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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취재인물(내가 만난 사람들)
서울에서 고향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김범진이라고 부르는 이웃동네의 사람으로 이전에 종종 내왕이 있었던 사이였다. 고향을 떠난 십여년만의 상봉이라 그렇게 놀랍고 기쁘지 않을수 없었다. 한참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옆사람이 그를 정모씨라고 부른다.
(분명 나와 같은 김씨인데 난데없이 정모씨라니?…)
그러나 김범진은 아주 담담한 표정이다.
“뭐가 그리 이상하니? 사실 난 몇해전에 언녕 이름을 바꾸었어.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 들어올수 없었으니까.”
나는 의아함을 떨쳐 버릴수 없었다.
“그건 왜요? 무슨 죄라도 지었어요?”
김범진은 서글피 웃었다.
“6년전에 한국신문에 요란하게 실렸댔어. 밀항선을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해양경찰대에 잡혔거든. 그런 경력이 있으니까 감히 본명을 쓸수 있냐.”
6년전의 밀항선 이야기라니 어슴푸레 기억되는 것이 있었다. 중국신문에도 떠들석하니 실린 톱 뉴스였으니깐 말이다. 그 장본인이 고향사람이라니 참말 세상이 작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니까 무척 알고싶겠지?…” 김범진은 고향사람답게 그렇게 쉽게 말꼭지를 떼주었다.
9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려권 수속이 무척 힘들었다. 초청장이 동반해야 했고, 초청장이 있다고 해도 꼭 려권을 받을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때 돈만 두둑히 내면 밀항선을 탈수 있다는 고향사람의 소개에 김범진은 귀가 솔깃, 나중에 친지 4명과 함께 밀항을 단행한다.
김범진은 요녕성 심양에서 기타 밀항자들과 합류, 브로커와 함께 출발지인 장하(庄河)에 갔다. 브로커는 밀항선은 큰배라서 기슭에 닿일수 없다고 했다. 일행은 똑딱선에 몸을 싣고 약 2시간동안 검푸른 바다를 달렸다. 밤장막 아래 희부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이 12메터, 너비 5메터짜리 나무배, 파도가 칠때마다 금세 자빠질 듯 기우뚱거렸고 그때마다 이음목이 무섭게 입을 반뼘씩 쩍쩍 벌리군 하였다. 목에 단박 오라 줄을 매더라도 그런 배에는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는 이미 범의 잔등에 올라 탄 격이였다.
나무배는 가랑잎처럼 파도를 타고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난생 처음 배를 타는 시골사람들인지라 배멀미가 심했다. 여자들은 아이때 먹은 젖물까지 게워낼 심산인지 죽어라고 토악질을 하였다. 그렇든 말든 날이 밝아오자 선주는 20여명 되는 밀항자들을 비좁은 선창속에 떠밀어 넣었다. 창해속에서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배들에게 밀항선이라는게 발각될가 두려워서였다. 선창에는 빵과 물이 나름대로 충분히 실려있었다. 그러나 긴장감과 흥분, 배멀미 때문에 음식물에 손을 가져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내들은 애꿎은 술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바다위에 거밋거밋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김범진은 기다렸다는듯 선창위에 올라갔다. 그때까지 배는 계속 공해를 달리고있었다. 선주는 배가 수시간후에 한국쪽으로 꺾어들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하루낮 하루밤을 자지 못한 선주의 눈에는 피발이 벌겋게 서있었다. “성공할수 있어요?” 김범진은 아무래도 찜찜한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근심말라 해.”
선주는 지도 한장을 꺼내 보였다. 한국 군산 앞바다의 지형도였는데 섬들의 위치, 레이더망 초소, 해양경찰대의 순라시간, 예정 항로 등이 자세히 적힌 첩보급의 지도였다.
“이래 봐도 여러번 군산에 가만히 드나들었다 해. 현지정보랑 일기예보랑 꼭꼭 챙긴다 해. 경찰에게 잡힌다거나 비바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해.”
드디여 나무배는 군산쪽으로 방향판을 돌렸다. 얼마를 갔을가? 멀리 륙지에서 깜박깜박 점멸하는 전등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배에서는 나지막한 환성이 터졌다. 그런데 야단이 났다. 감기에 걸린것처럼 콜록거리던 엔진이 무슨 성깔을 부리는지 느닷없이 멈춰버렸다. “젠장, 물이 들어갔다 해.”
