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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변은 언제나 사람들을 커다란 충격속에 몰아넣고 거기서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심심히 맛보게 만드는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손가장사람들은 지금 기쁨이라 할지 흥분이라할지 그러한 걷잡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는데 김려홍이 문득 집으로 돌아온데서 그네들의 그러한 감정을 한결 더 진하게 만들어주었다. 온갖 풍우란설이 시골에 파다히 퍼져서 사람들은 믿음직한 새소식을 얻으려 했다. 그리하여 려홍이가 돌아온 그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마실을 와서 여지껏 고적했던 조촐한 방안은 마치 동네사랑방같이 흥성흥성
해졌다.
헌병대감옥으로 가면 칠성판을 진거나 다름이 없다고 했는데 려홍이가 죽지 않고 살아온게 기상천외의 일처럼 생각되였던 모양이다. 하길래 다른때는 전혀 마을돌이를 하지 않던 토성밑 움마집 계월이네 알머니까지 지팽이를 짚고 찾아와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말이 맞구나! 김령감이 하루도 잊지 않고 아들을 외운다더니 이렇게 이렇게 살아온게 아니겠어유!... 실루 이게 다 하느님의 덕분이라잉.>>
하면서 토스레옷소매가 젖도록 눈물을 닦았다.
그새 2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마을에는 대체상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오직 형편없이 낡고 틱틱한 자기의 례배당과 함께 늙어가던 최목사가 병으로 앓다가 죽어서 하느님을 신봉하던 예수쟁이들이 기독교의 법대로 장례를 굉장히 지냇다는 것과 려홍이를 감옥에 처넣었던 경찰서 서장 리경광놈이 해방이 되자 독수리한테 쫓기운 족제비모양으로 어느새 몸을 빼여 달아나버린 그것뿐이였다. 와보니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다. 봄에 논에 씨를 넣자마자 드러누운것이 오늘 이때까지 신고하고있는데 남천오네가 여지껏 병구완을 하면서 살림뒷바라지를 해주었다니 실로 눈물겹도록 고마운일이였다.
(혜옥이가 시집가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어서 안해로 맞아들이여 아버지를 돌봐야지.)
집에 온지 이레만에 논판을 돌아보려고 마을밖을 나가며 려홍이는 이렇게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혜식은 사람처럼 씩 웃었다.
혜옥이는 이전부터 간이라도 서로 빼먹일 지경으로 사이가 자별한 막역지우인 남천오의 누이동생이다. 감옥문을 나오면서 털보 왕복룡이한테 놀림받기도했지만 사실 그를 오매불망 잊지 않았고 마을에다 발을 들여놓는 그 시각까지도 걱정이 많았던 려홍이였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반갑게도 스물두살 여자나이ㅡ 열일곱살이면 꽃시절이라 머리얹고 시집가는 시골에서는 희괴하다 할만큼 번다하게 달려드는 성화같은 혼사말을 죄다 막아버리고 혜옥이는 고스란히 기다려주었다,...
바람이 건들 불어 한결 개운한 감을 주었다. 소작농들이 부치고있는 손지주네 천여상이 넘는 논밭은 수목임 무성한 저기 서남쪽 산기슭으로부터 시작되여 둔덕진 마을앞을 활짝 펼쳐져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좋다
금수강산에 풍년이 왔네...
누국ㄴ가 논뚝에서 삽을 메고 <<풍년가>>를 불렀다. 목청을 돋구어 길게 뽑아넘기는 그 건드러진 노래소리에 취하고있는 듯한 전야는 마치 너그럽고도 자애로운 어머니가 한없이 풍만한 자기의 젖가슴으로 곡식들을 여름내 키워 무르익게 만드는 그 애틋한 심정으로써 바로 여기 이 고장에서 태여나 잔뼈가 굵은 젊은이를 한껏 반가이 맞아주는상싶었다. 려홍이는 그러한 넌야를 두팔을 벌려 포옹해주고싶었다. 아, 얼마나 숙친한 땅인가! 이고장을 빈궁이 없는 무릉도원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좋으랴!
