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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연길에서 떠나 용정을 거쳐 천평(泉坪)벌의 하천평(下泉坪) 마을에 도착하는데는 한시간 정도 걸렸다. 하천평은 60여가구, 170여명 인구를 가진 자그마한 동네였다. 승용차는 달구지 길을 간신히 비비고 지나 마을 귀퉁이에 있는 빈터에 멈춰 섰다. “어곡전”이라는 글을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어곡미가 나는 논이 바로 여깁니다.” 안내를 맡은 오정묵(남, 53세)씨가 이렇게 소개했다.
“별로 이상한 데가 없어 보이죠. 그래도 임금에게 천거된 땅이랍니다.”
푸른 논을 애정에 잠겨 응시하는 오정묵씨는 완연 시골 나그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사실 그는 농부가 아니라 용정시 현지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의사이다, 일찍 연변의학원(대학)을 졸업하고 WHO 산하의 세계전통의학과학원 박사학위를 획득한 그를 진짜 시골의 농부와 한데 이어놓기 힘들다. 그러나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는 땅에 대한 애착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생활로 어느 정도 생활이 부유하게 되자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몇년전 하천평의 땅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부의황제가 먹던 쌀이 여기서 났다고 해요. 그래서 바로 여기다 하고 기어이 살 작정을 했어요.”
그때는 마침 부근 종이공장의 오염으로 농사가 잘 안되고 쌀도 잘 팔리지 않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땅을 사는데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일가? 계약서를 체결한 바로 이듬해 정부에서는 농업세를 줄이는 정책을 출범했고, 환경보호부문의 간섭으로 오염문제가 해결을 보았다. “어곡전”이 주인을 만나자 하늘도 이를 알아준 모양이라고 동행한 인부가 너스레를 떤다.
빈터의 귀퉁이에는 10여미터 높이의 백양나무가 아스라이 서있었다. 동네의 “당수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인데 수령이 1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어곡미가 난다는 “어곡전”은 바로 “당수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수나무는 동네보다 어곡전을 지키는 수호신인 듯 했다. 어곡전 논배미의 일부는 시멘트로 반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구경꾼들을 배려한 주인의 자상한 마음씨가 엿보였다.
우리가 논에 다가서자 논물에 금세 푸드득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논에 있던 물고기들이 놀라서 도망치는 소리였다. 이어 개구리가 풍덩풍덩 물에 뛰어들어 적이 놀랐다. 오염에 찌들어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지 오랜 시골에서 진짜 희한한 풍경이었다. 화학비료를 일절 쓰지 않고 유기농법을 하고 있단다. 어곡전의 윗쪽 논에는 잉어, 아래쪽 논에는 게를 넣었다고 한다.
사토질의 이 땅에는 자연재해가 적고 다른 지역보다 날씨가 따뜻하며 무상기가 140일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불과 0.6정보의 이 논은 어딘가 다른 땅이었다. 부근 논들은 검은 색의 흙이었는데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렸던 이 논만은 유독 누르께한 색의 땅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쌀은 다른 논에서 나는 쌀보다 맑고 향기가 진하며 점착성이 강하고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어 그 맛이 진짜 일품으로 전해진다.
어곡전은 말 그대로 천혜의 땅임이 틀림없었다. 어곡전은 왼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었고 오른 쪽에는 국사령(國師嶺)을 두고 있었으며, 뒤에는 선구(船口)산성을 업고 있었고 앞에는 군산(群山)이 춤추고 있었다. 풍수학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현무, 주작이 골고루 갖춰진 셈이었다. 더구나 어곡전 뒷켠의 국사령은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들고 두만강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 형국이었다. 두만강은 또 항간에서 “황제의 강”이라고 불리는 등 역사적인 무게를 어곡전에 실어주고 있었다. 조선 이씨왕조의 시조 이성계, 청나라 왕조의 시조 누르하치의 탄생 전설이 대를 이어 두만강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의 수라상에 어곡미를 올린건 부의황제가 첫 사람이 아니였다. 어곡미는 일찍 발해의 왕이 즐겨먹던 쌀이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버들이 방천을 이루고 인적기가 드물었다. 늪에서 피어난 연꽃 향기는 먼 하늘의 천궁까지 풍겼다. 천녀는 그 향기에 취해 지상에 내려오며, 이곳에 살던 부지런한 총각과 연분을 맺는다. 옥황상제는 천녀에게 볍씨를 주어 총각과 더불어 벼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이 들(논)에서 난 백옥미는 천녀가 가져온 쌀이라 천녀의 부드러운 살결처럼 희고 맑았으며 향기 또한 천녀의 체취처럼 그윽하고 감미로웠다. 한입 건너 두입 소문이 자자한 노송의 백옥미는 드디어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
임금은 백옥미를 맛본 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쌀을 다 먹어보자면 크게 심어야 할 것이로다.”
