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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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 1장(3)
2014년 08월 22일 22시 29분  조회:2965  추천:1  작성자: 김송죽
 

3.

 

    손가장의 네면은 토성으로 둘러져있는데 그안에 또 옾은 성을 둘러치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여러채가 수백호의 게딱지같은 허술한 농가들을 내리누르면서 우뚝 솟아있었다. 손지주장원정면에는 정을 가득 박은 크고도 육중한 철갑대문이 있다.

   13년간을 불리워 온 이름, 세상에 염라국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삼척동자들마저 그 울안을 바로 염라국으로 알고 두려워 치떨며 저주하는 장원, 그 이름이 생겨서부터 거머칙칙한 대문은 구렁이아가리같이 흉측하고 악독스레 이고장백성들의 피땀을 빨아먹었다. 헌데 오늘은 웬일로 꾹 닫겨져 있었다. ...

    저,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사상에서 력사의 한페지를 기록해놓은 의화단운동! 열렬하고도 비장한 그 운동이 야수같은 8국렬강들의 피묻은 손에서 종말을 보았을 때, 흙으로 빚어만든 거상ㅡ 만청정부는 자기의 부패하고 무능함을 감추지 못한채 그 얼마나 비굴하고도 수치스럽게 침략자들앞에서 무릎꿇고말았던가!

   당시 만청정부는 자국인민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탄압하는데는 <<영웅>>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으나 외세의 압력에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며 제구실도 못하는 부패무능한이였던 것이다. 광서황제와 서태후가 선후하여 죽고 순친왕 재풍(載灃)의 아들 부의(溥儀)가 즉위하고 재풍이 감국섭정(監國攝政)이 되어 년호를 선통(宣統)으로 고치고 이미 기울어져가는 만청정부를 다스리노라 할 때 지금북만의 패주로된 손창유의 애비 손정화는 그에게 충성이 지극한 신하이며 관리로 있었던 것이다.

   1911년 손중산이 령도한 신해혁명은 268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해내려오던 만청정부를 뒤엎었다. 그때 손정화는 북경에서 도망쳐 동북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후부터 그는 도당을 무어 마적이 되어 20여년간을 더 살다가 바로 일본이 만주국을 세워 부의를 황제로 올려 앉힐림박에 죽고말았다. 부의는 강덕황제로 된후 저의 황족과 아이신줘러(愛新覺羅)의 영예를 위하여 헌신한 충신들을 은근히 물색하였던바 드디여 제 애비의 정통마적행위를 그대로 유전받은ㅡ 만청의 오랜 관리였던 손정화의 아들ㅡ 손창유를 찾아내여 그에게 보상으로 땅을 떼여주고 세력을 주는 것으로써 은총을 베풀었으니 그때로부터 손창유는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토호로 되엿던 것이다.

   환갑이 이미지난 그에게는 지금 나이 스믈다섯인 아들 손자량과 스믈두살먹은 딸 손옥란밖에 없었다...

   <<딩겅! 딩겅!>>

   비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말못할 애수에 잠긴 녀인이 타는 비파소리였다. 저의 아버지께 성화부려 방 한면 절반이 거의 차도록 자기 키보다 더 큰 경대와 시계를 구해다놓더니 오늘은 그 괘종소리가 듣기 역겹고 경대에 비치는 관년한 자기 얼굴이 보기싫어 등지고 앉아 손옥란은 지금 비파만타고있었다.

   그의 온갖 잡동사니같은 고급화장품들과 노리개들을 겨우나 다 닦고 절리해놓은 어린 몸종애는 그놈의 비파소리에 귀가 따가와 주인모르게 상을 찡그리며 걸상에 가 앉았다. 몸종애를 놓고 보면 참 괴상한일이기도했다. 요즘은 왜 저따위 슬픈곡만 타는걸가? 저러다가 마음괴로와지면 또 야료를 대며 못살게 굴것이 뻔했다. 몸조애는 두렵고 증오하는 한편 걱정도 되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죄이는 고달픈 한숨을 내쉬였다. 그랬더니 손옥란이 눈살을 세우고

