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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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1.
2011년 08월 09일 16시 08분  조회:4384  추천:0  작성자: 김송죽
 

대하력사소설 

           반도의 혈

               ㅡ백포종사 서일 일대기ㅡ제2부  

 

  11.

    이또오 히로부미의 탁상우에 1907년판 <<통감부시정일반>>이 펼쳐있다. 그 책의 7~8페지에다는 1906년 1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한 이래 통감의 감독하에 서울, 인천, 마산, 목포, 군산, 진남포, 평양, 대구... 등에 건립한 20개소 거류민단조직의 상황을 상세히 밝혀놓았다. 1906년 3월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수가 6만 1,900여명이였는데 반년이 지난 9월에는 8만 700여명으로 늘어났다고 기록되였다.

  《하세가와사령, 거류민단의 수자를 보오. 벌써 팔만이 넘는구만. 이네들이 안거락업을 하게끔 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을 다해 보호하지 않구야 될까.》

   이또오 히로부미가 하세가와 요시미찌를 향해 하는 말이였다.

  《천만지당한 말씀입니다, 각하!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왜 포고없는 전쟁에 피를 흘리겠습니까. 우리 사람이 이 땅에다 뿌리를 박자는거요, 일단 박은 뿌리는 흔들리지 않게 보호해야지요!》

   하세가와사령은 명석한 두뇌로 통감의 뜻을 리해하고 있었다. 올해 나이 벌써 58세, 로일전쟁을 방금 치르고나서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조선주차군사령(朝鮮駐箚軍司令)으로 임명된 그는 이또오 히로부미를 따라서 그와 함께 이 땅에다 발을 들여놓은이래 여지껏 손을 잘 맞추느라 돌아치고 있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십히 지난해의 8월이후 각지에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작당하여서는 자칭 의병이라고들 하고있습니다, 이왕년에 비할바없이 대단히 많이. 그러다보니 장자를 달고있는 괴수만도 그 수가 많아졌는데... 올 상반년까지의 조사해본 정황을 보면 이러합니다.》

   하세가와사령은 갖고온 <<폭도편책>> 제29호를 통감앞에 내놓았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것을 받아 펼쳤다.

   의병장수가 일목료연하게 기록되여있었다.

                      

   경기도 71명, 충청도 79명, 전라도 59명, 경상도 104명, 강원도 34명, 황해도  39명, 평안도 8명, 함경도 48명. 합계 442명.

  (연해주,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는 자 6명 포함.)

   

  하세가와사령은 <<비도상황월보>>도 갖고왔는데 거기에는 의병장의 “직업별구성통계”까지 있었다.

   그가 말했다.

  《통감각하께서도 <황성신문>의 보도를 보신 기억이 날겁니다. 광무10년(1906) 5월초의 일 말입니다. 그때 폭도 250여명이 경상북도의 진보군을 습격하잖았습니까, 그당시 신문이 폭도들의 무장장비상태에 대해 밝혀놓은것을 보면 80~90%가 칼이고 10~20%는 화승총이라했습니다. 헌데 지금와서는 아주 영 달라진 상황입니다.》

   《아주 달라진 상황이라니? 어떻게 달라졌다는건가?》

   《군대해산시 서울서 1,000여정, 원주서 1,600여정, 강화에서 600여정을 그자들이 가지고 간겁니다. 물론 그것만갖구서야 어림없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각 지방에 흩어져있는 총을 거둔겁니다. 조사해본바 군량도감과 소모관이 마을민들에게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전하고 설복하여 널려있는 무기를 수집하는 한편 각 고을관청들에 있던 무기도 얼마있으면 얼마를 탈취해갓답니다. 그자들이 자체를 무장하는 다른 한 경로는 바로 우리의 군대를 돌연습격해서 인명을 해치고 휴대한 무기를 빼앗아갖고 달아나는 그겁니다. 물론 자체로 무기를 사서 보충하기도합니다만은 구입이란 참으로 어려운걸로 알고있습니다. 총 한자루값이 황소 한 마리값에 해당하니 그 비싼 무기를 살 돈이 어데있겠습니까. 허니까 이제는 우리 일본인과 친일자의 재산을 몰수해 그걸로써 벌충을 하는 판이랍니요.》

