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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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장.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1
2014년 07월 14일 14시 55분  조회:2950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중국인민해방군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에로
조선인장병들 동북해방전장에서 진붉은 피 휘뿌려

"3기공세"에서의 조선인장병들

1946년, 동북민주련군의 통일적인 편제에 든 조선인무장대오는 장춘제1차해방전투, 사평보위전과 라법-신참 저격전 등 전투에 참가하였다. 길동경비1려는 주력부대와 협동작전하여 라법-신참 계선에서 국민당군의 진공을 막음으로써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으며 북만과 동만의 련계를 차단하려는 국민당의 음모를 짓부시고 연길-라법, 라법-할빈간의 철도운수선을 보장, 아군의 대후방인 동만과 북만근거지를 보위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의 “3하강남”, “4보림강”전역에서 주력부대에 참가한 조선인전사들은 엄한을 무릅쓰고 송화강을 세차례나 건너 1월에는 치따무전투, 2월에는 성자가전투, 3월에는 덕혜와 농안간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동만독립사와 길동경비 2려 등 조선인부대는 한편으로는 길해선, 라기선 이남으로 출격하여 쌍하진, 쌍양 등 지구의 적거점을 공격함으로써 길림과 장춘의 적군이 남만근거지를 침공하지 못하게 제어하였고 또 길림동쪽으로 침공해오는 적군을 로야령일선에서 견제하였다. 다른 한편 화수림자, 부가툰, 려대방자 등 10여개의 적의 거점을 공격하고 130여개 촌을 해방, 그후 동만근거지와 남만근거지를 련결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1947년 5월, 해방전쟁은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으로 진입하였다.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전략적반공에 진입한 동북민주련군은 1947년 5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사이에 하기, 추기, 동기 세 번에 걸쳐 동북의 국민당군에 향해 전략적인 공세를 발동, 30여만의 적을 섬멸하고 적들을 장춘, 심양, 금주 등 몇 개의 거점에 몰아넣고 고립시켰다. 이 세 번의 공세에서 조선인장병들은 영용히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1947년 5월부터 7월 1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하기공세를 펼쳐 적 8만여명을 소멸하고 42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이 공세에서 동만의 조선인장병들은 길동지구의 부대들과 함께 선후하여 화전, 연통산, 반석, 이통, 쌍양, 로아령, 천강, 강밀봉, 대툰 등지에서 수십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길해철도 이남과 길돈철도 이동의 대부분 지역들을 해방하고 남만과 동만근거지를 하나로 이어놓았다. 쌍하진전투에서 독립사 제4퇀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치로하에서 적 120여명을 소멸하였다. 특히 로야령에서 독립사는 장개석의 제1강군이라고 불리우는 신1군과 10여일동안 치렬한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하기공세에서 동만독립사 제4퇀 6련같은 전투모범련과 오룡진 등 100여명의 전투영웅과 모범들이 나타났다.

독립4사(리홍광지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매하구일대의 국민당군 제60군 제184사를 전멸시키는 전투를 벌려 승리를 거둔후 5월 14일, 형제부대와 함께 공업도시 료원을 해방하였다.

1947년 9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추기공세를 발동, 적 6만 5000여명을 섬멸하고 17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추기공세에서 동북야전군은 전쟁형세의 발전에 적응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지방부대로부터 보충받았다. 연변, 목단강, 송강, 통화지구의 지방부대에서 싸우던 조선인장병 2만여명이 이때 야전군 각 종대에 편입되였다. 동만 독립사는 동북군구독립1사, 3사와 합쳐 10종대로, 리홍광지대는 동북군구 독립4사(후에 166사)로, 원 길동군구 독립 3퇀, 6퇀과 길남군분구 71퇀은 동북군구 독립6사(후에 156사)로, 송강군구 8퇀과 길남군분구 72퇀, 74퇀은 동북군구 동립11사(후에 164사)로 각기 편성되였다.