놀랜 고기들이 물속에서 장포며 갈대며 물수세미들을 건드려 놓으면서 달아나고있는 좁다란 도랑 옆길을 걸으면서 려홍이는 소시적의 감미로운 추억에 잠겼다...
려홍이가 열세살나던 해였다. 햇볕 따사로운 그해 봄 어느날, 이 마을로 한집이 새로 이사를 왔다. 려홍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나이 많은 두 부부가 자식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네들이 갖고 온 이사집이라고는 모두해서 남성이 지게에 진것과 부인이 머리에다 인 자그마한 보따리뿐이였다. 듣자니 조선에서 건너와 어디라없이 떠돌다가 북만에는 넓은 땅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들어왔다는 것이였다. 려홍이의 아버지 김덕구는 본래 갖은 고생을 겪어론 사람이라 시국풍조에 부대껴 온갖 풍상고초를 겪은 그네들의 눈물젖은 신세담을 듣고나자 측은 한 감을 이길수 없어 다른데로 가지를 말고 한께 살자고 극구 말려나섰던것이다. 그래서 남천오네가 손가장에 와서는 려홍이네와 맨먼저 알게 된게고 더구나 그 한해를 한집에서 살았기에 두집은 사이가 내내 끔찍한 처지로 되었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려홍이는 처음 만나서 서먹해하는 남자애에게 물었다. 덩치가 려홍이보다 더크고 나이도 한 살 우였던 천오는 제이름을 대고나서 자기보다 네 살아래이며 예쁘고 귀엽게 생긴 게집애의 이름은 혜옥이라 알려주었다. 그때 성품이 어리무던하고 유화한 그의 어머니는 려홍이를 이름부르려는 혜옥이를 버르장머리없는 계집애라고 되게 꾸짖고나서 오빠라 부르라 했었다. 그래서 향제라곤 없는 려홍에게는 난데없는 누이가 갑자기 생기게 되었는데 아직은 철부지였던 그가 그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이듬해봄이 돌아왔다. (그때는 천오네가 새집을 짓고 나갓고 온 동네가 봄일에 손이 모자라 쩔쩔매고있는 때였다.)
려홍이가 홀로 집을 지키고있는데 헤옥이가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남령감이 담배를 썰군 하던 빼또칼과 자그마한 싸리광주리가 쥐여져있었다.
<<오빠 나물캐러 안갈래?>>
<<난 싫어.>>
고무총만들기에 여념없던 려홍이는 퉁명스레 대꾸하고나서 물러가라는 손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혜옥이는 뽀로통해서 눈을 할겼다.
<<그까짓걸 해선 국끓여먹나뭐?... 나하고 안가면 난 이담부터 캐온걸 안줄테야!>>
(혜옥이가 나물캐주지 않으면 뭘로 국해먹나?)
려홍이는 할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첫날은 남대문박을 나갔고 이틑날에는 서대문밖을 나갔다. 천진한 때여서 즐거운 동심이 나래펼친 그들은 손을 잡고 가면서 종달새마냥 노래불렀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명랑한 노래소리는 꽃피는 앵두나무가지들을 가법게 흔들어주고있는 정답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타고 내를 건너 아지랑이 피는 들판으로 날려갔다.
<<얘, 너 고향 어디메니?>>
노래를 하다가 려홍이가 불쑥 물었다.
<<꽃피는 산골이지 뭐!>>
<<체, 곷피는 산골이면 다 네고장이겠구나?>>
<<그럼 어디야, 오빤 아나?>>
혜옥이가 당돌해서 되따져물었다.
<<빨리 대답해, 려홍오빤 어디메서 났는가말이야?>>
<<내말이지, 난 여기서 났어.>>
<<호호, 여기서났다구?!... 그럼조건에도 못가봤겠네. 그래가지구도 날보구 고향물어? 호호호... >>
혜옥이는 어정쩡해있는 사내애를 보더니 눈을 새물거리면서 깔깔 웃다가 나중에는 손벽까지 쳐댔다.
