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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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과일 한바구니가 일으킨 열풍
2013년 01월 20일 17시 11분  조회:5121  추천:1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과일 한바구니가 일으킨 열풍

 

채시장(菜市场)에 망과(芒果)가 있길래 한근값이 얼마냐 물어봤더니 7원이란다. 맛이 언떤가고 사서  먹어봤다. 들들했다.

"그리  힐끔하지도 않은걸 갖구서 되게는 요란을 떨었댔구나!?"

그것이 맛이 굉장할줄로 알았던 나는 쓰게 웃고말았다.

 

사전을 뒤져보니 이러했다.
"망과(芒果)는 옺나무과에 속하는 상륙교목으로서 높이 30메터 가량에 잎은 호생하며 피침형이고 혁질(革質)로 광택이 나는데, 길이 10ㅡ30센찌임. 2ㅡ3월에 적색을 띤 백색의 작은 사판화 혹은 오판화가 가지 끝에 원추화서로 핌. 과실은 길이 5ㅡ15센찌의 달걀꼴 또는 긴타원형이고, 황록색 내지 황색 또는 적색으로 익음. 과실 '망고'는 맛이 좋은 열대의 진과(珍果)임. 종자는 약용, 어린 싹은 식용함. 말레이반도, 미얀마, 인도북부의 원산으로 예로부터 과수(果樹)로 재배하여 왔으며 대만 등지에서 널리 재배함. 맹고. 암라(菴羅)."


이런 과실 한바구니를 외국사람이 모택동에게 보내온통에 한때 중국에서는 수억만의 백성이 망과를 영접하는 들끓는 운동을 벌리게되였던 것이다. 그 일을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몽매하고 유치하기가 그지없어서 그저 쓰거운 웃음만나간다.
세상을 웃기는 그런 운동이 생긴건 1968년도 여름이였다.

 

다들 알겠지만 1979년 9월 9일은 모택동이 이 세상을 하직한 날이다. 그러니까  "모택동시대"에 종지부를 찍은지도 어언 34년이 되는 것이다. 하건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일을 비롯해서 지나간 그 세월에 친히 겪었던 몇가지 일들은 찰거마리같이 그냥 지긋이 달라붙어 잊혀지지를 않으면서 가끔 뇌리를 아프게 긁으니  이 글을 쓰게되는 것이다.

 

1968년에 파키스탄대표가 모택동주석에게 망과(芒果)를 한바구니 증송했는데 모택동은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라"면서 그것을 공인계급에 보낸것이다. 한데 훗날 몇 개 나라, 특히는 제3세계의 나라들에서 모택동이 망과(芒果)를 좋아하는줄로 여기고는 그 과일을 보냈던 것이다. 하여 항간에서는 망과(芒果)를 맨처음보낸것이 알바니아의 호쟈라느니 비률빈의 총통부인이라느니 같지 않은 설이 나돌아 서로 엇갈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자료들을 찾아보게된건데 2004년 8월 7일자 파키스탄련합통신사에서 낸 "파키스탄의 망과가 지금은 중국시장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보고서야 제대로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통신에 "파키스탄은 1968년에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할 때 망과(芒果) 한바구니를 모택동주석에게 증송했다"고 하면서 "모택동주석은 그 과일을 로동계급에게 보냈다"고 밝히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니 1968년 8월 17일자 <<인민일보>>의 보도가 절대틀리지 않은 것이다. 그 신문은 첫면에다 "모주석께서는 외국벗이 보내온 진귀한 례물을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보냈다"고 했던 것이다.

 

1968년은 바로 대만을 내놓고는 온 중국대륙에서 "문화혁명"이 가장 열광적인 기세로 전개되던 때였는데 모택동은 외국사람이 자기에게 준 례물을 그같이 처리함으로써 수억만인민의 자기에 대한 애대와 숭배심을 한층 더 격발시켰거니와 그 흉흉한 기세가 지어는 하늘끝까지 치달아오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최대의 관심, 최대의 신임, 최대의 지지, 최대의 고무. 우리의 위대한 수령 모주석은 영원히 군중과 한마음, 모주석께서 외국벗이 보내온 진귀한 례물을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보내셨다.''그때 이런 소식보도가 신문에 났더랬는데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다 요즘은 그 시절을 회억하는 한족친구를 알고 사귀게되면서 지난일이 새삼스례 되살아나 다시금 여러 자료들을 뒤지게되였다. 세상을 마치 돗자리감듯이 세차게 불어쳤던 그때의 "개인숭배열풍"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어느정도였는지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거의가 모르거니와  알수없고 지어는 상상도 못할것 같아서 다시금뇌이게되는 것이다.

