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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제1차 세계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 있던 20세기 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 투쟁을 고무하여 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 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 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 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 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재(诚斋) 리동휘(李东辉1873--1935년)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조선말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륙군 참령(参领)으로 지냈던 리동휘는 개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리동녕(李东宁),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많은 학교들을 세우며 조선의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그는 1912년 중국 동북에 망명하여 간민회에 가담하였고 1915년에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아시아지역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권립)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은 제각지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요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다.
1919년 9월,동방의 빠리로 불리 우는 국제도시인 상해에 도착한 성재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 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 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 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들이 조기 공산주의 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 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면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열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불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동북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지도하던 성재 리동휘는 그후 쏘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1935년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韩村)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권립) 리동휘 선생이 상해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다른 한 공산주의자 안병진 선생이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상해에 도착했다.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안병진이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온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들인 리대소와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창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병진은 그후 일제 옥중에서 십년간 고생하다가 출옥한 후 조선의용대의 충직한 지하일군으로 계속 투쟁하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있은 후 두 나라 혁명가들 가운데서는 공산주의 학습 열조가 일어났다. 쏘련 10월 혁명승리에 크게 고무된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면서 로농대중에 의지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내에 들어온 조선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중국의 진보적인 인사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중한호조사(中韩互助社)>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중한호조사는 1921년 1월 한구에서 설립되였다. 다년간 한구에서 조선인들을 적극 도와주던 중국의 유명한 대 변호사 시양이 조선인 리우민(李佑民)과 합작하여 <중한국민호조사>를 설립하였다.
이해 3월 호남성 장사에서 <장사중한호조사>가 건립되였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의 한사람인 하숙형(何淑衡)이 장사중한호조사의 선전부 주임을 맡았고 모택동이 통신부 주임을 맡았다. 한편 광동에서는 <중한협회>가 설립 되였는데 손중산의 아들 손과(孙科)가 나서서 조선인들과 함께 <중한협회> 기관지인 <광명>을 꾸리면서 조선 혁명자들을 도와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호조사 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1922년 8월 상해에 <중한호조총사>가 창립 되었다. 전국 각지의 중한 호조사를 통해 두 나라 혁명자들과 두나라 인민의 단결이 이루어 졌으며 동방 피압박 민족의 대 단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규식, 리동휘를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구국의 길을 적극 탐색하고있을 때 중국의 정치중심지인 북평에도 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 왔다. 리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들이 북평에 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북경에서의 반일투쟁 유적지 답사는 2003년 9월 15일 시작하였다. 이날 아침 10시, 취재팀은 북경 서산의 향산공원에 모였다. 북경의 향산은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북경시와 20키로메터 상거한 향산은 1186년 금나라 황제가 이곳에 사원을 축조하면서 인적이 닿기 시작하였다. 금대에 만든 사원 대영안사(大永安寺)가 있는데 현지인들은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한다. 그후 사원은 부단히 확건되면서 청나라 건륭 10년인 1745년에 와서는 정의원(静宜园)으로 명명되였다.
향산공원에서 취재팀의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북경에서의 조선인 혁명자들의 행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북경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옛날 전문으로 많이 들어왔다고 본다. 북경에는 좌익 인물들이 많았다. 북경은 총적으로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 등 이런 사람들이 좌익이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자만이 림시정부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시영도 반대하였다. 또 향산은 리대소, 진독수와 관련 되는 사람, 25년 좌우 북경 여러 대학에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무정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대부분 북경에 유가족이 많다.
향산 기슭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적극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이며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인 리대소가 조선 혁명가들에 대한 동조가 많았다.
북경 서산 기슭에는 중국의 위대한 공산주의자 리대소 릉원이 있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목이 우거지고 흰 대리석 건물과 비석이 푸른 잔디와 꽃밭 사이에 유난히 아름답게 안겨 왔다.
(최룡수) 중국 공산당의 창시인으로서 조선혁명에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5.4운동의 지도자의 한분이였던 그는 조선의 3.1운동을 적극 평가하고 북경에 오는 조선 젊은이들의 혁명사업을 도와주었고 20년 상반기에 조선 젊은이들을 만나 혁명 사업을 도와 주었고 또 이 시기 김일학, 김상지 등 조선청년들을 향산 자유원에 보내 혁명사업을 하게 하였다. 김산과 김성숙이 꾸리는 <혁명>잡지에도 글을 발표하였다.
3.1운동이후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있는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지만 리승만은 계속 미국에 남아 활동하면서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주의 제창에 맞추어 위임통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더욱이 1920년 일본군이 조선독립군 탄압을 구실로 중국 동북에 출병하여 조선 독립군과 독립 단체들이 붕괴되거나 분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본군과 동북의 봉건군벌 장작림이 결탁하여 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있을 때 림시정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이 필요되였다.
1921년 2월 초, 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勋),金昌淑(김창숙) 등 14인이 <我同胞에게 告함>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선언은, 전국민의 의사에 따라 통일되고 안정된 정국을 만들고 단결된 힘으로 독립운동의 발전방향을 확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이해 4월 박용만(朴容万), 신숙(申肃), 신채호 등의 조직하에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의(军师统一筹备会议)가 소집된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억압과 수탈에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해 혁명자들은 무장투쟁의 길을 확정하게 되었으며 대단결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1 리동휘 2 옛 북경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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