<<요 배라먹을 계집애, 왜 요 모양이냐?... >>
려홍이는 주먹으로 때렸다. 그래서 혜옥이는 엉엉 울었다. 그랬지만 이틑날에는 또 함께 내가로 버들개지 뜯으러 나갔다.... 그때 주먹매맞아 울던 일이며 개눈깔사탕 나눠먹고 좋아서 앙감질하던 일이며 여자애라 깔보고 시부렁거리는 부랑진 동네애를 려홍이가 고무총으로 쫓던 일이며를 혜옥이는 지금도 기억하고있으리라...
려홍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나서 제멋에 겨워 빙그레 웃었다.
(소문은 내지 않았어두 실은 부모들끼리 혼사가 다 된게구... 헌데 정식으루 약혼했단 말도 안했다가 어떻게 갑자기 잔치를 하나?)
려홍이는 괜히 활랑거리는 가슴을 달래고나서 이번에는 자신을 비난하기도했다.
(헝, 사위절도 하지 않은 녀석이 비위는 좋다. 그리고 혜옥의 맘은 어떤지 딱히 알아보지두않고서.... 여자속은 알구두 모를 일이란데... )
려홍이는 공연히 끄집어낸 착잡한 생각에 모대기며 걷다나니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는것도 몰랐다.
요즘 혜옥이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어쩐지 동네사람들 앞에서 머리조차 들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병석에 누워있는 김로인의 병구완만은 잊지 않고있었다. 오늘도 혜옥이는 려홍이네 집에 갔었는데 병자는 달인 약을 마시고 방금 잠에 든것 같아보였다. 그래서 려홍이를 찾아 도로나왔는데 근처에는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래서 허전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다가 남대문쪽으로 얼핏 시선을 주었더니 지금 막 대문을 벗어지는 그를 발견하고 얼른 뒤를 따라선것이였다.
(어딜 저렇게 혼자 가는걸가?)
종종걸음을 쳐서 다행히 거의 따라잡기는 하였으나 자연히 발걸음이 주춤거려짐을 어쩌는수 없었다. 실상 려홍이를 오빠라 불러온지도 아주 오래다. 그러나 인제는 오빠라 부를 수도 없는 처지라 생각되였다. 그렇다고 외람되게 이름을 부를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속만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혜옥이는 쿵쿵 방아찧는 가슴을 눅잦히며 려홍이의 신변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인기척을 내느라고 부러 발자국소리를 내고 기침도 짖엇건만 알고도 모르는척하는지 려홍이는 고개를 푹 떨군채 무관하고 흔들흔들 걷기만했다.
(갑작스레 귀머거리가 됐나봐? 참 속상해죽겟네!... )
혜옥이는 고까운 생각이 치밀어 눈을 새초롬히 떴다. 그런데 려홍이는 몸가까이에서 앵앵거리는 벌떼를 쫓기나하듯이 팔을 휘저으며 뚜벅뚜벅 걷기만하였다.
려홍이는 공연히 마음만 번거롭게 하는 불측한 생각들을 진작 쫓아버리고 지금 다시 달콤한 꿈에 푹 잠겨있었다.
(이제 내가 장가들면 어떻게 한다?... 먼저 새집부터 지어야지. 지금 집이 너무도 형편없어. 아버진 허물어져가는 대장간도 제꺽 허물어치울 맥조차 없었던 모양이지... 하긴 할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보냈던 곳이니까 그냥 놔두고 보자고 그럴수도있어. 그까짓거 놔두고봐선 뭘 해, 쥐만 끓고 찌그러져가는걸. 새집을 버젓하게 짓고 살테야....
이제 새집에 즈는 날로 아들을 철석 낳고 그담은 딸도 낳고... 그럼 난 애들의 아버지가 되고 혜옥이는 어머니가 될테지. 제 어머니를 닮아서 얌전하고 어리무던한 어머니로 될거야. ... 헌데 오랍되는 천오는 장가간지 3년도 넘는데 왜 아직두 자식하나없나? 오칠성령감은 제 딸을 새끼도 못낳는 둘계집으로 키워서 준 모양이지? ...)
