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동네(외4수)/방순애
2019년 07월 29일 06시 28분 작성자: 문학닷컴
시
버드나무 동네(외4수)
- 방순애-
산촌 현관문
출석부를 달고 있다
신선 구름 알몸 문 열고 들어간다
가장자리에 앉은 바위 머리가 번뜩이여 산을 빛낸다
달이 웃을 때
그림자 뒷걸음치고
생각 굴리던 별 풀잎에 키스한다
진달래에 햇님 뜨고
퉁소 소리로 촌락은 아침을 입는다
시계바늘 분침 오늘도 백년 전 할배한테 카톡 전한다
가을 연가
엉킨 혈 매듭
강물 타고 졸졸 풀려
초록빛 다림
꾸겨진 마음을 펴고
일천 봉오리 눈에 들어와 점 된다
저 기러기떼
릴레이 경주를 하고
가슴의 불꽃은 하늘로 치솟는다
커피향기
젊은 바다는
보라 커피색의 바다
뱃머리에서 떠오르는 꿈의 파도
언어의 선박
돛을 올려 출항한다
그늘 스친 입술 토기에 입 맞춘다
칠선녀 옷 벗는 소리에 찰랑대는 소천지 차잔에 흘러든다
길 우
환하게 웃는 인터넷
튕겨오는 모니터 정원의 선들
건반 우에 떠있는 짙푸른 호수가에서 련꽃으로 핀다
삿갓 구름은
하늘이 모아온 정액
울컥 눈물이 작동한 하얀 빛 보석
트럭에 구슬 옷을 입히여 소풍하는 대지를 수놓는다
높은 산은 저울추다
기여가는 길과 강을 저울에 달고
련못에 내려와 하늘을 재단한다
황야
웅크린 나무
왕관을 벗어버리고
이끼 낀 바위돌 무지로 달려간다
별무리들 쏟아지는
황혼 사막의 메마른 호양나무들
동천 붉은 땅의 천년 꽃으로 된다
기복을 타는 락타가
백리 언덕을 주름잡는 구름 타고
삼라만상 얼굴에 핀 야청빛 짓눌렸던 광명을 늘군다
/료녕신문 2019년7월23일 발표
===================================================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무아의 기저에서 펼치는 환상의 랩들
방순애 첫하이퍼시집<<시간은 원이 되여>>에 부치는 편지
평론 허창렬(허인)
이모저모 살펴보면서ㅡ
십여년을 문학과는 쭈욱 담을 쌓고 지내오다가 요즘들어 조심스레 살펴본 조선족시단은 말그대로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아직 생소하고 낯선 얼굴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특히 중견시인으로 어엿이 자리매김을 하고서 맹활약중인 김승종 ,김영건 ,조광명 , 한영남 등 시인의 변화는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며 또한 놀라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란 구경 무엇인가 ?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볍게 단 한마디로 정의(定义)를 내릴수 없는 이 간거한 작업을 그들은 나름대로 소화해냈으며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한폭ㅡ 또 한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며 립체화며 수묵화를 개성있게 그려내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아직도 제 자리매김에 집착하고있는 여러 동우시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지않을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며칠전 필자는 연길에서 부쳐온 조선족시단의 첫하이퍼시집 방순애시인의 <<시간은 원이 되여>>를 읽으면서 또 한번 크나 큰 충격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었다 . 언어련금술의 화려한 탈변, 그리고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과거의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뿌리깊은 관습으로부터 당당하게 해탈을 웨치며 한결 숨결이 자유로와지고 시야가 맑아진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境界)ㅡ <<저는 아직 초작자에 불과합니다>> 겸손이 철철 넘쳐나는 그녀와의 짧은 통화에서 필자는 <<나에게 있어서 시는 과연 무엇이였을가?>>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지나온 행보를 뒤돌아보지 않을수가 없었으며 늦게나마 새로운 변화를 결심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필자가 알건대 방시인은 시공부를 시작한지 이제겨우 일년이 조금 지난 늦둥이시인이다. 평생을 경찰직에 몸담그고 살아온 그녀가 퇴직후 문학공부를 시작한데는 그녀만의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책을 내면서 그녀는 머리글에 이렇게 쓰고있다
