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은 경찰서 앞에서 뺑소니치듯 달려가는 구급차를 보모 가슴에 두 손을 모아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저걸 어쩌나?”
그러나 나영의 정체를 안 종호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지영은 옆에 말뚝처럼 서 있는 종호를 돌아보며 애원했다.
“리사장님, 병원에 따라가 봅시다.”
“그럴까?”
종호는 어정쩡해 서 있다가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택시!”
그때 때마침 택시 한대가 미끄러워져 왔다.
택시가 멈춰 서자 지영과 종호는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저 앞의 구급차를 뒤쫓아가세요. 병원으로요!”
“알았어요.”
택시는 경정소리를 들으며 구급차를 물고 늘어졌다.
지영은 택시에 앉아 구급차를 응시하면서 어깨를 들먹이었다.
옆에 앉은 종호는 지영이 노는 꼴이 하도 우스웠다.
“어떤 때는 머리끄댕이를 끄당기면서 싸우더니 지금은 우오?”
그만 속으로 생각한다는게 빗말이 나가고 말았다.
지영은 종호를 피끗 곁눈질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리사장은 몰라요, 나영과 내 사이 이왕지사를.”
지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린 초중 때부터 한 학급에서 죽자 살자 한 딱친구였어요. 건데 고중을 졸업하고 나는 나영한테 마음의 큰 빚을 졌어요. 죽을 죄를 졌어요. 량심에 항상 걸린단 말입니다…”
종호는 그제야 지영이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천방백계로 나영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그는 지영과 나영, 춘영 사이에 무슨 말 못할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터폴 지명수배도주범을 도울 순 없잖소?”
종호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괜히 속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구급차가 부근의 병원 문 앞에서 멈춰섰다. 구급대원들이 구급차 뒷문으로 뛰여내렸다. 그들은 아주 재빨리 나영을 담가차에 옮겨싣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춘영아!”
지영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황급히 담가를 뒤쫓아갔다.
나영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로 돌아누우며 뒤쫓아오는 지영한테 얼굴을 쳐들었다.
“가만 누워 있어요. 떨어지겠어요.”
여경이 나영을 꽉 눌러 되눕혔다.
나영은 지영한테 손을 내밀었다.
춘영은 뛰어가 나영의 손을 잡고 연신 물었다 .
“어째 이렇게 바보 짓을 해? 괜찮니?”
나영은 지영의 손을 꽉 잡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성림을 부탁하자."
나영과 춘영은 또 한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성림이 한국에 나와 조선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뭐냐? 내 잡혀가면 어쩌니? 성림인 이젠 나영을 믿곤 못 살아. 나영은 맨날 경찰들한테 쫓겨다니다나면 언제 성림을 돌보겠니? 성림은 고향에 돌아가면 조선말을 또 다 잊어먹어. 호로자식이 되겠는지 오랑캐 새끼 되겠는지 어떻게 아니?”
지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근심하지 말라. 걔는 꼭 한국에서 조선말을 할줄 아는 애로 키워줄게.”
나영은 뒤따라온 조호한테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종호의 손을 꽉 잡고 신신당부했다.
“카시모도,곤경에 처한 에메랄드 불쌍하잖아요? 좀 도와 주세요.”
종호는 나영한테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뭐요?”
나영은 카시모도 얼굴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카시모도, 성림을 꼭 조선말을 할줄 아는 조선애로 키줘 주세요.”
나영의 그 한마디 말은 민족심이 강한 종호의 가슴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종호는 담가를 따라 가면서 나영한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심하지 마오. 내가 살아 있는 한 성림은 꼭 조선족 애로 될 거요. 세종대왕 옆에서 키우면 꼭 ㄱ, ㄴ, ㄷ, ㄹ를 잊지 않을 게요.”
종호는 죄인으로서의 나영은 도우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러나 나영이 성림한테 조선어를 배우게 하려고 아득바득 애쓰는 모성애를 보고 마음이 찡하면서 흔들렸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나영이 뿔쌍하였다.
성림을 부탁하는 나영을 보고 지영은 고향에 두고 온 안나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나도 나영을 데려다 한글을 마음껏 배우게 해야지. 이런 좋은 언어환경이면 조상들이 남겨놓은 말을 제대로 배울 거 같아. 조선어로 글짓기도 하게 하고. 내 이루지 못한 동화작가 꿈도 안나가 이루게 해야지. 성림과 안나 함께 학교 다니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선족애들끼리 서로 친구도 되고...)
