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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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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07)
2018년 06월 16일 12시 45분  조회:1491  추천:0  작성자: 김장혁



                     2. "작은 선생"

       하늘에서는 거무칙칙한 구름이 감때사납게 흩날리고 먹장구름을 꿰뚫고 불뱀이 패용천산 중턱을 날카롭게 핥아갔다.
       꽈르릉! 꽝! 꽝!
        먹장구름은 칼산이 높이 솟구치려는 야심이 있다고 갖은 술책을 다 부린다. 먹장구름은 때로는 넓은 흉금으로 포옹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잠시나마 옥맺힌 옹졸한 가슴을 하얗게 풀어헤치면서 산봉오리를 끌어어안기도 하고 숙구멍을 어루만져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함구무언일 때는  불채찍을 휘둘렀다.
        번쩍!
        우르릉 꽝꽝!
        간사한 요귀는 먹장구름 사이에 숨어서 음산한 바람을 일이키더니 불혀를 날름거린다.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지꿎게도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밤알만큼 한 우박이 와르르 쏟아져 진창에서 물똥이 튕겼다. 풀이 듬성듬성 난 함흥중학교 운동장에는 난데없는 탁구공만큼 한 하얀 우박이 쏟아져 나뒹굴었다. 운동장에서는 체육시간을 본지 오래었고 뛰노는 학생들을 본지 오래 풀이 무성하게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감때사납게 불어치는 비바람에 학교 지붕 양철이 들려 넌덜거리며 산신당 귀신 소리를 울리며 사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긁었다.
펑펑 구멍 뚫린 교실 유리창문은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내다보며 장탄식하고 있었다. 학교 벽에는 대자보가 다닥다닥 들어붙어 있었다. 이른바 류소기의 “독서벼슬론”을 비판하고 “반역자이며 내부간첩이며 매국역적인 류소기 수정주의 교육노선”을 비판하는 대자보들이었다. 그런 대자보를 많이 써야 정치표현이 좋다고 하는 세월이었다. 때문에 남의 대자보를 베껴서라도 비판대자보를 주일마다 한 장 붙여야 했다. 겹겹이 나붙은 대자보는 세상에 보기 드문 “명필”들이었고 필체도 각양각색이었다. 쌀이 귀한 세월이라 쌀 물로 풀을 쑤어 붙이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에 바깥에 나가 진흙을 파다가 물에 풀어 진흙탕으로 벽에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다나니 허연 종이에 쓴 대자보는 그야말로 흑대자보로 돼버리었다.
덕돌은 공부를 뛰어나게 해 애들이 “수학 골”, “작은 선생”으로 별명을 지어 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시기” 학교 정치 환경에서는 용빼는 수가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지식분자들을 “더러운 아홉째”라느니 “소자산계급”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의 사상은 발에 소똥이 묻은 빈농들의 사상보다 못하다.”고 했다. 또 지식보다도 사상이 붉어야 한다며 지식분자들은 빈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우에서 최고지시가 내렸다.
함흥중학교에서는 정치형세에 맞춰 빈농 대표 이흥수가 와서 관리하기 시작했고 학교 당 지부 서기 장동원은 유명무실한 지도자로 되였고 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이승복과 서기 장동원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과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토론한 후 함흥대대 당 지부 선전위원이던 김철봉, 김성환 등 몇몇 지식이 있는 농민들을 겸직교원으로 초빙했다. 이흥수는 학교 빈농 대표라는 특수신분을 이용해 종연의 동생 황승연도 학교에 끌어들이었다. 자기 졸개로 쓰려는 이도에서였다.
학교에서는 문화지식공부는 뒷전이고 농업과를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쳤고 학생들을 생산대에 내몰아 봄에 담배그루뽑기, 벼모꽂기부터 가을하기에 탈곡까지 하게 했다. 진짜 학생이 아니라 공을 받지 않는 준농사군들이나 다름없었다.
덕돌은 당시 공부를 잘했지만 표창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류소기 “독서벼슬론” 반동사상에 물젖었다고 락인돼 한쪽으로 밀리었다.
더구나 담임교원 황승연은 형 황종연과 이흥수와 짜고 들어 상순의 아들이라고 덕돌을 학습위원에서 내치고서도 모자라 처처에서 기를 펴지 못하게 들볶았다.
어느 날 아침, 숱한 학생들이 교탁 옆에 황승연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덕돌이 다가간 줄도 모르고 황승연은 계속 지껄였다.
“덕돌은 안 되오. 새애기처럼 코를 풀럭거리며 공부나 잘했지. 일하기 싫어하고 체육이랑 영 못한단 말이오. 뽈이랑 어디 찰줄 아오?”
애들은 덕돌을 돌아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제야 덕돌이 애들 뒤에 서있는 것을 본 승연은 교편으로 교탁을 탁탁 치더니 교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분명 덕돌을 때리지 못해 하는 짓거리였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지꿎은 날에 사래긴 밭을 김맬 때 덕돌은 제일 앞에서 기음을 매며 나갔다.
황승연은 호미를 메고 전문 덕돌의 꽁무니를 뒤 따라다니며 곡식포기 속의 풀을 뽑아 숱한 애들 앞에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비평했다.
“이게 뭔가? 이렇게 거짓으로 매서 되니? 빈농의 재교육을 밑구멍으로 받아?”
“허허허. 어째 그렇게 빨리 나갔나 했더니 풀을 매지도 않았구먼.”
“일을 할줄 알아야 어쩌지?”
“작은 선생”으로 불린 덕돌을 질투하던 어떤 애들은 속이 시원해 헐뜯었다.
게다가 성욱이랑 상선이랑 덕돌이 철주와 함께 동네 해바라기를 훔쳐 먹었다는지 뭔지 하면서 이른바 덕돌의 “죄상”을 만들어 헐뜯었다.
그럴수록 덕돌은 김매기도 더 잘하고 쉼 시간이면 애들과 멀찍이 떨어져 숨어 성환 형님이 빌려준 소설책을 가만히 읽었다.
덕돌은 황승연이 어찌나 미웠으면 모주석의 칠언율시를 배운 후 딱딱 한 행에 일곱 자로 된 이른바 “7언 시”를 써서 황승연을 “황둥개”라고 욕하면서 자기를 압제하는 이른바 죄상을 폭로했다. 그런데 성욱이 황승연에게 덕돌이 쓴 시를 훔쳐다 보이는 바람에 덕돌은 또 봉변을 당했다.
황승연은 쑥 꺼져 들어간 우멍 눈에 쌍불을 켜고 덕돌의 귀 쌈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길러준 개 발 뒤축을 문다고 네놈새끼 언감 날 헐뜯어?”
저쪽에서 성욱이랑 깨 고소해 입을 싸쥐고 웃었다.
허나 방순희랑은 덕돌을 동정해 마음이 아파 상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황승연을 바라보았다.
덕돌은 황승연에게 한매 또 한매 얻어맞을 때마다 속으로 이 다음 커서 힘이 세면 황둥개부터 까부실테다.” 하고 윽벼르면서 이를 악물었다.
허나 흐린 하늘이 조금 개이면서 간혹 쨍 하고 해 뜨는 날도 있었다.
덕돌을 그렇게 못 살게 굴던 황승연이 글쎄 하루 새에 함흥중학교를 떠나게 됐다.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 황종연이 김용만 국장에게 술 상자를 들어다주고 뒷문거래를 해서 승연을 공사 기업소에 넣어주었던 것이다.
황승연이 학교에서 사라지자 덕돌은 얼마나 홀가분한지 긴 한숨을 후 내쉬었다.
뜻밖에도 담임교원으로 김경산 선생이 왔다. 성환이나 경산, 황승연은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와 소학교 때부터 고중까지 동창생이었다. 특히 경산은 춘자와 한 마을에서 자랐고 소학교부터 농학원 다닐 때까지 동창생이었다.
덕돌은 인차 경산 선생님이 담임교원으로 온 기쁜 소식을 편지로 써서 교하 큰누나한테 부쳤다.
춘자가 쓴 편지 두통이 인차 날아왔다.
한통은 고향 친구 경산한테 날아왔다. 그는 편지에서 덕돌이 그간 황승연에게 수모를 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덕돌을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한통의 편지는 덕돌에게 날아온 것이었다.
덕돌은 편지를 받아 쥐고 학교 운동장 동남쪽에 있는 백양나무 아래로 갔다.
운동장에는 쑥이 한 키씩이나 자라 범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한족묘지 바깥으로 드러난 뻘건 관 널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어 시꺼먼 관속이 들여다보여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허나 덕돌은 한족묘지꺼리에 누구도 오지 않아 좋았다.
편지를 뜯어보니 춘자는 덕돌을 보고 교오자만하지 말고 경산선생님의 가르침대로 공부만 잘할 것이 아니라 다른 동창생들과 단결도 잘하고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며 훌륭한 사상품성을 닦으라고 재삼 부탁했던 것이다.
덕돌은 글귀마다 형제의 정이 찰찰 넘치는 편지를 읽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뜨거운 눈물은 편지지에 점점이 떨어져 젖어갔다.
“누나, 꼭 누나 가르침을 명기하겠소.”
덕돌은 교하 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님이 찾아왔다.
“온데를 찾아도 없더구나. 여기서 뭘 하니?”
덕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선생님, 전 잘 못도 많은데 많이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경산은 “독서무용론이 살판 치는 세월에 너 같은 훌륭한 학생들이 고생하게 됐다.”라고 하며 덕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네 누나에게서 편지가 왔더구나. 내 있는 힘껏 도와 줄 테니 근심하지 말고 공부를 잘 해라.”
그 말에 덕돌은 놀랐다.
“공부를 잘해도 일없습니까?”
“일 없다. 요즘 등소평 동지가 올라가 교육을 틀어쥐면서 학교에서 지식교육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공부를 잘 해라. 우리 학급의 학습 성적을 춰 세워야 하겠는데 네가 학습위원을 맡아야겠다.”
“예?!”
경산 선생님의 말에 덕돌은 놀랐다.
“난 널 믿는다. 학습위원이 된 후 자기 공부만 잘 할뿐만 아니라 이전처럼 ‘작은 선생’이 돼 학습 성적이 차한 애들을 배워줘라.”
뒤이어 경산 선생님은 미더운 눈길로 덕돌을 바라보면서 “할 만하지?”라고 물었다.
덕돌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감개무량해 경산 선생님을 바라보며 “꼭 잘겠습니다.”라고 했다.
“좋다. 내일 학급에서 통과하겠다. 그리고 몇 가지 말해야겠다.”
