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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성의 슬픈 이야기
김호림
흥안고성은 현지의 동네이름으로 명명된 옛 성곽인데,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시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걸로 알려져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뜻밖에도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옛날 고성 성터에 세워졌던 표지판은 개발의 붐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현지인 황종림(49세)씨는 기재가 잘못 된 게 아니냐고 재삼 묻는다. 그는 소꿉시절부터 이곳에서 자랐지만 옛 성곽이 있었다는 얘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고 말한다. 혹여나 해서 흥안향 정부청사 부근의 노인활동센터를 찾았더니 한담을 즐기던 노인들은 도리어 엉뚱한 질문을 던져온다. “이봐, 자네가 말하는 성터란 게 뭔가?”
아닌 게 아니라 흥안향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성벽 비슷한 둔덕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풀처럼 일떠선 아파트들이 땅 위에 슬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도 흥안고성과의 인연은 쉽사리 끊을 수 없나 보다. P교수가 사그라졌던 불씨를 다시 지펴줬던 것이다. 모 역사연구소 전임 소장이었던 P교수는 연변의 고대 성곽 연구에서 권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흥안고성 말인가? 바로 3호선 버스 종착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네.”
필자가 고령의 노인에게 안내 부탁을 드리기 어려워 머뭇거리는데,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3호선 버스의 종착역은 도시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쯤부터 건물들이 자리 나게 줄어들고 밭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내에서 빠져나온 연길-도문 도로는 낮은 비탈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내처 뻗어가고 있었다.
요금을 지불하느라 택시에서 잠깐 지체하는 사이, 길옆을 기웃거리던 P교수는 어느 결에 손에 기와조각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보니 그건 네모무늬의 붉은 암키와였다. 흥안고성에서 발견되는 이런 기와와 노끈무늬의 기와는 집안현의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동류의 유물로, 색깔이나 무늬, 두께, 무게가 모두 일치한 걸로 알려진다.
흥안고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국으로 남부와 서남부는 주민구역이며 서쪽에는 북남 방향으로 연집강(煙集江)이 흐른다. P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바로 흥안고성의 동북쪽 각루자리라고 한다. 연길-도문 도로는 바로 고성의 동쪽 변두리를 뭉텅 잘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각루자리에는 높이가 1.5미터 되는 작은 둔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벽돌담이 일어선 이곳에는 기와조각을 제외하고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로 서쪽에는 연집강 강변으로 이어진 흙길이 있었다. 밭들 사이에 난 이 흙길은 이웃 지경보다 조금 더 높았는데 바로 흥안고성의 북쪽 성벽 자리라고 한다. 기재에 따르면 이 북쪽 성벽은 길이가 374미터에 달한다. 서쪽 성벽은 연집강의 물에 밀려 말끔히 사라졌는데, 500여 미터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안고성은 둘레의 길이가 약 1,800미터로 중급 규모의 평지성이었다.
그러고 보면 연길-도문 도로를 달릴 때마다 흥안고성을 지나는 셈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대로 옆의 수수한 흙길이 바로 천년 성벽 자리인줄 상상조차 했을까. P교수에 따르면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 한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현지에서 고성을 잘 모르고 있는데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성터인 밭에는 황소 한두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한가롭게 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밭갈이를 하지 않은 밭두렁에는 기와조각들이 자갈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우리는 빗살무늬의 기와, 노끈무늬의 기와 조각 여러 개를 찾았다. 다만 온전한 모양의 기와는 하나도 없었고 죄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조각들이었다. 이 성터에서는 기와조각을 비롯하여 토기 조각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연변의 옛 성곽에서 고구려 유물이 이처럼 밀집된 것은 기타 고구려 유적지에서 아주 보기 드물다.
흥안고성을 세운 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동북부 변계에서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길 지역은 바로 도문이나 훈춘에서 용정이나 화룡, 안도를 왕래하는 교통로의 중간 기착지에 위치한다.
“주위의 유적을 보게. 이곳이 중요한 요새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네.” P교수는 부근의 유적지들을 일일이 가리켜 보인다.
