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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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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하북성 섭현의 남장
2014년 02월 10일 10시 19분  조회:3651  추천:1  작성자: 김성룡

무연한 황토고원(黃土高原)과 화북평원을 동서로 량분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항산맥(太行山脈)은 항일전쟁시기 적후 유격투쟁이 가장 치렬하였던곳이다. 태항산의 옛 명칭은 대형산(大形山)인데 산세가 웅장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태항산은 지세가 험악하고 요새가 많아 유격전을 펼치기가 적성인 곳이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적후에 깊이 들어가 싸웠다.

조선혁명자들은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다음 반일최전선에 나가 싸우기 위해 단연히 북상하여 태항산구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팔로군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항일전쟁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적과 싸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 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자욱이 력력히 남아있다.

 

유유히 흐르는 청장하

하북성 섭현의 명소 왜황궁 녀와 광장

옛건물을 수선해 축조한 관광명소 왜황궁

한단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하북성 섭현(涉縣)으로 향했다. 한단시 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섭현까지 갈수 없는가고 문의하였다. 녀기사가 갈수있다고 하자 가격을 흥정하고 섭현으로 떠났다. 한단시를 벗어날 때 녀기사는 집에 들려 남편을 불러냈다. 자기는 길을 잘 모르니 남편이 모셔다 준다는것이다.

차는 한단시를 벗어나 309국도를 따라 서부로 달렸다. 잘 닦아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지만 석탄을 가득 싣고 달리는 트럭을 많이 볼수있었다. 석탄이 많이 나는 산서성으로부터 석탄을 날라 화북평원을 통해 멀리 수송해 가는것이였다. 석탄트럭이 많이 다니기때문에 길바닥에는 석탄먼지가 많았다. 차가 지날 때마다 수면에 파문을 내듯이 검은 석탄먼지가 길바닥에서 맴돌았다.

산서성과 린접한 섭현은 한단과 20, 30킬로메터 떨어져있다. 섭현은 1,500여평방킬로메터 면적에 38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이곳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호두를 비롯한 농산물이 유명한 고장일뿐만아니라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섭현 현성에서 12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왜황궁(媧皇宮)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왜황궁은 봉황산(鳳凰山) 산허리에 축조된 1450년전의 건물이다. 4, 5층 정교한 루각이 산 벼랑에 축조되여 반공중에 걸린 것이 그야말로 귀부신공(鬼斧神工)의 걸작이다. 왜황궁은 돌로 구멍난 하늘을 막고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다는 중국의 유명한 전설의 주인공인 녀와씨(女媧氏)를 기념해 만들었는데 북제(北齊) 시기부터 축조되였다. 지금 이 건물은 하북성 10대 고대건물의 하나로 유명하다.

섭현의 선전부와 이미 련락이 되였기때문에 차는 곧바로 섭현 현정부에 도착하였다.

선전부의 언론담당인 리숙영(李淑英)과장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리숙영과장은 30대 젊은 녀성이였는데 매우 활달하고 친절했다. 그녀는 우리를 현정부 초대소(招待所)로 안내해 주었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섭현의 선전부 부부장 장화평(張華平)과 문학예술가련합회 부주석 강옹군(江擁軍)이 호텔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사전에 우리의 답사 목적을 알려주었기때문에 이들은 원 섭현 당사판공실 주임이였던 리사화(李士華)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섭현에서 학식이 가장 뛰여나다하여 《섭현공부자(涉縣孔夫子)》라는 아호를 가진 분이다. 섭현의 공자님이라는 뜻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호텔방에 모여 앉아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리사화로인은 71세 고령이였지만 몸은 퍽 건장하였고 또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는 섭현의 중원촌(中原村), 남장(南莊), 석문촌(石門村) 등지에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섭현은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지가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미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였으므로 다른 곳을 답사하지 못하고 우리는 호텔에서 리사화 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섭현의 "공자" 리사화 로인(좌)와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우) 

리사회로인의 이야기[1]: 1943년에 태항산 항일근거지 인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적들의 철벽같은 포위로 물품이 아주 결핍하였고 쌀도 많지 않았다. 당시 섭현에 머물던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긴장한 학습과 훈련,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함과 동시에 대생산 운동에 참가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옥수수, 감자를 심었고 적후의 련락소를 통해 소중한 물품을 구해왔다. 극도로 빈곤한 근거지의 의용군 식생활을 보면 야채와 나물이 고작이였고 대부분 좁쌀 죽으로 끼니를 에워야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자리잡고있는 남장촌(南莊村) 뒤산 골짜기에는 낡은 절이 있었다. 절에는 사묘(司苗), 사과(司果)라는 중 두명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가 일제가 파견한 밀정이였다.

사묘와 사과는 늘 팔로군의 행적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정보를 일제 본부에 전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팔로군이나 의용군 전사들에게 접근하여 금전과 부귀로서 회유하려 들었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가서 감자를 심는 일을 하게 되였다. 휴식할 때 사묘와 사과는 혼자 있는 의용군 전사 차만길(車萬吉)에게 접근했다. 두놈은 나물과 죽을 먹으며 이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일본군으로 넘어오라고 차만길을 구슬렸다.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의 정보를 알려주면 많은 돈을 줄것이며 또 큰 도시에 가서 호강시켜주겠다고 했다. 차만길은 짐짓 생각해보겠다고 하고서는 두놈이 떠난후 즉시 무정사령에게 보고하였다.

무정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절에 찾아가 사묘와 사과를 체포하고 심문하였다. 놈들은 일제의 파견을 받고 이곳에 왔다고 실토하였고 의용군은 마을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두놈의 죄장을 밝힌 다음 총살해 버렸다.

