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김성룡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제75회 양림의 희생지
2014년 11월 20일 16시 07분  조회:5227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삭막한 황토고원의 하구나루는 수천년간 수없이 많은 길손들을 건네주었다. 언제부터 마을이 생기고 나루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명줄이나 다름없이 중요하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삭막한 고원에서 억척스레 살아가고있는 이 고장 사람들은 하구나루를 통해 서로 이어져있었던 것이다.

전자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까지도 하구나루는 예나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다. 성깔 사나운 황하를 건너 길손들은 오늘도 나룻배를 타고 오가면서 교류하고있었다.
답사팀은 누런 흙물이 사품치며 흐르는 황하기슭에 서서 하구촌으로부터 오는 나룻배를 기다렸다. 대안에서 발동기를 단 나룻배 한 척이 건너왔다. 우리는 이곳까지 열심히 안내해준 석루현 사업일군들과 작별하고 배에 몸을 실었다.

 

조선혁명가 양림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황하

 

황하는 중국의 두 번째로 큰 하천이다.

중화문명이 황하기슭에서 탄생했기때문에 황하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운다. 황하의 물은 말 그대로 누런 흙물이여서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10여분 뒤 대안에 도착했다. 대안은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이였다.

나루가 있는 대안은 터가 비교적 널찍했다. 하구마을은 그닥 높지 않은 산기슭에 오붓하게 있었다. 하구촌 남쪽으로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가 황하에 흘러들고있었다. 무정하는 남부의 큰 벼랑가를 굽이돌아 흘렀기때문에 벼랑과 하구촌 마을에 막혀 대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권립교수) “동정하려면 우선 황하를 건너가서 염석산이 산서성 황하동쪽에 구축한 또치까 방어진지부터 까부셔야 했습니다. 중앙군위에서는 이 무거운 과업을 양림의 부대에 맡겼습니다. 양림은 농민으로 가장하고 황하강변에 나가서 우선 도강지점을 확정하고 상세한 작전방안을 세웠습니다.”

하구나루터는 수십리 상류에 위치한 신관(辛關)나루터와 함께 예로부터 주요한 나루터였다.

1936년 2월, 홍군 만 2천명 동정부대가 황하기슭에 도착하였다. 홍군 제15군단은 하류의 하구 나루터로 도강할 준비를 하였고 제1군단은 상류의 신관 나루터로 도하할 태세를 취했다. 이해는 윤달이 들어 2월에 황하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크고 작은 얼음덩이가 물결에 흘러내려 도하에 어려움을 조성해 주었다.

양림은 제15군단 선견대를 거느리고 하구촌에 도착하였다. 75사 참모장인 양림은 사급(師級) 간부였지만 선견대인 75사 223퇀 제1영을 거느리고 이번 도하돌파임무를 맡았다. 그때 홍군은 상급 지휘자가 직접 부대에 내려와 전투를 지휘하는것이 관례였다.

양림은 하구촌 남쪽의 무정하에서 배를 마련하고 도하 훈련에 들어갔다. 큰 벼랑이 막혔기때문에 대안의 적은 홍군부대의 행동을 알지 못했다. 양림은 크고 작은 목선 5개를 확보하였는데 큰배에는 80명이 탈수있었고 작은 배에는 20여명이 탈수있었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밤을 타서 40명 돌격대원을 먼저 도하시켜 적의 보루를 기습하기로 하였던것이다. 2월 20일 밤, 도하작전이 시작되였다. 돌격대 용사들은 팔에 흰 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 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권립교수) “1936년 2월 22일 밤, 양림은 선봉영을 거느리고 도하작전에 나섰습니다. 황하를 채 건너가지 못하고 우리의 배들이 적에게 발견되였다. 선봉영은 양림의 지휘하에 기관총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기관총 화력에 대처하면서 끝내 황하를 건넜고 하가와 서북에 등륙하였습니다.”

 

1936년 2월 22일 밤, 어둠이 깃들자 드디어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양림은 돌격대원들을 앞세우고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돌격대가 탄 배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조직해 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 개 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적 병사 한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권립교수) “그들은 상륙하자 포연탄우를 헤가르며 덮쳐드는 적을 물리침으로서 대부대의 도강을 엄호하게 되었습니다. 밤 열시 선봉영 전사들이 적의 종심으로 돌격해들어가고 있을 때 죄악의 적탄이 양림의 복부를 꿰뚫었습니다. 양림은 쓰러졌습니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주사제의 회억에 따르면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21일 오후 하가와촌에 이른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하구 나루터에서 다시 황하 대안을 되돌아보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있는 이름 없는 하가와촌, 그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된 조선혁명가 양림을 생각하니 마음은 격동되기만 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만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 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4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84 불멸의 발자취—련재를 마치면서 2016-02-19 2 3662
83 제83회 서안과 락양 답사 2016-02-15 1 3860
82 제82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옛터 2016-02-09 0 3335
81 제81회 연안에서 맞이한 승리 2015-12-14 0 6250
80 제80회 조선혁명가들의 연안 대 집합 2015-10-21 1 4162
79 제79회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2015-09-18 0 4162
78 제78회 연안의 사적지 2015-08-05 1 4337
77 제77회 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2015-02-10 0 5414
76 제76회 혁명성지 연안 2015-01-13 1 5176
75 제75회 양림의 희생지 2014-11-20 0 5227
74 제74회 하구나루 하가와촌 2014-10-09 1 4759
73 제73회 홍군동정기념관 (하편) 2014-09-22 0 4246
72 제72회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 (상편) 2014-07-14 1 5856
71 제71회 좌권현을 떠나 석루현으로 2014-05-23 0 4903
70 제70회 동욕진 상무촌의 사적지 2014-04-14 0 4829
69 제69회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지 2014-04-08 0 4862
68 제68회 5월의 혈전 2014-03-25 0 5398
67 제67회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옛터 2014-03-16 0 5402
66 제66회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 2014-03-06 0 5346
65 제65회 섭현의 사적지 2014-02-15 0 4762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