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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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장 피눈물의 이민생활
2014년 02월 16일 10시 24분  조회:2542  추천:0  작성자: 김철호

 
1941년 연길현(지금의 안도현) 명월구 도안촌의 개척민부락.

속임수에 걸려들어 강제이주되여온 조선 이주민들
“출하”  임무 완수 못하면 근로봉사에  끌려가기도

일제의 강제이민

“조선인의 동북에로의 대량적인 이주는 1931년 ‘9.18’사변이후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14년간인데 이 시기를 개괄하여 강제이민시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14년을 또 3개 시기로 세분할수 있는데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통제이민’시기이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집단이민’시기이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개척이민’시기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일제의 강제이민에 대한 분석이였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의 통제이민시기에 일제는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동북의 농업자원을 더 략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은 괴뢰만주국정부를 사촉하여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제정했다. 이 요강에 의하면 조선으로부터 해마다 1만세대 5만여명의 조선파산농민을 동북에 이주시키며 조선인 이민의 이주구역을 간도 및 동변도의 23개 현(1938년에는 19개 현을 더 확대하여 39개 현)으로 제한하며 중쏘변경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인농민을 강압적으로 지정한 구역에 이주시키는것이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에 조선이민경영기구인 “석만척식회사”를 세우고 괴뢰만주국의 신경(장춘)에 그의 집행회사인 “만석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세운후 새 이주민과 기주민들에 대한 통제와 집결, 그들에 대한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했다. 1937년 3월부터 만석척식회사는 연변지구의 왕청, 연길, 안도 그리고 료녕성 영구지구에 2339호, 1만 2149명의 이민을 수용하여 35개의 집단부락을 세웠다. 그리고 북만, 특히 중쏘국경지대에 산재하고있거나 류랑하고있는 조선인들을 “국방과 치안의 수요”라면서 영구, 류하, 환적, 왕야묘, 대함창 등 5개 지구에 집중시킨후 1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1016호의 4338명을 수용하였다.

1937년 일제는 수전경작을 위주로 하고있는 조선남부의 경기도 외 6개 도에서 2500호의 농호를 이민으로 선정하고 간도성과 봉천성 연구현구역에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1938년 7월에는 남만과 북만에 16개 이민현을 더 증가하였다. 1939년 12월에는 39개 현에만 이주하게 하던 규정을 철수하고 전 동북을 다 이민지점으로 확정하였다. 1940년 8월까지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만 3897호의 6만 1421명의 “집단, 집합이민”을 받아들여 동북 각지에 23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였다. 조선이주민은 1940년부터 북만을 중심으로 6450호, 1941년에는 2725호, 1942년에는 3462호 이주하여왔는데 1942년 12월말까지 동북의 조선인 인구는 151만 6000명, 1943년 6월에는 163만 3220명, 1944년 4월에는 165만 8572명, 동년 9월에는 175만 492명, 1945년 광복까지 약 210만명으로 증가되였다.

1940년 6월 일본인 이민경영을 담당하던 만주척식회사와 만석척식회사를 합병하여 “만주척식공사”로 개편하고 동북경내의 이주민과 이주사업을 통일적으로 관리하였다. 특히 1941년부터는 나날이 확대되는 저들의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농지조성계획”, “긴급농지조성계획”을 세우고 동료하, 제2송화강지구를 위주로 하는 동북 간지의 대소가경지를 개간하기에 광분했다.

조선이주민이 증가함에 따라 동북지구의 수전경작도 신속하게 확대회였는데 1935년 전 동북의 수전면적은 3만 5353헥타르에 벼산량은 8만 3517톤이던데로부터 1940년에는 수전면적이 8만 9134헥타르, 벼산량은 16만 5589톤, 1944년엔 수전면적이 다소 축소되여 8만 1108헥타르였으나 벼산량은 19만 124톤으로 증가되였다.

 

야만적인 량곡출하제

 
일본으로 략탈해가는 동북의 특산물.