주력부대로 된 여러 조선인부대들은 주기공세에서 길림과 장춘 주변의 적 주력을 유인하여 운동전가운데서 섬멸하였다. 10종대 29사와 독립6사는 아군부대와 배합작전하여 길림주변의 강밀봉, 기반가, 우라가, 룡담산, 환희산, 단산자 등 지점을 공격하여 적을 길림시안에 몰아넣고 30사는 장춘주변의 덕혜진에 신속히 출격하여 아군부대와 함께 덕혜를 해방하고 다시 장춘이남에 진출하여 28사와 함께 중고, 철령, 장당 일대에서 장춘과 심양에서 쓸어나오는 적을 저격하였다. 특히 덕혜현소재지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제30사 6퇀 2영 영장 박종수 등 수많은 조선인전투영웅들이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1947년 12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이미 동북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고친 아군은 동기공세를 발동, 적 15만 6000여명을 섬멸하고 18개 도시와 600만 인구를 해방하였다.

3개월간의 동기공세에서 제10종대의 조선인장병들은 형제민족장병들과 어깨곁고 엄한을 무릅쓰고 남하하여 법고, 참무 등 현소재지를 포위하고 적 75사 만여명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심양으로부터 공주툰의 적을 지원하러 오는 적 신1군, 신6군을 견제하는 전투에서 4000여명의 적을 섬멸함으로써 형제부대가 공주툰에서 국민당 신5군을 전멸하도록 조건을 창조하여 주었다. 2월 19일, 10종대는 개원현 경운보에서 신6군 62사를 추격하여 7200여명을 섬멸하였으며 뒤이어 개원을 해방하고 적 3400여명을 섬멸하였다.

화룡현청년들로 조직된 제30사 99퇀 3영은 황화산에서 적 59사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고지쟁탈전을 벌려 끝내 142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형제부대의 적 62사를 섬멸하는 전투를 보장해주었다. 전투에서 교도원 김성룡과 8련 련장 김수억 등 수많은 조선인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리홍광지대도 심양, 철령 일대에서 운동전을 벌려 공주툰섬멸전과 사평해방전투를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왕청현 조선인농민들로 조직된 독립6사 7련은 인민영웅 김상범의 이름으로 명명된 모범전투련이다. 12월에 장춘동역의 적 또치까를 8분간에 까부시고 역을 점령하여 “전투모범련”칭호를 수여받았고 이듬해 1월 21일, 오마툰전투에서 일거에 적 한 개 영을 섬멸하여 집체대공1차를 세워 “맹타격, 맹추격의 용감한 부대”라는 축기를 수여받았다. 2월, “김상범련이 소속된 독립6사는 호가툰, 고점자 일선에서 길림으로부터 장춘으로 철퇴하는 적 60군의 주력을 맞받아 자기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적들과 영용히 싸웠다. “김상범련”의 기관총사수 정형련은 중상을 입고서도 화선을 떠나지 않고 단신으로 기관총을 휘둘러 적의 5차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50여명을 섬멸하였다. 인민영웅 주광문은 적들과의 백병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독립6사는 적 2000여명을 섬멸했다.

첫 붉은기를 사평성루에

아군의 “3기공세”에 기가 눌리운 국민당군은 몇 개 도시를 거점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사평에는 2만여명 적이 지키고있었는데 국민당군은 새로운 방어시설을 구축한후 증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리고있었다.

1948년 3월 21일 새벽 3시, 사평을 수복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해방군의 대포는 국민당군의 방어선과 또치까를 짓부셔버렸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종대 제2사 4퇀 1영의 제2련은 철도동쪽으로부터 성을 향해 공격하였다. 그들은 세겹이나 되는 철조망과 함정, 지뢰매장구역을 지난후 7메터 깊이의 해자를 넘어 적의 또치까를 폭파하면서 전진하였다. 전투에서 앞장선 폭파조 전사 9명이 모두 희생되였다. 뒤이어 제1반 반장 김동원이 거느린 두 번째 폭파조가 내달아 적들과 백병전을 벌리면서 돌격하여 제일 먼저 사평성루에 붉은기를 꽂고 부대의 돌파구를 열었다. 2련은 재빨리 돌파구를 통해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이때 기차역부근의 다리밑에 수축한 국민당군의 비밀또치까에서 맹렬한 사격이 터져나와 2련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김동원은 적의 또치까에 수류탄을 뿌리고 수류탄이 터지며 생긴 연막을 리용하여 적의 또치까에 접근한후 폭파약꾸레미를 또치까안에 밀어넣었다. 폭파소리와 함께 적의 비밀또치까는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2련은 적을 무찌르며 돌격하였다. 전투에서 2련은 100여명 적을 섬멸하고 400여명 포로하였으며 20여정의 기관총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그러나 2련은 김동원을 비롯하여 거지반 희생되여 3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인민해방군은 드디여 사평을 수복, 전투에서 적군 1만 9000여명을 소멸했다.

