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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에 의하여 결집되였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이듬해인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재편성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가 탈퇴하였고 또 독립운동진영이 분렬되여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수 없게 되자 이에 만주의 독립운동세력만이라도 꼭 통일해보자는 의도에서 1924년 7월 10일, 전만통일회의(全滿統一會議)를 열어 같은 해 11월에 정의부(正義府)가 나왔다.
한편 경신참변후 재기하여 동북만과 북간도 북쪽에서 활동하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비롯하여 혈성단(血誠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의군부(義軍府), 독립단(獨立團), 광복단(光復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진단(大震團), 의민단(義民團) 등 9개의 독립군영도 남만주에서와 같이 통일운동을 일으켜 1922년의 8월에는 리범윤을 총재, 김좌진을 총사령으로 선임하여 하나로 통합된 군영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밀산에서 쏘련으로 건너갈 때 조직하였던 대한독립군단을 재건한것이다.
1,200여명이상의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이 대한독립군단에는 김좌진은 물론 김규식, 최진동, 현천묵, 강국모 등의 명장과 남극성, 최호, 박두희, 류현, 리장녕 등의 중진인물로 망라되였고 그 세력이 북만과 간도에까지 미치고있었다. 이와같이 가슴아픈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부단히 쏘련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되돌아온 독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이 쏘련으로 넘어갈때 본지에 잠복했던 독립군들을 찾아 다시금 무장대오를 건립했다.
한편 또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였던 조성환, 라중소, 계화도 1924년 3월 동빈현에서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했다. 이 독립운동단체 역시 공화주의계렬인바 북로군정서의 후신이기도했다. 그리고 이들역시 대한독립군단과 마찬가지로 거의가 대종교도(大倧敎徒)들이였다.
타격과 좌절속에서 다시금 떨쳐나서는 우리 아니냐, 피의 교훈은 우리들을 각성시켜 총명해지게 하였다. 이제 다시 남에게 속히여 자신을 훼멸하지는 않을것이다. 독립전쟁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헌데 쇠잔한 병력으로 강적을 대하는 것은 대부등에 곁낫질이요 닭알로 백운대를 치듯 어리석은 짓이니 지금에는 오로지 병사들을 쉬우면서 실력을 양성해야 할것이다. 김좌진은 이러면서 정처불온의 표우를 종결짓고 한곳에 정착하여 둔전양병을 하자는 방략을 구상하게 됐고 이를 동빈현에 알리기까지 했다.
좋은일이였다!
그것은 목전 공동의 념원이 아닌가. 1925년에 접어들면서 목릉현에서 두 군단의 대표들을 주축으로 하여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 합의를 보고 통합과 항일운동의 방책을 론의하였다. 그 결과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 남극성, 최호, 박두희, 류현. 대한군정서의 김혁, 조성환, 정신 그밖에 여러단체(공산계의 <<적기단>>은 제외)의 대표 및 일반민선 각지역대표인 윤우현, 박세황, 김규현, 최우, 리주현, 김태선, 박정덕, 김유성, 리 근, 리동천, 우기형, 류광진, 최수완, 강수군, 황공삼, 리영백, 김승현, 정석준 등이 녕안현의 녕안성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1925년 3월 15일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했고 22일에 결의안을 채택하고 그 진로를 밝히는 선포문과 임원을 발표했다.
<<우리는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아랫단체의 의사에 따라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으로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되였음을 자에 선포한다. 희(噫)라 과거를 생각컨대 사회상태가 분렬하고 민족의 심리가 환산하여 우리의 사업은 날로 늘어나 위미(萎靡)하는 일방이 되었다. 이를 각오한 우리는 만반의 동작에 합일하여 국가의 완전한 건설과 민중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강권폭력의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다시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와 동일한 지위에 있는 세계민중과 협동의 동작을 취하지 아니할수 없다. 이 신사명을 받은 신민부의 운명개척은 오직 우리 민중의 희생적정신에 놓였다. 來하라. 단결하고 일어나 분투하라.>>
이상은 선포문이였다. 준국가식의 신민부를 꾸려나가기 위해 채택한 결의안은 모두 12가지 조목이 되었는바 목적과 방향이 아래와같이 뚜렸했다.
