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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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괴수(蚩尤怪樹), 그 천년의 비밀
2007년 05월 22일 08시 59분  조회:3822  추천:127  작성자: 김호림
 

  넓은 황야에 병풍처럼 둘린 민둥산과 드문드문 나타나는 촌락… 싯누런 황사에 덮인 탁록(涿鹿)은 그렇게 황량한 모습으로 처처히 다가왔다.

  먼 옛날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대전을 벌인 싸움터로 유명한 탁록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120㎞ 떨어져 있다. 탁록의 벌판에는 황제묘(黃帝廟), 정차대(定車臺), 토탑(土塔), 치우채(蚩尤寨) 등 고대 전장의 흔적이 적지 않다.

  치우채는 이름 그대로 치우가 설치한 군영이라는 뜻이다. 5천년 전의 역사가 지명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채는 생각처럼 찾기 쉽지 않았다. 지명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도로에는 안내표시도 없었다. 근처를 오르내리다가 아예 “황제성(黃帝城)”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황제성은 관광풍경구로 도로에 안내판이 있었고, 또 관광지라면 십중팔구 가이드를 찾을수 있을 듯 싶었다.

  “치우채를 찾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가이드는 약간 괴이쩍다는 표정이었다. 이 며칠째 내가 첫 손님이란다. 후문이지만 치우채에는 1년에 대여섯번 정도 한국 관광팀이 찾아온단다. 그리고 황제성을 다녀가는 홍콩, 마카오 사람들도 이곳을 드물게 찾는다고 한다.

  이윽고 차는 가이드의 안내로 용왕당촌(龍王塘村)을 찾아 마을 중심가의 빈터에 멈춰 섰다. “치우채”라는 글자를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 왔다. 마을사람들이 40~50년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동네 어구의 벽에 모신 토지신과 농가의 바깥벽에 옴폭하게 자리를 파고 모신 신상(神像)은 여느 시골과는 어딘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해묵은 소나무가 마을 빈터의 한 귀퉁이에 서있고, 졸졸 흘러나오는 물가에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물은 부근의 치우천(蚩尤泉)이 있는 샘터에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치우천이 있는 서너 평 크기의 뜰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전전(李佃全, 42세) 촌장이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왔다. “애들이 들어와서 장난을 칠까봐서요.” 그는 자물쇠를 열면서 변명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문객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치우천은 “탁록지전(涿鹿之戰)”때 치우부족의 인마(人馬)가 물을 마시던 곳이다. 샘은 3m 정도의 둘레에 4~5m의 깊이었는데, 돌로 쌓여 있었고, 밑바닥에는 물이 한두 뼘 정도로 차있었다. 몇 년전만 해도 물은 사시장철 샘물터의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철을 제외하고 거의 말라있는 상태라고 한다.

  치우천의 앞뒤에는 각기 천년고목이 서 있었다. 고목 앞에는 모두 돌로 된 제대(祭臺)가 있었다. 제대에는 누가 놓고 갔는지 붉은 점을 찍은 만두가 놓여 있고, 타다 남은 향대가 향로 삼아 놓은 모래 대야에 꽂혀 있었다.

  “이걸 잘 보세요.” 이전전씨는 그 중 앞쪽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뭐가 비슷하게 보여요? 모두들 이 나무에는 신령이 현신했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 밑둥에 박힌 옹이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흡사 뿔이 돋친 짐승의 머리가 나무에 박혀 있는 듯 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머리에는 긴 뿔이 돋쳐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치우의 신령이 샘터의 고목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말라드는 샘물과 더불어 4천여년 전의 위용이 역사 속에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진짜 치우가 현신할 걸까…

  치우의 군사가 숙영했던 군영이 근처라고 해서 대끔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치우천 북쪽의 수십 미터 되는 곳에 자그마한 산 둔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치우가 담을 쌓고 군대를 주둔했던 숙영지라고 한다. 이곳은 치우의 북쪽 군영이라는 뜻의 치우 북채(北寨)라고 부른다. 고증에 의하면 그때 치우의 군영은 남, 북, 중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남채(南寨)는 후방의 공급기지, 중채(中寨)는 지휘중심, 북채(北寨)는 전연진지었다.

  우리 일행은 반달음으로 둔덕에 올랐다. 둔덕 기슭에는 한그루의 고목이 있고, 그 뒤로 흙담이 있는데 고대 전장의 잔재한 성벽이라고 한다. 저쪽 둔덕은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금방 발끝에 닿일 듯 했다. 이런 둔덕의 뒤쪽은 산에 막혀 있고, 앞쪽에는 들판이 펼쳐졌다.