사람들은 하늘의 은혜를 입어 벼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이 논을 “하늘의 복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금은 또 이 “하늘의 복판”을 지키기 위해 뒷산에 둘레가 4천미터나 되는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백년 세월 속에 노송은 상전벽해의 개벽을 맞는다. 천평벌을 지키고 섰던 선구산성은 어느덧 폐허로 사라지고, 산 아래의 동네도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청나라 시기 천평벌은 또 봉금(封禁)정책으로 200년간 더구나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조선 북부의 이재민들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기재에 따르면 연변경내의 수전농사는 1868년부터 두만강 기슭의 조선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천평일대에는 20세기 초에 수전농사가 시작되었다. 천평벌이 “어곡전”으로 소문을 놓게 된 것은 천평벌에 벼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 길주에서 살던 농부 최학출이 1935년 남부여대 하고 두만강을 건너 천평벌의 하천평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였다.
최학출은 모를 일찍 내는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 냈다. 당시에 소문을 놓은 “유지(油紙) 온상 육모법”, 말하자면 오늘의 비닐박막 온상육모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 유지제품이 없어서 콩기름을 바른 크라프트지를 모상판 위에 덮어주어 모판의 온도를 높이고 이로써 벼모가 빨리 자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학출 농민의 밭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또 밥맛이 좋아 점차 소문을 놓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간도총사령부를 통해 만주국(僞滿洲國) 정부에서 알게 되었다. 만주국에서는 최학출에게 황제의 수라상에 올리는 “어곡미” 생산을 위임했다.
어곡전에서 마을 처녀들은 하얀 버선을 신고 모를 냈고, 가을이면 하얀 장갑을 끼고 가을걷이를 했다고 전한다. 달거리가 온 처녀들은 이런 대오에서 단연 제외되었다고 한다. 어곡전 주변에는 마을의 개나 돼지가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어곡전은 탈곡도 맨 먼저 했고, 쌀을 찧은 후에는 판 위에 한줌씩 올려놓고 귀가 떨어졌거나 색이 이상한 것은 알알이 골라냈다. 이어 하얀 옥양목으로 만든 주머니에 포장하여 황제에게 진상하였다.
훗날 최학출은 황제에게 진상한 이 “어곡미”의 덕분으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에 상경하여 포상금과 시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토록 소문난 어곡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맛보기에는 판판 부족이다. 재래식 자연농법을 쓰고 또 땅이 한정되다보니 1년 소출이 3t 미만이기 때문이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 지금 어곡미는 1㎏에 100위안(약 1만 3천원)이라는 고가이지만 그래도 금방 동이 난다고 한다. 어곡전 주위의 쌀도 “어곡미”의 명성에 힘을 입어 쌀 가격이 껑충 뛰어 올랐다.
어곡전의 주인인 오정묵씨는 여기에 만족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어곡전 민속마을”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쌀을 생산해서 팔기만 하던 재래의 원시농법을 개변해야 한다는 것. 한두 뙈기의 땅을 떠나 마을 전체인 하천평을 생태관광의 모델 마을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시작하고 보니 일이 점점 커지네요.” 오정묵씨는 자조삼아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지금 그가 하천평에 사놓은 농가만 해도 십여 채가 된다. 인제 어곡전 부근에는 바야흐로 민속농가, 박물관, 도서관, 농업과학연구소 실험기지 등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빈 터에 닦은 광장과 무대 등 하천평촌은 동네 귀퉁이에나마 민속마을의 추형을 갖춰가고 있었다.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만 오르던 어곡미의 전설은 인제 민속마을의 브랜드로 되어 두만강 기슭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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