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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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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93)
2018년 02월 28일 16시 07분  조회:959  추천:0  작성자: 김장혁
    


             3. 원대한 설계도
어느덧 만물이 기지개를 쭉쭉 켜며 돌아눕는 봄이 왔다. 고향 태평강의 곧게 쪽쪽 뻗은 참버들 가지들에 물기가 파랗게 올랐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낫을 가지고 태평강가 버들방천에 가서 물기 오른 참버들가지를 베다가 버들피리를 만들었다.
덕돌은 애들과 함께 버들피리를 입에 물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삘리리삘리리 불어댔다.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버들피리 소리일망정 참 귀맛을 돋우었다.
봄바람에 바자에서 울리는 대자연의 음악소리를 반주로 삼아 버들피리를 신나게 불었다. 어떤 때에는 집의 코 깜쟁이 암소를 몰면서도 버들피리를 삘리리삘리리 재미나게 불었다. 저녁노을이 비낀 황혼 무렵에 무지개 비낀 패용천산과 칼산을 배경으로 소잔등을 타고 버들피리를 부는 목동, 생각만 해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것 같지 않겠는가! 덕돌은 애들과 함께 놀 놀음 감이 없었다. 궁리 끝에 아버지를 보고 놀음감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허나 상순은 “언제 놀음 감을 만들 사이가 다 있겠느냐?”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생산대 일을 하러 떠나갔다.
(어쩜 아버진 저렇게 무뚝뚝할가?)
덕돌은 하는 수 없이 애들과 함께 또 세찬 봄바람에 연을 띄우면서 하늘높이 날아예는 연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뒤 집 정갑의 할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놀음 감을 잘 만들었다.
그러자 덕돌은 성욱이랑 동림이랑 정갑이랑 함께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수수대로 제법 그럴듯한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정갑이랑 순희랑 우리 애들은 정갑의 할아버지를 따라 태평강 모래톱에 갔다.
“얘들아, 여기에 물도랑을 파라.”
“예.”
덕돌 등은 정갑의 할아버지가 가리킨 모래톱에 물도랑을 파고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새 정갑의 할아버지는 물도랑에 물레방아를 고정시켜놓았다. 실폭포처럼 쏟아지는 맑은 시내 물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수수대물레방아를 보고 애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렇게 재미나는 놀음은 세상에 둘도 없었다.
덕돌이랑 성욱이랑 모래 언덕에 구불구불 길을 닦았다. 새알같이 반들반들하고 조그마한 조약돌들을 주어다가 구불구불한 언덕길 양쪽에 촘촘히 박아놓고 고무신에 모래랑 조약돌이랑 실어 언덕길로 밀며 입으로 “붕붕” 소리를 내면서 자동차놀음이랑 놀았다. 모래에서 곤두박질을 하면서 재미나게 놀기도 했다. 정말 금싸라기 같은 모래알을 사박사박 밟으면서 놀기란 참말 재미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 여름이면 덕돌이랑 성욱이랑 더운 줄도 모르고 참새들이 재잘거리는 고향 태평강 버들방천에 가서 버들모자를 만들어 쓰고 버드나무숲속에서 배를 모래불 둔덕에 붙이고 숨어 있다가도 “봤다, 꿍!” 하면서 전투놀음도 놀았다.
덕돌은 풀꽃모자를 쓰고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숨은 순녀를 뒤로 가서 “봤다 꿍!” 하고 소리쳤다.
“어마나! 놀라라.”
순희가 몸을 돌리면서 눈을 곱게 흘기었다.
덕돌은 “헤헤” 하고 헤벌쭉 웃으면서 지껄여댔다.
“뭐? 놀을 났다고?”
“야, 놀랐다 했지 언제 놀을 났다고 했니?”
"금방 놀을 낳았다 해놓고서도. 헤헤헤."
덕돌은 여자애들을 깜짝 놀래우던 개구쟁이 시절이 즐겁기만 했다.
아, 버들피리를 불고 고향 태평강 강물에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놀던 천진난만한 소꿉시절이 아름답기만 했다. 대자연의 품 속에 안겨 원시적인 놀음을 놀던 애들의 소꿉시절이야 말로 대자연을 알게 되는 황금시절이었다.
덕돌이랑 동림이랑 애들은 한 여름에 달아다니면서 전투놀음이랑 놀다가 너무 더워 태평강가 큰 물도랑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군 했다.
그런데 그 큰 물도랑에서 큰 일이 생겼다.
어느 하루 이른 아침, 사원들이 밭일을 나갈 때었다. 5대의 최학철은 삽을 둘러메고 논물을 보러 나가다가 그만 큰 물도랑 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거머스름한 떼목 같은 것을 몇개 발견했다.
“저게 뭘까? 떼목인가? 건져다 불이나 때자.”
워낙 최학철은 시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날이 아직 시퍼래 어둑시그레 한 물속에서 보일락말락하게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떠내려오는 거머스름한 물체를 잘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물에서 “푸, 푸.” 하는 숨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찬찬히 여겨 보니 황소만큼 한 곰 서너마리 물도랑을 따라 헤염치며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 놈 곰 새끼들이, 이전에도 물도랑으로 가만히 내려오더니 또 왔구나!”
최학철이 소리치자 곰들은 가만히 밭으로 나오는 사람을 접근하다가 수면으로 몸뚱이를 드러내더니 곧추 학철에게 덮쳐들었다.
“곰이야! 곰이야!”
학철은 고함치며 반사적으로 삽으로 곰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곰은 학철이 찔러댄 삽을 척 받아 무릎에 대고 툭 끊어버렸다. 그때 다른 곰이 최학철을 덮석 안아 내동댕이쳤다.
“곰이야! 곰이야!”
최학철은 모진 고함을 치며 단말마적으로 곰에게 덮쳐들어 메치려고 기를 썼다.
이때 논밭으로 나오던 숱한 사람들이 고함소리를 듣고 삽이며 걸이대며 괭이며를 들고 이리로 달려왔다.
최학철은 덮쳐드는 곰을 이리 저리 날래게 몸을 날려 피하면서 곰에게 드센 주먹을 날렸다. 곰은 학철을 가지고 고양이처럼 양공질을 하고 있었다.
“이 놈 곰 새끼!”
상순은 고함치며 당년에 전쟁터에서처럼 걸이대를 비껴들고 곰에게 덮쳐들었다. 그는 먼저 학철의 머리를 부둥켜안은 곰의 뒤로 에돌아 덮쳐들어 걸이대로 목을 콱 찔렀다. 그러자 곰은 학철을 놓고 몸뚱이를 홱 돌리더니 상순에게 덮쳐들었다.
“싸(杀)!”
함성소리와 함께 상순은 시퍼런 걸이대끝을 곰의 턱밑에 콱 박아 넣고 푹푹 찔러댔다.
곰은 모진 소리를 치더니 비칠거리다가 푹 꺼꾸러졌다.
그 틈을 타 최학철은 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때 최국선이랑 박성근이랑 이병수랑 뛰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소총이 들려 있었다.
상순은 걸이대를 버리고 성근의 손에서 소총을 빼앗아 쥐었다.
“조개덕 민병들은 명령을 따르라!”
“옛!”
“사격 준비!”
당년의 퇴대군인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총을 들고 곰을 겨냥했다.
“쐇!”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곰 세 마리가 쓰러졌다.
나머지 곰들은 흥수랑 학수랑 숱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오자 쓰러진 동료들을 놔두고 도망쳤다.
흥수는 달려오자마자 삽으로 죽은 곰을 두들겨 패면서 고함쳤다.
“죽여라! 이놈 곰 새끼들아! 분명 큰 물도랑에서 목욕하는 덕돌이랑 우리 미선이랑을 잡아먹으려고 왔는기여!”