   <<조년 계집애! 방정스레 한숨은 웬 한숨이냐?>>

   하고 소리를 꽥 질럿다. 흠칫놀랜 소녀는 주인의 모달진 성미를 알기에 몸을 와뜰 떨면서 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저... 아씨님, 아씨님께서 늘 즐겨띄우던 <지나의 밤>과 <만주의 아가씨>는 띄우지 않길래 어쩐지... >>

   지주딸은 웬 일인지 성내거나 욕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파줄을 고른다.그러다가 그는 비파를 내려놓고 맥없는지 이마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올렸다. 몸종애는 그의 모양을 다시금 자세히 훔쳐보았다. 녀색을 즐기는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은근한 애욕에 잠긴 녀인의 흡인력있는 매력을 가진 얄팍하고도 해사스러운 얼굴이여서 퍽 고운것 같으나 음달에서 핀 꽃처럼 생긋한 멋이 없이 광택이 조락한 얼굴에 서글픈 미소를 띠고있는 손옥란은 어쩐지 오뇌에 잠겨있는 요귀같아보였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꿀벌 하나가 날아들어와 앵앵거리며 꽃을 찾아앉더니 보람없다고 그러는지 인차 날아가버렸다. 그러니 방안은 더더욱 고적해지면서 침묵이 재빨리 몰려와 손옥란의 낯색은 더 어두워졌다. 생활에서 이미 환락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여 과묵에 빠지고있는 이 처녀는 벌써 10년째 홀아비딸로 살아왔기에 자기에 대한 굳은 신념은 속절없이 사라져버려 애오라지 늙은 아버지에 대한 서글픈 경모의 정을 품으면서 자기의 운명을 그에게 기탁하고있는 처지였다.

   쌀창고만 해도 스므나문개에 정미소, 제분소가 각각 따로있고 마방간, 대장간... 무엇무엇 수태있고 농군, 노비, 침모, 식모, 과방군 등만도 200여명이나 들어 사는 수십개의 방들중에서도 다만 산호기둥에 호박주축을 한 금전옥루가 아니랄 뿐, 훌륭한 기와집이요, 갑비싼 비취와 옥으로 장식한 옷궤와 이불장들이 있고 멋짓 화분통들로 장식된 그의 방은 어디에다 비할바없이 화려했다. 하지만 한때 그처럼 완악하고도 패기있어 보이던 아버지가 이젠 손에 풀기가 적어져감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있는 손옥란에겐 이같이 부유한 생활환경은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에 대한 환멸감과 한없는 고독감만 더해주는 상 싶었다.

   하여 그는 지금 울적한 자기 신세를 한탄하였다. (먹을것, 입을것 근심걱정없고 세상 어느 귀부인이나 공주도 부럽지 않다만 어쩐지 내 맘은 슬퍼만가누나.) 그는 환각에 잠겻을 때 처럼 멀거니 뜬눈으로 밖을 응시하며 계속한탄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어쩌면 독사보다도 더 독할가?... 한피줄타고난 형제건만 우리는 왜 이렇게도 성질이 다를가?... 제 각시 죽은걸 보고도 슬퍼할줄을 모르던 오래비가 지금은 또 무슨 수가 생겼는지?... 요즘은 거지반 고주망태가 되어 바깥출입이 잦더니 더욷더 나납고 독살스러워져 피비린내까지 묻혀가지고 들어오는것 같고나. 불길한 조짐에 이내가슴 떨린다.)

   종잡을수 없는 회의와 불안에 손옥란은 제 침상에 훌렁 드러누웠다. 사위는 무거운 정적속에 잠겼다....

   늙은 아버지가 거처하고있는 옆방에서 말소리가 웅웅 들려오더니 <<삐익!>> 못빼는 소리가 나고 이러저 널판자소리가 덜꺽 덜꺽 났다.

   어린 몸종애는 그 소리에 소스라치듯 일어나면서 낯을 병적으로 찡그렸다. 어쩌면 그가 수십번도 남아 목도한, 신세불우한 사람이 또 하나가 붙잡혀 바로 그 방에서 곤장을 맞는것만 같은 무서운 환각에 사로잡혀 갖잡힌 참새모양으로 도근도근 뛰는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짚으면서 숨을 죽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허나 그럴수록 신경은 더 예민해지기만 하였다.