선주는 사람들을 시켜 선창의 물을 퍼내게 하였다. 모두들 마음이 급한지라 손길이 분주히 빨라졌다. 그러나 엔진은 한식경이 지나도록 요지부동. 갑자기 머리우로 하얀 섬광이 펀뜩 스쳐지났다. 탐조등 불빛이였다.
“어이구 발각된거야.”
누군가 나지막히 비명을 울렸다.
아니나 다를가, 불과 몇분후 눈앞에 집채같은 거물이 세개 나타나 나무배를 울바자처럼 둘러막았다. 한국 군함이였다. 밀항자들은 군인들에게 압송되여 옴짝달싹 못하고 군함에 올라탔다. 군함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그들이 탔던 나무배는 손바닥만큼 조그마하게 보였다. “얏따, 그놈의 군함이 크긴 크구려.”
“포로”가 된 와중에도 밀항자들은 신기한 구경을 했노라 저마다 혀를 끌끌 찼다. 시골에서 군함이라곤 TV나 영화에서 얼추 눈요기를 했던 그들이였다. 그들은 인제 바다 밑으로 추락된 신세는 잊어버리고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한국 군인들은 그런 어이없는 군상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라면을 끓여주는 선의를 보여주었다.
배가 군산 부두에 도착하자 한국 언론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왔다. 카메라들이 눈을 뚝 부릅뜨고 있는데다가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머리가 막 어질어질해졌다. 밀항자들은 군산 교도소에서 약 2개월 쭉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인물사진을 찍고 중국 관련측에 전송하여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에 시일이 어느 정도 걸렸던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중국 대련에 강제출국 된후 중국인들로부터 또 반역자라는 눈총을 받아야 했고 약한 다리에 찜질이라고 중국측에 또 인민폐로 벌금 5천원(원화 80만원)을 물어야 했다.
김범진은 밀항사건이 터진 이듬해에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지전장을 뭉치로 날려버린 한국 꿈을 종이장처럼 허망하게 접어 버릴수 없었던것이다. 밀항선을 함께 탔던 친지 4명도 공무와 연수, 결혼 등 명목으로 모두 한국에 다시 들어온다.
“본명을 사용하면 밀항 경력이 들통날 수 있잖아? 그래서 성도 이름도 몽땅 바꾸었고 생일까지 바꾸었어. 말하자면 변성명을 한거지. 어떤 때는 내가 정모인지 김모인지 진짜 착각이 되는거야.”
김범진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역에 나가 기웃거렸다. 혹여 일감을 찾을수 있을가 해서였다. 그의 기색을 보고 한국인 하나 다가왔다.
“자네 노가다를 뛰겠나?”
“예.”
“그럼 뒤를 따라와.”
김범진은 그렇게 일산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당 3만원을 받고 잡부로 일하게 되었다. 문틀을 세우는 일이였는데, 오야지(팀장)는 물론 기타 일군도 김범진에게 내처 허드레 일만 시켰다. 도면을 들여다 볼려고 해도 그때마다 무슨 핑계거리인가 만들어서 자리를 함께 할수 없게 하였다. 김범진은 어깨너머로 목수일을 배우고, 눈어림으로 도면 보는것을 배우면서 4개월을 보냈다.
“그 다음 홀로 서기에 성공한거야. 먼저 돈내기를 했지. 문틀 하나에 7천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이때 김범진은 잡부에서 한 단계 승진을 한 셈이였다. 그후 일에 미립이 트고 돈지갑이 두툼해지자 김범진은 타카, 못주머니 등 도구를 사들였고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원천 오야지(팀장)에게서 하청을 받고 또 아래에 일군 6명을 두는 등 명실상부한 오야지(팀장)로 둔갑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게 1년 푼히 걸렸지. 그동안의 고생이야 이루다 말할수 있겠나.”
김범진은 지난해 4월부터 모 아빠트 건설현장에서 문틀 2만개를 맡았다. 인건비만 한화로 1억원대의 돈이 쏟아지는 큰 일거리였다.
“1월까지 이 일을 끝낸다면서요? 그후에는 어떡할건데요?”
“글쎄 말이다.” 김범진은 약간 주저하는 모습이다.
“사실 인제는 예약이 많이 들어오고있어. 그런데 아무래도 찜찜한데가 있어서 미뤄놓고있는 사정이야.”
그럴 법도 했다. 지난해 5월, 한국정부가 불법체류자들에게 자진신고에 잇따라 허용한 “합법적” 체류기한은 올해 3월까지인데 그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수하 일군들이 혹여 강제출국 당하면 맡은 일들을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그럼 내년 3월에도 귀국을 안 하려는 타산인가 보죠.”
