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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2)
할빈시 남강구 대직가에 있는 극락사(極樂寺)가 흑룡강에서는 제일큰 불교사원인 것이다. 내가 내내 쟈므스근처에 있는 향촌에서 살다가 성소재지인 그리로 이사를 하자마자 일부러 품놓고 제일먼저 구경하러 찾아간것이 바로 극락사(極樂寺)였으니 어느새 25년세월이 지났다.
중국에는 그것말고도 불교사원이 여럿되지만 국무원에서는 1983년에 할빈에 있는 그것을 한지불교중국중점사원(漢地佛敎中國重點寺院)으로 정해놓은것이다.
극락사가 생기기는 당천보원년(唐天宝元年)이라니 기원742년이요 당, 송, 원, 명, 청, 민국을 거쳐 오늘에 이른거니 저그만치 1270춘추를 보낸것이다. 그러니 상전이 벽해가 되는 허구한 세월에 흥폐(興廢)의 진통인들 오죽했으랴! 거의 피페해지는것을 1937년에 당시 불교협회회장이였던 원영법사(圓瑛法師)와 고전현상회회장(古田县商会会长) 호진거사(胡震居士)가 돈을 모아 다시금일떠세워 오늘에 이른것이니 명실공히 천년고찰(千年古刹)인 것이다.
극락사(極樂寺)의 건축역시 다른사원과 마찬가지로 주축건물은 남북향으로 배렬이 된건데 그 차례를 볼것 같으면 천왕전(天王殿)다음 대웅보전(大雄寶殿), 그다음은 삼성전(三聖殿), 장경전(藏經殿)이다. 극락사(極樂寺)에서는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봉양하고 서방의 삼성인 아미타불,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양하고있다. 장경루에 들어가봤는데 그곳에 진장된것들 중에서도 <<룡장(龍藏)>>이 옹정(雍正)년간의 유물이라니 아마 제일오랄것이다.
삼성전(三圣殿)뒤에있는 그 장경전(藏经殿)은 벽돌과 목재가 결합된 2층집이였는데 송판영인(宋版影印)의 적사장(碛砂藏) 60함(函) 모두 590책, 빈가장《频伽藏》48부; 륭장<<隆藏>>678부; 속장<<续藏>>1750部가 있다고 한다。
극락사는 1983년도에 문을 다시금 연 이래 흩어진 승려들을 속속받아들이였다. 그러면서 아울러 신일대를 배양하여 중국불학원에 보낸것이다. 그런일을 한 극락사가 지금은 대외로 불학원의 구실을 잘하고있다고 한다. 문화교류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셈이다.
극락사주건물 주변의 것들을 볼것같으면 왼편에 안양당(安養堂), 념불당(念佛堂), 종루(鐘樓), 재당(齋堂), 십방실(十方室), 선방(膳房), 사방(司房) 등의 건축물이 있고 오른켠에는 숙사(舍宿), 고루(鼓樓), 불학원교실(佛學院敎室), 선방(禪房), 객당(客堂) 등 당실(堂室)이 있는데 모든 전당과 법상(法像), 법기(法器)들은 다가 화려하고 장엄하거니와 휘황찬란했다.
지장전(地藏殿)에서 나오니 7층으로 만들어진 부도탑(浮屠塔)이 유별나게 눈길을 끄당겨 가까이가보니 과연 찾기어려운 건축물이였다. 그것은 높이가 37메터, 벽돌을 쌓아만든 7층으로 된 팔각형의 탑이였는데 탑처마밑에는 룡, 봉황, 학, 사자 등의 동물이 그려져있는데다 아래쪽 탑체의 둘레에는 30라한의 부각상이 놀랄만큼 기묘하게 조각되여 있었다. 극락사에서만이 볼수있는 경관이 아닐가싶을지경이였다. 아마 그래서 소문이 더난것 같고 따라서 유람객의 발길이 늘 끊지를 않는 것 같았다.
