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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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피눈물의 지팡살이
2014년 02월 04일 16시 08분  조회:1606  추천:0  작성자: 김철호

농촌녀인들 함지에 점심밥 담아 밭으로 나르고 귀가길에는 땔나무 이고 돌아온다.


지주 지방관청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에 녹아나는 조선족농민들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 되기만 했다.

한창 재밌게 농사를 짓고있을 때 난데없는 <<다부살이>>(만족식두루마기를 입은 점산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친다. 다 된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 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없는 황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들의 사지증서안에 든 땅이였던것이다. 어떤 점산호들은 조선족간민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다가 황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 불현듯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자들은 계속 농사짓겠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하여 조선족간민들은 자신이 일군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소작농으로 전락되여야 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에 대해 류병호선생은 “점산호와 포산호”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방법을 보면 첫해의 가을 혹은 이듬해의 이른봄에 잡초와 관목들을 베여낸후 괭이와 보습으로 갈아번지고 조를 심는데 첫해에는 밭고랑도 내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 이듬해부터 콩, 옥수수, 보리를 심었다. 이렇게 2-3년이 지나면 황지가 점차 옥답으로 되는데 이사이에 겨울이면 도끼로 나무뿌리를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간민들을 당시 지방관청에서는 간민이라고 불렀고 한족과 만족들은 지호(地戶) 혹은 포산호(刨山戶), 즉 산을 뚜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된 포산호들의 생활이란 중세기 장원주의 농노와 같았다.”

산골짜기에 단풍물 오르고 밭곡식이 여물어서 누렇게 익은 가을, 탈곡장에 높이 쌓은 낟가리를 바라보면서 봄내 여름내 손이 갈라터지게 일한 보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날아든다. 무장한 졸개들을 거느린 다부살이가 탈곡장에 뛰여들어 마구잡이로 조선족간민들이 지은 곡식을 우마차에 실어간다. 자기들의 요구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집 안해를 빼앗아 가기도 한다.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자식까지 빼앗아간다.

포산호들은 혼히 4상의 토지를 소작맡으면 점산호의 1상의 밭을 무상으로 다루어주어야 했다. 또 해마다 10-20일간 점산호의 일을 무상으로 해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점산호를 위해 잡역을 해주어야 했다. 례컨대 음력설전후이면 점산호의 마소들이 1년간 먹을 사료를 썰어주어야 하며 립추전후이면 땔나무 50단을 하여 바쳐야 한다. 같은 글에서 류병호선생은 포산호들의 억울함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채구의 점산호 손보산은 포산호들에게 매년 1상의 감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꼭 김 세벌을 매게 하고 가을이면 잘된 감자만 골라 자기의 국수방에 가져오게 하였다. 점산호들은 잘 다룬 옥답을 빼앗아 례물을 많이 바치는 다른 간민들에게 소작주고 옥답을 빼앗긴 간민에게는 다른 황지를 개척할 것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빚갚지 못해 처자 빼앗겨

옛날에 연변에서 땅없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아 부치는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이란 한어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지주가 차지하고있는 “地方(띠팡)”을 지팡으로 잘못 부른데서 생겨난 말인데 일부에서는 “地盤爾(띠팔)”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주민들이 입버릇처럼 외운 지팡이란 곧 토지를 비롯한 생산자료가 어느 한 지주에게 들어간 지방을 말한다. 례를 들면 쑹개네지팡(宋家地方), 왕개지팡(王家地方), 조개지팡(趙家地方)같은것들이다.”(박청산 김철수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개간초기 조선족농민들은 쌀도 농구도 없기에 지주에게서 쌀, 농구, 생활비를 빌어 땅을 부치잖으면 안되였다. 이런 것을 방청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쌀, 농구, 부림소, 생활용품을 대주면서 3년동안 소작료를 안받는다 해놓고는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쓸어들고 상품경제가 점차 발전해가자 첫해부터 소작료를 내라고 했다. 첫해에 수확고의 20%, 이듬해에 30%, 그 다음해에 40% 바치는데 거기에다 월리식까지 합하면 수확고의 70-80%를 바치는셈이였다. 네 번째해부터는 종자, 농구, 부림소 등을 자부담하면서 방청을 반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반작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는걸 말한다.

