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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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장 주구청산투쟁
2014년 04월 14일 15시 16분  조회:2442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인민들 투쟁전렬에 나서서 피의 원한 풀고 피의 대가 받아내

길동군정대학

길동군정대학은 1945년말부터 준비하기 시작하여 1946년 1월 6일 연길에서 정식 설립되였다. 주보중이 교장을 맡고 옹문도, 강신태가 부교장을 맡았다. 길동군정대학을 세운 목적은 시급히 수요되는 청년군정간부를 양성하기 위한것이였다.

길동군정대학에서는 1946년 3월 20일, 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쳐 500여명 학생을 입학시켰다. 그중 조선족학생이 380명이였다.

1946년 7월, 길림군구의 결정에 좇아 원래의 항일군정대학본교 제3대대, 태항산 조선군정학교 간부반을 토대로 하여 세워진 조양천교도대, 조선의용군 제7지대에 세운 화전군정학교와 길동군정대학을 합병하여 동북군정학교 동만분교를 내왔다. 교사는 연길 북대영에 잡았다가 인차 왕청현 라자구에 옮겼다. 학생은 2600여명, 조선족학생이 71.5%를 차지하였다.

1946년 8월, 동만분교는 룡정에 옮겨왔다. 9월에 원 룡정은진중학교자리에 교사를 잡고 10월 18일부터 정식 제1기분과학습을 시작하였다. 중공길림성위와 길림군구의 결정에 따라 동북분교를 길림분교로 개칭, 주보중이 교장을, 진정인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8년 3월, 길림시가 해방되자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 군구가 길림시로 옮겨갔다. 이에 분교도 길림에 옮겨갔으며 학원들을 모두 부대에 편입시키고 길동분교는 동북군정대학 제4퇀으로 재편성, 치치할에 가서 분교와 합병하였다.

길림분교나 동만분교 시기에 군정대학이 길동지구에 자리잡고있는 원인으로 하여 습관적으로 줄곧 “길동군정대학”이라고 불렀다. 길동군정대학은 설립되여서부터 2년 4개월간 4기에 걸쳐 3700여명의 학원을 졸업시켜 부대에 수송했다. 길동군정대학은 해방전쟁의 전면적인 승리를 위하여 우수한 군사간부와 정치간부를 양성,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악질지주와 주구들을 청산

해방되자마자 연변인민들은 악질지주와 일제의 주구에 대한 청산투쟁에 귈기해나섰다. 이것은 기세드높은 군중운동으로 번져졌는데 주구청산투쟁과 감조감식투쟁의 결합은 농민들의 단순한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넘어가게 했고 공산당이 령도하는 군중사업이 커다란 성과를 취득하게 하였다.

화룡현 삼도구에는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대지주 리영춘이 있었다. 리영춘은 화룡현 덕화향 길지촌의 류가라는 한족집 돼지몰이군이였다. 리영춘은 남들보다 먼저 귀화입적한후 다른 사람을 동원시켜 입적시키고는 입적비를 받아먹었다. 1919년, 리영춘은 녀동생 리춘화를 동북군 화룡현보안퇀 련장 석중운에게 첩으로 바쳤다. 하여 석중운의 권세에 의거하여 토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차지하게 되자 리영춘은 화룡부근의 대금장에 이사하여 백호장을 담당하고 지방깡패로 되었다. 1931년에는 화룡현 명신사 사장으로 되었다. 차츰 리영춘은 1600여정보의 토지와 수천평방메터의 가옥을 가진 화룡현의 첫째가는 대지주로 되었다.

1945년 8월 20일, 일제가 망한지 며칠 안되여 리영춘은 지주 문덕창, 주회창 등과 결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그러모아 화룡현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문덕창이 회장으로 되고 리영춘, 주회창이 부회장이 되었다. 수하에 30여명 무장대를 두었다. 1945년 10월 2일, 남평일대의 조선족들이 로농청부동맹창립대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리영춘은 무장대를 보내여 탄압하게 하였다. 하여 9명의 사상자를 내는 류혈사건을 빚어냈다.

