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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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래자(夜來者) 설화와 한왕(汗王)산성
2009년 09월 21일 15시 07분  조회:4694  추천:49  작성자: 김호림
 

  “한 마을에 처녀가 살았는데 밤마다 웬 남자가 와서 그와 동침하였다. 그러나 이 남자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다. 어느 날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아서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워낙 돌굴에 있는 지렁이었다. 그 후 옥동자를 순산하였으니 그가 바로 나라를 세운, 혹은 유명한 누구였다…”


  눈 감고 줄줄 외울 수 있는 옛말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런 야래자 설화는 다만 지명과 장소, 이름이 약간씩 다를 뿐이며 중국과 한국, 일본, 서구까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구전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 견휜의 출생설화가 이와 비슷하며 또 서구의 ‘큐피트-사이키’형 설화도 이와 사뭇 비슷하다. 함경북도 회령지역에 전해오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도 다만 돌굴이 늪으로, 지렁이가 구렁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에서 등장하는 이 늪은 바로 한왕산성에 있는 걸로 전한다. 한왕산성은 몽골어로 임금, 왕의 산성을 이르는 말로 용정시 삼합진에서 서쪽으로 약 10㎞ 상거한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다. 한왕산성은 현지인들이 누르하치가 쌓은 산성이라고 주장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학계에서는 또 이 산성이 조동(朝東)촌 부근에 있다고 조동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이 위치한 산은 천불지산 산맥의 지맥으로 두만강 강기슭에 툭 튀어져 나왔는데, 산 정상의 삼면이 벼랑인 까닭에 흡사 고깔모자처럼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뜨인다.


  산기슭에 있는 조동촌 어구에는 서북쪽의 벼랑바위를 배경으로‘한왕산성’ 표지판이 서있다. 이 표지판을 지나 골짜기에 들어서서 북쪽으로 10여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선다. 산 정상이 왼쪽에 있는지라 그쪽의 수풀로 사라진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비탈을 얼마간 올라가자 불쑥 높은 둔덕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이 둔덕은 반달 모양으로 벼랑을 감싸고 있었는데, 오솔길은 둔덕을 지나 곧바로 벼랑위에 덧쌓인 석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둔덕은 다름 아닌 석성 동북쪽 성문 밖의 옹성이었던 것이다. 옛날 산성으로 내왕하던 교통로도 바로 지금 발밑에 밟고 있는 이 산길이 아닐까. 오솔길에 그려진 들쭉날쭉한 나무 그림자는 마치 그리스의 아리송한 상형(象形)문자처럼 홀제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옹성 문자리 부근의 수풀에는 깊이 1.5미터, 지름이 2미터 되는 웅덩이가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인공적으로 쌓은 돌들이 아직도 반 미터 남짓한 높이로 남아있다. 옛날 초병들의 막사자리로 알려진 유적이었다. 이곳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비탈이었는데, 이 때문에 산성 주인은 옹성을 만들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또 초소를 세울 정도로 성곽 경호에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옹성 밖에서 잠깐 화젯거리가 생겼다. 남쪽 막사 유적지 부근에 벼랑가로 간신히 톺아 오른 오솔길이 있었던 것이다.


  “옛날 초병들의 소행으로 보이네요. 다문 몇 걸음이라도 덜려고 한 게 아닐까요.”일행 중 누군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이 오솔길은 초병들이 옹성 쪽으로 돌아가서 성으로 들어가는 일이 귀찮아 만든 ‘지름길’ 같다는 것이었다.


  옹성을 지나 내성 성문에 들어서자 불시에 눈앞에 뉘엿한 평지가 나타났다. 산 정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평했고 또 부지가 엄청 컸다. 성벽은 절벽 위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 정상을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지날 정도의 오솔길이 성벽 내측에 그림자처럼 졸졸 붙어 있었다. 둘레가 1,500m인 한왕산성은 중등 크기의 산성으로, 지세를 보아 전형적인 산봉식 산성이었다. 남쪽은 수직되거나 거의 수직된 5~15m 높이의 현애절벽이었는데, 산성은 이를 직접 이용하고 있었다. 기타의 성곽은 이런 자연적인 낭떠러지나 천험 위에 0.5~5m의 높이로 돌을 쌓고 있었다.


  산성의 동쪽 모서리에는 망루자리로 보이는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이 자리에 들어서니 산기슭을 따라 연연히 흘러가는 두만강이 먼발치에서 보였다. 동쪽의 삼합진으로 통하는 길과 앞쪽의 강 건너 북한의 회령시 유선, 그리고 서쪽의 두만강 상류로 통하는 강기슭 길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웅덩이가 위치한 모서리 자체가 천연적인 망루였다.


