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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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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제2차 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 답사
2007년 12월 11일 09시 04분  조회:3995  추천:44  작성자: 김성룡

1932 국민당 반동파들은 강서 중앙쏘베트지역에 대한 4 포위토벌을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직접 총사령을 겸하고 수십만 군사를 끌어 모아 서금으로 공격해 왔다. 이시기 왕명(王明) 대표로 좌경 모험주의 사상이 공산당 중앙을 통제하고있었다.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 지역에 림시 중앙대표도 왕명로선을 고취하면서 홍군이 창도한 정확한 전략, 전술을 배격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인 중국에서 혁명의 승리를 이룩하려면 장기적이고 복잡한 투쟁을 진행해야한다는 객관법칙을 무시하고 대도시를 공격하는 것으로 쉽게 혁명의 승리를 이룩할수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십만 반동군대가 포위 공격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모택동은 점차 중앙쏘베트 당과 홍군의 지도적 지위에서 밀려나 쏘베트 정부 주석직만 보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덕과 주은래는 계속 모택동이 창도한 적의 예봉을 피하고 약한 적들을 각개 섬멸하는 유격전술로 적의 4 포위토벌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3 2, 주덕과 주은래가 이끄는 중앙홍군은 황피(黄陂) 대룡평(大龙坪) 부근에 매복했다가 50 전부를 섬멸하고 52 사장 리명(李明) 생포하였다. 3 1 홍군주력부대는 계속 적들을 추격하여 59 사장 진시기(陈时骥)마저 생포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국민당군 총지휘 진성(陈诚) 6 사단 십여만명 군사를 길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3 15 홍군주력부대는 초대강(草臺冈), 동피(东陂) 부근에 매복했다가 2 사단을 포위 섬멸하였다. 세차례 전투를 거쳐 홍군은 장개석 반동군대 3만여명을 포로하고 수많은 무기를 로획함으로써 4 반포위토벌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서금에서 1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개최되였던 엽평촌을 답사한 2004 2 12 오전, 답사팀은 2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사주패(沙州坝) 보았다.

사주패는 서금시 서남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대회 개최지였던 강당은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하고있었다. 기념관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나무 사이로 거대한 로씨야식 건물이 보였다. 건물정면은 6 기둥에 의해 5 부분으로 나뉘여 졌다. 가운데 정문이고 량옆에 각기 하나씩 있었으며 정문과 곁문 사이에 창이 있었다.

정문 웃부분에 커다란 붉은 별이 새겨져 있고 량옆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낫과 망치의 표식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이곳이 바로 2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던 회의장이였고 쏘베트정부 강당으로 사용되였던 유적지였다. 강당은 1933 8월에 착공하여 년말에 준공되였다고 밝혀있었다. 2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는 1934 1 21일부터 2 1일사이에 진행되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1933 10월부터 시작된 국민당의 5 포위토벌을 한창 진행되고있었다. 장개석은 동북 3성을 강점한 일본침략자들과 이른바 당고협정(塘沽协定) 체결하는 한편 50여만 병력으로 홍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강당 문을 들어서니 써늘한 느낌을 주었다. 부지면적이 5 평방메터에 달하는 강당 천정은 십여메터나 되어 공간이 컸다. 강당에는 무대를 향해 나무 걸상들이 배렬되여있었다. 그러나 강당은 창이 적어서 비교적 어두운 편이였고 무대 벽에는 당시 2 대표대회에서 선출한 중앙집행위원회 명단을 밝혀 놓은 액자가 있었다. 자세히 찾아보니 거기에 조선혁명가 삐스티(毕士悌) 이름도 있었다. 삐스티는 양림의 로씨야식 이름이다.

대회에서는 모택동의 정부사업보고를 청취하고 헌법대강(宪法大纲) 수개안을 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던 것이다.

국공분렬 쏘련으로 갔던 양림은 동북에서 한동안 혁명하다가 주은래의 소환을 받고 중앙 쏘베트혁명 근거지로 오게 되었다.

1930 봄에 귀국한 그는 상해에서 조직을 만났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동북의 유격 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를 동북에 파견하였다.

양림은 조선의 녀혁명가 리추악과 함께 동북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양림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东满特委) 위원 군사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이주민이 많이 집중된 연변지역을 다니면서 대중운동을 령도하였고 혁명무장조직을 일떠세웠다. 1931 일본침략자들이 동북을 강점하자 그는 재조직된 만주성 위원회의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게 되었다. 곳에서 유격대 조직에 진력하던 양림은 1932 4 길림성 반석(磐石)지역에서 일어난 기세 드높은 반일 농민봉기를 령도하였다. 그는 봉기자들을 이끌고 50여명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일제의 철길을 파괴하였다. 봉기후 양림은 조선혁명가 리동광(李东光), 리홍광(李红光) 이끄는 <개잡이대> 중심으로 반석 로농의용군(劳农义勇军) 건립하였다. 부대는 장시기 동북에서 활약하면서 후에는 동북항일련군(东北抗日联军) 1군으로 확대되였다.