1. 機關名稱: 기관명칭은 <<신민부>>라 한다.
2. 制度: 제도는 위원제로서 중앙, 지방, 구로 정한다.
3. 事業方針.民事: 필요에 의하여 기성의 자치기관은 서로 협조하여 진행시킬것. 일체의 페속을 교정하고 각 지방에 경찰기관을 설치할것. 외교 대외관계는 가능한한 신중 원만히 해결할것.
4. 軍事: 의무제를 실시할것. 둔전제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할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것. 군사서적을 편찬할것.
5. 財政: 재정은 의무금 및 모연금으로 충용할것. 의무금은 토지에 대하여 수전은 소쌍 2원, 대쌍은 3원으로 하고 밭은 소쌍 1원, 대쌍은 2원 5각으로 하며 상가(商家)에 대해서는 소유재산의 1/20을 징수하나 단 대양(大洋)으로 함. 기관하에 조직된 지방은 일체의 모연금을 페지할것.
6. 實業: 토지의 매매와 조세는 기관의 지도하에서 행하기로 할것. 각인은 로동력작을 권할것. 공동체를 실시하며 공동농지를 경영할것. 식산조합을 둘것. 부업을 장려할것. 필요한 지방에는 소비조합을 설치할것.
7. 敎育: 소학교 졸업년한은 6년,중학교졸업년한은 4년으로 할것. 단 100호이상의 촌에는 1개의 소학교를 둘것. 필요에 의하여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립할것.
8. 憲章: 헌장은 기초위원회에 위임하여 창립총회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완성하고 이를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할것.
9. 經常費: 금년도의 경상비(음력 3월부터 10월까지)는 현대양(現大洋) 3천원으로 결정함.
10. 年號: 년호는 민국년호를 사용한다.
11. 其他事項: 본기관의 총회는 매년 3월 15일까지로 정한다.
12. 人選: 중앙집행위원회, 참의원, 검사원.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신민부의 임원은 아래와 같다.
中央執行委員會 委員長: 김 혁
委員: 조성환, 김좌진, 박성전, 최 호, 정 신, 리영백, 최정호, 허 빈, 류현.
保安隊總指揮: 박두희
參議院 院長: 리범윤
參議院: 홍중림, 김진연, 김송암, 량재현, 최문일, 황공삼, 윤 각, 리장녕, 안호연, 안룡수, 허 무, 김규현, 남 극, 차동찬, 리백향, 송상현.
檢査員長: 현천묵
檢査員: 강규상, 로호산, 황국민, 강인수, 손일민, 김기남, 라중소, 지장회, 강명현, 양윤삼.
신민부가 혁명원로들로 참의원을 구성하는 한편 검사원도 둔것은 삼권분립의 민주체재를 확립하기위함이였다.
이로써 만주에서는 50여개의 란립되였던 단체들이 봉천성의 집안, 관전현을 중심으로 압록강일대에서 세력을 가진 참의부(參議府)와 봉천, 길림의 두성에 걸치는 할빈이남 흥경, 통화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정의부(正義附), 그리고 녕안(녕고탑)을 중심으로 한 북만의 중동선일대에서 북간도 일부에 걸치는 신민부(新民府)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 3부는 각기 만주땅에서 살고있는 조선동포들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정기관과 그 소속 독립군을 통솔하고 무장항일을 전개하는 군정기관의 결합체로서 최고목표는 <<독립전쟁론>>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였다.
신민부는 왜 널다란 북만주에서도 이곳 녕안일대를 중심으로 삼았는가? 그것은 우선 여기는 북만교통의 중추일뿐만아니라 땅이 많고 비옥하며 녕안, 해림, 동경성에는 동포들이 많이 모여살기 때문이다.
북만의 조선동포들은 거의가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해왔다. 돌이켜보면 시간적으로는 료녕이나 길림에 비해 이주해온것이 늦지만 17세기중엽부터는 이곳에도 조선인들이 정착했다.
<<청조통지(淸朝通誌)>>에 기재되여있는, 만주씨족에 가임한 조선사람의 성씨만도 42가지였는데 그 대부분이 천총(天聰)년간(1627~1635)에 들어온 이들이였다.