   《이런 괘씸한! 무기단속을 했더니, 판매운반을 엄히 금했더니, 이제는 그 모양으로 해낸다는말이지!》

   《불어치는 바람을 피하려고 방풍막이를 하는거야 인간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총을 관속에 넣어 상여로 가장해 운반하지 않는가 총을 미역단속에 박아 넣어 운반하지 않는가...》

   《뭐라! 허허허... 》

    이또오 히로부미도 미처생각못한바라 맥빠진 웃음을 흘렸다.

   《각하! 여기에 기록이 있습니다, <전라도의 폭도들은 2월이후 화승총개조에 힘써 4월초까지 그 대부분을 개조하였다>. 》

   하세가와사령은 기록본을 펼쳐뵈이면서 의병들은 무기를 자체로 수리하고 개조할뿐만아니라 지어는 만들기까지 한다고 덧붙이였다.

   과연그랬다. 홍범도반일의병대는 화승총과 탄알을 자체로 만들어냈던것이다. 제작장소는 갑산군 능귀면 룡문리. 그들은 보습을 주조하듯이 총과 포의 형틀을 만들고 갑산에서 실어온 동과 철을 녹여 화승총과 탄알, 화승포를 주조하였다. 화승포에는 포신이 있고 포신후면에 화승을 달아 불을 달게끔 되여있었다.

   포탄은 포안에 장입한 다음 발사할수 있게되였다. 그러나 그들 자체로 제작한 포는 부족점이 있었다. 구경이 너무 벌어진 탓에 포탄이 먼거리에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거리의 적은 얼마든 쏘아눕힐 수 있어서 좋았다. 포에 사용하는 탄환은 보통의 화승총에 사용하는 탄환이였는데 그것을 많이 넣어 쏜다. 새총의 탄알같이 확산되기에 살상수가 많은 것이다. 실은 탄알제조가 그렇게 바쁜건아니였다. 쇠물을 높은데서 내려부을 때 물모래로 높은데서 흘리면서 치면 쇠물은 각개 덩어리로 응결되면서 동글동글한 탄알이 되였던것이다.

   의병들에게는 무기다음 중요한 것이 식량과 군수전(군자금)이였다. 그들은 그것을 백성들에게서 걷기도 하고 적이 갖고있는것을 빼앗기도했으며  지주가 농민들에게서 소작료로 걷어가는것을 몰수하기도했다. 림진강류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허위는 여러차례 통고문을 내여서는 납세와 미곡반출의 정지를 명령하여 군대의 량식을 준비했던것이다.   

   어떤곳의 의병들은 의병대의 통고와 지시를 무시하고 리기에 눈이 어두워 량식을 갖고 모리간상행위를 하는 자들을 체포하여 총살하기까지 했다.

   하세가와사령은 주차군사령부에서 입수한, 의병손에 의하여 씌여진 방문(榜文) 한 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간상배들에게 쌀을 팔지 말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였던것이다.

  《통감각하! 보아하니 올해역시 알곡징수는 매우 어려울것 같습니다. 폭도들은 식량과 군자금과 같은 것 까지도 직접 세민들에게 요구함이 없이 각 면의 동장들에게 통고하여 징수한답니다. 세민들은 물론 그자들을  성의껏 지원해주고있습니다. 례를 들것 같으면 강원도민들은 도내에 머물러있던 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지 못해 감자종자까지 아끼지 않고 먹여서 올봄에 밭에 심을 감자종자가 거덜이 난 형편이랍니다. 어디 그 정도라구요, 원!... 그자들은 또한 군수전을 마련하자고 관청을 습격해 돈을 빼앗는 짓도 하고있습니다. 그러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어쩌는갈 보시오. 아예 <군표>와 류사한 <증표>를 발행하여 쓰고있답니다. 담도 크지!》     

   

   대전분서장 경부 와다가 이해의 6월 8일 경무국장 마쯔이에게 보낸 보고에는 한 반일의병대가 가지고있던 물품을 아래와 같이 라렬했다.

