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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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장 반민생단투쟁.3
2014년 02월 12일 10시 37분  조회:2078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조선인부락을 토벌하는 일본군 <토벌대>.

가짜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원혼 통곡하고
사형장에서도   “공산당 만세!” 높이 웨쳐

억울한 원혼들

동만항일무장투쟁의 참가자 채광춘(蔡光春)은 반“민생단”투쟁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금창(金倉)에서 총살당한 사람은 정필국, 정동식, 최학철, 서노톨, 오일파이다. 5명은 구위서기거나 구위이상의 간부들이였다. 이들을 모두 묶어 가지런히 땅에 꿇어앉히였다. 나는 처음으로 총살임무를 집행하다나니 속이 떨리여 세 번째부터 제대로 맞히지 못하였다. 이때 반장은 “탄알이 귀중한데 랑비할수 없다”고 하면서 나의 사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총창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찔러죽였다...

우리가 잠을 자고있는데 보초병의 고함소리가 우리를 깨웠다. 일어나보니 정필국이 살아서 왔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령도를 만나게 해 줄수 없는가? 나는 민생단이 아니고 공산당원이요. 죽기가 아쉬운데 나를 남겨주오.”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령도는 그의 애걸을 들어주지 않고 우리를 보고 그를 데리고 가서 총살하라고 하였다. 후에 내가 가서 보니 그의 온 얼굴은 피흔적과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만약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적들이 있는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우리를 찾아와 두 번째로 총살당하겠는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이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붙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이것은 죽은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스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리였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 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리였다.

연변당사연구부문에서 1982년에 수집,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4퇀 전사 전흥문은 자신이 민생단으로 지목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차 대오를 떠나 달아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쪽지를 남기였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원이지 민생단원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잡으려는것은 백분의 백으로 틀린것이다. 나는 산에서 내려가지만 절대 주구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지만 나의 총은 계속 혁명해야 한다. 나는 총을 큰 나무밑에 묻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과연 그 나무밑에서 총을 찾게 되었다. 1945년 “8.15”광복후 주보중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하여 전흥문을 찾게 하였으며 그를 인민해방군의 패장으로 배치하였다고 한다.

1930년 음력 4월 중공훈춘현위 선전부장 김규봉이 민생단으로 체포되여 압송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주피구로 압송되는데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압송하던 유, 최 등 사람들은 적들의 토벌대가 덮쳐오는 것으로 오인한 나머지 김규봉을 버리고 급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김규봉은 홀로 그들을 따라 20리를 쫓아갔다. 그들을 따라잡은 김규봉은 “당신들을 파견하여 나를 체포하라 하였는데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교대하겠는가?”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 최 등 사람들은 갈길이 멀고 또 적들을 만나게 되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김규봉을 총살하여버렸다고 한다.

원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이 살해된 경우는 더욱 억울하다. 처창즈의 당지부서기 리억만(변절자)은 경상적으로 약담배를 피우며 공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김일환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이에 리억만은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 하면서 김일환을 민생단협의분자라고 거짓고발하였다. 1934년 11월의 어느날 리억만은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환을 즉시로 총살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때 구국군의 한사람이 대표로 나서더니 “김일환은 진정으로 항일하는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일년남아 같이 있었는데 그를 잘 알고있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국군의 모든 병사들이 총알을 재워들고 “누가 만약 김일환을 총살하면 우리는 곧 그 자의 머리를 박살내겠다.”고 웨쳐댔고 회의장의 기분은 매우 긴장되였다.

밤중에 리억만이가 한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김일환을 암살했다.

그날밤 총살을 집행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김일환은 사형될 때 “공산당 만세!”, “동지들은 혁명을 끝까지 하라!” 등의 구호를 웨쳤다 한다.

어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김일환뿐이랴. 가짜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한 수많은 억울한 원혼들이 울고 있다.

반"민생단"투쟁 종결

1935년에 이르러 “동만에 지금 있는 고려동지들은 누구나 모두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다. 만약 민생단의 공술이 없는 고려동지를 찾으려면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 위증민의 말은 추호도 과장이 아니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을 주도하여오던 중공동만특위령도자들도 누가 민생단이고 누가 공산당인지 똑똑히 분간할수 없게 되었다. 결국은 무지막지한 의심과 야만적인 핍박공술로 거의 모든 조선인항일혁명간부들에게 민생단협의를 들씌워놓은 셈이였다. 조선인간부들도 며칠이 지나지 않으면 곧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었으니 동만특위의 한족간부들은 큰 곤혹과 불안을 느끼지않을수 없었다. 하여 자기 신변의 “고려동지 간부들에 대하여 일부의 무서움까지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동만항일근거지와 공산당, 공청단 조직내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한족령도간부들은 결코 조직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 모두를 공술과 의심 그대로 배척하거나 체포할 수는 없었다.