흥수가 다 죽은 곰을 삽으로 찍으면서 고함치는 그 장면,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장면은 삶은 소대가리도 웃다가 꾸러미 터질 지경이었다.
상순은 매부 최학철의 피 흐르는 얼굴을 팔소매로 닦아주다가 놀라 소리쳤다.
“아니, 또 곰에게 낯을 허비었구만. 빨리 위생 소에 가봐야겠소.”
상순은 일없다고 팔을 뿌리치는 학철을 데리고 대대 위생소로 떠나갔다.
“처남이 아니면 난 곰의 밥이 될 번했소.”
학철의 말에 상순은 “이후에는 너무 일찍 밭에 나오지 마오.”라고 했다.
“곰들이 칼산의 남포질에 다 달아 난 것 같던게 또 나타날 줄을 누가 알았겠소.”
한편 곰과 용감히 싸워 잡은 상순과 학철이 위생소로 간 후였다.
흥수는 마치 자기가 사원들을 지휘해 곰을 잡은듯이 자처했다.
“내 제때에 갔으니 말이지 하마터면 학철이 죽을 번했소.”
그때 조선족 말을 조금 알아듣고 4대의 치해풍이 눈을 흘기면서 두덜거렸다.
“흥! 제길 할, 내랑 곰의 발톱에 코를 긁히면서 싸워 학철을 구한 걸 자기 구한 척 한다. 원, 더러워서.” 숱한 사원들도 코웃음쳤다.
그러나 저러나 낯이 두껍기로 소 엉덩짝 같은 흥수는 사원들을 시켜 곰을 수레에 싣고 마을로 돌아갔다.
조개덕 세개 마을에서는 곰 고기로 큰 잔치를 차리었다.
상순은 곰에게 물린 학철과 제해풍을 위생 소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처치한 후 점심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상순이 조개덕의 원래 식당에 들어가니 흥수가 상순이 없는 틈을 타서 한창 연설하고 있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집단의 힘을 빌어 곰을 네 마리나 잡았는기여. 이건 모두 내캉 제때에 큰 물도랑에 나가 힘을 합쳐 싸운 덕분인기오. 세상에 독불장군이라고 학철이나 상순인들 혼자서야 어찌 그 많은 곰들을 당할 수 있겠는기여?”
“뭐라고?”
모두들 흥수 말은 귀등으로 흘리어 보내면서 곰의 고기를 먹다가 출입문을 되돌아보았다. 머리를 흰 붕대로 딜딜 감은 최학철과 코를 싸맨 제해풍이 눈을 뚝 부릅뜨고 흥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최학철은 흥수를 손가락질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우리 없는 틈에 곰을 제 잡은 상하는가? 원, 더러워서. 내 곰하구 씨름할 때 넌 물도랑에 오기나 했니? 남이 곰을 다 잡은 후에야 화서 죽은 곰을 삽으로 찍어놓구 제사 곰을 잡은 양 하면서...”
허나 상순은 학철의 팔소매를 툭 쳤다.
“이제 구구히 더 말해 뭘 하겠소. 여러분들도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그제야 학철과 제해풍은 퉁사발 눈을 히번떡거리며 으르릉거리다가 밥상을 마주 앉았다.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 잔을 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곰을 잡은 승리를 경축해 한잔 들기오!”
그러자 흥수는 상을 찡그리면서 밥상 앞에 물앉았다.
“한잔 들기요!”
모두들 상순의 제의에 따라 한잔씩 쭉 굽을 냈다. 허나 곰을 잡은 일등공신인 학철과 제해풍은 상처 때문에 술 한잔도 내지 못하고 곰 고기국만 둬 사발 먹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오랜만에 술이 거나해지자 상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오늘 온 마을 사람들이 배불리 먹으니 얼마나 좋소. 당중앙에서는 지금 류소기동지와 등소평동지가 제창한  ‘3자’ ‘1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대담히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잘 지어 집집이 쌀독마다 쌀을 꼴딱꼴딱 채워놓고 살기요.”
“좋소!”
“그럼 얼마나 좋겠소.”
사원들이 호응해나서자 상순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기뻐하는 분위기를 빌어 동원까지 해나갔다.
“우리는 이전에 범바위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해 감자와 강냉이를 심었소. 또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게 어떻소?”
“좋소. 우린 김서기 말만 따르겠소.”
그때 흥수가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이제 몇 해 지나면 또 우의 정책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고 그러는기여. 또 김 서기가 저 허백호 서기처럼 투쟁받자고 그러는기오?”
      허백호 서기는 한쪽 구석에 김빠진 공처럼 물앉아 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사원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았다. 모두들 노동개조를 하는 허백호 서기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상순은 여러 사원들을 올바르게 리드해나갔다.
“여러분, 우리 이 좋은 때 황무지를 개간해 배불리 먹고 살지 않고 뭘 하겠습니까?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항상 배를 곯으면서 살게 아닙니까?”
흥수가 냉수를 치는 바람에 푹 식어져버린 썰렁한 식당 안의 분위기는 다시 오르기 힘들었다.
병완은 더 말하지 말라고 상순의 무릎을 툭툭 쳤다.
이윽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이구, 몇 해라도 배불리 먹고 살다가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렇찮고.”
“우에서도 집체식당을 하구 집체로 하니 잘 살수 없다는 걸 알고 이번에 다시 개인에게 밭을 떼맡기는 거겠지.”
“우에 눈치만 볼게 있소? 개체로 농사를 지어 잘 살 수 있으면 개체로 농사를 지을 판이지.”
“황무지도 마음대로 개간해서 배불리 먹고 살면 좋은게지. 무슨 두갈래 노선을 자꾸 말해 뭘 하오?”
상순은 자기 말을 한단락 매듭지었다.
“그럼 좋소. 황무지를 개간하는걸로 하고 유관 부문과 잘 토론해야 하겠소.”
학수가 끼어들었다.
“이보, 그 좋은 범바위골을 두고 또 어디에 가서 헤맨다고 그러오?"
그러나 상순은 소홀히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그 자리에서는 그만두었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에 속하는데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이러저러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해가 어슬어슬 지자 상순은 자기 집에 차례진 곰의 고기에서 몇 근 떼 들고 함흥 촌의 웃새집에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병완은 더부룩한 흰 수염이 가슴에까지 흘러내리고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잡힌데다가 허리마저 구부정해갔다.
로쇠해진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상순은 가슴이 뭉클해나고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할아버지, 몸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깇으면서 “이젠 늙어서 그러려니 하네.”라고 하며 상순에게 자리를 권했다.
상순은 할아버지를 보고 “ ‘야’, ‘자’ 하지 않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병완은 “이젠 마흔고개도 넘었는데 어찌 계속 어린애 취급을 하겠소?”라고 했다.
“할아버지, 몸조심 하십시오. 오래 앉으셔서 손자가 하는 일을 돌봐주시고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사는 날을 오래오래 지켜 봐줍소.”
“그래? 에이유, 자손들을 대여섯이나 앞세우고 주책없이 오래 살아 뭘 하겠소?”
상순은 자리를 잡고 앉아 문안이 끝나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사원들을 이끌고 다시 범바위골로 들어가 감자농사를 지어 올가 하는데 었떻습니까?”
그러자 병완은 상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상냥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맥이 없어 보였다.
“범바위골에 들어갈 예산이오?”
“예. 거기 가서는 통일적으로 이전처럼 집체생산을 해서 가져다가 노동공수와 인구 비례에 따라 나눌 예산입니다.”
