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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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장 올기강전투와 천보산전투
2014년 02월 19일 18시 40분  조회:2158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유서깊은 력사의 강 올기강.


제2방면군 두만강 넘나들며 일본군 짓부시고
연변인민 고향에 돌아온 자제병 열렬히 환영

올기강전투

1939년 4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장백현 북대정자회의후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격, 대홍단전투 등을 벌리고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넜다.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오중흡의 제7퇀을 올기강서쪽지대에 배치하고 자신은 제8퇀과 경위련을 이끌고 두만강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동골, 휘풍동일대로 진격해 들어갔다. 부대가 휘풍동에 도착하자 집단부락 경찰대는 접전도 하지 않고 꼬리를 빼버려 아군은 손쉽게 집단부락을 점령했다. 아군은 화룡현 광평 등지를 휩쓸면서 10여개의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일만군경을 거듭 격파, 수많은 적을 소멸했다. 아군은 간 곳마다에서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일군중들은 자신들의 자제병이 고향에 온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각처에서 얻어맞은 일본군은 대부분를 움직여 검질기게 항일련군의 뒤를 쫓았다. 아군은 추격해오는 적을 페문툰부근에서 일망타진하기로 작전을 짠후 두만강상류의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에서 활동하고있는 제7퇀마저 불러들여 백리평북쪽의 동수골막바지에 집결시켜놓았다.

그때 백리평에는 가장 악질적인 토벌대 “정안군” 1개 련이 주둔하고있었다. 적들은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하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후 매일 페문툰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 교대로 나뉘여 다리목을 지키고있었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화룡현일대의 도로와 마을마다에 삼엄한 경계망을 늘여놓고있었다. 그때 화북전선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워 천황의 표창까지 받았다는 다이노라는 자가 “토벌대장”을 맡고있었다. 이자는 가슴팍에 아수라를 입묵해가지고 다니면서 “아수라”로 자칭하기도 하는 악착하기 그지없는자였다.

6월 10일 새벽 3시경, 동수골을 떠난 아군 300여명은 백일평 올기강기슭에 이르러 적들을 유인하고저 금점굴주위의 돌들을 짓밟아 놓은 다음 부근에 매복하였다. 올기강기슭 큰길을 사이두고 서편언덕 북쪽과 약 500메터 거리를 상거한 지점에 8퇀 정위 박덕산(김일)이 책임진 기관총소대와 8퇀을 일렬횡대로 매복시키고 맞은편 밀림지대에 오중흡의 7퇀과 경위련을 매복시켰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메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은 청산리골짜기에 있는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서쪽 영액령에서 동남으로 흘러나오는 강이다. 해란강은 베개봉서북쪽의 로리커호가 그 발원지대인데 올기강발원지의 북쪽 약 3킬로메터의 산너머에 있다. 올기강은 베개봉서쪽에서 흘러나와 약 25킬로메터 흘러 소마록하와 합수된후 홍기하로 이름을 바뀌여진다 올기강량쪽기슭은 갈숲으로 우거져있고 자동차길이 그 한옆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에는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놓여있었다. 매복전을 펼치기에는 제격인 지형이였다. 게다가 전사들이 모두 풀로 위장하고있었기에 가까이에서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안개가 서서히 거치기 시작하는 늦은 아침, 만단의 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일평쪽으로 내려가다가 총을 쏘았다. 드디여 백일평쪽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다이노가 거느린 정안군 한 개 련이 여러 정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기세사납게 나타났다. 때는 오전 8시경이였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의 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찬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으로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간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도랑옆에 쓰러졌습니다...

 올기강기슭은 순식간에 일본군시체로 너저분해졌다. 첫방에 얻어맞은 다이노대장은 살겠다고 금전굴로 기여들어갔다가 그곳에 매복해있던 아군 전사들에 의해 처단되였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울렸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기세 드높게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몇놈이 내뛰다가 우리 전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도관 이하 50여명을 소멸하고 대부분을 포로했다. 전리품은 기관총 4정, 보총 100여자루였으며 아군은 1명의 손실도 보지 않았다.

올기강전투의 승리는 연변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군중들은 전투의 승리를 열렬히 환호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련군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부대를 찾아왔다.