덕돌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나서 똑바로 서서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참된 사람이 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겠지만 고상한 품성부터 닦아야 한다. 황승연 선생이 너를 압제하고 때리고 학습위원을 철직한 것은 잘 못이다. 나는 그를 몇 번이고 찾아 너의 학습위원을 회복시키라고 했다. 허나 필경 그는 너의 담임교원이 아니냐? 너도 이젠 나이 어리잖고 책도 다른 애들보다 많이 보았으니까. 이젠 셈이 들어야지. 아직도 밉던 곱던 자기 선생을 황둥개라고 시까지 지어 숱한 학생들 앞에서 욕한 건 잘 못이야. 지금 아무리 학생과 선생은 ‘한 전호 속의 전우’라고 하지만 필경 너의 스승인데 그럼 못 쓴다. 알만하지? 큰 그릇이 되려면 마음을 널리 써야 한다.” 덕돌은 인차 마음이 돌아설 수 없어 머리만 숙이고 발끝으로 땅바닥의 풀만 긁어댔다.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잘 배워주면서 자기 주위에 애들을 뭉치게 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각종 방법을 대서 애들을 하나하나 단결해 친구로 보내라. 그럼 외목에 나는 일은 없을 거야. 지어 성욱과도 단결해야 한다. 황차 성욱은 네 9촌 조카가 아니냐?”
어린 덕돌은 그 말까지 접수하기 힘들었다.
“성욱이랑 나를 도처에서 헐뜯는데 그 애하고 어떻게 단결합니까?”
“그래도 단결해야 한다. 너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걸 나도 안다. 그럴수록 단결해 너를 미워하지 않고 헐뜯지 말게 해야 한다. 그래야 네 위신이 올라 갈 수 있다. 알만하지?”
“네~”
덕돌은 실오리만큼 알듯 말듯해 그저 머리만 끄덕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날씨는 유난히 밝았다. 밤새 지루하게 내리던 소낙비도 멎고 새들도 깃을 털며 날 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덕돌이 오랜만에 호미 대신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갔다.
그날 경산 선생은 숱한 학생들 앞에서 엄숙히 선포했다.
“오늘 우리 학급 새 간부들을 선포하겠습니다. 반장에 장영웅, 홍위병 조장에 최설복, 체육위원에 김일광을 임명합니다.”
학생들은 모두 박수를 우레와 같이 보냈다.
그때 장영웅이 옆에 앉은 최설복을 보고 의아해 “어째 학습위원이 없니?”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설복은 “학습위원이야 성욱이지 않고 뭐야?”라고 하며 앞줄에 덕돌과 나란히 앉은 성욱을 바라보았다.
덕돌이 보니 성욱은 득의양양해 경산 선생을 바라보았다. 경산 선생은 성욱이네와 벽을 하나 사이 둔 아래 웃집 사이이었다. 성욱은 그 지리적 우세를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경산 선생은 정말 성욱과 덕돌을 번갈아보더니 목청을 돋우어 선포했다.
“다음 학습위원을 개선하겠습니다. 학습위원은 반드시 학습 성적이 우리 학급에서 최고인 학생이여야 됩니다.”
“학습 성적 1등이야 덕돌이지. 성욱이 되니?” 장영웅이 설복과 말했다.
허나 설복은 의견이 달랐다.
“그래도 학습 성적만 봐서 되니? 품성도 봐야지. 담임교원을 황둥개라고 욕하는 애가 어떻게 학습위원을 하니?”
그때 경산 선생이 설명했다.
“물론 학습위원은 다른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품성도 좋아야 합니다. 내 보건대 우리 학급의 학습위원은 공부를 제일 잘 하는 덕돌 동무가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성욱 동무도 잘 하지만 학습 성적이 덕돌과 비할만합니까? 누가 학습위원을 하는 게 옳은지 토론해봅시다.”
그러자 교실 안은 장마당처럼 의논이 분분했다.
영웅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덕돌 동무는 매개 과목 평균성적이 100점입니다. 우리 학급에서 최고 1등입니다. 성욱 동무는 겨우 급제나 맞았는데 어떻게 학습위원을 할 수 있습니까? 덕돌 동무는 기실 품성도 좋습니다. 황승연 선생님이 자꾸 욕하니까. 괘씸해 황둥개라고 그런 시를 썼을 뿐입니다.”
경산 선생은 명확히 말했다.
“건 덕돌의 잘못입니다. 밉던 곱던 선생을 그렇게 욕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생님과 어른들을 존경하는 훌륭하고 참된 사람이 돼야 합니다. 덕돌 동무는 이전의 잘못을 고치고 고상한 품성을 키우겠다고 나한테 결심을 표시했습니다. 덕돌 동무는 총명하고 학습도 잘할 뿐만 아니라 품성도 좋습니다. 덕돌은 초중 1학년 때 겨울이면 날마다 학교에 일찍이 나와서 자기 학급 교실의 난로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무실의 난로도 피워 사생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덕돌은 활동소에서도 단장을 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3년 동안 돼지 똥을 해마다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대 온상에 내게 했고 날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패용천산을 톺아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학교에서 제1패로 로두구 만인갱 앞에서 선서하고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동무입니다. 덕돌은 이후에 꼭 큰 일을 할 훌륭한 학생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엄숙히 말했다.
“이제부터 학습위원을 민주로 선거하겠습니다. 동무들은 필기장을 찢어내 자기가 동의되는 학습위원의 이름을 써서 내십시오.”
애들은 “와!” 하고 소리치며 이구동성으로 “덕돌이 좋다.” “학습이야 누가 덕돌을 따르니?” 하고 말하며 손으로 종이를 가리고 이름을 써 바쳤다.
해월이랑 은숙이랑 경산 선생을 도와 애들이 투표 결과를 흑판에 바를 정(正)자로 한 획 한 획 썼다.
결과는 불 보듯이 뻔했다.
성욱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 하나 밖에 없었지만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무려 열 개나 줄줄이 달려 있었다.
성욱은 콩알 눈으로 옆에 앉은 덕돌을 힐끔 가로보더니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덕돌은 성욱을 측은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내 생각에는 성욱이 계속 학습위원을 하고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학습위원을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애들은 “우-” 하고 소리치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안 됩니다. 덕돌이 해야 합니다.”라고 소리치며 책상을 마구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경산 선생은 웃으며 덕돌을 내려다보았다.
“덕돌을 정식으로 학습위원으로 임명합니다. 학습위원 덕돌은 우리 학급 학생들을 이끌어 학습성적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덕돌은 일어나서 전체 사생들 앞에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는 선생님과 동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보겠습니다.‘
그 “취임연설”에 애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튿날 덕돌은 전반 학급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기 위한 처음 조치로 자리정돈을 할 자기 생각을 반장 장영웅과 홍위병 조장 최설복과 말하고 구체적으로 토론해 자리정돈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한 횡대 줄에 앉은 대여섯 동무들 중간에 공부를 괜찮게 하는 학생을 하나씩 앉히는 혁신적조치가 들어 있었다.
덕돌은 그 자리정돈계획을 손수 작성해 교무실에 가서 경산 선생에게 바쳤다.
경산 선생은 자리정돈계획을 받아 보고 덕돌이 기특해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계획을 다 세웠단 말이냐?”
(열대여섯 살 밖에 안 되는 초중 2학년 학생이 이런 엉뚱한 계획을 세워? 정말 큰일을 할 애들은 애 때부터 다른 거야.)
이튿날에 경산 선생은 덕돌의 방안대로 자리정돈을 했다. 그리하여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쳤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던 애들을 중간에 앉은 덕돌을 비롯한 “작은 선생”들이 자습할 때 보충으로 배워 주었기에 제때에 알고 넘어 갈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성택은 힘도 세고 축구도 잘 찼지만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잘 가르쳤는데도 따라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작은 선생” 덕돌이 옆에 앉아 제 시간에 보충해 배워 준 데다가 하학한 후에 교실에 남거나 일요일에 교실에 나와 배워줬기에 꽤나 공부를 잘했다. 그 후부터 성택은 젖은 누룽지랑 감자밥이랑 밥 곽에 싸다 덕돌에게 주면서 친해졌다.
성택은 정말 속으로 덕돌을 따랐다.
그는 항상 “덕돌아, 누가 너를 건드리면 내 가만 놔두지 않겠다. 나를 믿어라.”라고 했다.
허나 성욱은 덕돌의 위신이 올라가자 그의 옆에 앉기도 싫어했다. 지어 그는 경산 선생을 찾아가 다른 자리에 앉혀달라고 졸라 앞으로 세 번째 줄에 상선이랑 같이 앉았다. 그들 셋은 누가 가르쳐주는 “작은 선생”이 없다나니 다 똑같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토대 위에서 덕돌은 집에 돌아간 후 학습 열성을 불러일으키려고 마을 별로 학습소조를 내오고 조장들이 학습이 차한 애들의 공부를 책임지고 보습시키게 했다. 이런 조치는 정말 전반 학급 학생들의 학습 성적을 제고시키는데 유조했다.
허나 마을에서 덕돌과 한 소조에 든 성욱은 상선이랑 종호랑 애들을 동원해 학습소조 공부에 참가하지 말게 맛있는 감자누룽지랑 삶은 옥수수 이삭이랑 쥐어 주면서 꼬드겼다.
그 바람에 덕돌은 슬그머니 애를 먹었다.
마을의 활동소에서도 성욱은 소장인 덕돌을 외목에 내려고 종호랑 상선이랑 짜고 들어 걸으라면 서고 서라면 걸으면서 처처에서 청개구리들처럼 애를 먹였다.
어느 날 경산 선생은 덕돌을 교무실로 불러갔다.
난로 옆에 방순희가 경산 선생과 나란히 앉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덕돌아, 여기 와 앉아라.”
경산 선생은 수학시험지를 덕돌과 순희에게 주면서 “수학선생님은 일이 있어 외출하면서 학습위원들인 너희들한테 중요한 임무를 주더라. 이 시험지를 너희들 둘이 매겨라.”라고 말했다.
사실 경산 선생은 덕돌이 여학생들을 배워주지 못하는 형편에 따라 순희에게 부학습위원을 맡겨 학습이 차한 여학생들의 공부를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뒤이어 그는 시험지를 놓고 매개 문제 모범답안을 알려주고 매기는 표준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그날 저녁에 덕돌은 경산 선생이 말한 표준대로 시험지 점수를 매기었다.
일광의 시험지를 매기다가 응용문제 아래에 답을 쓰지 않은 것을 몇 점을 떼 내야 하겠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었다.
한참 모지름을 쓰다가 그는 경산 선생의 집에 가서 물어보려고 신을 신고 떠났다.
그런데 그가 경산 선생 네 집으로 갔을 때 전등불이 이미 꺼져 있었다.
“이걸 어쩐다? 내일 시험지를 바치라고 했는데.”
생각하다 못해 덕돌은 “순희한테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순희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날따라 전기가 오지 않아 온 마을에 등불만 깜빡이었다.
허나 먼발치에서 등불이 깜빡이는 순희 네 집을 바라보며 걷다가 주춤 멈춰 섰다.
(내 순희 네 집으로 갔다고 혹시 성욱이랑 놀려주지 않을까?)
