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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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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3)
2007년 08월 20일 19시 21분  조회:3360  추천:54  작성자: 김성룡

    광주봉기 첫날 가장 치렬한 전투는 적의 공안국을 점령하는 전투였다. 혁명적 광주시민들에게 있어서 광주시 유신로(新路) 위치한 공안국(公安局) 반동군벌의 소굴이였고 적의 완고한 보루였다. 그러므로 이곳을 신속히 점령해야만이 혁명적 군민들을 고무할수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자 교도단의 부분적 부대는 엽용() 인솔하에 로동자 적위대와 함께 공안국을 공격하였다. 조선인 혁명가 리영(李瑛) 참모의 신분으로 엽용을 도와 공격전을 지휘하였다.

   리영의 원명은 리용()이다. 그는 <헤그밀사> 사람이였던 리준의 장남으로서 일찍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그후 쏘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쏘련 군사고문의 신분으로 광주에 있었다. 리용은 한때 국민혁명군 산두시 포병영 영장을 맡기도 하였다.

 

(권립교수) 다른 한편 조선족 군사고문 리용은 엽용과 함께 적의 완고한 보루인 공안국을 들이쳤습니다. 봉기군은 적의 장갑차를 짓부시고 2천여명의 혁명자들을 구출해 냈는데 그중에는 조선족이 6명이나 있었습니다.

 

   공안국 공격전은 로동자 적위대 주력이 맡았다. 부대는 두길로 나뉘여 공안국을 포위하였다.

  공안국 국장인 주휘일() 급급히 보안대(保安), 경위단(卫团) 불러 사수하려 했지만 경위단도 이미 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는 황급히 남은 부대를 이끌고 요충지를 사수하는 한편 기회를 보아 도주하려 하였다.

   사면으로 공격해 오던 로동자 적위대는 혜애로()에서 적의 장갑차와 부딛쳤다. 적들은 장갑차를 리용해 많은 봉기자들을 살상하였다.

   위급한 시각 엽검영이 교도단 전사들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다. 조선인 혁명가 리용은 기관총 화력을 조직해 효과적으로 적의 화력을 통제하였고 몇몇 용사들은 폭약을 들고 장갑차에 덮쳤다.

   두려움 없이 싸운 봉기군 용사들은 장갑차를 까부시고 공안국으로 돌진하였다. 치렬한 육박전에서 많은 적들이 소멸되고 주휘일은 일반인 옷을 바꿔 입고 도주해 버렸다. 30여분의 전투에서 봉기군은 천여명을 포로하고 공안국을 점령하였다.

   전투가 끝난 봉기자들은 공안국의 감옥 문을 부시고 적들에게 감금되였던 2천여명 혁명자들을 구해냈다. 그속에는 조선인 혁명자 6명도 포함되여 있었다.

 

    2004 2 9 오전 답사팀은 광주봉기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광주시 기의로() 200번지에 위치하고있었다. 기의로는 유신로였고 기념관 건물이 바로 공안국 건물이였다. 봉기군은 당시 국민당 광동성회(广) 공안국으로 사용되였던 이곳을 점령한후 이곳에 로농홍군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기념관에 도착해 보니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월요일이면 모두 출근하여 근무를 볼줄 알았는데 기념관에서는 공휴일에 시민들에게 기념관을 개방하기 위해 정상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휴식한다는것이였다. 당직을 서는 사람을 찾아 의사를 이야기하고 기념관을 볼수있었다.

   철문을 들어서니 노란색 회칠을 2 건물이 나타났고 건물 앞에는 대리석 동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광주봉기의 지도자들인 장태뢰, 팽배, 주문옹의 동상이였다. 정원에는 해묵은 나무가 그루 있었고 주건물 량측에 역시 2 건물이 붙어있었는데 남루() 북루()라고 했다. 당직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주건물이 바로 쏘베트정부 집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이였고 3층으로 남루는 경위련이 주둔하고있었다. 북루는 홍군총지휘인 엽정의 사무실로 사용되였다 한다

    기념관 총면적은 5,990평방메터였는데 가운데 청사는 장태뢰 사무실, 쏘베트정부 회의실, 쏘베트위원 사무실, 구호실로 복원되여 있었다. 일본침략군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되였던 남루는 수건되여 지금 광주봉기 진렬실로 사용되고 북루는 광주시 공안국에 소속되여있었다.