한참 궁리하던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치에 삐치지 마오. '범의 꼬리는 놓치면 죽는다.'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고 옛날 성인들이 말했느니라. 지금 우의 정책이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좌우경 기회주의분자요, 뭐요 하면서 두갈래 노선투쟁이 얼마나 심하오? 자칫 잘못 발을 내딛였다간 우파가 아니면 좌파로 몰려 투쟁받지 않겠소? 보오, 허백호 서기랑 허영주 부현장이랑 다 노선투쟁에 휘말려들어 투쟁받았잖소? 매사에 주의하오.”
“사원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범바위골로 들어가는 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뒤근심도 좀 있습니다.” 그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옳소. 뭐나 심사숙고한 후에 결단내려야 하오. 범바위골은 남의 공사 지역인데다가 멀기에 확실히 운송이랑 노동력이랑 문제 많소. 더구나 이전에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말을 많이 들었소? 가만, 우리 날씨도 좋은데. 마을 주위를 두루 나가 돌아보면서 얘기하면 어떻소?”
“좋습니다.”
병완은 지팽이에 몸을 의지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상순과 함께 계수동과 소서구, 장개골을 일일이 돌아보았다.
이젠 두만강을 건너온지 50여년 동안 조선족들이 가파른 산기슭의 황무지까지 다 개간해 뙈기밭을 일굴 곳은 없었다. 다만 밭머리에 조금 더 개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병완은 지팽이를 짚고 걷기 힘들어했다. 눈치챈 상순은 오후에는 할아버지를 수레에 모시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돌아보았다.
그는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마을에 인구는 점점 불어나지 밭은 더 없지. 이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원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려면 제가 말을 듣더라도 발 벗고 나서야 될 것 같습니다.”
병완은 백성을 생각하는 손자의 착한 마음과 비범한 담력에 속으로 못내 감탄했다.
“그래야지. 지금 세상에서 편안히 살려면 눈치만 살피면서 아무 일도 하잖으면 그만이지. 허나 백성들을 생각하려면 더러 말도 들을 각오를 해야 되오.”
상순은 “이것저것 눈치를 보다나면 언제 사원들의 굶은 배를 채우겠습니까?”라고 하며 굳은 마음을 내보였다.
“그래, 장하오. 마음먹은 대로 해야네.”
병완은 칼산과 패용천산 사이의 골짜기를 내려가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수레를 멈춰라!”
상순이 뒤돌아보니 할아버지는 바위돌이 가득한 골짜기를 두루 살피더니 무릎을 탁 쳤다.
“됐소. 이 골짜기 황무지를 개간하오!”
“예?”
상순은 눈이 휘 둥글해졌다.
“아니, 이 가파로운 산골짜기 말입니까?”
“음.”
병완은 수레에 앉아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바위돌도 가득한데 말입니까?” “그래. 난 이 골짜기를 보는 순간 내 고향 명천군 상우남면의 돌각담밭을 보는 것 같았소. 우리 고향에 이런 황무지가 더 있어도 여기 간도로 들어왔겠소?”
그제야 상순은 소고삐를 수레채에 매놓고 두루 살폈다.
“여기다 뭘 심으면 될 거 같습니까?”
병완은 수레에서 내려 지팡이로 이곳저곳 가리키며 말했다.
“산세가 가파른 이 산골짜기에 과수원을 개척하면 좋을 거 같소.”
“예? 당장 사원들이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과수원부터 차린단 말입니까?” “그래, 배나무를 심고 배나무 사이는 밭으로 개간해 콩이나 감자, 고구마를 심으면 되오.”
병완은 수염을 흩날리면서 허리를 굽히더니 흙을 한줌 쥐여 멀리감치 들고 여겨보았다.
“보오, 모래가 많이 섞인 이 땅에는 콩이나 고구마, 감자를 심으면 잘 열릴 게요.”
“예~ 거 참 좋습니다.”
상순은 가파른 산비탈에 눈길을 멈추었다.
“할아버지, 이 가파른 산비탈에 소낙비라도 쏟아지면 모래밭이 다 씻겨가지 않겠습니까?”
병완은 흰 수염을 슬슬 쓸며 한참 궁리하다가 “여기에 다락 밭을 만들면 될 거 같소.”라고 했다.
“다락밭이라니오?”
병완은 상순에게 머리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전에 우리 고향 산비탈에도 소잔등 같은 바위돌이 가득 했지. 그때도 우린 숱한 돌을 주어내서 토성처럼 쌓고 그 우에 흙을 펴서 평평한 다락밭을 만들고 메밀이랑 심어 먹었지.”
“예- 알았습니다.”
상순은 오래도록 머리를 끄덕이면서 할아버지의 원견과 고견에 탄복했다.
상순은 수레를 몰고 패용천산과 칼산 골짜기를 내려와 산 앞에 이르렀다.
“이전에 내 저 지개틀과 이펑거지에 논밭을 풀었지. 지학사네 배추밭 옆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보니까. 부르하통하 강변에 버두나무가 우거진 모래밭이 있더라. 거기로 가보자.”
“예. 가봅시다.”
상순은 비녀뿔이 끄는 덜렁거리는 수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부르하통하 강변으로 갔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우거진 강변에는 모래로 뒤덮인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봄바람에 몸부림쳤다.
“어떠냐? 여기에 논밭을 푼단 말이다.”
그러자 상순은 대번에 동의해 나섰다.
“저의 생각과 똑 같습니다. 저도 언제부터 여기에 눈독을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큰물이 지면 논밭이 밀려갈까봐 논밭을 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병완은 희죽이 웃으면서 강변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모래밭에 높은 돌 제방을 쌓는단 말이다. 홍수가 덮쳐들어도 끄떡하지 않는 제방 말이야.”
“품이 많이 먹어야 하겠습니다.”
“그만한 품이야 들어야지. 여기에 강물을 막아 제방을 한 일리 되게 쌓으면 서 너 헥타르 논을 풀 수 있잖겠소? 여기에 논밭을 일구기만 하면 천추만대로 우리 생산대 사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아니요?”
“예, 예. 맞는 말씀입니다. 곧 지부대회를 열고 의견을 통일한 후 인차 제방을 쌓고 논을 풀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주름 잡힌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조손은 그번 걸음에 6헥타르나 되는 과수원과 4헥타르나 되는 논을 풀 원대한 구상을 익히면서 수레에 앉아 5 리나 떨어진 마을로 돌아왔다.
이튿날 상순은 그 원대한 계획을 지부대회에 내놓았다.
"좋소!"
"동의하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동의해 나섰다.
“참 상상 밖의 좋은 계획이오.”
그러나 흥수와 학수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이보, 김 서기, 괜히 우리까지 말을 듣겠수.”
학수도 반기를 내들었다.
“그래도 우에 청시한 후 일하기오.”
그때 함흥촌에서 노동개조를 하던 허백호도 한마디 했다.
“매사에 주의하오. 이전에도 범바위골에 갔다가 말을 들어가지고 또 황무지개간이오?”
허나 상순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하려고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무슨 착오란 말입니까? 사원들이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난 투쟁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흥수와 학수 형제는 더 말이 없이 동의했다.
허백호 서기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점차 상순의 인간됨에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순은 노동개조를 하러 온 허백호를 날마다 투쟁할 대신 이전의 당위 서기로 존경하면서 매사에 그와 청시하거나 토론했고 당지부 회의에도 참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회의 때마다 흥수는 허백호 서기를 소 닭 보듯 하면서 아니꼬와했다.
지어 허백호 서기 앞에서 상순이 노동개조대상을 당지부 회의에 참가시켰다면서 조직원칙과 당성 원칙이 없다고 비평했다.
그때마다 상순은 단마디로 반박하군 했다.