려홍이는 잔치날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 차려입고 머리에 꽃너울 곱게 쓴 달같은 혜옥이의 수태머금은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면서 벌쭉 웃었다.
내가에 이르렀다. 깨끗한 자갈을 씻으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즐거운 희망에 부푼 종각과 속삭이듯 조잘대며 흘렀다. 려홍이는 징검돌을 엇디디며 급히 건너느라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첨벙 빠지고말았다.
<<호호호!... >>
갑자기 여자의 웃음소리가 터지는통에 려홍이는 돌우에 제꺽 뒤여올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모르는척하구 뒤도 안돌아보더니 잘코사니야! 호호호... >>
<<내가?... 하하하!... >>
돌밑에 숨었던 가재들이 사처로 꾸역꾸역 도망치고있었다. 혜옥이는 치맛자락을 가볍게 거머쥐고 징검돌들을 살짝살짝 골라디뎠다. 물우에 등을 내민 돌들은 그의 발밑에서 조금도 드놀지 않았다. 새하얀 옥양목저고리에 깜장통치마를 받쳐입은 늘씬한 몸매는 실로 향기그윽한 한송이의 함박꽃을 련상케 하였다.
내물을 건너오자 혜옥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려홍에게 잡혔던 손을 살그머니 뺐다. 새파란 물새 한쌍이 버들숲에서 나와 어디론가 푸드득 날아갔다.
<<어딜 가?>>
<<나말이야? 바람 좀 쏘일겸 논밭보러 가지.>>
려홍이는 이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루 살폈다. 아까 <<풍년가>>를 부르던 농군은 어디로 갔는지, 평화로운 내가에는 물새우는 소리만 들릴뿐이였다.
둘은 내를 따라 웃켠 보뚝쪽으로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자리잡고 가지런히 앉았다. 발끝아래에서 흐르고있는 옅은 내물을 건너 저켠에 마을이 보이고 햇볕 쬐는 뒷잔등은 지금 한창 보랏빛꽃이 피고있는 들싸리무더기가 가리워주고있었다. 그러니 사랑을 속삭일 안성맞춤한 이곳을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하고 찾아온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그들의 가슴을 세차게 들먹이게했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무릎을 가리운 치마우에 손을 얹고 앉아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채 코신끝만 만지작거리고있는 혜옥이의 거동을 오래도록 지켜보고있던 려홍이는 사내녀석이 말도 못하고 처녀곁에 붙어앉아있는게 멋없고 싱거운것인것 같아서 연신 코를 킁킁 거렸다.
(감옥가더니만 콧병났나부지?)
혜옥이는 조롱하듯 눈을 할깃하고는 고개를 다시돌려버렸다. 려홍이는 멋쩍게 씩 웃고나서 입을 열었다.
<<왜 날 찾아왔어?>>
<<이걸 줄려구!>>
혜옥이는 품속에서 희종이에 차곡차곡 싼것을 꺼냈다. 깜장천에 색실로 수놓아 만든 꽃쌈지였다.
<<야, 이거 쌈지로군, 허허!... >>
<<쉿, 떠들지 말어. ...도겁쟁이같은게!>>
혜옥이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고름끝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혜옥이, 고마워!>>
려홍이는 쌈지를 감추듯이 호주머니에 얼른 집어넣고 몸을 맡기듯 자기에게 살며시 기대는 혜옥이를 조용히 포옹했다. 그리고는 혜옥이의 새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이윽토록 내려다보다가 뜨거운 입술을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혜옥이, 날 몹시 기다렸지?>>
<<에그! 호호... 별걸 다 물어보네!>>
헤옥이는 꼬집듯 옆구리를 쥐여박고 몸을 뺐다.