남평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한 화룡주둔 쏘련홍군은 10월 5일 쏘련홍군 20여명을 파견하여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해제하고 문덕창, 리영춘, 주회창, 두유상, 리영창 등을 체포하였다. 10월 10일, 인민군중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해 쏘련홍군은 리영춘과 리영찬을 화룡에 호송해다가 인민재판에 넘겼다. 그날 화룡 남가소학교운동장에서 리영춘을 재판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분노한 군중들은 앞다투어 리영춘의 죄악을 고소적발했다. 군중재판에 의해 그날 리영춘은 당장에서 처단되였다.

1946년 가을, 훈춘현인민정부에서는 전 현 여러 민족 인민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해 8000여명이 참가한 공개재판대회를 연후 친일악질지주 한희삼을 청산, 총살하였다.

한희삼은 훈춘현 경신구 소하전사람이였다. 1904년 그는 혈혈단신으로 훈춘 포대촌으로 왔다. 온 낯이 곰보투성이인 그를 사람들은 “한곰보”라고 불렀다. 땅 한뙈기도 없고 집 한칸도 없던 한희삼은 포대촌에서 5년동안 소장사로 사기쳐 거액의 돈을 모으게 되었다. 그 돈으로 1700무의 땅을 산후 호되게 빈고농민들을 착취했다. 정씨성의 로인은 10년동안 한희삼네 돼지를 먹이다가 지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한희삼은 약 한첩 써주지 않고 팽개쳐버렸다.

한희삼은 농민들의 반항을 탄압하고 유격대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 일제에게 달라붙어 총 13자루를 타내다가 무장자위단을 조직한후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무장대까지 가지게 된 한희삼은 더욱 미친 듯이 농민들의 반항과 지하당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무장대가 생겨서 3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이자의 손에 10여명의 유격대원이 살해되였다. 이자는 또 일제와 배합하여 10여차나 피비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1938년, 한희삼은 일본천황에게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 비행기를 사서 헌납하기까지 하였다.

토지개혁운동이 깊이있게 진행됨에 따라 연길현 세린하일대의 농민들은 투쟁의 예봉을 악질지부이며 대매국역적인 손영명에게 돌렸다. 1947년 3월, 혁명적농민들은 손영명의 죄악을 폭로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이 악질지주를 처단하였다.

봉천사람인 손영명의 백부 손부인은 광서년간에 세린하에 와 비적두목 손루와 한동아리가 되어 부당한 수단으로 숱한 돈을 끍어모아 벼락부자로 된 동시에 순관질을 하는 아들의 세력을 등대고 자지방을 차지한 대지주로 되었다. 이자의 유능한 보가사군인 손영명은 협잡질을 일삼으면서 세린하, 두도구, 이도구, 동불사 일대의 수한전 9000여헥타르와 산림 1700헥타르, 가옥 360칸을 차지했다. 손영명은 또 세린하에다 기름공장, 제분공장, 벽돌공장, 석회구이가마 등을 꾸려놓고있었고 연길에다는 “태화륭상졈과 “친일방식당”, 가목사에다는 “덕발동철공장”을 꾸려놓고있었다. 손영명의 집울안면적은 7000여평방메터도 더 되었는데 담장 네귀에 포대를 쌓았고 대문에는 문간보초를 세우고있었으며 집에다 보총과 단총 70여자루를 두고 10명 기병을 가지고있었다. 손영명은 소작인 1000여명, 소 1200여마리, 말 20여필, 마차 2대, 승용차 1대, 화물자동차 1대를 갖고있었고 70톤씩 넣을수 있는 량곡뒤주 7개나 있었다.

소작인과 머슴들에 대한 손영명이 착취는 지독했다. 이자는 여러 가지 명목의 가렴잡세를 받아냈는데 이를테면 보갑비, 툰비, 보초비, 방공비, 등유비, 결혼세 등 이루 헤라릴수 없었다. 고리대로는 봄에 량곡 한섬을 꿔주고는 가을에 석삼을 받으며 돈을 꿔주고는 량곡으로 받고 량곡을 꿔주고는 돈으로 받는것외에 꿔준 돈을 년말에는 매달 5푼리자에 본전을 합쳐 받는것이였다. 소를 1년동안 쓰게 하고는 콩 석섬을 받았고 하루동안 소를 쓰게 하고는 두자루의 품값을 받았다. 이밖에 이자는 길닦이, 집짓기, 과동먹이풀준비 등 힘겨운 일들을 모두 작인들에게 무상으로 시켰다.

