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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화살에 뚫린 구렁이산
김호림
두만강은 도문시 양수진(凉水鎭) 경영(慶榮)촌 부근에 이르러 활등처럼 크게 휘어진다. 조선반도 최북단에 있는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가 바로 경영촌의 강남에 위치한다. 경영촌의 동쪽에는 활등을 타고 앉은 바위산 하나가 있으니 구멍이 많다는 뜻의 굴륭산(窟窿山)이라고 불린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활을 쏜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굴륭산, 그래서 굴륭산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유난히 많은 게 아닐까?
주몽은 일곱 살 때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목표물을 정확히 맞혔으며 이로 하여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린 이름이라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그러나 전설은 항간에서 부풀린 게 많아서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렇든 말든 굴륭산에 화살이 뚫은 흔적인지는 몰라도 구멍이 많다는 건 현지에서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여름철이면 이런 구멍에는 뱀이 유난히 많아서 굴륭산은 일명 구렁이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걸 다시 한자 이름으로 만들어서 굴륭산은 또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불린다. 아무튼 확실한건 굴륭산에서 고대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마을에서 물도랑을 팔 때 옛날 물건이 많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현지인 조만길(40여세)씨는 아리송한 기억의 끈을 가까스로 잡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마을 부근에서 유적지 표식판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중에 보니 표식판은 경영촌 북쪽을 지나는 도문-훈춘 철길과 도로 교차로 부근의 둔덕에 있었다.
지면의 유물은 주요하게 굴륭산 서쪽 산기슭과 경영촌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지의 면적은 길이 1,500m, 너비 250m로 알려지고 있는데,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석기, 골기, 자기, 건축자재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은 1957년 겨울철이었다. 물길 공사를 하면서 마을 남쪽의 두만강 기슭에서 많은 유물이 나왔고, 굴륭산 서쪽 기슭의 공사현장에서도 석기와 골기와 발견되었다. 연변지역 원시사회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삼족 기물의 밑 부분 유물 2점이 발견되어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가치와 재부의 상징인 조개껍질의 화폐도 출토되어 한때 화제가 되었다. 그때 벌써 화폐로 교환할 정도로 거래가 몹시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적지에서는 건축자재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는데, 연꽃무늬의 막새, 압지무늬의 평기와 등이었으며 이런 기와에는 천 무늬가 있었고 대부분 홍갈색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유물이 모두 굴륭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학계에서는 이 유적지의 이름을 굴륭산유적지라고 지었다.
학자들은 또 강물의 충격으로 생긴 단면 그리고 마을의 웅덩이 단면에 대한 고찰을 거쳐 유적지를 상, 하 두 문화층으로 나눈다. 아래 문화층은 약 2천년 전의 시기를 좌우하여 이곳에서 살고 있던 북옥저인들의 마을 자리이며, 윗 문화층은 발해와 요․금시기를 아우른 고대 문화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동명왕 10년 즉 B․C 28년에 고구려가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하고 책성을 세워 북옥저지역을 다스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굴륭산 유적지의 연대표에 고구려시기도 망라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학계에서는 유물이 풍부하고 또 상대적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 여기를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가 번영했던 중요한 성새로 보고 있다. ‘경영고성’이라고 이름한 이 성새는 발굴된 유적으로 미뤄 장방형 모양이며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굴륭산 유적지는 물론 고분들도 농가와 경작지, 과수원, 못, 대로 등에 파괴되어 원래의 형태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기슭에 나뒹구는 조약돌에는 이름 못할 애수만 파릇하게 젖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굴륭산유적은 외따로 고독한 게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유적은 굴륭산 동쪽에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굴륭산 동남쪽으로 약 3㎞ 되는 곳에는 높이가 30m 정도인 자그마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이 두 개 있는데 남북 양쪽에서 보면 그 모양이 똑 마치 강가에 엎드린 한 마리의 거북과 같다. 이 산은 형국이 거북인 데다가 다른 산들과 평지를 가운데 두고 홀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고산자(孤山子)’ 혹은 거북이라는 뜻의 ‘왕팔산(王八山)’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고산자 유적은 바로 이 산 위와 산 부근에 있다.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 고산자는 북쪽의 도문-훈춘 도로와 수십미터 길이의 길쭉한 언덕길로 이어져 있다. 조씨에 따르면 고산자는 두만강 기슭의 천연적인 초소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산 북쪽기슭의 바위에는 배기통 모양의 네모난 구멍이 패어 있었다. 지난 세기 60년대 말, 중국에서 전시준비를 하면서“방공 굴을 깊이 파던” 때의 흔적인 것 같았다.