1757년에 이르러 녕안현만도 동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조선족주민이 대략 4,000명좌우된다고 청조의 <<통문관지(通文館誌>>에 밝혀져있다.
특히 1860년부터 70년까지 10년간에 조선땅의 북부에서 력사상 보기드믄 재해가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봉건관료들의 폭정과 가혹한 착취를 더는 받아낼 재간이 없어서 분분히 월강하여 살길을 찾아 북만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녕고탑부도통(寧古塔副都統)은 자기 관할내에 있는 각지 카륜(佧倫)으로부터 조선의 남부자녀들은 륙속하여 왕래가 부절한바 인가만 만나면 굳이 들어와서 구걸질이요 쫓아내도 막무가내니 언어불통인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하는 보고를 받고는 걸식하는 조선사람 454명을 붙잡아 조선의 리조정부에 넘기기까지 했으나 헛짓이였다.
사실상 1626년의 <<강도회맹(江都會盟)>>이래 조선인이민들은 큰 장애없이 료녕, 길림과 혹은 연해주를 거쳐 북만으로 깊숙이 들어와 자리잡았던거다.
1894년부터 중동로연선의 횡도하자(橫道河子), 고령자(高嶺子)일대에 조선인들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1898년에는 연해주에서 우쑤리강을 건너온이들이 목릉(穆棱)에다 신한촌(新韓村)을 세웠다. 그리고 1900년 중동철도를 부설할 때 조선북부에서 모집되여 들어온 인부들은 거의가 1903년에 이 철도가 다 부설되자 돌아가지 않고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목릉, 수분하 등지에 자리잡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녕고탑에는 적잖은 독립군들이 정착하고 농사를 지었다. 로씨야령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사변>>때 무장해제를 당하고 분산된 후 만주로 탈출해온 사람도 있고 경신참변때 피신해 온 사람도 있었다.
1923년의 할빈, 일면파, 횡도하자, 해림, 녕고탑, 목릉, 수분하, 삼차구, 등 아홉곳의 조사정황만 보아도 이민이 2,963호고 인원수는 1만 1,201명이나 되었다. 그중에도 해림에 제일 많은데 총 1,034호에 2,887명이고 그다음은 녕고탑이였다. 686호에 2,246명.
이주민을 대체적으로 세 부류로 나눌수 있었다.
첫째부류: 모진 기아와 압박을 받아낼 수 없어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류랑민>>들이다. 이 부류가 제일많은데 전체 이민수의 90%. 계몽하고 단결시켜 장차 의거해야 할 력량이다.
둘째부류: <<한일합방>>을 반대한 애국자와 일제의 피비린 탄압으로 하여 만주로 망명해온 우국우민의 지사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식인으로서 선지선각자들이다. 이네들은 독립운동을 이끌고 나갈만한 중견들이니 손잡아야 한다.
셋째부류: 나라야 어떻게 됐던 무관심하면서 큰돈이나 벌어보자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교적 구속받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돈을 위해서는 아무런 막된짓도 서슴없이 할 인간들이다. 잘 교육하고 감독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북만에도 동포들이 많이 집거해있는 곳이면 일본령사관의 지시에 좇아 조직된 조선인회(朝鮮人會)가 있어서 독립군을 부식, 와해하며 조선인들의 일체의 사회활동과 문화교육사업, 지어는 복리사업까지 통제하고있었다.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았다.
단체이름 |
소재지 |
성립년월 |
참가호수 |
할빈조선인회 |
할빈 |
1910년 |
132호 |
일면파조선인회 |
동빈현,일면파 |
1920년 4월 |
47호 |
석두하자조선인회 |
동빈현,석두하자 |
1920년 |
25호 |
해림조선인회 |
해림 |
1920년 |
528호 |
횡도하자조선인회 |
녕안현,횡도하자 |
1919년 |
40호 |
소수분하조선인회 |
동녕현,소수분하 |
? |
168호 |
동녕조선인회 |
동녕현 |
1920년 |
74호 |
녕고탑조선인회 |
녕안현 녕고탑 |
1918년 |
369호 |
그 외에 보민회, 권농회, 신천교, 청림교, 제우교 등 친일조직들이 있지만 여기 북만주에는 아직 그런 조직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
이상과 같이 당지실태를 조사장악하고 넓은 간도지방까지 념두에 두면서 성립을 선고한 신민부는 창립한 그날부터 신중하면서도 대담하고 활기롭게 자기가 해야 할 사업들을 밀고나갔다. 즉 지방조직을 확장하는 한편 항일전에 대비하여 독립군의 편성과 훈련에 주력했다.