“허 서기는 잠시 착오를 져서 사상개조를 할 뿐이지 의연히 중국 공산당 당원이오. 왜서 당원회의에 참가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 장면을 보고 허백호는 흥수를 속으로 비할 데 없이 증오했다.
(어떤 때는 나한테 찰싹 들어붙어 술까지 대접하면서 당지부 서기를 시켜달라고 애원하더니. 흥! 이젠 헌 신짝 차 버리듯 하는구나. 내 눈이 멀었지. 배은망덕하는 저런 놈을 다 화선입당을 시키다니.)
그는 이전에 병완과 상순을 잘못 대한 것을 못내 후회했다.
(상순이야 말로 양심적인 인간인데 내가 눈이 멀었지.)
허백호는 속으로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이제 나한테 다시 한번만 기회 있어봐라…)
이튿날 상순은 함흥대대 200여명 사원들을 이끌고 패용천산과 칼산으로 줄지어 진군했다.
대자연을 정복하려고 진군한 상순을 비롯한 사원들 앞에서 패용천산도 머리 숙이고 칼산도 길을 피해주기 시작했다.
패용천산과 칼산 사이의 골짜기에서 남포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범과 곰들은 겁을 집어 먹고 슬금슬금 마개동을 넘어 도끼봉 쪽으로 도망쳤다.
상순은 사원들을 이끌어 돌을 캐 수레로 날라다 언제를 쌓고 시꺼먼 부식토와 모래개흙을 편 후 애어린 사과배나무를 심었다.
이때 공사당위 사무실 주임이 헐레벌떡거리면서 산비탈로 올라와 상순을 찾았다.
“김 서기, 우리 박서기 산 아래에 왔습니다. 내려오랍니다.”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 또 투쟁하려는 건가?)
상순은 대수로워하지 않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하는 거 보지 못했소? 어째 박서기를 보고 여기 올라오라 하지 않았소?”
그러자 사무실 주임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사실, 찌프가 가파른 산비탈로 올라오기 힘들어서. 에헴.”
그제야 상순은 곡괭이를 놓고 손을 툭툭 털더니 산 아래로 내려갔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서 내려 부채질했다.
상순이 마주 나가면서 인사했다.
“무더운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박우성은 동창생의 손을 잡으면서 “더운데 고생이 많구먼."하고 인사하고나서 
"그래 과수원공사는 언제쯤 끝날 거 같소.” 하고 물었다.
상순은 흐르는 도랑물에 손을 씻으면서 대충 회보했다.
“사과나무는 그럭저럭 봄에 심어놓았는데 다락 밭을 만드는 일은 아마 온 여름 걸릴 거 같소. 장마 지기 전에 산비탈에 몽땅 다락밭을 만들어야겠는데 말이오. 그러잖으면 모래와 부식토에 심은 고구마와 감자가 다 밀려 갈 거 같소.”
박우성 서기는 사무실 주임을 흘끔 곁눈질하더니 상순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김 서기, 동창생이니깐 하는 말이오. 생산만 생산이라 하지 말고 혁명을 틀어쥘 생각을 하오.”
“사원들이 배불리 먹게 하는 일만한 혁명이 또 어디에 있소?”
박우성은 쑥 꺼져 들어간 눈에 엄숙한 빛을 띠웠다.
“어떤 사람이 자네 큰어머니 진달래 중대장이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고발했소. 허나 난 이때까지 깔아두었소. 그런데 조선특무를 붙잡으라고 위에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소. 이 일을 어떻게 하겠소? 게다가 항미원조 전쟁 때 남조선 특무 김용천의 삼촌 김덕성과 사촌동생 김칠백, 김칠석마저 특무라고 고발한 사람도 있소. 허영호 소장은 자네 둘째딸 은숙이 조선으로 달아난게 분명하다고 반영했소.”
“뭐라오? 근거 없는 말. 오늘 아침까지 집에 있었는데 무슨 말이오?”
박우성은 상순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뒷말을 조용히 이었다.
“허영호 소장은 농망계절에 일하지 않고 진수해에서 삼합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는 걸 민경이 보고했다오. 이런 때 조선특무를 잡는 투쟁과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고 다락밭을 만드는 데만 머리를 써서야 되겠소?”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며 호주머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속이 탄 시뿌연 담배연기가 길게 뿜겨져 나와 타래쳐 올라갔다.
꽈르릉 꽝! 꽝!
저 멀리 칼산과 골짜기에서 또 발파소리가 요란했다. 먹장구름이 패용천산과 칼산을 뒤덮고 있었다. 먹장구름 속에서 번개가 구렁이처럼 혀를 날름거리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진동했다.
“소낙비 오겠는 모양이오.”
박우성 서기는 찌프에 오르면서 상순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사무실 주임과 함께 진수해로 달려갔다.
      찌프 뒤로 먹장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더니 바짝 뒤쫓아갔다. 대지에는 호두알만큼 한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드디어 밤알만큼 한 새하얀 우박알들이 와르르 떨어져 사원들을 머리를 들지 못하게 두드려댔다. 사원들은 황급히 수레와 나무 밑으로 들어가 대줄기 같은 소낙비를 피했다. 허나 수레 멍예를 목에 멘 비녀뿔이랑 코깜쟁이랑 황소들은 어디로 피할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우박과 소낙비를 맞았다.
“은숙이 달아난 걸 어떻게 하는가? 철없는 계집애라고. 참.”
상순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원망했다.
       “원, 하늘도 무심하지! 한창 다락밭을 만들 때 무슨 우박을 퍼부어.”


               4. “북조선 특무”와 “남조선 특무”

       패용천산 중턱에서 먹장구름과 안개가 흩어져 감돌고 있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천년 이끼가 낀 바위들을 씃어 올려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패용천산 중턱의 산비탈 다락밭머리에서는 한창 이른바 남조선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와 삼촌 김덕성 그리고 김덕성의 아들 김칠석을 투쟁하느라고 분위기가 팽팽했다. 이번에는 우파들인 오옥선과 허백호 그리고 지주 장학산과 그의 아들딸 장충국과 장미련 등은 투쟁하지 않고 남조선특무와 북조선 특무들만 투쟁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흥수가 앞장섰다.
“이놈, 남조선특무 삼촌아! 대가릴 숙여!”
흥수는 나서자마자 덕성의 허연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더니 내리 눌렀다. 옆에 서있던 칠석이 흥수를 쏘아보며 눈을 흘겼다.
“이 놈 새끼! 눈은 왜 흘겨?!”
“우리 온 집안이 어떻게 돼 남조선 특무냐?”
칠석이 머리를 들고 따지고 들자 흥수는 눈을 부라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래 모르는 척 할 테냐?”
흥수는 조개턱을 쳐들고 사원들을 돌아보더니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고 호통 쳤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있잖는기요? 항미 원조 전쟁 시기 남조선특무 김용천은 바로 이 놈들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특무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꺄?”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용천이 우리 집에 들었다고 우리가 남조선 특무란 말인기여?”
덕성이 남대 치 말로 답변하자 흥수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꽉 눌러 구십도로 숙이게 했다.
“이 놈, 주둥이를 다물지 못해? 무슨 말 답변 질이냐? 이 놈은 남조선 특무가 자기 집에서 활동하는 걸 공안국에 보고하지 않았지요. 아니, 특무들을 도왔단 말입니다.”
“뭘? 어떻게 도왔단 말인가?”
덕성이 또 머리를 쳐들고 대들었다.
흥수는 눈을 뚝 부릅뜨고 덕성의 흰 수염이 더부룩한 턱을 쳐들었다.
“이 놈, 네 놈이 특무에게 밥을 해 주지 않았는가?”
“말해!”
“탄백하라!”
여기저기에서 구호소리가 울렸다.
“남조선특무를 타도하자!”
