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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기는 만주땅. 벌판은 황막하고 산상은 거칠고 깊었다. 허나 여기는 구국용사들의 열혈이 끓는 곳이였다.
일제의 박해에 시달리다못해, 억압과 착취에 배기다못해 쫓기고 도망해온 백의동포들. 이제 더는 갈곳이 없어서 여기로 마지막모여들었으니 그 수가 무려 100여만명. 온갖 암담과 원한과 비분만이 사무치는 그네들의 생로는 참으로 무엇이였던가?
대일항쟁방략이 나온 후 우국지사와 독립투사들로 묶어진 신민회는 전국민은 무장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한다는 전제아래 벌써 여러해전부터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깝고 조선사람이 다수거주하며 일본의 압력이 덜 미치고있는 여기 만주지역에다 조선사람을 집단이주시켜 독립운동기지를 닦으려했다.
그러다가 신민회는 이 계획을 탐지한 일제에 의하여 소위 <<105인사건>>, 즉 191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초까지 한달도 채안되는 사이 민족운동자 600여명을 체포, 투옥되는 그 참혹한 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도불구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기 위한 계획은 힘차게 추진되고 아울러 군자금모집도 꾸준히 계속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투입되였다. 그결과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기지가 설립되였으니 그것은 바로 류하현(柳河縣)기지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 이 지역으로 이주한 리상룡(李相龍), 리시영, 리회영(李會榮), 리동녕(李東寧) 등은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히였다. 이 단체에서는 교육, 산업우선주의를 기본목표로 삼고 있었다. 아울러 부여구강주의(夫餘舊疆主義) 및 고구려주의적(高句麗主義的) 민족의식을 내세워 재만동포들에게 만주가 과거에 조선의 령토였음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현재 만주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와 같은 동포임을 강조하였다. 그럼으로써 만주에 살고있는 동포들이 안심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추진시키도록했다. 한편 경학사에서는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는데 그후 신흥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신민회가 중국 동북지역에 독립운동기지건설을 목표로 하여 신흥학교를 유지, 발전시켜나갔기 때문에 조선의 애국청년들과 일본군의 장교까지도 망명하여 독립군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在滿韓人獨立運動史硏究>> 박영석)
좌진은 만주로 건너오자 한동안 대한광복회의 삼달양행이 자리잡고있는 봉천가까이의 봉황성(鳳凰城)에 있었다. 조국을 잃고 복수다운 복수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몰리다싶히하여 만주벌에 들어선 그의 회포야 어떠했겠는가?
刀頭風盡關山月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劍末霜寒故國心
칼끝에 찬 서리는 고국생각 돋구누나
三千槿城倭何事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일인고
不斷腥麝一帚寻
더러운 세상 한칼로 쑬어버릴길 없나
이 절귀는 그가 봉황성에 있을 때 지은것이다. 원래 문장가가 아닌 그였으니 글로서 얼마만큼한가는 론할바가 아니지만 칼을 뽑아들고 서서 고국을 생각하며 보복을 맹세하는 그의 심경만은 뚜렷이 안겨오는 것이다.
혼자서 상대도 없이 칼부림인들 얼마나 했으랴.
한번은 온 천지가 꽁꽁 얼어붙는 매서운 겨울날 아침에 웃통을 벗어붙인 그가 가없는 들판의 동쪽을 향해
<<왜적아! 나를 보아라! 왜적아! 나를 보아라!>> 하고 소리다해 웨치는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봉황성에있는 기간 그의 활동은 그리 활기롭지 못했다. 일본 관헌의 움직임을 알자 좌진은 그곳을 떠나 보다 편벽한 길림성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이듬해인 1918년, 방황하던 김좌진은 고국에서 넘어와 이곳에 운집한 동지들과 손잡고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만들고 그자신은 군사부장(軍事部長)이 되어 사업하는 한편 39명의 서명으로 <<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서>>이라도 함)를 발표하였다. 그것이 11월 13일.
려준, 정안립, 김동삼, 정신, 류동렬, 박찬익, 신팔균, 송일민, 김동평, 리우, 서상용, 황상구, 박용만, 김좌진... 등이 그때의 서명자로서 그가운데는 호명학교때부터 김좌진을 따르면서 용케도 적의 법망을 뚫고 방금 두만강을 건너온 박성태도 끼여있었다.
<<슬프다, 일본의 무력이여!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될지어다.>>
선언은 이같이 명백하게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부르짖었다.