   두 방사이에는 벽감을 헐어 간살문을 만들고 거기에다 유리꽃병과 월궁아가씨를 새긴 칠기를 올려놓아서 옆방에서 주고받는 말이 똑똑히 들려왔다.

   민감한 자기 몸종애의 거동을 보고 이상한 감각을 느끼게 된 손옥란은 옆방에서 자기모르게 무슨 밀담을 하는가고 귀를 솔깃하고 엿듣기 시작했다.

   <<자! 이 칼을 받거라. 인젠 너한테 넘긴다. 이건 우리 집의 세전지보네라.>>

   하는 아버지의 은근한 소리가 났다.

   <<네, 하하, 칼! 칼!>>

   몸종애는 몸을 오싹 떨었다. 그의 눈앞에 또다시 늙은 제 애비를 닮아서 상판이 험악하고 성미가 괴벽스런 손자량의 몰골이 떠올랏기 때문이다. 그는 분홍색 짧은 원피스를 입은 죄고마한 체구를 더 작게 옹송그렸다.

   <<이 칼은 너의 할아버지가 무관으로 지내다가 자의국(諮議局)으로 넘어가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을 때 공로가 출중하다 하여 총독공서로부터 상으로 받은건데 광서 37년란때 관청을 습격해 들어오는 반란군두목 둘을 죽이고 거기서 배겨낼수는 없어서 이 만주로 피신오면서 호신도로 사용해 온 것이였네라.>>

   늙은 손창유의 말이였다. 그건 그의 선대가 사망하기 세해전에 그한테 물려준건데 그는 그것을 그냥 지니고다니다가 남몰래 감춰뒀던 것이다.

    더수기가 섬찍해난 손옥란은 어렸을적 자기 키보다 더 크던 그 칼 생각이 피뜩났다. 그것은 자루에다 시퍼렇게 선 날을 악어가죽집에 넣는 환도였는데 은으로 멋지게 장식한, 새가만 자루에 살모사혀바닥같이 갈라진 누런 금줄이 돌려졌고 호보석까지 세 개나 박은 보도였다.

   <<아, 생각납니다, 생각나요! 어느핸가 아르금산에서 그 태평동에 가둬놨던 자가 벌금안하고 도망쳤다가 도루붙잡혔을 때 그놈이 되려 아버지한테 침뱉고 횡설수설 늘이며 발악질을 그냥 해서 아버지가 이칼로 그놈을 내리찍어 어깨부터 배꼽까지 적 갈라 날림시키던것이 엊그저께 일처럼 력연합니다. 그때 부친님께서는 용검술에 능란했고 호기한 담량을 가지신 두령님이라고들 하잖앗습니까.>>

   <<너도 그때 일이 기억난단말이지. 흠, 하긴 룡천검도 그렇게 쓸줄을 알아야 하네라.>>

   남한테 눌리우지 않으려는 우악스런 패기는 있으나 아들이 하나라고 함함하며 키운탓에 버릇이 방자하고 상관없는 일에도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들의 행위가 경망하고 잗달아서 늘 근심하던 아버지가 오늘 역시 비위상하는 무엇이 감득되였는지 이윽토록 잠잠하더니 엄숙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자량아, 넌 오늘 내가 왜서 이 보물을 새삼스레 꺼내여 너한테 주는지를 아느냐?>>

   <<체, 아버지도 그래 이 자량이가 그것 하나 해득 못할 위인으로 보입네까? 아버지, 이건 바로 할아버지의 유훈을 잊지 말고 가운을 맡으라 함입지요 뭐. 안그런가요?>>

   <<음 그렇지, 바로그거네라!>>

   흐믓해졌는지 아버지가 아까보다는 한결 화애롭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식이란 효도를 지키고 은혜에 보답해야 하느니라. 아는 자는 동요하지를 않을것이며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네라. 의기장부로 되려면 풍패가 헌양해야 하거니와 거동이 신중해야 하는거다. 너의 그 겁 없는 담량만은 좋네만 덤비는게 큰 흠이다. 그러니 잘 듣고 명심해라. 지금은 이 칼을 다시쓸 때가 되었다. 나는 벌써 칠십고령을 오르고있으니 기력이 다하여 마상에 올라도 제노릇 다할수 없는 것 같구나. 그러니 이 칼을 넘겨받는 네가 나를 도와서 명문거족으로 살아왔던 우리 손가네 대를 이어 명예를 부흥시키기에 힘다하거라. 부귀와 공명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혜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는걸 명심해두거라.>>