덕성은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탄백하겠어. 난 일본 놈의 통치시기에 병완 영감과 함께 우시장 일본경찰국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 아들 칠백은 항일유격대 중대장, 대대장이었다. 그는 일제캉(와) 미제캉(와) 용감히 싸웠어. 목숨까지 바쳤어. 그래도 죄 있는 거야? 열사 아버지 대접은커녕 이건 뭐야? 투쟁해?! 너희들 누구 덕에 이밥 먹고 사는지 알기나 하고 이래?”
그 말에 흥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사원들 속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수는 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들은 아들이고 넌 너야. 어찌 했든 남조선특무 김용천에게 밥을 해 먹이고 자게 했어. 이건 남조선특무를 도운 특무 죄야!”
흥수는 억지로 덕성을 특무로 몰아세웠다.
“아차, 잊었어. 넌 남조선 특무자 북조선 특무야! 이중간첩, 그래, 이중간첩이야!”
“북조선특무라니? 이건 또 무슨 생뚱 같은 개소리냐?”
덕성은 눈이 휘동그래졌다.
옆에 서서 투쟁받던 경주는 너무나도 억이 막혀 무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보았다.
“네 아들놈이 조선인민군 대대장이 아니었어? 넌 북조선특무야.”
그러자 보다 못해 상순이 나섰다.
“이보게, 그만 하오. 자네 말대로라면 나도 자네도 다 북조선특무란 말인가?”
“뭐라고? 당찮은 소리.”
상순은 한술 더 떴다.
“항미원조 때 자네나 내나 다 영장과  반장 하잖았는가? 여기 항미원조 전쟁에 지원군이나 조선인민군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오? 그래 모두 북조선특무란 말이오?!”
흥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인차 침착성을 찾고 입에서 침방울을 튕기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야 지원군으로 나가 당신 영도 아래 팔에 부상까지 당하면서 싸웠잖아? 건데 무슨 놈의 조선 특무란기여? 김덕성 일가는 확실히 남조선특무들이지. 저자들은 모두 고향이 남조선 경상북도 경주란 말이여. 저 놈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남조선이 있는기여. 항상 남조선 고향을 그리고 남조선 위해 뭔가 하려는 놈들인기여. 용천 대장이 잡힌 후부터 입장이 바뀌어서 남조선특무로 된기여.”
그러자 허백호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만 두오. 아무리 고향이 남조선 경주라고 남조선특무라는 법은 어디 있소? 우리 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이 남조선이 아니면 북조선인데 그래 모두 남조선 특무 아니면 북조선 특무란 말이오?”
이때 성근이 또 입술이 간질거려 참지 못해 툭 쏘았다.
“이보, 흥수, 당신은 무슨 이씨요?”
흥수는 어망간에 “전주 이 씨여.”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인차 농촌 정객의 어처구니없는 침착성과 냉정성을 회복했다. 그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성근을 흘겨보았다.
“그걸 왜 물어?”
성근은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흥수, 당신 고향 어디요?”
“나야, 고향이 이북 함경북도 경성이야. 남조선이 아니란 말이야.”
“당신 할아버지 고향은 전주라고 하지 않았소?”
“할아버지 고향과 내 고향이 무슨 관계 있어?”
그러나 흥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근은 고삐를 놓치지 않고 홱 나꿔챘다.
“뿌리가 조선 땅에 박혔으면 다 같은 게 아닌가?”
“저런, 우파 같은 놈, 생사람을 잡지 말어. 난 왼팔 오른팔 다 남조선 총에 맞으면서 용감히 싸운 항미원조 용사야. 내 어찌 남조선특무란 말이야?”
박성근은 상순이가 눈짓하는 것도 끈질기게 바투 들이댔다.
“당신 동생 남조선 괴뢰군이라면서? 말대로라면 당신도 남조선 특무 아니고 뭔가?”
“닥치지 못할까!”
흥수는 민병들이 세워 놓은 총까지 들면서 꽥 호통 쳤다. 그제야 박성근은 목을 움츠리며 입에 빗장을 질렀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이제부터 이 당지부 선전위원에게 악독하게 대드는 놈은 좋은 끝장이 없다! 반당분자와 남북조선 특무 고깔모자를 씌워 투쟁할 테야. 대드는 놈은 총살해버릴 테다!”
모두들 흥수의 손에 든 총과 독기서린 눈길을 번갈아 보면서 자기에게 불똥이 튈 까봐 눈치를 살폈다. 허나 뒤에서 일부 사원들은 쑤군거렸다.
투쟁대회는 결국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원들은 다시 상순의 지휘대로 대자연을 개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남포질에 맞아 금이 간 바위 돌을 괭이로 캐내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에 돌다락을 쌓고 모래와 부식토를 섞어 채워 넣었다. 가파른 산비탈에 점차 다락 밭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원들은 밭을 많이 만들어 배불리 먹고 살 욕심에 힘든 줄도 모르고 상순을 따라 억척스레 일했다.
“밭이자 쌀이다.”
상순의 이 말은 사원들의 마음속에 딱 들어가는 진리였다.
상순은 천년 이끼 낀 바위 돌 틈에 긴 정을 박아 넣고 어깨를 넣어 떴다. 얼기설기 금이 쪽쪽 난 바위돌은 용케도 쩍 갈라졌다. 상순은 웃통을 벗어재끼고 용트림하는 것 같이 근육이 울뚝 뿔뚝한 두 팔로 떡돌만큼 한 돌을 “윽!” 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돌 언제에 쌓아놓았다.
“피해라!”
“돌이 굴러 내려온다!”
“저걸 어쩌니?”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가파른 산비탈 우에서 돌을 캐다가 그만 가마뚜껑만한 돌이 굴러 내려왔다. 그 돌은 흥수를 노리고 사납게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피햇!”
상순은 고함치며 흥수를 옆으로 밀어버리면서 긴 정을 휘둘러 굴러 내려오는 돌을 탁 쳤다. 돌은 불꽃을 튕기며 방향을 바꿔 굴다가 산비탈에 쓰러졌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나 쓰러졌던 흥수는 게두덜거렸다.
“괜히 밀어놔서 무릎을 벗겼어! 씨!”
모두들 흥수가 배은망덕 한다고 쑤군거렸다.
“항미원조 전쟁 때도 상순이 아니면 제 살았겠소? 압록강 바닥에서 미군 적기를 휑해서 구경하다나니 기관총에 맞아 죽을 번 했소.”
병수의 말을 이번에는 창걸이 받았다.
“그때도 상순이 콱 밀쳤기에 살았지.”
“어디 한두 번이오? 이전에 우리 군복을 싣고 남조선 충청남도 서현에 갔을 때오. 산에서 포위당해 유격전을 하게 됐지. 그때도 상순이 흥수를 밀어놓고 양키놈을 쳐눕히지 않았더라면 총에 맞아 죽었을 거요.”
“그런데도 쩍 하면 뜨개 소처럼 김 서기를 뜬단 말이오.”
“배은망덕 한 놈이지.”
“길러준 개 발뒤축을 문다는 게 저런 새끼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나그네 귀 석자라고 오고가는 뒷말을 듣고 흥수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병수와 창걸을 흘겨보았다.
해가 어슬어슬 져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원들의 뒤로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저쪽 칼산에는 벌써 저물어가는 하늘을 뒤덮으며 뽀얗게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원들은 괭이랑 삽이랑 들고 집으로 부랴부랴 뛰어갔다.