김범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돈만 좀 벌었어도 당연히 귀국할거 아니겠어?”
김범진은 지난해 추석전까지 그간 산더미처럼 쌓인 빚돈을 깨끗이 물었다고 한다.
“아니, 한국으로 온지 5년이 넘는다면서요? 인제 겨우 빚을 갚아요?”
“처 때문에 빚이 또 늘어났댔어.” 김범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1998년에 김범진의 안해가 입국하여 식당에서 일하였다. 덕분에 1-2년만 맞벌이로 벌면 빚을 인차 갚겠다 싶었는데 때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누군가 출입국사무소에 안해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하였던 것이다. 남편에게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당에 나간 안해는 그게 마지막 걸음이였다. 행방을 알리느라고 안해가 수용소에서 어렵사리 걸어온 전화에 김범진은 기가 막혀 한동안 할말을 잊어버렸다. 입국 4개월만의 일이였으니 입국비용 1천여만원을 또 고스란히 빚으로 만들어야 하였다. 김범진의 안해는 2년전에 변성명한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러니저러니 빚돈들은 수년동안 새끼를 치는 이자 때문에 원화로 약 5천만원, 인제 빚을 말끔히 갚아서 한 시름을 덜긴 했으나 그렇다고 냉큼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이다.
“고향에 돌아가 집 한채는 마련해야 하고 무언가 사업을 할 기반은 갖추야 할거 아니냐?…” 김범진은 어름 잡아 아직도 2년정도는 더 버티고 있어야겠다고 실토한다.
“뭐니뭐니해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거야. 중국에는 이렇게 좋은 돈벌이 기회가 없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목돈을 쥐어 볼수 있겠어?”
김범진과 함께 일하는 일군들도 동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리들은 언제 강제출국당할지 모르는 신세잖아.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면 아득바득 일할 수밖에 없잖느냐.”
김범진은 지금 안해가 입국하여 한 지붕을 이고 살지만 사실 이름이 부부사이지 서로 이야기할 사이도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오전 6시이면 일어나는거야. 건축현장에 7시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저녁이면 12시가 넘어야 들어가기가 일쑤이지. 그런데 처는 저녁 10시에 들어와 오전 10시면 나가거든. 서로 잠을 자는 얼굴밖에 볼수 없단 말이야.”
핸드폰 벨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자주 끊어놓았다.
“또 술 먹자는 전화겠지.” 김범진은 시큰둥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날마다 저녁쯤이면 의례 그런 주문이나 전갈이 들어온다고 한다.
“모두 고향사람들이야. 너도 잘 아는 이웃사람들이야.”
김범진은 한국에 고향사람들이 3-4백명 들어왔다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한 가구에 거의 한명 꼴이니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고있는 중국조선족이 약 10만명, 그 엄청난 숫자를 피부로 느낄수 있는 순간이였다.
“우리 건축현장에 식당이 있는데 그저께 새로 들어온 아줌마가 글쎄 한고향사람이 아니겠어? 정말 서울이 작긴 작은 모양이야. 허허.”
김범진의 웃는 얼굴에서 금세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것만 같아 마음이 이상해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한 사람들이다. 서울 어덴가의 식당에서, 아니면 어느 건설현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닿여오는것이리라. 사실 그들은 강제출국이 행하여지더라도 얼마후 또다시 달라진 얼굴로 입국할 터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정말 일을 많이 해. 돈만 된다면 어지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꺼리지 않아. 아마 조선족들이 없으면 금방 일손을 멈춰야 할 회사가 한두개만 아닐거야. 건설현장에서는 일군들이 거개 5-10명씩 함께 뛰거든.”
어덴가 호기가 넘쳤지만, 김범진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였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일시적인 “인력 진공상태”가 이뤄질수도 있는 실정이다. 관련업계와 중소기업청 등에 따르면 외국인 근로자가 몰려있는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의 경우 지난해 5월이후 20%가량이 더 많은 임금을 주는 다른 회사나 인근공단으로 옮겨갔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기업들은 정상가동이 어려운 상황까지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말 자유왕래를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이처럼 맨날 마음 졸이고 살지 않을텐데. 우린 한 피줄이 아니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고국땅인데 왜 이렇게 남스럽게 피곤하지?” 김범진의 얼굴에는 한순간 그늘이 비꼈다. 그래서인지 가무스레한 그의 얼굴은 더군다나 흐릿해 보인다. 가물가물해지는 김범진의 얼굴에서 또다시 수많은 얼굴을 보는듯한 환영이 안개처럼 일어나 갑자기 머리속이 혼란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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