   <<배천 24필, 짚신 220켤레, 통문 28통, 일기장 1책, 명령서 7통, 백성들이 보낸 정보자료 28통, 회계서류 10통, 지령서 2장, 기타편지 38통>>

   

   의병들은 물론 신식무기를 휴대하고 근대적인 물품으로 장비한 일본군과 무장과 군수물자를 대등하게 마련할 수는 없는것이였다. 무장장비로부터 기타 휴대품에 이르기까지 불비한 점이 어찌 한두가지였으랴. 그럼에도불구하고 의병들은 온갖어려움속에서도 기지용감히 싸우고있었다. 산간지대의 의병들은 산의 자연조건을 리용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평지에서 싸우고있는 어떤 의병들은 낮에는 상복을 입고 상제로 혹은 엿장사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탐지하다가 밤이면 공격을 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통의 농민이나 도시주민으로 가장하고 적의 기관에 접근했다가 기회를 보아 불의에 습격하여 적을 처단하거나 기관을 파괴 혹은 소각했다. 이런일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일을 올 2월 27일자 皇城新聞이 세상에 알린 바 있다.

 

   <<폭도의 행동이야말로 대단히 교묘하며 낮에는 량민으로 가장하고 다닌다. 공공연히 관청소재지를 돌아다니다가 관리의 움직임을 정찰하고 만약 기회가 조성되면 곧 자객의 행동을 감행한다.>>

 

   <<빈틈을  타서 저격과  기습을 시도하는 등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 헤아릴수 없다.>>

   조선주차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의 기록은 이러했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무슨 궁리를 하는지 량미간을 한참이나 끌어모으더니 <<조선폭도토벌지>>를 끄당겨다 친히 한 장 한 장 뒤지였다. 그러다가 그의 눈길은 다른 하나의 기록에 이르러 멈추었다.

                

    <<경상북도 일월산부근에 이강년이 이끈 폭도는 작년 아까시 토벌대에게 큰 타격을 받고 제천방향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일시 이 지방이 조용하였다. 그런데 금년(1908)에 들어와 신돌석, 김성운, 류시영 등이 이끈 의병들이 들어와서 다시 소란한 곳으로 되였다.>> 

   

   《신돌석이라! 내가 전에도 듣던 이름같은데...》

    이또오 히로부미는 의병장의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생각이 인츰 떠오르지를 않는모양이다.

   《각하! 그자에 대해 별도로 기록해놓은게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릴까요... 오, 그렇지! 여게있군요. <신돌석은 녕해에서, 김순현은 영양에서, 정용기는 영덕에서 봉기한 화적출신 의병장이다>》

   《화적출신이라?》

   《예, 그렇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조사의 확실성은 담보키 어려운지라 하세가와사령은 뒷끝을 흐리였다.

    국권회복운동자를 정치범 또는 사상범으로 치부하기를 일부러 회피하면서 사무라이적 작태로 조선민족의 의행(義行)을 폄칭(貶稱)하는 것이 이제는 근성으로 자리잡아 의병에 대해서도 폭도니 강도니 하고 서슴없이 몰상식한 단어를 쓰고있는판이였다. 그러니 신돌석이 과연 화적출신인지 그 진실여부에 대해서는 사령관인 그도 딱히 알수가 없는것이였다.    