 천보산전투

 6월 29일, 제2방면군 제9퇀은 제2군 4사, 5사의 부분적 부대와 함께 천보산을 습격할 목적으로 300여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박덕범(4사 참모장), 최현(4사 1퇀 퇀장), 마덕전(제2방면군 9퇀 퇀장)은 부대를 이끌고 30일 저녁 삼면으로 천보산을 포위했다.

“9.18”사변후 천보산광산은 일본침략자들의 연변의 지하자원을 략탈하는 주요한 기지였다. 이리하여 놈들은 이곳에다 일본수비대와 위만군, 경찰부대 및 위만무장자위단을 주둔시켜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부대를 항일련군“토벌”을 위해 우심산으로 출동시키다나니 광산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니 네귀에 탐조등이 환히 켜져있어 어둠속에서 광산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정문으로 밤대거리 로동자들이 나가고있었다. 부대는 두패로 갈라져 한패는 천보산부락을 들이치고 다른 한패는 광산을 들이치기로 했다.

4사 1퇀 전사들은 출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광산에 이르러 보초병을 해제낀후 순식간에 광산구역으로 돌입해들어갔다. 눈깜빡할새에 광산에 있는 경찰들은 몽땅 생포하고 일본군수비대와 맞불질했다. 놈들의 저항을 완강했다. 전반 전투계획에 영행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소수의 전사들을 남겨 놈들과 계속하여 맞불질하게 하고 대부분 전사들은 광산의 설비들을 파괴하고 광산사무소를 습격하게 했다. 광산사무소를 점령한 전사들은 도끼로 금고자물쇠를 마스고 대량의 위만화페를 찾아내 마대에 담아 메고 나온 후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른 한패의 전사들은 퇴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천보산마을로 내려와 일본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상점, 량식점, 약방 등을 습격하여 대량의 량식, 천, 약품, 신 등을 로획했다. 경찰서를 들이친 전사들은 류치장문을 짓부시고 갇혀있던 로동자들을 구해냈다.

아군은 전투에서 광산보위단 단장 요시다를 포함한 15명의 일본놈들을 소멸하고 20여 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 후 아군은 광산에 불을 지르고 로동자들의 협조로 로획품을 운반하는데 그중 50여 명이 자진하여 항일련군에 가입했다. 임동자에 도착한후 생포한 놈들중 악질분자 다섯놈을 그 자리에서 처단해버리고 일부분 전리품을 당지 백성들과 짐을 지고온 로동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천보산전투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바 적의 통계에 의하면 이번 전투에서 그들이 입은 손실은 80여만원이상에 달하였다. 그후 천보산광산은 또 1년동안이나 생산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튿날 임동자수림속에서 행군할 차비를 하고있는데 보초선에서 련락병이 달려와 적정을 알렸다. 천보산골짜기를 향해 로투구쪽에서 200여명의 일본군이 몰려온다는것이였다. 쳐들어오는 적들은 관동군정예부대인데 최신무기로 장비하고있었다.

아군은 휴식을 포기하고 인차 철수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화룡현 십리평으로 철퇴하는 아군을 계속하여 추격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산골짜기와 강가에 숙영지를 정하고 여기저기 우등불을 피웠다.

아군은 먼저 소수의 대원들로 밤에 적들의 숙영지를 습격한 다음 진펄로 끌어내여 골탕을 먹이기로 작전했다. 어두운 밤, 10여명 전사들이 여러 패의 습격조로 나뉘여 적진에 돌입해들어가 보초병을 제껴치우고 천막에 접근하여 기관총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에서 적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적들은 대오를 수습한후 산에 올라붙어 총질했으나 습격대원들은 이미 적의 사격권내에서 벗어나 귀로에 오르고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뜰무렵이였다. 적들은 다시 산정으로 돌격해왔다. 그러나 이 산정에는 적을 유인할 소분대만 있을뿐 대부대는 수림을 지나 진펄을 건너고 없었다. 소분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기동령활하게 진펄쪽으로 철퇴했다. 앞에 죽음의 진펄이 펼쳐져있는줄을 감감 모르고있는 적들은 “도쯔께끼!”를 부르면서 미친 듯이 추격해왔다. 그러나 진펄에 들어선 왜놈들은 덫에 갖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강이까지 쑥쑥 빠지는 진펄에서 허우적거릴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진펄 저쪽에서 6정의 기관총이 복수의 불을 내뿜었다. 진펄에 갖힌 왜놈들은 어쩌지 못하고 총알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한놈까지 까눕힌후 아군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면서 유유히 삼림속으로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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