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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0) 뜻밖의 상봉 김장혁
2024년 07월 07일 12시 08분  조회:531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제2권




        제7장 포수대


   
      11. 뜻밖의 상봉
 
 
  사실 병수는 점심 때 우시장에 있는 길수의 집에 가서 은녀를 만나 기름떡을 얻어가지고 장마당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은녀는 병수에게서 아버지가 아들딸 근심에 속을 태우다가 기막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고, 우리 아버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시름시름 앓더니 이렇게 불쌍하게 돌아가시다니. 아이고, 내 아버지, 불쌍한 내 아버지, 흐 흐 흑, 흑 흑.”
   은녀는 대성통곡하면서 “아버지 장례에 가겠어요.” 하고 길수에게 사정했다.
  한길수는 소를 잃어버렸는데 은녀마저 달아날까 봐 근심됐다.
  “가긴 어디로 가? 네년이 가면 우리 집 밥은 누가 해?”
  은녀는 한길수 앞에 꿇어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빌었다.
  “아버지 마지막 길을 바래드리게 보내 줍소. 제발, 주인님.”
  인정머리라곤 꼬물만치도 없는 길수는 건 가래를 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성대문을 나서더니 기생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 장례에도 가지 못한 은녀는 더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달밤에 그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월선의 호령에 못 이겨 물동이를 팔에 끼고 물을 길으러 비칠비칠 걸어갔다.
  (아버지 폐병치료에 일전 한 푼 돕지 못하고 장례에도 가지 못할 바엔 아예 죽는 게 낫지. 상호도 종무소식이고 은희마저 한 영감의 영월동 집에 머슴으로 끌려갔다지. 뭘 보고 이 세상에서 산단 말인가?)
  철렁!
  드레박이 우물에 떨어지면서 죽음의 비명소리를 질렀다.
  순간 은녀는 드레박처럼 우물에 철렁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 나겠는 걸 하는 생각이 피뜩 들었다.
  은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더니 우물 틀 우에 간신히 올라섰다.
  그녀는 얼음 쪼각 같은 눈썹달을 쳐다보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느님이시여, 아버지와 엄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는 불효녀를 용서해주옵소서.”
  말을 마치자 은녀는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우물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 때다.
  순간 뒤에서 꺽쇠 같은 팔이 은녀를 꽉 끌어안아 우물 틀 우에서 내리웠다.
  가슴을 할딱이던 은녀는 자기를 안아 내리운 마차몰이군 병수의 거머틱틱한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었다.
  병수는 소를 잃어버리자 장마당에서 도망쳐 우시장 경찰국 뒷산 수림 속에 가서 동정을 살피면서 숨어있었다. 그는 뒷산 수림 속에서 똘만이가 자전거를 타고 경찰국 울안에 달려 들어오고 헌병대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눈보라를 흩날리면서 달려 나가는 것을 다 보았다.
   한참 후에 경찰국 대문 안에 뚱뚱보와 소가 들어오고 한길수가 똘만이 등 자위대원들과 함께 철규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중에 묶인 뚱뚱보를 때리며 심문하고 철규는 묶이지 않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 철규 말처럼 소를 빼앗긴 걸까?)
  그러나 병수는 소를 잃어버렸기에 악마 같은 한길수에게 죽을지 살지 몰라 영월동에 돌아가지 못했다.
  병수는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자 산속에서 슬금슬금 내려왔다. 허기증을 달래려고 우물가에서 서성거리면서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혹시 은녀 뒤를 밟는 자가 있을까봐 사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우물터에 머리를 돌리는 순간 물을 길으러 온 은녀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달려가 은녀를 안아 내리우지 않았더라면 은녀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길수는 이전에는 득호나 마을사람들을 일을 시키면 품삯을 주는 척 하였지만 지금은 일본 놈들에게서 강도행세를 배워가지고 아예 일전 한푼 주지도 않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은녀나 은희나 일전 한푼 받지 못하고 여종으로 뼈가 물러나도록 일했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셨지만 딸로서 일전 한푼 치료비로 보태주지 못한 은녀와 은희의 아픈 마음이야 이루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 바에야 우물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병수는 은녀가 우물에 뛰어들려 한 얘기를 듣고 말리였다.
