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기둥
여우도 추워서 눈물을 흘리는 엄동설한이 돌아왔다. 맵짠 동지섣달 추위에 박달나무도 얼어서 탁탁 갈라터질 지경이다.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하얀 가슴으로 대지를 포옹하며 키스를 안긴다. 하얀 눈꽃은 땅에 사뿐사뿐 내려앉으면서 새 해 풍년을 약속하는가, 언 땅에 하얀 이불을 씌워주면서 우리 민족의 하얀 얼을 조용히 속삭이는가.
일요일인지라 종수는 또 취재길에 나서려고 서둘렀다. 전번에 삼도만에 갔다가 굶어 죽을번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배낭에 빵과 음료수병을 챙겨넣었다.
려평이 종수를 흘겨보면서 코웃음쳤다.
“우리 집 대기자 또 나간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가려는 종수 배낭을 홱 잡아챘다.
“또 어딜 갈 예산인가요? 오늘 쉬는 날에 좀 청화 공부나 가르치면 어때요? 예?”
종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야, 언제 그럴 새 있소? 해방전쟁 나날에 영용하게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된 우리 민족 전투영웅이랑 렬사랑 취재해야겠는데. 지금 취재하지 않으면 영원히 력사에서 사라지게 된단 말이요. 저 눈보라 치는 수림 속에 이름 모를 렬사들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 아는가.”
려평은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기자면 신문사 임무나 완수하면 됐지. 뭘, 그런다고 누가 동무를 잘한다고 할 거 같애요?”
종수는 정색했다.
“우리 민족영웅들이 총탄과 포탄이 비발치는 가렬처절한 전쟁의 나날에 목숨을 바쳐 싸웠소. 그들이 아니면 오늘의 우리 행복한 생활 있을 수 있소? 어찌 선렬들의 피어린 자욱을 그리 소홀히 력사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단 말이요?”
“어이구, 누가 보기나 하는가요? 아이고, 진짜 우리 집에 민족영웅이 나타났네요.”
“그래, 민족영웅이 되지 못하는 게 한이야. 우리 민족의 영웅들과 렬사들의 피어린 자욱을 취재해 꼭 책을 묶어낼 거요. 집 안 일은 동무 좀 수고하오.”
“그래, 가정은 안해 혼자 몫인가요? 내 은행 주임이라도 하니 그렇지. 당신 같은 나그네를 믿다간 서북풍이나 먹고 살 거요. 아이유, 내 팔자도 개팔자야. 대학생, 대학생, 하다가 어쩜 가정도 모르는 저런 나그넬 만났을가?”
려평이 도도거리건 말건 종수는 기어이 취재 길에 올랐다.
“여보, 먼 길을 떠나는데 재수 없이 고양이 방정을 작작 떠오. 흥! 참새들이 어떻게 고니 큰 뜻을 알리오?”
“집도 모르는 그 잘난 고니를 해서 어데 쓰겠소? 쯧쯧쯧.”
려평은 배낭을 메고 눈풍설이 이는 바깥으로 나가는 남편의 뒤모습을 눈물이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종수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이 장해 말리지 않고 바랬다.
“얘, 어디로 가든 안전에 주의해라. 전번처럼 무인지경에 들어서서 굶지 말고.”
“예,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대학교에서 만수가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이나 많이 해줍소.”
어머니는 맏아들이 하는 일이라면 안된다고 뒤다리를 잡아당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딸애 청화도 고사리손을 저었다.
“잘 갔다가 오세요.”
종수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취재하러 떠났다.
그가 한창 뻐스를 타러 갈 때다.
“종수야, 어디로 가니?”
생각 밖에도 승호가 손짓하면서 뛰여오지 않겠는가?
“웬 일이냐?”
승호는 배낭을 둘러메고 개털모자를 꾹 눌러쓴 종수를 보면서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야, 어디로 가니? 오늘 우리 동창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잖겠느냐? 성호와 범송을 부를게.”