김좌진은 우선 모젤, 부로우닝권총 또는 소총으로 무장한 약 500여명으로 따로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하였는데 그 편제와 부서는 아래와 같았다.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 김좌진
총사령부관: 주 혁
보안대 총지휘: 박두희
보안제1대대장: 문우천
보안제2대대장: 백종렬
보안제3대대장: 오상제
보안제4대대장: 주혁(겸임)
보안제5대대장: 장종철
별동대장: 문우천(겸임)
따라서 총회에서는 경제발전계획을 효과적으로 해나가기 위하여 따로 실업부(實業部)를 설치하고 그 위원장에 리일세를 임명했다.
그런데 제일의 문제는 신민부에서 토지를 장만하는것이였다. 이로하여 신민부가 설립되기전부터 의논이 있었다.
<<둔병전을 하자면 토지가 있어야 하는데 돈도 없지 땅을 어떻게 구한단말인가?>>
김좌진이 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북만에서는 조선동포들은 물론 중국백성들까지 모르는이라고는 별반 없었다. 그같이 청산리전루에서 혁혁한 위훈을 떨치였던 이 독립군장령은 아직 그 위망이 퍼렇게 살아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이같이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지방당국과 교섭하여 되도록 관계를 좋게하려고 했다. 외국인으로서 이국땅에 발을 붙이자고 보니 그렇게 해야지 달리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절대 결탁이 아니였다.
과연 중동로일대의 지방당국은 그의 위망을 알고있는지라 독립군에 대해 까다롭게굴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 지방에 정착하는 문제와 토지를 구하는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리였다.
그러나 애로는 종종 있었다.
북만의 지주는 대체로 령황지주(領荒地主), 점황지주(占荒地主), 권세렴토지주(權勢廉土地主) 등 세가지 형이다. 먼저 임의로 한뙈기의 황무지를 헐값으로 사서 <<령황토>>를 비준받고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많은 땅을 차지하여 토지대장까지 가진 지주를 령황지주라 하고 관리의 가족이거나 그의 친척들로 땅을 많이 가진 지주를 점황지주라 했으며 권세로써 령세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였거나 관부에서 땅을 재일때 뢰물을 먹이고는 면적을 적게 매기고는 너른땅을 가진자를 권세렴토지주라 했다.
녕안, 해림을 중심으로해서 중동로 동서일대의 토지들이 이상 세부류 지주들이 차지한것이 많았지만 아직 임자없는 땅도 적지 않았다. 물론 임자없는 땅은 미개간지였다.
어떤 중국 지주들은 독립군이 땅을 장만하려는 눈치를 채고는 림시토지대장을 만들어 팔아먹으려들었다. 김좌진은 중국의 지주들이 그들과 결탁하는 관부의 속셈을 알아보고 그같이 께림직한 땅은 돈이 있어도 사지 않으리라 맘먹었다.
알아보니 해림웃쪽 산시(山市)에 아직 미개간지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친히 나서서 그곳을 고령자와 같이 독립군의 주요한 둔병지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앞의 2헥타르되는 밭은 장태콩을 심어먹기 위해서 성이 마씨(馬氏)인 지주한테서 사고는 임자없는 습지판에 도랑을 빼고 98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황지촌에 있는 얼마가량의 땅도 대장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땅도 먼저 몇해간 부쳐먹다가 땅세를 적당히 물기로 지방관부와 협상했고 녕안의 땅 얼마가량도 그런 방법으로 차지했다. 신민부는 다방면의 노력 끝에 사전자(沙田子)에도 수한전합해 5헥타르있게 됐고 고령자, 석두하자, 백모자, 해림 등 여러곳들에 논과 처수답들이 얼마간식 다 있게 되었다.