“9.18”사변전 이자는 민국관리들을 등에 업고 무장자위단 40여명을 내세워 작인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괴뢰만주국이 건립되자 이자는 또 왜놈들과 위만관청에 무릎을 꿇고 달라붙어 무장자위단 40여명을 긁어모았으며 두도구경찰서와 야합하여 약수동, 대홍동 등지에서 44명 혁명자를 살해했다.

이 시기 각 현에서는 일본특무, 순사, 자위단장, 괴뢰경찰특무, 반역자 등을 잡아내여 청산하고 그 죄악에 근거하여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는바 투쟁이 치렬했으며 철저했다.

"해란강대참안"청산대회

1946년 8월, 연길현공작대는 장안구 하동에가 일제주구를 청산할데 대한 선전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가운데서 김신숙으로부터 몰래 간직해두었던 “하동자위단이 혁명동지를 참살한 사록”을 받았다. 이 사록은 구위에서 사업하다가 왜놈들의 혹형을 받아 사경에 이른 김신숙의 남편 김학군이 림종시에 남겨놓은 유물이였다. 김신숙은 남편의 유언대로 이 사록을 병속에 넣은후 깊숙이 파묻어두었다가 내놓은것이였다. 사록에는 살인귀들의 명단과 그들의 극악무도한 죄상이 낱낱이 기록되여있었다. 이 사록은 곧 연길현정부에 보고되였고 현정부에서는 조사조를 파견하여 유서에 적힌 내용에 따라 조사하였다. 하여 1931년 10월 15일부터 1932년 8월 7일까지 기간에 일본침략자와 그 주구들이 마반산, 하동, 화련리, 소영자, 화첨자 등지를 94차나 “토벌”하면서 1700여명의 혁명자와 반일군중들을 살해한 전대미문의 “해란강대학살사건”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었다. 조사를 거쳐 죄악이 큰 18명의 살인귀들을 체포하였다.

1946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중공연길현위에서는 길림성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연길시의 서광장에서 “해란강학살사건”청산대회를 열고 이 사건을 조작한 일제와 그 주구들의 죄행을 청산하기로 하였다. 청산대회준비처에서는 동북 각지의 피해자가족들에게  대회에 참가하여 악당들의 죄상을 까밝히도록 미리 통지를 하였다. 소영자, 하동, 화련리의 피해자가족은 물론 수십리, 수백리 떨어진곳에 있는 피해자가족들, 지어 조선에 있는 피해자가족들도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대회에 참가하러 왔다. 회의는 600여명 피해자가족과 1만여명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열리였다.

대회장주석대정면에는 “연길현해란강살인사건청산대회”라고 쓴 프랑카드가 걸려있고 주석대량켠에는 “살인귀를 잡아내고 그 죄악을 폭로규탄하자!”는 표어들이 씌여져있었다. 5일간의 대화에서 30여명 피해자가족들이 일제와 그 주구들의 죄상을 성토했다. 그들의 피눈물나는 성토는 1만여명 군중들의 크나큰 의분을 자아냈다. 첫날부터 하늘을 진감하는 구호소리속에서 대회가 들끓었다.

대회가 끝날 무렵 대회주석단대표 한동우가 대회에 18명의 범죄자명단을 공포, 처리방안을 내놓았다. 죄악이 극악한 최남순, 박희선, 리철우, 김동우, 박승준, 허남철, 황병윤 등 7명은 사형에 처하고 서봉묵은 무기형에, 허병선은 유기형 7년에, 박영춘은 유기형 5년에, 최성일, 허동룡, 윤승화, 허경규, 허동간, 박명호는 죄악이 크지 않고 죄를 승인하며 뉘우지는 태도가 좋기에 석방한다고 했다. 이에 군중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찬동했다.

살인귀들을 단죄한 이 청산대회는 인민들의 투지를 한결 높여주었고 반동파들의 잔인한 본성과 흉악한 몰골을 똑똑히 발가놓았을뿐만아니라 토지개혁을 유력하게 추동하였으며 향토를 보위하고 전 동북을 해방하는 싸움에 귈기해나서도록 연변인민을 고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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