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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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2014년 02월 07일 10시 30분  조회:1850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일제시대 서울서대문형무소.

공산당 자파(自派)중심 만주총국 편성하고
일제의 야만적탄압으로 동만청년동맹 해체

당내 파벌투쟁

조선공산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던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성립되던 그날부터 만주총국을 화요파중심으로 조직하려고 했으나 세력이 막강한 상해파와 청년운동에서 우세를 차지하고있는 엠엘파가 있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 김찬 등은 상해파의 윤자영, 김하구, 엠엘파의 김응섭, 이르쿠쯔파의 김철훈 등을 흡수하여 표면상에서 각파로 조성되여 보이는 통일총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실제상 화요파가 의연히 책임비서, 조직부장, 선전부장(상해파의 윤자영이 병을 구실로 선전부장자리를 내놓아 후임으로 화요파의 김동명이 부임), 위원 등을 차지하게 되어 령도권이 화요파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후에 엠엘파의 박윤서를 군사부장으로 보충선거하였으나 결과는 화요파와 엠엘파간의 모순을 격화시켰을뿐이였다.

1926년 5월 만주총국에서는 김동명(화요파)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엠엘파에서는 이미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를 조직하고 실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있으면서도 김동명은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와 아무런 상론도 없이 김해일, 강우, 홍원석, 한진, 전승우, 최동욱, 리주화, 김훈, 김동명 등 9명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구성하였다. 이에 엠엘파의 박윤서는 자신이 만주총국에 들어가지 못한데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김동명에게 “개별행동을 취하여 별개의 공청을 조직했다”고 항의해 나섰다. 상해파에서도 화요파의 이런 처사에 대해 의견이 있었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한때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27년 8월 김동명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선전부장으로 부임된후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의 책임비서를 엠엘파의 리종희가 맡아보게 되었다. 리종희는 김동명이 제의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명단을 무시하고 리윤수, 박사, 강진, 한익국, 김광근, 한사빈, 박병희 등을 위원으로 제기했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최원택은 리종희에게 원래의 결정을 집행할것을 명령했으나 리종희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내에 파벌투쟁이 있다는것을 구실로 최원택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리하여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서울, 상해파)사이의 내부모순은 격화되였다.

1927년 10월 2일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주도하던 최원택을 비롯한 주요한 간부들이 일거에 검거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아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습니다. 거기에다 창립당시부터 잠재해있던 여러 파들 사이의 모순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여 각파에서는 ‘자파중심(自派中心)’으로 혁명세력을 편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당내 여러 파들이 령도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였던 첨예했던 모순을 피력했다.

1927년 10월 9일 만주총국의 간부들인 김하구, 주건, 리신, 정창순, 김완, 정을산 등은 녕안현 장하(章河)의 서병택네 집에 모여 금후의 사업방안을 토의했다. 회의에선 우선 리순, 정창순, 김한호 등 3명을 연변에 파견하여 검거된 당원들을 위문하고 기층조직을 재건하면서 일제와 지방정부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조직부장에 전룡락, 선전부장에 김봉만을 림시로 보충선거했다. 동만구역국의 사업은 남아있는 당원들이 잠시 책임지기로 했다. 만주총국과 동만도(1928년 1월 구역국을 도로 고쳤듬) 가부사이이 련계는 림민호, 전룡락, 김기철(김만선) 등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3개의 만주총국

림민호, 김기철 등은 연길현 옹성라자에 와서 리순(엠엘파) 등과 토의한후 금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동만도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엠엘파) 가운데서 유력자를 선발하여 등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엠엘파의 본위주의의 경향이였다. 그와 반대로 상해파의 리환수, 주건, 김희창 등은 상해파 가운데서 만주총국과 동만도의 간부를 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주총국과 교섭했다. “10.2”사건-즉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에서 별로 손실을 입지 않은 엠엘파와 서상파는 령도권을 놓고 점차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는데 모순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화요파는 비록 “10.2”사건에서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김찬의 지도밑에서 만주총국을 회복하였다. 후보위원으로 있던 리동산이 책입비서를 맡고 김성득(백파)이 조직부장을, 김홍선(김홍한)이 선전부장을, 최충호, 진허, 리우영 등이 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화요파일색의 만주총국이였다.

