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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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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3    [세상만사] - "5억=10억"... 댓글:  조회:1168  추천:0  2021-09-08
“5억원 그림 훼손... 10억원 이라고요?”  2021.09.08.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몰 지하 포스트에서 열린 ‘스트리트 노이즈’(STREET NOISE) 전시회에 전시된 존원의 대형 작품을 관람객이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은 이날 물감에 훼손된 부분. 연합뉴스“5억 그림에 페인트 뿌린 20대 연인” CCTV 영상, 10억원 매물로 등장 NFT로 제작해 첫 판매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에 전시된 예술품이 20대 남녀 연인에 의해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20대 남녀가 롯데월드몰 지하 1층 ‘STREET NOISE’(거리의 소음) 전시회에 출품된 미국 화가 존원(58)의 작품 ‘Untitled’(무제)에 청록색 붓자국을 남긴 것이다. 전시 주최 측이 폐쇄회로(CC)TV를 돌려본 바, 전시장에 소품으로 놓여있던 물감과 붓을 들고 한 커플이 그림에 덧칠하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이들은 작품 훼손 경위에 대해 “벽에 낙서가 돼 있고 붓과 페인트가 있어 낙서를 해도 되는 줄 알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찰 관계자는 “대화가 원만히 되지 않을 경우 관련 진술과 증거를 제출해 추후 법적 절차가 가능한 사안으로 판단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존원의 대형 작품을 관람객이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진은 물감에 훼손된 부분.관람객 그림 낙서…CCTV 영상, 10억원 매물로 8일 미술계에 따르면 ‘그림 훼손 소동’ CCTV 영상이 NFT(대체불가토큰)로 제작돼 판매된다. 가격은 무려 10억원에 책정됐다. NFT 미술품 거래업체 닉플레이스 관계자는 “CCTV에 등장하는 연인과 연락해 손해배상 책임을 묻지 않는 대가로 초상권 협의도 끝마쳤다”고 말했다. 그림 훼손 소동 당시 당시 원작자가 “원상 복구를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 커플은 1000만원에 달하는 그림 복원 비용을 일부 부담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닉플레이스 측은 “이 그림을 우리가 구매하면서 배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최근 존원의 그림 ‘무제’를 구매해 분할 판매를 진행하는 동시에, 이같은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항간의 이슈를 선점해 판촉에 활용하는 NFT 시장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를 접한 네티즌은 “5억원짜리 그림 훼손하는 영상이 10억원 이라고요?”, “과도한 장삿속”, “전 세계적으로 없는 일이긴 하지”, “이걸 살 사람이 있을까?”, “분명히 살 사람 있다고 본다”등 반응을 보였다. 한편 ‘그림 훼손 소동’ 사건 발생 후 복원비용 등 법적 문제에 대한 내용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매스컴에 이슈가 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작품은 더욱 유명세를 치르게 됨으로써 작품의 가격은 2배 이상 상승, 10억원 이상 호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전해졌다.   /김채현 기자 
532    [그것이 알고싶다] - "인도 소똥 축제" 댓글:  조회:1570  추천:0  2021-04-17
       [출처] 아이들을 소똥에 굴리는 인도의 축제     인도에서 사두(힌두교 성자)와 신도들이 목욕 의식을 위해 갠지스강으로 행렬을 지어 가고 있다. /연합뉴스                   남부 연쿠르눌 지구 카이루팔라 마을에서는 현지 힌두력 새해 축제인 우가디(13일)를 맞아 소똥싸움이 열렸다. /연합뉴스       소똥싸움 축제를 벌이는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의 한 시골  
531    [세상만사] - 피카소 = 그림 엽서 댓글:  조회:1725  추천:0  2020-12-05
프랑스소식 피카소의 1919년 크리스마스 그림엽서 경매 나온다 ・2020. 12. 2.        [국민일보] 김남명 인턴기자 /2020년 12월 9일 ​ 감정가 4400만원 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피카소가 1919년 친구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그림 엽서가 경매에 나온다. ​ 지난 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1919년 피카소가 파리에서 친구 앙리 데포세에게 보낸 그림 엽서가 경매에 나온다고 보도했다. 피카소는 가로 14cm, 세로 9cm 크기의 엽서에 크리스마스 식탁 그림을 그려넣었다. 칠면조와 와인병, 안경, 포도, 바나나, 빵, 배 등으로 풍성하게 꾸며진 모습이었다. 피카소는 그림과 함께 프랑스어로 “내 친구들에게 잘 차려진 식탁과 함께 우리의 행운을 담아보낸다”라고 썼다. ​ 피카소가 친구 앙리 데포세에게 보낸 엽서 뒷편에는 눈 오는 거리 풍경이 담긴 그림과 함께 프랑스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피카소의 모습(왼쪽)과 친구 앙리 데포세에게 보낸 엽서(오른쪽) 엽서를 소장하고 있던 개인 수집가는 경매업체 IAA에 판매를 위탁했다. 경매는 2일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감정가는 3만 파운드(4431만원)다. ​ IAA 관계자는 “피카소가 크리스마스 만찬을 주제로 직접 그린 훌륭한 삽화가 담긴 엽서”라면서 “피카소 초기 작품으로 다른 입체주의 작품과 달리 2차원적”이라고 설명했다.
53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1692  추천:0  2020-10-14
  전나무 끌어안은 호랑이의 ‘황홀경’ 2020.10.14.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대상작은 연해주 호랑이…무인카메라로 촬영연해주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 설치한 무인카메라로 촬영한 암컷 아무르호랑이의 냄새 표지 모습.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대상으로 뽑혔다. 세르게이 고르쉬코프,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비스듬한 겨울 해를 받아 황금빛으로 물든 오랜 전나무숲에서 암컷 호랑이 한 마리가 굵은 전나무를 부둥켜안았다. 코를 나무에 들이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표정은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다. 이 모습을 촬영한 러시아의 야생동물 사진가 세르게이 고르쉬코프의 작품 ‘포옹’이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전시되는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의 대상작으로 뽑혔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이 공모전에는 4만90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고르쉬코프는 이 극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기다림과 함께 사람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그는 지난해 1월 두만강에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의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서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가 나무를 발톱으로 긁거나 오줌으로 냄새 표시를 한 나무 주변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했다. 이 사진을 얻은 것은 11개월 뒤였다. 낙엽 쌓인 암벽 위에 선 아무르호랑이를 담은 세르게이 고르쉬코프의 다른 출품작. 세르게이 고르쉬코프,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심사위원장인 로스 키드먼 코크스는 “마법의 숲 깊숙이 숨겨진 내밀한 순간을 독창적으로 엿본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전나무를 끌어안은 거대한 암호랑이는 수피에 남겨진 다른 호랑이의 냄새를 맡고 자신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무르호랑이는 한때 한반도 전역을 물론 카스피해까지 유라시아에 널리 분포했지만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1930년대 20∼30마리로 멸종 직전에 몰렸지만 보호조처에 힘입어 현재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중국 북동부와 북한에 550마리가 살아남아 있다. 심사위원인 팀 리틀우드 박사는 “사진의 독특한 감성적 전달력으로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지켜야 할 책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의 젊은 야생동물 사진가 대상작 ‘기러기를 잡은 여우’. 리이나 헤이키넨,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올해의 젊은 야생동물 사진가 대상작은 핀란드의 리이나 헤이키넨의 작품 ‘기러기를 잡은 여우’에게 돌아갔다. 이 작품은 사냥한 흰뺨기러기를 먹던 여우가 사진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담았다. 수상작으로 뽑힌 덴마크 사진가 모겐스 트롤레의 ‘포즈’는 명상에 잠긴 듯한 코주부원숭이를 담았다. 모겐스 트롤레,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지메네스는 엄마 뿔논병아리 가족을 담아 수상작으로 뽑혔다. 품속에서 아빠가 건네준 물고기를 새끼가 먹으려는 순간이다. 호세 루이스 지메네스,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프랑스 사진가 프랑크 디샨돌의 수상작인 ‘두 마리 말벌’. 기생벌의 일종인 나나니(왼쪽)와 다른 말벌에 탁란하는 뻐꾸기말벌을 담았다. 프랑크 디샨돌,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영국 사진가 폴 힐튼의 수상작은 중국 광시족자치구 놀이공원에서 찍은 눈먼 반달곰을 이용한 관광을 담았다. 곰에 대한 고문이 분명하다. 폴 힐턴, 2020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공모전 제공 공모전의 출품작과 수상작은 런던 자연사박물관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조홍섭 기자
529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 댓글:  조회:1832  추천:0  2020-09-10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 사천 신비로운 ‘써다 불교학원’                  (흑룡강신문=하얼빈) ‘써다(色達) 우밍(五明) 불교학원’이라 불리기도 하는 써다 불교학원은 1980년에 창립되었다. 1993년 프랑스 ‘르몽드(Le Monde)’에 의해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써다 우밍 불교학원은 사천(四川)성 간쯔(甘孜) 장족(藏族)자치주 써다현 경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의 해발 4,00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겹겹의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불교학원의 대경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모두 산비탈들로 빼곡히 연결되어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붉은 오두막집이 끊임없이 펼쳐져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계곡 밑과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몇몇 사찰과 불당은 그 건축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장식만큼은 정교하고 휘황찬란하다. 붉은 승포(僧袍)를 몸에 걸친 라마(喇嘛)와 여승이 오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생기가 넘치고 상서로운 분위기가 가득함을 느낄 수 있다.   웅대한 산들 사이에 자리잡은 이곳은 가장 순수한 불국(佛國)의 천당이자, 오래된 닝마(寧瑪) 홍교(紅教, 8-9세기에 성행했던 라마교의 한 분파)가 라마불교의 풍부하고 넓은 문화와 세상을 구하는 마음을 전수, 계승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민망 한국어판                                    
528    독일 화가 - 막스 에른스트 댓글:  조회:3318  추천:0  2020-02-29
미술대사전(인명편) 막스 에른스트   [ Max Ernst ] 요약 독일 출신의 쉬르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 마케의 지도로 표현주의적인 그림을 그렸고, 나무, 돌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비비는 프로타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괴기한 세계를 묘사했다. 액션 페인팅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에서 회화대상을 수상했다. 출생 - 사망 1891. 4. 2. ~ 1976. 4. 1. 출생지 독일 쾰른 근교 브뤼르 직업 화가 가족관계 배우자 : 터닝 독일 출신의 쉬르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 쾰른 근교의 브뤼르에서 출생하여 파리에서 사망. 본 대학에서 철학을 배움. 이때부터 피카소와 키리코의 작품에 관심을 보여 마케의 지도로 표현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1년 브르통의 초대를 받고 파리로 옮겨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교우. 1924년 이후 쉬르레알리슴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로 활약. 1925년경 나무와 돌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비비는 프로타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괴조(怪鳥) 로브로프가 파닥이는 괴기한 세계를 묘사했다. 1941년 뉴욕의 액션 페인팅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1946년 터닝과 결혼한 이후 55년까지 애리조나에 거주하는 동안 사막속의 새와 사람을 그려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에서 회화대상을 수상함. 제2차 대전후에 프랑스로 귀화함. 대표작은 『박물지』(1926), 『백두여』(1929), 『자선주강』(1934), 『도시의전경』(1935, 취리히코트 하우스), 『비온 후 유럽』(1940~42, 하트포드 워즈워스 아세니암)등 환상적인 유채화와 조각 작품도 있다. 작품 박물지(1926년) 백두여(1929년) 자선주강(1934년) 도시의전경(1935년) 비온 후 유럽(1940년 ~ 1942년)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물 속으로 뛰어들기(Aquis submersus)에른스트, 1919년, 유화, 54 x 43cm,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미술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501 위대한 화가 막스 에른스트   [ MAX ERNST ] 요약 다다이스트 화가.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눈을 뜬 그는 장 아르프, 바르겔트와 함께 제1회 '쾰른 다다이즘 전시회'를 개최했으나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폐회되었다. 에른스트의 몽환적인 유화 작품 ‘셀레베스’는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원본보기 출생-사망 1891년 4월 2일 ~ 1976년 4월 1일 출생지-사망지 독일 브륄 - 프랑스 파리 예술양식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 화가, 환각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터무니없는 이미지, 비관습적인 기법과 재료들을 사용함, 새처럼 생긴 대상을 자신의 분신처럼 화면에 도입함 작품 미술작품 감상하기 1948년 막스 에른스트는 자서전의 첫 구절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막스 에른스트는 1914년 8월 1일에 죽었다. 1918년 11월 11일, 그는 마술사가 되어 그의 시대의 중요한 신화를 찾기를 원하는 한 젊은이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그는 1914년에 죽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프로타주와 콜라주, 그라타주, 데칼코마니 같은 기법들을 새롭게 고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4년 동안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경험 덕분에 에른스트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새 '로플로프'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른스트에 따르면 로플로프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인간과 새의 혼동과 또 그것이 연상시키는 탄생과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얻은 것이다. 그는 전쟁에 혐오를 느낀 미술가들이 그 전쟁을 가져온 시스템들, 예를 들면 논리학, 언어, 회화 작품 같은 것들을 비판했다고 말했다. 1920년에 그는 장 아르프와 요한네스 테오도르 바르겔트와 함께 제1회 '쾰른 다다이즘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기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폐회되고 말았다. 에른스트의 몽환적인 유화 작품 (1921)는 최초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1922년에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기기 이전부터, 재현된 대상들이 비논리적으로 병렬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콜라주는 음울하고 초현실적인 콜라주 소설 『친절 주간』(1934)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적 이미지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처음에는 팸플릿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른스트는 애인이었던 레오노어 캐링턴과 함께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독일인임이 발각되어 프랑스 군에게 붙잡혔으며, 나중에는 나치 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는 미술애호가이자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했다. 에른스트는 구겐하임과 1942년에 결혼하지만 2년도 안 되어 헤어지고, 영국 화가인 도로시 태닝을 만나 1946년에 결혼했다. 둘은 애리조나에서 살다가 후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에른스트의 기법들 · 콜라주 : 에른스트는 책 삽화, 광고지, 사진 등의 조각을 사용해 불안정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 프로타주 : 결이 있는 나무나 천 등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지르는 기법이다. 에른스트는 잎사귀를 이용해 이 기법을 발전시켰다. · 그라타주 : 뾰족한 도구로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긁어냄으로써,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 데칼코마니 : 두 면을 함께 눌러 한쪽 면에 바른 물감을 다른 면으로 전사하는 기법으로, 우연성의 효과를 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박미훈, 위키미디어 커먼즈, 내셔널 갤러리 런던,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더 브릿지먼 아트 라이브러리, 비피케이) 두산백과 막스 에른스트   [ Max Ernst ] 요약 독일의 화가·조각가. 1924년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참여했다. 프로이트 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키는 오토마티슴을 원용했지만, 1925년에 프로타주(Frottage)를 고안하여 새로운 환상회화의 영역을 개척했다. 황폐한 도시 혹은 산호초(珊瑚礁) 같은 이상한 풍경 등을 다루었고, 내용과 표현력의 일치가 뛰어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색 화가 H.P.제헤르스나 마니에리스트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출생-사망 1891.4.2 ~ 1976.4.1 국적 독일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독일 쾰른 근처의 브륄 출생 주요작품 《새》 《신부의 의상》 《조가비의 꽃》 쾰른 근처의 브륄 출생. 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2∼1941년 파리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콜라주전(展)을 열고(1920), 1924년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프로이트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키는 오토마티슴을 원용하였지만, 결국 1925년에 프로타주(Frottage)를 고안하여 새로운 환상회화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주제는 주로 황폐한 도시 혹은 산호초(珊瑚礁) 같은 이상한 풍경 등이었으며, 내용과 표현력의 일치가 뛰어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색 화가 H.P.제헤르스나 마니에리스트의 기법을 훌륭하게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원시미술에 공명하기도 하고 미국 체재 중 현대미술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하였으며 195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아 대가로 인정받았으나, 이 수상으로 상업주의에 굴복하였다는 이유로 정통파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하였다. 작품으로 《새》 《신부의 의상》 《조가비의 꽃》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두산백과)  
527    [시공부 하기] - "데칼코마니" 댓글:  조회:3435  추천:0  2020-02-14
  © ADAGP, Banque d'Image, Paris - GNC media, Seoul, © René Magritte / ADAGP, Paris - SACK, Seoul, 2010 이미지뷰어로 이동 데칼코마니 Decalcomanie 아티스트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출생-사망 1898년 11월 21일~1967년 8월 15일 제작연도 1966년 사조 초현실주의 종류 유화 기법 캔버스에 유채(Huile sur toile) 크기 81 x 100 cm 소장처 개인 캔버스에 유채로 크기는 81x100cm이며,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제작 배경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원래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장식 기법을 일컫는 용어로, 인쇄기에 넣을 수 없는 물체에 무늬를 새기거나 상표를 붙일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독일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자신의 그림에 이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특징적인 하나의 미술 기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데칼코마니에는 과슈(guache) 등을 종이에 바른 후에 캔버스 혹은 다른 종이에 눌렀다 떼는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그를 통해 작가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는 이성을 거부하고 무의식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입장과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하나의 운동으로 문학과 미술 등의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세계대전 이전의 합리주의가 결국 비극적인 파괴를 가지고 왔다고 여겼으며 이를 거부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 함으로써 이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잡았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을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그들에게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의 세계처럼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적 세계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여러 방식을 고안했는데, 대표적으로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 독특한 형태를 담아내는 프로타주(frottage)나, 마음 속의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automatism) 등이 있었다. 데칼코마니 역시 그와 같은 방법 중 하나로, 초현실주의 작가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형식의 작품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작품과 표현기법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중산모를 쓴 남자의 이미지가 중앙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데칼코마니 기법을 통해 만든 모습과는 다르게, 이 작품의 대칭적 이미지는 그 형태만 같은 뿐 서로 담고 있는 내용에는 차이를 보인다. 화폭의 오른편에 그려진 바다와 하늘의 모습은, 왼편의 남자가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있는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그려놓은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모습보다도, 커튼 가운데 기묘하게 남아있는 바다 풍경은 더 밝고,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역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개념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캔버스 속 남자와 커튼, 바다와 하늘 중 어느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며, 어떤 것이 다른 것들보다 앞에 놓여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결국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그림이 가지고 있는 ‘모사’라는 속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며, 이는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얻기 힘든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림 속 등장하는 중산모를 쓴 남성의 이미지는 1930년대부터 꾸준히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으로, , , 등에서 역시 나타난다. 르네 마그리트14 전체보기 다음  
526    [세계국제] - 치마냐... 바지냐... 바지냐... 치마냐... 댓글:  조회:2526  추천:0  2020-01-18
  감옥같은 18세기 파리의 ‘바지 금지 조항’, 아직도 여전히 남아... 2020.01.18.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옷이 길들인 여성의 역사 코르셋부터 드레스, 교복까지 의존적 행동 만드는 의상들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1769년경, 캔버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미술관. 10대 시절 매일 입고 다녔던 교복을 떠올리면 곤혹스러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잠자코 있어도 땀이 뻘뻘 나던 여름날, 답답한 브래지어도 더운데 그 위에 꼭 러닝셔츠를 입어야 했다. 브래지어가 비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입던 하복은 칼라가 어깨 전체를 덮는 세일러복 스타일. 교실에 에어컨이 없던 그 시절, 선풍기 몇 대로 어떻게 버텼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등·하교를 할 때도 고역은 이어졌다. 하복 상의가 너무 짧아서 버스 손잡이를 잡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치마 안 속옷이 보일까 봐 노심초사였다. 속옷 노출을 막으려 속바지를 입었는데, 그 속바지가 보일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다 귀찮아서 치마 아래로 체육복 바지를 입으면, 이번에는 단정치 못하단다. 더워도 무조건 참고, 뛰지도 말고, 속옷이 보일까 전전긍긍하는 조신하고 순종적인 여학생, 그것이 학교가 원하는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교복은 그 여성상을 구현하도록 채찍질하는 독한 훈련 조교였다. 신발끈도 묶을 수 없게 한 옷들 옷이 여성의 행동을 길들인 역사는 생각보다 유래가 깊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는 미술 문외한에게도 익숙한 그림이다. 쿠션을 등에 받치고 오른손으로 책을 쥐어 든 소녀의 옆모습이 한껏 진지하다. 그런데 소녀는 왜 이렇게 작은 책을 읽고 있을까. 이 그림뿐 아니라 18세기 독서하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에서 그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작고 얇은 책을 들고 있다. 의문은 영문학자 린달 고든의 말을 통해 풀린다. 고든은 영국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의 전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자들은 배와 등을 판판하게 하고 가슴이 더욱 풍만해 보이도록 고안된, 단단한 고래수염으로 만들어진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고래수염 틀로 살을 감싸지 않은 여자는 외설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코르셋은 여자들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몸을 굽힐 수 없었기에 책을 읽으려면 손으로 세워 들어야 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소녀는 볼록한 소매, 이리저리 접힌 치맛자락, 목에 두른 풍성한 주름의 칼라렛 띠, 무엇보다 가슴과 복부를 사정없이 누르는 코르셋의 방해를 받아가며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녀에게 작고 가벼운 책은 최선이었다. 이 시기 여성복은 몸을 옥죄고, 행동을 제약하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슈미즈, 코르셋, 여러 겹의 패티코트, 스타킹 등 열 가지가 넘는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드레스를 걸친 여자. 그녀가 혼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무겁고 꽉 끼는 의복 탓에 여성은 일거수일투족을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코르셋을 착용한 여성은 몸을 앞으로 숙일 수 없기에 다른 이에게 신발 끈을 묶어달라고 해야 했다.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며 남성이 주워 줄 때까지 부채만 파닥거린 것도 같은 이유다. 옷을 입고 벗을 때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해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여성들은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자연스레 학습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이 우리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부장제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파리의 여성 바지 착용 금지 조례 그래서였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용 바지가 등장했을 때 사회가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던 것은. 1851년 여성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1818~1894)는 불편한 드레스가 여성들의 신체와 정신을 구속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용 바지 ‘블루머’를 만들었다. 그런데 남성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거셌다. 여성의 바지 착용을 ‘남성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곧 비난이 쏟아졌다. 런던의 잡지 는 “남편들은 아내가 블루머를 입지 못하도록 당장 금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남편들이 드레스를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래지어를 안 했다는 이유로 한 연예인을 괴롭힌 것과 비슷한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이러한 반발에도 드레스라는 족쇄에서 탈출하려는 여성의 시도는 계속됐다. 그 분수령은 자전거였다. 19세기 말 자전거가 유행하며 여성들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드레스 자락이 바퀴에 말려 들어가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제야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안전을 위해’ 마지못해 묵인했다. 페데리코 잔도메네기, , 1878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렌미술관. 파리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페데리코 잔도메네기(1841~1917)는 이러한 여성복의 극적인 변화를 포착해 화폭에 담았다. 파리의 공원에서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여인이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여전히 짙은 색 스타킹이나 레이스업 부츠로 다리를 가려야 했지만, 코르셋으로 조인 드레스보다 훨씬 편한 모습이다. 이처럼 바지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상징이었으나, 그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불편한 눈으로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그 흔적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 ‘파리 여성의 바지 착용 금지 조례’(1800년부터 시행)가 그것이다. 비록 사문화된 지 오래지만, 파리 여성들이 바지를 입을 때 경찰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규정이 놀랍게도 2013년까지 잔존했다. “문제의 조례는 여성이 남자와 똑같이 옷을 입는 것을 막아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제한하려는 취지로 제정된 것”이라는 프랑스 여성인권장관의 설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코르셋 착용부터 치마 교복까지, 가부장제 사회는 옷을 통해 여성에게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을 주입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만 지나면 내 딸도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는다. 배정될 학교의 교복이 어떤지 찾아보니 예상대로 치마다. 전보다 여학생의 바지 교복 착용을 허용하는 학교가 늘어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여전히 치마를 원칙으로 하는 학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열풍이 사회를 휩쓸고 있지만, 유독 학교는 무풍지대인 것 같다. 자유를 가르치려면 여학생에게 바지를 허하기를. 민주를 가르치려면 옷을 통해 여학생을 통제하려는 욕구부터 거두기를. ‘파리 여성의 바지 착용 금지 조례’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처럼, ‘여학생의 바지 착용 금지’ 규정이 21세기 학교에도 있었다는 게 곧 우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유리