    신돌석은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나기는했으나 화적출신이 아니다. 그는 경북 녕해군 남면 복평리(현, 영덕군 추산면 부곡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서 이조시대에 들어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배척을 받아 마침내 신돌석(申乭石)의 7대조에 녕해방면으로 락향한 뒤 신분적으로 천민으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그는 1879년 11월 3일에 태여났는데 본명은 태호(泰浩)지만 돌석으로 널리 알려졌다.

    신돌석의 고향 녕해지방은 개항전 짙어가는 봉건사회의 위기감이 감돌던 1871년 농민 수백명이 일어나 맹렬한 저항으로 부사를 죽이고 관아(官衙)에 불을 지른, 이른바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난 곳이였는바 봉건체재에 대한 농민들의 반항정신과 기질은 그 어느곳보다 강하였던것이다. 하길래 신돌석역시 그 지방 특유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것이다. 그는 15살을 먹어서부터 장사다운 름름한 체구와 활달한 기강으로 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는 말을 듣더니 19살에 이르러 과연 녕해(寧海)의병진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그러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의 기화(奇禍)로 일어났던 전기의병이 점차 종식되여가자 신돌석역시 형세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했던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나서 청도지방에는 전기가설을 하던 일인 5명을 죽이고 전주를 뽑아버린 사건이 발생했고 부산항에 잠입한 왜선(倭船) 1척을 뒤집어 엎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측은 사건조작자를 체포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종시 잡히지를 않은 그가 바로 신돌석이였다.

    1906년 3월 13일 신돌석은 보국(報國)의 결심을 품고 그동안 규합한 장정 300여명으로 녕릉의병대를 조직하고 부친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전 재산을 털어 군기와 군량을 장만하여 재기하였다. 그는 1907년부터 이강년, 이은찬, 이인영 등 의병장과 련계하면서 적과 싸워 련전련승하였다. 소문을 크게 내니 각지에서 모여온자가 무려 3000여명에 달했다. 그가 의병대를 이끌고 군세를 크게 떨치니 만인으로부터 추앙(推仰)과 기대는 매우 컸다.

    하세가와사령이 말하는 화적출신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그자가 정녕 화적출신이라면 물욕과 탐명(貪名)이 극해서 야생말같이 자신을 견제못하구 만용(蠻勇)을 부릴수도 있을거니 우리 이렇게 해봄이 어떨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이마살을 구겨박으면서 고작 생각해낸 것이 한번 자기 통감의 명의로써 신돌석을 회유해보자는 것이였다.

   《그 계책도 써봄이 좋을것 같습니다만, 각하! 일진회원이 의병장으로 된것만도 셋이라 조사됐는데요. 경기도 하나, 전라북도 하나, 전라남도 하나. 그런자들까지 총뿌리를 우리한테 돌려대는 판이니... 어찌 생각이나했겠습니까.》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머리를 설레설레 젓더니 입을 다시열어 집요한 투로 물었다.   

   《하세가와사령, 함북도쪽은 요즘 어떠한가?》

    하세가와사령은 기록본에 적혀진대로 내리읽었다.

   《7월 10일 오전 5시 폭도 약 200명이 함북도 두만강역의 신아산분견대를 습격, 그자들은 대단히 민활하고 사나운 동작으로 분견대를 포위하였다. 분견대 하사이하 9명은 분전 2시간만에 탄약이 떨어져 드디여 포위망의 한 모퉁이를 돌파하고 경흥수비대주재소로 패주하였다.》

   《그리구는?...그저그리구는 끝난건가?》

   《아까시 상등병이하 2명은 포위를 탈출하여 오후 1시 경흥에 돌아왔으나 가네지마 오장이하 전원은 현재 행방불명.》

   《?!......》

   이또오통감은 낯색을 굳히면서 하세가와사령을 아느새 눈박아보았다.

   행방불명이란 패주하다가 의병손에 몰살당했다는 것을 의미할뿐이라 생각하는 판이다.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은 7월 10일이후 일본수비군과 수일간 치렬한 전투를 하면서 친일주구도 잡아 죽이고 경원군일대의 통신망도 파괴하였으며 회녕과 종성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도 차단했던 것이다.

