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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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장 반일통일전선 무어
2014년 02월 12일 11시 14분  조회:2061  추천:0  작성자: 김철호

 
구국군명장 왕덕림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왼쪽으로부터)

유격대와 구국군 어깨겯고 싸워
각지에서 일본군 위만군 무찔러

대도회와 구국군

제1차 반“토벌”전에서 연변의 각 현 항일유격대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대오를 한층 성숙시켰을뿐만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쌓아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낼 견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가 약하고 적이 강한 참혹한 조건하에서 단결된 항전만이 승리를 취득할수 있다고 인식, 마땅히 구국군을 비롯한 반일부대와 단결하여 공동전선을 무어야 한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구국군과 한족반일군중들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인 대도회는 반일항전에 적극 나서면서 동만의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32년 3월 20일, 왕덕림의 구국군 250여명과 대도회 50여명은 로투구를 습격했다. 3월 30일에는 천보산광산을 습격하고 이튿날인 31일에는 왕덕림의 구국군 1500여명이 배초구를 공격했다.

4월 2일, 400여명 대도회무력은 삼도구를 습격하여 4월 8일까지 점령하고있었고 4월 8일에는 이도구(서성)를 습격, 중국공안분서 40여명 장병과 50여명 보위대원들이 봉기하여 대도회와 합류하여 일본경찰서를 습격하였다.

5월 9일에는 구국군과 대도회가 련합작전하여 달라자를 습격하고 이튿날인 5월 10일에는 구국군 220여명이 삼도만을 습격하였다. 6월 8일 구국군 200여명은 가야허일본경찰분서를 습격하였고 6월 14일에는 700여명 병력으로 삼도구를 다시 공격하여 일제가 무산수비대까지 동원하고 2차례의 비행공습까지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1932년 10월 27일 밤, 구국군 오의성부대 200여명은 쌍하진으로부터 목단촌을 경과하여 배초구를 습격하였고 11월 2일에는 대도회와 손을 잡고 동불사를 습격하였다.

“대도회 등 자발적인 대중무장과 구국군의 저항은 일제의 크나큰 장애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1932년 4월 19일 이까다가 이끄는 제19사단 1600여명의 간도파견대와 일본관동군 제10사단 1400여명 도합 3000여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두갈래로 연변에 쳐들어와 대도회와 구국군에 향해 대규모적인 포위토벌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화한 정규군에 의해 대도회가 괴멸되고 구국군도 괴사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들 수천명의 무장력량이 일제에 의해 비극을 맞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하여 일제의 연변침략이 견제되였고 동만 각 현 유격대건립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게 되었습니다.”

구국군과 대도회의 반일투쟁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교수의 긍정적인 평가였다.

항일의 기발을 추켜들고 연변지구에서 활동하던 구국군은 일제의 “포위토벌”로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1933년부터 중쏘변계로 밀리다가 쏘련으로 넘어간후 쏘련으로부터 관내로 철수해버리기 시작했다. 왕덕림과 공헌영 등이 이끄는 부대도 연변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구국군의 장병들은 의연히 남아있었는데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 등이 계속 남아있었다. 이들이 이끄는 구국군은 연변과 동녕, 녕안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통일적이 못되였는데 어떤 이는 항일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주저하면서 방황하고있었다. 이러한 장병들은 틀림없는 중요한 항일력량이였다.

제1차반“토벌”전에서 각 현 항일유격대는 구국군의 남아있는 부대를 쟁취하여 공동항일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동녕현소재지전투

1933년 9월, 김일성이 지휘하는 왕청, 훈춘 항일유격대의 110여명으로 조직된 결사대는 오의성, 시세영, 사충항이 이끄는 길림구국군과 리청천이 인솔하는 대한독립군부대와 련합작전하여 동녕현소재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련합부대의 병력은 3000여명이였다. 동녕현소재지에는 이사다가 이끄는 500여명 일본관동군 병력과 관퇀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병력외에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놈들은 대포와 비행기로 장비되여있었고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라자구를 떠난 원정부대는 며칠간의 시간을 로상에서 보낸후 9월 6일 밤부터 9월 7일 낮까지 동년현소재지전투를 벌리였다. 유격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국군과 제3퇀과 함께 동녕성 서대문밖 릉선에 2층으로 축성되여있는 서성포대를 쳐부실 임무를 맡았다.

유격대 지휘관 김일성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훈춘중대를 짜작골에 배치하고 왕청중대를 주공방향에 진출시켜 서산포대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밤 9시, 적진에 은밀히 접근한 유격대 파괴조는 진공의 신호총소리와 함께 적포대를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아간에는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왕청유격대는 련속하여 10여차의 진공을 발동하면서 혈전을 벌리였다. 그때를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을 봉쇄하게 하는 한편 일부 역량을 포대북쪽으로 우회시켜 맹렬한 작탄공격으로 서산포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동틀무렵이 다 되어서야 포대는 저항을 중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주력부대는 일본군수비대병영을 강철그물같은 봉쇄망으로 둘러싸고 적의 필사적인 반돌격시도를 가차없이 좌절시키였다. 일본군은 북문으로 도망쳤다.