525    [세계는 지금] -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 23 댓글:  조회:2061  추천:0  2019-12-12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여인의 초상' 23년만 무사 회수 도난된 미술관 담쟁이벽 사이에서 발견 (서울=뉴스1) 이원준 기자 | 2019-12-11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초상' © 뉴스1 이탈리아 피아센자(피아첸차)에서 도난당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이 무사히 발견됐다. 1997년 2월 22일 전시준비중이던 피아센자의 리치오디 현대미술관서 깜쪽같이 사라진지 거의 23년만이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의 초기작(1917년)으로 가치는 6000만유로(약 788억원)를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1일 BBC 방송 등에 따르면 그림은 미술관 벽면의 담쟁이 덩굴을 제거하던중 드러났다. 그림은 검은 가방에 담긴채 보호용으로 보이는 철판아래 가려져 있었다. 미술관측은 초기검수를 통해 진품임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23년동안 숨겨져 있었으나 손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방송은 전했다.   경찰측은 도난범들이 경찰 수사나 언론의 관심이 줄어들면 찾아가려 같은 장소에 은닉해 놓은 것으로 추정했다. 도난범들은 당시 지붕의 채광창을 통해 미술관에 진입하고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지붕위에는 이들이 버리고 간 빈액자만 놓여 있었다. 이후 20여년간 도난범이나 그림에 관한 어떤 소식도 나온 바 없다.  미술평론가 비토리오 스가르비는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스타프 작품 회수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고 환호했다.  ======================/// 도난당한 줄 알았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원래 전시됐던 미술관 벽 틈에서 22년 만에 나타났다. 이탈리아 안사(ANSA)통신은 10일(현지 시간)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현대미술관에서 1997년 분실됐던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사진)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당일 미술관 정원사가 건물 외벽의 담쟁이덩굴을 정리하던 중 벽에 붙어 있는 금속판을 발견했다. 이를 열어 보니 건물 내벽과 외벽을 잇는 틈이 보였고 거기에 검은색 봉지가 있었다. 정원사는 “처음에는 쓰레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로라 본판티 미술관 부관장은 “작품 뒷면에 있는 밀랍 봉인이나 도장으로 봐서는 진품 같다”며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듯하다”고 말했다. 진품이라면 그 가치는 6000만 유로(약 793억692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첸차 문화자문위원회 관계자는 도둑이 작품을 훔쳤다가 되돌려놨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관계자는 라퍼블리카에 “도난 직후 당시 미술관, 정원 모든 곳을 샅샅이 수색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작품 상태가 아주 좋다는 것이다. 22년간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여인의 초상’은 사라지기 약 10개월 전인 1996년에 클림트가 다른 작품 위에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시 엑스레이 분석 결과 ‘여인의 초상’은 1912년 도난당한 것으로 추측됐던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인 ‘젊은 여인의 초상’ 위에 그린 그림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    
524    오스트리아 "수수께끼"같은 화가 - 클림트 댓글:  조회:3122  추천:0  2019-12-12
인물세계사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트리아 화가 [ Gustav Klimt ] 출생 - 사망 1862.7.14. ~ 1918.2.6. 1897.4.3 클림트 회장으로 한 빈 분리파가 공식적으로 창설되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 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예술도시 빈에 새바람 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사조 중에서 ‘분리파’라는 이름처럼 특이한 것도 없다.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에는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요제프 호프만,카를 몰,클림트,알프레드 롤러,신원 불명,콜로만 모저(왼쪽), 클림트가 만든 제1회 분리주의 포스터. 분리파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있다(오른쪽) ‘빈 분리파’가 분리파의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크를 중심으로 ‘모나코 분리파’가 창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베를린 분리파’가 이미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 하면 ‘빈 분리파’가 떠오르는 것은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며,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결국 빈 분리파의 등장은 빈이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이미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빈 대학의 천장화로 사용하기 위해 그린 그림,,중 유일하게 그 밑그림이 남아있는 (1900년)(왼쪽), (1900년)(가운데),(1903년)(오른쪽).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 걸작 를 역사 속에 각인 시키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의 마지막 부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즐기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 ,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1907~1908),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1903년 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1907~1908), (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아터 호수에서 플뢰게와 클림트, 그리고 친구들(좌), 1903년 무렵의 클림트(우) 실로 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2009년 2월2일부터 5월1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명작 를 구경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대작 와 , , 그리고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풍경화 등 수많은 걸작들을 포함하여 종합예술을 추구했던 클림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베토벤의 을 들으며 를 오랫동안 구경했던 추억을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해설한 책은 매우 많으며, 각자 나름대로 훌륭하다. 한국의 필자들이 쓴 몇 권의 책은 클림트의 인기만큼이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클림트의 생애를 소설화한 책도 있다. 클림트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필자는 두 권을 소개한다. 다른 책들이 클림트의 생애보다는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면, 다음 두 권의 책은 클림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에바 디 스테파노 저 김현주 역 예담 2006.06.15. 상세보기 에바 디 스테파노의 는 클림트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본문에 언급되는 그림을 거의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클림트의 예술과 생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가치평가를 많이 하지 않고 사실 위주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는 점도 좋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질 네레 저 최재혁 역 마로니에북스 2005.06.05. 상세보기 니나 크랜젤의 또한 클림트의 생애와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당시의 시대상황부터 오늘날 빈 분리파가 새롭게 각광받는 것의 의미까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 있게 기술하였다. 자유분방한 생활 속에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클림트의 진정한 꿈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관련이미지 17                                               구스타프 클림트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 두산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 ] 요약 오스트리아의 화가.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출생-사망 1862.7.14 ~ 1918.2.6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 주요작품 《유디트 Judith》(1901),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는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다.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일로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이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주요 작품에는 《유디트 Judith》(1901),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Portrait of Fritsa Reidler》(19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1917~1918) 등이 있다. 참조항목 상징주의, 아르누보, 키스, 유디트, 다나에, 나무 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 빈 분리파 역참조항목 코코슈카, 에곤 실레, 프리차 폰 리들러, 아담과 이브 카테고리 지역 > 유럽 > 오스트리아 인물 > 미술 > 기타서양미술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입맞춤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corel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두산백과)   ==============================/// 도난당했던 그림 되찾다...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22년 만에 미술관 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갤러리 앞 정원에서 한 인부가 건물 외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가지치기하다 우연히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 그림은 '아르누보의 대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1917년에 그린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 1997년 2월 리치 오디 갤러리에서 도난당했습니다. 갤러리 관계자는 "당시 갤러리 전체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림이 인적이 드문 벽 속에 고스란히 감춰져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며 "그림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 미술계에선 이 그림이 1969년 시칠리아의 한 성당에서 홀연히 사라진 카라바조의 그림에 이어 두 번째로 가치 있는 도난 미술품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전문가에 감정을 의뢰해 그림의 진품 여부를 확인할 계획입니다.
523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리는것은 아닌지?!..." 댓글:  조회:2195  추천:0  2019-12-01
몸도,땅도 기억하는 감각을 잃어버린건 아닐지··· 2019.11.3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싱가포르 수교 45주년 국제네트워크 전시 '더 센시스: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 한국과 싱가포르 등 작가 13팀 참여 토탈미술관 전시 후 내년 싱가포르서 개최애들린 쿠에 ‘속삭임(당신을 기억하는 100가지 방법)’ [서울경제] 감각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서 활동하는 예술가 애들린 쿠에에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는 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더 정확히는 야들리(Yardley)의 잉글리시 라벤더향 파우더를 사용하던 그의 할머니와 고모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작가는 지난 2014년 9월, 싱가포르 라벤더 거리의 철거 예정인 건물을 위한 작업을 요청받았다. 라벤더 향과 할머니들의 시대를 기억해 낸 작가는 장소의 역사성을 되짚었다. 1858년 식민지를 장악한 영국인들이 농담처럼 이름 붙인 ‘라벤더 거리’는 가스 공장의 악취와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채소농장을 가로지르며 우마차가 다니는 곳이었고, 라벤더 향수를 뿌린 성매매 여성들이 드나들던 매춘업소 이름이 그 거리의 대표 건물인 ‘라벤더 스파’였다.  토탈미술관의 기획전 ‘더 센시스(The Senses):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의 오프닝 퍼포먼스로 작가 쿠에가 선보인 작품 ‘속삭임(당신을 기억하는 100가지 방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철거된 호텔 객실을 재구성 한 짙은 보라색 벽면의 공간에는 라벤더 파우더가 수북이 깔렸다. 2개의 종을 매단 가느다란 빨간 실은 아시아 지역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연’의 상징이다. 첸 사이 화 콴 ‘대지의 소리 싱가포르’ 감각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땅도 기억을 품는다. 싱가포르 작가 첸 사이 화 콴은 재해를 겪은 땅을 찾아다니며 깊이 1m 지점의 흙을 파 모았다. 탄소와 무기물을 함유한 흙이 전지처럼 작동해 미묘한 음파를 만들어, 지진·홍수·테러 등 땅이 겪은 상흔을 끄집어낸다. 작품 ‘대지의 소리 싱가포르’는 인간이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자연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번 전시 ‘더 센시스’에 참여한 국내외 작가 13팀은 전쟁이나 식민지를 경험한 적 없는 전후 세대로, 물질적 풍요와 사회·경제적 발전의 변화 속에서 경험한 서로의 ‘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오는 2020년 한국·싱가포르 수교 45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는 12월 2일까지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다음 내년에는 싱가포르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이잠 라만 ‘그는 사랑할 수 없는 한 남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연분홍 꽃은 아름답건만 슬픈 이름을 가졌다. 싱가포르 작가 이잠 라만의 ‘그는 사랑할 수 없는 한 남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야들야들해 보이는 꽃잎의 재료는 라만이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낸 굳은살이다. 파르르 솟은 꽃술은 잘라낸 손·발톱이다. 꽃을 떠받친 잎사귀는 피 묻은 붕대를 잘라 만들었다. 작가는 몸이 기억하는 인간의 감정을 자신의 신체 조각들로 재구성했다. 버려졌을지 모를 은밀하고 사적인 기억들은 작품을 통해 영원성을 얻는 셈이다. 최수앙 ‘언더 더 스킨’ 극사실적인 조각으로 유명한 최수앙의 신작은 일견 파괴된 듯한 모습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한 조각작업을 하다 건강까지 상하게 된 작가가 ‘이제는 안 그래야지’ 다짐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는 새 너무나 ‘잘’ 재현해 놓은 인간 형상을 마주하고선 그만 “얼굴의 가운데를 엄지로 짓누르고 쓸어 올린” 작품이다. 몸에 밴 감각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짓이긴 손가락 지문마저 선명해 “사실과 같은 허구에 또렷한 실재를 남기고” 있다. 김지민 ‘인사이드 아웃’ 작가 김지민의 ‘인사이드 아웃’은 해골 모양의 새장 안에 마주 앉은 새 두마 리를 통해 현대인의 지각·소통방식을 보여준다. 짹짹(tweet)거리는 새들은 생각도, 감각도 없이 옆 사람이 말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따라 읊고 복제만 할 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함몰된 현대인을 풍자하는 듯하다. 김 작가는 의류에 붙은 라벨을 재료로 한 작업으로 유명하지만 ‘라벨 공장’들이 인건비 싼 중국 등지로 옮겨가면서 재료 수급이 어려워진 것을 계기로 전혀 달라진 근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준 ‘입의 향연’ 작가 이준의 ‘입의 향연’은 잘 차려놓은 식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맛보는 입이 아니라 쉴새 없이 재잘거리는 입을 위한 성찬이다. 관객이 내는 소리에 센서가 반응해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인터넷신문 기사 제목·댓글 등을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식탁 색깔은 현재 미술관 바로 위 하늘의 색과 현장의 날씨를 반영한다. 접시 위에 놓인 병을 감싼 노랑·초록·파랑 등의 색깔은 카카오·네이버·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상징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승아 객원큐레이터는 “더 많은 양의 정보를 더 빠른 속도로 소통할 수 있게 된 지금, 과연 인간의 감각과 지성의 지평은 더욱 넓어졌고 그 소통 역시 더욱 확대되었는가 묻고 싶다”면서 “이번 전시는 인간의 감각을 사유하고 새롭게 경험, 지각하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성격을 재조명하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조상인기자 
522    [그것이 알고싶다] - 2000여년전의 그린 벽화... 댓글:  조회:2219  추천:0  2019-11-26
그리스 신화 그린 관능적 벽화 伊폼페이서 첫 공개  2019년11월26일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모습이 그려진 폼페이의 벽화. [EPA=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탈리아 폼페이의 관능적 벽화가 25일(현지시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다. 고대 로마시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이 벽화는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임신하는 그리스 신화 내용을 묘사한다. 작년 11월 폼페이 유적지 내 상류층 저택 침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됐다. 2천년이 지났음에도 그림의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물론 색감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해 고고학계와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레다와 제우스 간 관계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내용 가운데 하나로, 고대 로마의 폼페이에선 이를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가 꽤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프레스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수분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기술 또는 형태로 인식된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으나 서기 79년 8월 인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고고학계는 지금도 폼페이에서 꾸준히 유적·유물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엔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상과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벽화 등이 잇따라 출토돼 시선을 끌었다. 지난달에는 검투사들을 상대로 매춘을 한 여관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두 명의 검투사가 혈투를 벌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발굴된 바 있다.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발견된 '검투사' 프레스코화. [EPA=연합뉴스]
천재 화가 다빈치 '모나리자' 미완성 이유 찾았다? 2019년5월8일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포함한 다수의 미완성작을 남긴 것은 오른손의 마비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6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의료전문가들은 영국왕립의사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RSM저널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다빈치가 말년에 오른손 마비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애로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로마에 있는 빌라 살라리아 클리닉의 성형외과 전문의 다비디 라제리와 폰테데라 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카를로 로시는 16세기의 화가 지오반 암브로지오 피지노가 그린 다빈치의 초상화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초상화에 등장하는 다빈치의 손은 옷으로 감겨 있는 데다 뻣뻣하고 수축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종전의 연구에서는 이를 뇌졸종 탓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두 전문가들은 다빈치가 평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고 오른손으로는 채색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른손에 이상이 생긴 뒤로는 팔렛을 잡거나 붓을 쥐는 데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명화 '모나리자'는 1503년에 착수됐으나 다빈치가 숨진 1519년에도 그의 화실에 남아있었고 완성작은 아니라는 것이 미술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라제리 박사는 다빈치가 죽음을 앞둔 5년 동안 제자를 지도하고 데생을 계속했으면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연유는 바로 오른손 마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빈치의 어색한 손은 뇌졸중 이후의 근육 경직에 의한 주먹쥔 손이라기 보다는 척골신경마비에 의한 이른바 '갈퀴손'으로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라제리 박사는 실족이 뇌졸중 보다는 더 설득력을 가진 원인으로 본다면서 그가 순간적으로 넘어지면서 상지골에 부상을 입은것이 척골신경마비를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척골신경은 어깨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뻗어있으며 손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장한다. /한국경제
520    무수한 점점이 백억이 되기까지... 댓글:  조회:3224  추천:0  2019-11-23
  김환기 '우주' 경매가 132억 넘어… 한국 미술품 '최고'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조금 전 홍콩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가장 값비싼 작품이 나왔습니다. 김환기 만년의 대작 '우주'가 132억 5000만 원에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우리 미술품이 100억 원 넘는 가격에 경매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권근영 기자입니다. [기자] [크리스티 홍콩경매소 : 8800만 (홍콩)달러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132억 5000만 원, 지금까지 경매된 한국 미술품 중 가장 높은 가격입니다. 1971년 뉴욕의 화랑에서 처음 전시된 '우주'는 김환기와 절친했던 외과의사 김마태 씨가 구입해 48년 동안 간직하다가 이번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김환기는 두 폭의 캔버스에 커다란 원을 그리듯 파란 점을 찍고 또 찍어 '우주'를 완성했습니다. 이 그림은 지난해 85억 원에 팔린 김환기의 또다른 추상화 '붉은 점화'의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비싸게 경매된 한국 미술품 10점 중 9점이 김환기의 것입니다. 단순하고도 숭고한 아름다움,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미술의 흐름과 함께 한 그의 작품이 점점 각광받고 있습니다.  [에블린 린/크리스티 아시아 미술 부회장 : 홍콩에서 전시하면 많은 사람들이 김환기를 잘 몰라도 그의 그림에 매료됩니다.] 106년 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달항아리와 매화 같은 전통적인 소재를 사랑했습니다. 쉰 살 되던 1963년 낯선 뉴욕으로 건너가 새로운 미술에 도전했습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 (2012년) : 그 하나하나가 점을 찍을 적에 당신이 생각했던 사람도 있고 산도 있고 별도 있고 그랬어요.] 고향인 안좌도 섬마을의 뻐꾸기 소리를 추억하며, 먼 곳의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노화가가 찍은 무수한 점들은 이제 한국 현대 미술의 문을 활짝 연 별이 됐습니다. (화면제공 :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영상그래픽 : 오은솔) /권근영 기자  ===========================///   김환기 '우주', 한국미술사 새로 썼다… 132억원 낙찰(종합)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국 미술품 첫 100억원 돌파 작가 추상화 최대 크기·유일 두폭화 희귀성·예술성 인정 김환기,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크리스티코리아 제공]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1913∼1974)의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100억원을 훌쩍 넘기며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우주'는 23일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1억8천750만원(8천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이는 구매 수수료는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다. 수수료를 뺀 낙찰가 기준으로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원 넘는 가격에 팔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20세기&동시대 미술 이브닝 경매 하이라이트 작품 중 하나로 선보인 '우주'는 시작가 약 60억원(4천만 홍콩달러)으로 출발, 치열한 경쟁 끝에 예상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전화로 경매에 참여한 고객에게 돌아갔다. 낙찰자는 크리스티 뉴욕을 통해 경매에 참여한 외국 컬렉터로 추정된다.  1971년작 푸른색 전면점화인 '우주'는 김환기 작품 가운데 가장 큰 추상화이자 유일한 두폭화다. 254×127㎝ 독립된 그림 두 점으로 구성돼 전체 크기는 254×254㎝에 달한다. 김환기 작품 중에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림으로,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작가의 말년 뉴욕 시대에 완성했다. 자연의 본질을 담아내려고 한 김환기 예술사상과 미학의 집성체로 평가된다.  작가의 헌신적인 후원자이자 각별한 친구, 주치의였던 의학박사 김마태(91)씨 부부가 작가에게 직접 구매해 40년 넘게 소장했다. 1971년 완성 이후 경매 출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환기 작품은 한국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1년 6개월 만에 자체 경신했다. 직전 최고가는 김환기가 1972년 그린 붉은색 전면점화 '3-II-72 #220'가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기록한 낙찰가 85억3천만원(6천200만 홍콩달러)이다.  김환기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순위 상단을 독차지했다. 9위 이중섭 '소'를 제외한 상위 10위가 모두 김환기 작품으로 채워졌다. 이날 경매 결과는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쾌거로, 김환기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이 작품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 "'우주'만이 한국미술품 최고가 다시 깰 것"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앞에 선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부문 부회장. 2019.11.23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우주'는 경매시장에 등장할 때마다 늘 새로운 기록을 남길 것입니다. 이 작품만이 김환기 기록을 다시 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3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 낙찰 기록을 세운 김환기 '우주'(Universe5-IV-71 #200)에 대한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의 평가다. 