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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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18)
2014년 03월 18일 17시 24분  조회:3423  추천:1  작성자: 김송죽
 

18. 

 

김좌진은 10월 22일, 23일 어랑천전역 역시 승첩으로 이끈후 일제의 보복을 예상했다. 그자들은 틀림없이 대병력을 동원할 것이다. 장군은 여기서 그자들과 맞서는것은 무모한 짓임을 깨달았다. 우선 전쟁물자의 계속적인 보급이 어렵거니와 독립군의 인원보충역시 어려웠다. 그리고 현지 재만조선동포들에게 많은 피해를 줄것도 예상되였다. 그리하여 지체하지 않고 밀산을 향해 북정을 개시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1인당 탄약3,4백발씩 휴대하게 하고 기관총 2정, 야포 1문, 그리고 각종탄약을 우차에 만재하는 등의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10월 26일, 27일경에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경계인 황구령촌부근에서 홍범도의 련합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후 11월 7일경 다시 그곳을 출발하여 오도양차(五道楊岔)로부터 삼림계곡을 따라 천보산 서쪽 부근을 돌아 니추담구, 연길의 남하마탕 등지를 거쳐 11월 15일경 소삼차구(小三岔口)부근 왕청현 춘양 신선동에 도착한후 이어 여러 독립군부대가 집결하는 밀산으로 향했다.

또한 이를 전후하여 안무가 인솔하는 200여명의 군민회의 국민군과 의군부 및 광복단군 등도 이와 비슷한 길을 따라 밀산으로 북정했다.

밀산은 쏘련과 중국의 국경지대에 놓여있기에 가능한 한 큰회전을 피할수 있었다. 그리고 밀산은 간도에서처럼 조선동포들이 모여사는 곳이여서 그네들로부터 한동안은 부족되는 군량을 얼마가량 지원받을수도 있을것으로 생각되였다.

일찍이 1909년 여름부터 헤이그밀사로 사행했다가 울라지보스또크에 간 리상설과 그곳 한민회(韓民會)의 회장 김학만, 그리고 <<히됴신문>>의 주간 정순만, 유학자, 리승희 등을 중심으로 하여 씨비리, 특히는 울라지보스또크에 망명한 민족운동자들이 북만주의 밀산부(密山府)지역내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이를 추진한바 있었다.

그때 그곳은 넓은 황무지가 널려있는 곳이였다. 조선동포들이 여기저기 몇세대씩 들어가 개간사업을 벌리며 정착을 꾀하나 자금과 인력부족 때문에 유목생활을 면치 못하는 그런 지역이였다.

리상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리승희가 나서서  이 지역의 일부 토지를 사들이고 개척을 시작하게끔 했다. 그리하여 리승희는 울라지보스또크에서 700리 넘는 그곳을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면밀히 답사한 끝에 마침내 봉밀산(蜂密山)밑에 기름진 터전을 잡아 우선 45방(方)의 토지를 사들이였다. 그리고는 1909년 가을 100여호 이민단을 이끌고 이곳에 와 한흥통(韓興洞)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한흥동이란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는 또 거기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력사를 가르쳤고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조선동포들의 단결을 도모했다.

신민회의 중요간부였던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등도 한때 밀산지역을 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하기 위해 힘쓴바 있다.

이곳에 모여든 여러 독립군부대들은 대일방략을 연구한 끝에 힘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각개 분산되지 말고 단합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위시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도독부(都督府), 의군부(義軍府), 혈성단(血誠團), 야단(野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광복군단(光復軍團) 10개 단체는 통합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창립했다. 총재에 서일이 추대되였고 김좌진은 홍범도, 조성환 등과 함께 부총재로 임명되였다. 그밖에 총사령은 김규식, 참모장은 리장녕. 려단장은 리청천이였다. 이때의 총병력은 3,500여명이였다.

대한독립군단을 창립해놓은후 수뇌들은 장차의 구국방략과 아울러 이제는 병력을 밀산에서 어디로 이동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론의하였다.

이때 일제는 5만여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만주에 출동하여 독립군을 초멸(剿滅)하겠다며 한창 날뛰고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수뇌들은 론의 끝에 일본군의 추격과 중국당국의 간섭을 피하고 보다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쏘련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이 방략에 따라서 때한독립군단측과 쏘련 흑룡주(黑龍州)방면의 독립군측이 상의하던중 마침내 문창범, 한창해, 오하묵 등에 의해 하바롭스크에 있는 공산군 2군과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밀산을 떠나 국경인 우쑤리강을 건너 쏘련의 이만(伊曼)으로 가게 되었다. 이만(伊曼)은 이때 북으로는 쏘련군, 남으로는 일본군과 백파군을 두고있는 완충지대의 자그마한 도시였다.