   《각하! 아군은 두만강연안에서 갑작스런 타격을 받고 갈팡질팡했습니다만 지금은 기본상 수습이 된 형편입니다. 그곳을 책임진 마루이소장은 사령부에 <용담과 신아산부근의 도하지점에 병력을 증가하여 폭도들이 도문강쪽으로 빠지는 것을 막게하였다>고 보고해왔습니다. 내가 폭도들을 진압못하고 수치를 보인 수비대의 패전장들은 싹 다 해임하고 유능자를 새로 임명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찌는 이 이상 더 말할 기분이 못되였다.

   의병들은 진압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민활한 활동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와 또다시 공격을 들이댔던 것이다. 1908년 8월 4일, 그들은 경흥군 우암리를 습격하여 일본인이 만들어놓은 어장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였거니와 14명을 사살하고 두만강을 건너간 것이다. 

   하세가와 요시미찌는 통감의 부름을 받고 조선주차군의 의병진압상황보고를 하는것만큼 루락된 것이 있어서는 안되는지라 기분상하지만 전라도쪽 안계훈 담사리의병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보고하려고 기록을 뒤지였다.

   이때 헌병사령관 아까이시가 통감을 만나러왔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은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꾸였다.

   의병항쟁이 발발해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탄압도 점점 더 혹심해갔다. 그러다보니 체포되는 자가 자연히 이왕만 많아져서 헌병사령관 아까이시도 주차군사령만 몾지 않게 바삐돌아치는 몸이였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들 두사람을 수시로 관저에 불러다놓고 보고를 받군했다.

   오늘도 그가 아까이시를 통감부에 오라고한 것이다. 지금 헌병대감옥에 수감중인 반일의병의 거목 왕산(旺山) 허위(許蔿)를 교사(敎唆)하여 귀순시킬 일을 상론코자함이였다. 

   허위가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연기우, 김규식 등과 포천, 적성, 삭녕 등지를 종횡하면서 적을 크게 무찔러 한창 군세를 떨치고있는 때 이완용은 사람을 그한테 보내여 높은 관직을 줄테니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오라했다. 통감의 독촉에 못견디여 꾸민 유인술이였다. 허위는 그것이 전국의 의병진을 와해시키려는 적의 간계임을 제꺽 간파하고는 단호한 태도로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이완용은 허위를 비적의 괴수라고 무함하면서 황제에게 체포령을 내려달라고 상주(上奏)를 했던것이다.

   전해의 12월에 총대장 이인영이 공교롭게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하였기에 전국의 의병을 맡아 총지휘하게 되었던 허위장군은 짖꿎게 달려드는 불행을 모면키 어려웠다. 서울공격을 계획했으나 결국은 수비군사령부 오까사끼중장이 연대병력으로 응전함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말았다. 허위는 감심(甘心)먹고 칠전팔기(七顚八起)의 기백으로 재기를 도모하던 중 불행하게도 올해(1908)의 5월 24일 연천군 반석동에서 철원에 주둔하고있는 일본 헌병대에게 체포되여 서울헌병대에 압송되였던 것이다.

  《의병을 일으킨 자는 누구며 의병대장은 누구냐?》

  《의병을 일으킨 자는 이또오 히로부미고 의병대장은 내다.》

   수감첫날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허위를 심문할 때 오간 말이다.

  《아까이시 사령관, 수감된 자의 태도가 지금은 어떠하오? 좀 변화가 보이는가?》

   이또오통감은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나타나자 물었다.

   아까이시는 그가 허위에 대해서 묻고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왕산 허위말이지요, 그자는 기개가 대쪽같아 설득이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저나 각하께서 짐작한것 이상으로 굳기가 반석같습니다. 그러면서 성품은 또한 호방하고 유모아적인걸 보면...》

   첫심문때 허위가 내던진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왔다.