경매에 앞서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에서 만난 에블린 린 부회장은 '우주'의 한국미술품 최고가 달성을 확신하며 "이번 기록은 기념비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한국 작품이 예술성과 희귀성을 모두 갖춘 '우주'의 기록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는 분석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한국 대표 작가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김환기 전면점화 가운데 가장 크고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우주'는 실제 이날 경매에서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대만 출신 에블린 린 부회장은 소더비에서 14년간 근무하고 지난해 크리스티로 옮겨 동아시아 미술품 경매를 총괄한다. 2013년 장판즈의 '최후의 만찬'으로 당시 아시아 동시대 미술 경매 최고가 경신을 끌어내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2015년 홍콩에서 기획전을 열어 한국 단색화를 처음 선보이는 등 한국 근대 미술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김환기와 '우주'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한국 미술에 관심이 많고 특히 김환기 작품을 좋아한다"라며 "지난 10년 가까이 김환기 작품을 세계 무대에 소개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갈 때마다 '우주'가 위탁 전시된 환기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정말 훌륭하다고 느꼈다"며 "세계 시장에 내놓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우주'는 김환기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김마태 박사가 작가에게서 직접 사들여 소장한 작품이다. 서울 환기미술관에서 대여해 전시했으며, 경매에는 이번에 처음 나왔다.  김환기와 김 박사는 1950년대 초반 부산 피란 시절 우연히 만나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김 박사는 1953년 25세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로 떠났다. 김 박사는 성공한 외과 의사가 되고, 파리에서 3년간 서양미술을 접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1963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 재회한 이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지고, 김 박사는 많은 김환기 작품을 구매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컬렉션인 '우주'는 1971년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열린 김환기 첫 뉴욕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전시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할 만큼 작가도 큰 애정을 가졌다. 김 박사는 40여년간 소장한 '우주'를 마침내 시장에 내놓기로 하고, 지난여름 여러 경매사 중 크리스티를 선택했다. 동아시아 미술 담당자인 에블린 린 부회장이 뉴욕으로 날아갔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우주'를 큰 무대에 내놓는 날을 오래도록 꿈꿨는데 이뤄졌다. 운명적이었다"고 당시 감격을 전했다.  경매를 앞두고 전시장에 걸린 '우주'는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며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붓으로 점을 찍듯 작업해 자연스러운 번짐이 있는 작품에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라며 "많은 색을 써서 화려하게 그리기는 쉽지만, 색을 절제하면서도 다양한 푸른 빛을 낸 김환기는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김환기와 한국 미술 작품이 세계시장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그는 "서양 미술계에서도 '우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라며 "단색화를 비롯한 한국미술이 국제무대에서 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 PICK 안내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 김환기 작품 '우주' 131억여원 낙찰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23일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달성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작품 ‘Universe 5-IV-71 #200’(1971년 작·일명 ‘우주’). ‘우주’는 이날 저녁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8750만원)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의 작품 ‘Universe 5-IV-71 #200’(일명 ‘우주’)이 23일(현지 시간)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8750만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거듭 경신해온 김 화백의 작품이 이날 기존 최고가 기록을 다시 깬 것이다. 한국 현대 미술작품이 경매에서 100억원을 돌파한 것도 처음이다. 또 ‘우주’가 최고가를 차지하면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상위 1~10위 가운데 김 화백의 작품이 9개에 이르는 대기록도 세워졌다(이중섭 화백의 ‘소’가 9위다). 미술계에서는 한국 작가의 작품값이 100억원 대를 넘어서면서 세계 미술시장에서 한국의 입지가 다져지고, 향후 김 화백은 물론 한국 화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1971년에 미국 뉴욕에서 그려진 작품 ‘우주(Universe)’는 푸른색 전면 점화(點畵)로 김 화백의 전성기 화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받아 왔다. 김 화백 작품 중 유일하게 2폭 짜리이자 크기도 가장 크다(254×127㎝×2㎡). ‘우주’는 김 화백의 후원자로 미국에서 활동한 의사 김마태씨와 부인 전재금씨가 작가에게서 직접 구입, 40여년 소장해왔다. 경매에 나온 것도 이번이 최초다. ‘우주’는 이날 저녁 홍콩 완차이의 컨벤션센터 그랜드홀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의 ‘20세기와 동시대미술 이브닝 세일’에 17번째로 출품됐다. ‘우주’ 경매는 시작가 4200만 홍콩달러로 막을 열면서 경합이 벌어졌다. 치열한 경합 끝에 결국 전화로 응찰한 낙찰자가 시작가의 2배가 넘는 131억여 원의 최고가를 부르면서 경매는 마감됐다. 낙찰자는 경매 특성상 신원이 공개되지 않지만, 외국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이자 김 화백 작품의 최고가이기도 했던 기존 최고가 기록은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6200만 홍콩달러(약 85억3000만원)에 낙찰된 붉은색 점화 ‘3-Ⅱ-72 #220’이다. 2017년 4월 케이옥션 서울경매에서는 푸른색 전면 점화 ‘고요 5-IV-73 #310’가 65억5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김 화백의 작품이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처음 기록한 것은 2015년 10월이다.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1971년 작품 푸른색 전면점화 ‘19-Ⅶ-71 #209’가 약 47억2100만원에 낙찰되면서 직전 최고가 기록이던 박수근 화백의 작품 ‘빨래터’를 뛰어넘었다. 이후 김 화백의 작품은 자체 경신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도재기 선임기자 =====================================/// 한국미술 新 기원 연 김환기… "세계시장이 주목할 것"  2019.11.23.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국미술품 최고가 10위 중 9개 김환기 작품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예상을 크게 웃도는 가격에 판매되며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 미술품 사상 최초로 경매 낙찰가 100억원 돌파가 기대됐던 '우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단숨에 130억원대를 기록했다. 한국 미술이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대기록 세운 김환기 대표작 '우주' 김환기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우주'는 경매 출품 당시부터 화제가 됐다.  1971년 완성 후 경매 시장에 처음 나온 데다 예술성, 희귀성을 모두 갖춰 낙찰가 100억원 돌파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졌다. 그동안 많은 미술계 '큰손'들이 손에 넣고자 했고, 경매사들도 이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 애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경매에서도 국내외 컬렉터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시작가는 약 60억원(4천만 홍콩달러)이었으나 추정가 상단인 95억원 선을 순식간에 넘고 100억원마저 돌파했다. 현장에 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전화로 참여한 두 입찰자 간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져 가격은 132억원까지 치솟았다.  일각에서는 홍콩 정세 불안 등으로 낙찰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기우였다. 별을 상징하는 푸른 점들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우주'는 작가의 작품세계가 완성된 뉴욕 시대 대표작이다. 김환기 특유의 점화 중에서도 정신적, 기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단계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환기는 1970년께 얇은 서예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기법으로 전체 화면에 점을 찍는 전면점화를 선보였다. 이후 타계할 때까지 캔버스를 내려다보면서 한 점씩 찍어나가는 작업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척추신경이 손상될 정도였다. '우주'는 김환기 전체 작품 중 가장 폭넓은 푸른 색조를 사용한, 가장 큰 그림이다. '환기 블루'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푸른빛은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이다. 작가가 남긴 유일한 두폭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작가의 추상화 가운데 완전한 원형 소용돌이 형태가 나타나는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 "한국 미술 재평가 계기 만든 쾌거"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우주'를 가장 귀한 작품을 소개하는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하이라이트 이브닝 경매'에 올리고 별도 도록도 제작하는 등 공을 들였다.  이날 경매에는 김환기를 비롯해 요시모토 나라, 산유, 자오우키, 후지타 등 아시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여럿 나왔다. 그중에서도 '우주'와 이날 경매 최고가인 398억6천만원(2억6천6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된 산유의 '다섯 명의 나부'에 이목이 쏠렸다. '우주'는 프리뷰 전시장에서도 산유 작품과 마주 보는 부스에 전시됐다. 그만큼 이번 경매에서 김환기와 '우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그래서 이날 경매 결과가 더욱 중요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는 직전 기록보다 무려 47억원 뛰었다. 기존 기록은 김환기의 1972년작 붉은색 전면점화가 지난해 5월 기록한 85억3천만원(6천200만 홍콩달러)이었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7억2천만원에 팔린 푸른색 전면점화 '19-Ⅶ-71 #209'를 시작으로 김환기 작품은 지난 4년간 한국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7차례나 다시 썼다.  이날 '우주' 경매 결과를 포함하면 국내 미술품 판매가 상위 10위권이 9위 이중섭 '소'(47억원)를 제외하고 모두 김환기 작품으로 채워진다. 이날 경매 전까지 10위였던 박수근 '빨래터'가 11위로 내려갔다.  미술계는 김환기의 약진으로 한국 미술이 세계시장에서 더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어려운 시기에 절대 가치를 인정받은 쾌거로, 한국 대표작가 김환기가 국제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상징적인 액수 100억원을 돌파한 김환기 작품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는 "100억원대를 깨는 한국 작가가 나왔으면 하는 미술계 염원이 있었는데 매우 의미 있는 결과"라며 "그동안 작품성에 비해 국내 작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반전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도 "앞으로 한국미술이 국내외에서 다시 한번 더 부각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이 작품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2019.11.23 ===================================/// '우주',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 ‘우주’는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diptych)이다. 이는 뉴욕 시절 김환기의 추상예술의 정수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하다. 세로 254cm, 가로 254cm의 화폭을 푸른 점들이 가득 메우며 두 원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는 김환기 작고 3년 전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그림 중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지만, 경매 시장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를 소장해온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마태(한국명 김정준)·전재금씨 부부. 1951년 부산 피난시절 김환기를 만난 부부는 그에게서 작품을 직접 사들여 50년 가까이 보관해왔다. 첫 만남부터 김 화백이 타계한 1974년까지 김마태씨는 단순한 후원가를 넘어 친구로서 김환기의 작품 활동을 지원해왔고,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미술 작품 이상이었다"고 한다.  1972년 김마태 박사의 거실서 자신의 작품 '우주' 앞에 앉아 있는 김환기. [사진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주’는 그동안 환기미술관에서만 전시됐다. 이후 크리스티를 비롯한 여러 경매사나 바이어들이 재단 측으로 숱한 러브콜을 보냈으나 소장자인 김마태씨가 답한 적은 없었다. 그런 소장자가 ‘우주’를 경매에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에블린 린 (Evelyn Lin)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 & 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은 "그가 작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은 단순히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 시장 내에서 김환기에게 걸맞은 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김마태·전재금씨 부부가) 크리스티 뉴욕에 연락해 왔을 때, 저는 운명을 느꼈어요. 김환기의 작품을 미술 시장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포지셔닝)하는 것이 김마태씨의 꿈이었기에 크리스티 뉴욕에 먼저 연락해온 것입니다.”  린 부회장은 김환기의 ‘우주’가 한국 추상미술의 정수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 자체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원은 음과 양의 조화, 해와 달,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우주의 모든 기운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다. 제목이 ‘우주’인 것도 그런 이유다.  김환기 기록, 여기서 끝날까? 이미 한국 미술 시장에서는 김환기의 경쟁상대는 김환기뿐이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톱5가 전부 김환기 작품이다. 앞서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붉은색 점화 ‘3-II-72 #220’이 85억에 낙찰되면서 김환기의 최고가 기록과 한국 미술품 경매 기록이 경신된 바 있다. 올해 4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는 분홍색 점화 ‘무제’가 71억원에 낙찰됐다.  작품가격 사이트 K-Artprice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지난 5년간 김환기의 작품은 총 141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김환기 작품은 나오기만 하면 최고가”라는 것이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의 설명이다. 린 부회장은 전날 경매에 앞서 “김환기의 신기록은 ‘우주’만이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한국미술 성장에 직결될까? 하지만 린 부회장은 “(김환기 작품의 최고가 기록이)바로 한국 미술 시장의 성장과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덧붙였다. 김환기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한국 미술의 걸작(마스터피스)은 경매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번 신기록은 “김환기 미술 시장만 바꿀 것”이라 말했다. “한국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대부분이 미술관 소장이라 시장에는 좋은 작품이 많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 정상화 화백의 그림을 보고 반했지만, 작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미술 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 미술 시장은 연간 4000억원 규모로, 28조원 정도의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 미술 저평가돼 있다" 린 부회장은 “이번 경매에 나온 김환기, 박서보 등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 자체가 저평가되어 있다”면서 “미술은 어떤 아이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며 “한국 미술에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밝혔다.  /홍콩=윤소연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 한국 미술사 새로 쓴 김환기는 누구? 2019.11.24.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 앵커멘트 】 한국 미술사를 새로 쓴 김환기 작가는 대중은 다소 생소하실 겁니다. 어떤 인물이고, 이번 경매는 어떻게 이뤄진 건지 뒷얘기를 문화스포츠부 국영호 기자와 함께 뉴스추적을 해보겠습니다. 【 질문 1 】 132억 원, 낙찰가가 이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이 됐던 건가요? 【 답변 1 】 사실 이번엔 한국 미술품 최초로 100억 원을 돌파할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다른 작품이 국내 최고인 85억 원 거래가 됐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액수가 나오자 다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 질문 2 】 정말 그랬을 것 같은데, 경매 현장 분위기 자세히 전해주시죠. 【 답변 2】 이번 우주란 작품의 경매는 10분 정도 진행이 됐습니다. 가치가 낮게 매겨진 작품은 1분, 중요 작품은 5분 정도 소요된 걸 보면 '우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과 일본 작품 경매가가 그동안 2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어왔었는데, 우리 미술도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이학준 /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 - "마지막에 8,800만 홍콩 달러에 최종 낙찰됐을 때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한국 미술이 세계) 주류 미술시장에 편입됐다는 신호탄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질문 3 】 그런데 132억 원에 낙찰한 분,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 답변 3】 크리스티 경매 측은 고객 정보 보호를 위해 '신원 미상의 전화 응찰자'로만 밝힌 상황인데요. 오늘 오전에 한 언론에서 '국내 모 건설사 회장의 손자인 25세의 한 큐레이터'라고 보도를 해서 이목을 끌었습니다. 당사자는 "애매한 부분 있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말을 아낀 상황이고, 일각에선 외국인 수집가란 말도 나옵니다. 그리고, 낙찰자는 구매 수수료까지 포함하면 최종 구매가로 우리 돈으로 153억 정도를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질문 4 】 그렇다면, 영상에 계속 나오긴 했지만, 우주란 작품 어떤 그림인가요. 【 답변 4 】 작품은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점으로 꽉 채워진 '전면점화' 형태입니다. 작가가 작품명처럼 우주를 표현한 것인데요, 두 가지로 해석해 그린 두 폭의 그림이 하나로 붙여져 구성돼 있습니다. 전체 크기는 가로, 세로 2m를 훌쩍 뛰어넘는 대형작품인데요, 김환기 작품 가운데 가장 큰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 인터뷰(☎) : 문지수 / 크리스티 코리아 실장 - "음과 양, 여성과 남성 이렇게 우주의 본질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하셨거든요. 고국의 밤하늘을 그리워하면서 한 점 한 점 그리셨던." 【 질문 5 】 그럼, 이런 걸작을 완성한 김환기 작가는 어떤 인물인가요. 【 답변 5 】 김환기 작가는 사실 고인입니다. 1913년에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1974년 미국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주는 작고 3년 전인 1971년에 그린 것이고요. 굴곡진, 어떻게 보면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청소년기는 국내에서, 이후 일본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습니다. 유명 시인인 이상의 부인과 재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요, 미술 인생 말미엔 미국 뉴욕에서 이번 우주를 비롯한 걸작들을 쏟아냈습니다. 【 질문 6 】 그럼 우주란 이 작품 대중은 볼 수 있습니까. 【 답변 6 】 사실, 지난달까지는 김환기 작가의 이름을 딴 환기미술관에 전시됐었습니다. 그런데 작품이 현재 경매를 위해 해외로 가 있는 상황이라 쉽진 않아 보입니다. 낙찰자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인이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소장한다면 공개가 어렵고,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공개한다고 하면 가능할 일일 것 같습니다. ---- 김환기 작가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그림만 그렸을 정도로 집념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만의 예술혼과 진정성이 이제 와서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 것인데, 그 울림이 상당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큰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문화스포츠부국영호 기자였습니다. ===============================、、、 ... ‘우주’가 경매에 나오는데 김환기의 오랜 절친이자 후원자였으며 주치의였던 김마태(91) 박사와의 인연이 그 배경에 있어 눈길을 끈다. 크리스티는 이번 경매를 앞두고 발간한 ‘우주’ 도록을 통해 이 작품을 40여년간 소장하며 김환기와의 우정을 지켜온 김마태 박사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김마태 박사는 현재 미국 뉴욕에 산다. 인터뷰에 따르면 김환기와 김마태 박사의 첫 만남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대 부산 광복동의 한 커피집이었다. 당시 전쟁을 피해 내려온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김마태 박사의 부인 전재금의 어머니인 소설가 김말봉도 그 중 하나였다. 김마태 박사는 당시 약혼자였던 전재금과 함께 길에서 우연히 김환기와 만나 인연을 맺고 곧 절친이 됐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과 프랑스 등 각기 다른 대륙에 있었음에도 돈독한 우정을 이어왔다. 1963년 김환기가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주할 것으로 결심하고 그의 부인이 이듬해 합류할 때 김마태 박사가 항공권 비용을 도왔다. 이에 김환기는 감사의 표현으로 자신의 1959년작 ‘섬의 달밤’을 김마태 박사 부부에게 선물했다. 이후 이들 부부는 점점 더 자주 만났으며 김마태 박사는 개업과 함께 더 많은 김환기의 작품을 구매하며 컬렉션을 점차 키워갔다. ‘우주’는 뉴욕의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1971년 전시됐고 이때 김마태 박사와 그의 부인이 작품을 구매해 소장해왔다. 김마태 박사는 “김환기 화백은 언제나 환영 받는 손님이었다”며 “친화력 있는 웃음과 짓궂은 농담으로 인해 그는 중심 인물로 종종 주목을 받곤 했다”고 회상했다... =================================///   김환기 ‘우주’ 구매자 미스터리… “한국인 아니다” VS “20대 한국인 컬렉터”  2019.11.24.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131억 한국 미술 최고가 경신한 ‘낙찰자’에 관심 집중…송자호 큐레이터 “애매한 부분 있어”] 김환기,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 /사진제공=크리스티코리아 23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 역사상 최고가인 131억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의 주인공을 놓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술계 관례상, 낙찰자의 신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구매자가 20대 한국 컬렉터라는 얘기가 퍼지면서 ‘사실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우주’는 10분이 넘는 치열한 경합 끝에 약 131억 8750만원(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구매 수수료를 포함하면 150억원이 넘는다.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의 경매를 담당한 크리스티코리아 측은 낙찰가를 알리면서 구매자는 “한국인이 아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K씨가 보낸 ‘긴급속보’라는 제목의 메일에는 “한국인이 최종 구매자”라며 간단하지만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K씨 내용에 따르면 25세 한국인 송자호 큐레이터가 마지막까지 전화응찰로 치열한 경합으로 따라갔으며(구매의사가 확실해 최종 가격까지 경합했다는 의미) 미국 국적의 송씨 대리인이 직접 전화연결로 낙찰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구매 목적은 송씨 개인의 수집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구매자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보도자료 내용은 변함이 없다”며 “송자호 큐레이터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낙찰자가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자, 송자호 큐레이터는 24일 오전 한 언론과 전화통화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며 직·간접적으로 구매에 관여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한국 미술 경매 시장에서 ‘최초’와 ‘최고’ 기록이 나오면서 송 큐레이터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송씨는 송승헌 전 동원건설 회장의 장손으로, 동원건설에서 문화예술 분야를 도맡고 있다. 현재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수석큐레이터다. 미국 보스톤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2015년부터 동원건설 큐레이터로 입사해 다양한 전시의 기획과 후원을 담당해왔다. 그는 올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업 대신 미술을 선택한 것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며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상, 꿈꿔온 것을 이뤄내고 싶어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송 큐레이터는 국내 신인작가를 후원하고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면서 국내외 갤러리로부터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걸그룹 카라 출신의 박규리와 연인 사이로도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지난 6월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린 ‘낙서 천재’ 존 버거맨 전시회에서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송 큐레이터는 “앞으로 기획하는 전시에 연예인 등을 참여시켜 대중적으로 더 알리고 싶다”며 미술의 대중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김고금평 기자 =======================================/// 두산백과 김환기   [ Kim Whan Ki , 金煥基 ] 요약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미지가 걸러진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구현해냈다. 출생-사망 1913.2.27 ~ 1974.7.25 호 수화(樹話) 국적 한국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전남 신안 주요수상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회화부문 명예상(1963),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1970) 주요저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005) 주요작품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달과 산》(1960),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주요업적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서구 모더니즘의 한국화 구현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고, 이어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나 ‘백만회’(1936)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에는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추상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론도》(1938) 같은 작품을 보면 음악적인 주제와 어울리는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음악적 서정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그룹전을 열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의 멋에 깊이 심취하여 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파리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그의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파리에서의 제작 기간 동안 그 농도를 더했다. 그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을 선보였고, 이는 후에 고국산천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뉴욕에 정착한 1963년 무렵에 미국 화단의 주도적 경향은 색면회화였지만, 한편으로는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실험적 미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뉴욕 시기 작품은 크게 형상이 남아 있는 1970년 이전과 점과 선만의 완전한 추상으로 화면 전체가 변하는 1970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한 1974년까지는 그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서양미술을 풍부하게 경험했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시대의 문인화가였다. 