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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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2015년 07월 27일 12시 20분  조회:1764  추천:0  작성자: 김철호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조선민족지도자들 연변의 정권건설 주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서 구역자치 주장


주덕해와 민족사무처

 

동북행정위원회는 1948년 4월 민족위원회에 민족사무처를 신설, 주덕해를 처장으로 임명했다. 민족사무처는 할빈시 남강 마가구에 자리잡고있었다. 민족사무처의 주요임무는 조선인들을 공산당의 주위에 묶어세운후 여러 민족과 단결하여 생산을 회복, 발전시키며 전선을 지원하는것이였다. 이 중대한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사무처에서는 조선인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간부양성에 힘을 몰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문공대를 세우고 자체신문인 “민주일보”를 간행하기도 했다.

1948년 7월 20일에 거행된 조선인간부학교 개학식에서 교장 주덕해는 동북 각지에서 선발되여 온 150명 학생들에게 학습을 잘 하여 인민의 훌륭한 근무원이 되여달라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다. 주덕해는“당의 건설”,“민족정책” 등 과목을 직접 강의하였다.

1949년 1월 학생들이 졸업하고 돌아갔다. 그때 학습을 마치고 돌아간 학생들은 북만 각지의 토지개혁과 지방사업에서 골간으로 되었다.

1949년 2월 10일, 민족사무처는 9개월 동안의 사명을 완수하고 해산되였다. 그날 주덕해는 민족사무처의 전체 일군들은 이제 곧 연변에 가서 연변의 당정부문에 배치될것이라고 선포했다. 아울러 문공대는 연변문공대와 합치게 되고 “민주일보”는 “연변일보”, 남만의 “단결일보”와 합쳐 “동북조선인민보”로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조선인간부학교도 연변에 나가 조선민족간부양성사업을 계속 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어 민족사무처 간부들은 연변에 나와 연변의 당정 중임을 지니게 되였다.

 

3급 인민정권 전면 수립

 

1948년 3월부터 조선인 림춘추(1948년 3월 27일 임명), 문정일(1949년 3월 7일 임명), 주덕해(1949년 3월 20일 임명. 연변지위서기 겸.)가 선후로 연변전원공서 전원직무를 맡고 연변에서의 정권건설사업을 주도하였다.

1948년 11월 15일, 동북일보는 “민주정권건설사업을 다그쳐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 동북행정위원회 제2차 행정회의의 결정을 전달하고 1949년 춘경전에 본지구에서 현, 구, 촌 3급인민대표대회와 정부위원회의 선거를 끝낼것을 요구하였다. 사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급 당조직은 반드시 민주운동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고 전당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민주운동에 참가하는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11월 중순부터 중공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동북국과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에 쫓아 촌급선거사업을 시험적으로 진행하기 시작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사업간부양성반을 꾸려 2878명의 선거사업간부를 양성, 그중 구급조리원이상간부 1049명, 행정간부 858명이였다. 그들로 조직된 선거공작대는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사업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시험공작에서 경험을 얻은후 촌급정권을 세우는 공작을 보편적으로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까지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사업이 기본상 끝났는바 왕청현의 7개 촌을 제외한 57개 가두, 548개 촌에 비교적 완정한 촌급인민정부가 세워졌다. 촌급선거공작에서 촌급정권이 기본군중의 수중에 장악되도록 보증하였으며 불순분자가 혼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민족, 성별 비례에도 중시를 돌렸다. 하여 촌급정권의 대표성과 대표의 광범성을 보장하였다.

선거공작을 통하여 가일층 군중을 교양하였고 정치에 참여하는 군중의 자각성과 적극성을 더욱 높였다. 인민군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높였고 각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였으며 생산을 발전시키려는 인민군중의 의욕을 북돋우었다.

촌급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된후 각 현에서 륙속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길림성민족사업회의

 

1949년초, 길림성위에서는 연변의 주요한 책임자들에게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내였다. 통지를 받은후 림춘추, 주덕해, 김세균, 리욱, 오훈 등은 인차 회의에 참가할 준비에 달라붙어 연변의 력사발전, 토지개혁정황, 혁명투쟁력사 등 방면의 자료를 수집하고 문건을 작성하였다.

연변인민들의 크나큰 기대를 안고 떠난 대표들은 1949년 1월 19일 아침차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성위일군들이 자동차를 타고나와 역광장에서 연변대표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이것은 연변의 최고급 책임자들에게 있어서는 최고급 대우였다. 연변에서 자동차를 타보지 못한 그들은 자기들이 타던 마차보다 자동차가 훨씬 빠르다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성초대소에 도착하자 대표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이부자리를 펴놓고 가져온 자료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월 21일, 길림성민족사업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대표들은 근 40명 되었는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였다. 진정인이 회의를 사회하고 주보중, 주덕해, 림춘추 등 많은 사람들이 연변의 건설문제에 대해 연설하였다.