상순은 저녁이라고 멀쑥한 죽물을 들어 쭉 마시고 바깥으로 나갔다.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애기 별이 하나, 둘 나타나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흥수가 그저 일이 아니야. 제 서긴가? 마음대로 덕성을 투쟁하다니? 아무 사람에게나 우파 아니면 북조선특무, 남조선특무라고 모자를 씌운단 말이야. 그러다간 이 마을에 투쟁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상순은 착잡한 생각을 굴리며 곧추 함흥촌에 올라가 토성 동쪽에 있는 흥수네 집으로 찾아갔다.
창문가에 서 있던 춘실은 상순을 내다보자마자 이마쌀부터 찌푸리었다.
“어떻게 나그네도 없는 집에 소리도 하지 않고 들어오오?”
상순은 윗방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흥수는 어디 갔소?” 하고 물었다.
춘실은 마흔이 넘었지만 상순만 보면 처녀 때 마음이 되살아나는지 입을 쫑긋했다.
“없으면 어째?”
“잡담할 새 없소. 어디 갔소?”
“대대 사무실로 간 거 같은데.”
“흥!”
상순은 콧방귀를 뀌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대 사무실 쪽으로 휭 하니 써늘한 바람을 일구며 떠나갔다.
뒤에서 춘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백준이, 아니, 백호가 또 아들애를 봤다오. 제 손자도 안아 보지 않는 저런 독종놈, 저런 놈 세상 어디 또 있니?”
그 말에 상순은 주춤 멈춰 섰다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상에 자기 자손을 고와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니? 응준아, 백준아, 아니, 백호야, 나를 용서해라. 연길에서 애를 많이 낳아 키우면서 잘 살아라.)
그가 토성 안에 들어서는데 전기불이 환한 대대 사무실에서 뜻밖에 덕성이 한창 흥수에게 애걸복걸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흥수, 원수 진 일이 있나? 제발 그만 투쟁하라고. 용천은 용천이지. 내 특무 노릇 한 적은 없잖나. 우리 둘은 다 남조선에서 온 남대치친구인데 왜 그래?”
“아따, 이 영감이. 이거 누가 너거(네) 친군기여? 우리 당과 사회주의 조국의 안녕과 관계되는 일 아닌가? 자넨 분명 남조선 특무를 자기 집에 재우면서 밥을 지어 먹이지 않았는가? 용천처럼 처단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 두말 말고 투쟁받고 그 더러운 특무사상 개조하게나.”
“흥수, 나도 중국공산당을 열애하네. 당과 사회주의에 미안한 일을 한 적 없네. 억울하게 투쟁받지 못하겠네.”
“이 영감이 이게. 어째 죽지 못해 이래? 썩 나가지 못해?!”
흥수는 썩 이상인 덕성을 사무실에서 마구 떠밀어냈다.
덕성은 흥수에게 떠밀리어 마루까지 나왔다가 상순을 보자 파도가 세찬 바다에서 지푸라기라도 본 듯이 상순의 두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김 서기, 우린 한 고향 사람들이 아닌가? 자넨 어려서부터 알지 않나? 내 나쁜 행동 한 적이 없잖나? 용천 사건 때도 내 청백하다는 걸 자넨 알고 있잖나?”
상순은 덕성을 부축해 마루에서 내려가면서 말했다.
“근심하지 말고 돌아갑소.”
덕성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럼 자네만 믿고 가겠네.”
덕성은 흥수를 쏘아보더니 토성 바깥으로 나갔다.
상순은 그를 토성 바깥에까지 바래다주었다.
토성 바깥 어둠 속에서 칠석이 아버지를 부축해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절벅절벅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특무의 사촌동생이란 딱지가 들어붙어 장가도 들지 못한 칠석이 불쌍했다. 또 조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덕성과 칠백 대대장이 가긍해 콧마루가 시큼해났다.
상순은 그들 부자를 바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대 사무실로 들어갔다.
흥수가 오히려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노발대발했다.
“당신, 정신 있는기여? 남조선 특무와 무슨 그리 인정스레 놀아? 서기란 사람이 주책없이.”
“뭐라오?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오?”
상순은 흥수를 쏘아보며 책상을 꽝 쳤다.
“앉소. 오늘 조용할 때 따져 보기요.”
흥수도 노긋노긋하게 숙어 들려고 하지 않았다.
“특무하고 한 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니?”
“뭐라오?”
상순은 밸 같았으면 흥수의 면상을 한매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용케도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억지로 참아냈다.
“무슨 근거로 어째 덕성에게 마음대로 특무 모자를 씌워 투쟁한단 말이오? 나는 당시 용천 사건을 해명한 책임자기에 증명할 수 있소. 용천은 우리 마을에 잠입한 특무지만 덕성이나 칠석은 특무가 아니란 말이오. 적아 계선을 똑똑히 나눠야 한단 말이오.”
그 말에 흥수는 풀이 좀 죽었다. 허나 자기 체면을 지키려는 듯 또 두덜거렸다.
“어쨌든 덕성 영감은 특무의 삼촌이오. 칠석인 특무의 사촌동생이고.”
상순은 목소리를 낮춰 차근차근 말했다.
“흥수, 특무 친척이라고 다 투쟁하면 뭐요? 우린 봉건사회 때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팔촌까지 련루시켜 목을 치던 작법을 그만 둬야 하오.”
그러나 흥수는 계속 고집을 썼다.
“그럼 어째 빈농이고 지주고 성분을 나눴어? 그래 성분을 보지 말자는 말인기여?”
“애비가 지주라고 해서 아들마저 지주로 몰아 투쟁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리 당에서는 타격면을 좁혀 적을 적게 만들기 위해 지주와 아들은 구분해 보라고 했소.”
“점점 어처구니없는 말을 다 해. 그래 장충국을 투쟁하지 말래?”
“아니오. 장충국은 일찍 항일도 했지만 후에 국민당에 가담해 지주 무장을 조직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을 뒤엎으려고 한데다가 남조선 특무들과 야합했소. 그러나 덕성 영감네 부자는 다르오. 당지부에서 토론도 없이 당신이 마음대로 투쟁하면 되오?”
“당지부 위원이 셋인데. 나와 학수 형님은 덕성을 비판하자고 토론했소.”
“허나 당지부 서기인 나와는 왜 일언반구도 토론하지 않았소?”
“모택동 주석께서는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라고 했소. 서기든 뭐든 당신은 다수에 복종해야 하오.”
“허허허. 대단하구만.”
상순은 가소로워 너털웃음을 쳤다.
“내가 지부 서기인데. 토론도 하지 않고 당지부 결정이라고?! 조직원칙이 있소? 없소? 내일부터 덕성을 투쟁하지 못하오.”
“소수는 다수에 복종하오! 당신 그래 당지부 서기노라고 모택동 주석의 말씀도 듣지 않을 예산이오?”
“소수라고 해도 어떤 때에는 도리 있다고 모주석께서 말씀했소. 알기나 하오?”
그 말에 흥수는 입을 허 벌리고 말았다. 이론수준은 어쨌든 상순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상순은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다.
“함흥대대 당지부 대회에서 토론하고 덕성의 투쟁문제를 결정하기로 했소.”
“누구하고 토론하오?”
“우리 할아버지 지부 서기는 내놓았지만 아직도 당원이라는 것을 잊지 마오.”
“토론을 하나 마나. 당신 할아버지 내 편을 들겠어?”
흥수는 휭 하니 사무실에서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이 함흥대대당지부야 당신네 집안에서 세습해오지 않았소? 누가 김씨네 집안을 이기겠소?”
흥수는 사무실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창문 유리에 금까지 갔다.
상순은 전기를 끄고 나오면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흥수는 집에 돌아가 윗방에 담배연기를 뽀얗게 피우면서 온 밤 어떻게 하면 상순을 무너뜨리고 대대 당지부 서기 자리를 뺏을까 하는 궁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창문 밖이 희붐해 올 때 흥수는 흥분된 나머지 이불을 콱 차고 벌떡 일어났다.