그는 늙은 비술나무 아래 성욱이 네 집 쪽을 돌아보았다. 성욱이랑 종호랑 사랑채에서 한창 노느라고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에라, 시험지 때문에 가지. 뭐라니?)
덕돌은 시험지를 다 매기려는 일념으로 순희 네 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도에서 이사해온 순희 네는 3대가 한 집에서 사는 집이었다. 순희는 윗방에서 살고 오빠네 일가가 정지와 고방에서 살았다.
덕돌은 등불이 깜빡이는 윗방에 순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쪽에 가서 “순희.” 하고 조용히 불렀다.
“누구야?”
“덕돌이야.”
“밤에 어째?”
“시험지를 매기다가 모를 게 있어 그래.”
집안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순희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정지에서 순희보다 두살 이상인 여조카 월순이 두덜거렸다.
“밤에 찾아와 뭘 해?”
순희는 방에 들어오는 덕돌에게 자기 옆자리를 내주면서 정지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삐칠 게 뭐야? 남이 시험지 매기는 거 땜에 찾아왔는데.”
“낮에 올게지. 밤에 오니 말하지.”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순희 엄마가 월순을 나무랐다.
“월순이 그만하지 못하겠니? 남이 공부 땜에 그런다는데.”
덕돌은 영상한대로 모를 걸 물어보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순희는 “덕돌아, 온바하고는 몇 가지 물어보자.”라고 했다.
“뭘?”
덕돌은 멈칫 멈춰 선 채 등불아래 쳐다보는 순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일광이랑 성적이 어떻데?”
“수학성적이 괜찮다.”
“그 애네 외삼촌이 우리 수학선생 이기춘 선생이란다.”
“오, 수학을 잘하는 내력이겠다.”
“장영웅의 성적은 어떠냐?”
“98점이다.” “어째? 어디 틀렸더니?”
“소수점을 하나 찍지 않아 한 문제 틀렸더라.”
“설복은 몇 점이냐?”
“78점 밖에 맞지 못했다.”
“홍위병 조장이란 게 뭐야?”
“성욱은?”
“74점.”
“이전 학습위원이라는 게 뭐야? 이전에 수학콩쿠르에서도 네 껄 보고 베껴서 100점을 맞았다더구나.”
“…”
“베껴 쓴 애나 보인 애나 다 한가지야.”
“허허허.” 덕돌도 여자애들의 성적을 물었다.
“은숙이랑 성적이 어떻데?”
“잘했다. 95점이더라.”
“월금이는?”
“92점이다.”
“잘 했구나.”
이때 정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듣던 월선이가 소리 질렀다.
“너네 계속이냐? 염치 있니? 남이 자야겠는데 밤중까지 뭐야?”
그러자 아재노라고 순희가 또 정지에 대고 욕했다.
“계속 삐치겠니?”
순희가 손을 들어 정지를 손가락질 하다가 그만 등잔불을 툭 쳐서 꺼버렸다.
순희의 아버지가 성냥을 그어대자 순희 엄마와 순희가 등잔불을 다시 밝혔다. 허나 덕돌은 더 있을 재미없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말썽거리로 될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월순은 활동 참 부 참장이었는데 활동 때마다 덕돌과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했다. 어떻게 말하면 두살 지하인 덕돌이 지휘를 받는다는 것도 속에 내려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책없는 월순은 동네에 나가 덕돌이 순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 날 일을 가지고 소문을 펴놓았다.
그 바람에 성욱이랑 종호랑 상선이랑 월순의 말을 보태 덕돌이 순희에게 연애를 걸려고 밤에 집에까지 찾아갔고 덕돌이 “이담 커서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다고까지 학교에서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덕돌보다 한두 살씩 이상인 설복이랑 일광이랑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덕돌을 질투하던 터라 놀려대기 시작했다.
“못된 송아지 뿔부터 난다더니?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 연애한다면서?”
그러자 덕돌과 순희가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고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월순은 지어 덕돌이네 집에까지 찾아와 한창 부모형제와 함께 밥을 먹는 덕돌을 찾아와 한바탕 행악질을 했다.
“덕돌아, 조꼬만게. 이 담에 우리 순희를 각시로 데려다 살겠다고 했니?”
“난 그런 적이 없다. 너도 그날 밤에 정지에서 들었겠지만 나와 순희는 시험지와 공부에 관계되는 말만 했지 않고 뭐니?”
덕돌의 말에 월순은 성을 발칵 냈다.
“네 아직도 승인하지 않겠니? 네 친구 철주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데도.”
덕돌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네가 그날 밤 일을 소문냈기에 말이 보태져서 그렇게 됐다.”
“조꼬만 새끼, 니 정말 못된 놈 새끼구나.”
그 말에 상순은 밥술을 놓고 월순을 손가락질 하며 훈계했다.
“들어보니 네가 불을 저질러놓고 오히려 누구한테 와서 행악질이냐? 보기도 싫다. 썩 나가지 못하겠니?”
 “어디 두고 보자!”
월순은 덕돌에게 주먹을 쳐들어 보이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한편 순희는 집에서 월선을 욕했다.
“남의 일에 삐치겠니? 네 소문 놓는 바람에 내하고 덕돌이 머리를 들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됐다. 네 책임져라.”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퍼 담을 수는 없게 돼버렸다.
      나중에 말이 눈덩이처럼 굴면서 점점 더 커져 덕돌과 순희가 밤중에 집에서 연애하다가 월순에게 들키었다고 소문이 퍼졌다.
그 말이 끝내는 경산 선생의 귀에 들어갔다. 경산선생은 순희와 덕돌을 또 교무실에 조용히 불러 전후시말을 죽 들은 후 이후에 주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경산선생이 학급에 덕돌과 순희는 근본 연애한 적이 없었다고 명확히 지적하고 나서 엄포까지 놓았다.
“이후에 누구든 다시 덕돌과 순희를 놀려주면 책임을 추궁할줄 아십시오." 
그제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콩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덕돌의 어머니 명옥은 황급히 순희 엄마를 찾아가 빌었다.
“어쩌겠소? 이집 순희 애들에게 몰리는데 미안하오. 우리 덕돌이 잘못했소.”
그런데 순희의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해서 명옥도 놀랐다.
“덕돌의 잘 못이 없소. 장차 애들의 일을 어떻게 아오? 황차 덕돌이 그날 밤에 순희를 찾아와 잘 못한 게 없소. 나와 순희 아버지도 이 칸에서 덕돌이 하고 순희 말하는 거 다 보았소. 걔들 연애한 일이 없소. 괜히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질투 나서 떠드는 거 가지고 근심하지 말고 가오.”
그 바람에 덕돌과 순희의 관계도 어색하게 됐다. 그들은 교실에서 딱 마주쳐도 머리를 숙인 채 서로 못 본체 하면서 지나쳐버렸다. 더욱이 애들 앞에서는 서로 마주 보고 말하기는커녕 마주 걷기조차 하지 못했다.
덕돌은 그 번 일을 생각만 해도 등 곬에 식은땀이 돋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한숨을 후 내쉬며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3. 묘지부근 혈안


      토성 안팎의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들이 무더운 햇볕에 축 늘어져 이파리마저 달팽이처럼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토성 안의 늙은 비술나무는 벽돌 집 짓기에 들끓고 있는 사원들을 굽어보며 방불히 희죽이 웃음 짓는 것 같았다. 비술나무는 백여 년 살면서 이 마당에 빨간 벽돌집이 들어앉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상순은 조개덕 1대 사원들을 데리고 널찍한 토성 안 마당에 와서 벽돌로 대대 사무실과 위생소, 공장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장차 대대 민영기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내다보았다.
흥수와 종연은 새 벽돌사무실에 들 생각을 하자 어깨가 으쓱해 토성 안에 와 맴 돌아쳤다. 그들은 이번만은 상순이 “계급투쟁을 틀어쥐지” 않는다고 헐뜯어대지 않았다.
박영발은 윤희와 함께 위생소에서 침대를 들어 내오면서 빈정거렸다.
“침대 다 마사져 이젠 못 쓰겠소. 새 걸로 바꿀까?”
윤희는 영발에게 눈을 곱게 흘기면서 해쭉거렸다.
“누가 듣겠어요.”
“들으면 뭐라오? 체면을 차려? 침대 밑에 사내를 두고 다른 사내한테 다리를 벌려대는 주제에.”
윤희는 침대를 활 놓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침대가 각이 나버렸다.
상순은 삽으로 건물 기초를 파다가 그들 둘을 흘금 훔쳐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원, 참, 꼴 보기도 더러워서. 흥!”
충국은 괭이로 기초를 꽝꽝 파면서 두덜거렸다.
“이 토성안집은 우리 집에서 인섭 형님에게 져준 집인데 왜 허물어? 아무 때건 주인이 오면 어디 보자.”
상순은 저쪽에 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뭐라고 떠들어대는 종연과 흥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말조심하라고. 이 집의 주인은 바로 인민공사 생산대대야. 아무 소리나 했다간 고깔모자를 씌워서 투쟁하지 않는가 봐라.”
충국은 그래도 픽픽거렸다.
“한뉘 혁명하더니 꼴좋다. 대대 서기도 하지 못하고 우리 같은 지주나 거느린 대장이나 하면서. 그래, 하긴 조선에서는 대대장보다 대장이 더 높고 세지. 허허허.”
충국이 비웃는 소리에 상순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내 혁명을 한게 너 국민당처럼 벼슬이나 하자는게 아니야. 난 이 다음 북망산에 가도 조상들한테 할 말이 있어. "
그렇다. 상순은 저 천지꽃산 비탈밭이랑 소서구 상우지랑 장개골안과 계수동 숱한 밭이랑 일궜고 강물을 막아 멍지뫼산 앞에 산종논밭을 풀었다. 패랑산과 칼산에 과수원을 만들었고 조개덕에 벽돌공장을 세웠다. 이제 대대 사무실을 짓고 사원들의 집을 하나하나 지을 예산이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너 국민당원과 달라."
그렇다. 상순과 같은 공산당원은 자기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고생은 앞장서 하고 향수 앞에서는 뒤로 물러선다.
“그만하오. 내게 뭐 당과 학습을 시키는 판이오?”
장충국은 괭이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더니 상순을 손가락질하면서 신경질을 썼다.
“아무리 교육해도 나는 죽어도 지주 아들귀신이고 국민당 잔여세력 혼이니까. 헤이.”
“잔말 말고 기초나 잘 파라. 난 논물을 보러 가야 해.”
상순은 삽을 기초구덩이에 세워놓고 훌쩍 뛰어나갔다.
“내 무슨 지주 대장이오? 모르오. 저 종연이랑과 말하오.”
충국은 두덜거리면서 괭이질을 콱콱 했다.
