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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창, 한구, 한양 3진(三镇)에 대한 통칭이였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汉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 도시로 되었다.
만리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였던 것이다.
1926년 9월, 북벌군 주력부대는 한양, 한구를 점령한후 무창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하였다. 오패부가 남겨놓은 3만명 잔여부대는 견고한 성벽에 의재해 완강히 사수하였다.
한달 남짓한 치렬한 공격전을 거쳐 <무창봉기> 기념일인 10월 10일, 영웅적인 엽정 독립퇀이 기타 부대의 협력하에 무창을 공략하였다. 1927년 1월 18일 호 <동아일보>가 보도한데 의하면 모스크바 군관학교를 졸업한 4명의 조선인 군관도 지휘부의 요원으로 무창공격전에 참가하였다.
북벌군은 무한 3진을 전부 점령한후 엽정을 무창 수비사령으로 임명하고 주력부대는 강서 전장으로 나갔다.
북벌군의 다른 목표인 군벌 손전방을 공격하는 전투는 9월부터 강서 경내에서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북벌군 2군과 6군 그리고 1군의 한 개 사단이 강서 전역에서 손전방 부대를 공격하였다. 9월 19일 정잠(程潜)이 거느린 6군은 남창의 로동자, 학생, 성 경비부대의 내응을 받아 신속히 남창을 점령하였다.
국민혁명군 6군에는 포병영 영장 리검운(李检云), 부영장 권준(权■), 부관에 안동만(安东满)을 비롯한 조선인 군사간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초급장교로 북벌군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렬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의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혁명가이다.
권준(1895.5.2--1959.10.27)의 호는 백인(百忍)이고 권중환(权重焕), 강병수(姜炳秀)를 비롯한 많은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상주(尚州)에서 태여난 그는 1917년 광복회(光复会)에 참가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동북에 망명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권준은 본부를 북경에 옮긴 김원봉의 의렬단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는 군자금 조달과 폭탄제조 등 임무를 맡아 조선국내 폭탄 투척 의거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후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광주로 옮겨 짐에 따라 기타 의렬단원들과 함께 중국 광주로 갔다. 1924년 중국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는 국민당 제1차 대표대회가 소집되자 그는 조선혁명가의 신분으로 대회를 방청하기도 하였으며 얼마후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6군 포병영 부영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북벌전쟁이후 권준은 무한에서 동방 피압박 민족 련합회(东方被压迫民族联合会)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32년 권준은 남경에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党)에 가입하였고 1934년에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는 혁명투쟁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 간부들을 양성하였고 항일전쟁시기 중경에서 림시정부 요원으로 있었다.
구강(九江)에 사령부를 정하고있던 손전방은 남창이 공략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그는 급히 10만 병사를 끌어 모아 남창을 탈환하려 시도하였다. 이때 북벌군은 남창을 점령했지만 각 부대가 정비를 끝내지 못한 상황이고 또한 통일된 지령을 받지 못하고있었다.
북벌군이 남창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한 기회를 빌어 손전방 군대가 다시 쳐들어왔다. 적들이 사면팔방으로 공격해 오자 장개석의 직계부대인 1군의 왕백령(王伯龄) 사단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함으로써 북벌군 수비진에 구멍이 생겼다. 비록 북벌군 6군과 2군의 기타 장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적의 공격을 막을수 없었다.
2군의 조선혁명자 강파(姜波)는 포병영 련장이였다. 남창의 정가교(郑家桥) 사수를 맡은 그는 기관총을 걸어놓고 적들과 싸웠다. 치렬한 전투에서 전우들이 희생되고 단신으로 남은 그는 퇴각하지 않고 계속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기관총으로 적들에게 무리 죽음을 안기던 그는 적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남창성이 다시 손전방의 손에 넘어간 소식을 접한 북벌군 총사령 장개석은 급히 강서 전장에 달려와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장개석은 여러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정면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남창의 적은 손전방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에 전투력이 강했다. 적은 밤을 타서 결사대를 조직해 공격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북벌군은 혼란속에 빠졌고 제1차 남창공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6년 11월, 호남, 호북 전장에서 승리한 북벌군 4군과 7군 주력부대가 강서에 도착하였다. 북벌군은 제1차 남창공격전의 실패의 교훈을 섭취하고 주밀한 공격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각 부대는 무전기를 배포하여 통일적인 지휘에 복종하게 하였다.