<<허허, 날 기다리느라 시집도 안가구... 난 혜옥의 맘 다 알구있어, 그렇지?>>
혜옥이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머리를 떨구었다. 두귀뿌리가 앵두알처럼 빨갛게 상기되였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단둘이 이렇게 조용한데서 만나고보니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도 서로 리해하고 믿고있는 터였다. 설사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닥히 알수 없어도 이제 와서는 실로 서로가 잊을수도 떨어질수도 없는 그런 사이로 되고말았다. 하기에 혜옥이는 남모를 마음속절개를 고스란히 지켜왔고 려홍이 역시 얼굴에서 본래의 면목이 별반 남지 않도록 고생을 해오면서도 항시 잊은적이 없는 마음속의 혜옥이였다.
싷로 그들에게 있어서 흘러간 두해동안은 고통과 번민의 나날이였다. 새들의 지저귐도 술렁이는 바람소리도 그저 탄식같이만 들렸었다. 특히 혜옥이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였다. 그새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마음을 썩히는 것이 이미 생활상의 습성처럼 되어버리고 만 이 순결하고 정숙한 처녀는 그지없는 련민과 공상속에서 그리움을 참고 견디였던 지난날을 추억속에 깊이 묻어버리고 이젠 리별없는 영원한 사랑속에서 가정을 이루어 단란하고 행복하게만 살고싶었다.
그들은 냇물의 속삭임도 새들의 속삭임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꼭 붙어앉아 그립고도 애타던 이야기며 어떠하리라고 기약할수는 없으나 절절하고 소박한 념원대로 모든 것이 잘되여줬으면 하는 앞날에 대해서 꿈많은 청춘의 그 열망을 갖고 이야기했다.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그리고 재미나게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 재미는 방정맞게도 깨뜨러지고말았다. 바로 등뒤에서, 두사람을 숨겨놓고 안온함을 지켜주고있던 들싸리무더기에서 메추라기가 갑자기 아츠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날아낫던 것이다.
<<엄마!ㅡ>>
혜옥이가 가슴을 부등켜안고 비명을 질렀다. 려홍이도 심장이 당금 튀여나올듯이 마구 들뛰였다.
일어나보니 메추라기는 벌써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고 들싸리무지곁에 난 오솔길에 웬 사람이 서잇었다. 그도 코밑에서 방금 날아난 그 앙큼하고도 매련한 새 때문에 되게 놀랐는지, 아니면 들싸리나무밑에 웬 남녀가 앉아있는것을 보고 놀랐는지 걸음까지 멈추고 이쪽을 퀭하니 바라보고섰다. 손지주집마름 최봉학이였다.
<<저, 저 자넨 누구여? ... 넌 혜옥이구?!... >>
<<그간 안녕하셨어요?... 나 려홍이올시다.>>
<<아니, 덕구령감 아들이였구나! 그런걸 난 또 누구라구, 허허!... >>
최봉학은 그제야 려홍이를 알아본듯이 퍼그나 반가운양을 해가지고 한바탕 노적부렸다.
<<알았어, 알았어. 네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릴 나도 들었지... 참 반가운 일이야.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구 속담그른데있겠나. 착한 집안은 이렇게 자비하신 하느님이 보호해주신다니까! 허허... >>
그러나 그도 이쪽에서 정 시답지 않아하는 기미를 눈치챘던지 무밋무밋하다가 타이르듯 뒷말을 보탰다.
<<이제 다시 그런 욕볼일을 하지 않으리라 믿으면서도 생각하면 과연 기막힌 일이기두했지. 그사이 덕구령감이 고생인들 오죽했는줄 아는가? 나도 마음속으로 잊지는 않았지만 실로 곁에서 보기조차 딱하더군그려. 우리야 글쎄. 아무렴 제 사람들끼리니까말이네. 그러니려홍이, 이제부턴 아무쪼록 불쌍한 아버지를 잘 모시도록 하게!>>
<<네! 말씀만은 매우 감사하군요.>>
려홍이는 빈정대듯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온 낯을 덮고있는 수세미같이 희끗희끗한 수염을 얄밉게 건너다보았다.