“옳다. 옳아. 바로 그거야. 조선에 달아난 진달래와 경수, 으흐흐. 상순은 조선특무의 조카이자 사촌형이 아닌가? 으흐흐. 상순아, 서기 자리를 내놓겠어? 안 내놓겠어? 허허허.”
춘실은 나그네가 흥분된 모양을 보고 이불깃을 살며시 들면서 물었다.
“웬 일이오? 남도 자지 못하게 하면서. 내일 어떻게 일하러 가오?”
“작작 떠들어. 상순이 어떻게 되나 이제 보오.”
그러자 춘실은 어슴푸레 한 방안에서 입을 삐쭉해 보였다.
“괜히 호랑이 코 구멍을 쑤시지 마오.”
“흥! 어디 두고 봐!”
흥수는 이불을 쓰더니 이윽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했다.
쩍 하면 쏟아지는 소낙비를 보고 상순은 100여명 사원을 이끌고 멍지뫼산 앞으로 진군했다.
아름드리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우거진 모래톱을 핥으며 퍼런 부르하통하가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사원들은 모래톱과 사납게 파도치며 흐르는 강물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저기에서 한탄소리도 났다.
“저런 감때사나운 강물을 막을 수 있을까?”
“글쎄 말이오. 어떻게 저런 아름드리나무를 뽑고 논을 푼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소.”
“논물을 어떻게 먹이면 저 모래를 다 적실까?”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손바닥만한 논이라도 더 풀지 않으면 언제 배불리 먹고 살겠소?”
“옳소.”
상순은 목청을 높여 동원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는 앉아 굶지 말고 우리 두 손으로 부르하통하 물곬을 바꿔 놓고 여기에 논을 풀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한테 배불리 먹으라고 쌀을 줍니까? 하느님도 신선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자연을 개조해 논을 풀고 입쌀을 얻어 와야 합니다. 이제 부르하통하를 막아 물곬을 남쪽으로 돌려놓고 이 곳에 논을 풉시다.”
“좋소.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산이라도 옮기고 바다라도 메워야 합니다.”
어느 결에 왔는지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서서 상순의 말에 호응해 나섰다.
모두들 병완과 상순의 간단한 동원을 듣고 힘을 얻어 팔을 걷고 나섰다.
로촌장 병완이 상순과 허백호 앞에서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 서서 치수를 이리이리 하고 논도랑과 논두렁을 이리이리 하라고 지팽이로 모래에 그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힘이 나 했던 것이다.
이젠 허백호마저 병완과 상순을 지지해 나섰다. 그는 노동개조를 하기 위한 정치수요보다도 노동개조를 하는 자기를 인간대접을 하는 병완과 상순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감복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원들은 이제껏 병완과 상순의 지휘아래 뭐든 해서 잘못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믿고 반세기동안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병완과 상순이 설계한대로 먼저 물곬을 남쪽으로 돌리려고 제일 우로부터 시작해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를 쌓기 시작했다.
상순은 세찬 물살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두에서 떡돌 같은 돌을 받아 물에 처넣었다.
풍덩!
커다란 돌이 물에 떨어지면서 물보라가 솟구쳤다.
사원들은 상순처럼 연이어 커다란 돌을 물에 처넣었다.
한참 역사질 끝에 부르하통하 강물에 동남방향으로 돌 언제가 서서히 솟아나오고 있었다. 사납게 덮쳐오던 강물도 점차 기세가 눌리어 머리를 숙이고 동남 쪽으로 물곬을 돌리고 있었다.
상순이 기분 나서 사원들을 이끌어 한창 바위돌을 처넣으면서 물곬을 돌릴 때었다.
“북조선 특무 상순은 투쟁받을 준비를 해라!”
모두들 바위 돌을 처넣다가 머리를 돌려 보았다.
흥수가 진수해파출소의 몇몇 민경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상순이 여겨보니 그 속에 허영호 소장과 박우성 서기도 달려 왔다.
허백호는 수레에서 돌을 부리어 물에 처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어디 살겠니? 매일 새 사람을 붙잡아 투쟁하다니.”
상순은 허영호와 흥수 그리고 박우성을 번갈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오?”
흥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상순의 낯에 대고 삿대질하면서 우쭐거렸다.
“이 북조선 특무 놈아, 그래도 너의 죄를 모르는 척 하겠어?”
“내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가?”
상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손가락질 했다.
“넌 북조선특무 진달래 시조카다! 네 가문에는 숱한 북조선특무와 남조선 특무가 있다. 봐라! 너의 조카 동선도 북조선특무인 거여. 친딸 은숙마저 조선에 도망가지 않았는가? 넌 북조선 특무야! 민족우파야!”
흥수는 이를 악물고 상순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악설을 퍼부었다.
“이 놈아, 당지부 서기 자리를 내놔!”
사원들은 흥수를 흘겨보았다.
그들은 속으로 진짜 길러준 개 주인의 발뒤축을 문다고 욕했다.
그러나 상순은 그저 허구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흥수, 당지부 서기자리 탐나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마오. 과욕하면 눈이 멀고 정신이 나간 짓을 하게 되오.”
“뭐, 뭐라? 이 놈이 정말. 지금 조선특무를 잡으러 왔어. 쓸데없는 소리를 작작 해! 네 놈의 조카 동선과 둘째딸 은숙이 조선에서 온 편지를 읽어 줘야 정신을 차리겠어? 네놈이 조선특무들과 내통한 죄를 세상에 까밝아 놓아야겠어?”
그 소리에 상순은 조금 몸을 비틀거렸다.
저쪽에서 병완이 지팽이를 짚고 기침을 쿨럭쿨럭 깇었다.
이때 허영호가 민경들을 시켜 상순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 세웠다.
흥수는 호주머니에서 조선에서 온 편지 두통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건 몇 해 전에 조선으로 도망친 조선특무 김동선의 편집니다. 여러분, 들어보십시오.”
 
존경하는 삼촌
삼촌을 비롯한 일가 모두 안녕하십니까? 순자랑 홍자랑 여동생들도 무사히 공부를 하고 있겠지?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덕돌은 이젠 컸겠구나. 네 털모자를 쓰고 와서 얼마나 고생했니? 네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학교를 다닌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이 다음 내가 더 좋은 모자를 꼭 사줄게. 공부를 잘 해라.
삼촌, 나는 조선 함흥에 와서 기관사로 돼 기차를 모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 한족들의 “꼬리빵즈”라고 놀려대는 놀림 속에서 화물차를 몰기보다 조선에 와서 기관차를 모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고 어머니와 순애 그리고 노할아버지와 삼촌, 일가친척들을 간도에 남겨두고 조선에 나왔는데요.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조선을 위해 벽돌 한장이라도 더 쌓는 마음으로 기관사를 몰고 조국 땅을 달리니 얼마나 성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할아버지, 삼촌, 이 동선을 양해하고 동선이 잘 되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리라고 믿습니다.
 
“봐라. 북조선 특무로 나가더니 완전히 중국을 배반하고 침을 뱉았어. 이래도 북조선특무가 아닌가!”
흥수는 편지를 읽다가 고래고래 고함치더니 또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지난해 봄에 중국에서 나온 류정자씨와 결혼해 딸애 애숙을 보았습니다. 아내 류정자씨는 원래 중국에서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교정을 보았댔는데 민족우파요 뭐요 하면서 반우파투쟁이 백열화되자 정치투쟁이 싫어서 조선에 나왔습니다. 그의 본가집 부모형제와 친척들은 모두 도문과 연길에 있습니다.