그런데 엄동설한에 대부대의 이동이란 과연 간단치않았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눈보라속을 행군해야했다. 식량이 모자라 반기아상태에서 맥이 모자라는데다 얇은 옷속으로는 뼈를 에이는듯한 씨비리의 찬바람이 스며들었고 거기다가 일본군 호림선(虎林線)수비대의 추격과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야했다.

이때 쏘련의 연해주에는 김뾰똘의 이만군, 최니꼴라이의 다반군, 박그리고리의 독립군단, 오하묵의 자유대대, 박일리아의 니항군 등 조선사람의 독립군부대 여럿이 있었다.

3월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여러 독립군부대는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응하자면 더 큰 규모의 부대로 단합해야 한다는 동일한 인식으로부터 전체 독립군부대들의 통합을 바라게 되었다. 결과 4월중순 대한독립군단을 새로 창설했다.

그런데 여러 독립군단체들이 한곳에 모이게되자 쏘련홍군 제2군단 제6련대장으로 흑하지방의 수비대장직을 겸하고있는 오하묵과 빨찌산부대인 니한군(尼港軍)장령 박일리아사이에는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통에 독립군들까지 그만 이네들의 주도권쟁탈전에 휘말려들고말았다.

이때는 예상밖으로 쏘련의 정치형세가 이쪽으로놓고보면 불리하게 변해가고있었다. 이해에 쏘련정부대표 카라한과 일본공사 요시자와는 중국 북경에서 캄챠카반도 연안의 어업권에 대한 협정을 맺었는데 그때 일본공사는 쏘련정부대표에게 <<쏘련령토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한국독립군을 육성하면 량국간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이에 국내혁명을 방금 치르고 나서 국력이 쇠약했던 쏘련측은 쏘련령토에서 방금 철거한 일본과의 불화를 경계하는데로부터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겠노라 약속한것이다.

그래서 쏘련 치따정부의 지도자들과 독립군지도자들간에는 서로 랭대하는 미묘한 알륵이 생긴 형편인데 설상가상으로 이곳의 원조선인무장단체 지휘자들간의 군권쟁탈마저 로골화되면서 서로가 반목하는 지경에 이르었다.

빨찌산 <<니항군>>의 지휘자 박일리아는 고려공산당 한인부 지도자인 박애 등과 손을 잡고 <<한인군사회>>를 구성하고 쏘련 원동정부의 군부와 교섭하여 비준을 얻은 결과 조선인무장단체들을 통일적으로 관할할수있는 권리를 장악하게되였다. 그는 니항군을 싸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모든 독립군단체는 다 자기의 지휘를 접수해야한다고 선포했으며 지어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의 무장마저 해제한후 그들을 다시 수비대에 넘기였다.

이렇게 되자 전로고려공산당의 주요간부였던 오하묵은 이에 불복하여 이르꾸츠끄에 있는 공산국제 동양국 비서부와 교섭하여 <<림시고려군정회>>를 내왔다. 미구하여 그 <<림시고려군정회>>가 다시 연해주와 아무르주의 모든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은즉 군권관계는 바뀐셈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애, 박일리아 등이 사처로 분주하면서 <<송사>>를 거는통에 쏘련당국의 립장은 나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밀산에서 건립된 대한독립군단과 연해주의 독립군무장단체 및 쏘련홍군편에 가담한 사회주의계렬의 무장단체들의 결합체였던 대한독립단은 그 실존이 위태롭게 되었다.

종전부터 상해림시정부를 승인하고 그의 지지와 지도를 받아왔던 대한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은 오로지 단 하나 공동항일을 하자는 목적에서 박애 등이 지도하는 연해주의 고려공산당과 박일리아가 거느린 싸할린의용대와 합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통제권이 전로고려공산당의 오하묵한테로 넘어가버렸다. 하여 난처한 처지에 든 대한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은 하는수없이 대폭적인 양보를 하면서 협상한 끝에 오하묵과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림시정부의 성립은 당분간 보류키로 하되 대한독립군단은 상해림시정부와 일체관계를 끓는다.