종연과 흥수는 온 대대 이른바 "문제거리" 로간부들과 지주들을 몽땅 조개덕에 처박아 상순한테 떠맡겼다. 그리하여 충국도 소서구 토성 안에서 조개덕으로 이사해 왔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 곬에 모인다고 진짜 이 시대 "문제거리분자들"이 몽땅 조개덕 1대에 모인 셈이었다. 흥수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 날마다 공지에 와서 그들을 감독했다.
상순이 논으로 나가려고 하자 종연이 막아섰다.
“김 서기, 토론할 일이 있습니다.”
“김 서기? 난 서기 아니오. 생산대 대장이지.”
종연은 상순의 볼 부은 소리에 희죽이 웃으며 다가섰다.
“김 서기, 난 김 서기를 진짜 일을 하는 농촌 노서기라고 마음속으로 존중합니다. 흥수처럼 입방아만 찧는 간부는 딱 질색입니다.”
상순은 담배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아 물더니 달라진 종연의 태도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오. 난 논물을 보러 가야겠소.”
“김 대장이 딱 논물을 봐야 합니까?”
상순은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나직이 “한족사원들은 아직 벼농사는 둘째고 논물도 잘 보지 못하네. 어서 말하오. 무슨 일이오?”하고 물었다.
종연은 다가오는 흥수를 건너다보며 입을 무겁게 뗐다.
“저 박영발 서기는 정치입장이 견정하고 개조 표현이 좋다고 봅니다. 장차 제일 먼저 시내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발을?”
상순은 저쪽에서 윤희와 희희닥거리는 영발을 건너다보다가 상을 찡그렸다.
그는 한창 무거운 기초 돌을 쇠줄그물에 담아 멜대로 메 나르는 이계삼과 허영주, 허백호를 가라키면서 언성을 높였다.
“어째 저 노 간부들을 시내 당정 부문에 보내지 않고 박영발을 보내자고 그러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작작 하오.”
“아이쿠!”
이때 저쪽에서 허백호가 물앉아 손을 쥐고 죽는 상을 했다.
“어디 상하지 않았습니까?”
상순은 뛰어가며 물었다.
이계삼과 허영주도 멜대로 돌을 메 나르다가 내려놓고 허백호한테 다가갔다. 상순이가 보니 허백호가 상을 찡그리며 잡은 왼손에서 뻘건 선지피가 흐르고 있었다.
함지만큼 큰 돌을 움직이다가 그만 손이 찌워 터졌던 것이다.
상순은 무릎을 꺾고 앉더니 허백호의 피 흐르는 손가락에 묻은 돌먼지를 후후 불고 손으로 닦아준 후 자기 흰 바지가랭이를 찢어 싸매주려다가 말았다.
“허 서기, 나에게 돈도 먹지 않는 조상들이 물려준 밀 방약이 있습니다. 써보겠습니까? 꼭 낫습니다.”
“뭐기에?”
“저쪽으로 가서 이 터진 손가락에 소변을 보십시오. 즉석에서 지혈이 되고 어혈이 풀립니다. 또 소염도 되고 진통도 됩니다.”
“알았소. 또 오줌약이구먼.”
이렇게 돼 허백호는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토성 밑으로 가서 왼 손의 상처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그는 손을 들어보더니 “허, 정말 그 밀 방약이 좋긴 좋구먼. 피가 뚝 멎었구먼.”라고 하더니 피와 오줌이 게발린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상순은 종연에게 다가갔다.
“박영발이 위생소에서 해놓은 일이 뭣이오? 난 동의하지 않소. 저렇게 궂은 일, 무거운 일을 다 하는 허백호 서기랑 이계삼 서기랑 허영주 현장이랑 시내에 보낼 걸 제기하오.”라고 했다.
“김 서기, 이건 대대혁명위원회 결정입니다. 박영발 서기를 시내로 보내겠습니다.”
종연이 고집을 쓰자 상순은 삽을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밭으로 떠나가 버렸다.
저쪽에서 상순에게 하는 종연의 말을 듣고 박영발은 득의양양해 윤희의 어깨까지 툭툭 치며 히히거렸다.
종연은 자기 안속이 따로 있었다.
(박영발을 시내로 돌려보내고 윤희를 흥수에게 넘겨주면 두 사람에게 다 위신을 얻을 수 있어. 이거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틀어 불을 때는 격이 아니겠는가? 두 입당소개인에게 충성을 보여야 입당도 더 빨리 될 것이 아니겠는가? 또 상순과 토론하는 척 해야 상순의 미움을 덜 보지 않겠는가. 영발을 쫓아보내고 송선을 위생소에 넣고 윤희 대신 데리고 놀아야지.)
종연은 전날 밤에 위생소 주사실에 뛰어들었다가 흥수와 딱 마주친 후 윤희에게서 떨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황차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이 윤희보다 얼마나 더 예쁜 무용수 송선이가 마을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송선은 요즘 종연의 관심을 받아 대대 맨발의사로 돼 날마다 대대 위생소에서 박영발과 윤희에게서 주사를 놓는 재간으로부터 청전기로 진맥하고 혈압을 재는 것까지 배우고 있었다.
대지를 무덥게 달구던 여름해가 서쪽 하늘의 구름들을 뻘겋게 지지며 불태우다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송선이 토성 안 위생소에서 나와 조개덕으로 돌아갈 때다.
종연은 대대 사무실 공지에서 송선이 나오기를 혈안이 돼 기다리다가 사위를 둘러보면서 스적스적 먼발치에서 송선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송선은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불길한 느낌을 받고 함흥 촌을 벗어나 함흥중학교 마당에 들어서자 선불 맞은 노루처럼 황급히 조개덕으로 반달음박질을 쳐갔다.
허나 부대에서 십여 킬로미터도 단숨에 뛰어가는 군사훈련을 거친 특종병출신의 종연을 어찌 떼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거리는 각일각 더 가까워졌다.
조개덕과 몇 백미터 떨어진 한족묘지꺼리에 이르렀을 때다.
종연은 송선을 뒤따라 잡자  나직이 소리쳤다.
"겁나 마오. 나요, 나.” 
송선은 황급히 돌아서면서 물었다.
“아니, 황주임이구먼. 무슨 일이 있습니까?”
종연은 달빛을 빌어 송선의 부풀어올랐다 내렸다하는 풍만한 가슴을 음충한 눈길로 게걸스레 쓸어보았다.
“몰라서 묻소? 내 아니면 대대 맨발의사와 선전대 대장을 할 수 있었소?”
“고마워요.”
“사람이 신세를 졌으면 갚을 줄 알아야지.”
종연은 손을 내밀어 송선의 어깨를 감싸안으려고 했다.
송선은 무용수의 특유한 날렵함으로 허리를 살짝 굽혀 탈면서 종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빠져나갔다.
“아니, 어째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겠소?”
“황주임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왜 이래요?”
달빛에 색마의 불길이 비치는 종연의 우멍눈이 무섭게 드러났다.
“난 선녀 같은 송선 동무에게 홀딱 반했단 말이오. 내 책임지고 농사일을 시키지 않고 위생소에 들여앉힐 테니까. 내 말을 고분고분 듣소.”
종연은 다시 송선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며 덮쳐들었다. 송선은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두 손을 들어 종연의 팔을 막았다.
딱!
어둠속 어디에선가 돌멩이가 날아왔다.
“앗!”
비명소리와 함께 종연이 머리를 싸쥐고 핑그르르 돌아서다가 쿵 쓰러졌다.
“어마나!” 
송선은 풀이 한 키씩이나 들어선 한족묘지를 둘러보았다.
“어쩌나!”
송선은 두 손으로 대가리를 싸아나고 땔땔 구으는 종연을 내리보다가 다리야 나를 살리라고 주먹을 쥐고 묘지꺼리 풀밭에서 뛰쳐나갔다. 그녀는 종주먹을 쥐고  선불 맞은 사슴처럼 조개덕 쪽으로 달아났다.
뒤에서 종연의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처절히 들리었다.
한참 후 풀숲 속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허리를 구부정하고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는 종연한테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그림자는 발길로 종연의 면상이며 배며 가슴이며 마구 꽝꽝 걷어찼다.
       “앗! 악, 아이고!”
      종연은  비명을 칠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는 발로 종연의 가슴이며 아랫배며 마구 차고 짓밟아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름도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참경을 보기 무시무시해 먹장구름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이튿날, 흥수가 우사 회의실 마당에서 사원대회를 연후 조개턱을 쳐들고 야단법석하며 고아 쳤다.
“여러분, 우리 마을에 큰 형사사건이 생겼습니다. 어떤 놈이 황주임을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대대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입니다. 계급의 적들은 혁명위원회 주임과 우리 공산당원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처처에서 복수의 칼을 시퍼렇게 갈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얻어맞았소?”
병진이 나서서 물었다.
“남의 말 다 듣고 떠드오.”
흥수는 건 가래를 떼더니 병진을 힐끔 곁눈질해보고 뒷말을 이었다.
“어제 오후까지 펀펀하던 황주임이 해진 뒤라고 생각되는데. 저기 함흥중학교 동남쪽 조개네 한족묘지꺼리에서 맞아 쓰러졌단 말이오.”
“와-”
“어째 하필 그런 으쓱한 데 가서 얻어맞았다오?”
병진이 제일 떠들어댔다.
이때 흥수가 뒤짐을 짚고 치보 주임 틀을 차리면서 사원들을 둘러보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제부터 대 별로 매개 사원들은 어제 저녁에 뭘 했는가를 교대하며 수상한 자가 있으면 적발하오.”
그 말에 제일 가슴 찔리는 데가 있는 사람은 송선이었다. 허나 그녀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었다.
흥수가 또 말했다.
“누구나 모두 어제 오후에 입었던 옷을 입고 다시 이 마당에 모이오.”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그리고 허백호를 찾아가 의논했다.
“혹시 충국이 어제 볼 부은 소리를 하더니 그 놈 새끼 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요?”
이계삼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어제 충국은 토성 안 집은 자기 아버지가 양형님인 김인섭에게 지어준 집이라면서 주인이 조선에 간 후 빈틈을 타서 허물면 되는가? 언제든지 주인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식으로 두덜거리더구먼요.”
“음-”
이계삼이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 서있던 허영주는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나 허백호는 “그 놈 새끼 얻어맞아도 싸오.”라고 하면서 시원해 했다.
사원들은 하나 둘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우사 마당에 돌아왔다.
과연 흥수의 그 수사방법이 괜찮았다. 그는 어제 저녁에 묘지꺼리에서 종연을 때려 피터지게 한 자의 팔소매나 바지에 꼭 종연의 피가 묻어있으리라고 믿었다.
한편 진수해 파출소 허영호 소장을 비롯한 민경들도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흥수와 함께 사원들의 옷을 일일이 세심히 검사했다. 특히 지주 아들 장충국과 지괴호 등의 옷을 꼼꼼히 검사했다. 허나 피 묻은 옷을 입은 지주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충국의 바지와 팔소매를 서너 번이나 번지면서 검사했지만 혈흔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확실히 이 옷을 입었어?”