  “은녀, 죽어서는 안 돼. 우린 지금 아무것도 없이 힘들게 살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나가야 하오.”
   은녀는 우물 턱에 기댄 채 맥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길수 물이나 긷자구 살라오?”
   “집엔 엄마와 은희, 상호가 있지 않소?”
  그제야 은녀는 한숨을 땅이 꺼지 후~ 내 쉬었다.
  “오빠는 어떻게 돼 여기 왔소?”
  병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낮에 장마당에서 있은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녁도 못 잡쉈겠구먼. 내 물을 길어가지고 갔다가 올게.”
  병수는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쏟아 붓네 하고 안아 한길수의 집 쪽으로 들어다주었다.
  “됐소. 괜히 자위대에 들키겠소. 어서 우물에 가서 기다리오.”
  은녀 말에 병수는 은녀의 머리 우에 물동이를 올려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으로 비칠비칠 토성에 난 대문 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걸어 들어가는 은희의 뒷모습이 불쌍했다.
  한참 후 은녀가 물동이를 팔에 끼고 우물터에 나타났다.
  은녀는 물동이 안에 주먹밥과 누룽지 그리고 기름떡까지 넣어 왔다. 그것으로도 며칠은 먹을 것 같았다.
  “배고프겠는데 어서 잡숫소.”
  훤칠하게 생긴 병수는 기름떡을 먹으면서 말했다.
  “금방 은녀를 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소. 여기서 종살이를 한뉘 할게면 우리 간도로 달아날까?”
  뜻밖의 말에 은희는 깜짝 놀랐다.
  이윽고 그녀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며 반신반의했다.
  “만주로 간다고 잘 살겠소? 엄마와 은희랑 어찌 하고? 들키는 날엔 한길수가 잡아먹자고 할게오.”
  병수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우리 달아났다고 어쩔 거 같소? 상호가 달아나도 어쨌소? 은희를 부려 먹으려고 어쩌지 못하오.”
  은녀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손에 쥔 게 없이 산 설고 낯선 간도에 갔다가 굶어 죽으면 어쩌겠소. 가지 말기요. 이 추운 겨울에 간도로 갔다가 얼어 죽겠소.”
  병수는 은녀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말했다.
  “나를 믿소. 우린 아직 젊소. 간도에 가서 우리 함께 잘 살아 보기요.”
  은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희읍스름한 달빛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병수의 길쭉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사람일 게요. 구명은인 오빠를 따라 이 놈 지옥에서 훌 달아났으면 좋겠소.”
  병수는 은녀를 꼭 끌어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어서 집에 들어가 옷이랑 먹을 걸 물동이에 넣어가지고 나오오.”
  “알았소. 내 인차 갔다가 나올게.”
  병수는 우물터와 좀 떨어진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숨어 우물터에 은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은녀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우물터에 나타났다.
  병수와 은녀는 골목에 들어가 옷을 보에 싸안고 희읍스름한 달빛이 깔린 골목으로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은희는 병수를 따라 눈길로 달아나면서 말했다.
  “오빠, 금방 집에 돌아가니까 한영감이 ‘잃어버린 소를 찾았는데 병수를 잃어버려 큰일 났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 개소리를 믿어. 나를 한뉘 마차몰이꾼으로 부려 먹자는 게지.”
  병수는 은녀의 손을 잡고 더 빨리 달으면서 물었다.
  “철규는 무사하오?”
  은희는 숨이 차 할딱거리면서 대답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매를 맞았습니다. 영팔이랑 죽여 버리자고 하니까 누가 소를 먹이겠는가 하면서 철규를 잡아두고 덕팔이 삼촌이랑 잡자고 합데.”
   병수는 닫다가 주춤 멈춰 섰다.