2). 명칭은 대한독립군단을 그대로 하되 공산당본부가 교포자치단체의 지휘권을 가지며 민정부로서의 모든 책임을 지고 독립군단은 정치조직을 배제한 순수한 군사단체로서 군정부를 형성한다.

3). 대한독립군단은 국경에 접근한 이만으로부터 자유시로 본영을 이동시킨다.

 

이에 홍범도, 최진동, 안무, 허근, 리청천 등의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서로군정서는 이만을 떠나 자유시로 불리우던 알렉세브스크로 이동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현천묵, 리범석 등과 함께 원래의 북로군정서를 움직이지 않았다. 예감이랄가, 아니면 선지선각이랄가 김좌진은 쏘련이 너무나 생소했고 더욱이 미묘하게 번져지는 형세를 감안하여 자기 부대의 이동을 재삼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어 자유시로 선뜻이 가지 않고 기일을 끌었던 것이다. 이러고있는 중인데 6월 22일 그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이만일대의 조선독립군은 쏘련군으로부터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고를 받게되였다. 기막히는 일이였다.

<<종전에 맺었던 군사협정은 휴지쪼각이더냐? 배신을 하다니!>>

격분한 장군은 곧 부대를 거느리고 우쑤리강을 건너 만주로 되돌아오고말았다. 이때는 만주땅이 안전했다. 중국인민들의 강력한 성토와 항의에 의하여 북경정부가 일본정부와 반복적인 교섭을 한 끝에 <<경신대토벌>>에 동원되였던 일제군대는 5월달에 하는수없이 만주에서 철거했던 것이다.

한편 쏘련에 그냥 남은 조선사람의 부대들은 항일공동전선을 형성한다는 명의아래 고려혁명군을 편성했으니 그 정황은 아래와 같았다.

 

제1련대: 독군부부대(최진동, 리재욱)

         합동민족련대

제2련대: 니항군부대(박일리아)

         독립군단

제3련대: 자유대대(오하묵, 최고려)

         국민호군(안무, 김광, 김규찬)

         대한독립군(홍범도, 리청천, 리병채)

경비대 : 이만군(김뾰똘)

         다반군(최니꼴라이)

 

그런데 원 니항군이 이름을 바꾼 싸할린의용대는 부대편성에 관한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설복코저 1921년 6월 27일 오후 군인대표회의를 열고 토론하고 권고하였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이 중도파탄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날 밤에 고려혁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싸할린의용대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키로 결정지었다.

28일 새벽 1시. 오하묵이 령솔하는 자유시지방수비대(전 조선인보병자유대대)와 쏘련홍군 제29련대가 싸할린의용대가 주둔하고있는 스랍스크를 외선포위했다. 그리고는 쏘련홍군 제29련대 련대장이 아침 5시부터 싸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수뇌자들과 10여시간이나 교섭했으나 허사였다. 이렇게 되자 이날 오후 4시경에 총공격령을 내렸다. 오하묵의 지방수비대와 쏘련홍군 제29련대의 4개중대는 쏘련홍군 제2군단에서 증원한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화력의 엄호밑에 600여기의 기마대까지 앞세우고 스랍스크를 돌진했다.

막기힘든 력량이였다. 싸할린의용대는 전투가 시작된지 불과 한시간도못되여 혈로를 뚫고 퇴각하여 마침내 흑룡강에까지 이르었다. 어디로 더 퇴각한단말인가? 그러나 상대측은 그냥 쫓고 맹격하여 싸할린의용대는 비참히 전멸되고말았다.

이날의 무장충돌에서 싸할린의용대와 독립군부대는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이였다.

이른바 <<자유시사변>>은 이러했다.

 

<<자식들! 무슨 지랄이여! 동족상잔하다니!>>

좌진은 이 소식을 듣고나서 너무나 격분되여 치를 떨었다. 일본군과의 전례없는 대격전인 청산리싸움에서도 이렇듯 큰 손실을 보지 않았거니 원쑤도 아닌 자기편끼리 싸워 아까운 목숨잃고 피흘린것은 그야말로 말못할 수치로 되었다.

그리고 또 이 사변을 계기로 쏘련연해주에서 재조직되였던 리용(李鏞)의 대한의용군역시 백군과 맞서서 결사적으로 싸웠음에도 이듬해의 8월 쏘련홍군 제29련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말았다.

쏘련에서의 독림군운명은 바로 그러했다.