종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야, 그럴 새 없다. 쉬는 날에나 내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어.”
“쉬는 날에도 어디 다니니?”
승호는 종수를 마구 끌고 식당 쪽으로 가려고 했다.
종수는 승호의 손을 뿌리치며 저쪽으로 달아났다.
“후에 보자. 미안해.”
승호는 저 멀리 눈보라 속으로 멀어져가는 종수를 보고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종수는 나름대로 눈가슴을 헤치면서 가렬처절했던 항일전쟁시기 우리 민족의 영웅들의 혼이 살아숨쉬고 있는 봉오골과 청산리 등 항일전적지를 돌아다녔다.
물론 당지 당안국이나 서적을 뒤져 당년 청산리전투나 봉오골전투 자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청산리와 봉오골 전적지 지형까지 답사했다. 자신이 직접 눈 속을 헤매면서 체험해야 당년의 항일영웅들의 간고한 전투를 제대로 써낼 것만 같았다.
선바위 부근에서 항일용사들이 조선에서 건너오는 일본은행 놈들의 13만원을 지혜롭게 무장탈취한 사건을 취재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치 군사전문가처럼 선바위 전적지에 가서 지형지물을 답사하면서 당년에 일본은행 놈들이 조선으로부터 돈을 가지고 어디로 해서 말을 타고 들어왔는가, 우리 항일영웅들은 어디에 매복해있다가 앞뒤로 매복습격해 돈을 빼앗았는가, 또 자기라면 어디에서 매복습격하기로 결정했겠는가를 거듭 연구한 후 집에 돌아와 다시 이 력사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비록 현지답사하기는 힘들었고 집필 속도는 늦었지만 그가 피땀을 들여 쓴 력사이야기들은 전적지 지형까지 아주 보는듯이 생동하고 핍진하게 써냈다.
어느 날 종수는 쉬는 날에 소주랑 과자랑 소고기랑 두루 사 메고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고향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두만강변의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냥 찾아가도 항상 가슴을 들먹이게 하는 태줄을 묻은 고향이였다. 보기 스산해도 항상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고향이였다.
두만강변의 고향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혀있고 청춘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는가.
울고 웃는 우리 민족의 피눈물과 애환이 흐르는 유서깊은 두만강, 눈보라 속에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바라보는 순간 종수는 저도 몰래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두만강가 벌거숭이 버드나무들이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 속에서 얼음에 맞절이나 할듯이 몸부림치고 까마귀들이 까욱까욱 울부짖으며 어디론가 허둥지둥 날아가고 있었다.
두만강변의 초라한 고향 마을에는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떤 초가집은 주인이 버리고 한국으로 갔는지 시내로 갔는지 다 썩어 폴싹 물앉은 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키넘는 마른 쑥을 들쓰고 누워 있었다.
항상 정답고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이 이다지도 초라하게 변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을에는 몇몇 늙은이들이 살뿐 청년들과 젊은 녀자들, 애들을 찾아볼 수 없이 적막하고 한산했다.
종수는 해방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는 마을의 로전사한테서 장춘해방전투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로인들이 모여 노는 마을의 로인활동실로 찾아갔다.
담배연기가 자오록한 로인활동실 조왕 쪽으로 해서 몇몇 안로인들이 화토를 쳤다. 웃방에서는 최대장과 면목도 모를 두 로인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늘은이들은 종수를 귀빈처럼 반겨 맞았다.
“어허, 우리 마을 수재 왔구만.”
“어서 올라오게나.”
최대장은 종수의 손을 잡아주면서 기뻐했다.
“그래, 엄마랑 시내에 가서 잘 보내느냐?”
“예. 그럭저럭 잘 보내고 있습구마.”
마을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종수 엄마는 맏아들을 국장 사위로 주더니 팔자를 고쳤단 말이오.”
“그러잖고. 그게 다 저 대학생아들 덕분이지.”
종수는 늙은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인사했다.