편의대로 가장하고 시내에 미리부터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을 거쳐 시내에 돌입한 구국군부대들도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전투를 하였다.

...우리 부대는 결사적인 시가전으로 점령구역을 확대하면서 적들을 현성일각으로 압축하였다. 구국군도 이에 고무되여 병기공장을 점령하고 군수품적치장들을 습격하였다. 시가전은 여러 시간동안 계속되였다.

련합작전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였다고 인정한 나는 아군에 철수명령을 내리였다. 유격대는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현성밖으로 빠져나오는 구국군부대들을 화력으로 엄호하였다.

우리가 사충항려단장이 중상을 당한채 시내안에 쓰러져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이때였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 사지판에 려단장을 남겨둔채 시내밖으로 도망쳐버리였다. 부관도 그를 돌보지 않고 살구멍을 찾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최충국에게 사충항을 구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최충국은 그 명령을 결사적으로 집행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낸 사충항을 등에 업고 그를 화력으로 엄호하면서 부대를 고지쪽으로 무사히 빼돌리였다.

이번 전투는 동만유격대와 구국군 등 반일무장부대와의 가장 규모가 큰 한차례의 련합전투였다. 전투에서 유격대원들은 유격대의 영용왕강한 전투정신을 충분히 과시했으며 구국군과 기타 항일부대의 높은 신망을 얻었다.

동녕성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일본군과 위만군 150여명을 죽이고 7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위만경찰 2명을 죽이고 3명을 부상입혔다.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에서는 51명이 희생되고 19명이 상했다.

라자구공격전

1934년 6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군 제3퇀, 제4퇀의 부분적대원들, 수녕반일동맹군, 라자구일대의 사충항, 공헌영, 시세영, 리산협이 거느린 항일구국군은 도합 600여명으로 련합부대를 구성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을 들부시기로 하였다.

련합부대는 주보중과 김일성의 사회하에 적들을 소멸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련합군의 진공기미를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부근에 있는 소속부대 500여명을 라자구에 집결시켜 전호를 파고 포대를 쌓아놓고 저항할 준비를 하였다.

6월 26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부대는 부락서쪽의 평지에 매복하여 적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사도하자에 주둔하고있던 수녕반일동맹군과 항일구국군 사충항, 시세영 부대는 마을동산의 뒤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습격하였다. 위만군은 박격포로 아군의 진지를 포격하였으나 련합부대가 맹렬하게 반격하는바람에 하는 수없이 라자구거리로 도로 들어갔다. 이날 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적 30여명을 죽이고 보총 4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이튿날, 인민혁명군, 동맹군, 항일구국군의 지휘원들은 회의를 열고 세 개 부대를 편성하여 라자구를 공격할 전투방안을 짰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라자구공격전이 시작되였다. 제2부대는 라자구서쪽으로부터 거리에 쳐들어가 총 한방 쏘지 않고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경찰들을 포로하고 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들은 그 길로 제3부대와 련합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영부를 진공하였다.

제1부대는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는데 그것은 이번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고리였다. 그런데 적들의 포화가 어찌나 맹렬한지 일거에 쳐부실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구국군의 어떤 지휘원들은 동요되여 철퇴하자고 주장하였다. 구국군이 철퇴하면 아군은 매우 큰 손실을 받을것이였다. 인민혁명군전사들이 다시 한번 공격하였으나 여전히 서산포대를 점령할수 없었다.

이때 시가전도 긴장했다. 위만군은 아군을 반격하기 위하여 한 상점을 점령했다. 그러자 훈춘 4퇀의 부분적조선인전사들은 상점지붕에 올라가 뜨락을 지키는 적들에게 연길폭탄을 안기였다. 하지만 놈들은 그냥 완강하게 버티고있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였다.

전투가 시작된지 사흘째되는 날인 28일이였다. 전투를 시작하기전에 아군지휘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각 부대의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일거에 점령하기로 하였다. 적들은 박격포를 쏘아대고 비행기로 폭격하였다. 그래서 구국군은 많은 중상자를 냈다. 구국군은 동요했고 사기가 저락되였다. 이것을 본 인민혁명군 전사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꼭 점령하여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인민혁명군 전사들이 결사적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들어가 30분동안에 “난공불락의 보루”라고 큰 소리치던 적의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시가전에서 동요하던 구국군전사들이 갑자기 사기가 올라 용감히 적의 영부로 쳐들어갔다. 구국군은 인민혁명군과 협동작전하여 재빨리 위만군 영부를 짓부셔버렸다.

전투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하는수없이 투항하겠으니 담판할 대표를 파견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련합부대 지휘부에서는 적의 요구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반일부대에서 담판하러 오는 대표 한사람을 솨죽였다. 그러자 적들은 다시 진지를 사수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련합부대는 7주야의 격전을 거쳤지만 라자구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는 바람에 련합부대는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련합부대는 이번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이번 진공전을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는데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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