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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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봉오동전투
2014년 02월 05일 14시 41분  조회:3429  추천:0  작성자: 김철호



봉오동전투사적지의 하나. 최명록의 집 옛터에서 본 하촌 옛터. 지금은 저수지로 되여버렸다.

일본침략군과 진행한 첫 련합작전
반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첫 승리

봉오동전투의 도화선

도문 일광산(해발 390.7메터)은 아름다운 산이다. 깍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있는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쳐준다.

일광산 턱밑에 있는 마을이 유명한 산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다. 간평, 혹은 새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月新社)에 귀속되여있었다. 일광산에서 내려다보면 간평대안의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원래는 종성군에 소속) 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돌아서서 바라보면 도문과 조선 남양이 지척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밑으로 범진령고개길이 뉘연히 누워있다.

1920년 6월 4일 아침 5시, 신민단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헌병 군조 후꾸에 산다로이하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강양동습격전은 당시 연변의 각 반일단체들에서 진행하고있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의 일환이였다.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군경주둔지거나 경찰서를 습격하는 일이 련속 일어났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습격사건은 1650여차나 되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고 한다.

그날 박승길부대는 돌아가고 걸만동방면으로부터 다른 한갈래의 반일부대가 강양동습격을 목표로 삼툰자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두만강 남안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양동방면으로 향하다가 두만강북안의 항일군을 발견하고 총질, 이에 반일부대도 맞불질을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양동초소가 습격당하고 삼툰자마을에서 일본군종성수비대와 항일군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총격전을 벌리였다는 급보를 접한 남양수비대의 아라요시중위는 6월 6일 오전 11시 자기소대와 야마모도헌병오장이 거느린 헌병을 포함한 17명을 거느리고 삼툰자에서 7-8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로 기여든후 범진령을 에돌아 삼툰자서쪽 작은 골짜기로 내려와 마을 뒤산을 점령하고 반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할 목적으로 삼툰자마을을 습격하였으나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자 악에 받쳐 마을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는 범진령을 넘어 반일부대 종적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일광산기슭에서 숙영하하면서 대안의 후원을 바라고있었다. 밤 10시, 수십명의 무장한 반일부대는 삼툰자서북쪽고지에 이르러 숙영하고있는 일군의 보초선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톼각, 쌍방의 손실은 별반 없었다.

6월 5일, 일본군 야스가와소좌는 조선주재 제19사단의 명령을 받고 보병 제73련대(라남)소속 기관총 1소대와 보병 제75련대(회령)소속 보병 1개 중대로 이른 바 “월경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가지고 6월 6일 저녁 9시부터 해란강과 두만강합수목에서 10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도강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광산에서 숙영하고있던 아라요시부대는 안산방면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곧추 안산방면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보병 약 200명, 헌병 8명, 경찰 10명 합계 220여명이였다.”(최홍빈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봉오동을 진군하기 위하여 일본군추격대는 길안내를 찾으려고 정찰병을 후안산마을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에 가서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 모금대가 전안산 최명국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후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 와서 등불을 밝혀놓고 금후 행동방안을 상의하고있었다. 일본군정찰병들이 후안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한집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누구의 집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 갑자기 뛰여든 일본군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 반일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쏴눕히고 집을 뛰쳐나와 북쪽 고려령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에게 불질하였다. 일본군은 항일군의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왔다. 전투는 2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진행된 준비없는 싸움이였던지라 쌍방은 그다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일본군 1명이 죽고 독립군 1명과 최진삼의 처가 희생되였으며 마을사람 5명이 체포되였다.

야스가와의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을 향해 진군할무렵 봉오동에 주둔하고있던 홍범도련합부대 300여명은 이미 전투배치를 끝낸 상태였다. 사령관 홍범도가 거느린 부대와 지휘부는 상촌 서산에, 최명록부대는 북동과 남동 동산에, 신민단부대는 남산에 배치하여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리천오의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강산모의 제2중대는 동산에, 강시범의 제3중대는 북산에, 조권식의 제4중대는 서산남단에 각기 매복하였다. 백성들은 홍범도의 명령으로 모두 피신되여있었다. 일본군을 매복권내에 끌여들이기 위하여 리화일분대를 고려령북측 1200메터 지점과 그 동북촌락에 매복시켜놓고있었다.