 
“봐라. 조카며느리도 중국에서 도망친 북조선 특무야. 하나하나 몽땅 붙잡아 투쟁해야 해.”
흥수는 득의양양해 편지를 내리 읽었다.
 
진달래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모든 일이 다 잘 풀려나가고 있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큰할머니는 조선에 나온 후 성칠 큰할아버지 생전 소속부대에 찾아가 김인섭 작은 할아버지를 찾았답니다. 김인섭 작은할아버지는 항미원조 전쟁 때 김성칠 큰할아버지 수하에서 대대장을 하였고 후에 성칠 큰할아버지 대신 연대장을 했답니다. 그는 후에 사단장이 됐습니다. 이제 서부전선으로 나간다고도 합니다. 김인섭 큰할아버지 알선으로 지금 진달래 할머니는 군 녀성동맹위원회 위원장 사업을 한답니다.
 
“저런, 저런. 매국역적, 반동분자를 위원장으로 써? 헤이 참, 남조선 특무 녀편네 주제에 조선에 간들 오래 배길 거 같아? 제길, 이제 조선에 편지를 써서 그년의 내막을 몽땅 까밝아 놔야겠어. 어허, 이거 목이 아파 읽지 못하겠다.”
흥수는 손으로 목을 슬슬 만지더니 조개턱을 쳐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두 민경 사이에 서 있는 상순의 세귀눈길과 딱 부딪쳤다.
“옳아. 네 놈이 읽는 게 맞아.”
흥수는 편지를 가져다 상순의 코 앞에 내밀었다.
허영호 소장은 어쨌든 옛 상전인지라 상순의 체모를 지켜주려고 쇠고랑을 채우지도 않았고 바줄로 묶지도 않았다.
옆에서 허백호가 자기 사촌동생의 귀에 대고 뭐라고 자꾸 귀띔하는 것이 흥수의 눈에 뜨이었다.
(참 꼴불견이야. 저 놈들은 아직도 짜고 든듯이 의리를 지켜? 혁명하는데 무슨 봉건의리야. 저 놈 우파분자 허백호도 더 얻어맞아야 알겠는 모양이지.)
흥수는 게두덜거리면서 편지를 상순의 낯에 휙 뿌렸다.
상순은 편지를 한장 한장 주어 차곡차곡 정성껏 쥐더니 내리 읽어보았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편지인가!
흥수가 찢어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상순은 은숙의 편지를 내리 훑어 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노래하듯이 곡을 붙여 흥얼흥얼 내리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엄마, 그간 둘째딸이 잃어져 근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으로 나올 때 부모와 말도 하지 않고 와서 미안합니다. 말하면 조선에 가지 못하게 할까봐 말하지 못하고 정옥이랑 함께 떠나왔습니다.
 
“어디 보기오. 제 좋은 소릴 하지 않나?”
흥수는 상순의 손에서 편지를 홱 빼앗아다 내리훑고 올리훑었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조개턱을 쳐들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상순은 순순히 들이 대고 당하기만 했다. 이전에 자존심이 면도칼날 같고 독기 어린 세 귀눈을 부라리던 사내, 욱 하면 벽이라도 차고 나가던 그런 사내 성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상순은 편지를 받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지금 나는 철준 작은할아버지네 집에서 잘 지냅니다. 철준 작은할아버지는 외가집으로는 5촌 삼촌이 되기에 작은할머니(삼촌댁)도 나와 우리 친구 정옥이까지 아주 친절히 대합니다. 그런데 아직 직업을 찾지 못해 사처로 헤매고 있습니다. 철준 할아버지도 여기 저기 알아보지만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우리를 받지 않는답니다. 이전에 농중이라도 계속 다녔겠는 걸 그럽니다. 정옥도 아직 직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만! 그만!”
흥수는 바삐 편지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상순이 펄쩍 뛰었다.
“이 자식, 왜 내 딸의 편지를 빼앗느냐?”
그 뜻밖의 말에 흥수도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 놈이 되살아났구나. 네 놈이 아직도 파 속처럼 속이 새파랗게 살아 있었구나.”
상순은 와닥닥 달려들어 흥수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애들이 살자고 자기 고향으로 찾아 갔는데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이때 보준도 나서서 떠들어댔다.
“내 사촌동생도 회룡에 나갔기에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고 지금 교장을 하오. 잘 살자고 자기 고향에 나갔는데 무슨 죄란 말이오?”
흥수는 그래도 턱을 쳐들고 보준을 쏘아보며 떠들어댔다.
“사회주의 중국을 배반하고 조선에 나간 놈들은 몽땅 남조선 특무로 되지 않는가 두고 봐라.”
그는 머리를 돌려 상순을 흘겨보며 목에 지렁이 같은 피 줄을 세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당신의 조카는 북조선 특무야!"
그러자 상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내 조카 조선에 나가 무슨 죄 있다고 그래? 그는 당당한 조선공민이자 조선로동당 당원이다.”
“점점 양이 자랐구먼. 그래 당신의 조국은 어디요?”
상순은 주저하지 않고 “내 조국은 사회주의 중국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외까풀 눈을 가슴츠레 뜨고 말했다.
“허나 당신은 특무의 삼촌, 더 명확히 말해 조선특무 죄를 벗어메지 못하오.”
그때 상순도 맞섰다.
“네 조카 정옥도 내 딸과 함께 조선에 나가지 않았는가? 그럼 너도 북조선 특무가 아니야?!”
“쩌, 쩌. 쩌. 오늘 회의는 이만 하기오!”
흥수는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고 깨갱거리며 달아나는 개처럼 머리를 숙이고 저쪽으로 가버렸다.
사원들은 당당한 상순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박우성은 그제야 사원들의 앞에 나섰다.
“우린 아무 사람이나 조선에 갔다고 다 조선특무라고 몰아붙여선 안됩니다. 중국과 조선은 친선국가입니다. 중조 친선은 피로써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조 친선을 귀중히 여기고 대대로 전해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손으로 중조 친선에 먹칠을 하면서 반목해서야 됩니까? 여기 있는 어느 분이 조선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우리 모두 북조선 특무란 말입니까? 나는 일본에 가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일본 특무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친척을 찾아 조선에 놀러 갈 수도 있습니다. 놀러 간 걸 특무라고 하면 뭐가 됩니까? 이런 얼토당토 앉는 말을 하지도 마십시오.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나라 계선이 없습니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국가이기에 인민들이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중소 관계가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조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돈독히 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순 서기는 조선특무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 당의 훌륭한 농촌 기층대대 당지부 서기입니다.”
모두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병완은 먼발치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머리를 끄덕이며 박우성과 상순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흥수는 한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가더니 버드나무에 대고 오줌을 누는 척 하면서 외면했다.
“어디 두고 보자. 박우성, 네놈도 일본 특무로 몰아 없애 버리지 않는가. 그래야 상순의 서기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구나.”
그는 오늘의 치욕에 백배, 천배 복수하려고 이발을 득득 갈아댔다.
상순이 강가에 가보니 그새 거센 물살이 돌 언제 밑의 모래를 파가면서 언제가 무너져 수면에서 사라졌다.
“북조선 특무를 잡는다고 지랄발광 하다나니 언제가 다 무너졌구나.”
상순은 머리를 돌려 사원들을 향해 고함쳤다.
“빨리 돌을 가져다가 물에 처넣소. 언제를 다 밀어가겠소.”
“옛!”
사원들은 한 아름씩 되는 돌을 들어다 소용돌이치며 언제에 덮쳐드는 물에 처넣었다.
풍덩! 풍덩!
물보라가 연신 하늘로 솟구쳤다.
허나 밑 모래가 물에 패운 언제는 토대가 없어 무너져버린 채 좀처럼 다시 물 우로 솟아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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