비록 자연의 외형은 사라졌으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1년과 1972년의 그의 작품에서는 점화의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활형의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1973년에는 활형과 직선들이 교차되거나 어우러져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무한으로 열린 공간의 확장을 상징하고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풍류와 정취를 지닌 인정 많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온몸으로 예술을 살다가 이렇게 61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곁은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지켰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다.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산》(1958), 《달과 산》(1960), 《18-VII-65 밤의 소리》(1965),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Echo 22-1》(1973), 《09-05-74》(1974)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환기 [Kim Whan Ki, 金煥基] (두산백과) ==============================================/// 한국의 미술가 동경유학: 추상회화를 실험하다     김환기의 작품활동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가 동경유학을 했던 시절이다. 그 이유는 그 무렵에 활동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은 동경유학 시기를 회고하며 “우리는 동경에서 공부했지만 유럽의 미술을 또는 세계문학을 공부했으며 되도록 일본의 영향을 안 받으려고 노력했었다. 실은 영향을 받을 것도 없었고 일본이란 우리들 생리에 맞지도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1) 그러나 김향안의 회상을 존중하더라도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다니고 배우는 과정에서 일본화단과 알게 모르게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동경유학 시절 김환기는 우리나라의 어느 화가들보다 일본화단의 진보적인 화가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작가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부농 김상현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1927년 서울의 중동중학에 진학하였다. 김환기는 19세였던 193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동경의 니시키시로중학[錦城中學]을 다녔고 1년 후인 1932년에 졸업했다. 그 후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1937년까지 연구과에 남아 있었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50년사』에 의하면 1934년 당시 미술과 관계되는 교수와 강사 중 서양화 실습 교수에는 후기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던 기무라 쇼오하치[木村莊八, 1893~1958]를 비롯해 나카시마 주니로[長島重二郞]가 있었고, 일본미술사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담당하였다.2) 김환기가 이들에게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일본의 민예운동을 일으킨 야나기가 이 무렵 일본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김환기는 어느 글에서도 자신이 야나기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조선 도자에 대한 야나기의 관심이 혹시 김환기가 훗날 한국의 도자를 사랑하고 작품의 소재로 삼게 되는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게 된다. 일본대학 재학시절인 1935년에 김환기는 이과회(二科會)에서 주최하는 ‘제22회 이과전(二科展)’에 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의 데뷔 작품인 약 100호 크기의 이 작품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데 이 작품에 대해 김환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는 달기만 했던 작품이다. 모델 없이 제작했으나 누이동생 사진을 보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작품이었다. 구름, 버드나무, 새알들이 보이는 지극히 낭만적인 풍토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나는 남방의 따사로운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랐다. 섬이란 태풍이 오기 전에는 평화롭기만 했다. 사실이다. 그렇지만 특히 종달새 노래하기 시작하는 봄이면 살았나 죽었나 한계를 모를 정도로, 하여간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느껴지기만 하던 내 고향이었다. 나의 소년 시절의 이러한 것들을 표현해보려고 내 딴에는 애써보고 한 달 만에 가 이루어졌다.3)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소녀의 상체나 팔을 거의 원통으로 단순화하고 추상화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 올린 바구니의 명암표현에서는 입체주의[Cubism]적 단면화를 보는 듯하고, 바구니 안에 든 새알은 초기 입체주의 작품들에서 간혹 나타나듯 그대로 투명하게 표현되었다. 또 명암을 강하게 대조시킨 배경과 축도된 원근법을 통해 이미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78.0×127.0cm.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제22회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김환기의 데뷔작이다. 원통처럼 표현된 상체나 팔, 투명하게 보이는 새알 등을 보면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을 단순화ㆍ추상화시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78.0×127.0cm.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제22회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김환기의 데뷔작이다. 원통처럼 표현된 상체나 팔, 투명하게 보이는 새알 등을 보면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을 단순화ㆍ추상화시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입체주의의 변형, 예를 들면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의 작품에서 기하학적으로 원통화되어가는 인물표현들이나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의 1912년경의 초기 작품들, 또는 1928년에 프랑스에서 귀국해 ‘이과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1897~1978]의 양식과도 유사성을 가진다. 이와 같이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단순화된 형태의 추구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20세기 초 근대화ㆍ도시화되어가는 유럽 사회의 모더니티의 표현이다. 그런데 김환기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실험적 형태와 이질적인 토속적인 서정성이 서로 공존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섬이라는 배경설정과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소녀의 전 근대적 주제, 그리고 작가가 털어놓는 평화로운 섬의 낭만적 분위기가 서구의 근대적인 양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때부터 자연에 대한 서정적 반응이 김환기 작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김환기는 대학 밖에서도 다른 화가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활약할 수 있었던 기회가 많았다. 우선 그가 와 같이 낭만적인 주제에서 좀더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환하는 데에 적어도 간접적인 영향을 준 화가는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城, 1905~1999]였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유럽에서 공부한 무라이는 귀국 후 문화학원에서 가르치면서 주로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1910년대 회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1937년부터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풍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모를 모색한 화가였다. 무라이는 1935년 12월에 동경 시나가와[品川]구의 ‘포플러의 집’으로 불리던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그 후 이곳에는 화가이자 문화학원에서 가르치던 츠다 세이슈[津田正周, 1907~1952]가 이사해왔고, 화가 오노사토 도시노부[小野里利信, 1912~1986]가 자주 놀러왔다. 이 ‘포플러의 집’에 약 1년 정도 같이 기거한 우리나라 화가들이 김환기와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이었다. 무라이 마사나리의 화실에서(1938년 동경). 오른쪽으로부터, 김환기, 길진섭, 무라이 마사나리, 무라이의 부인이다. 무라이는 ‘포플러의 집’으로 불리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김환기는 이곳에서 1년 정도 같이 기거하였다. 1991년 일본에 있었던 필자4)는 무라이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무라이는 키가 훌쩍 컸던 김환기를 기억하면서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잘 울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무라이와 츠다 그리고 오노사토는 모두 1937년부터 시작되는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김환기뿐 아니라 문화학원에 다니던 문학수(文學洙, ?~?),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유영국 등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이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36년은 김환기에게 매우 바쁜 해였다. 그는 ‘제23회 이과전’에 아직도 인물의 형상이 남아 있는 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그는 훗날 일본 추상회화의 선구자들이 되는 도고 세이지, 야마구치 다케오[山口正男, 1902~1983], 사이토 요시시게[齊藤義重, 1904~2001], 야마모토 게이호[山本敬輔, 1911~1963] 등과 같이 제9호실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제9호실에서 전시한 이들 작가들은 1938년 10월에 도고 세이지와 후지타 츠구지[藤田嗣治, 1886~1968]를 고문으로 하여 ‘구실회(九室會)’를 결성하였다. 김환기는 1938년 12월 결성 성명서를 발표할 때 가입하였으나 1939년 5월에 있었던 제1회 전시회에 참여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그 직후 탈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한편 1936년에 김환기는 길진섭(吉鎭燮, 1907~?), 다시카미 다케나[鶴見武長], 간노 유이코[管能由爲子]와 더불어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고 동경 긴자에 있는 기노쿠니아[紀伊國屋] 화랑에서 네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 그룹은 도고 세이지, 아베 곤고[阿部今剛, 1900~1968], 초현실주의 화가 고가 하루에[古賀春江, 1895~1933], 그리고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귀국했던 후지타 츠구지 등이 1933년에 개설한 아방가르드 양화(洋畫)연구소의 연습생들이 결성한 것이다.6) 김환기가 다니던 이 연구소의 일본 화가들은 전위적 추상화가에 속하였으며 전후에는 모두 유명 미술가들이 되었다. 이해 11월 그는 동경의 아마기[天城]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으나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나 반응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알려진 바가 없다. 1937년 4월에 김환기는 일단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해서 그는 일본 최초의 추상미술 공모전이었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고향 기좌도 혹은 서울에서 작품을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김환기의 작품목록과 활동, 그리고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필자는 이미 논문으로 자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 7) 그가 출품한 작품들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사진 자료를 보면 대부분 곡선과 직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서울 화단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어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 남아 있는 예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중인 는 1938년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은 제4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보인다. 에는 아직도 피아노의 곡선적인 형태와 사람의 형상이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면에서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 노란색과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진 구성작품이다. 이것은 도 마찬가지이다. 김환기의 이러한 표현양식은 ‘자유미술가협회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기하학적 추상이나 구성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작품들이 엄격하고 팽팽한 균형감과 역동감에 근거하는 데 비해 김환기의 와 같은 작품에서는 곡선이 더 많이 사용되었고,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낄 수 있다. 김환기는 동경에 있으면서 서양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음악적 서정은 그 후에도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0.7×72.6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론도’는 순환부분을 가진 악곡 형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서정적인 운율감이 드러나 있다.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0.7×72.6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론도’는 순환부분을 가진 악곡 형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서정적인 운율감이 드러나 있다. 서울과 기좌도를 왕래하고, 일본에 작품을 보내기도 하면서 지내던 김환기는 1940년 10월 서울의 정자옥(丁字屋)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러나 그 후 해방까지 일본이나 우리나라 화단의 활동은 전쟁의 영향으로 위축되었고 김환기의 경우에도 역시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문인들을 많이 알고 지내게 되었고 문예지였던 『문장(文章)』 등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면서 지냈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김환기(c)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동경유학: 추상회화를 실험하다 (한국의 미술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안 김환기 고택   [ 新安金煥基古宅 ] 이미지 크게보기 2015년에 촬영된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이다. 유형 유적 성격 생가 건립시기·연도 20세기초 소재지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문화재 지정번호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 문화재 지정일 2007년 10월 12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설립된 화가 김환기의 생가. 국가민속문화재. 내용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 신안 김환기가옥은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의 생가로서 현재 안채와 화실 1채로만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920년에 건축된 것으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현 소유주는 신안군 교육청으로 되어있다. 현재는 교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별동으로 건립된 화실은 194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이 건물 역시 현 소유자는 김환기 가족이 아닌 정기웅으로 되어 있다. 안채와 화실 사이에 사랑채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 훼철되어 현재는 공터로 남아있다. 김환기는 안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화실은 김환기가 주로 방학을 이용하여 잠시 서울에서 내려와 작업을 하던 곳이다. 현재는 살림집으로 사용하여 내부가 많이 변형되어 있다. 신안 김환기가옥은 안좌면 읍동마을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입지한 집터는 상당히 넓으며 건물 위치는 안쪽에서 보아 좌측에 안채, 우측에 화실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기와집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좌측으로부터 곡간, 건너방, 대청마루, 안방, 정지의 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지 앞쪽으로 꺾어져서 다시 방 1칸이 있다. 이 방이 김환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구조는 다듬은 네모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은 정지의 판장문만을 제외하고 모두 띠살문으로 되어 있고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화실은 본래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기와로 개조된 一자형 민도리집이다. 평면 구성은 현재 우측 전면으로 방 2개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뒤쪽으로 정지, 그리고 좌측으로는 넓은 대청과 끝으로 곡간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좌측으로 방 1칸과 현재의 정지에 목욕칸만이 있었고 나머지(곡간 제외) 공간은 모두 넓은 대청(화실)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은 현재 별도의 담장 내에 위치하고 있다. 신안 김환기가옥은 건축적 측면 보다는 이 고장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 김환기의 생가로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전남의 전통건축』(천득염, 전남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 1999) 『문화재도록』(전라남도, 1998) 『지방문화재 조사보고서』 (I)(전라남도, 1992. 10) 관련이미지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1999년 이전에 촬영된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촬영: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안 김환기 고택 [新安金煥基古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19    [고향자랑] - 아름다운 장백... 댓글:  조회:2235  추천:0  2019-10-23
장백현  장려한 70년 촬영전 펼쳐 [ 2019년 10월 22일 ]     장백조선족자치현농업은행, 현문학예술가협회, 마록구진, 금화향, 현촬영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장려한 70년, 새 시대에 분투하자’를 주제로 한 새 중국 창립 70주년 촬영전이 10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 현민족문화광장에서 펼쳐졌다. 이번 촬영전에는 240여폭의 사진작품과 60여폭의 서법작품이 전시되였다. 이번 촬영작품은 광범한 과외작가들이 장백산의 아름다운 산과 들을 누비거나 또한 중조변경에 위치한 압록강변을 거닐며 찰칵찰칵 렌즈에 담은 것이다. 작품은 모두가 새 중국 창립 70년간 당의 민족정책의 찬란한 빛발아래 장백의 정치와 경제, 민족단결과 사회의 각항 사업에서 이룩한 휘황한 성과를 열정적으로 구가하고 고향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그대로 생동하게 부각했는바 광범한 관람자들의 발목을 끌었다. 아래에 촬영, 서법작품을 사진으로 본다.   ///길림신문 /윤녕(尹宁) /최창남 기자
518    우리 가락 우리 멋 - 장고야 울려라... 댓글:  조회:2001  추천:0  2019-10-10
517    ... 댓글:  조회:2001  추천:0  2019-05-13
2015년 1월 30일 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을 촬영한 사진. 불빛이 환한 한국(오른쪽 아래)과 중국 대륙 (왼쪽 위) 사이 조선 지역은 평양(가운데 밝은 점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희미한 불빛으로 검게 나타나 있다. 이 때문에 해안선도 드러나지 않은 북한은 동·서해가 그대로 이어진 부분 같으며 남한은 마치 섬처럼 보인다. [AP=연합뉴스]
516    먼... 길... 멀지만 가야 할 길... 꼬옥...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9-04-21
51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계는 지금... 댓글:  조회:2779  추천:0  2019-04-10
2019년 세계보도사진 수상작들 [ 2019년 04월 10일 ]     4月10日报道,第62届世界新闻摄影比赛(荷赛)获奖作品名单揭晓,本次的四项年度获奖作品中,有三项作品都与美墨边境移民有关。荷赛是由总部设在荷兰的世界新闻摄影基金会(WORLD PRESS PHOTO FOUNDATION)主办。自1957年举办第一届世界新闻摄影比赛以来,至2019年已举办了62届,今年的荷赛新增了三大奖项:年度图片故事、年度交互作品、年度在线视频。图为2019年荷赛提名作品截图。 年度世界新闻图片获奖作品《在墨美边境哭泣的女孩》,这张照片拍摄于当地时间2018年6月12日,美国德克萨斯州麦卡伦,一名两岁洪都拉斯小女孩与妈妈在美墨边境被拦截。根据特朗普政府的“零容忍”移民政策,美国边境执法人员从今年4月开始,在逮捕非法入境者时强制分离其未成年子女,所有被逮捕的非法入境者,都会被关押入狱面临审判甚至遣返,在这一过程中将其子女另行安置,人为制造“骨肉分离”悲剧,遭到各方批评。评委Alice Martins点评,“这张照片显示了另一种心理上的暴力。 年度图片故事《移民大篷车》。2018年10月和11月期间,许多中美洲难民加入了前往美国边境的大篷车。当移民大篷车队伍在墨西哥东南部的Tapanatepec附近休息的时候,一家人在RioNovillero河边洗澡,洗衣服。独立摄影策展人Yumi Goto表示,“这组作品有很高的尊严感。它告诉我希望真正意味着什么。 年度交互作品《最后一代》。科学家预测,如果全球继续变暖,位于夏威夷和澳大利亚之间的马绍尔群岛将被淹没,该岛上近一半居民年龄不到十八岁。这部影片通过拍摄马绍尔群岛上三个青少年的生活,讲述少年们面临海岛即将被淹没,失去家园的危机。评委Sara Kolster表示,“这是一个关于气候变化严峻的故事。从儿童的角度来讲:他们是必须应对气候变化影响的一代,这些故事非常个人化。 年度在线视频《“零容忍”政策遗留问题》。这部影片讲述了受过创伤的儿童无法获得治疗受美国总统特朗普的“零容忍”政策的影响,片中6岁的危地马拉女孩Adayanci Pérez在美墨边境与父母分离,她已经离开她的家庭三个半月。在回到危地马拉之前,她被诊断出急性创伤和创伤后应激障碍。评委Zoeann Murphy表示,“对我来说,这件作品最重要的特质之一,就是我们可以直接了解到受这个巨大新闻报道影响最大的人。 新闻摄影有多种类别,以下是各类照片排名。图为当代问题类单幅第一名《古巴女孩》,  当代问题类组图第一名《祝福成果》,爱尔兰推翻反堕胎法的努力 , 环境类单幅第一名《Akashinga——勇敢的人》, Brent Stirton, 南非,Getty Images盖蒂图片社。 环境类组图第一名:《乍得湖危机 》, MarcoGualazzini, 意大利,Contrasto图片社。 一般新闻类单幅第一名:《报道Jamal Khashoggi的失踪 》,ChrisMcGrath, 澳大利亚,Getty Images盖蒂图片社。 一般新闻类组图第一名:《也门危机 》,Lorenzo Tugnoli, 意大利, Contrasto图片社为华盛顿邮报拍摄。 长期项目第一名:《家在召唤我们》, Sarah Blesener,美国。 自然类单幅第一名:生存本能 Bence Máté, 匈牙利。 自然类组图第一名:《猎鹰和阿拉伯影响 》,Brent Stirton,南非,盖蒂图片社,为《国家地理》杂志拍摄。 肖像类单幅第一名:《达喀尔时装》, Finbarr O’Reilly, 加拿大/英国。 肖像类组图第一名:《双重麻烦》,两次保佑 Bénédicte Kurzen, 法国、Sanne De Wilde, 比利时, NOOR图片社。 体育类单幅第一名:《加丹加拳击》, John T.Pedersen,挪威。 体育类组图第一名:《为自由哭泣 》, Forough Alaei, 伊朗。 ///봉황넷 
514    [동네방네] - 환경 미화원 = 미술가 댓글:  조회:2338  추천:0  2019-02-06
생애 첫 미술 개인전 연 환경 미화원 (ZOGLO) 2019년2월1일  29일 중국 매체 왕이신문(网易新闻)에 따르면 지난 28일 산시성(陕西省) 시안시(西安市) 다옌타(大雁塔) 서쪽에 위치한 시장에서 54세 환경 미화원 가오야쥔(高亚军)이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자신의 손을 붓으로 삼아 그림을 그린 가오 씨는 그림을 20 위안(약 3307원)에 팔았고 시장의 쓰레기를 주워온 손님에게는 반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다. 이날 가오 씨는 그림 124개를 팔고 쓰레기 세 상자를 모았다.  이어 그는 "현재 직업은 환경 미화원이고 그림 그리기는 취미”라면서 "개인전을 갖는 것이 40년 동안의 꿈이었다”고 밝혔다. 
513    [그것이 알고싶다] - "비로봉" 그림?... 댓글:  조회:2669  추천:0  2018-11-26
2018년 10월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5~1759)의 알려지지 않은 금강산 그림이 최근 무더기로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기탁을 받아 지난 18일 공개한 것인데, 비로봉 등이 그려진 7점의 수묵화다. 진경산수화는 자연 모습 그대로를 그리는 그림이다.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서 나온 겸재 정선 금강산 그림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7점의 그림은 모두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선비 월하 조운도(1718~1796)의 후손가에서 발견됐다. 크기는 각각 가로 30㎝, 세로 40㎝ 정도로 그림 왼쪽 또는 오른쪽 윗부분에 '비로봉, '비홍교', '마하연', '정양사', '보덕굴', '구룡폭', '단발령' 같은 그림 제목과 '겸재초(謙齋草)'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겸재의 다른 그림과 달리 창작 동기와 감상을 표현한 화제(畫題)나 인장이 없다. 그래서 한국국학진흥원 측은 금강산 그림 초본쯤으로 해석했다.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서 나온 겸재 정선 금강산 그림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그런데 재밌는 부분이 있다. 겸재는 경북 영양군에서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주로 살았다.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금강산이라는 주제로 그린 겸재의 그림 여러 장이 금강산 인근 마을이 아닌 경북의 한 시골마을에 있게 된 걸까.      이에 대해 한국국학진흥원 측은 "월하 조운도는 조선시대 영남을 대표하는 문신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손자인데, 이들 7점의 그림은 조운도가 할아버지 조덕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덕린은 51세 때 강원도에서 벼슬을 했다. 당시 금강산을 유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를 기억하며 조덕린이 겸재에게 금강산 이곳저곳에 대해 그려달라고 부탁해 받은 그림이라는 추정이다.      겸재는 한성부주부·청하현감·훈련도감랑청 등 관직을 지냈다. 겸재가 현재 경북 포항 인근인 청하현감으로 있을 때 주실마을이 있는 영양군을 찾았고, 조덕린과 만나 그림을 그려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한국국학진흥원 측의 추정이다. 겸재 그림 7점의 소유주인 조씨 집안에는 그림 소장 배경에 대한 자료가 따로 남아있지 않다.    6만8000여 점의 유교책판이 보관돼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서 박순 전임연구위원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배자예부운략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관련기사 베일 벗지 않은 기록유산이 99%…국학진흥원 수장고를 가보니 그림 7점은 50여만점의 국학 자료를 기탁받아 보관 중인 한국국학진흥원(경북 안동시)의 수장고에 보관된다. 수장고엔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 유네스코 기록물로 유명한 만인소(萬人疏) 등도 있다.        ///중앙일보 /안동=김윤호 기자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의 사진ㅡ    
512    [쉼터] - 자작나무(봇나무) 숲으로 가고싶다... 댓글:  조회:3277  추천:0  2018-10-17
[포토친구] 자작나무 숲의 가을 2018.10.17.  음성 기사 듣기   번역 설정   공유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가을색으로 물든 자작나무 숲. 걸을 때마다 가을의 속삭임이 바람결에 속닥속닥 들리는 듯하다. 하얀 자작나무의 노랗게 물든 가을 잎과 붉은 단풍 노란 이름 모를 나뭇잎들의 가을잔치 속에서 내 마음까지 예쁜 가을이 스며들어와 행복 가득 채워주네요.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 ///사진가 별따라기YJM
511    [쉼터] - 그림 가격에 눈이 휘둥그래지다... 댓글:  조회:3291  추천:0  2018-10-15
  제작시기 1901년 가격 $47,850,000(502억 원)1) 작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파블로 피카소, 〈요, 피카소〉, 캔버스에 유화 / 73.5×60.0cm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 -파블로 피카소 1989년은 세계 미술 시장이 아주 호황이던 때라 미술품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가격에 거래된 그림이 많이 나왔다. 〈요, 피카소〉는 원래 1981년에 미국의 사업가 웬들 체리가 소더비 경매에서 580만 달러(60억 원)에 산 것인데 8년 만에 다시 내놓아 무려 여덟 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았다. 4785만 달러(502억 원)는 1989년 당시 파블로 피카소 작품 중 최고가이자, 전 세계 미술 경매 역사상 두 번째로 비싼 금액이었다. 사실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가격이 이렇게까지 치솟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세계 미술 시장이 워낙 달구어진 데다 피카소 작품 중 시장에 흔하게 나오지 않는 초기 작품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901년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가 시작된 시기다. 사실 청색 시대 경향은 1901년 후반기에 나타났고 이 그림은 1901년 전반기에 그려졌기 때문에 청색 시대의 우울한 모노톤이 나타나기 직전의 작품이다. 1902년에 그려진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처럼 청색 시대의 우울한 특징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 그림에는 오히려 당시 스무 살이던 젊은 화가 피카소의 자신감에 찬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모델이 이젤 앞에 앉아 관객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화가의 자화상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자세다. 눈에 띄는 짙은 주황색 머플러, 관객을 바라보는 매서운 눈매, 전체적으로 굵고 힘찬 붓질 등에서 매우 자신만만한 젊은 예술가의 힘이 느껴진다. 이런 힘있게 묘사된 피카소의 자화상은 흔하지 않다. 피카소는 서른 살 이후부터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그림은 20대 때 그린 다른 자화상에 비해서도 훨씬 당당한 모습을 담고 있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1901년 5월에 두 번째로 파리에 가서 그해 2월에 자살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집에 자리를 잡고 전시 준비를 한다. 바로 그해 6월에 앙브루아즈 볼라르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을 위한 준비였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피카소의 초기 딜러이면서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일찍부터 알아본 역사적인 딜러다. 이 그림은 이렇게 중요한 앙브루아즈 볼라르 갤러리에서 전시된 데다 당시 전시 도록의 제일 앞부분에 소개되었다. 이후에도 이 그림은 뉴욕 현대 미술관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동으로 연 피카소 일흔다섯 살 기념 회고전, 뉴욕 현대 미술관의 피카소 회고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획전 등 세계적인 미술관 전시에 여러 번 나왔다. 이런 뛰어난 전시 기록이 있으면 작품의 가치는 더 올라가게 된다.
