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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는 문물이 많아요. 자갈처럼 지천에 널린 게 문물입니다요.”
택시기사 소(邵)씨는 침이 마를세라 고향자랑을 한다. 그의 중고택시도 어느 왕조 때의 고물인지 시도 때도 없이 찌걱거렸다.
중국 중부의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시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도(古都)이다. 서기 770년, 주(周)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후 선후로 13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유명한 삼국지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한겨울의 낙양은 자욱한 운무에 잠겨 있었다. 서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고분박물관은 엷은 베일에 가린 듯 했다. 고대 의상을 입은 12지의 동물이 마치 고분속의 망령을 옹위하는 듯 박물관 앞에 두 줄로 시립하고 있었다. 고분박물관은 부지면적이 약 3만㎡로, 서한 시기부터 북송 시기에 이르는 20여기의 고분을 복원하고 있다.
박물관 북쪽의 2리쯤 되는 곳에는 뉘엿한 산등성이가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흐릿한 안개에 잠긴 산은 마치 꿈속인 듯 몽롱했다.
낙양 북쪽에 자리 잡은 이 산등성이가 바로 망산(邙山)이다. 망산은 낙양에서 시작되어 황하(黃河) 남쪽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무려 100여㎞를 뻗어나간다. 북망산은 낙양시 북쪽의 황하와 그 지류인 낙하(洛河)의 분수령을 이르는 말.
옛날 중국인들은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에서 살고, 북망산에 묻히는 것을 최고"로 삼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낙양의 제일가는 자랑거리는 죽은 사람의 무덤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고분군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발 300m의 망산은 지리적 조건이 알맞아 고대 고관대작들의 이상적인 무덤으로 되었다. 여기에는 네 개 왕조 10여기의 황제능묘를 비롯하여 청나라 때까지 수십만 기의 무덤이 쓰였다. 그래서 북망산은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다.
옛날 타령처럼 들리던 할아버지의 한숨이 금세 귀가에 들려올 것 같다.
“후유, 벌써 북망산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거개 ‘북망산’을 한반도의 어디쯤에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북망산을 잔등에 업고 있는 낙양은 한반도와 2천㎞나 떨어진 ‘천애지각’이다. 그렇다면 낙양은 도대체 배달민족과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1929년 낙양 북망산에서 한 백제인의 묘가 도굴되었다. 도굴꾼에 의해 팽개친 묘지석은 무덤주인이 흑치상지와 아들 흑치준임을 밝혀주었다.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중심으로 2백여개 성을 탈환했던 일대 명장 흑치상지는 뜻밖에도 이역만리 타향에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부흥운동 실패 이후 당나라에 투항, 그 후 당나라의 무관으로 맹활약을 한다. 이때 그는 토번, 돌궐 등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를 잇는 등 당나라에서 30여년동안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다. 나중에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군부서열 12위권에 드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간신의 무함을 받아 죽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장남 흑치준의 덕분에 나중에 측천무후(則天武後)로부터 좌옥금위대장군(左玉錦衛大將軍)으로 추증 받아 명예를 회복, 왕족과 귀족들만 묻히는 북망산으로 유해가 이장된다.
북망산에는 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직전 막리지(莫離支)를 지낸 천남생(泉男生·634~679)과 그의 동생 천남산(泉男産·639~701), 천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650~692),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708~729)의 무덤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발행하는 고고·역사학 계간지 ‘동북사지(東北史地)’에서 밝혀졌다. ‘동북사지’는 “2005년 4~6월 조사·발굴을 벌인 결과, 이들의 무덤을 낙양시에서 찾았다”고 발표했다. 위나라 효명제 왕릉의 북쪽에 위치한 이런 무덤은 원형으로, 크기는 직경 16m, 높이 6m 정도이며, 고구려 기와와 당삼채(唐三彩) 등이 출토됐다고 전한다. 북망산은 또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余隆),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제와 고구려 고위층의 무덤이 북망산에 알려진 것만 해도 이처럼 여럿 되니, 그들을 따라 당나라에 유배되고 또 이 북망산에 묻힌 유민들의 무덤은 또 얼마이랴.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십리 허 기슭의 북망산 어디인가에서 유민들의 망혼(亡魂)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서글픈 음조의 성주풀이가 천년의 시공간을 헤가르고 금세 한 올의 바람처럼 귓가를 스칠 듯하다. 음울한 구름장이 하늘나라의 설음처럼 북망산에 낮게 드리워 한결 슬픈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낙양의 동쪽 외곽에 고대 관방측이 세운 첫 불교사찰이 있다고 해서 내친 김에 그리로 차머리를 돌렸다. 사찰에는 참배자가 붐비고 향불이 자오록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찰은 상주하는 스님이 100여명에 달하며 부지면적이 10여 정보에 이르는 등 큰 규모였다.