  “아차, 한 가지 잊었다. 이대로 달아나지 말구 한영감 집에 불이라도 콱 싸질러 놓을 거 그랬다.”
  은희는 병수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두오. 헌병들이랑 자위대원들이랑 욱실거리는데 붙잡히겠소.”
  병수는 우시장 저 멀리 한길수의 집 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은녀의 손을 잡고 다시 달아났다.
  은녀는 달아나면서도 속으로 고향마을에 있는 엄마와 은희가 근심됐다.
  (엄마랑 무사한지 모르겠다. 빨리 가서 같이 간도로 달아나자고 해야지)
  한편 은희는 고향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를 뒷산 기슭에 장례지낸 후 날마다 악몽 속에서 허덕이었다.
  은희는 심란한 김에 이날 밤에도 내일 밥을 지을 물을 더 길으려고 일어나 몸채 부엌간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 더듬으로 물동이를 더듬어 팔에 끼였다.
  “누구야!”
 위방 밀창문이 열리면서 한길수가 반쯤 몸뚱이를 일으키고 이쪽을 내려다보는 것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였다.
  “은희예요.”
  “이 밤중에 뭘 떨꺽거리느냐? 잠을 깨우면서 성가시게. 에이 참.”
  “물을 긷자고 그래요.”
  “음, 알았다. 내일부턴 우리 잘 때 떨꺽거리자 말아라.”
  탁 미닫이문이 닫기는 소리 나고 두덜거리는 소리와 도도고리는 소리가 엇바꿔 들리었다.
  은희는 머리채를 뒤로 젖히고 물동이를 팔에 끼고 바깥으로 조심조심 나왔다. 그러나 연 며칠 자위대원을 시켜 은희 뒤를 밟게 해보아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자 월선이도 심드렁해져 오늘은 미행을 그만두게 했다.
  그녀는 희읍스름한 달빛과 눈을 사뿐사뿐 밟으면서 골짜기 막치기에 있는 우물가에 다가갔다. 가을바람에 나무들이 무섭게 비명을 질러 공포를 자아냈다.
  우물가에서 동이를 내려놓고 물을 푸려고 바가지를 우물에 넣던 은희는 처량한 반달이 비껴있는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할 바에는 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면 좋겠다. 그럼 모든 게 끝이겠는데.)
  그런데 샘물에 비낀 달 옆에 총총 박힌 뭇별들이 차디찬 샘물에 잠겨 추위에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몇 해 전 여름에 은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우물가에서 성칠 오빠가 은녀의 눈을 두 손으로 싸쥐고 누군가 알아 맞추라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때 오빠는 은녀가 떠준 샘물을 두 바가지나 마시고 시원하다고 하면서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지. 호, 오빠, 이젠 다시 볼 것 같지 않소. 성칠 오빠, 상호는 지금 어데 있소?”
   어려울 때마다 자기네 일가를 도와 나서던 성칠 오빠가 이 순간 더욱 그리웠다. 기실 성칠과 은희는 열대여섯 살이나 차 있기에 기실 삼촌 벌이 됐지만 어려서부터 성칠이 그렇게 습관을 시켜 은녀나 은희나 다 오빠라고 불렀고 상호는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은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흑흑 흐느껴 울면서 바가지로 우물속의 달과 별들이 담긴 물을 한 바가지 한 바가지 퍼서 물동이에 담았다.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이 점점 물동이 아구리 쪽으로 올라와 차 넘쳤다.
   은희가 물동이안의 달과 별들의 우에 바가지를 동동 띄워놓고 물동이를 이려고 할 때였다.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났다.
  은희가 머리를 돌려보니 골짜기에서 난데없는 검둥이가 뛰어나왔다.
  “아니, 검둥아, 네가 어떻게 돼 왔니?”
  검둥이는 은희의 치맛자락을 물어 당기더니 끼깅거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때 뒤에서 휘파람소리가 들리었다.
  “이게 은희 아니냐?” 
  나직한 부름소리가 들리었다.
  (아니, 이게 성칠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은희는 자기 앞에 두 사내가 달 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상호!”