510    해란강은 유유히 흘러흘러 륙십리 평강벌 흥건히 적시고... 댓글:  조회:2371  추천:0  2018-10-12
509    [그림과 함께] - 신사임당과 초충도 병풍 그림 댓글:  조회:3439  추천:1  2018-08-24
신사임당의 시와 초충도 병풍그림     대관령을 넘어서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고향 천리언마는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톱에 헤락 조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려니 언젠가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가지와 방아깨비 제1폭에는 가지·방아깨비·개미·나방·벌 등이 등장하고 있다. 땅위에 개미 한 쌍과 방아깨비가 기어다니고, 위쪽에는 나비·벌·나방이 날고 있다. 자연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박과들쥐 제2폭에는 수박·들쥐·패랭이꽃·나비·나방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수박을 파먹는 들쥐 두 마리의 모습이 흥미롭다. 민화에서는 수박이 다남(多男)의 상징물로 여기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어숭이와 개구리 제3폭은 공간을 나는 나비, 원추리꽃 줄기에 붙은 매미, 뛰어 오르려는 개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폭의 것과 같은 구성 요소와 짜임새를 가진 문양이 반닫이나 장롱 등 가구 장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원추리는 일명 망우초(忘憂草), 또는 훤초(萱草)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경 詩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근심을 잊고 답답함을 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기서는 그저 흔히 보는 식물 중 하나일 뿐이다.     산차조기와 사마귀 제4폭에는 여뀌·메꽃·잠자리·벌·사마귀 등이 등장하고 있다. 잠자리는 여뀌 주위를 날고 있고, 사마귀는 땅을 기면서 벌을 노리고 있다. 사마귀는 민화나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재이지만 초충도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제5폭에는 맨드라미·산국화·나비·쇠똥벌레 등이 등장하고 있다. 쇠똥벌레 세 마리가 제나름대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나비는 맨드라미 주변을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다. 이 화면의 주인격인 맨드라미는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부르는데, 민화에서는 관계에로의 진출을 상징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보인다.     원추리와 개구리 제6폭에는 어숭이꽃·도라지·나비·벌·잠자리·개구리·메뚜기가 등장하고 있다. 나비와 잠자리는 어숭이꽃과 도라지꽃 주위를 맴돌고 있고, 개구리는 땅에 기는 메뚜기보다 허공을 나는 나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잠자리는 고려 동경이나 도자기 장식 문양에 등장한 예가 있으나 다른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양귀비와 도마뱀 제7폭에는 양귀비·패랭이꽃·달개비·도마뱀·갑충 등이 등장하고 있다. 도마뱀이 고개를 돌려 갑충의 거동을 살피는 모습이 재미있다.     오이와 개구리 제8폭에는 개구리·땅강아지·벌·오이·강아지풀 등이 그려져 있다. 개구리가 땅강아지를 잡아먹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강릉오죽헌의 율곡기념관에 있는 조선시대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신사임당(1504~1551)이 그린 8폭의 유색 병풍으로, 각 폭마다 각기 다른 초화와 벌레를 그렸기에 초충도(草蟲圖)라고 부른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한결같이 단순한 주제, 간결한 구도, 섬세하고 여성적인 표현, 산뜻하면서도 한국적 품위를 지닌 색채감각 등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초충도는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분야에서 으뜸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작(眞作)보다는, 그의 작품이라 추측되는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이이(李珥:1536~1584)를 배향하고 있는 송담서원에 소장되었는데, 1804년 강릉에 큰 산불이 나서 송담서원까지 불이 번져 서원의 소장품들과 함께 분실되었다. 그뒤 강릉의 민가에서 보관해오던 것을 이이의 종인(宗人) 이장희가 입수하였다가 율곡기념관이 건립되자 1965년에 기념관에 양여한 것이다.   신사임당의 자녀인 이매창이나 이옥산의 그림들은 묵화이나, 이 병풍화는 채색이다. 그림의 소재를 초충에서 취하되 각 폭마다 같은 초화는 없고 초화와 관계가 되는 풀벌레를 꼭 그려놓았다.   =====================/// 시(詩), 서(書), 화(畵)에 두루 능했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초충도(草蟲圖) 병풍이다. 사임당은 율곡집(栗谷集)에 의하면 7살 때부터 조선초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화를 그렸으며 포도, 꽃, 풀, 곤충 등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8폭인 이 병풍은 배경이 없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과 풀벌레 등을 2∼3종류씩 화면 중심의 상하, 좌우에 배치하여 안정감 있는 구도를 하고 있으나 다소 장식적이며 산만하다. 오랜 관찰을 통하여 사물에 대한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섬세한 필선과 채색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여성적인 청초함과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임당의 초충도는 여러 점이 전하고 있으나, 이 그림은 처음에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이장희(李璋憙)가 보관하다가 1965년 율곡기념관에 기증하였다.
508    [동네방네] - "민속벽화" 닐리리~~~ 댓글:  조회:2276  추천:0  2018-06-28
민속벽화를 그리는 최향순교원과 그의 프로젝트 학과목 [ 2018년 06월 27일 ]     최근 연변직업기술학원 미술교원 최향순선생(51세, 부교수)은 조선족민속풍토인정을 반영한 수회화(手绘画) 프로젝트화(项目化) 학과목 교재를 펴내 조선족학교들에서 민족특색의 미술교육을 진행함에 있어서 공백을 메웠다는 점에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아동벽화를 마무리고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최향순교원   최향순 선생은 1987년 동북사범대학 미술학부 전과를 졸업한 뒤 연변직업기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미술강의를 하였다. 10년 후인 1998년에 그는 다시 동북사범대학 본과공부를 마쳤을 뿐더러 이어 청화대학 미술학부 공부를 하였으며 2004년에는 또 연변대학 미술학원 제1기 벽화연구 석사학위를 따냈다.   2002년경 청화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한 뒤 계속하여 석박사공부에 도전할 때 가정생활은 더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리혼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소학생 아들은 공부성적이 꼴찌여서 학급 성적에 지장이 크므로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라는 호출령이 떨어졌다.   조선족민속풍토인정수회화 프로젝트화 학과목교재   이 학교 저 학교에 보내봐도 아들은 그림 그리기만 좋아하고 공부는 뒤전이였다. 역시 지력장애증명서라도 떼와야 학급의 공부성적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귀띔이 있어 남들에게 더는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연길시 하남병원 로교수문진을 찾아 들어갔다. 사실을 얘기하며 아들애의 지력장애증명서를 떼달라고 로교수한테 부탁하였다.   “친엄마가 맞어? 한창 자라나는 아이한테 그런 모자를 덮어씌우면 애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봤어? 정말 친엄마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나가라! 어서 나가!” 로교수는 인정사정 없이 호되게 욕을 퍼부었다.   쫓겨나다 싶이 문밖에 나선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는 자동차에라도 머리를 박고 아들과 함께 끝장을 내고만 싶었다. 하지만 한걸음 두걸음 겨우 걸음발을 옮겨놓으며 집에 들어서니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부모라는 사람이, 교원이란 사람이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지? 아들아, 엄마를 용서해다오!” 그녀는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한나절이나 울고 또 울었다.   “물고기와 원숭이, 코끼리에게 같은 요구를 제기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라면 교육자라면 내 자식, 내 학생이 무얼 잘할 수 있는가를 눈을 비비며 찾아내야 하는데요…” 그때를 돌이키는 녀교원은 허구픈 웃음을 짓는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들애가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도록 아들애가 요구하는 미술 관련 놀이감도 사주고 게으름을 피우며 노력하지 않을 때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화를 삼키며 되도록 고무하고 치하를 하면서 이끌어주었더니 몇년이 지나자 아들애는 인물화도 사진처럼 신통하게 잘 그려냈다.   중학교를 마치면서 아들은 연변직업기술학원 학생으로, 엄마의 학생으로 되였다. 아들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인 직업기술교육을 진행할 것인가가 최향순교원의 절실한 연구과제였다.“사회가 수요하는 훌륭한 인재는 못 되더라도 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는 자립할 수 있는 유용한 인간으로 키우자” 이것이 최향순교원의 확고한 교육목표였다고 한다.   한편 최선생은 교문을 열고 사회에 나와 시장이 수요하는 벽화 그리기에 살손 붙였다. 수요가 다양한 사장님들과 교섭하고 안목이 층차만별한 관람자들의 공인을 받는 벽화를 그려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최향순교원은 아들과 함께 벌써 5년전 룡정 동성용향의 1,700메터 되는 토담장에 조선족풍토인정을 담은 민속벽화도 그려냈다. 2016년에는 연길시 새싹유치원 분원인 진달래유치원의 300메터 되는 아동만화벽화도 손색없이 완성하였으며 “오두막” 등과 같은 많은 민속음식점이나 가게에 특색있는 조선족민속벽화들을 생동하게 그려내여 연변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과 귀빈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 모자는 지금까지 시각적 효과가 충격적이고 내용이 풍부하며 색채가 아름다운 민속벽화를 약 만여메터 그려냈다. 엄마가 구도를 짜면 아들이 색칠을 하고 아동만화며 현대기법은 아들이 주선을 끌며 다종다양하게 창작하였다. 아들 오욱(吴旭, 26주세)은 엄마에게 “최화벽화”(崔花壁画)라는 아이디를 지어주었고 또 그 이름으로 지금은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 엄마는 아들의 실력성장과정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직업성장법칙을 모색하였으며 새로운 혁신체계에 따른 미술교육을 진행하였다.   연길시북대신성 단지마을 사장님과 그 친구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벽화에 담아 찬탄을 자아냈다   그리하여 최향순교원이 제기한 “민족지역 직업 학원 및 학교의 민족풍토인정수회화 프로젝트화 교과목 설계와 개발 실천연구”(民族地区职业院校民族风情手绘画项目化教程的设计与开发实践研究)는 길림성 직업교육과 성인교육 교수개혁연구중점과제(비준호2017ZCZ028)”로 선정되였던 것이다.   최향순교원은 학생들을 조직하여 수회화 사회실천을 하면서 조선족특색의 용모특징과 복식의 조화, 색조, 분위기들을 세분화하고 시장화 수요에 따라 조선족민속풍토인정을 담은 벽화작품을 대량 창작하였는 데 그 제재가 광범위하고 풍격이 다양하였다. 그는 이번 교재에서도 자신의 실천과정을 종합하여 시장화 도전에 초점을 두면서 계약서작성과 창작순서, 보조와 종목총결, 사회평가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벽화 그리기 사회실습에 나선 연변직업기술학원 학생들   그는 실천과 리론을 결부하면서 선후로 10여편의 론문을 집필하여《영화문학》과 《중국과학교육》《중국육인》《미와 시대》《조선족교육과학연구》《문학과 예술》 등 핵심간행물과 국가급 간행물에 발표하였다. 최향순교원은 이번에 펴낸 《조선족민속풍토인정수회화프로젝트화 학과목교재》는 "몇십년간 생명을 다 바쳐 경작해낸 성과물이며 나의 민족혼의 결정체"라고 심경을 토로하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507    [동네방네] - 하마터면... 댓글:  조회:2193  추천:0  2018-06-06
고흐 작품 경매중 친구 부르려고 손 들었다가… (ZOGLO) 2018년6월6일 [동아일보·채널A 공동취재]500만 유로 넘은 뒤 피 말리는 신경전 맨뒤의 동양인 회심의 “560만”도 잠시, 전화 참가자 “600만”… 박수가 터졌다 프랑스 파리 8구 샹젤리제거리에 있는 경매회사 ‘아르퀴리알’ 2층에서 4일 오후 빈센트 반 고흐의 1882년 작품 경매가 한창 진행 중이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경매에 나온 고흐의 ‘모래언덕에서 그물을 수선하는 여인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4일 오후 8시, 프랑스 파리의 중심 샹젤리제거리에 위치한 호화 주택 건물에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프랑스 경매회사 아르퀴리알이 주최하는 고가 미술품 경매가 있는 날이었다. 미술품 애호가부터 갤러리, 상인, 미술관 관계자들까지 많은 사람이 몰려 전체 180석이 금세 꽉 찼다. 50여 명은 선 채로 경매를 지켜봐야 했다.   이날은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입체파 파블로 피카소, 팝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앤디 워홀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 57점에 대한 경매가 예정돼 있었다.  가장 관심을 끈 작품은 20년 만에 파리 경매에 나온 ‘불멸의 화가’ 고흐의 작품으로 ‘모래언덕에서 그물을 수선하는 여인들’이었다. 1882년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에서 그린 유화 작품으로 고흐의 초기 그림이다. 고흐 작품 경매를 기획한 아르퀴리알 부회장 브뤼노 조베르는 “고흐가 프랑스에서 꽃피운 풍경화의 주요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며 “모래언덕과 함께 해변가의 광활한 풍경, 그물 가방을 수선하는 어부 부인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가장 흥미로운 건 이때부터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매 예상 금액은 300만∼500만 유로(약 37억5000만∼62억6000만 원). 조베르는 “경매 시장에서 고흐 초기 작품의 시세다. 고흐 그림 중 가장 비싼 건 죽기 직전 그린 작품으로 3000만∼5000만 유로에 달한다”며 “그러나 경매가 실제 열리기 전에 정확한 낙찰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고흐 그림이 14번째 순서로 경매에 나오자 현장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매 시작가는 200만 유로(약 25억 원)였지만 현장뿐 아니라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서도 초당 20만 유로씩 금액이 뛰었다. 390만 유로에 이르자 금액을 부르는 속도가 다소 느려지면서 전화 참가자 1명과 현장에 나온 남성 1명만 남은 듯했다. 하지만 500만 유로를 넘어서면서 두 사람의 고민이 길어질 무렵 행사장 맨 뒤 구석진 곳에 서 있던 한 동양인이 560만 유로를 불렀다. 그러나 결국 전화 참가자가 600만 유로를 불러 낙찰됐고 현장에서는 큰 박수가 나왔다. 경매 주최 측은 “세금까지 포함하면 낙찰자가 내야 할 돈은 정확히 706만5000유로(약 88억6000만 원)”라며 “(낙찰자는) 북아메리카 사람”이라고 귀띔했다. 막판에 경매에 참가했다가 고흐 작품을 놓친 동양인은 16번부터 시작된 폴 고갱의 초상화 작품 3개를 연달아 구매했다.    경매 도중에 한 남성이 친구를 부르려고 손을 들었다가 경매 참가자로 오해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남성은 “하마터면 순식간에 56만 유로가 사라질 뻔했다”고 말해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경매에 나온 작품 57점의 평가액은 2368만5000유로(약 296억9000만 원). 경매가 모두 끝나는 데는 9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개 평가액의 1.2∼1.5배에 달하는 금액에 낙찰되는 것을 감안하면 분당 4억5000만 원씩 거래가 이뤄진 셈이다. 한 경매 참가자는 “예전에는 인상파를 비롯한 근대미술이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현대미술이 압도적으로 가격이 높고 경매에 나오는 작품량도 많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50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순간, 찰나, 8초... 댓글:  조회:2779  추천:0  2018-06-02
독수리와 새끼 여우       8초 간 사투   조재형 2018.06.02.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독수리에게 물러서지 않고 맞선 용감한 새끼 여우가 포착됐다. 온라인미디어 보어드판다는사냥감을 사이에 둔 두 포식자의 박진감 넘치는 사진을 보도했다. 리빙와일더니스닷컴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케빈 에비는 산후안섬에서 새끼 붉은여우를 발견했다. 케빈은 이 여우에게 키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루는 키트가 초원을 거닐면서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케빈은 "여우가 토끼를 사냥해 서식지로 옮기고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야생의 순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키트를 향해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독수리는 키트가 사냥한 토끼를 낚아챘다. 상황을 지켜보던 케빈 역시 여우가 독수리에게 먹잇감을 바로 빼앗길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키트는 독수리에 매달려 떠오르는 중에도 사냥감을 물고 놓지 않았다. 독수리는 키트를 달고 6미터 높이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키트는 물고 늘어지는 것 외에는 토끼를 되찾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8초 동안의 저항은 키트의 포기로 일단락됐다. 케빈은 "아주 어린 여우였기 때문에 겁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독특한 광경이었다"며 "이야기가 담긴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조재형 기자
505    [동네방네] - 그림 사시오... 그림 사시오... 댓글:  조회:2732  추천:0  2018-05-16
외설 논란으로 전시 중단됐던 모딜리아니 '나부' 경매가는? [ 2018년 05월 16일 ]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 달러(약1681억7000만 원)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 [AP=연합뉴스] 이탈리아의 현대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1917년 작 유화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가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 달러(약1681억7000만 원)에 낙찰됐다.  모딜리아니가 1916∼1919년 그린 35점의 누드화 가운데 하나로 경매 출품 전부터 낙찰가 신기록을 세울지 관심이 쏠렸던 작품이다.    결과는 모딜리아니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이 됐다.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소더비에서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 경매 가 진행되고 있다.[EPA=연합뉴스] 지난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모딜리아니의 또 다른 '나부'는 1억7040만 달러(약1972억원)에 낙찰돼 모딜리아니의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했는데, 이를 넘지는 못했다.  지난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모딜리아니의 또 다른 '나부 1917-1918'. [AP=연합뉴스] 나체의 여인이 왼쪽으로 비스듬히 돌아누운 채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크다. 가로 147cm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모딜리아니는 미술품 딜러인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로부터 매일 15프랑을 받고 아파트에서 누드화를 그렸다. 모델은 5프랑을 받았다고 한다.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들은 191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개될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의 음모가 세밀하게 묘사되는 등 지나치게 외설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경찰이 진행을 막는 바람에 첫 번째 개인전시가 중단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모딜리아니는 모델이 누웠거나 의자·쿠션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를 취한 누드화 22점과 앉아있는 자세의 누드화 13점을 남겼다. 현재 상당수는 세계 유명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금까지 미술품 경매에서 최고가로 팔린 작품은 2017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030만 달러(약 4978억9000만 원)에 낙찰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문디'(구세주)이다.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1955 그다음은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로, 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940만 달러(약 1982억 원)에 낙찰됐다.     변선구 기자   [중앙일보] [서소문사진관]
504    영국 거리 락서화가 - 뱅크시 댓글:  조회:3247  추천:0  2018-05-14
        거리 예술가 뱅크시 작품 경매     거리 예술가 뱅크시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1993년 벽에 손으로 낙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이후 작품 제작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스텐실 기법을 사용하면서, 그는 '쥐와 경찰관' 같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독특한 도상학(iconography)을 개발했다. 이런 이미지들은 그의 반권위주의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뱅크시는 비꼬는 듯한 기발함과 은밀함으로 그라피티 예술을 설치 예술 및 퍼포먼스와 결합했다.         뱅크시는 2003년에 열린 전시회 '영역 다툼(Turf War)'에서 살아 있는 돼지의 몸에 그림을 그렸다.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에드워드 호퍼의 유명 작품들을 패러디한 모조품 전시를 특징으로 삼아 2005년 런던에서 열린 '원유(Crude Oils)'라는 전시회에서, 그는 살아 있는 쥐 200마리를 풀어놓았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테이트 미술관을 비롯한 뉴욕 및 런던에 있는 대형 미술관에 숨어 들어가 벽에 그의 작품들을 걸어놓는 도둑 전시를 하기도 했다.         그는 웨스트뱅크의 팔레스타인 쪽 담장에도 그림을 그렸다. 어린이들이 절망적인 한 조각의 땅에서 놀고 있는데, 벽 일부에 그려진 선명한 구멍을 통해서는 완벽한 열대 해변의 풍경이 보인다.   뱅크시는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의 정치적, 예술적 제도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자신을 '질 높은 예술 파괴자'로 표현했다. 2006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창고에서 있었던 그의 주말 전시회 '거의 합법적이지 않은 Barely legal'은 홍보를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큰 인파를 끌어모았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살아 있는 코끼리에 벽지와 같은 페인트를 칠해 전시 공간에 세워놓았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그는 공공 가족계획병원 담장에 창틀에 매달려 있는 나체 남성을 그렸다. 지역민들은 투표를 통해 그 벽화를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2008년 칸 영화제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캔스 페스티벌(Cans Festival)'에서, 뱅크시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국제 아티스트 40명이 에어브러시 페인팅을 했던 런던 남쪽의 철도 터널에 그림을 더 그리도록 독려했다. 그다음 해에 그는 영국 브리스틀에 있는 시립박물관 겸 미술관에서 깜짝 쇼를 선보였다. 그곳에서 애니메트로닉스(animatronics), 유화, 낡은 아이스크림 트럭을 전시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졌음에도, 뱅크시는 여전히 익명을 유지하고 있다. 극히 드물게 이루어지는 그의 인터뷰들은 이메일이나 음성을 변조하여 녹음된 테이프로 진행되었다. 그는 그라피티가 합법화된 도시 안에서의 삶은 '모든 사람이 초대받은 파티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거리 예술에 헌신하고 있다.                                                   One by one, Enya       ▲ 사진=AP 연합뉴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화가 뱅크시(Banksy)의 벽화가 맨해튼 시내에 깜짝 등장했다. 지난 1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AP통신 등 외신은 뉴욕시 맨해튼 시내에 길이 21m에 달하는 뱅크시의 새 벽화가 등장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지난 15일 공개된 이 벽화는 뱅크시가 역시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보프와 함께 작업해 완성한 것이다. 벽화의 주제는 철장에 갇힌 것으로 묘사된 터키의 예술가 제흐라 도간의 구금을 항의하기 위한 것. 터키의 예술가이자 언론인인 도간은 지난해 3월 터키군에 의해 짓밟힌 쿠르드 주민 마을을 그림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2년 9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 사진=AP 연합뉴스 뱅크시는 도간의 복역 기간과 더불어 석방을 촉구하는 글귀(FREE zehra dogan)를 벽화에 남겼다. 뱅크시의 새 작품은 이렇게 주요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훼방꾼'이 나타났다. 17일 누군가 뱅크시 벽화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해놓은 것. 이에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현지언론은 자신의 이름을 벽이나 건물에 새기며 경쟁하는 ‘태깅’(tagging)으로 해석했다. 한편 일명 ‘얼굴 없는 화가’로 전 세계에 알려진 뱅크시는 거리와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 등을 풍자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그렸다 하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킬 만큼 영향력이 크다.  ///서울신문
503    [동네방네] - 이순에 동양화를 배워 제2의 인생을 빛내이다... 댓글:  조회:3042  추천:0  2018-05-04