동만의 모든 항일유격구가 기본상 조선인들로 이루어져있고 인민혁명군의 기본대오와 골간들도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때문에 조선인들에 대한 전체적인 배척과 탄압은 바로 동만항일혁명의 포기거나 자멸과 거의 같은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하여 민생단협의가 있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아무리 믿기 어렵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들과의 공존은 불가피한 사정이였고 그들과는 공동투쟁 역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재고하지 않을수 없었고 피비린 투쟁방법만이라도 완화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민생단공술과 협의가 있으면서도 혁명대오내에서 주요한 간부로 있은 조선인들로는 인민혁명군 제1퇀 퇀장 방성괴, 정치위원 림수산, 제2퇀 참모장 류란환, 김일성, 동만특위 부녀위원 황선일 등이 있었다.

당시 동만항일유격근거지 군중의 95%는 조선인이였다. 일제의 삼광정책의 잔혹한 유린속에서도 유격근거지인민과 군인들은 완강하게 유격근거지보위에 목숨바쳐 나섰다. 대다수가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에서 그처럼 생사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겠는가. 이러한 형세하에 중공만주성위 길동순시원 오평은 중공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유격구내의 절대다수 군중이 민생단이라면 이런 유격구역은 일찍 일본군에게 소멸되였을것이다”고 지적하면서 종자운을 비판하였다. 위중민도 만주성위에 보내는 편지에서 “과거 인민혁명군은 완전히 민생단의 령도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치상의 매우 큰 착오이다”고 종자운을 비판했다. 그후 종자운도 공청단만주성위에 편지를 보내여 위증민을 비판, “그들은 고려동지들을 완전히 체포하고 해결하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조건으로 공작을 철소하려고 계획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6월 17일 동만공산당, 공청단 특위가 제출한 보고서는 민생단이 “우리의 령도기관을 민생단의 기관으로 만들려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줄곧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생단의 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반“민생단”투쟁에서 매우 적극적이던 공청단동만특위 서기이며 제2군 제1퇀 정치위원인 주소동마저도 공청단성위에 보내는 편지(10월 23일)에서 “만약 동만에 그렇게 많은 민생단이 있다면 이 몇 년간의 영용한 반일투쟁은 계속될수 없었고 우리의 인민혁명군은 일찍 일제한테 가서 변절하였을것이며 언녕 폭동이 일어나 령도자로 있는 몇 명의 중국인을 죽여버리고 투항하려 갔을것이다”고 지적하였다.

1935년 5월 쏘련으로 떠난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은 그해 12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민생단들이 가끔 유격구에서 도망쳐 일본제국주의에게 가서 투항하지만 일제도 그들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아주 적은 민생단의 령수들만 믿고 하층군중은 믿지 않는다.) 일제가 그들을 붙잡으면 마찬가지로 고문하고 도살하기 때문에 민생단이 유격구에서 도망쳐간 것이 비교적 매우 적다...”고 했다.

하여 반“민생단”투쟁후기에는 민생단공술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체포하지 않았고 소위의 교육해석공작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마치 대오내에 민생단이 없어진것처럼 되었다.

1935년 9월 라자구유격구의 포기와 10월 서남부 처창즈유격구의 포기를 최후로 동만의 원래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전부 소실되였고 인민혁명군 제2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북만과 남만으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반“민생단”투쟁은 객관조건상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36년 2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에 반“민생단”투쟁 등 동만문제를 회보하고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 및 동만에 대한 새로운 지시를 가지고 위증민이 동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위증민은 “민생단문제에 있어서 동만 각 유격구에 민생단이 그와 같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하고 만약 그와같이 많았다면 유격구와 인민군대를 지금까지 유지하지 못하였을것이니 지금 신임하고 사용하라”는 지시를 전달, 이 전달을 듣고 조선인 마음속에 쌓여있던 공포는 해소되였다.

1936년 3월초 동만특위와 제2군은 안도현 미혼진에서 위증민의 주최하에 령도간부회의를 열고 중공중앙의 “8.1선언”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제3사를 새롭게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미혼진회의”직후에 신편 제3사단의 사단장 김일성 등은 무송현 마안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감시, 개조받고있던 민생단협의자 100여명에게 완전 무죄를 선포하고 그들 전부를 제3사단 부대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협의자들의 자백서, 심문서 등을 모두 깨끗이 불태워버렸는데 이는 반“민생단”투쟁의 최후종결을 선고한 것으로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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