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3. 부억녀 은녀
토끼꼬리만한 겨울 해가 눈보라 속에서 뒹굴다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의 차디찬 황혼 빛도 꽤나 날카롭게 언 대지를 찔러놓고 지평선에서 사라져갔다. 참 이상했다. 황혼빛이 톱날 같은 서산마루를 치솔질할 수록 샛하얗게 되지 않고 누렇게 물들어갔다. 땅거미는 황혼빛을 한술한술 파먹고 먹물을 토해내 어둠의 장막으로 대지를 슬슬 뒤덮어놓는다.
성칠은 사냥에 나섰다가 경성 산골마을 여인숙에서 날강도 삼형제를 만나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했다. 그는 살아 집으로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성칠은 마을에 들어서자 한길수의 우멍눈을 떠올리자 잔등에 소름이 끼쳤다.
눈 덮인 마을 구석구석에 공포가 허연 눈을 베고 누워 저승사자 눈깔을 부릅뜨고 죽음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칠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은녀가 되 붙잡혀 한길수 집에 부엌 여로 되들어가지 않았겠는가!
한길수는 성칠이 준 웅담을 다 달여 먹었지만 신기를 돕지 못했다고 하면서 가짜 웅담에 속았다고 생떼를 썼다. 그는 은녀가 이제도 3년은 부엌 여를 해야 빚을 물수 있다고 강다짐으로 은녀를 끌어갔던 것이다.
성칠은 분이 꼭두까지 치밀어올랐다. 그는 한길수를 찾아가 한바탕 따져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찌나 말리는지 그 자리에 물앉았다.
밖에서 눈보라가 윙 윙 휘몰아치는 초겨울의 어느 날 달밤이었다.
검둥이가 요란스럽게 “왕, 왕, 왕.” 요란하게 짖어댔다.
기준이 문을 열고 내다보니 아닌 밤중에 상판이 길쭉한 응삼이 한길수를 부축해 개울을 건너 헐금씨금 올라오고 있었다.
기준은 집에 들어가 아버지한테 알렸다.
병완은 황급히 문밖에 나가 마중했다.
“이거 어떻게 돼 이 밤에 우리 집에 다 오오?”
한길수는 개화장으로 눈 덮인 땅바닥을 쿡쿡 찌르면서 거들먹거렸다.
"에헴,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어조마저 전에 없는 친절을 보였다.
“양, 어서 집안에 들어가기요.”
병완은 팔을 들어 집 쪽으로 안내했다.
한길수와 응삼은 아주 거만스레 집에 들어가 틀스레 타리대를 치고 앉았다.
창준은 길수에게 인사하고 나서 무슨 일로 찾아 왔나 궁금해 눈치를 살폈다.
응삼은 산더미 같은 병완을 마주 바라보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런 우직스러운 놈은 아들과 며느리 말처럼 얼리고 닥쳐야지. 맨 힘으로는 꺾을 수 없어.)
“에헴, 병완이, 우린 몇 십 년 전에 씨름판에서 익힌 친구지.”
병완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 듯 하는 그 한마디 말에 한길수를 흘끔 쳐다보았다.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들이 친구 사이에 목숨을 내놓고 아까울 게 있는가? 이게 사내대장부의 의리심이란 말이요. 당신이 이 골 안에 나를 믿고 왔는데 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네.”
선심을 쓰는 그 말에 병완은 해가 서산에서 뜨나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정주에 앉아 두 어른의 말을 듣던 성칠과 창준을 비롯한 온 집식구들도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이상야릇해 했다.
병완은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담배 물 주리에 담배를 꿍꿍 쑤셔놓으면서 한길수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때 길수는 번들이마에 돋는 식은땀을 뚝뚝 찍더니 응삼에게 눈짓했다.
응삼은 보자기에 싼 묵직한 무엇을 척 병완의 앞에 내놓았다.
“헤헤, 병완 어른, 받소. 이건 우리 주인어른이 겨울나이 쌀이나 사라고 주는 약소한 선물이오.”
응삼은 그 자리에서 보자기를 헤쳐 보였다.
백설같이 번쩍이는 흰 은덩이는 피뜩 보아도 스무 냥은 실히 되는 것 같았다. 은덩이는 등불 빛에 반사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한길수 마름질을 십 여 년이나 해온 응삼도 이렇게 많은 은덩이를 선물로 가진 적이 없었다.
“이건 무슨 은덩이요?”
한길수는 담배대통을 길게 빨아 퍼런 연기를 후 내뿜더니 말했다.
“사내대장부끼리 에둘러서 말하지 않겠소. 자네가 우리 집 도감이 돼 주게나. 응삼은 장부나 관리하고 동생이 도감이 돼 날 도와 모든 걸 관리하면 오죽 좋겠나. 년 말에 땅값에서 이렇게 줄게.”
한길수는 두 손을 펴대더니 엄지손가락 하나를 꼽아 보였다. 뜻인즉 열 분의 하나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참말로 돼지에게 겨를 주고 살점을 먹으려는 심보였다. 병완을 앞잡이로 내세워 영월동의 가난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면서 콩물주머니를 쥐여 짜듯 해보려는 심보가 아닌가!
“이 은전 받을 수 없소.”
병완은 은보자기를 길수의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이 사람아, 난 아주 좋은 뜻으로 주는 게거늘 뭔가?”
길수는 다시 은보자기를 병완의 앞에 밀어주었다.
“내가 그만하면 자네를 봐주는 건데 뭐가 모자라나? 이 영월동에서 일인지하 천인지상 자리에 올려 세우겠다는데도.”