<<세상을 향하고 독자를 향하고 자신을 향할수 있는것이 문학입니다. 평생 경찰직에 몸 담그던 내가 문학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2003년9월, 한 친구의 권고로 백일장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처녀애들로부터 중로년 녀성들까지 70여명이 현장에서 글을 쓰고 수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실로 엮은 수상글을 읽는 순간 나는 감동에 눈물을 흘렸습니다.(아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구나. 그런데 난 뭐하며 살았지?) 그것이 계기가 되여 독서하기 시작하였습니다…2012년초 우연한 기회에 시와 접촉하여 시를 배우게 되였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어설픈 시공부를 시작하여 안타깝게 잘 되지않아 여러번 시 쓰기를 포기하려고 마음을 먹은적도 있었습니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단속하며 시를 익히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년하고도 넉달이 되게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책을 보고 글 쓰며 부지런히 달려왔습니다.
ㅡ하이퍼시를 쓰면서 한 시각에서 또 하나의 다른 시각에로, 상상속에서 자연의 사물들과 현실인간의 조화를 얻어낸다는것은 그리 쉽지않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이미지는 체험감상, 현실적인것, 개인적 자아마저도 잊어야고 사물의 운동으로 시를 엮어야하는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되였습니다. 시적 사색을 가짐에 있어서 선입견을 깨끗이 쓸어버려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무의식속에서 숨겨진 존재를 끄집어내고 희열과 고뇌에서 언어를 찾아 순간순간을 살아나게 하고 젊게 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쏟아넣었습니다….>>
시란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는 표현예술이다. 이미지는 사물성과 회화성을 추구하며 관념을 배척한다. 영국의 비평가 시드니(Sir Philip Sidney, 1554-1586)는‘시를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가르치고 즐겁게 할 목적을 가진 “말하는 그림”(speaking picture)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여기서 알알이 통통 잘 여무른 88수로 엮여진 방순애시인의 금싸락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주옥같은 하이퍼시들을 잠깐 함께 살펴보자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 그리고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지에서 펼치는 환상의 바이브
수천개의 태양이
나무가지사이로 들어온다
태양줄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
땅구멍마다 숨어있는 진실을 본다
개미가 떡함지무대에서 댄스를 쳐댄다
무대등 달덩이는
가슴을 헤치며 내려오고
베짱이들은 악기들고 연주에 여념이 없는데
엿장수가 지나다 멍하니 보며 중얼거린다
태고의 텅 빈 배속에
희미한 생명의 맥박이 널뛰기하고
시간의 등에 업혀 굴러나온 생명이
따가운 태양을 마주하느라
시물거리는 눈
<<대나무아래에서>>의 전문이다. 수천개의 태양과 거꾸로 매달려있는 잎새들이 땅구멍의 숨어있는 진실을 살펴보고 있다고 시작된 이 시의 텍스트는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제목이 <<대나무아래에서>>이지만 마치 한폭의 자연을 무아(无我)와 무의식(无意识) 그대로 그려놓은듯하여 독자들은 대나무숲사이로 수많은 해살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느듯한 느낌을 받을수도 있으며 또한 한폭의 생동한 오감도(鸟感图)를 보는듯한 새로운 느낌을 준다. 여기서 다시점(多视点), 다초점(多瞧点)의 역할이 된 수천개의 태양, 개미 , 떡함지 , 댄스 ,달덩이 , 베짱이 , 엿장수 , 악기 , 널뛰기, 시물거리는 눈은 방시인의 숙련된 언어련금술을 통하여 서로 묘하게 새로운 조화를 이루면서 현시대 단순구조적 동화(同化)에 거부와 강한 저항의식이 깔린 다선구조로의 화려한 탈변을 선포하면서 환상적인 바이브와 랩을 펼치고 있다. 이외에도 이 시는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 시적 분위기를 나름대로 고조시키려는 작자의 의도가 최소한의 개입이 되여 냉정한 지적 사색과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럼 하이퍼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서 잠간 하이퍼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함께 료해하여 보자!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하이퍼와 텍스트를 조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드 넬슨(Ted Nelson)이 만든 말이다. 단순구조가 아닌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문덕수선생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3차원보다 높은’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이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다… 더불어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수가 있다.]