 

모택동은 그때 "인민일보"가 말한바와 같이 "진귀"한 례물인  "망과" 한바구니를 청화대학에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 학교의 지식분자들인 교직원들을 생각해 먹으라고 보낸건 아니였다. 그때 청화대학에는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가 들어가있었는데 그 골간들은 북경신화인쇄공장, 침직총창, 북경27기차차량창, 북경남구기차차량기계창, 북경화공3창, 북경북교목재창 등 여섯곳에서 온 공인들이였던 것이다.

당사자였던 요즘 새로사귄 한족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그때 공선대(工宣隊)가 청화대학에 진주하여서 약 3일만이였다고 한다. 하루는 모주석이 파견한 비서가 망과 한바구니를 갖고와서는 이건 외국손님이 모주석께 드린건데 모주석께서는 자시지 않고 공인들이 골고루맛보라고 보낸거라면서 "청화공인선전대지휘부"에 들여놓더라는 것이다.

 

1968년 8월 7일자 <<인민일보>> 보도에는 다음과 같은 세절이 있다.

"5일오후, 모주석께서 수도공농 모택동사상선전대에 망과를 증송했다는 특대소식이 청화원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즉시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서 보내주신 진귀한 례물의 주위에 모이여 열열히 환호하면서 노래를 불렀거니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충성심을 모아 우리의 가장 경애하는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빌고빌었다! 만수무강! 만수무강!"   


한데 망과 한바구니라는 것이 다해봤자 열몇개였다. 당시 공선대의 령도는 해방군이였는데(기실은 중앙경위퇀의 사람) 그가 이것을 자산계급지식분자들이 모여있는 청화원(淸華圓)에다는 절대 둘수 없다면서 그것을 6섯몪으로 나누어 공인간부들에게 주면서 제 단위에 갖고가 여러 공인들이 골고루 향수하게끔하라고 했던것이다.

 

그래서 나눠주는대로 저마끔 두세개를 갖고 단위로 간건데 공인들이 모택동이 베푸는 지극한 은정에 몹시 격동한건 더 말할 것 없었다. 그런데 입은 많고 과일은 두세개뿐이니 그것을 누군 먹을 수 있고 누군 먹을 수 없단말인가? 계다가 그 "금망과(金芒果)"들이 이미 무르익은것이여서 먹지 않으면 곧 썩게 될 것이라 오래둘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쨋으면 좋을건가 말이 많았는데 어떤데서는 아예 가져온 망과 두개를 큰 가마에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끓이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공인들이 렬을 지어 돌아가면서 그것을 한숫갈씩 떠먹었다. 한데 망과가 이미 썩은것이라 욕심을 부려 몇숫갈 더 먹은 사람은 그만 중독되여 배탈을 만낫던 것이다.  

이러자 공선대(工宣隊)의 지도자는 머리를 앓게 된건데 그는 끝내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각 단위마다 망과걷면에다 파라핀(밀랍)을 발라 될수록 과일의 수명이 길게하면서 모두가 우러러보게끔 하는 것이고
둘째, 지금 당장 북경경공업계통의 기술자에게 맏겨 비닐로 모방한 가짜망과를 많이 만들어 전국각지에 보냄으로서 그 누가 공인이면 다가 골골루 눈으로 보게함으로써 영예와 복됨을 누리게하는 것이였다.

 

이리하여 얼마지나지 않아서 과연 누런 금빛나는 비닐모방품 망과가 숱해제조되여 전국에 퍼졌는데 그것들은 다가 잘 밀페된 원형의 유리통에 든 "보배"였다. 유리통에다는 慶祝偉大領袖毛主席萬壽無疆ㅡ紀念偉大的領袖毛主席向首都工農毛澤東思想宣傳隊增送的珍貴禮物ㅡ芒果, 一九六八年八月五日(複製品)이라 써놓은 것도 있고 "颗颗芒果恩情深"이라 쓴것도 있으며 그저 "芒果"라 쓴것도 있었다. 

그밖에도 망과는 초상휘장, 선전화제재로도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쨌든 사람이 식용하는 과실에 불과한 망과였건만 그것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진품(珍品) 으로 떠받들리면서 심한  "망과숭배열"을 일으켯으니 과연 세상이 놀랄일이였다!  

대만을 제외한 전국 각 성, 시, 자치구는 다가 수십만씩 집회하여 모택동이 망과를 보낸데 대하여 감지덕지 고마움에 겨워서 그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다른소리를 죄쳐서 욕을 본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다. 