그러자 장충국은 상순을 흘깃 곁눈질하며 날카로운 흥수의 우멍한 눈을 피했다.
"어째 나를 의심하오? 어제 이 옷을 입었소. 저 상순대장과 물어보오.” 
상순이 충국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흥수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흥수는 도리머리를 흔들더니 민경들과 함께 이젠 우파분자 정규상, 허백호, 일제통역 리달송, 하향간부 이계삼과 허영주 차례로 검사하기 시작했다.
흥수가 순식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민경 옆에 서 있던 상순의 바지를 가만히 보더니 외까풀 눈을 데굴거리며 고함쳤다.
“저 피!”
민경들과 숱한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상순의 바지에 집중됐다.
상순은 “허허허.” 하고 웃더니
     “어째 나를 의심하오?”라고 하며 찢어지고 피가 발린 바지와 흥수를 번갈아보았다.
저쪽에 갔던 허영호와 허백호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 피!”
이번에 흥수는 허백호의 팔소매와 바지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허영호와 민경들의 눈이 허백호와 상순에게 집중됐다.
상순은 허영호를 보고 어제 허백호 서기 상처를 처치해준 일을 얘기했다. 
“허 소장, 사실 이건 어제 허 서기가 돌에 손이 찌워 흐른 피오!”
허영호 소장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오류분자들한테로 다가갔다.
흥수는 상순과 허백호 서기를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허영호 소장은 사촌형 허백호를 놔두고 충국 같은 악질지주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이 어제 여기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 와서 일하던 옷을 아무리 검사해도 피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의심에 찬 시선은 다시 상순과 허백호 서기한테 집중됐다.
흥수는 외까풀 눈으로 쏘아보며 상순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피는 증겁네.  당신들 종연 주임을 상해한 혐의를 벗지 못 하오. 로실하게 말하라니께. 반란 파 두목 종연이가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올라간 데 앙심을 먹었지?”
상순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 사람이 생사람을 잡는다. 난 확실히 종연이 노간부들을 못 살게 구는 게 눈꼴사납소. 허나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소. 모 주석도 ‘말로 싸워야지. 주먹다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뻔뻔스럽긴! 아직도 떼를 쓰긴!”
흥수는 우먹한 외까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상순한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만 두오!”
그때 허백호 서기가 앞에 썩 나섰다.
“김 대장은 아무런 죄도 없소. 내 종연을 때려눕혔다. 통쾌하게 돌로 대가릴 까고 발로 밟아놓았다. 봐라! 이 팔소매와 바지의 피를!”
모두들 시선이 허백호에게 집중됐다.
“아니, 허 서기가 저럴 수가?”
“글쎄 말이오. 사람은 겉을 봐서 모른다니까.”
허영호 소장은 실망어린 눈길로 사촌형을 바라보았다.
상순은 허백호 서기한테 다가가며 두 손을 펼쳐보였다.
“아니오. 허 서기는 절대 그럴 수 없소.”
허나 허백호는 자기 소행을 시인했다.
“김 대장, 확실히 내가 돌로 까부셨소. 난 이미 묘지꺼리 백양나무에 목을 맸던 사람이오. 어찌 똥이나 퍼서 밭에 내며 노동개조를 하면서 살겠소. 죽기만 못하오. 난 죽기 전에 종연과 흥수를 죽여 버리고 싶었소. 종연이가 묘지꺼리로 가자 뒤따라가 돌멩이를 뿌려 대가리를 깠소…”
뒤이어 사건 경과를 죽 얘기했다.
“와-”
좌중에 숱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공사당위 서기 허백호, 그것도 파출소 소장의 사촌형이 대대 혁명위원회 주임을 해쳤다니?)
흥수는 외까풀눈을 가슴츠레 뜨고 허영호 소장의 눈치를 흘깃 곁눈질하며 허백호 앞에 다가갔다.
그는 어색한 함경도 말투로 물었다.
“난 허 서기가 한 짓이라고 보지 않소. 그래, 종연이 어쨌다고 그렇게 돌로 쳤단 말이오?”
허백호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삼아 속에 들어앉은 앙금을 쏟아냈다.
“종연은 노 간부들을 반란해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을 한 새끼요. 우리 노 간부들을 똥이나 쳐서 밭에 내게 하면서 노동개조를 악착스레 시킨 놈이오. 언제부터 내 그 놈 새끼를 때려죽이자고 별렀소.”
흥수는 반대파가 하나 줄어들 거 같아 속 시원했지만 파출소 소장의 형인지라 다른 때보다는 살살 다루려고 억지로 애썼다.
“한가지 더 묻기요. 어떻게 종연이 조개덕 뒤에 있는 한족묘지꺼리로 갈 거 알고 따라가 해쳤소?”
허백호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말했다.
“어제 대대 사무실을 짓는 공지에서 보니까. 종연 놈 새끼 뒤지개를 짚고 여기 왔다 갔다 하더구먼. 해질녘에 먼 발치에서 종연의 뒤를 밟아 묘지까지 쫓아갔댔어.”
송선은 허백호의 눈길이 자기에게 오자 종연이 자기 뒤를 쫓아와 덮친 사실을 말할까봐 머리를 폭 숙였다. 허나 다행히 허백호는 송선을 보고 희죽이 웃을 뿐 송선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뭣들 해! 죄인을 파출소로 압송하지 않고!”
허영호 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민경들은 허 소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허백호 서기의 손목에 쇠고랑을 철컥 채워 찌프에 등을 떠밀었다.
상순이가 보니 찌프에 압송돼가면서도 허백호는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머리를 쳐들고 격분해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고함쳤다.
"종연 새끼 숨통을 끊어주지 못한 게 한이다!” 
허영호가 찌프에 오르려고 하자 상순이 팔소매를 잡아 끌어당겼다.
“좀 보기요.”
허영호 소장은 상순의 엄숙한 세 귀 눈을 보며 차문 고리를 스르르 놓더니 운전수에게  먼저 가라고 당부했다.
부르릉 부르릉.
찌프가 먼지를 새뽀얗게 일구며 마을을 벗어났다.
허영호 소장은 상순을 따라 토성안 늙은 비술나무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상순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허소장, 그래 종연인 어떤 정황이오?”
허영호 소장은 옛 상전을 미더운 눈매로 보면서 대답했다.
“이마가 돌에 맞아 터졌고 갈비뼈도 밟혀 부려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며칠 치료하면 괜찮다고 합디다.”
상순은 “다행이군.”라고 하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허백호 서기가 그런 무모한 일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소. 충국이랑 지주들을 다시 잘 조사하는게 어떻소?”
허영호 소장의 어두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무슨 단서라도 쥔 게 있습니까? 김국장님?” 
“또, 또. 국장은 무슨 국장이야? 김 대장이라고 편히 부르게나.”
상순은 허영호 소장의 입버릇을 핀잔주고 나서 뒤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충국이랑 지주들이 수상하단 말이오. 어제 충국은 한참이나 우리 공산당과 대대 간부들을 헐뜯었소.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구먼. 우린 계급의 적들이 날마다 우리 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칼을 시퍼렇게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해가 서산에서 뜨지 않겠소?”
이때 언제 다가왔는지 흥수가 뒤에서 오며 끼어들었다.
“김 대장이 어쩌다가 계급투쟁을 다 말하오? 항상 생산만 틀어쥐더니. 흥. 우리 대대에는 아직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단 말인기오.”
상순은 세 귀 눈으로 흥수의 외까풀 눈을 엄히 쏘아보았다.
“내 언제 계급투쟁을 잊은 적이 있소? 모 주석께서는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라.’고 지시하셨지 언제 혁명만 틀어쥐고 생산을 틀어쥐지 말라고 했소? 혁명을 제대로 인식하란 말이오. 입방아만 찧으면서 계급투쟁만 하는게 혁명이 아니오. 생산도 새 마을 건설도 모두 혁명이란 말이오.”
리론 수준이 차한 흥수는 기암이나 썼지 상순의 전면적인 이론에 답변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외까풀 눈을 부라리며 끙끙거릴 뿐이었다.
“잘 왔소. 이 치보, 우리 허 소장이랑 함께  지주들의 집을 한번 돌아가면서 들추는 게 어떻소?”
상순이 어색한 장면을 깨면서 건의했다.
“좋다니께.”
리흥수는 상순과 허영호 소장과 함께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몽땅 수색할 행동방안을 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패용천산과 태평 벌에 두툼한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 드리웠다. 마을은 자정이 가까워오자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도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어둠 속에 짓눌렸다.
허영호 소장과 이흥수 치보 주임, 상순은 꼴꼴한 세 개 소조 민병들을 거느리고 조개덕에 집중된 전 대대 지주와 부농들의 집을 동시에 수색했다.
상순은 민병들을 데리고 둔덕 아래 장충국이네 집을 들이닥쳐 수색했다. 장학산과 아내는 이미 죽고 충국은  홀로 대충 살고 있었다.
“문 열엇!”
“누구요?”
“민병이다!”
안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충국이 두덜거리며 전등불이 켜졌다. 드디어 문이 삐꺽 열렸다.
불시에 뛰어든 민병들은 충국을 한쪽에 밀어버리고 집 구석구석을 뒤졌다.
민병들은 궤짝이며 쌀독이며 지어 장독까지 뒤져도 아무것도 뒤져 내지 못했다. 희미한 전등불아래 충국은 민병들을 쓸어보다가 상순을 흘겨보며 두덜거렸다.
“우리 집에 뭐가 있다고 그래? 밤중에 자지 못하게.”
그때 상순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북쪽구들에 뛰어올라가 이불을 쥐어 훌 들었다. 요대기 밑으로 시퍼런 칼끝이 삐죽이 드러났다.
“이게 뭐냐?!”
상순은 요대기를 훌 들었다. 그 밑에 시퍼런 검과 비수가 드러났다.
상순은 전등불빛에 번쩍이는 시퍼런 검과 비수를 쥐어 충국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이놈, 이게 뭐냐? 삼도만 토비질을 할 땐 이불 밑에 권총을 숨기더니 이번엔 시퍼런 칼을 숨겼구나. 우리 공산당과 정부를 보복하려고 시퍼런 칼을 갈고 있었구나.”
상순은 비수를 충국의 목에 바투 들이댔다.
“탄백해. 시퍼런 검과 비수를 갖춰두고 보복하려고 했지? 네놈이 황 주임을 돌로 깠지? 로실히 탄백해라!”
“형님! 아니, 김 대장!”
충국은 머리를 번쩍 쳐들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왜 나를 억울하게 구오? 난 어제 저녁에 근본 그리로 간적이 없었소.”
“이 놈아, 황주임 머리를 깐 돌멩이엔 지문이 남아 있다! 로실히 탄백하지 못할까?! 위국은 어디로 갔어?!”
“야, 억울하다! 누가 한 짓을 내게 들씌우는가?!”