무릇 모더니즘이든 포스터니즘이든 레알리즘이든 휴머니즘이든 필자가 알건대 시는 시인의 체험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진술, 전달하는것이 절대로 아니다. 더불어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시적언어라는 매개물이 있으며 이 매개물 역시 의미전달의 구조가 또한 아니여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형성을 위한 언어구조일뿐이다. 어디까지나“시는 예술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인정한다면 전통시든 현대시든 또한 하이퍼시든 시는 단순히 시를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려 하거나 전달받으려고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시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삶을 체험하게 하는 언어예술이 되여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를 한수 더 보자
지구가 점을 본다
너무 커서 보면 볼수록 어지럽다
지구가 지레대로 점을 앞으로 민다
요지부동이다
지구가 등으로 점을 굴려본다
꿈적거리는것 같더니 또 굳어버린다
바람이 쇠스랑 들고
은하수를 긁어어본다
표피가 떨어졌다가도 또 새살이 나온다
태양이 은하수를 바줄로 묶어 던진다
뒤로 번져지는 시늉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온다
컴퓨터 불이 켜진다
하나하나 또 하나가 켜진다
반짝이들이 세계표면을 덮는다
지구가 들린다
지구가 달린다
<<지구>>전문이다
보다싶이 전례의 자의였던 타의였던 아니면 피의였던간에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오랜 세월동안 주류를 이어온 대아(对我), 자아(自我)의 흔적은 꼬리마저 찾아볼수조차 없고 불교에서 달관의 경지에서나 찾아봄직한 무주(无住) , 무득(无得) , 무소위(无所谓), 무아(无我)의 새로운 경계(境界)에서 작자는 마치 우주와 자연과 자연스럽게 남의 이야기하듯이 녀성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펼쳐진 이 시적화자는 우리들에게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문명의 산물인 <<컴퓨터 불이 켜진다>>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지구가 들린다/지구가 달린다>>로 현실적인 직시, 미래에 대한 불안정과 또한 불안함과 그러한 갈구, 생명운동을 다차원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 꼼꼼히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알수 있듯이 지구 , 지레대 , 잔등 , 바람 , 쇠스랑이 , 은하수 ,태양 , 바줄 , 컴퓨터ㅡ 등등 달라도 너무 다른 실물들이 이 시에서 직접 만나 방시인의 섬세한 가공을 거쳐 마침내 하이퍼시의 특유의 새로운 개성을 완성해나가면서 시적인 울림, 즉 허다한 공명과 긴 여운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시인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이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 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최룡관시인이 평론에서 한 말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옳바른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너무나도 작은 우리 조선족시단에서 내노라하는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많지만 진정 후배양성과 현대시보급에서 서슴없이 자신의 <<차키>>마저 선뜻이 문학도들에게 내여줄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가? 이 점에서 나는 최룡관선배의 로고에 나름대로 큰 긍정을 하고 싶다. /시간이 우리를 버리고 간다/칼바람이 심장을 찢고 그늘들이 모여 몸의 골수를 빼먹는다/흐르는 피는 왜 저토록 푸른걸가?/바이올린 현줄을 켜면 떠나간 아픔이 다시 와서 신경을 켜댄다/노을이 머리를 빠끔히 내밀며 흩어진 가슴을 몰아세운다/바라보는 한순간 두눈길은 멈추고 얼어붙은 등뼈에서 시린 정이 빠져나간다/메마른 가슴에서 백양나무가 다시 잎사귀를 키울수 있을가?/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문득 가슴이 부푸는 이 시각/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