김좌진은 <<자유시사변>>을 생각만하면 가슴쓰라리고 답답해나군했다. 그때 김좌진이 형세를 민감하게 보아내고 이만에서 만주로 되돌아온것은 과연 현명한 결책이 아니라할수 없다. 그러지를 않고 자유시로 갔더면 어쩔번했는가? 그도 은연중 그놈의 주도권쟁탈전에 휘말려들어 어떤꼴이 되었을지 모를일이다. 하니까 그번의 값없는 류혈을 묘하게 모면했다고하겠다.

하지만 <<자유시사변>>이 있은지 두달만인 8월 26일에 또 <<당벽진사변>>이  발생해서 김좌진은 전혀 예상못했던 혹심한 타격을 받았다.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여 독립군인들이 로씨야로 건너갈 때 그와 가장 의기상투했던 동지이자 총재였던 서일은 둔병제로써 전체독립군의 경제적 뒷받침을 하려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당벽진에 남았다.

(당벽진은 밀산남쪽 흥개호가의 중로변경에 있는 활량한 곳.)

그런데 주력이 떠난지 불과 8개월밖에 안되는 그날에 수백명의 토비들이 마치도 피에 굶주린 악마같이 급작스레 덮쳐들어 그곳에서 농사짓고있던 독립군들을 피바다에 몰아넣었던것이다. 너무도 참혹한 훼멸이였다.

이틑날 서일은 청년병사들이 많이 죽었으니 이에 책임을 지고 대종사 라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허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백암이 먹고 도야지 뛰여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믈고 길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를 크게 읊조리고는 그만 자결하고말았다.

 

이보다 며칠 앞서서 8월 11일 조선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맹활약하면서 김좌진과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박상진이 체포된지 4년만에 대구감옥에서

             難復生此世上   幸得爲男子身

             無一事成功去   靑山嘲綠水頻

 

이란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처형되였다.

그가 죽던날 옥졸은 울먹이면서 <<의인이 죽으니 천지가 깜깜해지고 시정(市井)에는 전방문이 모두모두 닫혔습니다.>>고 고인의 부친께 전하였다. 그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 성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모두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번갈아가면서 밤을 새우기도하고 금백(金帛)과 지촉(紙燭)으로 돕기도하였다. 장사지내던 날 가두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낮모르는 길가던 나그네까지도 눈물 흘리지 않은이가 없었으니 모두들 <<죽었어도 오히려 영광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국인과 조선인 리완우, 김모 등 수십명은 경관들의 조사를 피하여 15리쯤 떨어진 동촌역에 와서 통곡하였다. 또 청천역까지 이르러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하는 소리에 땅이 꺼지는 듯 하였다. 시체를 발인(發靷)할 때부터 기마대가 달려와 길가에 늘어서서 오는 손님들을 휘몰아 쫓았는데 그 광경이 참혹했다.

이러했은즉 박상진이란 인물이 조선인민의 가슴속에 어느만큼한 위치에 놓였음을 가히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조선땅에 남아있은 항일비밀결사대원들은 아마 다가 장례식에 가보았으리라. 헌데 좌진은 갈수도 없었다. 그는 신문보고 이 소식을 알았을 때 눈앞이 캄캄해나면서 북바쳐오르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지난날의 가지가지 일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깊이 묻으면서 멀리 이국땅에서 의형제이며 동지인 박상진의 령전에 만사(輓詞)를 올리였다. 그중 한구절.

 

<<結義桃園二十年  知公毅節衆難肩>>

   

1921년도의 한해는 실로 절망과 슬픔과 고민에 모대겨야하는 암담한 해였다. 하늘이 흉년까지 내려보냈으니 어떻게 살란말인가?

우선 구복이나 달래고봐야했다. 그래서 독립군들은 흩어져 끼리끼리 먹을것을 구하러 다니였다. 때로는 잔인하게 착취하는 부락의 토호들을 습격하여 략탈도했다.

이해에 김좌진의 동생 동진이가 조선 고향에 가 집식구들을 데려왔다. 김좌진은 여러해동안 돌보지 못했던 어머니와 안해를 부양하게되였다. 그러나 보다싶히 먹을것이 극난이여서 장군인 그도 반배나 불리며 살아가는 형편이였다. 집은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랬건만 어머니는 좀치도 아들을 탓하지 않았다.

<<얘야, 태산을 넘으면 평지를 보네라. 이제 나라가 독립하면 배부르게 먹고 잘살수 있을게 아니냐.>>

이러시는 어머님이였다.