상순은 “뭘 하는가? 이 놈을 끌어가라!” 하고 명령했다.
민병들은 장충국을 바 줄로 꿍꿍 뒤 결박 지어 함흥 대대 우사에 있는 회의실로 끌어갔다.
회의실에는 다른 소조의 민병들이 속속 돌아왔다. 허영호 소장이 거느린 민병소조에서는 한국 특무 용천의 아들 김경주의 집을 수색했다.
“김경주와 그 놈의 새끼 아들애 토함산이 보이지 않소.”
그 말에 충국은 피씩 웃었다.
“어디로 갔어? 말해!”
허영호 소장이 따지자 충국은 “그래, 미련이도 없습디까? 토함산이 정말 없습디까?” 하고 물었다.
“미련은 있더라.”
충국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애를 데리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놈, 시치미를 딸 작정이냐?”
상순은 계급투쟁의 안광으로 위국과 경주가 잃어진 일을 한데 연계시켜 경각성을 높이고 있었다.
“난 모르오. 알면 허 소장에게 미련이 있던가고 물어보았겠소?”
흥수가 이끈 민병소조도 회의실에 돌아왔다.
“그 조덕림이랑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아무것도 들춰내지 못했소.”
허영호 소장은 상순과 흥수와 금후 계급투쟁에 대해 의논한 후 찌프를 타고 파출소로 돌아갔다.
민병들은 회의실에 장충국을 가둬놓고 윤번으로 보초를 섰다.
이튿날 저녁부터 장충국과 조덕림, 지괴호 등에게 고깔모자를 씌워 성세 호대한 투쟁대회를 열었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상순이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휘두르며 구호를 목청껏 불렀다.
사원들은 상순을 따라 구호를 목이 터지게 불렀다.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반혁명분자, 지주와 부농, 일제 주구들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커다란 쇠 물통에 충국을 비롯한 지주들을 높이 올려 세워 놓고 두 손을 추켜들게 하고 몇 시간 동안 연속 투쟁했다.
허나 지주들은 손을 쳐든 채 한사코 “종연을 돌멩이로 깐 일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충국은 꾀 망둥이어서 두 손을 쳐들고 오래 서 있기 힘드니 한 미터 높이도 더 되는 쇠 물통 위에서 거꾸로 떨어지군 했다. 민병들이 다시 쇠물통을 세워놓고 그를 들어 올려놓는 사이라도 팔을 쉬우려는 수작이었다. 홍위병완장을 낀 민병들에게 얻어맞아도 한 10분 서 있고는 또 쇠물통 위에서 굴러 떨어지군 했다.
밤이 깊어도 투쟁대회는 백열화돼갔다.
뭇별도 깜박이며 우사 회의실을 내려다보고 휘여든 반달도 겁을 집어 먹은듯이 바르르 떨다가 황급히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4.경쟁


    온 하루 구름이 뒤덮여 흐리터분하던 하늘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더니 해가 어슬어슬 져가고 있었다.
허나 덕돌은 함흥중학교 마당에 홀로 가서 남몰래 철봉대에 매달려 턱 걸기도 해보고 닫다가도 멀리 뛰기도 연습했다.
그는 당장 고중에 올라가야 했다. 학습 성적은 근심도 하지 않았다. 허나 료녕성 철령사범학교에서 대학입시에서 백지 시험지를 낸 장철생이란 “백지영웅”이 나온 후부터 학교에서는 학습을 틀어쥐지 않고 빈농의 재교육을 받는답시고 농촌에 나가 농사 일만 했다. 학생들이 고중에 입학하려고 해도 시험성적을 우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사상품성을 우선 고려해 학생들이 먼저 추천하고 대대 혁명위원회에서 동의해야 하며 학교 빈농 대표 흥수와 학교 당지부와 혁명위원회에서 최후로 결정했다.
허나 성욱이랑 질투해서 어찌나 덕돌이 방순희와 연애를 걸었다고 헐뜯었던지 덕돌의 위신은 납작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덕돌이 공부를 잘한 것도 “독서벼슬론”에 물이 든,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지 못한 죄로 돼 덕돌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셈이 들지 못한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을 모르고 생각하면 할수록 성욱이 괘씸해났다.
(개새끼, 아무리 아버지가 친척이기에 용서하라고 했으나 정말 용서할 수 없어.)
이때 송철과 철주가 다가왔다.
“야, 덕돌아, 아무리 연습해도 쓸데 있니? 성욱이 새끼 너를 헐뜯어서 어떻게 고중으로 가니?”
“글쎄 말이다. 내 고중에 가지 못하는 날엔 성욱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
철주가 뒤에서 쐐기를 박았다.
“야, 우리 성욱을 언제 또 때려놓을까?”
허나 덕돌이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안 돼. 그랬다가 전번에도 아버지한테 혼났다. 괜히 친척집 9촌 조카를 때렸다가 말썽을 일으켜 고중에도 가지 못하겠다.”
철주는 철봉대에 디룽디룽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빈정거렸다.
“그 새끼, 연애하지 않은 거 연애했다고 했겠니?”  
“후-”
덕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돼. 내 한주먹이면 성욱이랑 콩가루로 만들 수 있다. 허나 고중에 간 다음에 보자.”
송철도 “옳다.” 라고 하며 쌍봉 대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고중에 올라간 담에 손을 써도 늦진 않아.”하고 동을 달았다.
덕돌은 마을로 돌아오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철주야, 너 어째 내 커서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다고 물어먹었니?”
바빠 맞은 철주는 “난 근본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누가 그러더니?” 하고 변명했다.
“성욱 새끼, 경산 선생과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아니? 우리 아버지는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면서 집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덕돌의 말에 송철은 손사래치면서 말렸다.
“됐다, 됐어. 우리끼리 싸우면 괜히 성욱이랑 좋아하겠다.”
덕돌도 비상시기에 친구끼리 싸우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상순은 덕돌이 공부는 잘했는데 순희와의 일로 고중에 올라가지 못할까봐 함흥중학교 장동원 서기 집을 찾아갔다.
장동원 서기는 원래 진수해중학교 화학교원이었다. 그는 당시 쏘련과의 전쟁과 재해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라는 최고지시에 따라 화학품으로 수류탄을 만들다가 그만 화학품폭파사고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당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데서 그는 화선입당했고 함흥중학교 당지부 서기로 내려오게 됐다.
상순이 찾아가자 장동원은 반갑게 맞이해 위방에 모셨다.
“춘자 아버지 어떻게 돼 왔습니까?”
상순은 자리를 정하고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덕돌을 고중에 붙여주십시오. 부탁드립시다.”
“예. 알았습니다. 덕돌은 총명한 아이어서 장차 꼭 큰일을 할 학생입니다. 지금 시대를 잘 못 만나 고생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덕돌 같은 애들을 무슨 류소기 ‘독서벼슬론’ 나쁜 사상에 물젖었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못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덕돌이 소롱소롱 해 성욱이랑 싸우고 여자애들과도 말썽을 일으킨 거 같은데 많이 교육해주십시오.”
상순이 머리를 숙이며 하는 말에 장동원은 미안해 솔직히 말했다.
“시대가 발전하자면 장차 덕돌이 같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 의거해야 합니다. 농사일을 잘하고 힘이나 세고 일이나 잘하고 남을 헐뜯는 애들에게 의거하면 맨 날 계급투쟁만 해야 합니다. 지식에 의거하지 않고 정치투쟁만 해서야 어찌 사회가 발전하겠습니까.”
장동원은 너무 장황히 말한 것 같아 화제를 되돌려왔다.
“덕돌은 온 학교에서도 손꼽히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체육까지 몽땅 우수를 맞은 학생은 그 학급에서 덕돌 밖에 없습니다. 그런 장래성이 있는 학생을 고중에 붙이지 않고서야 우리 함흥중학교가 장차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근심하지 말고 돌아가 덕돌을 보고 다신 말썽을 일으키지 말게 잘 타일러 주십시오.”
상순은 “예, 고맙습니다. 그럼 장 서기를 믿고 시름 놓고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일어나 떠나갔다.
정지에서 장동원의 아들 장영웅이 아버지와 덕돌의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을 다 들었던 것이다.
장동원은 영웅을 불러 타일렀다.
“넌 다른 애들이 덕돌을 놀려주면 말려라. 덕돌은 창창한 전도 있다. 네가 친구로 보낼만한 애다. 넌 덕돌에게 추천 투표를 하게 애들을 하나하나 동원해라.”
아버지 부탁을 들은 동원은 항상 광철을 데리고 덕돌의 집에 찾아와 함께 놀면서 애들을 하나하나 낚을 토론을 했다.
상순은 오촌 조카 철봉과 성환 그리고 담임 경산 선생까지 찾아다니면서 덕돌의 고중입학을 주문했다.
철봉은 덕돌을 참된 사람을 만들려고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조용히 타일렀다.
“얘, 넌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고 옛말도 잘하고 아동단 단장으로부터 활동소 소장까지 하면서 정치공작도 잘했지 않았고 뭐야? 우리 가문에서는 너에게 희망을 건다. 이제부터 쓸데없이 애들과 싸우며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나한테 다니면서 글짓기를 배워 장차 기자나 작가나 되면 어떠냐?”
덕돌은 6촌 형님의 진심어린 말이 마음에 와 닿아 “양, 형님의 말대로 하겠소.”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철봉은 궤짝에서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누렇게 색 바래진 책들을 꺼내 주면서 타일렀다.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이런 책이나 읽어라. 지금 시대에 지식이 쓸데없다고 하지만 장차 지식이 있는 애들이 사회에 쓰일 거야. 난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때를 놓쳐 대학공부를 하지 못했다. 네나 이 책을 읽고 장차 큰 문인이 돼라.”
“양.”
덕돌은 형님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 나고 희망으로 한 가슴이 벅차올랐다.
철봉은 시나 극, 소품도 꽤나 잘 썼다.
덕돌이 머리를 숙여 철봉 형님이 준 책을 보니 “문학창작의 길”, “임해설원”, “홍루몽”과 같은 두툼한 책이었다.
“홍루몽, 조설근? 허허허. 그러지 않아도 읽을 책이 없어 헤맸는데 실컷 보겠소.”
그는 보풀이 진 누런 두툼한 책을 받아 쥐자 읽고 싶은 충동부터 생겼다.
그때 철봉의 아들애 일국과 성국 그리고 성빈은 아버지가  책을 삼촌을 준다고 아까워했다.
덕돌은 자기보다 일여덟 살 밖에 지하가 아닌 일국이랑 성국이랑 조카들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얘들아, 삼촌이 본 후 가져다 줄 게.”라고 했다.
철봉은 길쭉한 얼굴에 희죽이 웃음 지었다.
“쾐찮다. 가져다 봐라. 열 살도 안 된 얘들이 언제 그 책을 알고 본다고 그러니?”
아주머니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괜찮소. 생원이 가져다 보고 큰 사람이 되오.”라고 하며 가지고 가라고 손짓했다.