일제는 “만주농업이민 100만호계획”을 조작하고 20년동안에 일본인 100만호, 500만명을 동북에 이민시키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제통치자들은 이주조선인을 통제하고 집결시키고 조선농민을 강제로 동북지방에 이주시키는 외에 위만정부와 결탁하여 조선농민들이 일군 토지를 함부로 략탈하여 일본개척단에게 주었다.

1936년 8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괴뢰만주국정부와 “만척”에서 략탈한 토지면적은 연변에서 1207.6헥타르, 목단강성에서 17만 3850헥타르, 안동성에서 2102헥타르나 되었다. 인구가 적은 개척단이 많은 토지를 점하고있어 부분적토지를 조선인농호와 한족농호에 소작주기도 했다. 하여 조선인농민과 기타 여러 민족 농민들은 일본개척단의 소작농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특히 “7.7”사변후 일제는 농민들에 대한 고리대착취를 다그쳤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은 대부금과 변돈을 갚을수가 없어서 자작농으로부터 일제식민지회사의 소작농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이른바 “략곡출하제”와 “식량배급제”로 동북의 여러 민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량곡출하”란 농민들이 일년내내 뼈빠지게 가꾸어 타작한 알곡을 최대한으로 략탈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이는것인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후에는 “결전징수방책”을 실시하여 동북의 량곡을 철저히 징수하려들었다. 지어는 무력적으로 농민들을 강박하여 량곡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는 이른바 “보은출하”로 량곡을 더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수전을 경작하는 조선인들은 벼를 몽땅 바친후 잡곡을 사서 먹게 했다. 일제는 최고한도로 생산량을 내오고 최저한도로 백성들의 배급을 줄이면서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미쳐 날뛰였다.

위만관리들과 경찰들은 출하기간이면 농호에 뛰여들어 온 집안을 휘딱 뒤지면서 어디에다 량식을 감추지 않았는가 수색하기가 일쑤였다. 촌공서의 관리나 경찰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쌀뒤주를 들추고 심지어 작대기에 색대를 맞추어 짚가리, 나무가리, 구들고래안, 지붕과 변소까지 들추었는데 일단 량식을 감춘 것이 드러나는 날이면 마구 때리고 붙잡아갔다. 연길현 구수하 영창동골안에서 산 박로인의 일제출하에 대한 구술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구수하 영창동에는 33호가 살고있었는데 말짱 길주, 성진, 명천 사람들이였다. 바심이 끝나면 촌공서와 분주소의 순사들이 나와 출하량을 매호에 정해주고는 아무 때까지 바치라고 하였다. 굶어죽어도 완수해야 했는데 완수하지 못하면 감옥에 붙잡혀갈판이였다. 대동아전쟁이 폭발한 뒤 더 혹심해졌는데 한번 바치고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있는대로 바쳐야 했다. 순사들이 다 긁어가면 끼니거리가 떨어지니깐 동네사람들은 순사들이 눈을 피해 골안에 찾아가 김치움처럼 굴을 파고 쌀독을 거기에 넣어두었다. 쌀독에 조, 옥수수, 콩, 보리, 수수 따위의 걷곡을 채워넣고 뚜껑을 잘 덮고는 흙으로 묻어버린 뒤 나무검불로 눈가림을 해놓았는데 그렇게 하고서야 분주소의 순사나 총공서의 관리들의 수색을 요행 피면해서 그걸고 겨울을 나고 밭갈이철에 씨종자로 할수 있었다. 그런데 출하를 완수하지 못해서 매맞고 구류당한 사람이 있었다. 반작을 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로 공출하는 출하는 고사하고 처음 출하도 완수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동네에 전조감이라는 량반이 있었는데 이미 일흔고개를 넘기고있었다. 어느해인가 그 량반댁에서 출하를 완수하지 못하자 분주소의 왜놈순사가 그 량반을 차렷을 시켜놓고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출하를 완수못하였거나 량식을 감춘 것이 발각되여 얻어맞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축이였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근로봉사에 끌려가는것이였다. 놈들은 출하를 완수하지 못한 사람과 량식을 감춘 사람들을 근로봉사에 보냈는데 촌공서의 사무원이 분대장으로 되어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근로봉사에 끌려간 사람들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근로봉사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하도 많았기에 근로봉사에 나갈 때면 모두들 죽는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1941년부터 주민들의 식량표준을 최대한 제한하는 “배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농민들은 피땀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쌀은 한알도 입에 대보지 못하고 털어바치였으며 그대신 보리, 감자, 옥수수 같은 잡곡을 타다가 끼니를 에워야 했다. 도시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이 이밥을 먹다가 밀정이나 주구에게 발각되면 “경제범”으로 몰려 징벌을 받았다.