드디여 그는 배낭에서 소주 두병과 과자랑 푹 삶은 소고기랑 수두룩이 내놓았다.
최대장은 밭고랑 같은 이마의 주름살을 쫙 펴고 반가와했다.
“우리 마을 대학생이 선물도 톡톡히 가져왔구만.”
안로인들도 화토를 치다가 소고기랑 소주랑 부엌쪽으로 가져다놓으며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점심에 잘 먹겠소.”
종수는 최대장을 따라 웃방에 올라가 함께 “장훈이야!”, “멍훈이야!” 하면서 훈수하였다.
점심때 거의 될 때였다.
“두부를 사오~”
최대장이 대야와 잔돈을 가지고 나거더니 두부 몇모 들고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밥상에 둘러 앉자 종수는 술병을 들어 사발에 일일이 돌아가면서 소주를 부어 올렸다.
늙은이들은 모두 반가와 소주를 마시고 종수가 가져온 통졸임소고기를 집어 잡수며 기뻐 야단쳤다.
“어허, 오늘 기자선생 덕분에 소고기에 술까지 마시는군.”
종수는 배낭에서 민족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를 수두룩이 꺼내 최대장한테 드렸다.
“마을 활동실에 걸어놓고 보십시오.”
“아이고, 고맙기두.”
최대장은 책을 받아쥐여 이리저리 번져보다가 도리머리를 저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책을 보지 않는게 통 흠이라니까. 모두 책을 읽어야 하겠는데 말이요. 그저 모여들어 도박이나 놀고 술이나 마시고. 참 말이 아니야.”
종수네 앞집에서 살던 나그네가 받아쳤다.
“에이구, 최대장이나 콱 읽소. 우린 눈이 시려서 못 보겠다이.”
종수네 뒤집 나그네는 최대장의 손에서 책을 하나 쑥 뽑아 두루 번져 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농사에 관계되는 책은 없소?”
다른 늙은이들은 황소가 닭을 쳐다보듯 하면서 신을 신고 소피 보러 나가거나 다시 화토판에 들어붙었다.
안로인들은 아예 책을 쓴 외 보듯했다.
한 안로인은 팔소매를 걷고 구들에 화토장을 탕 메치며 떠들어댔다.
“에이구, 우리 이제 책을 읽어 벼슬 하겠소? 화토나 치구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면 다요.”
종수는 활동실에서 나와 어려서 다니던 고향 마을에 있는 모교로 가보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몸부림치는 소학교 교실은 문이고 창문이고 다 떨어져나가지 않았겠는가.
교실에서는 소들이 누런 똥을 밀밀 싸며 돌아다녔다.
종수는 마음이 아팠다.
“아, 이게 그래 내가 다니던 모교란 말인가?”
순간 그는 코마루가 시큼해나 손으로 찌그러진 교실문을 매만졌다.
그는 쓸쓸한 고향 마을의 초가집들을 둘러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고향의 장래가 근심됐다.
종수가 씁쓸한 마음을 안고 시내에 거의 들어설 때다.
승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종수는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냈다.
“종수야, 여기 성호랑 범송이랑 널 기다린다. 어쩌다 모이자니 넌 항상 후에, 후에 하면서 빠지니.”
종수는 “시간이 없다.”고 말할가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어디냐?”
“선녀음식점이야.”
“응, 알았어.”
“이번엔 실언하면 영원히 동창생명단에서 삭제할 테야.”
종수는 배낭을 맨채 그 길로 선녀음식점으로 찾아갔다.
왁짝 떠들어대는 음식점에 들어서자 선화가 반갑게 맞았다.
“정말 오래간만이구만요. 리경리랑 저 칸에서 기다린지 오랜데요.”
종수는 선화와 인사를 하고나서 승호랑 있는 칸으로 갔다.
거기에는 승호와 성호, 범송이 둘러앉아 있었다.
“어이구, 대기자선생이 끝내 왔구만. 환영한다! 환영해!”