  은희는 놀라 풀렁 물앉았다.
  “쉿~”
  상호가 식지를 입에 대면서 은희를 안아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성칠 오빠가 서있지 않는가?
  은희는 대번에 상호오빠의 품에 와락 안기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더니 정말 왔구먼. 이게 꿈이요, 생시요?”
  “그래 이건 생시요.”
   상호는 은희의 파도치는 어깨를 다독이면서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샘물터에 오면 너를 만날 거 같아 여기 왔다.”
  은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성칠을 쳐다보았다. 뒤이어 은희는 상호의 품에 안기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쳐댔다.
  “어데 갔다 이제야 왔니?”
  “사냥하러 갔지.”
  은희는 여기저기 살피면서 서있는 성칠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사라진 후 저 한길수가 오빠네 집을 빼앗아 림산파출소라는 걸 들여앉히고 일본 헌병들이 들어 살고 있소.”
  “그랬니? 여긴 얘기하기 위험하니깐. 저쪽 숲 속으로 가자.”
  성칠은 물동이를 안고 상호네 오누이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오빠, 그간 한길수란 놈은 별의별 악독한 짓을 다했소. 흐 흑 흑.”
  은희에게서 그간 고향마을에 있은 일들을 죽 들은 성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
  성칠은 은희에게서 한길수의 영월동 토성안집의 형편도 묻고 나서 말했다.
  “넌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물동이를 이고 토성 안에 들어가라. 그 다음 철규와 함께 이렇게 해라.”
  성칠은 사위를 둘러보더니 은희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예~ 알았소. 그렇게 할게.”
  은희는 물동이에 물을 퍼 담아 이고 허연 눈 위에 깔린 희읍스름한 달빛을 밟으면서 토성 안 집 쪽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성칠과 상호가 우물터 옆 소나무숲속에서 보복행동계획대로 손을 쓸 준비를 다그칠 때다.
  우물터 아래쪽에서 눈을 빠드득빠드득 밟는 소리가 들리었다.
  “쉿!”
  소나무숲 속에서 성칠이 입에 식지를 가져다대면서 허리춤에서 모젤권총을 쓱 뺐다. 상호는 시퍼런 비수를 빼들었다.
  저쪽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쪽으로 빠드득빠드득 계속 걸어오면서 도란도란 말까지 했다.
  “은희는 늘 저녁에 여기로 물 길으러 올게오.”
  “글쎄 말이오. 한길수나 영팔이나 이렇게 추운 날에 여기로 오겠소?”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상호는 성칠에게 다가서면서 “어째 은녀 누나 목소리 같소.” 하고 나직이 말했다.
  성칠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샘물터에 눈길을 돌렸다.
  두 검은 그림자가 샘물터에 가까워 올수록 여자의 목소리는 더 똑똑히 들리었다.
  “여기서 은희를 만나면 얼마나 좋겠소?”
  남자가 하는 말소리.
  “은희를 만나 고향 마을 정황을 안 후 엄마를 만나는 게 옳소.”
  분명 은녀의 목소리 아니겠는가.
  상호는 성칠에게 “은녀 누나요." 하고 말하고 나서 비수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성칠은 상호의 팔을 걷잡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휴-휴-
  소나무가 설레는 소리 밖에 다른 동태가 없었다.
  “나가봐라. 옆의 사내를 주의해라.”
  상호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천천히 소나무 숲에서 나가면서 조용히 불렀다.
  “누나, 은녀 누나.”
  “엇, 누나라니?”
  다가오던 남녀가 주춤 멈춰서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누나, 상호요.”
  “뭐라고? 상호?”
  은녀는 품에 안았던 보꾸러미를 툭 떨어뜨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은녀와 상호는 달려 나가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 선 사내도 다가왔다.
  “누구요?”
  그러자 저쪽 사내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상호야, 난 병수다.”
  성칠도 슬금슬금 소나무숲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밟으면서 나갔다.
  “저건 누구냐?”
  은녀의 물음에 상호가 나직이 대답했다.