 

   사하진과 연당의 적을 숙청한 양달부와 김산이 지휘부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경이였다. 공안국은 이미 점령되였고 혁명위원회 사령부가 이곳에서 일을 보고있었다. 엽정에게 상황을 회보한후 양달부와 김산은 사하진으로부터 오는 포로들을 기다렸다.

   천여명 포로들이 공안국 정원에 도착하자 양달부는 김산의 통역을 거쳐 포로들에게 연설하였다. 연설을 마친 그는 믿을만한 병사 2백여명을 뽑아 그들에게 총과 탄약을 주어 봉기에 참가하게 하였다. 양달부는 부대를 이끌고 공방전이 치렬하게 진행되고있는 12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문덕로(文德路--20세기 2,3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광주시의 유명한 골동품 거리였다. 골동품 전문점이 많았고 난전도 많았다.) 달려갔다.

   적들은 길목에 기관총 진지를 설치해 놓고 미친 듯이 소사하고있었다. 봉기군은 도저히 머리를 들수 없었고 진퇴량난의 경지에 빠지게 되었다. 위급한 시기 이곳에 도착한 양달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일진의 전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지휘부로 달려가 대포를 끌어왔다.

   날은 이미 밝았다. 적이 사수하고있는 주요 건물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12사단 사령부 건물 앞에 국민당 군벌 리제심() 저택이 있었다. 양달부가 대포를 걸고 목표를 조준하였다. 포탄이 리제심 저택 우층에 명중되여 터졌다. 장애물이 제거되고 12사단 사령부가 정면에 나타났다. 번째 포탄은 사령부 건물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양달부가 번째 포탄은 정확히 사령부 2 건물을 강타하였다. 이때 봉기군 전사들은 환성을 올리며 돌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부대의 전사들이 화염병을 사령부에 던졌기 때문에 주변에는 화광이 충천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불길을 뚫고 들어갈수 없었다.

   12 11 오전까지 12사단 지휘부, 장발규의 4 지휘부, 관음산 부근을 제외하고는 광주시 중심이 모두 봉기군에 의해 통제되였다. 도처에 붉은기가 휘날렸고 로동자, 병사, 학생들이 동원되여 다투어 봉기군을 도왔다.

   중산대학의 혁명적 학생들도 학교에서 경찰들의 무기를 빼앗고 반혁명 학생들을 제압하였다. 가운데는 장지장(志章), 김세영, 류우상을 비롯한 조선학생들도 있었다.

 

(권립교수) 중산대학의 수십명 우리동포 학생들은 봉기가 시작되자 학교 경위대의 총을 빼앗아가지고 국민당 우파분자 네명을 처단하고 봉기군 선전대에 뛰여들었다. 그들은 무기 운반과 부상병 수송, 선전삐라 살포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중산대학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삐라를 살포하였고 거리연설을 진행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봉기의 의의를 알게 하였다.

 

   봉기군 부대에 파견되였던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들은 이때 유신로에 위치한 공안국에 모여 쏘베트정부 설립을 준비하였다. 많은 혁명적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공안국에 모여왔다.

 

(권립교수) 공안국을 점령하자 공안국 정면에는 광주쏘베트 정부라는 간판이 내걸리고 붉은기가 휘날렸습니다.

 

   공안국이 봉기군의 손에 들어오자 봉기군은 이곳에 봉기군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날이 밝자 봉기군 각부대 로동자, 농민, 병사 대표들이 비밀리에 총지휘부로 모여왔다. 공안국은 인차 새롭게 단장되였다. 벽에는 맑스와 레닌의 초상이 걸렸고 십여개 책상을 한데 모아 대회 주석단이 만들어졌다. 주석단 주변에는 많은 등나무 걸상을 배렬해 놓았다. 공안국 대문에는 광주쏘베트정부라는 주문옹(周文雍) 친필 액자가 걸려있었다.

    9시쯤 되니 3만여명의 대중집회가 열렸다.

   양달부, 김산, 김규광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도 집회에 참가하였다. 사람들은 국제가를 부르면서 쏘베트정주 수립를 기다렸다. 집회에서 광주 로동자농민 민주정부를 설립하고 16 위원을 선출하였다. 소조정(兆征) 정부 주석으로 선거되였지만 그는 농민군을 동원하기 위해 동강()으로 갔기 때문에 장태뢰가 주석대리를 맡았다.