흥안고성 서북쪽에는 고구려 천리 장성의 일부라고 추정되는 평봉산(平峰山) 장성과 봉화대가 있으며, 남쪽에는 모아산(帽兒山) 돈대, 서남쪽에는 연길공원 소돈대, 동북쪽에 역시 대돈대가 있다. 동쪽 20㎞ 되는 곳에는 또 쌍둥이 성곽으로 불리는 성자산산성과 하룡고성이 있다.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곽이라면 후세의 발해가 묵과할리 만무하다. 그런데 흥안고성은 여느 성곽처럼 발해시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발해가 흥안고성의 남쪽에 따로 성곽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해성곽은 1937년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가 최초로 조사하고 “간도성 고적조사보고”에 글을 발표하며 연길가(延吉街) 북고성이라고 명명된다. 그때 이곳은 일본군의 요충지였으며, 이 때문에 도리야마 기이치는 성곽을 조촐하게 조사하고 지표면의 일부 유물을 채집한데 불과했다. 1985년, 연변 문물조사팀은 두 번에 걸쳐 조사를 하고 고성의 위치와 규모, 출토된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현지의 북대촌 이름을 따서 북대고성(北大古城)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도 북대고성 자리에는 병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중국군의 한 유명 부대가 숙영하고 있는 이 병영은 흥안고성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상거한다.
이때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다. 우리는 병영을 지척에 두고 부근에서 한겻이나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옛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터가 있었다는 채소밭은 다문 한 뙈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병영 역시 아파트단지에 빈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도 병영 북쪽 담의 기슭에는 산등성이로부터 내려오는 옛날의 물도랑이 그대로 뉘어 있었다. 북대고성의 남쪽 성벽은 바로 이 도랑을 지나 병영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재에 따르면 유적지의 남쪽 부분에는 자그마한 둔덕이 있었는데, 건축 유적지로 추정되며 그 주변에는 유물이 많이 밀집되었다. 유물 분포 상태로 미뤄 북대고성은 동서와 남북 길이가 각기 500미터인 고대 중급 규모의 발해성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의 아성은 그런 아련한 기억마저 빡빡 지우고 있었다. 와중에도 P교수는 포장도로 옆에 있는 흙속에서 회색기와 한 조각을 줍는다. 기와 뒷면에 있는 천 무늬는 천년의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뒤이어 필자도 전봇대 아래에서 또 회색기와 조각 하나를 찾았다. 옛날 여기에 유물이 적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병영 내에서도 유물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고 전하지만, 그곳은 일반인 금지구역이라 마음을 접어야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북대고성에서는 또 푸른 유약을 바른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와는 훈춘 팔련성의 발해 동경유적지, 화룡 서고성의 발해 중경유적지 그리고 개별적인 발해 사찰 외에 아주 드물게 보인다고 한다. 그때 북대고성은 일반 성곽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증한 셈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발해인들은 일반 성곽이 아니라면 고구려의 성곽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왕궁이나 주, 현의 치소(治所)는 멸망된 이전 조대의 성곽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발해인들은 동경 용원부인 팔련성의 경우, 부근의 고구려 책성인 온특혁부성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부근에 따로 성곽을 세웠다. 북대고성은 부근 고구려의 성곽인 흥안고성과 엄연히 분리된다. 따라서 북대고성을 발해의 “노, 현, 철, 탕, 영, 흥” 6주의 어느 한 주의 소재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제 날 천년 성곽의 화려한 모습은 편린으로나마 지면의 유물들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북대고성의 폐허는 인제 아파트와 포장도로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다. P교수는 성터를 돌면서 연신 탄식을 했다.
“몇 해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아쉽구먼.”
천년고성의 슬픈 이야기는 이로써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연길 도시의 외곽은 연집강 강기슭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터를 넓히고 있었다. 흥안고성 역시 바야흐로 북대고성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얘기이다. 천년의 이 고성은 결국 도시의 음영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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