극락사 산문(山門)에 새겨진 “极乐寺”란 세글자는 청대의 장원남통인(状元南通人) 장건(张謇)의 글씨라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날따라 절강에서 온, 그곳 어느 시의 불교협회회장이라는 법사가 밖에 나왔다가 구경을 간 내가 불교를 지극히 관심하는 사람같아 보였던지 내내 무람없이 곁을 주면서 이것 저것 내모르는것들을 차견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는 사(寺)내에 있는 미타(弥陀), 세지(势至), 관음(观音) 삼존동상과 인도의 옥불은 조형이 정미해서 높은 예술가치와 문물적가치가 있다면서 근년에는 해외교포들의 경제지원으로 산문(山門)과 지장전(地藏殿), 방장실(方丈室)을 더좋게 지을거라고 알려줫다. 그러면서 그는 천왕전(天王殿)편액은 려경민적(旅京闽籍)의 서법가 우우(虞愚)의 필적이라는 것과 웅위로운 대웅보전(大雄宝殿)의 편액은 당년 중국불교협회회장인 조박초(赵朴初)가 쓴것이라 알려주면서 옛적에 해지법사(海智法師)가 민공을 거느리고 대웅보전의 기지를 닦을 때 묘하게도 굴속에 도자팔괘패(陶瓷八卦牌)가 하나있는것을 발견한건데 거기에 닭걀같은 샛노란 오매니단(五枚泥蛋)이 함께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런것이 잃어진 후로는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햇다니 과연 유감스러웠다.
절강에서 온 그 불교협회회장이 하는 말인즉은 할빈의 극락사(極樂寺)역시 국내 다른여늬곳의 불교사원과 마찬가지로 문혁(文革)때는 퍼쓰쥬(破四舊)바람에 액운을 면치못했다면서 날강도와도 같은 홍위병들의 손에 속이 다 털리웠거니와 하마터면 모양마저 없게 훼손될번했다는 것이였다. 그럴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형편을 보건대는 극락사가 그만큼이라도 모양을 갖추었으니 그래도 운수대통이아닌가싶었다. 천제님맙시사, 이제다시는 재앙이 없이 세상끝까지 보우하옵소서!
1966년 5월 29일, 청화대학부속중학의 학생들의 비밀리네 “홍위병”이라 이름을 단 조직을 내오고서는 6, 7월간에 선우로 <<무산계급반란정신만세>> 등 대자보 석장을 내다붙이면서 <<반란에 도리가있다>>고 했다. 8월 1일, 모택동은 편지로 청화대학부속중학홍위병을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시의 학교들은 분분히 “홍위병”을 조직했고 8월 18일에는 모택동이 천안문에 올라 그들을 검열했다. 그리하여 “홍위병”이라는것이 신속히 전국적범위에서 왁짝생겨났고 그것은 “문혁”의 중요한 정치력량으로 되었던 것이다.
청춘의 열혈이 한창 끓기시작하던때라 그들은 “낡은세계는 짓부셔야한다”, “요물잡귀신은 싹다 쓸어버려야한다”는 자극적이고 선동성이 강한 정치구호에 용기가 들뜨니 히스테리가 발작을 하듯이 사나와졋던 것이다. 그들 “호위병”은 무자비하고도 악렬한 파궤를 도맡다싶이했으니 그들에게는 무서운것이 없고 무르고 센것이 없었다. 무릇 낡은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라면 닥치는 뚜드려부시고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략탈”이라고는 하지 않고 “혁명인 수색”이라했는데 그들의 “수색”에 의하여 제일심하고도 험하게 “소탕”된것이 바로 “극락사(極樂寺)”와 같은 민족문화유물이였다.
우리 나라 중국의 남쪽끝 해남도에 있는 해서(海瑞)의 묘가 훼멸되였거니와 청장고원의 각랍사(覺拉寺)에 있던 장왕송찬간포(藏王松贊干布)와 문성공주(文成公主)의 소상(塑像)도 일부가 훼멸되였으며 하남(河南) 락양시의 룡문석굴(龍門石窟)에 있던 무수한 불상들은 몸체만 남고 머리는 싹다 떼우고말았다.
호남(湖南)에는 중국사람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줄곧 시조(始祖)로 모셔온 염제릉(炎帝陵)이 있었는데 홍위병들의 손에 전부훼멸되고말았다.
절강(浙江)에는 4천여년전 백성들을 이끌고 치수(治水)를 하면서 세 번이나 집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를 않았다는 전설적인 인물 대우(大禹)의 묘가 있었는데 그것을 뜯어 없애버렸거니와 높다랋게 만들어놓은 그의 소상(塑像)마저 뚜드려부수었다.
안휘(安徽)에는 천년 대를 내려오면서 보호하고 제를 지낸 명관(名官) 포청천(包靑天)의 시신이 묻힌 묘(墓)가 있었는데 훼손되였다.