 

이해의 초가을 어느날 오후, 림범석이 독목하(獨木河)에 있는 김장군을 찾아왔다. 그는 산산히 흩어져버린 독립군을 다시 모이여서 동산재기할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좌진은 왜 그렇게 못하겠느냐 그것은 시간문제일따름이라했다.

<<자네 여기 잠간만 앉아있게.>>

이야기가 어느덧 한담으로 넘어가 너털웃음을 텃뜨리던 김좌진은 뜻밖에 이러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데 잠간만이라면서 나가던 사람이 오래도록 들어오지 않아 리범석은 이 사람이 대체 웬일이냐고 밖으로 나가 찾아보았다.

마을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동구밖을 나가보았더니 거기 커다란 못가에 쭈크리고 앉아있는 장군이 보였다. 그는 두발을 괴고 앉아서 낚시질을 하고있었던거다.

범석이 가까이 다가가니 장군은 돌아다보며 웃었다.

<<오늘 바람이 세여서 그런지 그놈들이 잘 물려주지를 않네.>>

범석이 그 말을 들으면서 장군의 옆 버들다래끼를 보니 안에 여라문마리 잘되는 물고기가 담겨져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범석이는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찾아온 자기를 대접하여고 장군은 무관답지 않게 이런 노릇을 하고있지 않는가!

그날 밤.

장군이 잡아온 물고기찬에 조밥그릇을 놓고 두사람은 나란히 겸상을 받았다.

<<자네의 말은 아직 죽지는 않았겠지?>>

숱갈을 놀리고있던 장군이 우연히 생각나는지 물었다.

<<네, 아직 죽진 않았습니다만 무척 여위였습니다.>>

<<거 안됐네, 그놈인들 먹지 못하니 살이 찔리가있나.>>

<<.....>>

며칠후 범석은 김장군의 편지를 받고 놀랬다. 어떻게 해서라도 말의 목숨만은 구하라는 짝막한 사연의 편지와 함께 그속에는 5원짜리 지페 한 장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말먹이를 사라는 것이였다. 후에야 할았는데 그 돈은 장군이 한벌뿐이던 양가죽외투를 저당잡힌 돈이였다. 범석은 그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어찌잊으랴.

이때의 형세를 보면 독립운동계에서는 분산된 독립운동의 세력을 총집결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였다. 이에 박용만, 신숙 등은 4월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여 상해의 림시정부를 부인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내외의 항일세력을 총망라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림정부를 불신임하는 이 국민대표회의에 대하여 림시정부측에서는 내무부령(內務部令) 제121호로써 해산을 촉구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 자체내에서도 창조파니 개조파니 하는 파벌이 생겨 회의는 흐지부지해지고말았다.

한편 만주지역에서는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문제가 론의되던 중 1921년 1월 남만통일회의에서 대한통군부(大汗統軍府)로 결집되였다.

이때의 김좌진은 절대 정서가 저락되여 주저앉아있는 사람은 아니였다. 그의 활동에 대해 <<동아일보>>와 <<독립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있었다.

 

<<金佐鎭을 隊長으로 暗殺爆破計劃進行 이미 폭탄까지 준비했다고.

모처에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중국 輯安縣에 있는 金佐鎭은 상해에서 열린 國民大會에서 決死隊隊長으로 임명되였으므로 김씨는 哈爾濱에 있는 독립단체에 명하여 상해 佛國租界에 있는 아라사 사람에게서 폭탄 20개를 사들이게 하고 결사대원 金淳甲, 韓敬德외에 수십명을 조선안으로 들여보내여 관공서를 파괴하며 오로지 大官들을 암살하려고 계획한다는데 요사이 만주 각지에는 독립운동이 맹렬하여 안동현방면에는 상해에서 발행하는 <獨立新聞>>이 각처에 배달된다하더라.>>

 

(1923. 5. 3)

金佐鎭 又活躍

의렬단과 련락하여 대활동

조선의 대관암살 관서폭파

 

(1923. 6. 27)

金佐鎭이 吉林에 나타나 북경을 향하려 한다고

 

(1923. 11. 17)

獨立黨統一計劃

金佐鎭등 유력한 이십일명의 발기로

 

(1923. 11. 17)

金佐鎭 部下와 內通

金組給仕公金橫領后報

 

피비린 <<자유시사변>>을 겪고나서 전도에 절망하거나 맥을 버리고 나앉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좌진은 보다싶히 남아의 열혈이 그냥 끓고있는 투사로서 장령의 원모습을 그냥 빛내이고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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