 홍범도장군


홍범도장군이 1922년 러시아 불라고베시첸스끄에서 지낼 때 현지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홍범도(洪範圖)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부근의 한 가난한 농부가정에서 태여났다. 집이 함경남도 갑산으로 이사한후 젊은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갑산은 험준한 산골이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신묘한 검술과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가진 그는 직업포수들의 단체인 안산사 “포수계”에 가입하였고 포연대장으로 추대되여 직업포수계의 두령으로 되었다. 그는 인품이 당당했고 정신이 꿋꿋했으며 장대한 체구와 불의에 굽힐줄 모르는 의협심이 있는 사람으로 린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난했기에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천성이 름름한 쾌남이였다.

홍범도가 갑산지대에서 “척왜(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집하여 기의한것은 륭희원년(1907년)도 저물어가던 때였다. 그해 9월 7일에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했다. 민간에 있는 무기, 화승총을 회수하기 위하여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이것은 산간지방에서 수렵을 주업으로 삼고 근근득식 하는 산포수들에게는 청천벽력이였다. 이 법령은 쌍이고 쌓인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거나 다를바 없었다. 홍범도를 위수로 하는 삼수, 갑산 등지의 포수들은 의거하여 일떠났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는 의병을 지휘하여 총기를 회수하려 온 회수군을 한놈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버렸다. 이튿날에는 북청수비대소속 1대가 호위하는 우편마차를 중도에서 습격하였다.

1907년 8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홍범도를 비롯한 반일의병들의 무장투쟁의 봉화는 조선 방방곳곳에서 드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안달아난 왜적들은 의병대에 대한 참혹한 “토벌”을 감해하는 한편 반일력량을 분화, 와해시키려고 회유책을 썼다. 일제침략자들의 갖은 음모를 분쇄하고 시련을 이겨낸 홍범도와 그의 이병대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반일기치를 추켜들고 무장투쟁을 견지해나갔다.

1909년 겨울, 홍범도의병대에서는 다수의 의병들이 해산하여 돌아가고 모든 군사물자가 단절되였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 홍범도는 소수의 정예대오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 십칠도구 왕가구로 전략이동했다. 여기서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사냥하여 의식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의병대본영을 건설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탄약을 제작하기도 했다.

1911년 3월 홍범도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장백현 왕가구 둔전지에서 3년세월을 보낸 홍범도는 자그마한 의병대를 거느리고 로씨야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궂은 일, 고된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장장 6년이란 세월을 두고 일했다. 부두에서, 금전판에서, 어선에서, 경작지에서 피땀흘려 번돈 3050루블로 오련발초 17자루와 탄약을 사가지고 중국 밀산 김형무농장에 와서 농사하였다. 3년 농사하며 사냥하여 얻은 귀중한 약재를 팔아 무기와 탄약을 더 샀다. 홍범도는 드디여 106명을 무장시키게 되었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이전의 의병과 포수들을 단합해서 “대한독립군”을 결성, 사령으로 추대받았다. 독립군은 400여명 병력을 가지고있었다. 1919년 8월 홍범도는 200명 대원을 거느리고 야밤에 조선 혜산을 맹렬히 공격, 수십명의 적군을 소멸하고 병영에 불을 질러놓고 무기, 탄약, 군수품을 로획했다. 그해 10월에는 만포진을 습격, 1920년 2월, 독립군군련합부대는 불의에 회령의 왜군을 기습하였다. 3월에는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많은 무기를 들여온후 근거지를 왕청으로 옮겼다. 4월에는 연해주로부터 700여자루의 보총을 반입하여 독립군부대를 무장시켰다.

새장비로 무장한 독립군은 빈번히 일제침략자들을 타격하였다. 조선통독부의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1월부터 6월까지사이에 전후 32차나 되는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련합부대가 홍범도장군의 지휘밑에 연변땅에서 벌린 첫 저격전이였다. 봉오동전투후 홍범도는 또 김좌진장군 등과 함께 청산리대첩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청산리전투가 끝난후 홍범도장군은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에서 출발하여 호림현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했다. 1921년 1월 로씨야에 철퇴한 반일부대들은 이르꾸쯔크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싸할린부대를 위수로한 대한의용군의 파벌투쟁으로 하여 발생된 “자유시참변”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두파의 렵합을 주장하고 분렬을 반대하였다. 그후 그는 동양비서부가 지도하는 고려군정청의 징집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부대는 쏘련붉은군대 제5군단에 배속되였고 그는 조선인려단 제2련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여 백파군을 섬멸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21년 러시야 크레믈리궁앞에 선 홍범도장군.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공산주의혁명조직 제1차대회”에 52명 조선인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레닌을 만나보았다. 이는 홍범도가 구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는 계기로 되었다.

