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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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2014년 02월 14일 10시 56분  조회:1959  추천:0  작성자: 김철호

 
미혼진밀영에서의 항일련군 제6사 조선인장병들.

조선인항일무장력 조선혁명력량 및 중국항일무장력량 이중사명 확인
김일성 등 조선공산주의자들 중한인의  통일된 무장대오건립을 주장

용맹한 서부파견대

1935년 9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추기“토벌”을 발동했다. 서부파견대는 액목에 온후 일만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리였다.

9월중순, 서부파견대는 액모현 청구자, 6호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려 적들을 소멸했다. 9월26일, 돈화현 관지서남에서 일만군을 매복습격하여 위만군 제11련대장 진옥청을 비롯한 일만군 10여명을 격살하고 군수물품을 로획했다. 10월에는 액목현 만리구, 삼도구에서 위만군과 두차례 교전하여 적들을 살상, 포로했다. 11월3일, 서부파견대는 액목현 청구자부근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전부 소멸하고 경기관총 1정, 보총 10자루, 권총 2자루, 탄알 600발을 로획했다.

청구자전투에서 서부파견대는 자신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해 적들로 하여금 크나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특히 전투중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왜놈만 죽인다!” 등 구호들을 은을 내여 많은 위만군 병사들이 인민혁명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지어 인민혁명군을 가만히 방조해주기가지 했다. 어떤 위만군 장령들은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셋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 본척해달라”고까지 하면서 일부러 교전을 피하기도 했다.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기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 쓰면 위만군이였다. 인민혁명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갑모를 쓴 일본군만을 골라서 갈기군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래서 인민혁명군은 위만군에 향해 인민혁명군과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련락했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인면혁명군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어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 것을 알리였다. 이런 상황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빨찌산이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 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들만 골라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신호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 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씩 한데모여서서 “지지가가”, “지지가가”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 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 장만 내도 무기, 탄약, 식량을 실어다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총만 요구할뿐 생명은 요구하지 않는다)”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 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려”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에 총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서부파견대는 11월 5일, 앵목현 로투구부근에서 일본군 11명과 자위단 몇놈을 죽였다. 또 액목현성에 쳐들어가 일만군 20여명을 소멸하고 많은 총과 탄알을 로획했다.

12월6일, 서부파견대는 돈화 관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유격활동을 범위를 더한층 확대하기로 결정, 리형박, 김일성이 제5군 제1사 제1퇀 제1련과 제2군 제3퇀 제4련, 제4퇀 제2련의 110여명으로 분견대를 조직, 이끌고 서남으로 진격하여 황니허, 교하지구에서 길돈철도를 습격하면서 아군의 정치영향력을 확대하고 나머지 부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이 부서에 따라 서부파견대 분견대는 12월 7일, 먼저 관지를 공격, 일본교관의 지휘하에 있는 위만경찰중대와 1시간남짓 격전을 벌리여 일본군교관 3명을 비롯한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위만경찰들이 분분히 총을 놓고 투항해 아군은 관지거리를 손쉽게 점령하게 되었다. 통구강자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소식을 듣고 즉시 증원병 200여명을 관지에 파견했다. 아군은 적들이 경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통구강자 동북부의 길 량켠에 매복해있다가 적들이 포위권안에 들어서자 맹렬히 사격, 대부분의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와 동시에 적들의 본영이 비여있는 틈을 타서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뒤돌아가 통구강자본부를 점령하게 했다.

관지와 통구강자를 점령한 아군은 3일동안 남아있으면서 군중대회를 열고 일제주구를 청산, 적들의 창고를 헤쳐 식량과 물자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련대는 관지와 통구강자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후 즉각 대량의 일만군과 위만경찰을 출병시켜 돈화 동부와 서부의 관지, 통구강자, 흑석, 맹목에 쳐들어왔다.