최봉학은 자기가 조롱당하고있음을 눈치채자 돌쳐서서 황망히 가버리고말았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야?... >>
혜옥이가 려홍이를 나무랐다.
<<내가 어쨌길래? 허허... >>
령홍이는 이렇게 너털웃음을 치며 어물쩍하게 웃어버렸다.
<<이제 가서 뭐라구하겠어? 례절없는 사람이라구 동네사람들 앞에서 되게 욕하지 않나봐.>>
<<체, 별걱정다하네.>>
혜옥이는 호하고 한숨까지 쉬더니 관심어린 어조로 안타깝게 타일렀다.
<<제발 그러지 말어 자기를 좋게 대해주는 사람인데 그렇게 인정머리없이 대했다가 훗날 무슨 면목으로 다시보겠어?... 마음착한 사람은 언제나 좋게 대해줘야지 뭐.>>
<<대관절 누가 마음착한 사람이게 그 걱정이야? 그래 저 마름이?>>
려홍이는 이렇게 내뱉듯 말해버리고는 피식 웃었다.
최봉학은 워낙 당지주네가 여기에 있을적부터 마름질을 해먹은 사람인데 그가 손가네한테 땅을 앗기고 멀리로 가버리게되자 제꺽 손가네 마름으로 자리를 바꿔앉았다. 절에 가면 중인체, 촌에 가면 속인인체 능한 처세술로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그 한 재간으로 하여 마을에서는 지주다음으로 꼽는 부자로 되었다. 허지만 혜옥이는 예수를 믿는 그를 선량한 사람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려홍이는 해마다 소작료를 락출없이 받아내여 지주에게 신망을 얻었고 소작농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실권자인 그가 사실은 손창유지주를 닮은 내흉하고 다욕스런 사람으로 보아온 터였다.
마름은 내를 거슬러 곧추가다가 등성이아래로 내려갔다. 아마도 논밭을 돌아보려는 모양이였다.
혜옥이는 잠잠히 침묵에 잠겼다. 실은 마름에 대해서 그 무슨 남다른 호의를 품은것은 아닌데 자기의 몇마디 말로 려홍이의 기분을 헝클어놓은것 같은, 송구하고 미안쩍은 감이 솟아남을 자신으로서도 어쩌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마름에 대한 고까운 생각도 났다. 남의 행복한 이야기판을 깨뜨려7버리기 위해서 우정 메추라기를 놀래운듯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려홍이는 일매지게 펼쳐진 전야를 바라보느라니 비영비영한 몸으로 농사도 채 짓지 못하고 드러누운 아버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저렸다. 이른봄부터 늦가을까지, 온 손가장 소작농들이 새벽에 나오면 저녘별을 지고야 지치고 느른해진 몸으로 돌아가군하면서 근면한 하루를 보내군하던 여기 그 전야에서 아버지도 남처럼 등이 휘도록 일하며 살아왔고 이와함께 이 자식도 잔뼈가 굵기전부터 일솜씨를 배워왔던 것이다. 하건만 제 사지만 부지런히 놀리면 남부럽지 않게 살리라던 신념은 여지껏 허황한 꿈으로밖에 되지 않았다....
려홍이는 긴 한숨을 훅 내쉬며 손을 들어 가없는 전야를 가리켰다.
<<혜옥이, 저걸보라구. 밭들은 또 얼마나 좋은가말이여! 그래서 우리는 힘것 일해서 한번 잘살아보자구 맘먹었댓었지. 한데 우린 왜 늘 이렇게 구차하게만 살아야하는가말이여?>>
<<글세?....>>
혜옥이 역시 의혹에 찬 그런 표정이였다.
<<혜옥이, 우리 아버지나 임자 아버지가 그래 여기 이 땅에다 땀을 적게 흘렸단말인가? 어서말해보라구!>>
<<왜 적게 흘렸겠어. 온 손가장사람들이 여태껏 흘린 땀 한데모을수만 있다면 아마 이 개울물처럼 흐를거야 호!... >>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졌다.