1932 가을,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이 계속 확대됨에 따라 우수한 혁명인재가 많이 필요되였다. 양림은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상해 지하당 조직의 도움으로 중앙쏘베트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안해 리추악과 작별하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새로운 사업터로 떠났다. 그후로 양림은 사랑하는 안해이며 혁명동지인 리추악을 다시 보지 못했다. 동북에서 계속 혁명활동에 종사하던 리추악은 승리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적들에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오랜 상급이였던 주은래는 양림을 중앙정부 로동 전쟁위원회(劳动与战争委员会)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의 적위대(赤卫队) 령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것이 위원회의 주요 과업이였다. 로동 전쟁위원회 주임인 주은래가 총책임을 맡았다. 양림은 이시기 쏘련에서부터 사용하던 삐스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어 어음으로 읽으면필사적이라는 뜻도 된다.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그의 굳은 결심이 함축된 이름이다.

중앙 쏘베트지역에서 양림은 선후로 강서군구(江西军区) 회창(会昌), 심오(寻乌), 안원(安远) 군분구 사령원, 홍군 23 군장으로 있었고 1933 봄에는 중앙군사위원회의 배치에 따라 월감군구(粤赢军区) 사령원으로 사업하였다. 이해 6 그는 홍군주력부대인 1방면군 1군단 참모장을 담임했고 1934 1월부터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总动员武装部)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광범한 대중들을 동원하여 일선의 전투를 지원하였고 농민, 학생들을 어엿한 홍군전사로 훈련해 냈다. 그리고 유력한 후방담보를 제공함으로써 홍군 주력부대의 4 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적극 도왔다.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 책임자들은 조선혁명가인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모택동은 양림의 안해 리추악을 동북에서 중앙쏘베트 지역으로 전근시키라고 지시하기도 했지만 후의 상황이 어려워 실현되지 못했다.

 

(권립 교수) 1934 1 21일에 중화쏘베트 2 전국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열렸다. 홍군총병참부 참모장으로 있던 양림은 대회의 주석단 성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에서 양림은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됐다.

 

2 전국 쏘베트 대표대회가 개최되였던 강당에서 삐스티라는 이름을 찾은 우리는 모두 흥분되였다. 우리민족 혁명가가 이처럼 중요한 대회에서 이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였다. 비록 이름은 뒷부분에서 찾을수있었지만 중국 공산당내 주요인물들인 섭영진, 엽검영, 림표, 진의 등과 서렬을 나눌 정도였으니 중국공산당에서의 그의 지위가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수있었다.

2천여명을 용납할 있는 강당은 회음(回音) 좋았고 시야가 트였다. 창문보다 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였는데 해설원의 설명에 의하면 적의 폭격에 대처하기 위해 쉽게 회의장을 빠져 나갈수있도록 문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강당 건물 뒤에는 방공호가 있었다. 너무 오래된 방공호이고 지질구조의 변화를 고려해 개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개최지에 방공호까지 파놓고 있었으니 당시 홍군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수있었다. 국민당의 비행기가 수시로 폭탄을 던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 유적지 곁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원상태로 보존된 사주패 마을이였다. 당시 쏘베트 림시중앙정부 기관이 바로 마을 수십채의 가옥에 설치되였다. 집들은 대체로 흑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 강남의 풍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은 모두 흰벽에 검은 기와였고 붉은 글로 <홍군만세!>, <인민들은 홍군을 옹호한다!> 구호가 씌여진 담벽이 이따금 보였다. 푸른 잔디와 나무 사이에 얼른거리는 가옥들은 유난히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강당과 마을 사이에는 거대한 고목에 가리운 기와집 채가 있었다. 모택동이 거주하던 곳이다. 나무는 가지를 펼쳐 마당과 기와집을 모두 덮을 정도였다. 홍군부대 지휘권을 박탈당한 모택동은 이시기 군중사업과 작풍 사업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이를 많은 농민들과 접촉하면서 인민들의 질고를 헤아릴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였다. 쏘베트 중앙정부 주석이였던 모택동은 간부들의 봉건악습을 고쳐주고 부패를 방지하는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군중의 생활을 관심하고 사업 작풍에 주의하자>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고 <탐오, 랑비행위를 징벌할데 관한> 26 주석령을 내렸다. 그때 쏘베트 2 대회 강당을 지을 공정처의 좌상운(左祥云) 처장의 직무를 리용해 공금 246원을 탐오하고 도주하다 체포되였다. 중앙정부는 좌상운을 공개 심판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같은 유력한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쏘베트 지역의 군민의 정은 더욱 깊어 졌고 인민들은 공산당 간부와 홍군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인민들은 당의 간부들을 애대하였고 자녀들을 홍군에 보냈다.

모택동은 실천속에서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을 발동한다는 군중로선을 제기하게 되었다. 쏘베트 지역 인민들은 지금도 스스럼없이 농민들과 접촉하고 인민들의 질고를 헤아려주는 모택동을 잊지 않고있다.

사주패 마을 앞에는 작은 늪이 있었고 늪가에는 작은 돌기둥과 쇠사슬로 둘러놓은 우물 하나가 있었다. 우물은 1933 9 모택동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함께 팠다고 한다. 1950 현지인들은 모택동을 기념하기 위해 우물가에 비석을 세우고물마실 우물 판사람 잊지 않고 시시각각 모주석을 그리네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우물을 붉은 우물이라 해서 홍정(红井)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우물을 마실수있었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모택동 주석과 같이 실천을 중시하고 인민의 질고를 헤아려 줄줄 아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중국혁명을 이끌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때문에 양림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중국공산당을 믿었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함께 조선인민의 독립이 이룩될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을 따라 두려움 없이 투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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