주보중은 회의에서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후 조선인민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압박을 받았고 중국에 와서 또 중국착취계급의 착취를 받았기에 혁명성이 특별히 강하다는 것, 조선인민들은 중국의 항일투쟁가운데서 중국인민과 피로써 우의를 맺었다는 것, 자기의 피땀으로 연변을 개척한 연변조선인들은 반드시 연변을 잘 건설해야 하며 중국의 각 민족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연변대표들은 항일투쟁과 해방전쟁가운데서 세운 연변조선인들의 력사적공훈에 대해서 한결같이 긍정하고 연변의 전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전망에 대해 구김없이 토론하였다. 회의는 특히 연변에 건립될 정부의 규모에 대해 열렬한 토론은 진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중국 땅에 와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비장한 사실과 쏘련의 국가조직형식 등 실례를 들어가면서 연변을 가맹공화국형식으로 만들어 완전히 조선인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였다.

주덕해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우리 조선인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면서 놈들과 싸워온 것은 누구나 다 승인하는 사실이며 우리의 빛나는 력사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명기해야 할바는 우리가 혁명에 참가한 목적이다. 우리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혁명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압박과 착취를 없애고 로고대중의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 역시 손님으로, 지원병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민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력사가 부여한 의무를 다한 것이다. 피를 흘리는 싸움에서 이러하였다면 이후 건설가운데서도 마땅히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으로서 자기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특점에 따라 민족자치권을 향수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독립왕국을 꾸리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대표들은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정부를 창립하여 중국공산당과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충분한 민족자치권리를 향수하면서 연변을 보다 아름답게 건설하기로 의견을 통일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연변에서의 교육발전사업에 대해 토론하고 연변조선민족자신의 최고학부인 연변대학의 창건문제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고 우리 조선민족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발양하여 후대들의 교육사업에 큰 중시를 돌리기로 의견일치를 가져왔다.

회의기간 대표들이 장춘을 방문하는 기회에 림민호는 건국대학에 들려 많은 책을 구입하여 연변대학도서관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희의는 2월 4일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1949년 8월, 주보중은 운남성으로 전근되여가기 전에 중공중앙 모택동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여 “먼저 연길지구에서 민족자치를 실현” 할 것을 건의하였다.(1989년 길림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回憶周保中》의 p.268에서)

 

주덕해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출석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북경의 중남해에서 모택동의 사회하에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에는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계, 민주인사, 소수민족, 해외화교 등 23개 단위의 대표 134명이 참가했는데 소수민족대표로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조직조례”,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단위 및 대표인원수에 대한 규정” 등 문건을 채택했다.

9월 17일,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2차회의가 소집되였는데 회의에서 정치협상회의조직법초안, 공동강령초안, 정부조직초안 등이 기본적으로 채택되였다. 이 회의에서 신정치협상회의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라고 고쳤다.

주은래는 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열리기전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대한 몇가지 문제”라는 보고를 하였다. 보고에서 주은래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한족이 4억 이상으로 그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묘족, 이족, 조선족, 고산족 등 소수민족은 전국인구의 10%도 안된다. 물론 인구의 다소를 막론하고 다 평등하다, 우선 한족은 다른 민족의 종교, 언어, 풍속, 습관을 존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자치를 목표로 하는가, 아니면 자치범위를 초월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 민족정책의 한낱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우리는 민족자치를 주장한다. ...우리는 련방을 실시하지 않지만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여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하도록 한다.”고 강력히 지적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에는 각 당파, 인민단체, 각계, 각 민족 대표 662명이 참가했다. 조선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이 회의에 참가했다.

9월 29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 채택되였다. 공동강령에는 “각 소수민족의 집거지구에서는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바 민족집거구에서의 인구의 다소와 구역의 대소에 따라 각각 민족자치기관을 건립한다”고 명확히 규정되여 있었다.

공동강령을 토론할 때 주덕해는 중국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다고 표시하였다. 주덕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은 과거에 독립적민족이 아니였기에 쏘련의 민족문제와는 그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다고 천명했다.

회의기간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현상황을 소개함과 동시에 장래 민족문제에서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하여서도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민족간부를 양성할 문제, 민족지구의 민족관계문제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주덕해는 또 연변은 력사적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떤 지방의 한족(漢族)의 교육은 뒤떨어지고있으므로 소수민족도 한족(漢族)을 도와주어야 할 문제가 나선다고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또 각 민족의 발전과 단결문제도 언급하였다. 각 민족이 단결하여야만 경제상에서도 공동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경제가 발전되면 국가건설에 대하여서도 공헌이 클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거하였으며 모택동이 초안을 작성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선언”을 일치하게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나라의 명칭, 수도, 국기, 국장, 국가(國歌) 등도 결정하였다. 이러한 국가대사를 토론할적마다 주덕해는 조선민족인민을 대표하여 자신의 민주권리를 충분하게 행사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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