혜옥이는 한결 무거워진 기분으로 한숨짖고나서 저녁지으러 먼저 들어가야겟노라며 살풋이 자리를 떴다. 려홍이는 그가 저녁해빛을 받으며 내를 건너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나서 논밭쪽으로 돌아섰다. 이전에 소를 놓아 먹이군하던 좀 둔독진 곳인, 노란 금불초꽃이 시들고있는 풀밭과 논두렁에 흰옷입은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있는게 얼핏 눈에 띄였다. 려홍이는 아마 금년 도지문제를 두고 의논하고잇는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그리러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곳은 한족소작농 정지항이네 논밭이였는데 씨름잘하기로 소문이 난 장골 심병호며 흰수건을 머리에 동인 천오의 아버지 남상백령감이며 등이 구부정한 오칠성령감 등이 모여있었다.
인간세상에 보기드믄 변란에도 드팀없는 계절이여서 벼들은 벌써 무르익기 시작하느라고 누른빛갈을 띠였다. 사람들은 려홍에게 알은체를 하더니 이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짐작했던 바와 같이 농사형편에 대한 이야기들이였는데 모두들 세상을 뒤집는 큰 사변이 일어난것도 깜깜 잊은상싶었다.
<< 그나 어디 그뿐이요. 올엔 묵은빛까지 싹 다 받아갈거라누만. 원이렇게 달구치구서야 숨이나 돌려야 살지.>>
남령감의 말에 뒤받혀 바지기랭이를 걷고 마주선 신병호가 동을 달았다.
<<갈수록 수미산이외다. 말대루 그렇게만 하면 래년에두 많은 집들에서 영락없이 보리고개를 넘기기가 힘들게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보리수제비로 끼니를 끼니를 겨우 이어가고있는 김덕보가 한숨 끝에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산중에 농사지어 고라니 좋은 일 한다더니만 우린 버덕에 농사지어놓고 누구 좋은 일 하누?... 일년내내 손톱발톱 잦혀지도록 일해두 그냥 이 꼴이니 못살겠수, 못살겠수... 어델 또 떠봐야지.>>
려홍이는 두해전 자기가 감옥가던 해에 이사왔던 그를 다시금 쳐다봤다. 마침 남상백령감이 혀를 끌끌 차고나서 나무라듯 말했다.
<<실없는 소린 작작하게. 자네가 이사를 적게해봤길래 또 그소린가? 어데루간다고 이눔의 세상이 다르겠나? 다 마찬가질세, 마찬가지야!>
려홍이는 장인으로 될 남령감의 듬직한 얼굴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동감이 갔다. 그런데 농사일에 들어서서는 한다하는 실농군인 오칠성령감만은 부귀빈천이 하늘이 내린것이니 하느님이나 믿고 살아야지 별수 없다는 듯이 뻑뻑 담배만 태우면서 함구무언이였다. 려홍이는 문득 어느핸가 추석에 (그해는 대풍이 들었다) 온 마을이 얼싸절싸 춤판을 벌리고 놀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저 칠성령감은 남색얼굴에 붉은 점, 흰점을 그리고 눈알을 금박으로 크게 만든 봉산탈을 쓰고 춤을 추었다. 곱사춤을 추느라고 일부러 허리를 굽히던 그때의 그 허리가 지금은 아예 굽어들고말았고 이마에 난 주름살은 감자밭고랑같이 깊어졌다.
여직 입을 꾹 다물고있던 정지항이 곧잘하는 조선말로 말밥에 끼여들었다.
<<화가 동해 못살겠어! 이눔의 노판에다 불을 콱 질러박고 도망을 가든지 아니면 타죽어버리든지 원!>>
뭉클뭉클 솟아나는 심화, 그 심화를 대관절 어데다 화풀이했으면 좋을지 모를 반발심을 묵색이느라 그의 얼굴은 지지벌개졌다.