대뜸 길수는 낯에 주름살이 쫙 퍼지더니 병완의 너부죽한 얼굴을 흘금거렸다.
담배만 뻑뻑 빨던 병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당신네 집에 가서 머슴을 살지 못하겠소.”
그러자 길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근심하지 마오. 자네를 보고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게 아니요. 그저 며칠에 한 번씩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도와주면 되네.”
병완은 그저 묵묵히 앉아 애꿎은 담배물주리만 뻑뻑 빨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응삼이 혀를 날름거렸다.
“헤헤, 우리 주인어른은 넓은 마음을 먹고 선심을 쓰는데 이 은덩이를 받아주오. 세상에 후회 약은 없으니까.”
병완은 응삼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응삼이는 혀를 홀랑 내밀더니 얇은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병완의 얼굴에는 근심에 찬 검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집안에는 쥐 죽은 듯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병완이가 담배 물 주리를 담배 재떨이에 툭툭 털어 짓눌러 꺼버리고는 쇠 덩이를 콘크리트바닥에 굴리는 듯 하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음, 먼저 요구가 있는데 들어주겠는가?”
길수는 병완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어디 말해보게나. 내 어련히 들어주지 않을라고.”
“은녀를 돌려보내주게나.”
길수의 눈에는 은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 은녀를 며느리로라도 삼으려는가? 듣자니 이 집 맏아들과 은녀가 눈이 맞아 돈다던데.”
병완은 똑바로 한길수를 보면서 정색했다.
“자넨 생떼 질을 작작 쓰게나. 창렬이 페병에 먹으려던 곰의 열을 주고 빚을 다 물었는데도 약효가 없다고? 당장 은녀를 돌려보내주게나.”
길수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길수는 병완을 끌어당기려면 그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응삼이 옆에서 설설 기면서 슬그머니 길수의 무릎을 톡톡 치면서 뱁새눈을 질끈 감아보였다. 그러자 길수는 마음이 아픈 대로 대답해버렸다.
“그렇게 합세. 또 무슨 요구가 있는가?”
“없네. 이 은전은 가져가게. 이게 없어도 난 살만하네. 또 이담에 이자에 이자를 받으려고 들면 난 줄 은덩이가 없네.”
“아니, 이 길수가 언제 그렇게 옹졸했다고? 이건 선물로 주는 거네. 누가 빚 문서에 올렸는가? 에참, 그럼 이렇게 결정하구 난 가겠네.”
병완은 말리지 않았다.
응삼의 감아버린 듯 하는 뱁새눈에는 간사한 웃음이 어리어 있었다.
한길수가 은덩이를 두고 가버리자 성칠은 중간 방에서 안방으로 올라와 병완이 앞에 와 앉았다.
“아버지, 정말로 그 쥐새끼 같은 한길수네 집에 들어갈 예산입둥?”
병완은 담배 물 주리를 두고도 손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 물었다.
“내 뭘 그 자식에게 허리를 굽힐 것 같으냐? 한길수는 나를 얼리려고 잔꾀를 쓰는 것 같아. 흥정은 붙이고 말은 하기에 달렸다구. 먼저 임기응변해 은녀를 빼 내오고 보자.”
그제야 성칠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부자지간에 하는 말을 성희와 하옥도 정지에서 듣고 한시름을 놓았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감돌던 검은 구름이 점차 가시어졌다.
이튿날 은녀는 새 초롱 속에서 놓여나온 새처럼 겨울바람이 불어오듯 사뿐사뿐 개울물가에 난 길로 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에구, 내 딸아, 고생이 많았겠구나.”
창렬은 마루에 서 있다가 지팡이를 버리고 은녀를 와락 끌어안고 볼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녀는 몇 달 동안이지만 남의 집 종살이를 하여 양기가 죽었고 눈길에도 정기가 없었다. 때 이르게 은녀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이마를 타고 건너갔다.
뒤따라 나와 딸을 붙안은 명순도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질금 질금 쏟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성칠과 병완도 묵묵히 서로 붙안은 그들 세 식구를 바라보았다.
창렬의 세 식구는 한참이나 붙안고 울다가 병완 부자에게로 돌아서더니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말 감사하오. 자네 부자간은 참말 우리 일가의 은인이오.”
병완은 창렬의 휘어 든 잔등을 툭툭 치면서 위안했다.
“별말을 다 하오. 우리 집안과 당신네 엄씨네는 세세대대로 형제처럼 지낸 한집안이 아니고 뭐요?”
엄창렬은 병이 다 나은듯 기침도 멎었다. 지팡이를 버리고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는 병완의 부자간에게 안주를 끓여 막걸리라도 대접하려고 장작을 와락와락 안아 부엌에 들여갔다.
“이러지 말게나. 난 길수네 집에 볼 일이 있으니까 가봐야 하겠네.”
병완은 말을 마치자 발길을 돌렸다.
성칠은 허리춤에서 백설 같은 은덩이를 하나 꺼내 창렬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겨울나이 쌀을 사서 잡숬소.”
“아니, 자네 이럴 변이라고.”
창렬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성칠은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쉬, 말씀 말고 씁소.”
그는 은녀를 되돌아보며 눈을 찔끔해보이고는 성큼성큼 개울가로 내려갔다.
은녀는 문설주를 잡고 믿음직한 성칠의 뒤잔등을 바라보다가 동전으로 눈굽을 찍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가늘게 들먹이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 너머 슬픔이 처절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횡설수설 하는 눈발 속에 첫 사랑이 숨어 울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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