60살 넘어 그림 공부 시작한 동양화가, 호랑이를 그리다 2018.05.03.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짬] 동양화가 안창수씨-봉화 백두대간수목원서 호랑이전 [한겨레] 안창수 화백이 그린 호랑이 그림   그가 보여준 것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전에 그린 몇 장의 그림이었다. 다들 어처구니없어하는 눈치였다. 억지였다. 그럴 만하다. 머리 희끗희끗한 60살의 외국인이 미술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니 말이다. 이력을 보니 정규교육과정에서 한번도 미술을 공부한 적이 없다. 평생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게다가 중국어도 먹통이다. 그런 한국인이 중국 전통의 남종 문인화 본산인 항저우의 국립미술대학에 입학시켜 달라는 것이다. 당연히 미술 교수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제자로 맞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었다. 일주일 만에 반응이 왔다. 한 교수가 ‘막무가내 외국인’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추천서를 써줄 테니 교무실에 가서 외국인 연구생 자격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세요.” 가까스로 입학을 허락받았다. 13년 전이다. 동양화가 안창수(73)씨가 어렵사리 동양화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  정년퇴임후 전혀 새로운 제2의 인생을 개척한 안창수 화백이 자신이 그린 호랑이 그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3일 개원식을 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가는 경북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의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백두대간 호랑이를 그리다’라는 동양화 전시회에 전시된 호랑이는 안씨가 그린 호랑이들이다. 그가 3년 전 ‘전일본 수목화 수작전’에서 수상한 이라는 제목의 호랑이 그림도 내걸렸다. 숲속에서 한껏 웅크린 채 정면을 노려보는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화폭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는다. 하지만 무섭지 않다. 오히려 친근하다. 지난달 30일 양산의 개인화실에서 안 작가를 만났다.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단군신화에 곰과 함께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입니다. 또 불행을 물리치고 행운을 부르는 영물입니다. 신선도에도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사나운 동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그의 호랑이가 무섭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이순의 나이를 넘어서 그리기 시작한 호랑이라 그럴지 모른다. 남들은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할 나이에 그는 전혀 새로운 길을 용감하고 단호하게 걷기 시작했다. 인정도 받았다. 수출입은행 퇴임 뒤 서예 배워 닭 잘 그린다는 주변 칭찬에 동양화 배우러 중국 항저우로 6개월 만에 중국서화대전 입선 일본에도 유학 여러 미술전 수상 그는 은행원이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안씨는 대학 졸업 뒤 수출입은행에 취직했다. 해외업무를 주로 보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 때는 경수로 담당 부장으로 북한에 출장을 가기도 했다. “중국에서 민항기로 평양에 가서 군용기로 함흥에 도착, 버스를 타고 나진 선봉 지역에 가기도 했어요. 비록 경수로 사업이 중단됐지만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은행에서 정년퇴임하고 여유 있는 시간에 붓을 들었다. 서예를 배우다가 닭 그림을 그렸다. 본인이 닭띠여서다. 주변에서 잘 그린다며 한번 정식으로 배워보라고 농담 삼아 권유했다. “한번도 미술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아! 초등학교 5학년 때 진흙으로 개구리를 빚어 색칠했는데, 집에 오신 교장선생님이 멋있다고 달라고 하셨어요. 싫다고 했어요.” 안창수 화백이 그린 호랑이 그림 문득 욕심이 동했다. 더 늦기 전에 동양화를 배우겠다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중국으로 떠났다. 억지 입학을 하고는 미친 듯이 그림 공부를 했다. 하루 종일 붓을 잡고 놓지 않아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지 않을 정도였다. 몸무게도 10㎏이나 빠졌다. 한때 포기하려 했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체력도, 감각도 자신이 없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그런 그를 스승이 만류했다. 나이가 무슨 문제냐는 것이었다. “청나라 대표적인 화가 금농(1687~1764)은 쉰살이 넘어서 붓을 잡았고, 예순이 넘어서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미국의 최고 민속화가로 꼽히는 그랜드마 모제스(1860~1961)는 일흔여섯살까지 10남매를 키운 주부로 살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살에 타계할 때까지 1600여 작품을 남겼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비행기표를 취소했어요.” 중국에 간 지 6개월 만에 중국 서화대전에서 닭 그림으로 입선했다. 이듬해에는 중국 임백년전국서화대전에서 1등을 했고, 중국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 금상도 받았다. 단박에 중국 화단의 신예로 떠올랐다. 애초 6개월 예상하고 간 중국 유학이 2년으로 늘어났다.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중국 화가들의 도록 600여권을 상자 50개에 넣어 갖고 왔다. 지금도 소중한 스승들이다. 하루에 2~3시간씩 그 도록을 보며 그림 공부를 한다. 내친김에 일본으로 유학 갔다. 일본 교토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일본에서도 소화미술대전 입선, 전일전에서 준대상을 받는 등 주목받는 화가가 됐다. 일본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국내에서도 이미 13번 개인전을 열었다. 안창수 화백의 호랑이 그림 그의 동양화는 색감이 화려하다. 동양화의 여백이 그의 작품에서는 중시되지 않는다. 화폭을 빼곡히 채운 색감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으로 꼽힌다. 한국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한국 화단이 낯설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이다. “남들보다 빨리 그림을 그려요. 옆에서 한 장 그릴 때 세 장을 그렸어요. 스승은 나름의 스타일이라고 칭찬해줬어요.” 뒤늦게 시작한 그림이라 속도감 있게 그리는 것일까? ///양산 /글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502    [이것저것] - "소 그림" 팔고사고... 댓글:  조회:3044  추천:0  2018-05-04
'싸우는 소' 14억5천만원.. 이중섭 소 그림 왜 높게 팔릴까 박현주  2018.05.03.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옥션 부산경매..9억 시작 경합 현장 응찰자에 낙찰 '청자상감매죽포도문표형병' 16억5천만원 최고가 기록 【서울=뉴시스】9억원에 경매를 시작해 14억5천만원에 낙찰된 이중섭 싸우는 소.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미술시장에 다시 '이중섭'이 꿈틀대고 있다. 2일 열린 서울옥션 '부산경매'에서 이중섭(1916∼1956)의 '싸우는 소'가 14억 5000만원에 팔렸다. 시작가는 9억원이었다. 경합을 거쳐 현장 응찰자가 차지했다. 두 마리의 소가 싸우는 모습을 종이 위에 그린 '싸우는 소'는 보기 드문 구도의 작품이라는 평가와 푸른 색조와 황색조가 특징이다. 이 외에도 '소와 여인', '아이들'도 경합을 벌이며 낙찰돼 '이중섭 강세'를 증명했다. 이중섭 작품은 서울옥션 3월 경매에서 깜짝 이변을 일으켰다. 위작 파동 이후 8년만에 '소'가 47억원에 낙찰되면서 작가 레코드를 경신, 박수근(빨래터 45억2000만원)을 제치고 '비싼 국내 작가' 2위에 올라섰다. (1위는 김환기 '고요(Tranquility) 5-Ⅳ-73 #310'·낙찰가 65억5000만원) 2010년 서울옥션에서 '황소'가 35억6000만원에 낙찰된 후 잠잠했던 이중섭 그림이 경매 시장을 흔들고 있는 것과 관련 "소 그림의 희소성"이라는게 경매사의 분석이다. 이중섭 '소 그림'은 9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경매 시장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은 아주 적다는 이유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단색화 열풍이 가시고 시장의 재조정기가 들어갔다는 신호로 봤다. 대중 인지도와 시장의 선호도가 높은 안정적인 블루칩 작가들의 뒷심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환기 홀로' 주도하던 경매시장은 이중섭의 활기로 근현대 작가들도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경매에서도 박수근은 총 2점이 출품되어 두 점 모두 추정가를 넘겨 새 주인을 찾았다. 유영국도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1억 8000만원에 시작해 2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이외에도권옥연, 오윤, 이숙자 등의 작품도 이전보다 활발하게 팔려나가고 있다. 【서울=뉴시스】박현주기자= '청자상감매죽포도문표형병'은 16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번 서울옥션 부산 경매 최고가 낙찰 작품이자,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 고려 청자 중 가장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한편 서울옥션은 이번 두번째 부산 경매는 낙찰률 86.3%, 낙찰총액 53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서울옥션이 부산 큰손들을 찾아간 이번 경매는 낮은 추정가 총액을 넘는 금액으로 지역 미술 시장의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경매로 평가된다. 이번 부산경매 하이라이트는 고미술품이 최고가를 기록했다. 고려시대 '청자상감매죽포도문표형병'이 16억5000만원에 낙찰돼 고려 청자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이전 최고가는 2004년 서울옥션에서 팔린 '청자상감매죽조문매;로 10억9000만원이었다.
501    [쉼터] - "로망쟁이" = 5월 봄눈 댓글:  조회:2389  추천:0  2018-05-03
봄의 불청객... 연길 5월의 눈 [ 2018년 05월 03일 ]     5월 2일, 연변 대부분 지역에 낮의 보슬비에 이어 저녁에 눈이 내렸다. 비속에 꽃펴나는 함박눈은 5월의 화초를 더욱 어였하게 장식하였다.  사진은 당일 촬영 애호가들이 눈오는 정경을 찍어 위챗모멘트를 달구던 일부 "작품"들이다. / 길림신문                                                                        
500    [그것이 알고싶다] - "성공과 평화", "평화와 소망"... 댓글:  조회:4390  추천:0  2018-04-29
[남북 정상회담] 우리를 웃게 만든 비하인드 장면 3가지 (ZOGLO) 2018년4월29일  [아시아경제 부애리 기자]  지난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 메인프레스센터(MPC)에 모인 내외신 3000여명의 기자들은 이 순간을 함께 지켜봤다. 기자들을 빵 터지게 했던 비하인드 장면들을 꼽아봤다. ◆'열혈 취재' 북한 기자 선생들 완장을 찬 북한 취재진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북한 기자들의 의도치 않은 등장은 우리 기자들도 웃음 짓게 만들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평화의 집 벽에 걸린 '북한산' 그림을 함께 감상하는 장면에서 정작 두 정상의 모습 대신 북한 취재진의 엉덩이를 봐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도 벌어졌다. 이후에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단둘이 도보 다리에서 담소를 나누는 과정에서 북한 취재진이 김 위원장을 밀착 취재하는 바람에 김 위원장이 웃으면서 기자를 물리기도 했다.  ◆'밀착 경호' 북한 경호원 12명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서 오전 회담을 마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승용차로 떠나자 북한 경호원들이 승용차와 함께 뛰고 있다. 사진=한국 공동 사진기자단 김 위원장의 밀착 경호원 12명들도 눈길을 끌었다. 북측 경호원들은 군사분계선을 향하는 김 위원장과 함께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차량 속도에 맞춰서 마치 조깅 하듯이 뛰는 경호원들의 모습은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MPC에 있던 기자들은 이들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즐거워했다. 특히 경호원 12명은 어디선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곤 해서 호기심을 유발했다. 경호원 12명은 김 위원장이 북측으로 돌아가는 마지막까지도 열혈 경호를 멈추지 않았다. 환송 행사를 마치고 김 위원장이 손을 흔들며 나가자 경호원 12명은 어디선가 등장해 다시 경호를 시작했다.  김 위원장을 근접 경호한 경호원들은 북한 현역 장성인 김철규와 신원철의 부대 병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쳐 선발하는데 고위급 자녀 출신들로 군인 중의 군인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여정에게 명함 건넨 우원식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27일 평화의집 환영 만찬에서 서로 악수를 하고 있다. 오후 6시30분께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 행사에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도 참석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도 참석했다. 우 원내대표는 특히 이날 함박 미소를 지으면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에게 명함을 건네 눈길을 끌었다. 통상 지도부들끼리 명함을 건네는 장면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명함을 본 김 제1부부장은 잠시 어딘가의 눈치를 살피다가 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도 생중계에 잡혔다. 한편 우 원내대표는 만찬 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 위원장과 시원하게 한잔 했다"면서 "남과 북이 하나되는 기쁨을 맛 보았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2018남북정상회담을 맞아 새단장한 판문점 평화의집. 미술품도 새롭게 교체했습니다. 남북정상이 입장할 1층 입구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회담장인 2층과 3층까지. 평화의집의 모든 공간에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전시해 회담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4월 27일 평화의집 회담장에 걸릴 미술품 중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민정기 작 2007년, 캔버스에 아크릴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인 민정기 작가가 그린 북한산 그림이 평화의집 1층 로비 정면에 걸렸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쪽 땅을 밟는 북측의 지도자를 서울의 명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   HOME 뉴스 문화예술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 함께 한                        민정기의 북한산민정기 작가 인터뷰 용은성 기자  2018.05.04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메일보내기 인쇄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남북정상회담에서 화제가 된 민정기의 ‘북한산’. 문재인 대통령은 이 그림의 기법을 묻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질문에 “서양화인데 우리 동양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고 소개했다. 캔버스에 유채, 452.5×264.5㎝, 2007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과거와 현재 겹쳐지는 ‘원형’의 구도… 남북 평화와 번영 이루는 상징성 부합 “내 그림처럼 둥글둥글 평화 오기를”   “내 그림처럼 둥글둥글 타협을 통해 남과 북이 좋은 결과물을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달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1층 로비에 걸린 거대한 산 그림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반겼다. 민정기(69) 작가가 그린 500호 이상의 대작 ‘북한산’이다. 이 그림을 배경으로 남북 정상은 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했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판문점선언’에 서명한 뒤 서로를 끌어안았다. 풍경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민 작가는 지도 제작자에 가까울 정도로 직접 답사한 지형 등을 상세하게 묘사함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것들을 함께 표현한다. 남북정상회담의 한 장면을 장식한 ‘북한산’은 2007년에 6개월 이상 걸려 완성한 것으로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표현한 대표적 작품이다. 예술 감상은 우리가 안 쓰던 정신의 근육을 움직여주는 일이라고 한다. 민 작가는 금강산 줄기의 북한산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하나의 거대한 원(圓)으로 그렸다”고 했다. 시점이 하나로 고정되는 서구 풍경화와 달리,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등 여러 시점에서 본 풍경을 한 화면에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민정기의 북한산은 우리 산맥의 아름다움을 둥글게 모아놓았고, 11년 후 남과 북의 정상은 이 그림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인 회담에서 둥글둥글 원만한 성취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기원하며 판문점선언을 이끌어냈다. ‘북한산’의 소장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때문에 민 작가도 회담 이틀 전에야 작품이 설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림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돼 정말 기쁘다. 작가로서 보람을 느끼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양서면 부용리 작업실에서 만난 민정기 작가는 “TV를 통해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벅찼다”고 했다. 뒤로 보이는 그림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삼청동에서 바라본 인왕(2018)’으로, 4일부터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미술상 30년의 발자취-역대 수상작가’전(展)에서 볼 수 있다. 1972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민 작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현실을 직시하고 발언한 미술운동 집단 ‘현실과 발언’을 창립한 민중미술의 주역이다. 1980년대 민중의 억압된 삶을 시대적 상황과 도시의 그늘진 모습으로 잔잔하게 기록했다. ‘세수’, ‘돼지’, ‘풍요의 거리’, ‘영화를 보고 만족한 K씨’ 등 그의 초기 작품들은 미학적 엄숙주의에 사로잡힌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민 작가는 1987년 서울에서 양평으로 들어와 서종면 서후리의 축사를 고쳐 나무로 지어 올린 화실에서 줄곧 작업을 해오다 30년 만에 양서면 부용리의 빛이 잘 들어오는 새 작업실을 마련했다. ///용은성 기자 =================   민정기 작가의 입니다. 2007년 제작된 452.5 x 264.5cm의 동양화 기법으로 표현된 서양화 작품입니다.(구분이 무의미할 수 있지만 재료 특성상 서양화로 나눕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국민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산 그림이 자칫 기상만 강조하면 삼각형 구도의 날카로운 이미지가 되기 십상이지요. 제 그림은 옛 지도처럼 북한산을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린 ‘북한산 전도’이지요. 북한산의 이미지를 다각도로 보고 핵심적 아름다움만 둥글게 모아놓았습니다. 그렇게 둥글둥글 타협을 통해 남과 북이 좋은 결과물을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처음 작품인 의 판화적인 딱딱함, 먹의 무채색으로 인한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는 장소에 보다 자연스러운 붓질과 산뜻한 청록색(노란색이 곁들어진) 작품을 함께 배치하여 기념촬영 장면에서 남북이 만나 밝고 희망찬 화해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시작하고자 하는 의미가 비칩니다. 또한 '북한'이라는 이름과 남한산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둥글게 이어진 구도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지자는 희망이 담겨 보입니다.  ‘북한산’의 작가 민정기 “내 그림처럼 둥글둥글 평화 이뤄졌으면” “허허, 그림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돼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30일 전화기 너머 민정기(69) 작가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지난 27일 남북 정상 간 판  2018 남북 정산 회담과 미술|작성자 아트스튜디오B         판문점 평화의 집에 걸린 민정기 '북한산' 2018/04/25    이전다음   (서울=뉴스1) -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 집에 걸린 리얼리즘 작가인 민정기 화백의 작품 '북한산'. 기념사진 촬영 배경이 될 이 작품은 사상 처음으로 남한의 땅을 밟는 북측 최고 지도자를 서울의 명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북한산이라는 이름의 중의적 의미도 고려했다. (청와대 제공) 2018.4.25/뉴스       김준권 작 2009년  대표적 목판화 작가인 김준권 작가의 작품은 로비의 방명록 서명장소에 전시됩니다. 수묵의 깊은 색감은 앞에 설 인물의 배경이 되어 안정된 구도를 연출하고 두 정상을 정중하고 편안하게 감싸는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판문점 평화의 집에 걸린                     김준권 '산운' 2018.04.25.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판문점=연합뉴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실내 곳곳에는 성공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원하는 의미의 다양한 미술품이 걸려 눈길을 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25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을 선정했다"며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평와의집 1층 방명록 서명 장소 뒤쪽에 걸린 김준권 작가의 '산운'. 수묵으로 그린 음영 짙은 산이 안정적인 구도를 연출하는 그림이다. 2018.4.25 [청와대 제공=연합뉴스] ======================================= 김정은 국무위원장 방명록 서명 당시 배경됐던 수묵 목판화  김준권 작가 2009년 4개월 공들어 완성…"한반도 평화 기원" (진천=연합뉴스) 이승민 기자 = "특별한 날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처럼 북녘땅을 오가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화폭에 담고 싶습니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TV를 통해 지켜본 김준권(62) 작가는 감격에 북받친 듯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에 수묵 목판화 '산운'이 걸린 데 대한 소감을 밝히는 김준권 작가.   김 작가는 보름 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에 그의 작품을 걸고 싶다는 요청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정상회담 전까지 언론 등에 알리지 않겠다는 '비밀 유지 서약'까지 한 터라 자신의 작품이 평화의 집에 걸린다는 말을 그는 정상회담이 열릴 때까지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주변에 알리지는 못했지만, 정상회담 일이 다가올수록 설레는 마음에 그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김 작가는 "5개 화폭에 담은, 켜켜이 쌓인 산은 한반도를 잇는 백두대간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인위적으로 나뉜 우리 민족도 다시 하나가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방명록 쓰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판문점=연합뉴스) 배재만 기자 =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명록을 쓰고 있다. 뒤에 걸린 작품이 김준권 작가의 작품 산운. 2018.4.27   김 작가의 작품 '산운(山韻)'은 김 국무위원장이 방명록을 서명한 평화의집 뒤쪽 벽에 배치됐다. 김 위원장은 김 작가의 그림 앞에서 "새로운 력사(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고 방명록을 작성했다. 수묵 목판화인 산운은 음영 차이를 준 산들이 겹쳐져 안정적인 구도를 연출하는 그림이다. 48개 목판에 먹물을 묻혀 찍어낸 이 작품은 김 작가가 2009년 4개월 동안 공들여 완성했다. 90년대 초 해인사에서 목판화를 접한 그는 한국적 음영과 색채로 우리 산수(山水)를 주로 그린 작가로 알려졌다. 김준권 작가가 수묵 목판화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산과 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던 그는 지금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 중국 접경 지역을 답사하기도 했다. 그는 "풍경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작품 산운을 가만히 바라보면 단순히 풍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 문화, 역사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림을 설명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산운과 비슷한 기법으로 그린 수묵 목판화들이 자리잡고 있다. 2층 작업실 입구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는 그가 북한 두만강 접경 지역에서 바라본 북한 혜산 지역 풍경을 그린 작품이 걸려있다. 김준권 작가가 북한 혜산 지역 풍경을 접경 지역에서 보고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김 작가는 "정상회담을 보니 곧 통일이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서 "북녘땅을 자유롭게 방문해 그곳의 산과 들을 보고 그릴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김중만 작 2018년, 무광택 디아섹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의 서문의 한글부분에 남북 정상의 이름 첫 글자를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강조하여 무광택 디아섹으로 처리해 마치 병풍처럼 보이도록 전시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ㅁ'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은 '서로 맞다, 통하다' 는 뜻이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ㄱ' 이 있는 부분은 '만들다' 는 뜻입니다. 두 문장을 합쳐 '서로 통하게 만들다'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환담장에 전시됐던 '훈민정음'(김중만 作, '천년의 동행, 그 시작')이 오는 9일부터 열리는 청와대 소장품 전시회 '함께, 보다'에 특별 전시된다. 이 작품은 김중만 작가가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재해석한 것으로, 4·27 남북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평화의집 1층 접견실에 걸렸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현장의 배경작품을 국민들이 직접 관람하고 평화를 향한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면 좋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추가로 전시되게 됐다. (청와대 제공) 2018.5.8/뉴스1 남북정상회담 첫 횐담장 배경 작품 文대통령 제안으로 추가 전시 결정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공식회담 전 대화하고 있다. 뒤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김중만 작가가 재해석한 사진 작품 '천 년의 동행, 그 시작'이 걸려있다. /사진=연합뉴스 "'서로 사맛디'는 우리 말로 '서로 통한다'는 뜻이고 '맹가노니'는 '만들다'는 뜻입니다. '사맛디'는 'ㅁ(미음)'은 문재인의 미음, '맹가노니'의 'ㄱ(기역)'은 김 위원장의 기역이죠."(문재인 대통령) "세부에까지 마음을 썼습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지난달 27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훈훈한 대화를 이끌었던 김중만 작가의 '훈민정음' 작품이 문재인정부 1년을 맞아 특별 공개된다. 청와대는 9일부터 열리는 청와대 소장품 전시회 '함께, 보다'에서 4·27 남북정상회담 사전 환담장의 배경 작품인 '천년의 동행, 그 시작'을 특별 전시한다고 8일 밝혔다. '천년의 동행, 그 시작'은 김중만 작가가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평화의 집 1층 접견실 내 전시돼 우리 민족 공동의 큰 자산인 훈민정음 서문을 배경으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역사적인 첫 환담을 가진 바 있다.   남북정상회담 현장 속 작품을 국민이 직접 관람하고 평화를 향한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면 좋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추가 전시가 결정됐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전시회는 청와대 사랑채 1층 전시장에서 다음달 29일까지 진행되며 사전신청이나 입장권 구매 없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판문점 평화의 집 1층 정상 접견실 내 병풍으로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김중만 작가가 재해석한 사진 작품 '천 년의 동행, 그 시작'이 걸려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은희 기자   ⓒ 파이낸셜뉴스,      신장식 작 2001년, 캔버스에 한지, 아크릴 2층 회담장 정면에는 남북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 그림을 걸었습니다. 회담장 안으로 금강산을 들여와 이번 회담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신장식 작가는 서울올림픽 미술조감독을 맡았으며 금강산을 10여차례 방문해 '금강산 작가' 로 불리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장 장식한 미술품 눈길..회담장 벽에 펼쳐진 금강산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실내 곳곳에는 성공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원하는 의미의 다양한 미술품이 걸려 눈길을 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25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을 선정했다”며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았다”고 소개했다.