덕돌은 “그래도 이담 얘들이 보게 다 본 후 가져오겠소.”라고 다짐했다.
그제야 조카들은 해시시 웃었다.
떠나갈 때 철봉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재삼 타일렀다.
“그 책을 너만 보고 남에게 보이지 말라. 자칫하면 황색소설을 본다고 또 말을 듣겠다.”
“양, 알았소.”
“고중에 가는 관건적인 대목에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 영웅이랑 광철이랑 하나하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친해라. 그래야 너를 고중에 추천하는 애들이 많아 질 게 아니냐? “네만 잘하면 경산 선생이랑 성환이랑 우리도 학교에서 네 고중에 가도록 힘을 써줄게.”
덕돌은 책을 안고 떠나가면서 “형님, 형님 말대로 잘 해보겠소.”라고 했다.
덕돌은 “임해설원”을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나서 밤중까지 탐독하였다.
그는 책을 보다가 곤해 바깥에 나와 두 팔을 벌리고 뒤지개를 지으면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았다.
여름밤의 무더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가 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순희랑 은숙이랑 내게 투표하게 편지나 써볼까?)
허나 인차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또 연애를 한다고 말을 들으면 어쩐다?”
그는 소설책이나 더 보려고 집으로 들어오다가 또 생각을 달리했다.
“혹시 필적을 속이면 내 쓴 거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덕돌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익명신을 쓰자.”
그는 제 딴에는 아주 묘하게 필체를 바꿔 익명신을 쓰기 시작했다. 고의로 글씨도 필획을 평소처럼 죽죽 곧게 긋지 않고 비뚤비뚤하게 써내려갔다. 내리 금은 고의적으로 뱀처럼 구불구불하면서도 윗 끝을 실하게 오려놓았다.

은숙아, 내 누구라는 거 묻지 마라. 내 고중입학 도와 투표해 달라. 옛날 내가 배고플 때 감자누룽지를 준 것처럼 말이야. 찬란한 미래를 향해 어깨 겯고 한걸음 한걸음 나가자. 넌 영원히 내 누룽지야.

덕돌은 또 다른 필기장 한 장을 쭉 찢어낸 후 또 다르게 써 내려갔다.

순희야, 우리 둘 다 공부를 잘하는데 함께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가자. 나 고중 입학을 도와 달라. 네가 날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니? 여자애들을 동원해 나에게 투표하게 해 달라. 하늘이 굽어 지켜볼 거야.

편지라 할까? 쪽지라 할까?
덕돌은 다 쓰자 접어서 책가방에 넣었다.
“옳지. 내일 학교에서 진수해에 영화 보러 간다지? 그때 우전국에 가서 부치자.”
이튿날 덕돌은 진짜 영화 보러 가는 김에 우전 국에 들리어 자기를 아는 애들이 들어 올까봐 흘금흘금 살피다가 편지봉투와 우표를 샀다.
그가 편지에 은숙과 순희 집 주소를 거의 쓸 때다. 갑자기 우전국 문 안으로 상선과 종호가 쑥 들어왔다.
(젠장!)
덕돌은 편지 주소를 제꺽 써서 책가방에 넣었다. 상선이 다가오다가 덕돌을 이상한 눈길로 여겨보더니 나갔다.
“어쩔까?”
덕돌은 우전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상선이랑 떠나 갔는가고 바깥을 흘금흘금 내다보았다.
상선이랑 보이지 않자 그는 황급히 편지봉투를 번져 놓고 풀을 가져다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슬쩍 걷어넣았다. 그때 우체국 안에 모를 시내 애들이 몇이 있을 뿐 알만한 애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상선이랑 있은들 뭐라니? 내 교하 누나네 집에 편지를 부쳤다고 하면 다지. 황차 누가 쓴 건지 모르는데 겁날 게 없다. 연애편지도 아니고 투표해달라는 거뿐인데 뭐라니?”
덕돌은 제딴에는 귀신도 모르게 편지를 부쳤다고 위안하면서 우체국에서 나왔다.
그런데 저쪽에 상선이랑 성욱이랑 종호랑 모여 서서 뭐라고 이쪽을 손가락질을 하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 우체국에 있던 애들이, 시내 애들이 성욱이랑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이, 오늘 시내 애들을 시켜 나를 칠 작정인가?”
덕돌은 편지를 가만히 부치려고 오늘만은 철주랑 동림이랑 송철이랑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허나 그런 근심은 인차 사라졌다. 성욱이랑 뭐라고 말하며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볼뿐 털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야 덕돌은 시름놓고 영화관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갔다.
며칠 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난데없는 편지가 순희 집에 날아와 떨어졌다. 다행히 편지는 주책머리 없는 월순이 먼저 받지 않고 순희가 먼저 받아 보았다.
순희는 콩콩 높뛰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겉봉을 뜯어보았다. 보지 않던 필체였다. 허나 그는 대뜸 덕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공부는 특등 가게 잘하지만 고중을 가지 못할까봐 근심하면서 자기에게 투표해달라고 할 남자애는 덕돌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 일 밭에서 돌아왔는지 엄마가 불쑥 집안에 들어왔다.
정신을 잃고 편지를 거듭 읽고 또 읽는 순희를 보고 “누구한테서 온 거야?” 하고 물었다.
“어마나!”
“무슨 편지기에 그러니?”
“편지는 무슨 편지. 삐치지 마세요.”
순희는 황급히 편지를 가지고 부엌에 내려가 성냥을 득 그어 불을 달아 아궁이에 걷어 넣고 벼 짚을 넣고 또 넣었다.
그녀는 다시는 또 덕돌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았다는지 연애했다는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애들에게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자기와 덕돌이 당장 있게 될 고중입학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순희는 부지깽이로 아궁이에서 불타오르는 벼짚과 편지를 들여다보면서 쌔무룩이 웃으면서 나직이 혼자 말을 했다.
“별 애를 다 보았다. 좋은 입을 뒀다 뭘 하고 이런 짓을 하니? 남 또 웃기자고. 나쁜 놈 새끼. 놔두는가 봐라.”
순희의 놀란 거동을 보고 엄마는 대개 짐작이 갔다.
“너 남자애들과 작작 휩쓸려라. 자칫 전번처럼 덕돌과 연애한다고 동네방네 학교에까지 소문이 나면 큰일이다. 괜히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겠다.”
“됐습니다. 누가 듣고 무슨 일이 있는가 하겠습니다.”
그때 월순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바람에 그들 모녀간은 제꺽 입을 다물어버렸다.
순희는 이튿날 학교에 가서 덕돌을 보고서도 편지를 받은 일이 없는 것처럼 꾸며댔다. 그러자 덕돌은 혹시 자기 쓴 편지를 받지 못했는가고 추측이 들어갔다. 순희는 덕돌의 이상한 눈길이 자꾸 자기를 훔쳐보는 것을 보고 덕돌이 한 소행임을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순간 웬 일인지 소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할랑거리고 높뛰는 것을 어찌는 수가 없었다.
휴식 시간에 복도에서 덕돌을 딱 마주치자 순희는 저도 모르게 곱게 흘겨보더니 머리를 숙이며 얼굴을 귀밑까지 빨갛게 붉히었다.
그제야 덕돌은 순희가 편지를 받은 것을 알게 됐다.
한편 같은 날 은숙도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은숙이 먼저 그녀의 어머니가 받아 가만히 뜯어보았다.
“이게 뭐야? 옛날 배고플 때 감자 누릉지를 어쩌고 뭐고 한 거 보지. 요게 저 아랫마을 덕돌이란 놈 새끼 한 짓이 아니야? 조꼬만 새끼 벌써부터 연애편지질이냐? 못된 놈의 송아지 새끼 엉덩이에 뿔이 난다더니. 이러고서도 고중으로 가?”
은숙의 어머니는 편지를 뜯어 부엌 아궁이에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덕돌이 편지를 썼는지 붙잡아내 혼내 줘야지. 고놈새끼 쏠락거리면서 웃기지 않아? 흥!”
이때 은숙이 집으로 돌아왔다.
“너 혹시 누구와 연애를 하는게 아니야?”
“어째 그럽니까?”
“이걸 봐라! 누가 쓴 겐가.”
은숙은 편지를 뜯어보고 또 뜯어보며 숙인 머리가 홍당무로 돼버렸다.
“주의해라. 덕돌이 어떤 애냐? 전번에는 순희하고 잔치해 살겠다고 해 온 마을과 학교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이젠 또 옛날 누룽지 친구 어쩌고저쩌고 집적거리니?”
은숙은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엄마, 절대 학교나 마을에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마오.”
어린 딸의 말도 그럴 법해 어머니는 은숙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갔다.
“좋다. 이 편지는 내가 건사할게. 덕돌이 새끼 이제 또 편지 쓰는 날엔 이 편지까지 가지고 학교에 찾아가 한바탕 해낼 테다.”
은숙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어머니, 제발 떠들지 마오. 소문 펴지면 난 어떻게 머리를 들고 학교를 다닌다고 그러오? 고중에도 가지 못하오.”
그제야 어머니는 두덜거리면서 편지를 건사했다.
“덕돌이, 고 못된 올 종자 놈 새끼, 좋은 입을 가지고 투표해달라고 말할 게지. 간이 떨어지게 편지질은 왜 한다니?”
은숙은 벽 쪽에 마주 서서 손으로 맑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두 눈을 비비며 어깨를 들먹였다…
담임교원 김 경산 선생은 학생들 속에서 덕돌의 위신을 높이려고 처처에서 여론을 조성했다.
그는 덕돌이 쓴 글을 학급마다 돌아다니면서 읽어주는가 하면 지어 한어로 쓴 작문이나 “칠언률시”마저 붓으로 대자보로 써서 벽보 란에 붙여주었다.
고중입학을 추천하는 관건적인 시각이 닥쳐왔다.
두 개 학급에서 고중은 한개 학급만 모집하기에 기실 절반 밖에 가지 못하게 됐다. 진산선생이 천방백계로 덕돌의 위신을 세워주었기에 성욱이랑 아무리 추천하지 않고 헐뜯어댔지만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장영웅이랑 맹광철이랑 전성택이랑 모두 덕돌을 추천했다. 게다가 순희와 은숙이가 여학생들 속에서 장차 대학으로 갈 애는 덕돌 밖에 없다고 여론 조성을 한 바람에 여학생들도 대부분이 덕돌을 추천했다.
순희 차례가 되자 그녀는 발딱 일어나 제일 처음으로 덕돌을 추천했다.
“덕돌은 우리 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전 진수해 공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공부 천재입니다. 수리화 평균성적이 100점을 맞는 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수학콩쿠르에서도 번마다 100점, 그것도 참고문제까지 몽땅 풀고 1등을 했습니다. 이런 동무를 고중에 추천하지 않으면 누구를 추천하겠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덕돌을 고중에 입학시키지 않으면 후회할 겁니다. 큰 손실입니다.”