  성문자리는 서남쪽에도 하나 있었다. 이 성문은 두만강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바깥쪽은 경사가 심한 비탈이어서 수비에 유리하고 공격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북쪽 성문처럼 옹성이 없었고 초소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낭떠러지가 낮은 까닭으로 그 위에 서너 미터 높이로 덧쌓은 석성은 산성 전반에 걸쳐 이곳에서 제일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성문 부근의 석성은 약간 허물어진 곳이 있어서 아예 속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석성은 돌들을 안쪽 깊이까지 엇물려주어 역학적으로 아주 안정된 구조를 이룬 모습이었다. 바위 위에 덧쌓인 성벽은 돌들을 모양새에 따라 맞물려서 차곡차곡 올려 쌓고 있었다. 이런 성벽은 아래부터 물려오는 적심석으로 해서 아주 견고했다. 이 때문에 산성은 천년의 풍상세월 속에서 거의 원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성에는 집 자리로 추정되는 건물유적이 세 개나 남아있다. 산성 남쪽에 위치한 이런 건물유적에는 흙으로 쌓은 담이 있어 아직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산성의 크기와 건물유적으로 미뤄 이곳에 있었던 수비군을 3,0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갑자기 수풀에서 후드득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대여섯 마리의 꿩이었는데, 건물유적 북쪽의 늪가에서 물을 먹고 있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타원모양의 이 늪은 어림짐작으로도 지름이 50m가 훨씬 넘었다. 산 정상의 수원지로는 과연 일대 장관이었다. 늪 서쪽에는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인공으로 쌓은 둑이 있었다. 둑 부근에는 또 지름이 10m, 깊이가 2m 되는 물웅덩이가 있었으며 물웅덩이에는 큰 돌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옛날 물을 긷던 곳이 아닌지 모른다.


  현지인들은 산성에서 천 무늬가 있는 회색 기와조각을 발견, 또 돌구유와 구리 숟가락을 발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성한 수풀 때문에 기와조각은 더는 한 조각도 주을 수 없고 구리 숟가락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 서남쪽 성문부근의 건물유적 밖에는 아직도 돌구유가 그대로 남아있어 위의 내용을 방증하고 있었다.


  산성 남쪽 1.5㎞ 되는 두만강 기슭에서는 바로 이런 구유모양의 나무관이 여러 기 발굴되어 산성과 이상한 ‘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무덤 떼는 조동촌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동 무덤떼로 불리는데, 연변지역의 명나라시기 무덤으로는 단연 첫손에 꼽힌다. 1976년, 연변박물관에서 13기의 무덤을 발굴, 대부분의 무덤은 나무관을 쓴 흔적이 나타나고 있은 걸로 전한다. 무덤의 매장풍속을 보면 단인장이였으며 사기기물과 구리기물, 쇠 기물, 조가비 치렛거리, 구슬, 질그릇 등 230여점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조동 일대는 명나라 때 여진인의 활동지역이였으며 건주좌위의 소재지인 북한 회령과 불과 10㎞ 상거한다. 상술한 정황으로 미뤄 조동무덤떼는 건주 여진인의 무덤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로 자리하고 있다.


  산성 부근의 이 조동무덤떼는 산성과 그 무슨 연관이 있으며, 따라서 학계에서는 명나라 때의 여진인이 바로 한왕산성의 진실한 주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다. 정말로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도 여기 산성과 그 무슨 ‘실’로 꽁꽁 얽매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성의 위치나 특이한 지세 그리고 축성기법 등을 미뤄 일찍 고구려시기에 축성되고 그 후 또 요․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산성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다만 이런 견해가 위의 거센 주장에 파묻혀 몹시 미약하게 들릴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만강지역에는 설화를 비롯하여 여진족의 형상이 이상하다고 할만치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이 지역이 여진족의 옛 활무대였던 특수한 지리, 혈연적 관계를 묵과할 수 없다. ‘사돈(査頓)’이 여진족의 낱말이듯 함경도 사람들의 피에는 여진족의 피도 적잖게 섞여있는 걸로 알려진다. 그걸 잠시 제쳐놓더라도 조선왕조의 건국역사에는 여진족 인물이 적지 않게 출현한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대공을 세운 퉁두란, 즉 훗날의 이지란(李之蘭) 역시 여진족 대토호로 전해지고 있다. 미상불 한왕산성은 여진족의 흔적이 너무 진해서 여타의 주장이 모조리 파묻히고 있는지 모른다.


  한왕산성은 수원지나 건물 등 일반 시설은 물론이요, 견고하고 전술의미가 있는 옹성 그리고 수비에는 쉽고 공격에는 어려운 석벽 성곽이 있는 등 두만강지역의 전형적인 천험 요새로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산성의 축성연대는 아직도 베일에 깊숙이 가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성의 시원을 열어놓은 ‘야래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수풀에 장벽처럼 둘린 늪에는 야래자의 숨결인 듯 정오의 아지랑이가 그물그물 춤추고 있었지만, 천년의 신화 속으로 사라진 야래자는 더는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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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조글로산악회련맹
날자:2009-09-21 21:36:17
한왕산성 사진 보기 http://www.zoglo.net/news_2007/board.php?board=dengshan_course&act=view&no=40&page=1&search_mode=all&search_word=한왕산성&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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