한편 신민부는 무장인원을 내놓고는 이젠 나이많고 잔약하거나 남정북전에 고생많이했고 몹시 피로해진 900여명 독립군들을 <<재향군인>>이라 이름을 짓고 안착해서 농사짓게 했다.
공농제(公農制)의 실시를 위해 이런 <<재향군인>>들은 붙임땅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원도 많고 적게 나뉘여졌는데 그네들은 자기가 간 곳에서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렇지만 조직성과 규률성만은 의연했는바 유사시에 손에 무장만 다시잡고 나서면 여전히 당당한 전투원이였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자기 관할내의 18세이상 40살이하의 청년과 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계획있게 시키여 장차 맞이할 항전을 준비하고 상비군을 보충하려하였다.
한편 신민부는 정예군인양성을 목적해서 목릉현경내에 있는 소수분(小綬芬ㅡ 지금의 綏陽) 팔리평(八里坪)골안에다 사관학교를 세웠다.
본래 맨먼저 자리잡았던 곳은 중동선동쪽 끝머리에 거의이르는, 중쏘변경이 가까운 토성자마을이였다. 그 마을은 동포 90여호가 한데모여사는 자그마한 마을로서 그네들은 다가 연해주를 거쳐 들어온 난민들이였다. 그래서였는지 항일의식이 높았고 서로지간에 동포애도 깊었다.
이 마을에다 통나무를 찍어 벽을 만든, 가운데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ㅁ자모양의 교사를 짓고 얼마가량 수업을 하다가 그곳은 군사훈련에 적합하지 않길래 마을의 소학교로 쓰게하고 사관학교를 팔리평에 옮겨 자리잡았다.
팔리평은 토성자에서 곧추 북으로 25리 들어와 있는데 높다란 산들이 빙 둘러있는 졻고도 길다란 분지로서 거기에는 무려 60여채의 동포민가들이 산기슭을 따라 띠염띠염 산재해 부락을 이루어 살아가고있었다.
여기에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얕다란 내물이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있는데 독립군들은 그것을 쇼류분(小流分)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이 냇물을 동쪽기슭에 두고 흡사 산같아 보이는 둔덕이 하나 있는데 그 둔덕동켠 후미진곳에 있는, 180여평방쯤 되는 ㄱ자형의 토벽집이 바로 사관학교였다.
그런데 둔덕우에는 묘하게도 흡사 비행장같은 널다란 공지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공지의 서북쪽 끝머리에 자그마한 삼각산이 하나 솟아있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고려 옛성이 흔적을 남기고있다. 한즉 사관학교는 고려옛성의 동쪽에 위치한 셈이다. 하여 이름을 성동사관학교라 지어부르게 된 것이다.
성동사관학교는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상세 등이 취임하여 련 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해 그후 500여명의 사관생을 길러냈다.
신민부는 발족하면서부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가계각층이 모여서 다만 항일과 자주와 독립이란 대전제하에 굳게뭉쳐 일제의 타도에만 정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하였고 또한 지성인이 갈구하던 시대경향에 가장 적합하게 <<시대사조에 병진한다>>는 선언을 한바가 있었기에 력사적인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믿음으로부터 내외인사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았다.
그리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데 신민부라는 이 어마어마한 기관은 명성과는 너무나다르게 겉으로보기에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간소하고 검박했다.
초창기에는 신민부의 중앙기관이 주하현(珠河縣)의 동포부락인 소량자(小亮子)에 설치되였고 중앙집행위원장 김혁과 민사부장 최호, 경리부위원장 유정근 등이 소속직원 약간명을 데리고 각기관련락과 기타사무를 처리했다.
그럴수밖에. 일제는 신민부의 일거일동을 주목했고 간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노리였던거다. 지어 중요간부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까지 내걸고 밀정들을 기관내부로 잠입, 암해음모를 획책하고있었기 때문에 령수급인물들은 주위의 경계를 특별히 심하게해야했었다.
김좌진은 고정지점이 거의없다싶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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