기짓말에 속히워 온 이민들

ㅡ만주는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된다.
ㅡ로자는 물론 첫해의 량식, 종자 등을 선대해준다.
ㅡ소, 수레, 농기구도 선대해준다.
ㅡ몇해만 부지런히 일하면 자작농으로 될 수 있다.
ㅡ지금 거처할 집까지 지어놓고 당신들을 기다린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을 듣고 조선의 파산농민들은 땅이 흔하고 기름지다는 만주에 가 팔자를 고쳐보자고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지정해준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집까지 지어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새빨간 것짓말이였다.

“놈들에게 속았구나!”

격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디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하여 울며겨자먹기로 눌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득불 한족농민들 집에 얹혀살거나 거의 찌그러가는 방앗간, 고간 같은 데를 빌어 대수 손질하고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향을 떠날 때만 하여도 만주의 허허벌판 어디엔가에서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다수 농민들이 정작 도착한곳은 지세가 높은 산골같은데였다. 만선척삭회사에서 첫해에 종자와 식량, 농쟁기를 살돈을 선대해주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로 종자값과 선대한 돈 그리고 거기에 붙은 리자까지 갚아주어야 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이민들은 봄갈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집단이민에 대한 다큐멘터리사진촬영을 목적으로 5년간 심층조사를 벌려온 촬영가 리광평씨가 처음으로 발견한데 의하면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935년 음력 3월 연길현 6구 대말리구 남하마탕에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200세대 농민들을 사기수단으로 끌어들여 시험적으로 조선인집단이민부락을 세웠다고 한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에 넘어간 조선인농민들이 어찌 이들뿐이겟는가. 1937년 봄부터 경상북도의 문경, 상주, 봉화, 안동, 려천 등지에서만도 400~500호가 왕청현 동신향 전각류, 태양촌 등지에 이민으로 왔고 라자구에는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봄까지 600호, 1940년에 100호가 거짓말에 속아 들어왔다.

지금 연길에 살고있는 금년(2005년)에 83세의 채도식씨의 고향은 경상북도 산양면 현리 문경군에 있었는데 고향에 일가친척이 70여호나 있었다. 조실부모한 채도식씨는 백부님과 함께 고농살이를 하다가 팔자를 고쳐보려고 1938년 2월 27일 아침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기차역까지 배웅나오섰던 백부님이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통곡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기차에는 채도식씨처럼 고향을 등진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기차가 떠나자 렬차안은 울음바다로 되고말았다.

눈물과 한숨을 가득 실은 기차는 추풍령을 넘어 근 50시간을 달려 3월 1일 아침에야 도문에 들어섰다. 거기서 좀 멈춰섰던 기차는 다시 떠나 아침 9시경에 대흥구에 도착하였다. 대흥구에서 하루 쉬고 3월 2일 이른아침에 트럭을 타고 눈이 하얗게 깔린 산골을 100여킬로메터나 달려, 그것도 50킬로메터나 되는 무인지경을 경과하여 목적지인 사도하자 집단부락에 도착하였다. 집단부락주위에는 높다란 흙담을 쌓았는데 담밖에는 한길 넘는 해자를 파놓았고 동서남북 네곳에 대문을 달고 경찰의 감시밑에서 자위단원들이 보초를 서고있었다.

라자구에 이민으로 온 집들은 1937년 가을에는 150호, 1938년 3월에는 450호였는데 모두 6개 집단부락에 나뉘여 살았다고 한다. 집단부락과 집단부락들사이는 3~5킬로메터 되었는데 후에는 이민들이 너무 많아 한족부락에 나뉘여 살게 되었다.