   <<네, 아버지의 충언을 꼭 명심하겠어요!>>

   오빠가 수긍하며 대답하는데 손옥란은 갓해입은 비단옷섭에다 땀난 손을 문질렀다. 그 어떤 상서롭지 못한 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격어내야만 될 난관과 불행이 죄없는 자기 몸에 떨어질것만 같아서 그는 못내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가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위험한 항로에 오르려함이 틀림없는 로망으로 생각히우면서 마음은 또 서글퍼났다. 아버지의 말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예로부터 례의를 아는 사람은 주인의 자리를 빼앗으려하지 않네라. 그런데 지금 보려무나. 광복인지 뭔지 일본이 망하니 가난뱅이들이 담이 커져 세상살림을 해볼 잡도리니 어디 될말이냐?>>

   <<헝, 그 가난뱅이들이 제멋대로 살게 해선 안되지요.>>

   <<그러게말이다. 하기에 난 여러 궁리하던 끝에 먼저 수향대(守鄕隊)란걸 조직하려고 맘먹었네라.>>

   <<아, 그랬어요. 그것 참 좋지요!>>

   오빠가 데식은 웃음을 웃고나서 다음 말을 이었다.

   <<헌데 저, 아버지, 그게 뜻대로 될가요?>>

   <<왜 안될턱있나, 내가 하는 노릇인데?>>

   <<그래두요. 아버지께서두 방금 말씀하셨지만 어쩐지 가난뱅이들이 점점 고개를 쳐들고있거던요. 려홍이녀석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습니다. 그녀석이 글쎄 어제 길가에서 보더니만 외면하면서 침뱉더란말입니다.>>

   아들의 이런 고발에 노증이 생겨 풀풀거리는 아버지의 성난 모양이 손옥란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석이 줒지 않고 살아와 너를 대하는 꼴이 그렇단말이지? 기억하느냐, 네 이마에 흉터를 만들어놓은게 그녀석이였네라.>>

   <<알고있습니다. 그녀석은 아무 때건 내가.... 그런데 말이지요. 그녀석 대체 무슨 재간있는지 감옥갔다오더니만 마을의 젊은놈들을 제곁에다 끓어붙인단말입니다.>>

   하는 오빠의 쥐여짜듯하는 불쾌한 소리에 뒤이어 아버지의 말소리가 났다.

   <<음, 그래서 넌 수향대를 내오기가 어렵겠다 그 말이냐?>>

   <<딴은 그런가봅네다. 우리가 수향대를 조직하련다면 그자식이 군소리없이 들것 같습니까? 침뱉고 돌아선 놈인데.>>

   <<거 과연 괘씸한 놈이로구나.>>

   하는 늙은 아버지가 슬그머니 악정이 치받쳐 뇌까리는 소리였다.

   <<그렇지요, 과연 괘씸합니다.>>

   아버지의 말을 받아외우는 오빠의 음성에는 어딘가 주눅이 든 기미가 엿보였다.

   <<아버지, 그, 그자식은 본래부터 감때사나운녀석이지요. 기가 죽기는커녕 거동이 더욱 당돌해졌습니다. 어릴적부터 거지자식이라고 하찮게봤더니만 지금은 제법으루 사람이 된갑죠.>>

   오빠의 이런 야속한 뇌임에 뒤이어서

   <<그녀석 그래 정말루 그 모양이 되어가지구 마을로 왔단말이냐?>>

   하는 소리와 함께 책망이 시작되였다.

   <<그러한즉 위풍있는 가문의 자식으로 태여난 너도 그앞에선 제 위신 차리기 어렵단말이지? 자식이 얼마나 데생겼으면 그 꼴이냐 응?>>

   오빠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잠잠하니 온 방안에 잡살뱅이 귀신들이 뒤쳐나오는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침묵이 생겨 손옥란은 겁이 더럭났다.