그러자 성욱이랑 “아우, 어우. 자는 덕돌의 각신 게 뭐.”하고 빈정거렸다.
순희는 돌아서서 성욱을 쏴줄까 하다가 영상해 그만두었다.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니?)
은숙의 차례가 됐다.
“나도 덕돌을 추천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조직능력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학급에서 덕돌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안 됩니다. 덕돌을 추천하면서 한마디 충고하겠습니다. 이후에 남녀관계를 주의하기 바랍니다. 전도가 유망한 동무인데 이 결점을 고치지 않으면 장차 전도에 영향을 줄 겁니다.”
“이제야 중점발언을 했다.”
“옳다. 저 덕돌이 새끼 순희와 잔치해 살겠다고 했지 않고 뭐야?”
성욱이 떠들자 덕돌은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난 근본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네 어찌 9촌 조카라는 게 이다지도 날 헐뜯니?”
교실 안에서 덕돌과 성욱의 무섭게 번쩍이는 눈길 사이에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레가 천지를 진동하며 울렸다.
“누가 널 9촌숙이라니? 옛말이면 듣기나 좋지. 흥!”
경산 선생이 둘 다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장 맞붙을 것만 같았다.
추천은 계속 이어졌다.
결과 덕돌의 이름 아래에는 바를 정자가 6개 하고도 2획이 꼬리 붙었다. 덕돌은 학급 학생들의 투표수가 32표나 돼 친구들인 장영웅, 맹광철, 동림, 순희, 은숙과 함께 고중입학선에 추천됐다. 물론 일을 잘해 이른바 사상품성이 좋은 성욱이도 겨우 26표, 딱 반수를 얻어 제일 마지막이름으로 추천됐다. 성욱과 친하던 리응과 종호, 상선도 추천됐다.
허나 손버릇이 나쁜 철주가 그만 고중에 추천받지 못했다. 철주는 누구 탈만해 입이 따발 3개나 걸 지경으로 나와 온 마을로 돌아다니며 누구와 행패를 부리지 못해 씩씩 거렸다.
경산 선생과 성환, 철봉은 덕돌의 고중입학 그 다음 보조로 학교 빈농 대표 이흥수와 학교 지도부 공작을 했다.
경산 선생은 성환과 철봉과 무슨 수를 대겠는가고 토론하고 흥수의 딸 해월이 추천받지 못한 일을 가지고 거래하기로 했다.
허나 흥수는 호의로 찾아간 경산선생을 외까풀 눈으로 흘겨보았다.
“무슨 일이오?”
“해월의 고중입학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흥수는 “흥!” 하고 코 방귀를 뀌더니
“김 선생이 담임교원을 어찌나 잘 했으면 우리 해월이 학생들에게 추천도 받지 못했겠어?”라고 하며 누런 이발사이로 침까지 튕겼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경산 선생은 흥수 앞으로 허리를 굽히며 다가앉아 조용히 말했다.
“거래를 합시다. 해월을 우리 책임지고 고중에 입학시키고 대신 덕돌의 고중입학을 학교에서 토론할 때 비준해 주십시오.”
“안 돼!”
흥수는 딱 잡아뗐다.
“어디 와서 뒷문거래를 하려는기여? 빈농 대표를 보기로 뭐로 보는가? 되지도 않을 소릴! 흥!”
허나 경산 선생은 맥을 버리지 않고 재삼 권고했다.
“서로 좋게 하면 어떻습니까? 덕돌이도 구하고 해월도 구하면 좀 좋아 그럽니까? 잘 고려해보십시오. 황차 학교 지도부 결정은 빈농 대표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 당 지부 장동영 서기는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중하게 결정하십시오.”
그래도 흥수는 경산을 보지도 않고 고집을 부렸다.
“덕돌은 애비를 닮아 사상품성이 나쁜 애여. 류소기 ‘독서벼슬론’에 푹 물젖어서 공부밖에 모르는 애오. 장차 어떻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위업을 그런 애들에게 믿고 맡기는가. 우리 해월이 고중에 가지 못하면 농촌에 나와 일을 잘해 추천 받아 대학으로 가면 돼. 장철생이랑 처럼 고중에 가지 못해도 빈농의 재교육만 잘 받으면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단 말이여.”
“그래도 잘 고려해보십시오. 나도 해월과 덕돌의 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진 않을 겁니다.”
진산 선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흥수네 집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 해월이 정지에서 어린 애처럼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면서 떼를 썼다.
“아버지, 날 고중에 붙여 주오. 엉~ 엉. 헝, 어 헝, 헝, 엉~ 엉”
춘실도 위방에 올라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영감, 남의 새끼 눈을 멀게 하자고 제 딸의 눈도 멀게 하겠소? 황차 당신이 반대해도 덕돌의 앞길을 막지 못하오. 학생들이 추천했지 장동원 서기나 리종봉 주임이 동의하는 판에 당신 혼자 어쩌오?”
“흥!”
흥수는 그래도 납작한 콧대를 세웠다.
“종연까지 반대하면 상순의 금이야 옥이야 하는 외동아들이 어떻게 고중에 입학해?”
“종연을 그렇게 믿소? 지난여름에 한족묘지꺼리에서 대갈통이 깨진 후 어리어리해졌더구먼. 너무 믿지 마오.”
“종연까지 믿지 못하면 누굴 믿고 일하오? 황차 입당소개인 말도 안 듣고 어떻게 그 자식이 입당하오?”
춘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혹시 입당하려고 상순한테 타협할 수도 있잖소?”
흥수는 큰 소리를 탕탕 쳤다.
“그 새끼, 림표처럼 양면파 수법을 쓰기만 하면 해봐라. 가만 놔두는가 . 그 놈 새끼 속까지 들어갔다 나와서 다 알아.”
흥수는 정지에서 떼질 쓰면서 우는 해월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치지 못하겐? 어떻게 서둘렀으면 애들에게 추천받지 못해?”
허나 해월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자지러지기만 했다.
대대 우사 회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서 추천받은 학생들의 명단을 놓고 하나하나 혁명위원회와 당지부에서 토론하게 됐다.
회의에는 황종연, 이흥수, 김상순, 이학수, 이성수, 이계삼, 허영주, 박윤희 등이 참가했다.
먼저 경산 선생이 담임교원 신분으로 학생들을 쭉 소개했다.
그는 덕돌을 소개할 때 특별히 자세히 소개했다.
“덕돌은 우리 학급 학습위원이고 전 교에서도 공부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게 잘하는 학생입니다.”
그때 흥수가 콧방귀를 뀌었다.
“공부를 잘 해 무슨 소용 있소? 사상품성이 좋아야지.”
그때 종연이가 제지시켰다.
“다 듣고 말하오.”
흥수의 우멍한 외까풀 눈에 의아한 눈빛이 어리었다.
(저 자식이 어데가 찰싹 붙어?)
경산 선생은 계속 소개했다.
“덕돌 학생은 사상품성도 아주 좋습니다. 그는 자기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선생’으로 돼 학습이 차한 학생들을 잘 배워주어 학생들에게서 위신이 아주 높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자리를 정돈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차한 학생들을 이끌면서 호상 학습하는 열조를 일으켜 우리 반의 학습 성적을 눈 뜨이게 제고시켰습니다.”
“원래 담임교원부터 ‘독서벼슬론’에 푹 전 사람이구먼. 그저 공부, 공부 밖에 모르지 않아.”
흥수가 또 부르튼 소리로 두덜거렸다.
종연은 싸맨 머리를 들더니 또 손시늉으로 제지시켰다.
“덕돌 학생은 노동도 아주 잘하고 정치사상도 아주 좋습니다. 중학교에 올라온 후 하루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우리 학급의 난로 불을 도맡다 시피 피웠을 뿐만 아니라 교연실의 난로불도 피웠습니다. 또 아동 단 단장으로부터 활동 참 참장까지 하면서 겨울 방학이면 자기보다 두세 살씩 이상 되는 애들까지 데리고 패용천산에 오르면서 군사훈련을 했고 겨울방학마다 돼지 똥을 열 수레씩이나 주어 생산 대에 바쳐 빈농들이 모상 판 둼으로 잘 쓰게 하지 않았습니까? 덕돌은 해마다 생산 대에 가서 빈농의 재교육을 받을 때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일을 잘 했습니다. 근 첫 패로 홍위병에 가입한 훌륭한 학생입니다. 때문에 덕돌의 고중입학을 대대에서 비준할 것을 건의합니다.”
경산선생이 덕돌을 하나 소개하는데 한 식경이나 걸렸다.
퉁퉁 부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황종연이 무거운 입을 벌리더니 첫 포를 쏘았다.
“경산 선생의 소개를 듣고 난 덕돌의 고중입학을 지지합니다.”
“뭐라오?!”
흥수는 종연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상순이나 경산 선생 그리고 회의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다.
허나 종연의 발언은 명확했다.
“덕돌은 김상순 서기를 닮아 애들을 이끌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사상품성도 좋습니다. 공부도 잘해 장차 큰일을 할 훌륭한 인재인데 그런 학생을 고중에 보내지 않으면 누굴 보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종연은 말을 마치면서 상순과 이계삼의 눈치를 흘금 곁눈질해 보는 것이었다.
“더러운 새끼, 깨 그루에 앉은 새 새끼처럼 까불지 말라. 김 대장한테 알락거리면 널 입당시켜 줄 거 같니?”
종연도 숱한 당원들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입당할 사람이니까. 더욱 원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덕돌 같이 훌륭한 학생을 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개인감정으로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옳소.”
“덕돌의 입학을 동의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이구동성으로 덕돌의 고중입학을 동의한다고 표시했다. 지어 흥수의 형들인 성수나 학수마저 동의해 나섰다.
(이렇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경산 선생과 해월의 고중입학을 거래할 거 괜히 고집했지 뭐야?)
흥수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발버둥질을 치며 엉엉 울던 해월이 떠올라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회의실에서 훌 나가버렸다.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학교에서 토론해보았자 불 보듯 빤하지 않는가? 장 서기나 이 주임이나 모두 덕돌의 큰누나 춘자의 은사들인데. 상순이네 조손 3대가 반세기 동안 쌓은 기반에 와서 사는데, 흥! 진짜. 남의 눈을 빼려다가 제 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는가? 쳇!)
흥수는 아예 학교에서 토론할 때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장동원 서기가 어찌나 빈농 대표가 참가하지 않으면 무효라고 해서 마지못해 참가했다. 그는 눈을 뻔히 뜨고서도 회의에서 장동원 서기가 덕돌의 우점을 잔뜩 늘여놓아 덕돌의 고중입학이 통과되는 것을 구경했다.
      진짜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
      덕돌은 고중에 입학하게 됐다. 그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마음 속으로 자기를 도와준 김경산, 철봉과 성환 등 은사님들과 부모, 형님들과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는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이상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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