이전에 고산자산과 부근의 경작지에는 토기와 자기 조각이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때 고산자에서 채석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이 유적지에서는 돌로 만든 창날과 도끼 등이 출토되었으며 또 원주형의 돌절구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자 부근의 밭에는 강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을 뿐 토기나 자기 조각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뭘 보시려는데요?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조씨의 권고를 뒤로 하고 기어이 산마루에 기어올랐다. 사실 서쪽 산꼭대기의 화강암에 인공으로 뚫은 흔적이 있다는 기재 때문이었다. 「훈춘현문물지에」 따르면 이 화강암은 둘레 60㎝, 두께가 15㎝나 되는 큰 돌덩이였다. 그런데 진짜 발품만 들인 셈이었다. 이 무거운 화강암마저 누군가 건축자재로 실어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키 넘는 무성한 수풀은 2천년 전 북옥저인들의 흔적을 모조리 어디엔가 파묻어버린 것 같았다.
굴륭산 부근에는 이 시기의 옛 무덤 유적들도 적지 않은 걸로 알려진다. 굴륭산 서쪽기슭과 남쪽기슭은 물론이고, 양수진을 위시한 양수평원 주위에도 옛 무덤떼가 여럿이나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들은 흙구덩이 무덤, 돌무덤, 석관무덤 등 여러 가지 유형이며 모두 2천년전 좌우의 무덤인걸로 판정되고 있다. 양수평원 일대는 책성으로 비정되는 온특혁부성과 서쪽으로 불과 수십㎞ 상거, 북옥저인들이 활약하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굴륭산은 또 훈춘 옛 장성의 서쪽 끝이라는 주장이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변장(邊墻)’, ‘변호(邊壕)’ 또는 ‘고려변(高麗邊)’이라고 불리며 훈춘평원의 북부 산간지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일찍 1920년대부터 고찰이 시작된다. 학자들의 고찰에 따르면 장성 성벽은 죄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일부 구간은 돈대나 망루, 봉화대로 이어진다. 이 장성은 훈춘하 하류의 훈춘평원을 중심으로 평원의 북쪽 산지대에 쌓여졌는데 이것은 훈춘평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옛 장성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원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못하다.
훈춘의 옛 장성 축성연대를 두고 학계에는 고구려설, 발해국설, 동하국설, 고려설 등 서로 다른 4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때 북으로 내려오는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해 북옥저인을 동원하여 쌓은 군사방어시설이라고 보는 게 제일 합당하다는 주장이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 후 발해시기와 동하국 시기에 계속 이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성 서쪽 끝머리로 추정되는 굴륭산 부근의 유적지에 고구려의 ‘도장’이 찍히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굴륭산에서 고구려의 ‘도장’을 확실하게 찾는다는 건 주몽의 화살구멍을 찾는 것처럼 정말로 쉽지 않았다. 「훈춘고성고(琿春古城考)」에 따르면 굴륭산 꼭대기에 장성의 일부인 흙 둔덕이 있다고 하는데 이 둔덕은 수풀로 몸을 감춘 구렁이처럼 종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남쪽 벼랑기슭에 그제 날을 견증한 비석인양 우뚝 서있는 돌기둥만 눈에 아물거릴 뿐이다. 보아하니 옛 장성은 이미 굴륭산의 전설로 사라진 것 같았다.
굴륭산의 이름을 만든 구렁이 역시 전설 속의 기담(奇談)으로 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현지의 농부들은 산의 석굴에서 죽어버린 구렁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구렁이가 굴륭산 북쪽의 채석장에서 울리는 남포소리에 놀라 죽었다는 게 항간의 속설이다. 그때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장정들이 까닭 없이 죽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세간에는 굴륭산의 수호신인 구렁이가 죽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뒤숭숭한 추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기슭의 경영촌을 원래 ‘용배미’라고 불렀다고 하니 산과 마을은 예전부터 그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굴륭산에 얽힌 천년전의 이야기는 산과 마을에 전하는 전설의 어디엔가 숨어있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굴륭산의 전설과 기담은 두만강 기슭에 엄청난 물음표만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하다면 이 물음표를 과녁처럼 명중하여 의문을 말끔히 떨쳐버릴 ‘주몽의 화살’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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