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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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상경룡천부(김철호)
2008년 09월 01일 16시 12분  조회:2109  추천:47  작성자: 김철호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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