   <<미러한 자식! 이제보니 아직 제 뉘풍도 세우지 못했구나. 사람은 위풍이 있어야하네라. 아직도 늦지를 않으니 모든걸 배우고 익혀야 하네라. 아직도 늦지를 않으니 모든걸 배우고 익혀야 한다. 사람이 무지하면 짐승과 다를게 뭐냐? 그러니 잘 듣거라. 계으루고 용렬하면 언제나 남한테 뒤떨어지는 법이다.>>

   손옥란은 여직 아버지가 노하여 이토록 아들을 핀잔하는 것을 보지 못햇다.

   <<아버지지 말씀이 지당합니다. 자식된자 부모발씀 듣지 않고 배움에 힘쓰지 않으면 옳을바가 못되지요.>>

   이윽고 오빠의 윽벼르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아저지, 내가 그자식을 그저...>>

   <<어떻게 하겠다는말이냐?>>

   아버지는 이렇게 마뜩잖게 묻고나서 아들의 말을 기다릴새없이 얼른 뒤말을 이었다.

   <<우리는 먼저 그런녀석을 끌어당겨 써먹음이 나을것 같다. 그런다고 해될건 없으니까.>>

   <<아버지두 원... 무슨생각으루 그따위놈을 다 써머그렵니까?>>

   <<넌 통 모르는구나. 그녀석이 고분고분해지면 기타녀석들도 말을 잘 들을게 아니냐? 조선사람들만 손에 넣으면... 참, 그녀석 애비가 지금도 그냥 앓고있다잖느냐?>>

   <<그건 딱히 모르겠는데요. 마름하고 물어볼가요?>>

   <<나는 진작 알고있으니 물어볼것 없다. 아들이 잡혀가던 날 앞가슴채운 미열이 풀리기전에 우리 집 개한테 물렸던 자리가 도져 아직도 춰서지 못하고있는 모양이더라. 그러니까 우린 려홍이녀석을 수향대에 끌어넣어 급을 주어 서먹기로 하고 돈도 좀 후히 줘보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리네라. 그녀석이 제 애비의 고치기 위해서도 거절은 안할게다.>>

   말이 잠시 동강나더니 역시 아버지의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녀석이 우리가 던진 낚시에 걸리기만하면 대사필인걸!>>

   <<그럴법도 합니다마는 아버지... >>

   오빠가 좀처럼 믿음성없고 납득되지 않아서 아버지한테 다시 묻는 소리였다.

   <<어찌보면 아버지 생각이 고명한것 같습니다만 그 녀석임 을 듣지 않을 때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어떻게 할게 있냐, 그담은 뻔하지. 자기가 상대되는 자를 물리치고 패권을 쥐려면 사람을 분별있게 대하고 자기 수하에 끌어넣는 지모와 수완을 갖고있어냐 하거니와 또하한 자비를 모르는 강포한 대담성도 있어야 하는거다.>>

    이 말 끝에 호응하듯 칼을 쭉ㅡ 뽑았다가 본때있게 칼집에 도로 집어넣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오빠의 강포한 웃음소리에 련이어 그의 교만하고 방자한 대꾸소리가 들려왔다.

   <<허, 두고보십시오, 내가 이래 뵈두 숙맥불변은 아니지요. 이 칼을 들고 아버지를 제대로 붙좇지를 나를 손씨네 자손으로 치부하질 마십시오. 아버지의 사려깊은 훈도이니 깊이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겠습니다. 창자를 벤 조희간을 본받아 이 자량이도 효자로 될텝니다. 이 칼을 들고 명성을 떨쳐 부모의 위신을 높이며 선조를 빛내고 뜻을 이루렵니다.>>

   밖에서 어미잃은 망아지 우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손옥란의 귀에는 그 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제 새끼도 찾지 않는 어미말을 꾸짖으며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괘종이 요란스레 새로 두시를 쳤다. 그 소리에 적이 놀랜 손옥란은 착잡한 생악을 떨어버리려고 다시 돌아서서 자기 침대에 와 맥없이 걸터앉았다.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마저 그의 눈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잠시 괴괴해졌던 옆방에서 말소리가 나지않고있었으나 침묵에 빠진건 아니였다. 틀림없이 손옥란이도 잘알고있는, 토색질한 약담배를 많이 넣어두던 아버지의 그 구리장식품들을 가득 붙여서 얼룩고양이의 상판을 방불케하는 둔탁한 장롱을 들추는 소리가 나더니만 좀 있어서 애비, 아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자 이것도 네가 건사하거라.>>

   <<그건 뭔데요?>>

   오빠가 의아쩍어 그것을 받는 모양이였다.