승호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구나.”
성호도 손을 내밀었다.
종수는 범송까지 일일이 손을 잡고나서 자리에 앉았다.
안주도 들어오고 술이 오르자 승호가 술잔을 잡고 권했다.
“야, 우리 동창생들이 한 시내에 살면서도 얼마나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앉았니? 오늘 즐겁게 마시자. 자, 건배!”
“건배!”
그들은 첫잔을 통쾌하게 굽냈다.
뒤이어 동창생들은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너순배 돌자 승호가 종수를 마주보며 화제를 꺼냈다.
“종수야, 네 손을 좀 빌면 안되겠니?”
“뭘?”
승호는 정색해 말했다.
“사실 우리 단위에는 부패현상이 대단하다. 종수는 폭로문장을 쓰기 좋아하잖니? 우리 단위 일도 세상에 폭로할 수 없겠니?”
“어떤 부패현상인데?”
종수가 어안이 벙벙해하자 승호는 술잔을 내려놓고 간단히 말했다.
“우리 광고회사 리굉팔이란 나그네 말이 아니야. 오국장을 등에 업고 마구 탐오하고 람용한단 말이야. 사흘이 멀다하게 오국장을 데리고 유흥장소에 드나들어. 오국장한테 장식비로 5만원이나 준 적도 있다.”
종수는 샘물병을 들어 한모금 마시더니 상을 찡그렸다.
“물론 신문에 내는 것도 좋지만 검찰부문에 신고해 조사하게 하는게 낫다.”
성호는 조용히 듣다가 격분해 입을 열었다.
“전번에 누군가 검거신을 써보내 조사하러 왔댔다. 장부랑 다 들어가고 한참 조사했지. 그런데 오청룡이 ‘광고회사 돈을 꿨지. 공짜로 쓰자 한게 아니다.’고 딱 잡아뗐단다. 또 말로는 꿔간 돈을 다 되물어넣었단다. 조사기관에서도 별수 있니? 그저 광고회사 돈을 마구 람용했다고 엄중경고처분을 내리고 말았지.”
승호는 이번에는 굉팔을 잡자고 팔을 걷고 나섰다.
“굉팔이 우리 광고회사에 있는 한 우린 편안한 날이 없어. 봐라. 굉팔은 저쪽 광고회사를 다 비벼먹고 망하자 김범수 총경리 덕분에 우리 광고회사에 왔댔지. 그런데 배은망덕한 배신자라구. 김범수 총경리를 쫓아내고 우리 광고회사 총경리자리를 차지했지. 그 놈새끼는 이제 나하구 성호도 제거하려고 할 거야.”
“가만, 가만!”
종수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승호를 손가락질하였다.
“넌 굉팔 덕분에 백화상점 공회 주석을 하다가 광고회사에 가지 않았니?”
승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난 정의감에서 출발해 부패분자를 척결하자는 거야.”
성호도 동을 달았다.
“맞다. 굉팔은 탐욕스럽고 삐뚠 정치를 하는 놈이야.”
그는 종수를 정색해 보면서 말했다.
“승호도 알지만 백화상점 광고는 내가 안총경리와 련계해서 가져온게 아니고 뭐냐? 그런데 기어이 자기 걸로 만들자고 나를 협박한단 말이야. 이게 어디 도리에 맞니? 이번 조사에서도 묘한 수로 그물에서 빠져나갔단 말이야. 오청룡한테 꿔준 돈’을 되물어넣고 미꾸라지처럼 살짝 빠져나갔지. 진짜 간교한 놈이야.”
종수는 승호를 보면서 물었다.
“조사조에서는 널 조사하지 않더냐?”
“아니, 근본 부르지도 않더라.”
승호의 말에 성호가 부언했다.
“피뜩 보니 이번에 은영이랑 조사하러 온 거 같더라. 정희한테서 명세장을 가져가기만 하면 몽땅 드러날텐데.”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짜 서뿔리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워놨구나.”