한가지만 례로:

흑룡강건설병퇀 제2사 13퇀에는 북경에서 온 녀지식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공선대원(工宣隊員)이였다. 그리하여 그 녀지식청년은 아버지를 통해서 남먼저 망과비닐방제품을 하나 사올 수 있은건데 부련장이 망과를 첨앙(瞻仰)하러 온 사람과  말하기를 나는 운남에서 병사질을 했는데 거기에 망과나무가 있어서 망과를 먹어봤다, 그게 생각같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더라 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렇게 좋은게아니면 외국에서 모택동에게 보냈겠는가? 넌 그게 무슨뜻인가 하면서 그를 되게 비평했거니와 부련장직에서 나떨구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그가 위대한 수령을 모욕했다면서 아예 반혁명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지금도 이러루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때 전국인민이 휘말려든 "망과열"에 대해서 쓴 글이 한두편이 아닌 것이다.
 

1968년 9월 16일, 복건성 복주시군민은 5.1로광장에서 "수도공인 모택동사상선전대가 보낸 진귀한 례물ㅡ망과복제품을 열렬히 영접하는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북경기차수리공사전체직공과 제1경공업계통 무산계급혁명파가 망과를 전선군민에게 보낸다는 편지와 망과헌사를 증송했다"

1968년 9월 17일, 제남시의 공인들은 "8.1"례당에서 집회를 열고 수도공인이 모택동주석에게서 받은 례물을 산동공인들에게 보낸것을 열렬히 경축하는 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1968년 10월 14일, 장춘시 15만군민은 인민광장에서 집회를 가지고 수도 북경에 가서 국경관례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대표단을 열열히 환영하면서 수도공인들이 보내는 망과를 뜨거운 마음으로 영접했다고 했다.

......

하다면 북경의 공장에 남았던 망과들이 후에는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문혁에 관한 한 회억록에서 넉넉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왕동흥(王東興)이 망과를 북경침직총창대표에게 주었을  때 그곳에서도 망과를 환영하는 의식을 륭중히 했다. 그러면서 망과를 밀랍으로 봉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그들은 망과를 대청중간에다 모시고는 공인들이 길게 대렬을 지어서는 그 앞을 지나면서 국궁재배를 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독하지 않았기에 빨리썩는다는 것 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하여 그것이 얼마안거서 인차 썩게되였고 그렇게 되니 혁명위원회에서는 밀납을 벗기고 큰가마에 넣은 후  물을 가득부어 오래끓이여서는 대렬을 지어 허리를 꿉썩 꿉썩 국궁재배를 해가면서 그것을 한숱갈씩 떠먹은 것이다.   ..... 

 

"망과숭배열"이 그같이 한참 열기가 오르면서 전국에 만년될 때 나도 그 행사에 적극참가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있은 흑룡강성의 합강지구 쟈므스의 동쪽 화천현에서도 망과를 첨앙(瞻仰)하는 행사를 굉장히 벌렸던 것이다. 온 성화공사 5,000명이 넘는 조판패(造反派)를 위시하여 6개마을의 사원전체가 총동원해서 화천현소재지 열래와 쟈므스구간의 큰길에 나가 지루한  몇시간을 기다려 "망과행렬"을 영접했던 것이다. 두사람이 각각 망과가 든 유리통을 두손에 바쳐 가슴에 안았는데 손에 장총을 잡은 행방군 넷이 그 운송행렬의 량켠에서 그것을 보위를 했다.

그날 첨앙(瞻仰)을 나간 "혁명적군중"들은 모주석이 보냈다고 하는 그 비닐로 모방한 망과를 제 눈으로 봄으로하여 마치 덕분에 이제는 장수하게 되기라도한것 같이 기뻐하면서 목이 터져라고 모주석의 만수무강을 빌고 빌었던 것이다.
그 뒤에 련이어진건 "3경3축"이라는 것이였다.
나도 안해와 아직은 철모르는 두자식을 거느리고 그 행사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했지만 나는 그런날이 얼마안가서 꿈밖에도 갑작스레 덥치는 중학교 "홍위병"들에게 집이 털리우는 봉병은 당했고, 일기에다 "범은 죽어 껍지를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글을 써놓은 것과  장차 작가로 되려고 촌에서 문학크루쇼크를 조직하여 문학공부를 하면서 소설을 쓴 것이 화근이 되여 "자본주의출세욕, 무산계급적대분자, 용서못할 반혁명"으로 몰려 옹근 4년간 "호래나발똥"을 갈긴것이다.

 

모택동이 남이 준 과일 한바구로 그같이 수억만의 제 국민들을 그리도 쉽게 감동시켜 눈문을 흘리게했거니와 들끓는 경애심과 불타는 숭배심을 갖추게끔 만들어놨으니 과연 기지활달하고 영명한 전략가라 하기에 손색이 없겠다.

그 수완에 진정으로 탄복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시대에 남한테 사람축에도 못가게 받은 멸시와 버림을 생각하면 가슴에 불이 일면서 무지하여 충성을 다지면서  만세를 불렀던 자신이 병신같아 낯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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