리사화로인의 이야기 [2]: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은 섭현 중원향(中原鄕) 중원촌에 있을 때 한 지주 집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중원촌은 강을 사이 두고 팔로군 사령부와 마주하고있었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이 불때면 강을 건널수 없어 고생이였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긴급한 상황을 팔로군 사령부에 전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장마철이라 강을 건널수 없었다. 무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며 잘 훈련시킨 군견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편지를 군견의 목에 매달아 강을 건너게 하였다.

주인의 뜻을 안 군견은 재치있게 헤염쳐 강을 건너 편지를 전했고 또 답장까지 받아가지고 왔다 한다.

우리는 저녁까지 리사화로인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남점진 남장의 희대, 우리글로 "중조한 우의기념대"라고 쓴것이 흥미롭다



남장유아원, 원 조선청년간부 학교 터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

10월 23일은 태항산지역 답사를 시작한 네번째 날이였다.

섭현에는 답사할 곳이 많고 내용도 많기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찍 일에 달라붙었다.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이 선뜻 길 안내를 나섰고 선전부의 리숙영과장이 우리를 배동해주었다.
우리는 먼저 하남점진(河南店鎭) 남장촌으로 향했다. 청장하(淸漳河) 기슭에 자리잡은 하남점진은 섭현 현성에서 2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진정부 동남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남장촌에 이르게 된다.

대부분 흙으로 만든 집이였고 이따금 검푸른 벽돌로 지은 기와집이 보였다. 원래는 마을이 위치가 낮은 청장하 기슭에 자리잡았지만 물이 자주 지기때문에 부근의 산언덕으로 옮겼다 한다. 남장촌에는 근 4,000명 인구가 살고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은 바로 이 마을에 주둔했던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공지가 나타났고 거기에는 커다란 로천 무대가 있었다. 현지인들은 로천무대를 《희대(戱臺)》라고 불렀다. 명절이면 《희대》에서 공연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지에 모여 재미나게 여러가지 공연을 구경하였다 한다. 벽돌과 콩크리트로 만든 무대건물 웃부분에는 모택동 초상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 남장이라고 씌여있었다. 더욱 재미나는것은 남장이라고 쓴 아래에 우리 글로 《중조한우의기념대》라고 밝혀놓은것이였다. 중국과 조선, 한국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수교하기전에는 무조건 《중조우의기념대》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한국을 포함해 넣었다는것이 흥미로웠다. 구태여 외교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과 함께 지냈던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조선과 한국을 동일시하고있음을 느낄수있었다. 그만큼 모든것을 포용할수 있는 현지인들의 그 넉넉함에 감탄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 이 기념대는 남장의 문화센터로 사용되고있다. 자주 사용되는건 아니지만 명절이나 큰 대회가 있으면 이곳에 모여 공연도 하고 촌민회의를 소집하기도 한다.

《희대》는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 군사간부학교가 설립될 때 학교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항일을 선전하는 연설을 하거나 재미나는 공연을 선보였던것이다.

섭현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린접한 곳에 위치하였다. 지형적으로 보면 태항산 중심부분과 가까운 이곳은 또한 태항산 중심에서 하북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하다. 조선혁명가들은 대체적으로 1943년경에 섭현에 모여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이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였고 조선혁명가 무정이 사령원을 맡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자체의 군대로서 조선의용군을 가지고있었고 당으로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투쟁의 수요에 따라 많은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꾸렸는데 섭현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중조한우의기념대》가 있는 공지 한쪽에는 남장 유아활동중심(幼兒活動中心)이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 곁에 철대문이 있었고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주변에 단층으로된 벽돌기와 건물이 둘러있었다. 그중 서쪽의 단층 벽돌집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였다. 건물구조를 보아 옛날 절간으로 사용한 건물임을 짐작할수있었다. 문 옆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현판이 붙어있었다.

현판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년간 이곳에 있었다. 1943년 4월 조선의용군 본부와 조선독립동맹은 남장촌에 주둔하였으며 이해 9월, 남장촌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해 당, 정, 군 간부 300여명을 양성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조선혁명가들은 각 곳에 많은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을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혹은 《태항산군정학교》라고도 불렀다.

1943년 12월, 일제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조선의용군 주력은 연안에 집결하였다. 그때 태항산근거지에 있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으로 떠났지만 무정은 계속 남아 팔로군의 사무를 보면서 조선청년 간부양성에 몰두하였다. 동북과 화북에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하여 태항산근거지에 온 많은 조선청년들은 섭현 남장에 있는 이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졸업직후 연안으로 가거나 다시 지하투쟁 임무를 맡고 적후로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고철(高哲)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1944년, 남장 마을 어귀에 빈 절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갔기때문에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절에는 늘 향불이 피워져있었다. 당시 성냥이 몹시 귀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피워놓은 향불은 전사들의 담뱃불로 잘 씌였다한다.

100여명 학원들이 학교에서 학습하고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간소한 시설로 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리섭(李涉)선생이 남긴 회억록에 의하면 낡은 절간을 보수해 만든 학교는 교탁이나 책걸상이 따로 없었다. 학원들은 얇은 이불을 깔고 앉아 무릎우에 필기장을 놓고 공부하였다.

이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학원들은 팔로군과 함께 대생산운동을 하였고 선전과 군사훈련에 열중하였으며 또 상급의 지시에 따라 적후를 넘나들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근거지에 필요한 약품과 물자를 날라왔으며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적의 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엿한 조선의용군 전사로, 조선혁명 간부로 성장했던것이다.

1945년 3월 1일에 태항산 군정학교가 재 출범하였는데 그때 전교에 293명 학원이 있었다. 무정이 교장을 맡고 무정, 양계(楊界), 박무 3명이 정치과를 맡았다. 그리고 교무주임에 장지민, 교무간사에 공명우(孔明宇 일명 주성 朱星)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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