만주의 여러 독립단체들이 주축이 되고 국내와 만주, 로령, 미국, 중국관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까지 서명자로 나섯던 이 <<선언서>>는 실로 기미년에 한해 앞서서 <<기미독립선언>>의 전주곡이였거니와 그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독립운동단체들은 지주와 소작민사이 차지(借地)와 소작료문제, 조선사람의 법적지위인 귀화권문제, 조선사람을 위한 경찰권과 교육권문제, 중국관리들이 가렴주구와 횡포 그리고 마적들의 횡포로 인한 조선사람들의 피해 등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그런데 좌진은 대한광복회가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고말았음에 구곡간장이 끊어지는것 같았다. 그처럼 활발하던 활동은 1918년 1월 24일 김경태, 림봉주 등이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함으로써 충청남도경찰부가 일제히 수사에 착수하게된것을 계기로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1918년 1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성환면 장두환이 체포됨에 따라 대한광복회의 전모가 점차 드러났다.
<<그날 집에만 가지 않아두 그 지경 되진 않았을건데... 지금쯤은 우리 함께 목청높이 독립선언을 웨쳤을건데....>>
박성태는 박상진이 체포된 일을 회상하곤 한숨쉬였다.
<<안될라니 화가 그렇게 쌍으로 겹친 모양이여.>>
좌진이도 한숨쉬면서 지나간 일을 회상했다.
박상진은 자기도 장차는 만주로 건너와 후일을 도모하겠노라며 좌진이보고 먼저건너가라했다. 그러던 그가 생모(生母) 정부인(貞夫人)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만 일본경찰에 잡히우고말았던 것이다. 너무도 잔인한 현실이다.
<<지금 부친과 친지들이 그일 구해내자고 천방백계를 다하고있소.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면서 사람을 구해 내세워보기도하고... 그래서 재판은 늦어지는 모양인데 어쩐지 희망이란 없고 막연하게만 느껴지는구만요.>>
<<이런 때에 내가 거미만큼도 맥못쓰는게 과연 원통하고 죄스럽소. 사지에 든 동지를 빤히 보고도 속수무책이되다니 원!... 어느 녀석이 제 동지를 팔아먹었는지!>>
자곡지심에 감겨들던 좌진은 낯색이 돌연 굳어지면서 노날같은 분노가 눈에서 일었다.
1919년이 돌아왔다. 조선은 또한번 력사에 기록남길 범상찮은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1월21일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갑자기 죽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였다. 고종은 1907년이후 12년간 서울의 덕수궁에 갇혀서 살아왔기에 나라일은 전혀 모르고있었다. 그러하건만 국민들은 그를 나라님으로 생각하고 만수무강을 빌면서 그가 살아있는한 나라는 다시일어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의문이였다. 향년 67살. 아직은 얼마간 더 살만한 나이였다. 일본사람이 누군가를 시켜 차물에 독약을 타서 죽이였다는 소문까지 나서 분하기 짝이 없었다.
2월 8일 도꾜 류학생 600여명이 조선기독교회관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상해에서는 대한청년단의 려운형, 김규식 등이 독립운동계획을 작성했고 미국의 대한부인회에서는 전해에 14개조항에 달하는 평화의견서를 발표하여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원칙을 천명한바있는 윌슨대통령에게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독립의 불길은 이같이 중국, 일본, 미국으로부터 피여나고있었다.
한편 이 기간 조선본토에서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세종교단체가 통합해서 하나의 거사를 은밀히 준비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종의 인산일(국장)을 계기로 3월 1일 만방에 알려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시내의 곳곳에서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시골선비와 시민들로 가득차있었다.
이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 모였고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 모이였다.
<<오 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가 랑독되자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참으로 10년동안 참아오던 민족의 함성이였다.
시민들도 뛰여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련창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기쁨과 함성으로 떠나갈듯 하였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조선반도 13도와 해외각지로 급속히 전파, 확대되였다.
<<3.1운동선언서>>는 만주로도 날아왔다.
길다란 선언서 뒤로 해서 마지막에 공약3장이 있었다.
1.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인도(正義人道) 생존존영(生存尊榮)을 위하는 민족적요구이니 오직 자유적정신을 발휘할것이요, 결코 배타적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2.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가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단기 4252년 3월 1일
마지막에 손병희로부터 시작해서 33명 민족대표의 서명이 밝혀져있었다.