  《건 무슨소리요, 호방하고 유모아적이라는게?...》

   이또오 히로부미는 아까이시가 말을 하려다말고 자기를 별스레 보면서 뒷꼬리를 사르는지라 이상쩍어하면서 귀바퀴를 세웠다.

    아까이시는 허위가 한 말을 공중이 알면 당연히 물의를 빚을것 같아 죽을때까지 자기 혼자만 알고 발설을 하지 않으려했건만 이또오 히로부미가 흥미를 가지면서 캐물으니 아마도 이제는 토로하는 수밖에 없겠다여겨 그는 목청을 가꾸어 말했다.

   《첫심문때였습니다. 제가 의병을 일으킨 자는 누구며 의병대장은 누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가...》

   《그랬더니 뭐라구하던가?》

   《그자가하는 말인즉 이러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자는 이또오고 의병대장은 내다>》

   《뭐라? 허, 허허허!...그 녀석이 나를? 허허허!...》

   이또오 히로부미는 듣고보니 어처구니없는지라 허연 턱수염을 들까불며 련신 너털웃움을 웃어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세가와사령과 마에마 교오사꾸도 웃었다. 어처구니없어서 웃는 것이 아니였다. 허위라는 의병장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몰골은 보지 못했어도 그 대답이 허파를 경악케 할 지경 호기스러운 명언이였기 때문이다.

  이또오 히로부미는 자기를 도마우에 올려놓고 놀리면서 칼질하는 의병장이 괘씸하기는했지만 그 기품이 호매로와 악행으로 졸렬하게 욕보일수 없거니와 의병진에서 위망이 대단히 높은 그만 귀순시킨다면 지금 세상사람들로부터 침략자라고 지탄받고있는 일본이 감내해야 하는 난면을 어느정도 풀어나갈수 있을것 같아서 계속 무마책으로 유인해보리라 맘먹었다.

   《잠자리와 식사일절을 우대하여 황은의 후더움과 관대함을 보여준다면 심기일전할 날이 있을거네. 그 누구나 목숨만은 아까와하는 근성이 있는거니까.》

   《각하! 우리 국민은 성질이 편협한데다 자중할줄을 몰라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내고 목숨을 내걸지만 한국인은 다릅니다. 동물의 본성대로 제목숨을 대단히 아끼지요. 하지만 빼앗긴 국권을 찾자고 드니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맹수모양으로 사나와지는게 바로 그들인가봅니다.》

   《죽음으로도 굴복은 시키지 못한다는 말이겠지.》

   이또오 히로부미는 고개를 기웃하고 아까이시가 하는 말을 듣더니 이번에는 마에마 교오사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에마 통역관, 제자가 함북도에 있다구했지. 내 말은 전번날에 본 젊은이 말일세. 요즘 형세에 그도 의병에 휩쓸리지 않았겠나?》

   《통감각하! 그는 경원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칠려구 하지 총잡고 나가 위험스레 고생을 하자구는 안할겝니다.》

   《마에마 통역관! 장담이 이른게 아닌가? 선생이 제자를 거느리고 의병에 가담한 실례가 한둘이 아닐세. 그 제자가 이름이 뭐라구했더라?》

   《애명이 기학이고 지금은 서일이라구합니다, 각하!》

   《출신은?》            

   《부모가 천민이오만 그의 조상은 고려공신인가봅니다. 담판으로 거란의 침공을 막아낸 서희장군의 36대손이랍니다. 통감각하, 헌데 그건 왜서요?...》

   《소문을 내는 의병장의 밑그루를 뒤져보면 거개가 본전이 파뭍혀있어서 그러는거네. 명맥을 이어주는 뭐가 있다는 걸세.》

   《통감각하! 저의 제자들은 며칠전에 려권을 해갖고 만주로 고적견학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이 의병활동에 휘말려들고십지를 않아서 일부러 회피한걸로 봅니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만일의 경우에 생길수 있는 책임을 미연에 회피하려고 이같이 듣기좋게 별명했다. 서일은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기때문에 자습해서 남먼저 일본글을 알고있는것이다, 자기는 도꾸도미가 쓴 “황실중심주의”를 읽어보라고 근일 개정판으로 세상에 나온 <<吉田松陰>>까지 한권사서 그한테 주었노라했다.      

