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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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3.13”후의 반일무장단체들
2014년 02월 05일 10시 14분  조회:1999  추천:0  작성자: 김철호


1920년 9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왕청현 서대파에 모인 북로군정서 장병들.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장군.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무장투쟁 노도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외교독립론”이거나 중국정부의 힘을 빈다는것은 닿지도 않는 일이라는것을 피의 교훈으로 느낀 각계 반일단체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무장단체의 결성과 무기구입, 군자금모집 및 반일기지건설의 방침을 제정하고 힘차게 밀고나가는것만이 생로라는 것을 알고 즉각 대오를 무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게 되었다.

간도국민회

간도국민회는 “3.13”반일운동후 연변에서 그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세력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무장집단이였다.

“3.13”반일운동이 일어난 이틀후인 1919년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변의 반일의사들은 연길현 지인향 솔완자(지금의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 “3.13”학살사건의 경험교운을 총화한 뒤 “한족독립기성총회”(회장 구춘선)를 건립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각지 반일운동을 지지 지도하고 민중을 조직, 동원하면서 반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을 악질 친일분자들을 체포, 처단했으며 운동자금을 모연하기도 했다.

3월 21일 로씨야에 파견되였던 김약연, 정재면이 돌아온후 이들은 민족독립은 남에게 의거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반일무장단체를 결성할것을 결정하였다. 하여 “한족독립기성총회”를 “간도국민회”(회장 구춘선)로 개편하였다. 소재지는 하마탕(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에 옮겼음)에 두었다. “간도국민회”는 중앙총회아래에 다섯개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소재지와 탄탄한 간부진용을 갖고있었다. 촌지회도 100여개가 있었다.

1920년 봄부터 “간도국민회”에서는 경호대와 국민회군 등 군사조직을 내왔다. 경호대 총사령은 리용(李鏞), 국민회군 사령은 안무(安武)가 맡았다. 이들은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지회에 교관을 파견, 청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진행, 군대에 편입시켰다. 1920년 8월의 총병력수는 450명,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이들은 또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속에 사관훈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920년 5월 국민회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신민단의 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간도국민회”는 전 동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반일단체였는데 회원이 8000여명이나 되었다. “간도국민회”는 반일단체들의 통합에 힘쓰면서 반일무장투쟁에서 련합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금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0년 “경신년대토벌”후 국민회군은 기타 반일부대들과 함께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로씨야로 이동하였다. 주요간부들은 국민회의 회복건설에 힘썼고 1921년말에는 리동휘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참가하여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중앙총회를 건립하고 민족해방투쟁을 견지하였다.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대종교동도본사의 주관 서일이 지난날의 반일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되여 세워진 반일무장단체이다. 1919년 5월, 서일은 유교계인물들과 함께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10월에는 정의단을 반일무장조직인 “대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병사모집과 군사훈련, 무기구입 등에 힘을 모으면서 반일무장조직을 확대했다.

북로군정서는 정치행정사무, 군자금모연, 군인모집, 지방통신련락, 교제, 경비 등 사무를 담당하는 총재부와 군사훈련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담당하는 군사령부 두 조직체가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부는 왕청현 덕원리에 있었는데 서일이 총재를 담당하고 수하에 부총재, 비서장, 비서, 서무부장, 재무부장, 인사국장, 경리국장, 계사국장, 탁지국장, 모연국장, 징모국장, 경신국장 등을 두고있었다. 군사령부의 소재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두고있었다.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리장녕이였다. 수하에 참모부장, 려단장, 련대장, 참모, 련성대장, 군기국장, 군범국장, 군계보관, 정탐대장, 참모, 군의정, 부관 등을 두었다.

총재부산하에는 지방경신국과 경비대가 있었는데 35개 경신분국, 200여명 경비대원이 있었다. 군사령부산하에는 400여명 학생을 수용한 사관훈련소가 있었는데 김좌진이 소장을 맡았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1600명, 동년 화룡현 청산리로 진출한 병력은 600명이였다. 무기장비는 보총 1300자루, 기관총 7정, 권총 150자루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끝내고 북만의 밀산으로 철퇴한 북로군정서는 연변으로부터 철퇴한 각 반일부대들과 련합하여 서일을 총재로하는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그후 그들은 로씨야에 철퇴하였는데 그때 서일은 밀산현 담벽진에 남아서 군정서군대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로씨야에 철퇴한 부대들은 “자유시(즉 스보보드니시)참변”으로 하여 좌절되였고 같은해 8월 17일에는 친일토비 고산의 습격으로 하여 하루밤사이에 담벽진의 기지는 파괴되고 무장을 탈취당하였으며 수십명의 장병들이 살해되였다. 크게 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7일 담벽진 뒤산에 올라가서 돌을 베고 누워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였는데 당년 41세였다.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은 이름난 의병장 홍범도가 1919년 “3.1”운동후 원래의 옛부하들을 토대로 세운 순수한 반일무장단체였다.