한나라 명제(明帝)는 꿈에 흰 빛을 뿜는 금빛 신을 보고 사절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법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사절들은 서역에서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와서 명제의 명을 받아 경성 낙양에 사찰을 세운다. 사람들은 불경을 싣고 온 백마의 공로를 기리어 그때부터 이 사찰의 이름을 ‘백마사’라고 부른다.
‘백마사’, 참으로 연상의 끈을 잡게 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한국문헌에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이다. 신라의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따르면 사람들이 백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백마가 승천하면서 큰 알을 하나 두고 갔는데, 바로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밖에도 백제의 견휜 탄생설화 등에서 백마는 역시 상상의 동물인 용과 함께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그려졌다. 신라의 고분인 천마총 벽화에서도 벽화의 주인공은 날개가 달린 천마이다.
그러고 보면 백마의 길상적인 이미지는 국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하다. ‘백마사’는 고향의 유물처럼 머나 먼 이역 땅에서 한반도 유민들의 향수를 달래 주지 않았을까.
드디어 시내로 향한 택시는 불과 십여분 후 도심에 이르렀다. 낙양성은 워낙 크지 않은 도시였던 것. 낙양의 도심지역인 옛성(老城)은 변두리가 각기 4㎞ 정도인 네모모양이었다.
“낙양의 볼거리는 땅속에 많아요. 낙양의 문물은 대부분 땅속에 있거든요."
소씨의 농 섞인 소개이다. 진짜 허풍이 아니었다. 외곽에서 고분박물관을 보고 왔는데, 도심에도 비슷한 박물관이 있었다. 말이 도심이지 번화한 상가나 호화스런 빌딩 대신 주나라 임금의 수레와 말 무덤이 이색적인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임금의 수레에는 여섯 필이 말이 메워졌다는 뜻의 ‘천자육가(天子六駕) 박물관’, 고관대작의 고분으로 유명한 낙양의 모습을 일축하고 있었다.
낙양성은 도심을 흐르는 낙하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바야흐로 안개가 걷히는 낙하 기슭에는 낚시꾼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낚시 줄에 매달려 이따금 수면 위에 바둥바둥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은 도심의 낙하에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6,7천년전 황하에서 몸뚱이에 그림을 그린 용마가 뛰어오른다. 이때 여기 낙하에서는 또 천서(天書)를 등에 업은 거부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게 바로 유명한 하도(河圖), 낙서(洛書)의 전설이다.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수장인 복희(伏羲)씨는 하도, 낙서에 근거하여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한다.
한국 국기에 그려진 팔괘도가 낙하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게 하도, 낙서처럼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수천년 흘러온 이 낙하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전설이 숨어 있을까?
낙양의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한글 간판의 식당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제주도’, ‘한도(韩都)’, ‘한풍(韩风)’… 제잡담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했더니, 점원들은 오히려 이방인을 보는 듯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양머리를 내걸고 개다리를 파는 격”이었던 것.
나는 맥없이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이방인’의 행동거지가 이상했는지 식당에서 금방 뭐라고 소곤거린다. 그런데 먼 나라의 말처럼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다. 하남 특유의 사투리인 탓이다. 아, 먼 이방인이었던 한반도의 유민들은 이처럼 난해한 방언을 어떻게 해득하고 말했을까…
이 몇해 사이 낙양 거리에도 ‘한류’를 타고 ‘한식당’이 오늘내일로 불쑥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밀가루 음식이 위주인 낙양에서 원조 ‘한식당’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런 짝퉁 ‘한식당’마저 금방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쌀밥문화는 낙양사람들의 체질에 전혀 어울리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역의 낙양에서 언어소통은 둘째 치고 쌀밥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던 한반도의 유민들이 어떻게 허구 헌 날을 보냈을지 궁금하다.
먼 동쪽하늘 아래의 한반도를 바라고 하염없이 눈물을 짓는 유민들이 동화 같은 화면으로 떠오른다. 태를 묻은 정든 고향에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거냐?…애수에 젖은 유민들의 노래 소리가 금세 안개를 헤집고 세상 저쪽에서 흘러나올 것 같다.
“…저 산비둘기 잡지 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맸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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