<<찢겨진 가슴>>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특히 /어둠 저편에서 빤히 쳐다볼때 진달래 흐드러진 젊은 산이 내게로 와서 옷소매를 잡는다/와 /초록빛하늘을 들이 마신다/라는 이처럼 단단한 긍정어로 부재의 세상속에서 현실적 존재의 충일성을 노래하는것은 부재의 그 아픈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갈수 있는 시인의 강한 힘, 그것은 곧바로 시인의 맘속에 포근한 휴머니즘정신이 자리하고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따라서 시인의 그러한 휴머니즘정신은 더없이 랭철하고 명석한것이며 또한 자성(自醒)이 밑거름으로 안받침되여있다고도 생각된다. 제목이 <<찢겨진 가슴>>이지만 보시다싶이 결말에서는 부푸는 가슴이며 초록색하늘이여서 희망이 보여서 좋다. 이 시 역시 최룡관시인이 말한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것이 특징이라면 또한 특징으로 될것도 같다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 있는
커다란 바위우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 있다
<< 성>>
상아는 검은 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 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상아의 노래>>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여기서>>
스님이 되여 앉아 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입은 닫겨있다 <<어떤 바위>>
이러한 시구들은 방시인이 얼마나 언어련금술을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으며 또한 숙련되여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좋은 근거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보는이의 시각이 다 즐거워지고 둘째 촉각이 스스로 감미로와지고 셋째 미각이 어느새 시원해지는ㅡ더불어 이러한 시구들은 단순구조로부터 다선구조로의 힘찬 도약의 새로운 상징이며 또한 무아의 경지에서 오직 방순애시인만이 마음껏 펼칠수 있는 화려한 바이브이고 환상적인 랩이라고 한마디로 총괄하고싶다. 그럼 여기서 늦게나마 방순애시인이 이처럼 짧은 시간내에 크나 큰 성과를 이루어낸데 대하여 아낌없는 치하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처리
시에서의 회화성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여 객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옴니버스(낯설게 하기)기법은 여러개의 이야기를 배치하여 시의 새로운 구조를 선보이는 하이퍼시창작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로만야콥슨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사물, 언어, 사건을 충돌하여 낯선 구조와 낯선 의미의 새로운 감각과 미의식을 추구하였던 리론이다. 옴니버스기법은 제목과 내용, 련과 련의 연결고리를 끊어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한다. 즉 낯설게 하기를 최대화하면 구조의 새로움, 의미의 새로움, 감각의 새로움이라는 하퍼시성립조건을 충족시킬수 있기깨문이였다. 그럼 여기서 방순애시인은 폭력적조합과 옴니버스기법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잠깐 다시 살펴보고 가자
스님이 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
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 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 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
심에서 우는 천둥소리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
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 어떤 바위 >>전문
여기서 1련과 2련ㅡ 그리고 3련은 제각기 생판 다른 세 얼굴이다 , 달라도 서로 너무 다른 불협화음을 조성하는듯하지만(옴니버스기법처리) 마지막련의 제일 끝부분에서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와 절묘하게 어울려 돌아가면서 뜻밖의 아어효과(雅语效果)까지 창출해낸다. 흔히 진펄에 빠진 발걸음이 한결 무겁다로 표현하지만 방시인은 여기서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로 시를 느긋하게 마무리하면서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진펄속에서도 발걸음이 자유로운 바람과 바람을 타고 둥둥 떠가는 마음을 엿볼수 있게끔 한다. 얼핏 보면 상호 모순이 되는 어구이면서도 또한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고있는가? 이것이 방시인의 놀라운 재치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여기서 폭력적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잠깐 더 살펴보자 . 스님 ㅡ 법글 ㅡ전설 ㅡ 강 ㅡ이파리 ㅡ 구름 ㅡ펜 ㅡ 입술 ㅡ 천둥 ㅡ귀뿌리 ㅡ열쇠 ㅡ진펄ㅡ 어찌면 제법 글깨나 쓴다하는 이름있는 시인들마저도 제대로 잇기가 쉽지 않을것이라는 걱정이 슬그머니 든다 . 이렇듯 언어련금술은 아무나 자유자재로 사용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 언어련금술은 제대로 장악한 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기때문이다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 불을 지펴 지가 낳은 뿌리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여기서>>전문
