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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1935년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중국을 가일층 침략하기 위해 화북 각성으로 하여금 남경 중앙정부를 리탈하게 하는 이른바 “화북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무력으로 남경정부에 압력을 주어 <하매협정(何梅协定)>을 비롯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화북의 통치자들을 회유하여 저들의 괴뢰로 삶았다.
이해 11월 11일 일제는 <화북의 고도로 되는 자치안>을 접수할 것을 화북의 최고 실력자인 송철원(宋哲元)과 남경정부에 강요하였다. 12월 18일 줄곧 일제와 타협하면서 국권을 팔아먹던 국민당 정부는 일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화북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하북, 차할 정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것을 력사에서 화북사변이라고 한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고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조작한 화북사변은 무능한 국민당 통치자들에게 접수되였지만 천백만 중국인민의 단호한 반대를 받았다.
날로 엄중해지고있는 민족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에서는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게 항일하자”는 구호를 제기하고 전국인민의 항일구국 운동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1935년 12월 9일 북평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성세호대한 애국운동이 전개되였다. 3천여명 애국 학생들이 신화문 앞에 모여 대규모의 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하북, 차할 정무위원회의 설립을 반대하고 화북자치를 반대하며 화북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였다.
12월 12일 상해, 남경, 무한, 광주에서도 애국 학생들의 시위가 진행되였다.
북평 12.9운동 소식이 천진에 전해지자 리철부와 천진의 광범한 애국학생들은 12월 18일 항일구국 대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리철부는 여러 학교들과 련락을 가지고 선전물을 인쇄해 놓았으며 시위대오의 전진 로선을 확정하였다.
12월 18일 오전 천진시 법상학원(法商学院)에 모인 애국 학생들은 리철부를 따라 일본 주둔군이 둥지를 틀고있는 해광사(海光寺)로 출발하였다. 시위자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선전물을 대중들에게 살포하면서 전진하였다.
다년간 리철부에 대한 연구를 해왔던 원 중앙인민방송국 김형직 교수는 천진 학생운동 과정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김형직 교수) “처음에 불과 백명밖에 안되였습니다. 그들은 구호를 부르면서 거리에 나섰습니다. 일본군대가 천진에 들어와 일본땅크가 천진의 거리를 창궐하게 다닐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학생들이 과감이 거리에나와 시위를 벌였던것입니다. 그들이 금강문, 해광사를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뛰쳐나왔고 시민들이 합류해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만여명 시위대오가 성세호대하게 거리를 메우며 나갔습니다.”
시위대오는 고루와 패루를 지나 곧바로 해광사의 일본군 병영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격 자세로 시위자들을 위협하였다. 이때 리철부가 앞장에 서서 기타 학생들과 팔을 겪고 구호를 웨치면서 계속 전진하였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감히 사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날 점심 12시 시위자들은 남개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수만명이 참가한 항일구국 대회를 열었다. 리철부의 조직력에 의해 천진의 12월 18일 애국적인 반일구국 운동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2004년 1월 8일, 답사팀은 리철부가 령도한 애국학생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천진의 거리를 걸었다. 금강교를 지나 번화한 옛 금융거리인 천진시 권업장(劝业场)에 이르렀다. 돌로 축조한 옛 건물이 많은 거리였는데 30년대 천진시의 유명한 금융가였다.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해광사는 사당자리인 것이 아니라 천진시의 한 지명이였다. 지금 해광사 부근에는 종련사(宗莲寺)라는 절 하나가 있었다. 고풍적인 고루와 패루를 지나 해광사에 도착하였다.
해광사는 천진시의 번화가이고 중심가였다. 당시 애국 학생들이 전진한 로선을 따라 걷노라니 저도 모르게 힘이 솟구쳤다. 맨 주먹에 피 끓는 가슴을 내밀고 간악한 일제의 총구를 향해 침착하게 전진했던 조선투사 리철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 모르는 이들의 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각성되였고 드디어 전민이 일제를 반대하는 기세 드높은 항일투쟁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당사 판공실의 황소동 비서장이 소개한데 의하면 당시 천진시의 지하당 사업은 아주 어려웠다. 당내에 좌적인 모험주의 로선이 성행했기 때문에 조직체계가 혼란했고 또 많이 파괴되였다. 게다가 일제특무와 국민당 통치자들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였다. 거듭 파괴된 지하당조직은 아무런 조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쟁경험이 풍부한 리철부와 같은 유력한 조직자가 없었다면 12.9애국운동을 지원하는 천진의 12월 18일 애국운동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권립 교수) “1935년 1월 준의회의후 왕명의 좌경로선이 시정됐습니다. 그리고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중앙 북방국 서기직을 맡았습니다. 류소기는 왕명의 좌경로선을 반대하고 혁명의 력량을 축적하면서 당의 지하사업을 견지한 리철부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리철부는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조직의 두터운 신뢰는 리철부에게 더욱 큰 힘을 주었다. 그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천진시 당조직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리고 천진, 북경, 석가장 각지에 지하당을 재조직하였다.