홍범도는 10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19년 9월 연변에 왔다. 그후 인차 다른 부대와 합쳐 400명의 병력으로 늘었다. 홍범도의 리상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이였다. 《연변항일사적지 연구》(김철수)에 따르면 “당시 중국관방의 자료에도 일단 빠리강화회의에서의 교섭이 실패하면 전대(결사대)는 백산의병대장 홍범도대장의 인솔밑에 의기를 들고 혈전하려는 계획이라고 기록하고 일제의 1919년 10월 9일 첩보자료에도 ‘홍범도는 결사대 2500명을 인솔하고 조선내지에 침입하려고 기도하고있다’고 기록되고있는 정황과 1919년 12월 13일의 조선함경남도 지사의 보고요지의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불령선인들의 수령 홍범도수하에 약 2천여명의 부하들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준비로 부하들을 날마다 훈련시키고있으며... 그 근거지를 내두산에 설치하고 음력 11월기간에 조선내지로 침입하여 일본관현과 교전할 계획을 하고있다’는 등 자료들을 놓고볼 때 홍범도는 확실히 일제와의 싸움을 첫 자리에 놓는 주목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대한독립군은 후에 국민회와 합하여 국민회산하에 귀속, 국민회의 근거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전문 전투에 뛰여들었다. 홍범도부대는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 “3.1”운동후에 무장투쟁을 준비한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부대로써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는 특점이 있다.

홍범도는 특히 반일무장단체들의 련합을 선도해 나섰다. 국민회와의 련합을 실현한후 련속하여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를 열어 통일과 련합문제을 토의하였다. 잠시 통일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련합전선을 결성할데 대한 협의를 맺기도 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은 군무도독부와 통합,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한후 근거지를 왕청현 봉오동(지금 도문시)에 옮기였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는 정일(征日)제1군사령원의 신분으로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후 각 무장단체들에서는 련합전선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통합을 찬성하는 서명운동을 진행, 동도독군부로 통합(북로군정서를 제외)되였다. 홍범도가 사령관을 맡고 근거지는 연길현 의란구 구단구 산속에 두었다. 사령부 산하에 4개대대를 두었다.

1920년 8월중순 홍범도부대는 일제침략군을 부단히 타격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나 이도구일대로 이동, 반일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을 벌리였다. 국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반일부대들도 이도구와 삼도구일대로 이동하여 홍범도부대와 함께 이름난 청산리전역을 벌려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쳤다.

기타 반일무장단체들

리명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한민회는 로씨야에서 성립된 “대한국민의회”의 지부로서 1919년 4월 14일경에 성립되였다. 훈춘한민회군사부 부장은 황병길(후에 김정)이였다. 1919년 7월 한병길은 결사대를 보집하여 “급진단”을 건립한후 연통라자 서골에 땅 40상을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대오를 4개중대로 편성한후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 “의사단”, “포수단”과 합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로 정식 편성되였다.

1920년 새롭게 군사부를 편성 최경천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군사부는 군내에 엄격한 군사규률을 세우고 간부선거 등은 민주적으로 진행했다. 군사부에서는 조선진입전투를 벌리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는 의민단은 연길현 숭례향 차조구(현재 안도현) 천주교 교회당에서 천주교신자들을 위주로 하여 세운 반일단체다. 본부는 차조구 천주교 교회당에 두었다가 후에 명월구 묘구로 옮겼다. 의민단무장력은 200여명, 1920년 5월 국민회군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에 편입되였다.

최명록을 총재로 하는 도독부는 “3.13”운동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건립한 기초우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병력은 2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충족했다.

1920년 3월과 5월 도독부는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 결정에 의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군 및 기타 반일단체들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편성, 홍범도를 정일(征日)제1군 사령으로 6월에 봉오동전투를 벌리였다. 그후 령도권문제로 홍범도와 모순이 발생하여 7월에 홍범도군은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으로 이동하고 최명록군은 라자구를 거쳐 동녕으로 이동했다.

최명록을 부장으로 하는 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 27일 봉오동에서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도독부군, 홍범도군이 련합하여 결성하였는데 후에 의군부, 의민다과 신민단도 련합여 들어왔다.

병력은 600여명, 기관총 2정, 5련발보총 355자루, 38식보총 13자루, 30식보총 28자루, 구식보총 4자루 합계 보총 400자루가 있었고 이밖에 각종 권총 18자루, 수류탄 다수가 있었으며 식량이 충족했다.

리범윤을 명예단장으로 김성극을 단장으로 하는 광복단은 의병장 리범윤이 로씨야에 갔다가 “3.13”후에 돌아와서 반일의병을 규합하여 결성한 단체인데 반일단체이면서도 또한 리조왕권의 광복을 꾀하는 조직이였다. 병력은 150명이고 본부는 왕청현 대감자이북의 곰골에 있었다.

1920년 10월 22일 어랑촌에 갔다가 동녕으로 철퇴, 다른 부대들과 함께 대한총군부를 건립하고 리범윤을 사령을 추대했다.

리범윤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는 “3.13”후 공교파들이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병력은 200여명, 10월초 홍범도군과 함께 와룡동에 갔다가 다시 라자구를 거쳐 동년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김종식을 의사부장으로 하는 라자구의사부는 “3.13”후 라자구에서 조직되였다. 처음엔 대장에 리춘범, 최정국이였다. 10월경에는 개선을 거쳐 김리근이 의사부장으로 활약했다. 병력은 200여명이였다.

그외에도 림창세를 총재로 하는 야단, 김중건을 단장으로 하는 대진단, 리백성 등이 조직한 의형제단, 리춘정이 성립한 구제단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궐기해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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