“돌은 하늘이 버렸을때 침묵의 기발을 든다”라고 서두를 뗀 이 작품은 마지막 련에서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우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고 마감하고 있다. 이는 자유의 혼이 구속의 쇠사슬을 박차고 아무런 구애없이 천애지각을 나름대로 미화해보려는 시인의 조심스런 양상인것 같다. 또 어딘가 모르게 본능에로 끌려가는 생명의 충동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제목이나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가 암시해주는것은 과연 무엇일가는 독자마다 견해가 다를수도 있겠으나 이 시는 곱씹을수록 무언의 암시와 그런 색깔이 다분히 짙다고 필자는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총체적으로 방순애시인의 많은 하이퍼시는 한수 한수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가 완전무결하다는것은 절대 아니다./손에 들려 호강을 받을때/ <<유리컵>>중에서/시베리아 풍차가 /장거리 려행을 떠난다/ <<계절풍>>중에서 이러한 시구들은 표현이 너무 단순하고 형상적인 이미지보다 추상적인 이미지가 더욱 짙어 방순애시인의 특유의 시맛을 많이 떨어뜨리고 있다. 또 일부 시편이 주제가 모호하고 어디로 튈지 몰라 읽기에 불안한것도 더러 있다. 첫술에 배 부를수는 없다. 아무튼 다시한번 방순애시인이 짧은 시간내에 이룬 성과에 다함없는 성원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마무리하면서
조선족시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변시단이나 북방시단(흑룡강)에 비해 료심시단은 아직도 개간중인 <<황무지>>에 불과한것만 같다. 료녕조선문보 <<압록강>>문예부간, 심양조선족문학회 기관지라고 할수 있는 <<료동문학>>잡지에서 가끔 생소한 얼굴들이 때때로 나타나긴 하지만 별로 읽을만한것이 적고 새로운 시도를 꿈꾸는 시인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하는 말이 있다 . 두꺼비 한번 눈섭을 찡그렸다 하여 금방 하늘이 흐려지는것도 아니건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바른 말 하기를 꺼려하며 또한 너무 회피하려고만 드는것은 아닐가? 혹시 가슴 깊숙히 간직한것이 향긋한 파인애플이 아니라 겉이 속보다 더 싱싱한 한알의 진렬된 사과알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기스라도 갈가봐 너무 전전긍긍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픈 매가 어쩌면 문인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촉매제가 되고 필연적인 파스효과가 되지 않을가 ? 그럼 여기서 료심시단 중견시인이라고 할수 있으며 십여년간 심양조선족문학회 회장으로 있다가 지금 다시 료녕조선문보 기자부주임으로 사업하고 있는 김창영시인의 시집 <<산처럼 물처럼>>과 <<서탑>>을 잠간 살펴보자
산은 나보고 산이 되라 하네
물은 나보고 물이 되라 하네
산앞에 산처럼
물앞에 물처럼
말을 버리네
고개 숙이네
<<산처럼 물처럼 >>전문
물은 나보고 흐르라고 하고
산은 나보고
거기, 서라고 하네
산속에 물이 흐르고
물속에 산이 있으니
나, 여기
오도 가도 못하고
뜬구름 더불어 바장임이여
김학송시인의 <<세상살이 어려워라>> 전문
김창영시인은 아마도 도를 딲고 있는상싶다. 시인지 감오문(感悟文)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ㅡ
<<99편의 시작품을 여러해를 두고 쓰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인의 립장이나 주제의식은 거의 변화가 없다. 이 시들을 쓰기 시작한 동기가 오랜 세월 시인의 의식속에서 발효되다가 련작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수가 있다. 하지만 무르익은 주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하겠지만, 시를 쓰면서 더러 의식의 변화가 있음직하기도 한데 너무 변화가 없다는것은 오히려 약점이 될수도 있다. 혹 력사의 무게를 담아내겠다는 시인의 강박의식이 주제의식의 변화를 제약한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더러 여유를 가지고 좀더 가벼워진 마음, 열린 마음으로 서탑의 새 력사를 쓸수는 없을까 기대해본다.