그 리념은 민중화, 일원화, 비폭력이였다. 념원이야 얼마나좋은가! 헌데 도끼든 강도앞에서 선량한 웨침이 어느만큼이나 위력이 세겠는가.
장곡천호도와 조선총독앞으로 보낸 원경 내각총리대신의 지급친전관보(至急親展官報)는 아래와 같다.
<<이번 소요사건은 내외에 대하여 표면상으로는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하게 함을 필요로 함. 그러나 실제로 엄중한 조취를 취하여 앞으로 다시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바람. 단 그 조치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가장 주목하는 문제이니, 적어도 잔인 가혹하다는 비평을 듣게 하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하기 바람.>>
그러나 일제는 운동의 기세가 높아지자 본국에서 2개 사단이나되는 병력을 끌어들이여 적수공권인 조선인민을 무차별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결과 피살자 7,000여명에 부상자 1만 6000여명. 체포투옥된자가 4만 7,000여명되였다.
<<3.1운동>>은 피비린 탄압속에서 실패하고말았다. 좌진은 명백히 깨달았다.
<<오로지 혈전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입니다.>>
이같이 부르짖은 김좌진은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즉각 중국 단기서(段棋瑞)정부에 <<東省韓僑致軍府電>>을 보내여 제1차세계대전이 결속된 후 약소민족은 자치를 요망하고있는 추세를 말하고 조선을 삼켜버린 배신적이고 무도한 일제가 국부(國父)를 살해하고 폭정을 감행하는 죄행을 폭로하면서 조선은 견결히 독립하련다는 태도를 강력히 표명했으며 각국의 동정과 지지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정부에서는 조선교민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다.
중국은 처음부터 조선의 독립혁명을 지지하는 태도였다.
리대소(李大銷)와 함께 신문화를 적극제창하면서 중국에다 한창 맑스주의를 전파하고있었던 진독수(陳獨秀)는 자기가 꾸리는 <<매주평론>> 3월 23일자 첫면에 지안(只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독립운동감상>>을 발표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성실하고 비장한 것이다. 관념을 뚜렷하게 밝히면서 백성의 의지대로 폭력을 쓰지 않은 이 운동이야말로 세계혁명사에 새기원을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찬미하면서 슬픔, 흥분, 희망, 참회가 엉키는 감정에 잠기였다....>>
일제의 잔인무도한 횡포가 기록을 남기고 끝맺은 3.1운동. 그러나 그것은 실상인즉 끝난것이 아니라 깨여진 얼을 가지고 속으로 속으로 스며든 것이였다. 뜻있는 이들은 끈질긴 지하운동으로 파고들어갔고 많은이들은 또 해외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만주는 의지하러 찾아온 우국지사들로 장을 이루었다.
좌진은 이 동포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함께 손잡고 싸워가기를 바랐다.
이즈음이던 1919년 4월 11일 상해프랑스조계지 보창로 32호서 각 도(道)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림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림시헌장(臨時憲章) 10개조를 결의반포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에 대한민국림시정부(상해림정)를 조직하고 관제(官制) 등을 선포했다. (17일에 태극기를 걸었음)
선서문은 이러했다.
<<존경하고 열애하는 아(我) 2천만동포국민이여! 민국원년 3월1일 아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함으로부터 남녀로소와 모든 계급과 종파가 일치 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忍辱)하게 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의사(意思)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다.
이제 세계의 동정은 아국에 집중하려 한다.
차시(此時)를 당하여 본 정부는 전국민의 위임을 수(受)하여 조직된고로 본 정부는 전 국민과 더불어 전심코 육력(戮力)하여 림시헌법과 도덕이 명하는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방기(邦基)확고의 대사명을 리행할것을 자에 선언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기하라, 우리의 흘리는 일적(一適)의 피가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에 치(値)하고 신국(神國)건설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도는 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고 우리의 정의는 마침내 일본의 폭력에 승리할것이다. 동포여! 최후의 1인까지 싸우라.>>
김좌진은 언녕부터 최후의 1인으로 남을 때까지 싸워보리라고 결심한 조선의 남아였다.
<<자유는 피와 땀의 대가이다.>>
<<힘에는 힘으로 대처해야 한다.>>
<<대한의 국토는 대한사람인 우리들의 피로써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의 호소였다. 현모한 철리(哲理)로 되어진 이 호소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공명을 주면서 그들을 각성시키였고 열혈청년들을 구름같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게하였다.