등허리를 내리 쬐는 무서운 땡볕아래에서 잔뼈도 굳지 않은 애숭이 머슴애가 후치를 끈다. 이마로는 비지땀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마구 쏟아진다. 후치대를 잡은 아비의 목에서도 겨불냄새가 난다. 이것은 당시 조선족농민의 풍경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조선족농민들에게 있어서 부림소 한 마리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소가 메여야 할 쟁기를 흔히 사람이 메잖으면 안되였다. 뼈가 물러나게, 살이 떨어지게 한해농사를 지어놓았으나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여러 명목의 가렴잡세까지 바치고나면 다시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만다.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쌀독이 비게 되어 조선족농민들은 지주에게서 높은 리률로 쌀을 꾸어다 호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곡물반환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봄에 곡물 1되를 꾸어주고 가을에 3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봄이면 지주들은 시장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가을이면 폭락한 값으로 6배에 해당한 곡물을 받아들인다. 례하면 봄에 량식 한되 값이 1원이라면 한되에 1.5원으로 꾸어주는데 가을이면 량식값이 0.5월으로 폭락했으나 의연히 봄의 가격으로 받는다. 그러니 봄에 1되 꾸어온 량식이 가을에 6되 되는 것이다.

이외에 점산호들은 고리대로 지호들의 고혈을 짜냈다. 리자는 보통 5푼이고 높을 때에는 10푼짜리도 있었다. 정한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처자를 빼앗기기도 했다. 빚을 못갚은 농민들의 아들딸들은 지주집에 꼴모슴, 부엌데기로 들어가야 했다.

“덕신향 장동촌 하촌의 최대동은 점산호의 고리대를 갚지 못하여 하마터면 고환을 잘리울번하였다.”(김희 “장동촌을 개척한 사람들”)

가렴잡세와 “동양척식회사”의 착취

“조선족농민들은 지방관청으로부터도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동북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괴이한 세금을 바쳤는데 문턱세, 인두세같은것이 그런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조선족농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 없다고 한다.

조선족농민들은 교육비, 순경비, 보위단비 등 지방세를 바쳐야 하는외에 사묘, 도로, 교량수축비같은 촌세를 바쳤으며 억울하게도 문턱세, 인두세. 고용세, 양우세(養牛稅), 굴뚝세, 입적비 초대비, 땔나무세, 해산세 등을 바쳐야 했다. 문턱세라는 것은 관청에 불리워간 조선족들이 관청의 대문에 들어설 때 바치는 세금이다. 소로 농사를 짓는다고 소세를 바쳐야 했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받는다고 고용세를 바쳐야 했다. 이외에도 호세(戶稅)라는것도 있었는데 주둔군의 생활비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량식, 닭, 닭알, 땔나무, 술, 담배, 잡화의 비용을 모두 호세로 각 호에 분담시켰다.

그리고 군대가 촌락을 경유할 때 촌민들이 무상으로 식사와 잡비를 제공하여야 하고 관리와 경찰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쓰는 비용도 촌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가련한 조선족농민들이 당하는 설음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그들은 악착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박과 착취도 받아야 했다. 1918년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에서는 조선족농민들의 토지계약서를 저당잡히고는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개척해놓은 땅을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40-50%의 소작료를 받아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의 해설사이다. 이 대형다큐멘터리에서 하마탕주민 오준섭(80세)로인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이 수전, 한전 5헥타르 다룬다면 문패에다 한 헥타르당 얼마를 바치라는 것을 써붙여 놓습니다. 세금이 어찌나 높은지 혀를 찰 정도였지요. 세금을 못내는 경우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가장집물을 빼앗거나 부셔놓군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변대학 황룡국교수와의 인터뷰도 있다.
“연변의 토지를 점하기 위하여 일제는 연변에다 <동약척식회사 간도출장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구제한다는 명의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토지대금, 밭갈이소값, 농기구값, 량식값 등이 망라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은 그 규정에 따라 밭을 사가지고 토지계약서를 동양척식회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규정에는 리자와 본전을 다 물면 토지계약서도 돌려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자가 어찌나 높았던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도 리자를 다 갚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지주와 지방관청 그리고 일제의 악박착취는 조선족농민들의 명줄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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