장개석은 리종인의 7군과 정잠의 6군, 주배덕의 3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강서를 공격하게 하였고 자기의 직계부대 1군은 총예비대로 보류하였다.
리종인은 7군과 4군 부분적 부대를 이끌고 강서 북부로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신속히 덕안(德安)을 공략함으로써 구강과 남창사이의 련계를 차단하고 구강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주배덕의 부대는 남창 남부의 적을 숙청하였고 정잠의 6군도 남창 부근의 적을 숙청하는 한편 리종인 부대의 구강 공격전을 돕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11월 5일 손전방의 사령부 소재지인 구강을 공격하였다.
강서성 최북단에 위치한 구강은 장강 남쪽 기슭의 항구도시이다. 구강은 강서성의 주요한 하천인 감강(赣江)이 파양호(鄱阳湖)를 통해 장강에 흘러드는 합수목에 위치했다. 그리고 중국의 명산 려산(庐山)을 등졌기 때문에 구강은 더욱 유명해 졌다. 장강 중류의 주요한 항구도시이며 남북 철도 대동맥인 경구선(京九线) 중부의 중요한 도시인 구강시는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리종인 부대와 정잠의 6군 부분적 부대가 구강 공격전에 참여하였다. 6군의 조선족 혁명가 리검운(李检云)은 포병 련장으로 출전하였다가 구강 포대에서 손전방군을 격파함으로써 영장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북벌군은 손쉽게 구강을 점령하고 예봉을 남창으로 돌렸다.
11월 6일, 북벌군은 북, 남, 서 삼면으로 남창을 포위하고 제2차 남창공격전을 시작하였다. 치렬한 접전을 거쳐 8일 남창이 함락되였고 3만여명 적들이 포로되였다. 남창이 공략되자 장개석은 포로들을 전부 자기의 직계부대에 편입시키고 남창에 북벌군 대본영(大本营)을 설치하였다. 남창전투에서 군벌 손전방의 주력이 전부 소멸되였고 손전방은 남경으로 도주해 버렸다.
제2차 남창공격전에서 자랑찬 우리민족의 영웅적 투사인 김준섭이 희생되였다. 북벌전쟁의 선봉대로 엽정부대의 정사교, 하승교 전투를 엄호하였고 남창 공격전에서 앞장서서 달리던 김준섭은 남창 교외의 락화(乐化)역 전투에서 희생되였던 것이다.
김준섭(金俊燮 ?--1926)은 일명 강화일이라고도 한다.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오동리(明川郡 梧桐里)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 쏘련 군관학교 기관총 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광동에 와서 중국 대혁명에 뛰여 들었다. 1926년 2월 쏘련으로부터 중국 광동성에 온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전문적인 군사지식으로서 국민혁명군을 위해 복무하였다.
김준섭은 광동성 혜주(惠州)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6군 55단의 기관총련 소좌교관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혜주에 기관총 훈련반을 꾸렸는데 김준섭은 훈련반의 교관으로 초빙되였다. 당시 6군에는 김준섭과 같이 전문 기관총 기술을 배운 인재가 없었던 것이다. 훈련반 학원들은 6군 각 부대의 련장, 패장급 장교들이였다. 중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은 김준섭은 한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수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인내력을 가지고 강의했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의 뜻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밤이면 부지런히 고장난 기관총을 수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김준섭은 부대 장병들과 훈련반 학원들의 애대를 받았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김준섭은 6군을 따라 호남, 호북 전장으로 이동하였다. 4군, 7군 주력부대가 공격을 도맡았고 6군, 3군은 주력부대를 협조하는 한편 강서의 손전방 부대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9월 북벌군이 정사교, 하승교에서 치렬한 접전을 치를 때 김준섭은 기관총 부대를 거느리고 엽정 선견부대의 공격을 협조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후 김준섭은 6군을 따라 강서 전장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는 남창 공격전, 남창 방위전에 참가하여 영용히 싸웠고 11월 제2차 남창공격전시 락화역 전투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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