김좌진은 만주에 와서 입교한 대종교도(大倧敎徒)였다.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대종교의 종지였다.
좌진이 만주로 망명해오기 몇해전이던 1911년 3월에 북간도에서 대종교도들을 골간으로 하는 중광단(重光團)이 조직되였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단체는 무장투쟁을 전개코저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일대의 대종교도와 한말의병 및 공교회(孔敎會) 등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재조직되였다. 그리하여 긴급히 독립군을 편성, 훈련시키는 한편 <<一民報>>와 <<韓國報>>를 발간하여 일제와의 항전은 혈전을 벌리는 독립전쟁의 수행만이 있을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때 각지에 산재해있었던 결사대원과 단지결사대원들로 모집된 인원은 무려 1,000명에 달했다.
<<....우로 신성의 영광을 조정에게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몸을 순(殉)하여 1백몸을 속죄함은 인도의 원훈(元勛)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 노예로 사는것은 생의 치욕이요, 누가 죽는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지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를, 량미가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만세에 영광을 남기리...>>
이는 대한정의단이 독립무장단체인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면서 발표한 창의문이였다. 열렬하고 절절하며 따라서 매력적인 강한 호소력을 갖고있는 이 창의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구국성전에로 불러일으키면서 그네들을 자기의 두리에다 굳게 묶어세웠다.
1917년에 만주로 건너와 대한광복회의 무관으로, 대한독립군의군부의 무관으로 있었던 김좌진은 1919년 8월 대종교리창시자자의 한사람이며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장과 교도들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해 무력을 키워온 문무겸비의 의병장이였던 서일(徐一)의 초빙을 받아 조성환, 리장년 등과 함께 대한군정회의 중진으로 되었다.
두달후인 10월에 이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개편되였고 얼마후에는 또 상해림시정부의 12월 <<국무원 제205호>>정신에 립각하여 명칭을 대한군정사로 고쳤다. 그리고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칭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가졌다.
창립초 북로군정서의 간부진영은 다음과 같았다.
총 재: 서 일
총 사 령: 김좌진
참 모 장: 리장녕
려 단 장: 최 해
경 리: 계 화
길림분서고문: 윤복영
군 기 감 독: 양 현
그때 북로군정서가 자리잡은 곳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의 잣덕이라 불리우는 북산기슭이였다.
북로군정서는 병력증강을 위해 1920년 봄에 백초구(百草溝)등지에서 장정 300여명을 새로 모집했고 리성규(李成奎)를 국내에 파견하여 대한제국때의 륙군장교였던 김규식(金奎植), 홍충희(洪忠喜), 김찬수(金燦洙), 박형식(朴亨植) 등을 초빙했다.
한편 북로군정서는 무장활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서로군정서와 련계를 맺고 군사상 일체의 주요안건, 사관양성, 무기구입 등에 서로 협조하기로 했고 합의에 의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던바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리범석과 졸업생장교 박영희, 백종렬, 강화린, 오상세, 리운강 등을 비롯한 다수의 훈련장교와 교재를 공급받았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북로군정서는 자기의 본부가 있는 십리평에다 사관련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했다.
그리하여 간부진영도 변하여 아래와같이 재조직하였다.
총 재: 서 일
총 사 령: 김 좌 진
모 연 국 장: 계 화
재무및검사국장: 김 덕 현
군 사 교 육 장: 김 일
외 교 부 장: 김 병 덕
의 군 단 장: 허 근
의 용 단 장: 허 재 명
군 정 위 원: 고 평, 김 덕 현, 손 범 철,
김 희, 김 근 우, 신 원 균.
모 연 대 감 시: 정 신
제 1 대 장: 최 한
제 2 대 장: 현 갑
제 3 대 장: 김 한(김 상 원)
제 4 대 장: 김 홍 래
제 5 대 장: 현 우
제 6 대 장: 황 희
제 7 대 장: 리 휘
제 8 대 장: 조 춘 순
사관령성소는 리범석이 련성대장이였고 총사령인 김좌진이 학교장을 겸하였으며 김규식, 홍흥국, 최상운 등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약 1,100여명으로서 그중 잘 훈련된 정예군인이 600명이고 나머지 500명은 경호력이였다. 무기로는 총 800여정, 기관총 4정, 포 2문, 수류탄 2,000여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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