이윽고 그는 뒤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신문에 내지 못해.”
“왜?”
승호와 성호는 눈이 데꾼해졌다. 믿던 기둥이 와그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였다.
종수는 저으기 엄숙해졌다.
“신문폭로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이번 일이 그래. 들을라니 전번에 상부 조사조에서도 ‘오청룡이 광고회사 돈을 꿔갔고 공금을 마구 꿔준, 공금람용’으로 규정했잖아? 그걸 신문에 내서야 되니?”
승호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정의감이 있다던 너도 그저 그렇구나. 왜 그리 쫄짱부냐?”
종수도 물러서지 않았다.
“보도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승호는 지꿎게 고집했다.
“그럼 왜 엄중경고처분을 줬겠어? 엄중경고처분을 받은 걸 세상에 폭로하면 안되니?”
종수의 견해는 달랐다.
“그게 아니야? 신문에 폭로할 수도 없고 또 설사 폭로한다고 해도 뱀을 서뿔리 건드려놓을게 뭐냐?”
종수의 말에 승호의 눈이 반짝였다.
“고견을 말해봐라. ”
종수는 샘물병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나서 말했다.
“이번 일을 파묻어두자.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재차 너덜대기를 기다려 손을 써야 해. 증거를 딱 잡으란 말이야. 만약 오청룡이 이른바 ‘꿔간 돈’을 장식에 다 쓴 다음에 적발했더라면 영낙없이 그물에 걸렸을 거야.”
종수는 허리를 쭉 펴면서 말했다.
“그때 가서 그 놈들의 죄상을 폭로해도 늦지 않아.”
“오-”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잔 들었다.
나중에 그들은 자연히 인생에 대해 허물없이 담론하게 됐다.
승호는 술을 쭉 굽내더니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이젠 정계에 다 진출한 거 같애.”
종수는 의아해했다.
“무슨 소리냐? 넌 부총경리 아니냐?”
춰주는 말에 승호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말라. 인생은 서른에 일어서야 한다는 말이 있잖느냐? 그런데 이젠 마흔 고개를 다 바라보면서 이게 뭐냐? 굉팔 같은 풍각쟁이한테 다 당해야 하니? 단위 돈을 좀 복리에 쓰면 어떻겠냐? 굉팔은 그저 상전한테 돈을 푹푹 쓰고 우리 직원들의 생활고초는 털끝만치도 고려하지 않는단 말이야.”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승호는 계속 넉두리를 했다.
“가정은 무슨 꼴이냐? 아들도 보지 못했지. 맨날 녀편네한테 돈타령을 들어야지. 쩍하면 바람을 피우지 않는가 의심받지. 요즘엔 돈고생을 하지 못하겠다면서 한국에 나가겠다고 야단친다. 어떻게 살겠니?”
범송도 승호의 어려운 처지를 듣고 한숨을 후~ 내쉬였다.
“나도 한가지야. 백화상점 구입과에 있으면 어디 허망 돈이 생기니? 돈 때문에 맨날 댕댕거린다. 전번에 선금도 처남댁과 함께 한국에 나가자고 했대. 옛말에 안해와 그릇은 바깥에 내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잖았니? 그런데 안해들이 한국에 나가면 애들은 어쩌니? 참 코막고 답답하다.”
종수는 성호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우리 동창들 가운데서 그래도 성호네 제일 괜찮은 거 같애. 택시두 경영하지. 한때 소장사도 했지. 광고도 남보다 많이 하지.”
그러나 성호의 대답은 맥이 없었다.
“어느 집에 골치 아픈 일이 없겠니? 돈을 벌어 우로는 부모께 효성을 하고 아래로는 대를 이을 아들을 볼가 했다. 그게 어디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니?”
종수도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집도 항상 가정을 돌보지 않고 김삿갓처럼 나 다닌다고 생야단이야.”
그는 돌아가며 술잔에 술을 부어놓고 말했다.