여경은 시술실 앞에서 경계심에 찬 눈길로 지영과 종호를 되돌아보았다.
“돌아가세요.”
“병문안도 안되는가요?”
지영은 여경한테 눈을 흘기었다.
여경은 지영을 손가락질했다.
“경고해요. 전번에도 병실에서 이불을 들쓰고 나영인 척 하면서 나영을 도망치게 했잖아요? 이번에 나영의 도주를 도우면 엄벌을 면치 못할줄 아세요.”
지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관두세요. 그때 나영이 날 침대에 쓰러눕히고 천오리로 묶어놓은 후 이불까지 덮어놓고 도망친 걸 낸들 어떻게 해요? 당신들 경찰들이 무능하단 말이나 하세요.”
여경이 지영을 손가락질 하며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었다.
나영은 담가에 실려 시술실에 들어갔다.
“지영이, 무슨 일이요?
지영이 얼굴을 돌려보니 함께 간병하던 혜련이 아니겠는가.
“친구가 시술하게 됐어.”
혜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니 간병해야겠구만. 무슨 도울 일이 있으면 알리오. 이럴 때 서로 도와야지.”
“그러지.”
삽십대 초반 혜련은 한국에 나온지 몇달이 안됐다. 그녀는 원래 음식점에서 일했는데 밤중까지 숱한 주정뱅이들의 심부름 해도 돈은 얼마 생기지 않는다고 더러운대로 간병하려고 병원에 찾아왔댔다. 병원 사정을 잘 모르는 혜련은 지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간병하다가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지영을 찾군 했다. 지영은 간호장이 혜련을 깔보거나 괴롭히거나 일거리를 잘 주지 않으면 항상 나서서 시비하면서 혜련을 여동생처럼 챙겨줬다. 그래서 혜련은 이제야 병원에 발을 붙이고 간병에 적응됐다.
그때 한 남경이 황급히 공무가방을 들고 복도에 나타났다. 그 남경은 여경 둘을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공무가방에서 필림 같은 것을 꺼내는 것이었다.
여경은 힐끔 지영과 종호를 되돌아 보는 것이었다.
지영은 혜련의 팔소매를 쥐어당겨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경찰들이 모여선 쪽을 눈짓하면서 혜련한테 나직이 당부했다.
“저기 경찰들이 뭐라는가 좀 들어보겠소?”
혜련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추 경찰들이 모여 쑤근덕거리는 곳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여경은 남경과 뭐라고 쑤근덕거리더니 복도 굽인돌이에서 지영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혜련은 경찰들을 흘끔흘끔 살피면서 가까이에 다가가며 귀를 도사리었다.
사실 남경은 그 사이 출입국사무소에 달려가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의 협조하에 나영의 지문과 입국시 춘영이 출입국사무소에 남긴 지문을 대조해보았던 것이다.
남경은 남경장을 보고 쑤근거렸다.
“참 이상해. 이 지문을 좀 봐. 웃기잖아?”
여경도 필림을 전등불빛에 들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나서 의아해 입을 함박만큼 쫙 벌렸다.
“이렇게 밋밋한 지문은 처음 보는데. 왜 지문이 똑똑하지 못할까요?”
“진짜 웃기는 지문이야. 쌍둥이라더니 지문도 밋밋한게 비슷하잖아?”
남경의 말에 여경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진짜 이 쌍둥이 지문은 미스터리야."
사실 나영과 춘영은 식지를 숫돌에 갈고 갈아 지문을 거의 다 밋밋하게 갈아 버렸던 것이다. 그녀들은 식지를 숫돌에 갈고는 손도장을 찍어보면서 아주 비슷하게 갈아 밋밋하게 버렸던 것이다.
여경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시술실에 들어간 여자는 나영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요?”
남경은 머리를 끄덕이었다.
“춘영일 수도 있어.”
나영과 춘영이, 쌍둥이자매의 음모궤계가 먹혀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혜련이 지영이 앞에 다가왔다. 그녀는 금방 경찰들이 주고 받은 말을 그대로 쭉 이야기했다.
지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나새끼들이 미리 지문을 가지고 꿍꿍이를 꾸며 놓았구나. 누구도 그 쌍둥이 간나새끼들을 못 이겨.)