이에 박윤서는 조선공산당중앙에 화요파의 “전형행위”를 소송하고 엠엘파로 구성된 만주총국명단을 제기하였다. 당시 엠엘파가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책임비서 안광천(엠엘파) 등은 1928년 3월 화요파의 만주총국을 부정하고 엠엘파가 제기한 만주총국간부명단(첵임비서 리경호, 위원 박기석, 박윤서, 김영식, 리순)을 비준했다. 동만도의 간부로는 김기석, 최종학, 김진탁, 리순, 동만도공청회 간부로는 리정만을 선임하였다. 이러한 간부임명에 대해 화요파는 승인하지 않으면서 원래의 만주총국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구에서 엠엘파총국과 화요파총국이 동시에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1927년 8-9월 서울파와 상해파는 련합하여 “재만조선공산주의동맹”을 결성, 리동휘, 윤자영, 리운혁, 장도정, 최동욱, 김철수, 김영만 등으로 지도소조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북풍파의 일부 성원들은 비록 “10.2”사건에서 체포되고 수령인 김봉익도 울라지보스또크로 피신간 정황이였으나 한상묵, 류운섭, 최화봉, 황욱(황금달) 등은 다시 일어나 조직을 회복하였다.

11월 중순 그들은 한상묵을 책임비서로 하는 북풍파당조직을 성립하고 울라지보스또크에 피신해있는 김봉익과 련계를 달아 임무를 접수하였다. 북풍파에서는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와 련계가 없이 자체로 조직을 확대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민성보》에 문장을 발표하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죄악을 폭로하고 조선인군중을 선동하여 사회주의혁명에로 궐기시켰다. 1928년에는 “5.1”절을 계기로 반일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들의 활동을 감시해오던 일본경찰들은 5월 10일 밤 8시 30분에 수색망을 늘여 북풍파성원들을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원래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북풍파는 철저히 파괴되고말았다.

“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습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마레주의의 전파와 조선공산당조직이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연변에서의 청년운동도 생기발랄히 발전하였다. 연변지구에서의 청년운동의 비약적발전은 통일된 청년조직의 발족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1926년 1월 25일,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룡정의 시천교강당에 모여서 동만청년총련맹의 창립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동만청년련맹의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합리한 사회생활의 지적교육과 실지훈련을 목적으로 한다.
(2) 우리는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대동단결에 힘쓴다.
(3) 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신문화의 향상에 힘쓴다.

총련맹의 간부진영은 다음과 같다.

림시의장 박재하
서기 김소연
규약기초위원 리주화, 김소연, 김소광
선언 및 강력기초위원 리린구, 김봉익, 주채희
집행위원 리주하 이하 15명

동만청년련맹은 창립된후 약 반년동안 독자적인 청년운동을 벌리다가 1926년 10월 동만구역국과 고려공산청년회 구역국이 설치된후 직접 그 령도를 접수하게 되었다. 동만청년련맹은 연변지구청년운동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조직확대와 회원흡수에 모를 박았다. 1928년 1월 1일에 정기대회에서 동만청년총련맹을 “동만청년총동맹”으로 개칭, 단일동맹수는 24개로 급속히 늘어났고 5000여명 회원이 있었다. 1928년 8월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진영을 보명 중앙집행위원장, 중앙집행위원 22명 가운데서 공산당원과 공청원이 13명이고 무소속은 9명뿐이였다. 이렇듯 동만청년총동맹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령도하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산하의 표면단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조직에서는 1928년 9월 2일이 “국제청년일”인것을 기회로 산하의 가장 유력한 합법단체인 동만조선청년총동맹을 동원하여 기념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일본총령사관에 탐지되여 대규모 검거체포되였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책임비서 리정만을 비롯한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간부와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 간부 51명, 동만청년총동맹 소속 및 기타 21명 총 72명이 검거투옥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하여 연변지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을 뒤이어 또 한차례의 준엄한 시련에 부딪쳤다.

동만청년총동맹도 문화부장 윤용준을 비롯한 12명의 간부를 잃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 손을 떠지 않았다. 1928년 10월 연변의 여러 지역에서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들을 검거투옥하기 위하여 지방치안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들씌워 공개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리하여 동만청년총동맹은 1928년 10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그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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