1936년 1월 7일, 아군은 흑석진을 공격, 3시간 남짓되는 격전을 벌려 적들의 방선을 철저히 쳐부수고 흑석진을 완전히 공략했다. 1월 8일 흑석진에서 철퇴한 아군은 이튿날(1월 9일) 앵목진을 진공, 2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액목진을 장악했다.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휘관 1명, 교관 2명 헌병 6명을 격살하고 위만군 50여명을 살상, 대량의 탄약과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부대는 군중대회를 열고 로획한 군수물자 일부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5년 11월부터 1936년 1월말까지 두달남짓되는 사이에 서부파견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수차의 전투를 벌려 적들의 “토벌”활동에 충격을 주면서 일부분의 유생력량을 훼멸, 이 지구에서의 일만군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광범한 군중들에게 항일구국 선전, 조직 공작을 펼쳐 2군과 5군의 정치적력량면을 확대, 군중들의 항일열정을 고무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민혁명군에 가입하여 부대의 력량을 장대시켰다. 2군 4퇀 2련의 서부원정을 시작할 때에는 일색으로 조선인전사들이였지만 이때에 와서는 많은 중국인전사들이 편입되여 보충되였다.

미혼진회의

1936년 2월 10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국공산당대표단은 “8.1선언”의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여러 반일의용군은 함께 전 중국적으로 통일된 항일련군을 조직하자”는 정신에 따라 “전 동북의 항일련군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초안”을 제출하고 반일통일전선의 수요에 적응하여 전 동북의 항일군대의 명칭을 동북인민혁명군으로부터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으로 고칠 것을 결정하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국공산당 국제대표단에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1936년 2월 5일, 흑룡강성 녕안현 경박호 북호두에 있는 제5군 군부에 도착하여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 주보중 등과 함께 항일련군편성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를 토의연구한후 5군 군부를 떠나 동만으로 오는 도중 경박호 남호두에서 녕안에서 회사한 제2군과 제5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제2군, 제5군 주요령도간부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성위를 철회하고 유격구에 따라 남만, 동만, 길동, 송강 등 4개 성위를 건립할데 관한 지시정신과 동북항일투쟁에 관계되는 일련의 정신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중공대표단의 “중한(中韩)민족은 련합하여 공동항일함으로써 중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조선인문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기본주장과 중공동만당조직에서는 한인“민생단”책략을 개변하여 망군노를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을 흡인하여 광범위한 항일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생단”문제에 대한 지시정신도 전달했다.

회의후 위증민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왕덕태, 리학충, 김일성 등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유격구의 미혼진에 이르렀다.

미혼진에 다달은 제2군의 주요한 간부들은 위증민의 사회하에 중공동만특위와 제2군 군, 사, 퇀급 간부들이 참석한 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전영림 등이 참석하였다.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만인민혁명군을 중한(中韩)항일련군으로 편성할 건의”를 전달한후 제2군 평선문제를 상세하게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이 광범위하게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적응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일치하게 결의했다. 동시에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항일련군 가운데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를 각기 건립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고 마땅히 항일련군의 이름으로 무장투쟁을 함께 조직하고 벌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8.1선언”과 “동북항일련군통일군대건제선언”을 충분히 토론한 기초에서 회의참가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편성할 것을 결정했다. 왕덕태가 군장으로 임명되고 위증민, 리학충, 류한흥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사와 군부직속교련퇀, 소년영을 두었다.

제1사는 원래의 제1퇀에 일부의 반일삼림대를 흡수하여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안봉학이 임명되고 주수동, 려백기, 박덕범 등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으며 아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겸)가 임명되였다. 제3사는 원래의 정2퇀과 제3퇀의 일부 및 전영림이 이끌던 항일의용군 6개 중대를 합쳐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고 산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7퇀 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마덕전이 임명되였다. 3월 20일, 사충항이 부대를 이끌고 항일련군 제2군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여 제4, 제5, 제6퇀이 인차 편성되였다. 사충항이 사장으로 임명되고 왕윤성, 진한장이 정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자균, 정치부주임에 왕송백, 제6퇀은 사부직속지휘에 두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은 전원이 2000여명이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절반을 차지했다.

군당위원회는 군정위, 군장, 군정치부주임 및 세 개 사의 정위, 사장 등 9명으로 조직되였는데 그들로는 위증민, 왕덕태,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왕윤성, 사충항, 김일성, 조아범 등이다. 위증민이 서기로 당선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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