   집회에서는 몇가지 결의를 지었다. 광주쏘베트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세계 인민들에게 알리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반동파들을 숙청하고 해륙풍쏘베트정권과 련락을 취하며 로농홍군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광주 쏘베트정부 수립은 광범한 로동자, 농민, 병사, 학생들의 열렬한 옹호를 받았다. 거리에는 붉은기가 휘날렸고 곳곳마다 프랑카드가 걸려있었다. 광주거리는 혁명가곡을 부르는 노래소리로 넘쳐났다.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음산 남부 번화가인 장제()부근의 전투는 계속 치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양달부는 소분대를 거느리고 4 사령부로 달려갔다. 장발규의 4 사령부는 광주시 주강이북의 장제에 위치하고있었다. 이때 조선인 혁명가 리빈도 북부경계 임무를 완수하고 장제 부근에서 싸우고있었다.

   로농홍군은 더욱 효과적으로 적을 대치하기 위해 관음산에 대포를 걸어놓았다. 양달부와 리빈을 비롯한 몇몇 우수한 조선인 포술 전문가들이 모여 사령부를 포격하려 하였다. 양달부가 직접 포를 조준하였다. 그는 지형에 익숙한 로동자 적위대 대원이 가르치는 곳을 정확히 측량하고 발포하였다. 포탄은 사령부 부근에서 터졌지만 적들은 계속 사수하였다. 전투는 대치단계에 들어갔다.

 

    이날 지휘부에서는 작전회의가 소집되였다. 엽정은 12 새벽부터 주강 북안의 적의 거점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공격을 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공격부대를 조직하여 주강 이남의 적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2 12, 날이 밝기 시작하자 광주의 정세는 위급해 지기 시작하였다. 장발규, 진공박, 황기상을 비롯한 국민당군 두목들은 주강 남안의 리복림을 사촉하여 봉기군을 진압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주둔하고있던 영국, 일본 제국주의 함대도 조계지의 교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봉기에 간섭해 나섰다.

이날 아침 사면(沙面) 주강에 정박하고있던 제국주의 군함이 봉기군을 향해 포를 쏘았다. 부근에서 작전하고있던 리빈을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은 더욱 적개심으로 불탔다. 일본 포함 척이 함부로 발포하면서 부대를 상륙시키고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장병들은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민을 마음대로 수탈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자 모두 혈안이 되었다. 리빈은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포를 끌어 왔다. 그는 직접 적함을 조준하고 발포하였다. 포탄은 정확히 명중되여 일본군함 ?야마모도(山本)호에 치명타를 안겼다. 중상을 입은 일본 포함은 검은 연기를 길게 토하며 도주해 버렸다.

    봉기군은 계속 제국주의 포함과 격전을 벌였다. 양달부와 기타 조선인 장병들도 달려와 참전하였다. 조선인 포술전문가들은 정확히 세방을 쏘았다. 백발백중이였다. 포함 연통 세개가 박살나 허공에 날렸다. 질겁한 포함은 기를 내리드리우고 급급히 자리를 떴다

조선인 투사 리빈이 일본포함을 포격한 사면은 주강이 두갈래로 나뉘는 백아담() 섬이였다. 북쪽 광주시의 비교적 번화한 곳이고 옛날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있는 조계지였다. 월수산에서 남으로 오다가 연강로(沿江路) 따라 가노라면 즐비한 서양식 건물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곳은 술집도 많았다. 다정한 모습으로 거리를 다니는 련인들도 많이 볼수있었다. 이전에나 지금에나 광주의 가장 번화하다고 하는 장제를 지나면 강에 커다란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사면섬이다.

   돌을 던져도 그냥 닿을만한 거리였다. 강에는 류람선 몇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밤이 되면 관광객들은 류람선을 타고 주강에서 광주시의 황홀한 야경을 감상한다는 것이다.

번화한 거리, 답사팀은 그속에서 조선혁명가들이 싸웠던 전적지를 찾아 헤매였다. 무거운 심정을 안고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거리의 번화함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득히 그때 이야기, 그것도 이방인의 이야기를 누군들 기억해 주겠는가? 사람들은 그냥 거리를 다녔고 아늑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련인과 함께 다정히 앉아있을뿐이였다. 우리가 찾고있는 전적지, 25세의 피끓는 조선인이 두려움 없이 싸운 전적지는 그냥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보다는 자유와 독립을 빼앗아간 원쑤에 대한 지대한 분노를 억제할길 없어 용감히 맞써 적과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은 그냥 우리 마음속 기념비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진설명봉기당시 적공안국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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