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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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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동만 토비숙청 상편
2016년 04월 25일 10시 02분  조회:2997  추천:0  작성자: 김성룡

1945년말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은 신속한 행동으로 동북 대부분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였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새로운 전투에 뛰여들도록 동북의 광범한 여러민족인민을 단합시켰다. 항일련군속의 조선인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신속히 남만, 북만, 동만에 진출해 조선인 주민의 환영을 받았고 조선인 군민을 이끌고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민주정권을 세우는 성스러운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동북진출은 자유와 해방을 찾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공산당의 두리에 뭉치게 했으며 전반 동북의 민주정권건설과 토비숙청 그리고 동북에서 국민당과의 대결전을 진행할수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은 장개석은 평화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무력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부유한 동북을 독점하고 자기의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는 수천만 동북인민을 계속 수탈하려 시도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국민당 정예군은 산해관을 넘어 금주를 강점하고 심양을 접수하면서 동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전쟁의 불길은 동북에서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1945년 11월, 발해연안의 진황도에 상륙한 국민당군은 동북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산해관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철수하는 동북인민자치군을 추격해 수중(绥中)에 이르렀다. 국민당군의 공격소식을 접한 동북인민자치군의 총사령인 림표는 급급히 남하하여 흥성(兴城)에 도착했지만 동북에 들어온 팔로군과 신사군, 조선의용군 각 부대가 동북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각곳에 분산되여 있었기때문에 수중에 방어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림표는 할수없이 금주부근 수백킬로메터 공간을 내주면서 적의 주력을 분산시킨후 병력을 집중해 각각 타격할 작전을 구상하였다.

게다가 이때 쏘련정부가 태도를 바꿈으로하여 공산당의 립지는 더욱 어렵게 되였다. 쓰딸린은 동북각지에 널린 10여만 공산당부대로는 장비가 우수한 국민당 수십만 정예군을 막아낼수없다고 생각했고 쏘련정부가 계속 공산당을 지지하다가는 동북에서 아무런 리득을 챙기지 못할뿐더러 미국과 영국 정부의 더 큰 정치압력을 받게 될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잠시 중지하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에 행정권을 넘길것을 동북에 주둔하고있는 쏘련군 사령부에 지시했다.

11월 26일, 쏘련군은 심양에 있던 중국공산당 동북국을 축출했고 동북 대중도시에서 공산당을 축출했으며 국민당 관원을 보호하고 그들을 도와 정부체계를 수립하였다. 쏘련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동북의 상황은 더욱 혼잡해졌다. 숨어있던 국민당 특무와 괴뢰만주국 관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수시로 공산당 간부를 습격하고 암살했으며 각지 보안대, 치안대에도 전향하는 자가 많아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모택동과 당중앙에서는 동북문제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12월 28일, 모택동은 동북국에 보내는 중공중앙의 지시문을 작성했다. 바로 “공고한 동북근거지를 건립하자”는 그 유명한 보고였다. 글은 광범한 동북 농촌과 인민에 의지해 공고한 근거지를 다져나감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것을 동북국에 지시했다.

이때 쏘련군의 지지를 받은 장개석은 심양과 장춘에 부대와 군수품을 공중수송하는 한편 국민당이 동북을 완전 장악할때까지 철군기일을 연장할것을 쏘련정부에 요구했다. 그러지 않아도 동북에서 더욱 많은 리익을 챙기려하고있던 쏘련은 이 요구에 응해 철군기일을 1946년 1월후로 미룰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비위에 거슬렸다. 미국은 쏘련군이 계속 중국에 남아있으면 자기리익에 손상주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평화담판을 적극 주장해 나섰다. 미국 륙군참모총장이였던 마셀(马歇儿)장군이 직접 나서서 국공량당의 평화담판을 촉성하여 잠시적인 휴전상태가 나타났다. 하지만 국민당은 동북의 일본군 포로와 괴뢰만주국 군인과 경찰 심지어 마적떼까지 사촉해 계속 공산당과 대항하게 하였다.

 


옹문도(1912-1997) 한족 1945년 11월부터 1946년 2월가지 길림성 연길지방위원회 서기, 길림군구 연길군분구 정치위원을 담임, 해방후 국가림업부 부장, 서기 등 직을 련임.

 

 

1945년말 연안에서 파견한 공산당 간부인 옹문도가 연변에 도착해 연변의 당정사무를 책임지게 되였다. 동북내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중되여있는 연변지역은 항일전쟁때부터 반일조직과 공산당조직이 있었기때문에 혁명토대가 비교적 좋았다. 그리하여 연변에 도착한 옹문도는 비교적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할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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