사진은 2층 회담장의 배경이 될 출입문 맞은편 벽에 걸린 금강산의 높고 푸른 기상을 담은 신장식 화백의 작품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고 부대변인은 ”2008년 이후 다시 가지 못하는 금강산은 누구나 다시 가고 싶어하는 명산”이라며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소망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제공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실내 곳곳에는 성공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원하는 의미의 다양한 미술품이 걸려 눈길을 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25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을 선정했다”며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2층 회담장의 배경이 될 출입문 맞은편 벽에 걸린 금강산의 높고 푸른 기상을 담은 신장식 화백의 작품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고 부대변인은 ”2008년 이후 다시 가지 못하는 금강산은 누구나 다시 가고 싶어하는 명산”이라며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소망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제공     ================== 25년간 금강산 그린 신장식씨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작품   “백두대간 에너지와 민족의 힘   푸른색 많이 사용해서 살려내” 신장식 화가. 연합뉴스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는 신장식 작가가 그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이 걸린다.   가로 6m 81㎝, 세로 1m 81㎝에 달하는 대형 그림으로, 푸른색을 이용해 금강산의 장엄함을 담은 작품이다. 26일 한국일보와 전화통화에서 신 작가는 "(그림이) 정상회담장에 걸린다는 사실을 어제 알았다”면서 “25년간 꾸준히 금강산을 그려온 사람으로서 매우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금강산 그림이 있느냐’는 문의가 왔다. 마침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을 제가 소장하고 있어서 (그림이 있다는 걸) 확인 해줬다”며 “평화의집에 그림이 걸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워낙 큰 그림이라 회담장 로비에 걸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상팔담은 금강산 옥류동 계곡을 올라가면 나오는 구룡폭포 위 8개의 소(沼)를 이른다. 금강산 절경 중에서도 절경으로, 작가는 “상팔담에 오르면 금강산의 장엄한 풍경을 27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며 “백두대간의 에너지, 민족의 힘이 느껴지는 풍경으로,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푸른 색을 많이 썼다”고 설명했다. 오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장이 공개됐다. 뉴시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조감독을 맡으며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게 됐다. 처음 금강산을 그린 것은 1992년. 금강산을 가볼 수 없으니 일본 작가가 촬영한 사진을 보고 연구해 그렸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하면서 작가에게도 직접 금강산을 볼 기회가 생겼다. 작가는 “1998년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열 번 가량 북한을 오갔다”며 “이때 사진을 찍고 스케치한 것들을 바탕으로 이후 작품들을 그렸다”고 밝혔다. 작가는 금강산을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테마”라고 강조했다. “겸재 정선부터 민화까지 금강산은 늘 우리의 그림에 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갈라진 뒤로는 직접 가볼 수 없으니 그리는 작가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죠. 저 개인적으로는 휴전선을 아리랑 고개라 생각하고,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는 심정으로 금강산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남북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정상회담에 이 그림이 걸린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작가는 "금강산의 높은 기상과 평화로운 에너지를 받아 한반도에 평화가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황수현 기자      신태수 작, 2014년, 한지에 먹  회담 후 남북 정상이 함께 할 연회장 헤드테이블 뒤에 설치된 작품으로 작가 특유의 우직한 수묵과 색채의 멋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서해 최전방 백령도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선정했습니다.           (판문점=연합뉴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실내 곳곳에는 성공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원하는 의미의 다양한 미술품이 걸려 눈길을 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25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을 선정했다"며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3층 연회장 헤드테이블 뒤에 걸린 신태수 작가의 '두무진에서 장산곶'. 북한과 마주한 서해 최북단 백령도의 해안가를 묘사한 회화로,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담았다. 2018.4.25 [청와대 제공=연합뉴스] 경북 안동대 의성 출신 신태수 작가 “서해 ‘평화 보금자리’ 염원… 남북정상회담 일조 뿌듯”   2018.04.29   하지만 인천 두무진과 북한 지역 장산곶 사이에 NLL이 지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사진은 신태수 작 ‘서해, 두무진에서 장산곶’."    신태수 작가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자리에 작품이 전시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사적으로 뜻깊은 행사에 일조하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  의성 출신 한국화가 신태수(56) 작가는 자신의 작품 ‘두무진에서 장산곶’이 남북정상회담 장소의 배경을 장식한 소감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신 작가는 “2주전 쯤 청와대 의정비서관으로부터 ‘두무진에서 장산곶’과 소연평도의 고요한 앞바다가 담긴 ‘동동한 바다’ 등 작품 두 점을 파일 형식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보냈었다. 그 가운데 분쟁의 상징이었던 백령도가 담긴 ‘두무진에서 장산곶’이 선정된 것”이라고 전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판문점 평화의 집이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이 채워진 가운데 신 작가의 작품은 3층 연회장에 배치됐다.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려진 ‘두무진에서 장산곶’은 2014년 작으로 크기는 가로 430㎝, 세로 130㎝다. 신 작가가 2012∼2013년 인천문화재단 주관 평화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서해 5도를 답사한 결과물로 작품에는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한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두무진은 백령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인천 두무진과 북한 지역 장산곶 사이에 NLL이 지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작품에서나마 한 폭에 담고 싶어 그리게 됐다”며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넘게 실경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온 신 작가는 다양한 풍광들을 찾아다니며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을 살려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다는 신 작가는 사방이 철책으로 둘러싸인 백령도와의 조우를 시작으로 연평도, 소연평도, 소청도, 대청도 등 서해의 여러 섬을 답사해 작품으로 그려왔다. 그는 주로 한지와 먹을 작품 재료로 사용하고 채색은 수채화 물감, 한국화 물감, 아크릴 물감 등 소재 및 제작 기법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는 편이다. 현재는 세월호를 주제로 한 작품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신 작가는 “세월호가 침몰한 동선을 따라 침몰한 목포 팽목항에서부터 병풍도 앞바다까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침몰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기록을 위해서라도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또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삶의 부분과 글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 그림으로 제작, 권정생 선생 서거 15주년 기념 전국순회전을 계획 중이다. 신태수 작가는 안동대학교 미술학과와 영남대학교 대학원 동양학과를 졸업했으며 올해 대구예술발전소 8기 단기입주 작가로 선정돼 오는 9월 입주할 예정이다. 한편 의성군 관계자는 “의성 출신의 예체능인들이 연일 지역의 위상을 떨치면서 지역에서도 크게 반기고 있다”며 “지난 2월에는 올림픽에서 의성 컬링 선수들이, 이번 남북정상회담에는 신태수 작가가 의성의 명성을 알린 것에 대해 의성의 많은 예체능인들이 지역을 넘어 한반도를 대표하는 훌륭한 인물들로 성장하고 주목받길 바란다”며 기대를 전했다. ///대구일보 /김호운 기자, 김지혜 기자   ========================== [기자] 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 집에 들어선 두 정상은 북한산을 소재로 한 미술 작품을 보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기법으로 그린 것이냐"고 묻자 문재인 대통령은 "서양화인데 우리 동양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훈민정음 작품도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성 'ㅁ'을 푸른색으로, 김 위원장의 성 'ㄱ'을 붉은색으로 특별히 표시했다고 말하자 김 위원장이 "세부에까지 마음을 썼다"며 화답한 겁니다. 백두산 장백폭포 등을 그린 미술 작품은 백두산 방문을 약속하는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윤영찬/국민소통수석(어제) : (문 대통령이) 나는 북측을 통해서 꼭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 (김 위원장은) 오시면 편히 모실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두 정상이 마주앉은 회담 테이블은 남북관계의 전환점이 될 2018년을 상징하는 2018mm 너비로 만들어졌고, 벽엔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그린 작품이 걸렸습니다. 청와대는 만찬이 열린 연회장에 백령도 앞바다를 담은 그림을 걸었습니다.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자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 2018 남북정상회담의 장소였던 판문점 평화의집 1층 접견실에 놓여졌었던 훈민정음 병풍이 김정숙 여사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여사는 28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광장에서 개최된 궁궐 봄 축제 '제4회 궁중문화축전'의 개막제 '세종 600년, 미래를 보다'에 참석해 "두 정상이 손을 잡고 마주선 자리 뒤편에서 제가 장식을 해야 될것이 무엇인가 생각을 하다가 훈민정음을 놔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래서 훈민정음 서문을 놓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의 평안과 민족의 태평성대를 꿈꾸는 세종대왕의 정신이 분단된 남북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날 정상회담이 진행됐던 판문점 평화의집 접견실에는 사진작가 김중만씨의 작품 '천 년의 동행, 그 시작'이 병풍으로 배치됐다.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원작으로, 김 작가가 재해석한 작품이다. 작품은 검은색 글씨로 훈민정음이 쓰여 있는 모양새다. 이 가운데, '사맛디'의 ‘ㅁ’은 파란색으로, 맹가노니의 ‘ㄱ’은 빨간색으로 강조돼 있다. 문 대통령의 'ㅁ'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ㄱ'을 상징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환담에서 훈민정음 병풍을 가리키며 "이 작품은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의 글씨를 작업한 것"이라며 "여기에 보면 ‘서로 사맛디’는 우리말로 서로 통한다는 뜻이고 ‘맹가노니’는 만든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웃으며 "세부에까지 마음을 썼다"고 화답했다. 【판문점=뉴시스】전신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사전 환담을 하고 있다. 2018.04.27.ⓒ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문 대통령은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 집에서 김 위원장에게 “이 작품은 세종대왕이 만드신 훈민정음의 글씨를 작업한 것”이라며 “여기에 보면 ‘서로 사맛디’는 우리말로 서로 통한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사맛디의 글자에는 ㅁ이 들어가 있고 맹가노니는 만들다는 뜻인데 특별히 ㄱ을 썻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사맛디의 ㅁ은 문재인의 ㅁ을, 맹가노니의 ㄱ은 김 위원장을 위해 사용했다”며 “세세한 것에 마음을 썼다”고 김 위원장에게 말했다. 문 대통령이 소개한 ‘훈민정음’ 작품은 평화의집 1층 정상 접견실 내 병풍으로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원작으로 한다. 김중만 작가가 이를 재해석해 작품 ‘천 년의 동행, 그 시작’으로 구성했다. 김 작가는 “문재인 대통령 성(姓)의 ’ㅁ’을 푸른색으로 김정은 위원장 성의 ’ㄱ’을 붉은색으로 강조해 두 정상이 서로 통하기를 소망하는 뜻을 작품에 담았다”고 밝혔다. ================================   -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 구현 - 회담장, 밝음과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로 파란 카펫으로 단장 - 정상회담 테이블,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도록 둥그런 형태...   D-2 남북정상회담을 이틀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평화의 집도 새단장을 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는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판문점 평화의 집 주요 공간을 정비하고 회담장 내부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를 구현했습니다. 가구 하나,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도록 했습니다.   평화의 집 1층 정상 환담장은 백의민족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허세와 과장이 없는 절제미를 담고자 한지와 모시를 소재로 사용하여 온화한 환영 풍경을 조성했습니다. 한지 창호문으로 둘러싸인 안방에서 따뜻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2층 회담장은 밝음과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로 파란 카펫으로 단장하였고, 한지 창호문의 사랑방에서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대화가 이뤄지도록 조성하였습니다.   3층 연회장은 무르익은 만춘의 청보리밭 푸르름과 함께 남북이 손잡고 거닐 듯 평화롭게 하나 되어 감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벽 바탕에 청색카펫과 커튼으로 연출하였습니다.   회담장을 포함해 평화의 집에 새롭게 비치된 전체 가구들은 호두나무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했습니다. 휨이나 뒤틀림 없는 신뢰로 맺어진 남북관계를 기원하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현장의 원형 보전에 적격인 재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1층 방명록 서명대를 보시면 전통 ‘해주소반’이 떠오르도록 제작했습니다. 손님을 초대한 기쁨과 환영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방명록 의자는 길함을 상징하는 ‘길상 모양’으로 제작해, 좋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두 정상이 주요한 의제를 다룰 2층 회담장 내 정상회담 테이블 폭은 2018mm입니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2018년을 상징합니다.   이 테이블 상판은 딱딱한 사각형이 아니라 둥그런 형태입니다. 휴전선이라는 물리적 경계와 분단 65년이라는 심리적인 거리감을 줄이고, 남북이 함께 둘러앉아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회담장 정상용 소파에 남북한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새겨 넣어 의미를 더했습니다. 평화의 집은 당초 남북 장관급 회담 장소였습니다. 정상회담에 걸맞는 기본적인 가구가 구비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번 정비 과정에서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가구만 신규 제작하였습니다. 기존 청와대 등에서 보관하고 있던 가구를 수선하여 배치한 것도 있습니다.         다음은 꽃 장식입니다. 꽃을 담을 화기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번영의 의미를 지닌 달항아리입니다. 화기에 담기는 꽃은 환영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꽃의 왕이라 불리는 화사한 색깔의 작약(모란)과 우정의 의미를 지닌 박태기나무, 평화 꽃말 가진 데이지, DMZ일대에 자생하고 있는 야생화 및 제주 유채꽃을 사용하였습니다. 삭막하고 추운 겨울을 극복한 한반도의 봄을 상징합니다.                 주요 미술품과 선정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술품 주제 역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입니다.   기념사진 촬영 배경이 될 1층 로비 정면에는 민정기 작가의 을 배치했습니다. 서울 북쪽의 거대한 암산, 북한산을 소재로 그린 작품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는 북측 최고 지도자를 서울 명산으로 초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서울에 있는 산이지만 이름은 ‘북한’ 산으로, 중의적 의미도 고려하였습니다.     로비 방명록 서명 장소 배경에는 김준권 작가의 을 배치했습니다. 수묵으로 그린 음영 깊은 산이 앞에 서는 인물의 배경이 되어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연출합니다. 한국 산이 북한 최고지도자를 정중하고 편안하게 감싸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1층 환담장 병풍은 세종대왕 기념관이 소장한 을 재해석한 김중만 작가의 사진 작품 을 배치했습니다. 남북한이 공유하는 한글이라는 소재를 통해 한민족임을 강조했습니다. 김중만 작가는 이 글에 남과 북 정상 두 분 첫 글자를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강조하여 제작해, 두 정상이 서로 통하여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를 소망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2층 회담장 정면은 신장식 작가의 이 걸려 있습니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이번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회담장 입구 양쪽 벽면에는 이숙자 작가의 과 를 좌우 측에 배치했습니다. 4월말 5월, 지금 이 시기의 한반도 보리밭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푸른 보리를 통해 강인한 생명력의 우리 민족을 시각화 하고 있습니다.     3층 연회장 주빈 석 뒤에는 신태수 작가의 을 배치했습니다. 북한과 마주한 서해 최전방 백령도에서 분쟁의 상징이었던 서해를 ‘평화’의 보금자리로 만들고자 의도로 선정하였습니다. 무릎이 닿을만큼 함께 할 남북 정상에게 이 상징적 공간이 소리 없이 말을 걸도록 했습니다.   2018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정성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 ... ...아울러 남북은 현재 30분 차이가 나는 남북의 표준시 역시 통일하기로 했다.  윤 수석은 "북한의 표준시각을 서울의 표준시에 맞춰 통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는 북한의 시각이 한국의 시각보다 30분 늦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에서 "평화의집 대기실에 시계가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서울시간, 다른 하나는 평양시간을 가리키고 있어 이를 보니 매우 가슴이 아팠다"며 "북과 남의 시간부터 먼저 통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이건 같은 표준시를 쓰던 우리 측이 바꾼 것이니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가겠다. 이를 대외적으로 발표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고 윤 수석은 전했다.  윤 수석은 "표준시의 통일은 북측 내부적으로도 많은 행정적 어려움과 비용을 수반하는 문제"라며 "김 위원장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국제사회와의 조화와 일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이자, 향후 예상되는 남북 북미 간 교류협력의 장애물을 제거하겠다는 결단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발표는 ... 모두 예정에 있던 합의가 아니라 회담장에서 처음 나온 얘기"라며 "당일날 발표할 상황은 아니었고, 서서히 복기하면서 김 위원장도 (공개에) 동의한 부분에 대해 공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차량에 부착된 ‘국무위원장’ 엠블럼         ▲ 종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생 ‘반송’을 심고 대동강 물과 한강물을 함께 주는 두 정상         ▲ 도보다리를 동행 수행원 없이 산책한 후, 평화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두 정상의 뒷모습   ==========================================   판문점 평화의 집에 걸린 김중만 작가의 '천년의 동행, 그 시작'. 훈민정음 서문의 언해본으로 모든글자가 검은색인데 반하여   '통하다(通)'이라는 뜻의 사맛디의 'ㅁ'(파란색)과  '만들다'라는 뜻의 맹가노니의 'ㄱ'(빨간색) 두글자만 다른색갈로 그려져 있읍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그림설명을 하고 있읍니다 문재인 대통령 성(姓)의 'ㅁ'을 푸른색으로, 김정은 위원장 성(姓)의 'ㄱ'을 붉은색으로 강조해 두 정상이 서로 통하기를 소망하는 뜻을 작품에 담은 김중만 작가의 작품 입니다       세종임금께서 한글을 만드시고 쉬운글이니  백성들이 날로 쑤메(나날이 쓰다보면) 편하여진다고 하셨듯이 남북간의 만남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훈민정음혜례본의 훈민정음 서문     훈민정음혜례본의 한글해석인 훈민정음 언해본         우리나라 백성들이 쓰고있는 말이 중국말과 다르게 발음이 되고 어려운 까닭에 어린(어리한) 백성들이 이르고저(말을 하거나 전하다)하여도 제뜻을 제대로 펼수없는사람들이 많기에 내가(세종임금) 이러한 모습들을 어엾이(불쌍하게)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이글을 쉽게 여기고 나날이 쓰다보면 편안해질 터이니  그러고 싶을 따름이니라            
499    [동네방네] - 금강산의 기운 받아 "통일대박" 만들자... 댓글:  조회:3679  추천:0  2018-04-29
두 정상 뒤로 펼쳐진 금강산… 신장식 작가 "기운받아 희망주길" 회담장에 걸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2018-04-27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에서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있다.  두 정상 뒤로 신장식 교수의 그림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이 걸려 있다. 남측(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서훈 국가정보원장) 북측(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 News1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백두대간의 꽃인 금강산의 기운으로 양 정상이 한민족 모두에게 평화가 오고 희망을 주기를 기원합니다."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걸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을 그린 신장식 국민대 교수(59)는 양 정상에게 바라는 바를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마주보고 앉은 자리 정면에 푸른 금강산의 주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그의 그림도 주목을 받고 있다.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은 가로 6m 81㎝, 세로 1m 81㎝에 달하는 작품으로 신 교수가 2001년 제작했다. 신 교수는 이날 뉴스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만나는데 저의 금강산 그림이 그 뒤에 대표적으로 걸렸다는 게 정말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금강산에 매료돼 1992년부터 자료를 연구해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 5년 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다. "금강산은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테마였지만 분단이후 금강산을 그리지 못했다"면서 "분단 됐더라도 우리의 산이기 때문에 계속 금강산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의 금강산 그림은 1998년 금강산을 직접 가보게 되면서 관념적 산수화에서 실경산수화로 바뀌게 된다.        상팔대는 금강산 비로봉에서 동쪽의 구룡대 아래 화강암으로 된 계곡에 크고 작은 못들이 층층으로 있는 것 중 대표적인 8개를 가리킨다.  그는 "상팔담에 올라가면 파노라마 같이 금강산의 주봉들을 다 볼 수 있다. 주봉들을 천화대, 하늘에 핀 꽃라고 한다"면서 "이번 정상회담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다"고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이 그림은 2001년 상팔담에서 받은 감동, 기운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남북 양 정상이 만나서 악수하는 자리에 역할을 한다는 게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뒤 10년간 10여차례 금강산을 방문하고 화폭에 담았지만 2008년 7월 관광이 중단된 이후에는 가지 못했다.  그는 "금강산 자체가 생동감 있는 우리 자연이고 정신적 뿌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생동감을 가지고  한민족에게 행복을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전세계에 ‘금강산’ 알린 신장식 교수 이화순  등록 2018.04.2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버블로그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 2층 회담장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신장식 작가의 그림’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다.   [시사뉴스 이화순 기자] 전세계가 주목한 4·27 판문점 평화의 집 2층 남북정상회담장.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회담을 주목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두 정상 못지 않게 벽에 걸린 거대한 금강산이 보였다.    겸재 정선을 비롯해 수많은 대가들이 즐겨 찾아 그려온 우리민족의 상징 금강산이 역동적인 생명력을 내뿜으며 한편의 그림으로 옮겨져 있었다.    가로 6m를 넘는 초대형 금강산 그림은 신장식(국민대 교수·59) 작가의 회화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681㎝ x 181㎝). 2001년 국민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국민대 예술관 갤러리 오픈 기념전에 출품한 대표작으로 전시 후 작가가 소장해왔다.      판문점 내부 공사 전만해도 한라산 전경을 담은 그림이 걸렸으나 지난 6일부터 20일까지 보수공사 후 신 작가의 금강산 그림이 걸렸다.    ▲ 신장식 회화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681㎝ x 181㎝)   신 작가는 “이 그림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를 통해 연락을 받고 ‘판문점 평화의 집’에 들어갈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4·27 남북정상회담장에 제 금강산 그림이 걸리니 감개 무량하다”고 말했다.     “저 역시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제 소망처럼 이 그림이 한반도 산천의 아름답고 푸르른 기상을 회담장 안에 몰고 왔길 바랍니다.”    상팔담은 금강산 팔경으로 꼽히는 절경의 하나. 금강산 구룡폭포 위 8개 연못이 있는 곳인데 그 연못 물빛이 신비로운 옥빛일 뿐 아니라 전체로는 마치 하늘에 핀 꽃과 같다 하여 천화대로도 불린다.   “한번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하는 절경”이라는 작가는 “백두대간의 에너지를 담기 위해 선을 단순하게 그리고 푸른 색을 많이 썼으며, 그 봉우리들이 하늘로 웅비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품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은 캔버스 위에 제작한 닥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아크릴로 금강산을 그려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난다. 