  “성칠 형님이오.”
  “오빠라고? 오빠가 살아 있어?”
  “그래, 난 살아있다.”
  성칠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은녀와 병수를 일일이 손잡아주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고생했니?”
  은녀는 너무 기쁨과 설음에 마음이 설레어 떨어뜨린 보꾸러미를 주어 안더니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였다.
  성칠은 은녀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말했다.
  “됐다, 금방 은희도 여기 왔다가 갔다.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 소나무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
  뜻밖에 상봉한 그들은 소나무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간 서로들 있은 이야기를 했다.
 성칠은 은녀와 병수  말을 듣고 나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간도로 무턱 대고 어떻게 간다고 그래?”
  병수는 초신 감발한 발로 소나무 밑 둥을 탁 걷어차면서 성칠을 보고 물었다.
  “간도에 가지 않으면 여기서 어떻게 사오?”
  “우리 독립군에 들어가야 산다.”
  “독립군에?”
  병수는 놀란 나머지 소나무 숲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성칠이 식지를 입에 대고 사위를 둘러보자 병수가 물었다.
  “형님과 상호랑 독립군에 들어갔소?”
  “그래. 너희들도 독립군에 들어가 총을 쥐고 일본 놈들과 한길수 같은 개다리들을 이 고향에서 몰아내야 잘 살 수 있다.”
  은녀는 소스러치 듯 놀라했다.
  “상호야, 너도 독립군이냐?”
  상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생각 밖으로 은녀는 상호의 손으로 잔등을 톡톡 쳤다.
  “참 장하다! 우리 철천지원수 한길수를 처단해 우리 원수를 갚아라!”
  이윽고 병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몰이군도 독립군에서 받아주면 들겠소. 그런데 은녀랑 은희랑은 고향마을에 둘 수 없소. 한뉘 어떻게 한길수의 종살이를 하게 내  버려두겠소? 여자들도 독립군에서 받았으면 좋겠는데.”
  성칠은 선뜻이 대답했다.
  “독립군에 들어오라. 독립군에도 여자대원이 할 일이 가득하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총도 쏴야지.”
  성칠은 은녀에게 물었다.
  “독립군 소대장 진달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니?” 
  은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소. 그 돌멩이를 잘 뿌리는 처녀장군 말이 아니오?”
  “맞다. 지난 번에도 나를 구할 때 돌멩이로 일본 놈과 자위대 놈들을 여럿을 까 눕혔다.”
  “나도 진달래 언니처럼 독리군 여대원이 되겠소.”
  성칠은 은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좋다. 우리 힘을 합쳐 우리 고향마을에서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같은 일본 놈들을 몰아내자. 원수를 꼭 갚고야 말자.”
   뒤이어 그들은 성칠의 영솔 하에 은희가 알려 준대로 엄창렬의 산소로 떠나갔다. 그들은 눈이 무릎까지 펑펑 빠지는 뒷산 비탈로 올라갔다.
  한참 후 아버지 산소에 이르자 상호와 은녀는 아버지 산소에 절을 세 번 올리고 나서 풀쩍 엎드려 엉엉 통곡 쳤다.
  성칠이 다가가 은녀와 상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다.”
  그들은 다시 눈보라를 무릅쓰고 담대하게도 은녀의 집으로 내려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쌩쌩 휘몰아쳤다.
   한길수나 응삼이 지어 야마모도소장도 이 눈보라치는 야밤삼경에 성칠과 상호 그리고 은녀와 병수가 이 마을에 숨어들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긴 반년 넘어 영월동의 성칠과 덕팔, 동욱, 상호네 집에 넓은 그물을 치고 밤낮없이 지켰지만 그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놈들은 겨울에 접어들자 몇 달째 경계가 허술해졌던 것이다.
   한편 야밤삼경에 명순은 은녀와 이태 남짓이 사라졌던 상호를 꿈결에서처럼 만나자 부둥켜안고 엉엉 운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는 성칠은 그들 삼모녀의 통곡소리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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