이어 이야기는 금년추궁을 넘겨보내기 어렵겠다는데로 옮겨졌다. 햇보리가 이미 지나긴 했어도 어렵겠다는데로 옮겨졌다. 햇보리가 이미 지나긴했어도 벼를 타작할 때까지 어떻게 이어가겠느냐, 하는수없이 또 손지주나 최마름네 량식을 장리로 내다먹어야 하겠다는 것이였다. 장리벼ㅡ 그것은 실로 눈물흘리며 가져다먹고 뼈를 갈아 물어주어야하는 곡식이였다.
려홍이는 장리를 놓아 폭리를 본, 소작농들한테서 흉작이 들건 풍작이 들건 변리를 말끔히 받아내는 각다귀같은 손지주나 물귀신같은 마름이 련상되자 무망간에 주먹이 쥐여졌다. 생각같아서는 막 뚜드려엎고싶은 현실이였다. 하긴 현실은 언제나 사람들더러 리성적인 거동을 취하라고 깨우쳐주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못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고난으로 흘러보낸 구질구질한 온갖 력사를 원망할줄은 알아도 다시는 그러한 력사가 반복되지 않게끔 자신이 버둥이치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을 영원히 불행하고 저주로운 처지에다 집어던지고마는게 아닌가!....
려홍이는 머리를 건듯 쳐들었다. 노을비낀 하늘이 반겨주는상싶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런데 우리네 생활은 왜 노을처럼 아름다워질 수 없느냐?)
려홍이는 단김을 훅 들이쉬고나서 스스로 랭정해지려고 애썼다. 하나 마음은 무엇에 떠밀리운듯 두근두근 조급해지기만 하였다.
(우리는 그래 그냥 이 꼴로 살아가야한단말인가?)
남상백령감이 북덕무명옷자락을 들고 괴춤에서 쌈지를 꺼내더니 곰방대에다 담배를 그득 채웠다. 그리고나서 부시쌈지에서 부시깃과 돌, 부시를 꺼냈다.
불꽃이 몇 번 튕기더니 마침네 깃에 불이 달려 남령감은 그것을 대통에 가져갔다. 남령감은 담배연기를 후ㅡ 내뿜으면서 좁혀진 눈으로 사위될 사람을 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넨 뭘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우리네가 고생 덜하면서 살수있는 수라도 생각해냇나?... >>
<<예? 예, 저... 전 이런걸 생각했습니다.>>
려홍이는 다소 놀란 빛을 보였다가 이어 진정하면서 자기가 생각하던바를 피력했다.
<<우린 제 살 도리만 따지지 말구 힘을 뭉치기만하면 되것 같습니다. 힘을 뭉쳐가지고 마름하고 지주를 한번 되게 들었다놓잔말입니다. ... 왜들그러세요? 무서울게 없어요. 우리라고 뭐 종지굽이 가려워 그냥 썰썰 기기만하겠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못살겠습니다. 그자들은 우릴 힘없고 나약한줄로만알고... 그래서 업신여기고 제 욕심껏 우리네 피땀을 빨아먹고있단말입니다. 이젠 왜놈들도 망해버렸어요! 그런데두 그냥 고생을 하며 살란말입니까?... 이젠 더는 그렇게 살수 없어요, 그래서 온 마을이 힘을 합해서 왁 들고일어나자는겁니다! 소작료를 탕감해달라고말입니다.!>>
려홍의 이 말은 화살마냥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다. 하면서도 여직 그런것엔 엄두도못해본 그들이여서 해보자는것보다도 두려움이 앞섯다.
마을상공에서 비단같은 저녁연기가 조용히 비껴흘렀다. 려홍이는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처 생각에만 골몰했다.
(오늘저녁에도 마을청년들이 모여들것이다. 그네들에게 말해보자. 그리하여 우리끼리 먼저 조직을 해보자. 싸움을 해서 조금이라도 얻게되는게 있기만하면 어른들도 물론 지지해나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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