혜련은 자리를 떠나면서 지영을 보고 말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알리오.”
“그래, 수고했소.”
혜련은 간병하러 병실로 총총히 가버리었다.
지영은 나영과 지영이 뛰어난 기만술에 못내 개탄했다.
종호는 여경을 보고 부탁했다.
“이보세요. 춘영이 조카애 혼자 집에 있어요. 춘영이한테서 집의 키를 좀 가져다 주세요.”
여경은 미심한 눈길로 종호와 지영을 번갈아보았다.
“키를 가져다 주세요.”
그제야 여경을 시술실 문을 두드리었다.
한참 후에 간호원이 키를 내다주었다. 남경은 자리를 뜰 념을 하지 않았다. 아마 나영이 자꾸 번마다 도망쳐서 오늘 밤에는 단단히 지킬 예산인 것 같았다.
(수술한 환자가 어디로 도망친다고 저럴까?)
종호는 키를 쥐고 아니꼬운 눈길로 경찰들을 쓸어보더니 지영한테 얼굴을 돌렸다.
“지영이, 여기 무슨 일이 있으면 련락주오.”
“네. 알았어요.”
종호는 먼저 애를 보러 갔다.
지영만 믿음에찬 눈길로 멀어져가는 카시모도 같은 종호의 뒤잔등을 눈바램했다.
지영은 종호가 간 뒤 혼자 복도 장의자에 앉아 나영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지영은 나영이 병원에 온 후 기회를 타 도망치려고 머리비녀를 삼켰다는 것을 불 보듯 빤히 알고 있었다.
(나영이 도망치는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는지 좀 기다려보자. 3층이니깐. 전번처럼 가스관이나 배수관을 타고 도망치긴 쉬울 거 같아.)
그때 갑자기 시술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의사와 간호원이 나영의 량팔을 붙잡고 걸어나왔다. 경찰들이 시술실 문께로 우르르 쓸어갔다.
지영은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으로 놀랐다.
그녀는 나영한테 다가가며 물었다.
“아니, 어째 걸어나오니? 수술 다 했어?”
나영은 코웃음쳤다.
여경 둘이 달려나가 나영의 양팔을 붙잡았다.
남경장이 의사한테 물었다.
“수술 다 했는가요?”
“수술은 무슨? 복부 초음파검사를 아무리 해보아도 머리비녀를 삼키지도 않았습디다.”
“네?!”
지영이나 경찰들이나 모두 놀라 초풍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눈이 데꾼해 나영을 쏘아보았다.
“도망칠 궁리했구만!”
경찰이 어처구니 없어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그래도 지영의 머리 베아링처럼 잘 돌아갔다.
그녀는 경찰들 앞에 다가서며 고성을 질렀다.
“이젠 당장 이 춘영을 석방하세요.”
여경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안 돼요. 나영인지 춘영인지 완전히 밝혀지기 전엔 구치소에 가야겠어요.”
지영은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영은 한쪽에서 의아한 눈길로 지영의 입을 바라보았다.
“무죄한 중국 공민을 작작 가두세요.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확인했잖아요? 춘영이 지문과 일치하면 이젠 석방해야죠.”
남경장은 지영을 마주 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내심하게 해석했다.
“쌍둥이자매라면서요? 저쪽 나영인지 나포해 춘영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돼요. 그전엔 잠시 구치소에 가야겠습니다.”
그때에야 나영은 제정신이 펄쩍 들었다.
그녀는 여경들한테 붙잡힌 두 팔을 마구 뿌리치며 몸부림쳤다.
“이 한 밤중에 셋집에 어린 조카 애를 홀로 두고 왔는데요. 집에 가게 좀 놔주세요. 당신들 이제 아무 죄 없는 여자를 억울하게 잡아 뒀다가 죄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남경장은 내심하게 해석했다.
“무죄면 왜 비녀를 삼켰다고 거짓말 했어? 병원에 왔다가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는게 아닌가?”
남경장은 나영을 돌아보며 똑똑히 말해두었다.
"도주혐의 있기에 구속영장을 신청해야겠어요."
여경은 나영의 잔등을 떠밀었다.
"걸엇!”
경찰들은 나영이 끌려가면서도 뭐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데도 들었는둥 마는둥 나영을 마구 끌고 경찰차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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