“우린 살아가면서 한가지만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우린 나라에서 돈을 대서 공부시킨 대학생들이야. 언제나 눈 앞 리익만 따지지 말고 나라와 백성들을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
범송은 코웃음쳤다.
“에이구, 텔레비죤 드라마에서 옛날 임금이 하던 말을 듣는 거 같다. 흥, 우리 로백성들은 생존이 우선이야. 그따위 빈말이 필요없어.”
종수는 정색해 승호를 쳐다보면서 뒤말을 계속 했다.
“바른 말을 한다고 노여워하지 말라. 봐라. 너는 한사코 정계에 바라올라갈 잡도리만 하고 아득바득 애쓰잖았니?”
승호는 안색이 단통 새까맣게 질린 채 밥상 우에 놓은 손마저 바르르 떨었다.
종수는 계속 바른 소리를 했다.
“기실 넌 반중 건중한 정객이야. 좀 자기를 알고 너덜거려라!”
승호는 어이없어 허구픈 웃음을 입귀로 흘렸다.
종수는 손을 들어 성호와 범송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좀 달라. 민족의 전통대로 효성을 다할 생각을 하니까.”
꽝!
승호는 밥상을 치고 일어나더니 종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그래, 넌 대단구나. 지금 우릴 깔보는 거냐?!”
성호가 일어나 말렸다.
“야, 왜 이래? 앉아라!”
승호는 마지못해 앉아서 성을 이기지 못하고 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종수는 웃으면서 정색해 말했다.
“야, 승호, 남의 말 마저 듣고 말해라. 우린 생존을 위한 경쟁도 필요하다. 돈도 벌고 효성도 하고 애도 장군으로 키워야 해. 부패한 놈들도 쳐내고 자기 위치도 찾아야 해. 그러나 항상 우린 정신기둥을 잊지 말아야 해. 정신기둥이 무너지면 생존도 뭐도 다 무너져.”
성호는 종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네가 말하는 정신기둥이란 뭐냐?”
종수는 동창들을 둘러보면서 똑똑히 말했다.
“민족의 정신기둥!”
종수는 천천히 해석했다.
“생존을 위한 삶은 가치가 별로 없어. 최하바닥 가련한 인생이야. 우린 나라와 민족, 인민을 위해 뭔가 정신기둥을 세워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말로 보람찬 인생이야.”
승호는 비웃었다.
“그래, 우린 다 생존을 위해 벌레 같은 생활을 한다고 치자. 넌 해놓은 일이 뭐냐? 큰소리만 땅땅 치면서. 흥! 삶은 소대가리 웃다가 꾸레미 터질 소릴 작작 해라!”
범송도 코웃음쳤다.
“종수, 넌 제 힘으로 살겠구나. 너네 색시 은행 주임을 하니 그렇지. 신문사에 기자질을 해서 살기나 하겠구나.”
승호는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올라 씩씩거리며 두덜거렸다.
“별 새끼, 잘난 척하지두 말라. 농민 아들새끼, 국장네 사위로 된 덕에 그만큼 살면서 누구 앞에서 큰 소릴 땅땅 치니?”
성호가 반박해나섰다.
“야, 농민의 아들이라고 너무 깔보지 말라. 농민 아들이 어떻단 말이냐? 너네 시내 애들이 해놓은게 뭐냐?”
승호는 그제야 말실수를 한 것을 알았다. 그 자리에 자기를 내놓고 몽땅 농민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범송까지 포함해 “농민의 아들”이라고 깔보면 모두 좋아할리 만무했다.
눈치빠른 승호는 제꺽 술잔을 잡았다.
“됐다, 됐어. 모두 술이 과한 모양이야. 말다툼이나 하려고 모이자고 한 게 아닌데.”
그는 종수의 잔을 쥐여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너무 과격하게 말한 거 같은데. 널리 량해해라.”
종수도 사람좋게 웃으면서 잔을 들어 승호의 잔과 마주쳤다.