리철부는 젊은 당 간부를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안해 장수암에게는 조카딸 장결청(张洁清)과 조카 장문송(张文松)이 있었다. 그들은 늘 리철부의 집에 놀러왔고 자녀를 두지 않았던 리철부와 장수암 부부는 이들을 극진히 사랑해 주면서 혁명의 도리를 이야기 해 주었다. 리철부는 공산주의 리론저서들을 설명해 주었고 지하투쟁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었다. 장결청과 장문송은 리철부의 가르침에 따라 좌익문화단체와 항일구국 단체에서 활약하였고 선후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의 훌륭한 간부로 양성되였다. 훗날 장결청은 팽진의 부인으로 되었고 장문송은 공화국 창건후 교육부 부부장을 지냈다.
1936년 봄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당중앙 북방국 대표로 사업하게 되었다. 그는 와요보 회의정신에 따라 좌경 오유를 시정하기 시작하였고 또 직접 리철부와 면담하였다. 그는 리철부의 조직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리철부를 다시 천진시 당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7년 5월 당중앙에서는 연안에서 제7차 전국 대표회의와 백색구역 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백색구역 대표로 리철부가 연안에 가게 되었다. 그는 류소기, 팽진과 함께 안해 장수암과 작별하고 연안으로 떠났다.
황소동 비서장이 소개한데 의하면 장수암도 같이 연안에 가게 되었지만 당시 투쟁경험이 미숙한 요의림에게 천진과 하북의 당조직 사업을 전부 맡 길수 없어 장수암은 그냥 천진에 남았다.
연안에서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를 준비하고있었다. 대회를 앞두고 당내에서는 백구사업에 관련한 론쟁이 진행되였다. 원 북방국 서기를 맡았던 고원화가 계속 좌적인 로선을 고집하면서 류소기와 리철부의 사업방법을 비난하였다. 사람들은 다시 이른바 철부로선을 거론하면서 첨예하게 투쟁하였다. 이때 당중앙에서 최종 결의를 지었다. 모택동은 직접 결의를 짓고 철부동지가 반영한 의견서는 기본적으로 정확하고 철부 동지는 훌륭한 동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류소기 동지는 백구의 대표이고 철부동지는 백구의 맑스주의자라고 하였다.
백구공작회의가 끝난후 당중앙에서는 리철부를 연안에 남겨 서북국 사업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연안에서 리철부는 건강이 악화되여 몸져눕게 되었다. 장기간의 지하투쟁에서 몸과 마음이 피로할대로 피로해진데다가 페결핵에 장질부사까지 겹쳐 그는 1937년 7월 10일 연안 휴양소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리철부의 병이 위중할 때 조직에서는 천진에 있는 장수암에게 통지했지만 교통상황이 불편했던 탓으로 장수암은 리철부가 서거한지 3일째 되는 날에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들 혁명부부는 끝내 마지막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장수암은 연안에서 중앙에 편지를 써 “철부로선”을 철저히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진운, 리부춘을 비롯한 당의 책임자들이 중앙의 결의를 장수암에게 알려주었고 모택동이 직접 결정하여 이젠 철부로선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장수암은 크게 통곡하였다.
리철부가 서거한후 당중앙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가지고 그의 유체를 청량산(清凉山)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묘소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비에는 <조선공산당의 창시인의 한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며 하북성위 서기인 리철부 동지 묘지>라고 썼다.
답사팀을 만난 당사판공실 황소동 비서장은 리철부를 연구한 경험을 총화하면서 리철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리철부 동지를 연구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는 충직한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 전사였다고 봅니다. 장수암의 회억에서도 장수암이 무엇 때문에 리철부 동지를 그처럼 존경하고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철부동지가 중국에 온후 장수암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철부 동지는 ‘세계혁명의 성공은 단순히 쏘련혁명의 승리로만 될 수 없다. 반드시 중국혁명의 성공이 있어야한다. 만약 중국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혁명만 성공한다하더라도 동아시아의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중국에 와서 중국혁명에 참가하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단락을 읽고 나는 크게 감동되였습니다. 리철부 동지는 참으로 국제주의 전사의 흉금이라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혁명가 리철부는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동방 여러 민족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피압박 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빛나는 한생을 바쳤다. 장원(长远)한 시각과 높은 식견을 가진 리철부는 일찍부터 조선혁명과 중국혁명, 세계혁명을 련계시키고 목표 명확하게 일제와 싸우면서 굴함없이 항쟁해온 국제주의 투사였다. 그의 빛나는 한생은 중국인민뿐만 아니라 전반 조선민족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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