   그러나 이또오 히로부미는 서일이 과연 일본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있길래 일본글을 배운걸가하면서 서일 등이 려권을 해갖고 국경너머의 만주까지 고적견학을 떠났다는 그 사실이 신경을 더 긁는다고 하였다. 자기가 청년시절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영국으로 류학을 떠나면서 애국심을 지니고자 둘이서 고적을 답사했던 일이 머리속에 다시금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사령과 아까이시 헌병사령관이 돌아가자 이또오 히로부미는 얼굴에 짙은 그늘을 지으면서 마에마 교오사꾸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스티븐스의 죽음에서 한국젊은이들의 용기를 알았다. 문약한 나라에서 태여났지만 그들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마에마 교오사꾸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말이 맞는것이다. 비록 문약한 나라에서 태여나기는했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용기가 있고 일본에 대해서는 사실 무서운 존재로 되고있었던것이다.

   통감이 말하는 스티븐스는 무서운 한국청년의 손에 목숨을 잃은것이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후 2천만 한국민의 맹렬한 반항에 부딪친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는 외국여론의 악화를 크게 걱정하여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D.W.Stevens)를 사가귀국(賜暇歸國)이란 명목으로 본국에 돌아가 미국여론에 일본정책의 공적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국제여론의 악화를 방지하려하였다.       

   스티븐스는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기자들과 회견을 가지고 일본의 한국통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던것이다.

 

   <<1.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최근 한일양국인간의 교제가 점차 친밀해지고 있다.

   2. 일본이 한국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인민을 다스리는 법과 같다.

   3. 한국에 신정부가 성립된 이후 정계에 참여치 못한 자들이 일본을 반대하지만, 농민과 일반백성은 전일의 정부가 일삼던 바와 같은 학대를 하지 않으므로 일본인을 환영하고 있다.>>  

 

   22일자 샌프란시스코 각 신문에 이같은 담화가 보도되자 격분한 교포들은 대표 4명을 선발해 스티븐스가 든 페아몬트호텔로 보내여 항의케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뻔뻔스럽게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한국에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 이또오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에 대행(大幸)이라. 내가 한국형편을 보니 대황제께서 실덕이 태심하고 완고당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즉,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아라사(로씨아)에 빼앗겼을터이다. 신문에 낸 것은 사실이니 다시 정오할 것 없다.》

   이같은 폭언에 격분한 4명의 대표는 일시에 달려들어 앉았던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를 마구내리쳤다. 사건이 돌발하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스티븐스는 일본외무대신과 이또오통감앞으로 유서를 써서 고이께총령사에게 맡기기까지했다. 허나 그에 대한 재미교포의 울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3일 아침 스티븐스가 총령사와 같이 워싱턴행렬차를 타기 위해 오글랜드 페리에 도착했을 때 한국청년 전명운(田明雲)이 권총으로 저격했다. 그러나 불발로 저격에 실패하여 두사람이 격투를 벌릴 때 장인환(張仁煥)이 쏜 다른 한발이 날아와 스티븐스를 명중했던 것이다... 

   스티븐스의 죽음을 보고 크게 놀란 이또오 히로부미는 그후 날아오는 탄알에 쫓기우는 악몽을 자주꾸어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서 그 누구를 해칠 마음은 없이 그저 옛스승을 찾아보려는 단순한 생각으로 통감부에 발을 들여놓았던 서일까지도 의심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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