  4,700여년 전, 황제의 부족은 염제의 부족과 연합하여 치우의 부족과 이곳에서 대결전을 벌였다. 전쟁에서 황제는 천녀(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풍후(風後),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도움을 받고, 치우는 과부족(夸夫族)인, 풍백우사(風伯雨師), 이매망량(魑魅魍魎)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對陳)을 보아도 범상하지 않는 이 싸움은 중국의 신화에서 제일 유명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는 재간을 갖고 있었다. 치우의 법술로 천지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황제의 군사는 방향을 잃는다. 황제는 나중에 “지남차”를 만들어 인도를 받는다. 싸움에서 패한 치우는 황제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한다. 그의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 수림을 이뤘다고 전한다.

  지금 탁록의 고대 전장 유적지에는 치우의 무덤이 3기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현지인들은 그중 남쪽의 치우무덤이 진짜 무덤이라고 말한다. 황량한 들판에 있는 자그마한 흙둔덕에 천년의 비밀이 숨어 있다니 전설인지 신화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 대전에서 치우를 전승한 황제는 많은 부락의 옹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어 염제(炎帝)의 부족도 황제의 부족과 충돌이 발생하여 탁록 부근의 판천(阪泉)에서 싸움을 벌인다. 승전한 황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중원지역의 부락연맹 수령이 되었다. 염제의 하족(夏族)이 황제의 화족(華族)과 근친이고, 또 한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을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결국 “탁록지전(涿鹿之戰)”에서 패한 치우의 부족은 이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중국 중부의 황하(黃河)유역에 살던 묘족(苗族)은 이때 서남부로 이주했다. 묘족 역시 한민족처럼 치우를 선조로 섬기며, 치우를 “우공(尤公)”이라고 부른다. 치우의 부족인 동이구려족(東夷九麗族)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한 단락이다.

  중국에서는 치우의 부족이 점차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게 융합되어 염황자손의 일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의 초반, “황제성”에 세워진 “중화 삼조당(三祖堂)”이 바로 그런 학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 3조는 황제, 염제, 치우가 중화민족의 선조라는 뜻이다. 중국 사책에서 짐승의 몸을 갖고, 인간의 말을 하는 “수신인어(獸身人語)”의 악인으로 기술되었던 치우는 이로써 비천한 신서를 고치게 된 것이다.

  혼전을 벌이던 인마와 창칼의 마찰음은 모두 전장을 뒤덮었던 온무처럼 가뭇없이 광야에 사라졌다. 아, 이 들판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산 둔덕에 서있는 고목은 멀리 들판을 굽어보며 수호신처럼 묵묵히 전쟁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고목은 수령(樹齡)이 천년을 훨씬 넘는다고 하는데, 모양은 느릅나무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상한건 도대체 수종이 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든 말든 해마다 가을철이 오면 나무에는 또 앵두 크기의 노란 과일이 수두룩하게 달린다고 한다.

  “그림속의 떡이죠. 식용이 불가능하니까요.” 이전전 촌장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현지인들은 이 이상한 나무를 “치우 괴수(怪樹)”라고 부른단다. 어쩌면 전세(前世)의 인물 치우가 수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천년의 괴수로 현령(顯靈)한듯 했다. 치우의 신상에 얽힌 수두룩한 비밀은 지금 무명(無名)의 과일로 응고되어 세상에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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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달인
날자:2007-05-29 12:07:33
치우가 황제에 의하여 패햇다는 전설은 한족이 그 한족이기전의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역사를 휘황찬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황제전설을 보면 탁록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10여년간 잠자리를 수십번 옮기면서 전전긍긍 햇다고 해요. 진정 전쟁에서 이겼다면 전전긍긍해야 할 사람은 치우족들이겟죠. 원인은 전쟁에서 패배 햇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역사계에서 분쟁이 많은 한단고기에서는 황제가 치우족의 한 부장을 죽였고 (그도 역시 성을 치우라고 했음) 후에 치우의 정벌을 받아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황제에 대하여 치우천항은 (우리 민족의 발음으로는 자오지천황)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배달국의 관리인(청제, 적제, 황제, 백제, 흑제) 황제의 관명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중원을 다스리게 하였죠. 그리고 난후 치우의 부족은 계속하여 중원에 남으면서 황제의 통치를 감시하였는데 훗날 그 후대가 오늘의 묘족으로 된 것입니다. 황제와 염제가 화하족의 시조로 된 것은 한나라의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형성 된 것이구요 그때 사마천은 한족의 원 역사인(식민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역사를 왜곡한듯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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