전투후 2련은 “돌격련”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김동원은 특등전투영웅으로 추천되고 “모택동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김동원이 거느린 1반은 “김동원영웅반”으로 명명되였다.

제2차 장춘해방전투

제2차 장춘해방전투는 아군이 전략적후퇴를 하였다가 1948년 4월에 다시 시작한 포위전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장춘포위전에 참가한 부대들로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종대와 제12종대의 주력부대들이였다. 동만의 독립6사도 이 포위전에 참가하였는데 이 사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독립6사 17퇀 3영은 장춘교외전투에서 이도하자, 잎담배공장, 양가점 일대에서 쌍양보안퇀의 400여명 적을 소멸하였고 대방신비행장을 점령하였다.

17퇀 포위권정면에는 건국대학, 건국묘, 조가산남령의 적수비군이 있었다. 17퇀은 그놈들을 상대로 소가보자로부터 수의대학이 위치해있는 탕도구에 이르는 구간의 포위경계임무를 맡았다. 17퇀 2영과 3영은 몽땅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졌는데 그들은 여러차례 적들의 포위돌파시도를 깨뜨렸다.

아군의 포위로 말미암아 독안에 든 쥐로 된 장춘시내의 국만당군대는 먹을것이 떨어져 사경에 이르렀다. 놈들은 포위를 뚫고 심양으로 도망칠 예산으로 여러차례나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번마다 아군에게 제지당하였다. 7월 6일 새벽 3시경, 한 개 사단이상의 적들이 자욱한 안개가 낀 기회를 빌어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아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였다. 독립 6사 17퇀 2영과 3영 7련 진지에만 하여도 두 개 영의 적들이 덮쳐왔다. 7련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7련 주력이 아직 전투에 뛰여들지 못한 정황하에서 전반 전사들을 인솔하여 적들과 근거리전투를 하였다. 적들이 30메터 가까이까지 덮쳐왔을 때 전사 엄도영은 쏜살같이 뛰여나가 적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하였다. 엄도영은 적 12명을 포로하여 진지에 넘겨주고는 계속 적진에 돌입하여 물중기 2정과 기관총 1정을 로획하였다. 한철혁반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돌격해나가 맞은켠쪽의 적의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위로부터 “강철8반”이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고 엄도영은 “강철용사”칭호를 받았다. 8반만 하여도 34명의 적을 소멸하고 23명을 포로하였을뿐만아니라 중기관총, 경기관총 4정, 보총 20자루, 수류탄 25개, 탄약 6000발을 로획하였다.

8반이 용감하게 싸울 때 7련도 전투에 뛰여들었다. 7련은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힌후까지 10여시간 싸워 적 한 개 영 이상의 병력으로 조직된 진공을 3차례나 물리쳤다. 적들은 포위를 돌파할 가망이 없게 되자 시내로 뒤꽁무니를 뺐다. 적정을 주시하던 3영 최봉준영장은 반돌격명령을 내렸다.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적들을 추격하였다. 8반의 전사들은 10명중 7명이나 부상당하였지만 계속 적을 추격하였다.

8련과 9련에서도 예비병력까지 몽땅 동원하여 적들을 추격하여 쓸어눕혔다. 적들은 또 포위되였다.

17퇀 2영과 3영의 조선인전사들은 적들의 여러차례 포위돌파를 짓부시고 적 424명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보총 34자루, 경기와 중기 6정, 척탄통 5개, 탄약 만여발을 로획하였다. 장춘포위전에서 17퇀에서만 해도 53명의 조선인용사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48년 10월 17일 밤 12시, 국민당군 제60군의 증택성군장은 장춘동쪽 방어구역에서 철거하고 아군에게 투항하였으며 동반부 방어구역을 아군 독립6사와 8시에 넘겨주었으며 10월 19일에는 동북행정 부사령이며 제1병퇀 사령 정동국, 참모장 룡군진, 제1병퇀 참모장 양우매도 신7군과 함께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장춘은 드디여 해방을 맞게 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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