“괜찮아. 우린 필경 허물없는 동창생이니깐. 허허허.”
성호와 범송도 웃으면서 맞잔을 들었다.
이윽고 성호가 종수를 보고 물었다.
“네가 항상 나라와 민족의 정신기둥을 세운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거냐?”
종수는 아주 정색해 말했다.
“나는 오늘도 유서 깊은 두만강가 고향에 가보고 가슴이 아프더라. 우리 조상들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서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 이 땅에 와서 첫 보습을 박아서부터 이 땅에 두번째고향을 건설하느라고 얼마나 많은 고생 했느냐?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선렬들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바쳤느냐? 이 땅에는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슴배여 있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느냐? 나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력사적 공훈과 혁명사적을 온 세상에 알리고 우리 후대들한테도 길이길이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민족 영웅들과 렬사들의 사적을 취재하고 정리해서 책으로 묶으려고 한다.”
성호가 지지해나섰다.
“그래, 정말 나라와 민족의 력사에 길이길이 남을 일을 하는구나. 책을 낼 때 자금이 딸리면 말해라. 나도 얼마간 지원하겠다.”
종수는 성호의 손을 잡았다.
“감사하다.”
승호와 범송은 머리를 수깃하고 침묵을 지켰다.
종수는 계속 열변을 토했다.
“지금 글쎄 돈벌이나 술놀이에 빠져서야 되겠니? 내 고향 마을에 가보니 모교가 다 망가지고 온 마을에 성한 초가집이 몇채 밖에 없더라. 혁명렬사기념비가 무너져가도 손질하는 사람이 없어 살풍경이더라. 대부분 마을 람들이 국외로무송출을 가거나 대도시로 나간 자식들을 따라 나가서 동네 로인들 몇분 밖에 없더라. 활동실에서는 늙은이 몇이 새뽀얀 담배연기 속에서 장기를 놀거나 화토나 치더구나. 두부 몇모에 소주 몇잔 마시고는 만족해하며 집으로 헤여져가더라.”
승호는 술잔을 들고 종수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야, 술이나 마시자. 오늘 혁명전통교육을 단단히 받았구나. 허허허.”
술잔을 쭉 굽내고 성호가 말했다.
“정신기둥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있다.”
종수는 저가락으로 개고기를 집다가 “뭘 말이냐?” 하고 물었다.
성호는 동창들을 둘러보면서 정색해 말했다.
“내 보 건대 정신기둥에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흥성한다.’는 것과 ‘효성’에 대한 것도 보충했으면 좋겠다.”
종수도 승호도 좀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수많은 자식들이 효성은 하지 않고 부모들의 등을 파먹으려고만 한다. 일부 불효자식들은 부모들께 효성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효성을 하는 일을 두고 아들과 딸, 시부모와 며느리 갈등이 얼마나 심하냐? 지금 내리사랑만 있고 치사랑이 있느냐? 가정은 사회의 제일 작은 한개 세포가 아니고 뭐냐? 가정에 갈등이 심하면 사회가 불안정할 게 아니냐?”
범송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종수야, 가정 생존이 담보돼야 정신기둥도 든든히 세울 수 있지 않느냐?”
승호도 나섰다.
“나도 정신기둥에 한마디 보충하자. 오청룡이나 리굉팔 같은 부패분자 척결도 정신기둥의 하나라고 본다.”
종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모임에서 정신기둥이 더 풍부하고 든든해졌구나.”
그제야 승호는 헤벌쭉 웃었다.
“이담 책이 나오면 한권 달라.”
종수는 쾌히 잔을 들었다.
“그럼 우리 그날을 위하여 한잔 들자.”
“위하여!”
술잔을 댕 부딪치는 소리가 귀맛좋게 들렸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앞뒤를 가려볼 수 없이 쌩-쌩- 휘몰아쳤다. 하지만 선녀음식점 분위기는 삼복염천의 무더위처럼 부글부글 끓어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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