홍범도는 백파군을 소멸하는데 공을 세웠다. 붉은군대의 군인들을 제대시켜 인력을 경제건설에 투입하였는데 조선인려단도 해산되고 고령인 홍범도는 군인생활을 끝마치고 제대하여 전사들을 거느리고 연해주에서 조선동포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조직, 농촌건설에 힘썼고 1929년에는 쏘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러시아 우즈베크공화국 알마타에 있는 홍범도장군의 묘지
.

1929년부터 년로한 홍범도는 년금생활로 만년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피쥘오르다시에서 별세하였다.

연변에서의 일제와의 첫 겨룸


봉오동 중촌 옛터.

물파란 호면에 주변의 산자락이 곱게 비껴있는 봉오동저수지, 멀리 초모정자산의 번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안겨온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기만하다.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이 곳이 연변땅에서 대일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곳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가. 그번 전투는 전 중국에서 일제와 격돌한 첫 전투였다.

저수지둑아래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지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놓고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인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붇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중공도문시위통전부
도문시 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

 1993년 6월 7일

유적비밑면은 벽돌로 쌍았는데 아직 콩크리트를 바르지 않은 비완성상태였다. 기념비 왼켠에 름름한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있는데 하늘을 날아오를 기상이여서 그젠날 영웅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것 같아 보였다. 한아름으로는 안을수 없는 보기에 끼끗한 소나무였다.

1920년 6월 7일 아침 4시 45분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에서 최명국일행과 교전하다가 계속 추격하여 왔는데 전위중대가 드디여 리화일부대의 매복권에 들어서게 되었다. 리화일부대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후 쏜살같이 고려툰 뒤산 산등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쪽을 후퇴해버렸다. 돌연습격을 받은 일제는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배해가지고 리화일부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추격하여 8시 30분경에 하촌마을에 들어섰으나 이미 온 마을이 텅 비여있을 때였다. 헛물을 켠 일본군은 골짜기를 따라 중촌으로 진격했다. 중촌에서 늦은 아침을 지어먹은 일본군은 계속하여 상촌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마구 총탄을 퍼부어 많은 살상자를 냈으며 한 농민의 수레를 빼앗아 기관총을 싣고 그 농민을 길잡이로 상촌을 향해 진격했다. 낮 12시경 일본군 척후병들이 반일부대의 매복권내에 들어섰고 오후 1시경에 일군 추격대 전부가 드디여 매복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상촌에서 일본군은 북동과 남동을 수색했으나 마을은 텅 비여 사람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그제야 독립군의 매복전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남동 앞골짜기로 하여 비파동으로 퇴각하려 시도하였다.

“땅!”

산골짜기를 찢는 맵짠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지휘관 한놈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총소리는 홍범도장군이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산과 동산에서 분노의 총탄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일본군은 두정의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산을 향해 돌격했다. 이때 서산지휘소에서 작은 붉은 수기를 흔드니 골짜기 홈채기에 매복했던 허형근소대가 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허형근소대의 매복지점으로 돌격하고 다른 한갈래는 서산으로 계속하여 돌격해갔다. 이에 허형근소대는 접근하는 적들을 대응하는 한편 서산을 향해 돌격하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드디여 적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허형근소대를 덮쳤다.

이번에는 동산에 매복해있던 최명록부대가 허형근소대에 덮쳐드는 일본군주력부대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동서로 되는 교차사격권에 든 일본군은 황급히 퇴각하려 했다. 이때 남산에 매복해있던 신민단부대가 적을 향해 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동서남 삼면의 교차사격을 받게 되었고 남쪽의 퇴로까지 차단되였다. 일본군은 쩔쩔매다가 병력을 집중하여 동쪽방향으로 퇴각로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때는 오후 4시 20분경이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다란 우박이 폭풍과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빌어 흩어진 부대를 긁어보아가지고 비파동으로 줄해랑을 놓았다.

반일부대도 억수로 퍼붓는 우박과 비 그리고 전투에서 지쳤는지라 더는 추격하지 않고 싸움터를 수숩한후 왕청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봉오동전투의 첩보를 보도한 상해의 <독립신문>

봉오동전투는 반일련합군의 대승로 끝났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자를 격파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이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는 또 연변의 반일무장부대들의 첫 련합작전이였다. 1920년 3월 홍범도는 조선국내에 대한 진공작전을 효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대한의군단의 본영을 명멸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로 옮기고 당시 연변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켰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와 손잡고 군무위원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회군과 련합하여 정일 제1사령부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최진동과의 련합을 도모했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 11일 홍범도, 최진동 등 북로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도합 4개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은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련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5월 28일에는 대한의군단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련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사령부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두었으며 병력을 집결하여 강력한 조선국내진격을 계획하고 중요간부와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광범한 대중들에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무장을 들고 굳게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침략자라도 격파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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