   <<웬 옥양목두루마리를 이렇게 우단으로 다 정성스레 싸두셨나요?>>

   <<물어볼거 뭐냐? 이제 펼쳐보면 알게다.>>

   <<아, 이건.... 이건 명부로구만요!... >>

   <<그렇다, 잘 보거라. 그건 우리 집 사판(仕版)이로다.>>

   <<그렇지, 알만해요. 이건... 하하하!>>

   <<오빠가 기뻐서 부르짖으며 셈을 세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하나, 둘, 셋... 모두 백공두명이로구만요! 그렇지, 첫머리에 할아버지명함이 적혀있고 그 다음엔 아버지... 여기엔 내가 어렸을적 아르금산에 있을 때 한께 지냈던 분들의 이름이 수두룩하구만요. 해귀당신, 안장코, 검덕귀신, 굴대장군... 하하하! 별호에다 용모파기까지 해놓았으니 옛몰골들이 선연합니다. 이것만있으면야 그네들을 아무데서건 찾을수있을 뿐만아니라 그네들의 자손마저도 찾아낼수  있겠는걸요.>

   <<그렇네라. 허니까 그건 우리 집의 두 번째가는 보배네라. 그러니 너는 명부에 적혀있는 그 이름들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두거라. 거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너의 할마버지와 나의 배하에 있었던 충복들이였네라. 그속에는 너의 할아버지와 내가 온 북만일대를 편력하면서 찾아낸 명사호걸들도 적지않네라.>>

   <<아, 그렇구말구요! 지금도 내 눈앞에 선합니다. 그때 얼굴이 푼더분하고 못났던 그 해귀당신은 쌍배기총질에 얼마나 능수였던가요. 참, 그러고보면 아버지의 수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어요. 그런 사람을 그렇게도 용케 손안에 후려넣었던걸 보면말입니다.>>

   <<묘계가 따로있는건 아니네라. 몇 대를 내내 포수로 내려왔던 그는 당시 장백산에 있던 여러 포수들 중에서도 불질에 이름있는, 꼽히는 포수였는데 나는 수렵이 잘 안되면 거침없이 민가의 재물도 략탈해먹는 그와 두 번째로 만났을 때 횡재하는 재물들을 가차없이 반분을 나누어주기로 하고 데려왔던거네라. 흐에 내 수하에 당인들이 배가 되고 세력이 날따라 커짐에 따라 협약대로 차례지는게 적게 되니 불만이 두루생겨 한때 말성부린적은 있었으되 년초에 맺었던 정약만은 버리지를 않고서 마감까지 충실했던 사람이였네라.>>

   <<그때 우리와 헤여지면서 베르단총 한자루만 달래갖고 산으로 들어갔지요?>>

   <<그랬네라.>>

   <<아버진 아직도 그이가 어데 있는지 모르십니까?>>

   <<모른다, 그게 천만 유감이로다!>>

   아버지의 후회막급한 소리가 계속울렸다.