본고의 서두에서 김창영의 시는 된장이나 김치처럼 소박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소박하다는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단순하다는 표현도 가능하여 약점이 될수도 있다. 화려함에 흔히 동반되는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제거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지만 현대시의 많은 표현기교들이 결여되여있다는 측면에서는 약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현대시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미지의 전략적인 사용이다.>>장춘식연구원이 김창영시인의 련작시 <<서탑>>평론중에 한 말이다.
그럼 여기서 료동문학 호롱불금상 수상자와 대상수상자인 서정순씨와 편도현씨의 근작시도 살펴보자. 본문에서는 이들의 수상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근작시만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며 더불어 아무런 폄하나 저의도 없음을 명백히 밝혀둔다
맨드라미(鸡冠花)
(심양) 서정순
올망졸망 장독대사이로
빠알간 벼슬만 내여놓은
수탉 한마리
사위오면 닭 잡아준다는
집주인 말에
제 먼저 놀라
장독사이에 숨죽이고
간이 달랑
빠끔히 내다보네
.시. 숙명
ㅡ어머니의 83세 생신을 맞으며
(심양) 편도현
그 흔하디 흔했던
밭머리의 흙도 아니였소이다
무너진 돌담밑에 얼기설기
그것도 아니였소이다
바위돌 틈새에 가는 실뿌리
훅?불면 쓰러질듯 가냘픈 신세
그러나 질기디 질긴 그 힘은
쇠사슬처럼 강파르게 살았소이다
헐벗어 드러난 하얀 속살
눈물겹게 가슴 시린데
바위에 매달려 안간힘 쓰며
여린 새싹들을 키우는 크나큰 사랑
어설픈 삶 시작할 때
이른봄 서리찬 새벽하늘은
그리도 차거웠고
밤하늘에 우뢰 울고
비바람도 사나웠소이다
걸음걸음 피눈물 나도록
세상살이 너무도 고달팠소이다
밤이나 낮이나 따로없이
푸름을 이고지고 보듬으며
언제나 분주했던 그 세월
몸에 푹 배인 그 땀이
이슬되여 축축이 젖어왔소이다
그렇소이다
모진 세파 그속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살아왔소이다
한잎 두잎
푸름을 받들며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이 두편의 시 모두가 작년에 료녕조선문보 <<압록강>문예부간에 실렸던 시들이다. 단순구조와 이데올리기의 련속이라고 밖에 볼수가 없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십오륙년전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맨드라미는 짜임새가 흐트러졌고 어쩐지 동시에 가까운 초학자 냄새를 물씬 풍기고 편도현씨의 <<숙명>>은 어머니의 83세 생일을 맞으면서 쓴 글이다보니 시제선택이 자유롭지 못한것이 사실이나 읽기에 다소 따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끝으로 새로운 한해 료심시단에도 새로운 시적 개혁의 바람이 일것을 희망하면서 여러 동우시인들 그리고 방순애시인이 새로운 한해 더욱 좋은 시들을 써내시기를 충심으로 기원해본다
2014년2월15일 심양에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