채도식씨 일가는 한족집 곁방에 거처했었는데 6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방에 여섯 식솔이 들었다. 좁은 방에 크고 작은 가장집물을 놓고나니 발펼 자리도 없었다. 급선무는 봄갈이전에 집을 짓는것이였다.

3월말부터 언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4월초가 되어도 땅이 녹지 않아서 벽을 쌓을 수가 없었다. 토피를 만들자면 밭갈이전에 집을 못다 지을 것 같아서 큼직큼직한 흙덩이를 떠다가 개암나무로 엮어가며 벽을 쌓았다. 4~5일사이에 전부락에 흙집들이 세워졌다. 이런 집에 구들을 놓고 거적으로 문을 달고 이사를 했다.

이사온 첫날밤에야 여섯 식솔이 오래만에 다리를 펼고 쉴수 있었다. 구들이 뜨뜻했지만 갓지은 흙집이라 누기가 몹시 찼고 초벽을 못한 병에는 구멍이 숭숭하여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봄눈이 내리면서 바람이 불었다. 방안으로 눈이 날아들어와 덮은 이불이 축축이 젖었다. 그래도 이게 내집이라 생각하니 추운줄 몰랐다.

봄갈이가 시작되였다. 만선척식회사에서 봄갈이전에 매호에 소 한 마리씩 대부해주기로 했는데 소들을 미처 사들이지 못하였다. 요행 사온 소들가운데는 너무 어려서 아직 쟁기를 메울수 없는 소들도 있었다. 하는수 없이 네댓집에서 겨리를 무어 한전 씨붙임을 하는 한편 논을 풀었다. 보를 막고 물길을 째고 논에 물을 대였다. 채도식씨네 집에는 땅이 두쌍 차례졌는데 씨붙임을 제때에 할 것 같지 못해 온 식솔이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오곡과 남새를 심었다. 그야말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이고 들어오면서 죽을둥살둥 일에 달라붙었다. 일이 고되고 수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애벌김이 끝난 7월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질에 걸려 고생하였다. 그때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름에 보리를 조금 거두었다. 가을에는 벼, 조, 옥수수, 기장, 콩, 감자 등도 거두어들였다.

1941년부터 생활이 다소 안정되였으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게 되자 통제는 더욱 심해졌다. “출하”제가 실시된후부터는 왜놈들이 입쌀을 몽땅 빼앗아가는바람에 명절때나 잔치와 같은 경사에도 입쌀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래도 집짐승들을 길러 팔아서 아이들 월사금을 물고 비누, 소금 같은 것을 살수 있었으나 이젠 먹이가 없어서 짐승을 기를수도 없게 되었다.

1943년 여름에는 황충이 성해서 곡식잎들이 황충에게 다 갉아먹히워 버렸다. 산전에 심은 곡식들은 곰과 메돼지들이 덮쳐들어 모조리 절단내는 바람에 그해 농사는 거의 페농이 되다싶이 되었다. 그래서 그해의 “출하”임무를 완수할수 없었다. 그러자 놈들은 경찰을 풀어 집집을 수색하여 낟알을 몽땅 략탈해갔다. 이밥을 먹거자 입쌀을 감추어 두었다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 끌려가 물매를 맞기가 일쑤였다. 마을에 김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밥을 먹다가 경찰놈들에게 들켜 석달동안이나 류치장신세를 졌다.

“출하”를 바치면 돈을 주기는 했으나 그 돈으로 빚을 갚고나면 옷감이나 신을 살 돈도 없었다. 그리고 “출하”량에 따라 천을 주기로 되었는데 그것마저 관리놈들이 잘라먹다보니 실지 농민들에게는 별로 차례지지가 않았다. 1944년에 들어서서는 입을 옷이 없어서 이불을 뜯어 옷을 해입었고 이불솜으로 무명천을 짜서 여름철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떤 집에서는 여자들이 밖에 입고 나갈 치마가 없어서 치마 하나를 번갈아입었다. 그해 겨울에 권도찬이라는 27살나는 청년이 홀옷바람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얼어죽고말았다.

채도식씨가 겪고 본 이민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때 가는곳마다에서 펼쳐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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