“중화민족영웅”으로 칭해온 내몽고의 칭키스칸의 묘도 훼손되였다.
어디그뿐인가, 반복되는 얘기지만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 하여 중국에서는 백성들이 제일높이 받들면서 2천4백년넘도록 제를 지내온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는 그 공자의 묘마저도 깨끗이 털리웠던 것이다.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에 있은 1천여넘는 석패들이 부서지거나 쓰러졋거니와 불에 타고 훼손된 문물이 6천여개넘는다. 불에 태우고 팔프로 처리해버린 책만도 10만권넘어된다. 5천그루가 넘는 고목들이 채벌되였거니와 2천개넘는 묘(墓)들이 도적에게 털리운것이다.
그 모든 것이 국가것이였다. 하건만 문혁(文革)이 끝나야 국가정부에서는 30여만원을 들여 도적맞힌 금은재보들을 얼마간 겨우 겨우겨우 걷어들일 수 있었다. 잃은것에 비하면 그것이 새발의 피나될가. 5천여년을 자랑하며 지켜온 문화재보들을 제손으로 말끔히 훼손해버리고나서 이제는 그것들을 다시 건설을 하느라고 재력을 퍼부으면서 고심한다.
세상을 웃기는 중국식혁명이다!
몇해전이다. 나는 북경에 이사를 오자 일부러 여러날 품놓고 시내구경을 했다. 소수민족작가 제1차필회때 5일간에 명승고적은 그나마 거의구경했어도 시내구경은 못한 나였다. 그래서 나선건데 어느 번화가에는 골동품상점에서는 갖가지의 미륵보살의 머리들만 가득 내놓고 팔고있었다. 분명 그자신이 제조한건아니였다. 그래도 값을 알아보니 비싸기가 입이 벌어질 지경이였다.
올봄의 일이다. 어느날 시장에 갓더니 깥에서 중년을 넘긴 한족부부가 사진두장을 펴놓고 팔고있었다. 보통사진이 아니였다. 큰사진이 너비가 40여센치에 길이는 근 3메터가량되는건데 천명이 넘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 장군급인물들이 통일된 회색장교복을 입고 모택동과 엽검영을 회견하고 찍은 합영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좀 작은건데 그도 근 천여명되는 사람이 중앙의 령도들을 회견하고나서 함께 찍은것이였다. 값은각각 2000원, 1300원이였다.
보는사람마다 그저 희한해 할 뿐 사지는 않았다. 생각들이 자기나 제집식구가 사진에 들어있으면 몰라도....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이 사진 어디서난거야?”
물으니 사나이가 대답은 안하고 팔기를 그만두는것이였다.
한데 그로부터 며칠지나서는 그들 부부가 내가 아침마다 운동하러가는 “만춘원공원”에 나타나 거기 하쪽에서 그것을 내놓고 파는것이였다.
“이사람, 자넨 성명이 뭔가?”
전날부터 수상쩍게 본지라 나는 잡담제하고 직방 캐물었다.
그랬더니 저쪽은 사기실으면 사지 말거지 남의 이름은 알아뭣하냐면서 몹시 아니꼬와했다. 그래 내가 말했던 것이다.
“공안에서 조사하면 할말이 있어야지, 성이 아무개인 누구한테서 삿다고.”
그 사나이는 급급히 거둬갖고 그만가버리는것이였다.
분명제것이 아니였다. “문혁”을 하느라 남의 집을 털어 손에 넣어 여지껏 보관햇던것을 이제는 때가됐다여겨 내놓고 파는것 같았다. 안그러면 왜서 떳떳이 나오지 못할가?
“그놈의 문화혁명은 숱한 도적놈만 길러냈다니까!”
나의 한족친구 로류(老柳)가 하는 소리였다.
아래에 공자상을 올리니 독자는 보기바란다. 사진은 산동곡부의 공묘대성전내에 있었던 공자인데 채색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그 공자상은 문혁(文革)때 북경에서 간 홍위병들의 손에 두 눈알을 빼웟거니와 심장이 도리워진데다 전신은 막된 욕지걸이와 저주로운 악담으로 엮어진 표어들로 어지러워진 채 거리에 끌려나가 회술례를 당하고는 박살이 난것이다.
바로 사람이 무지하면 야만이 되는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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