   <<수렵을 다시하겠노라며 우리에게서 떠나간후론 거래가 단절되고 소식마저 불통하여 그렇게 생존불명이 아니냐.>>

   <<아버지, 그러면 저 말잘타고 도끼 잘쓰던 안장코와 칼재간에는 아버지다음이요, 계집간빼먹기로 재간이 능통하던 검덕귀신은 지금도 아르금과 목단강에서 와주(窩主)로 있다잖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버금으로 손꼽아오던 굴대장군은 왜서 깜깜 무소식일가요? 그가 지금도 라북(羅北)에 있는지 사람을 띄워 한번 찾아보는게 어떠신지요?>>

   이 말에 대답은 안하고 아버지가 심중이 불안할 때면 노상 하는 버릇대로 코를 킁킁 거리는 소리만 갑갑하게 들려왔다. 손옥란은 눈을 말짱하니 떴다. 어린 시절에 함께 지냈던, 몸집이 구새통같이 굵고 키가 구척인데다 살결마저 흙처럼 거매서 보기만해도 초풍할지경으로 진짜마귀처럼 보이던 굴대장군의 험상한 몰골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빈번하게 보게 되는 학살에 습과된 관계로 마음이 사갈처럼 사박스러워졌던 손옥람마저 무서워 움쩍못하게 만들군 하던 그는 아르금산의 두령이며 <<흑룡>.이라는 대명으로 불리운, 아버지가 앞발톱으로 내세운 유력한 다섯 맹수중에서도 첫째로 손꼽는 자였다. 손옥란은 중뿔나게 찾아와 아버지네 무리에 가담하겠노라 맹세해놓고 돌아가던 그가 다시금 찾아오더니 사람머리를 떼여 꾸쳐싼 푸른 꾸러미를 앞에 던지고나서 아버지께 대바람 신임얻어 등용되던 일을 죽을 때까지 잊을것 같지 않았다.

   굴대장군은 본시 흑룡강을 오르내리며 로략질을 해먹던 마적이였는데 모리내부의 두목들사이에서 권력과 자리다툼으로 말미암아 알륵이 생겨 복수와 배반을 기도하다가 저의 두목의 목을 자른후 자기를따르는 심복 몇을 거느리고 넘어온 자였다....

   추억에 잠겻던 아버지의 느리고도 무거운 말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네가 받은 그 명부에 적혀있는 백공두명의 사람들중 지금은 스믈일곱명이나 생사존망이 불명하네라.>>

   <<어쩌다나니 그렇게도 많아졌습니까? 난 그저 해귀당신하고 굴대장군밖에 없는줄로 알고있었는데요.>>

   오빠가 애수해하며 어조를 바꾸어 또 하는 말이였다.

   <<그러면 저... 만철주식회사에 명적을 두고 아르금에서 협화회 회장노릇하면서 역게 놀아온 장삼은 그때 우리에게서 나이가 제일 어렸으나 문무재능이 겸비한 인물이였다지요? 세상이 뒤바뀌였으니 그가 이젠 어떠한 처세술로 누구한테 붙을가요?>>

   <<음, 벌서 13년이란 세월이 지났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른데있겠냐.>>

   <<강산이 변해도 사람맘이야 변하지 말아얍지요.>>

   <<그건 그렇네라. 간신이 아무리 변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게 인간의 도리련만 사람사람 어디 그렇게 되더냐?>>

   잠깐 침묵했던 아버지가 입을 다시열어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면 다시 물을바 아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남아있는 그네들이 급절하네라. 허니까 지체말고 속히 점명해봐야겠다. 우리한텐 권속이나답지 않는 그네들을 다시금 끌어모아 제 손안에 단단히 잡아넣을수 있는 권모술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먼저 세력을 확장하는 일부터 착수해야겠다.>>

   <<헤헤... 천만지당한 말씀이지요. 두고보십시오. 이 자량이가 아버지와 함께 결심품고 한번 해볼텝니다!>>

    아까보다 더 희떱고 방자한 오빠의 맹세였다. ...그러나 본시 허영심이 있었던 손옥란은 제 오빠를 나무랄수 없었다. 변덕쟁이인 자기의 푸접없는 마음을 고깝게 여기면서 늘 두려워하고있는 몸종애를 식당에 보내여 새로 끓인 차물을 가져오라고 시키고는 화려한 공단과 진주구슬로 장식된 침상포장깃을 박속같이 희고 보드라운 그 날씬한 손으로 애틋이 매만지면서 혼자 씽긋 웃었다.

   <<아버지가 다시 일어서시니 평소의 근심이 싹 다 가셔지려나. 행운아여, 모든 것이 제발 제대로만된다면... 이 옥란은 원앙금침속에서 영락을 보면서 평생을 잘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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