이런 기법을 쓴 까닭에 유화의 번들거림과는 거리가 먼 전통의 푸근한 맛이 은은히 배어있다.     ▲ 금강산 앞에 선 신장식 교수   ‘금강산 작가’로도 불리는 신작가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 미(美)를 현대 미술과 접목하여 고유한 전통의 맥을 잇는 작업을 꾸준히 하는 가운데, 1992년부터 금강산을 그려왔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를 비롯해 민화 속의 금강산, 일제시대 금강산 사진 화첩, 일본의 현대 사진 작가가 찍은 금강산 사진, 북한에서 흘러온 금강산 자료 등 금강산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찾고 연구했다. 93~98년에는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작품이 탄생했고 전시가 가능했다.    1998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소 1000마리와 함께 한 방북 이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첫배 금강호를 타고 금강산을 찾은 이래 2008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금강산,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으로 불리는 금강산의 사계를 두루 작품에 담아왔다.   마침 그의 금강산 작품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한국실에서 5월 20일까지 열리는 ‘금강산 특별전’에 겸재 정선의 1711년 금강산 그림 등 11점과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 판문점 평화의집에 걸린 신장식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입력 2018.04.25. 17:47 댓글 1개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판문점=연합뉴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평화의집 실내 곳곳에는 성공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기원하는 의미의 다양한 미술품이 걸려 눈길을 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25일 춘추관 브리핑에서 "'환영과 배려, 평화와 소망'이라는 주제로 미술품을 선정했다"며 "그림 하나에도 이야기와 정성을 담았다"고 소개했다. 사진은 2층 회담장의 배경이 될 출입문 맞은편 벽에 걸린 금강산의 높고 푸른 기상을 담은 신장식 화백의 작품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고 부대변인은 "2008년 이후 다시 가지 못하는 금강산은 누구나 다시 가고 싶어하는 명산"이라며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을 회담장 안으로 들여 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소망했다"고 말했다. /2018.4.25 [청와대 제공=연합뉴스] ====================   판문점 금강산 그림에 백두대간 기 담았죠 [중앙일보] 입력 2018.04.27    기자 이은주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금강산을 배경으로 선 신장식 작가. [사진 신장식] “금강산을 통해 우리 민족의 기운을 표현하려면 사이즈가 꽤 커야 한다고 생각했죠. 가로 길이가 7m에 달할 정도로 그림을 길게 그린 이유입니다. 이 그림에 제가 담고 싶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웅장하고 상승하는 기운, 그 역동하는 생명력이었습니다.”     정상회담장 작품 화가 신장식 교수 봉우리 하늘로 웅비하는 모습 표현 “남북간 미술 교류도 이뤄졌으면”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판문점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걸릴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을 그린 신장식(국민대 교수·59) 작가의 말이다.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은 가로 6m 81㎝, 세로 1m 81㎝에 달하는 대형 화폭에 금강산 절경을 담은 작품. 26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내 그림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 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2층 회담장 벽에 걸린다는 사실은 어제 뉴스를 보고 알았다”며 "남북의 두 정상이 이 그림 앞에서 함께한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덧붙였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그림이 어디 있느냐고 묻더군요. 2001년에 그린 작품인데, 다행히 제가 소장하고 있었죠.”     상팔담은 금강산 절경 중에서 절경으로 꼽힌다. 금강산 옥류동 계곡을 올라가면 나오는 구룡폭포 위 8개의 연못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작가는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은 하늘에 핀 꽃과 같다 해서 천화대로 불린다”며 "봉우리들이 하늘로 웅비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백두대간의 에너지를 담기 위해 선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푸른색을 많이 썼다”고 설명했다.       신 작가는 일명 ‘금강산 화가’로 불린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25년간 금강산 그림으로 연 개인전만 20여 차례가 넘는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금강산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88년 서울 올림픽 미술 조감독을 맡으며 자연히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눈길이 갔다는 그는  "산하의 아름다움을 그려보자고 결심했는데, 당시엔 금강산을 직접 볼 수 없어 조선시대 금강산 그림과 일본 작가가 찍은 사진 등을 보며 그렸다”고 했다.     8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며 그때 금강산을 처음 찾았다는 그는 "이전에 ‘관념 산수화’에 머물던 그림이 이때 이후로 ‘실경 산수화’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후 10년간 금강산을 10여 차례 방문하고,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이후 가지 못했다. "금강산은 겸재 정선으로부터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였다”고 강조하는 그는 자신이 "금강산은 한민족의 기운을 상징하는 백두대간의 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금강산의 에너지를 받아 한반도에 평화가 자리 잡기를 기원한다”며 "앞으로 남북 미술 교류도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은주 기자 =========== 韓國畵 신장식 作家의 그리운 金剛山   옥류동의 빛   온정리의 봄   수정봉의 빛   만폭동의 빛   금강산 만물상   해금강의 여름   백두대간   삼선암의 가을   비로봉의 겨울   천화대의 빛              [출처: 중앙일보] 판문점 금강산 그림에 백두대간 기 담았죠    옥류동에서 바라본 천화대, 캔바스에 한지 아크릴릭, 162x81cm, 2007    내금강 장안사터, 캔바스에 한지 아크릴릭, 117x73cm, 2007    금강산 만물상, 캔바스에 한지 아크릴릭, 291x145cm, 2007    내금강 보덕암, 캔바스에 한지 아크릴릭, 162x81cm, 2007     신장식의 금강산도 박은순 (미술사가) 신장식은 진지하게 모색하는 화가이다. 그는 미술작업의 의미를, 남다른 표현기법을, 이 시대 우리 삶의, 조건과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해답을 구하려 한다. 이제까지 그가 소박한 들꽃과 청사초롱, 큰북과 광화문 등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대상을 취한 것은 단순히 소재주의적인 경향에 편승한 것이거나 표피적인 전통 우려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할 때 우리 역사와 생활, 예술속에서 오랜 실험을 거친 뒤 체질화된 조형성과 감수성을 함께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우리 문화와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하여 예술표현의 의미와 역할, 현대인의 미감에 호소할 수 있는 미학과 양식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신장식은 금강산을 그린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종교, 문화가 깃들인 금강산이 설악산이나 한라산과 다른 것은 그것이 휴전선 이북에 있어 갈 수 없는 산이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이후 근대까지 천여 년의 세월동안 다양한 신앙과 사상, 문학과 미술작품을 낳게 한 영감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은 때로는 이 산을 한번 보면 죽어서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성지로, 때로는 어질고 지혜로운 자의 성정을 기르려는 유학자들의 이상인 절경으로, 또한 때로는 평생 금강산에 한번 가보지 못하면 사람축에 들지 못한다는 선망의 신선경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지금 분단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금강산은 민족통일과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자리잡으며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금강산에 갈 수 없게 된 젊은 예술가들은 더이상 금강산을 그리거나 표현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은 곧 오랜 문화와 전통의 단절을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것이다.   온 겨레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 영산인 금강산, 그러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그리는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더구나 금강산이 단순한 풍경으로 다루어 질 수 없는 대상이 된 지금 금강산을 발견하고, 예술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우연히,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애착과 성찰,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필요하고,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요구되며, 또한 당연히도 그러한 조건을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탁월한 감성과 표현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신장식은 오랜 기간동안 우리 문화와 예술을 반추하며 작업해 오는 과정에서 마침내 금강산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하여 일제시대에 찍은 금강산 사진첩들과 최근에 촬영된 금강산 비디오필름을 합성하여 금강산의 지질과 형세를 연구하였다. 또한 정선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그려진 여러 대가들의 금강산도를 살펴보면서 표현의 특징과 기법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외금강의 만물초를 중심으로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골산의 힘찬 형태와 기가 분출되는 특징을 부각하였고, 때로는 화가 자신도 가보지도 못한. 이제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금강산의 영험과 신비로움을 부각하였다.   파란색과 짙은 코발트색을 주조로 하여 그린 육중하고 단단한 모습의 금강산은 한편으로는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 그 어떤 풍상에도 끄떡없을 듯이 강인한 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늘로 향해 치솟는 왕성한 형세와 활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장면이 마치 우리 민족의 힘찬 기상과 강인한 생명력을 서사적으로 표상한 것이라면, 이보다 부드럽게, 마치 너울거리는 듯한 평면적인 모습의 봉우리에다 흰색을 듬뿍 사용하여 신화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또 다른 표현의 금강산도들은 마음속에 언제나 그리운, 그러나 지금은 가볼 수 없는 존재인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신장식의 금강산 작업이 금강산이라는 소재의 성격과 특징에서만 오는 것이라면 그의 작업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반감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 기법을 교묘히 융합시킴으로써 화가의 의도와 조형성을 극대화시키며 그의 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선택한 형태와 색채, 여러 기법들은 매우 긴밀하게 결합되며 독특한 표현력을 낳고 있다.   금강산의 분위기와 의미를 상징하기 위하여 주조색으로 사용된 파란색과 짙은 코발트색, 흰색은 상징적인 분위기를 강화시켰고, 상승세를 강조하기 위한 형태와 색채의 교묘한 배열, 캔버스 위에 미리 발라 놓은 닥종이에서 오는 독특한 질감과 생명력의 표현, 다양한 색깔의 아크릴 물감의 뿌리기로 마감 지움으로써 마치 옛날 수묵화 가운데 붓의 필치로 표현되었던 내면적인 에너지 또는 기가 분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그러하다. 또한 때로 화면 전체를 덮는 짙푸른 가로와 세로의 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틀을 놓은 것은 마치 마음속의 유리창을 통하여 꿈속의 금강산을 보듯이, 또는 직접 답사하고 그리지 못한 실경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보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표현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은유이면서 동시에 좀더 복합적인 조형성을 보여주는 방안이다.      
498    [쉼터] - 사진은 말한다... 댓글:  조회:2635  추천:0  2018-04-15
'2017년 최고의 사진' 월드 프레스 포토 발표 [ 2018년 04월 14일 10시 17분 ]       올해의 사진을 수상한 '베네수엘라의 위기' . 작년 5월 마두로 대통령에 반대하는 반 정부 시위대가 화염에 휩싸여 도망치는 장면을 AFP통신 사진기자 로날도 슈미트가 포착했다. 스팟 뉴스 부문 1위에도 선정됐다. [연합뉴스]    ' 타오르는 화염 속의 시위대, 삶의 터전을 잃고 죽어가는 로힝야 부족, 붉은 안대로 눈을 가린 흰코뿔소 등….'   세계 4000여명의 사진기자가 찍은 8개 부문 최고의 사진 수상식 암스테르담에서 열려...    올해의 사진을 수상한 로날도 슈미트가 12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EPA=연합뉴스]      월드 프레스 포토(World Press Photo)는 1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2017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과 스토리를 담은 최고의 사진을 발표했다. 올해로 61회를 맞은 이번 사진전에는 125개국의 4548명의 사진기자가 7만 3044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월드 프레스 포토는 이날 대상인 '올해의 사진'과 8개 부문의 당선작 등을 선정해 발표하고 수상식을 진행했다. 8개 부문은 Contemporary Issues, Environment, General News, Long­-Term Projects, Nature, People, Sports, Spot News 로 나누어진다.    '올해의 사진'에는 스팟 뉴스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베네수엘라의 위기'가 선정됐다. 이 사진은 베네수엘라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화염에 휩싸여 도망치는 장면을 AFP통신 사진기자 로날도 슈미트가 찍어 전 세계로 타전됐다. 대상과 각 부문 수상작을 소개한다.      컨템퍼러리 이슈 부문 1위 수상작 . 나이지리아의 남서부 해안도시 라고스의 한 수상가옥 밀집지역을 구경하는 관광보트(가운데 흰색)와 주변풍경이 담긴 모습이다. 마코코라 불리는 이 수상가옥 밀집지역에는 수세대에 걸쳐 살아온 주민 15만여명이 거주한다.[EPA=연합뉴스] 환경 부문 1위상 수상작. 작년 9월 아프리카 보츠나와의 한 보호지역에서 흰 코뿔소가 마취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코뿔소는 밀렵꾼이 많은 남아프리카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서 약재로 쓰이는 흰 코뿔소의 뿔은 1kg 당 4천만원 가량에 불법거래된다.[연합뉴스] 제너럴 뉴스 부문 1위 수상작인 '로힝야의 비극'. 작년 9월 방글라데시로 탈출하던 로힝야 난민들이 탄 보트가 전복되면서 배에 탔던 80여명의 난민들이 사망했다. 갈곳을 잃은 미얀마 로힝야족의 비극은 지금도 현재형이다.로힝야 부족은 불교를 주로 믿는 미얀마 국민들과 달리 이슬람 교도다.[EPA=연합뉴스] 네이처 부문 1위 수상작인 '쓰레기 더미 속의 흰머리독수리'. 미국 알라스카의 한 항구 쓰레기통에서 흰머리독수리가 고기덩어리를 먹고 있다. 흰머리독수리(혹은 대머리독수리)는 미국의 국조로 각 공공기관의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EPA=연합뉴스] 스포츠 부문 1위 수상작인 '영국 전통축구'. 지난해 2월 28일 영국의 애쉬본에서 열린 전통축구의 한 장면이다. 인근에 위치한 두 마을이 이틀 동안 경기를 치른다. 과거의 경기룰은 '상대편을 죽이면 안된다'고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현대화된 다양한 경기룰이 등장했다.[EPA=연합뉴스] '올해의 사진' 후보에 올랐던 보코 하람에 납치됐던 소녀. 14세 소녀 아이샤는 나이지리아의 무장단체 보코 하람에 납친된 후 자살폭탄 테러를 강요당했다. 위기 속에서 아이샤는 가까스로 탈출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EPA=연합뉴스] '올해의 사진' 후보로 올랐던 런던테러 현장 직후 모습. 작년 3월 테러가 발행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한 행인이 부상당한 여인을 돌보고 있다. 차량을 몰고 행인들을 향해 돌진한 테러로 5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로이터=연합뉴스] 컨템퍼러리 이슈 스토리부문 1위 수상작으로 카메룬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가 딸들의 가슴을 마사지하는 장면이다. 이곳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들의 가슴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엄마들이 아이들의 가슴을 조이는 벨트를 채우거나 심지어는 뜨거운 막대기 등으로 열을 가하기도 한다. 성폭행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이 같은 관행은 피해자들에게 신체적인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EPA=연합뉴스]SALES 환경 스토리부문 1위를 차지한 나이지리아의 한 쓰레기장. 이곳에는 하루에 3천톤 가량의 쓰레기들이 쏟아진다. 인근에 살고 있는 4천여명의 빈민들은 매일 이곳을 뒤지면서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을 모아 내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월드뱅크는 전세계에서 하루에 3백 5십만톤의 쓰레기가 나온다고 밝혔다. 100년전 인간이 만들어낸 쓰레기 양의 10배 가량이 늘어났다. [EPA=연합뉴스] 스팟 뉴스부문에서 3위를 차지한 이라크 모술의 시가전 모습. 작년 3월 이라크 모술에서 정부군이 자살폭탄 용의자를 사살하는 장면이다. 모술을 탈환하기 위해 정부군은 ISIS와 1년 가량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로이터=연합뉴스] 영국의 AFP 사진기자 올리버 스카프(왼쪽)가 12일(현지시간) 암스테르담에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 매년 봄 열리는 전통축구의 한 장면으로 스포츠 부문 1위를 차지했다.[AFP=연합뉴스]            ///중앙일보
497    [동네방네] - 피카소 그림 또 해빛을 보다... 댓글:  조회:2560  추천:0  2018-03-31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21년 만에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낸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의 자화상 추정 작품이 7천만 달러(한화 약 744억원)에 거래될 전망이라고 AFP통신이 30일(현지시간2018년 3월) 세계적인 경매업체 크리스티를 인용해 보도했다.   홍콩 크리스티에 전시된 피카소의 1943년작 '선원' [AFP=연합뉴스]   '르 마랭'(Le Marin·프랑스어로 선원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의 이 유화작품은 선원들이 즐겨 입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줄무늬 상의 차림을 한 남성이 슬픈 표정으로 오른팔로 얼굴을 괸 채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은 가로 81㎝, 세로 130cm 크기이다. 이 작품은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1943년에 제작됐다는 점 등을 미뤄볼 때 피카소가 강제수용소로 이송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투영해 그린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 남성은 다리를 꼬고 앉아 왼손을 무릎에 올려놨는데 이는 우울감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장치라고 크리스티에서 근대·인상파 미술을 담당하는 코너 조던 부회장이 설명했다. 조던 부회장은 "그림에 약간 어두운 느낌이 있는데 불안과 흥분, 약간의 우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작품 앞에서 한 남성이 같은 포즈를 취해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크리스티 측은 그동안 경매로 거래된 피카소 작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격에 판매될 것이라며 낙찰가를 7천만 달러로 예상했다. 작품은 내달 3일까지 홍콩에서 전시되며 경매는 5월 15일 뉴욕에서 진행된다. 이 작품이 대중에 공개되기는 미국 뉴욕 출신의 유명 수집가인 빅터와 샐리 갠즈 부부가 소장하고 있다가 21년 전 경매에 등장한 이후 처음이다. 피카소가 그린 '알제리의 여인들(버전 0)'은 2015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억7천940만 달러(한화 1천907억원)에 낙찰돼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알제리의 여인들' [EPA=연합뉴스]
496    [쉼터] - 안중근 의사 어록과 15m 대형 광목천 서예 댓글:  조회:3001  추천:0  2018-03-25
[포토]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년,                             서예 퍼포먼스 이창훈  2018.03.2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김동욱 독도 사랑 예술인 연합회 회장 겸 한국 서예 퍼포먼스협회 고문이 25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길이 15m의 대형 광목천에 안 의사의 어록을 적는 서예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하상윤 기자 ================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서예 퍼포먼스'로... 이윤기 기자  2018.03.26.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울산=뉴스1) 이윤기 기자 =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인 26일 김지영 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회장(오른쪽)과 김동욱 독도사랑예술인연합회 회장(왼쪽)이 울산 중구 성남동 젊음의거리에서 길이 200m 광목천에 안중근 의사가 남긴 171자의 유언을 쓰고 있다. 2018.3.26/뉴스1  
495    [쉼터] - "미완성작 모나리자", "완성작 모나리자" 댓글:  조회:5179  추천:0  2018-03-25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걸작품을 일일이 감상하려면 한 달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박물관 측에서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꼭 보아야 할 작품을 안내서에 적어 시간이 없더라도 이들 작품만은 빠뜨리지 말고 보라고 추천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중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모나리자〉다.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평범하게 보이는 여인을 그린 〈모나리자〉는 루브르박물관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작품만은 경보장치가 있는 방탄유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이처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명화로 부상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사실 15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모나리자〉가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보르디 페조리 미술관에 있는 〈소녀의 초상〉이었다. 이 초상은 다빈치보다 한 세대 선배인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가 그린 그림으로 다빈치도 젊은 시절에 이 그림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책 그런데 18세기부터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예술의 세계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예술과 과학을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19세기 말 뢴트겐, 베크렐에 의해 방사선이 발견되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소립자의 세계, 즉 인간을 비롯한 우주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려지자 재빠른 미술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회화에 도입하자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바로 추상화가 태어나는 요인이었음은 물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과학이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그가 평생을 두고 작성한 공책 23권도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 공책 덕에 만능 예술가로서의 위치가 더욱 공고하게 되는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과학자의 반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가 위대한 예술가이자 과학자로 자리매김하자 그가 그린 모나리자 역시 자연스럽게 세계최고의 명화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각종 기구를 설계한 그림 그런데 다빈치는 자신이 쓴 자기소개서에 “그림도 그릴 줄 압니다”라고 적었다.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 세계 최고의 예술가 중에 한 사람으로 불리는 다빈치가 자기소개서에 그림도 그릴 줄 안다고 겸손하게 적은 까닭은 자신을 화가나 조각가로 불러주지 말고 군사전문가(과학자)로 불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 중에서 그동안 미완성 작품이라고 설명되던 여러 가지 논란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 =========================   다빈치가 피렌체에서 델 조콘다를 6년에 걸쳐 그렸지만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실이다. 그런데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완성된 작품이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이 의문은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다빈치는 초상화를 그릴 때 항상 두 장 이상을 그렸는데 한 장은 미완성, 또 한 장은 완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이 구성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다빈치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의뢰에 따라 그의 부인인 리사 게라르디니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을 때 그는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의 초청을 받는다. 이때 줄리아노 데 메디치로부터 자기의 정부인 콘스탄차 아발로스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연하게도 콘스탄차는 그가 그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모나리자〉를 약간 닮았고 또한 ‘라 조콘다’ 즉 ‘미소 짓는 여인’이라는 뜻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다빈치는 평소에 두 개의 그림을 그렸으므로 자신이 여벌로 그려두었던 또 한 점의 〈모나리자〉 델 조콘다의 초상화를 손질하여 그림의 얼굴을 콘스탄차의 얼굴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초상화가 완성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메디치가는 정략결혼을 위해 정부 콘스탄차를 버렸기 때문에 그림을 사지 않았다. 다빈치는 당시에 자신이 갖고 있던 다른 그림들과 함께 제2의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지고 갔는데 그것이 바로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초상화이다. 이를 증언해주는 중요한 열쇠로 아라곤 추기경의 시종인 안토니오 베아티스라는 사람이 남긴 문서가 있다. 1517년 다빈치가 프랑스와 1세의 궁정에 갔을 때 아라곤 추기경이 그를 방문했다. 그때의 대화를 시종인 안토니오가 기록했는데 그에 따르면 추기경은 다빈치의 그림 몇 점을 보고 갔다. 성 요한의 그림, 성모 마리아와 성 앤의 그림, 그리고 플로렌티네의 어느 부인의 초상화, 이 그림은 메디치가의 줄리아노 대공의 요구대로 실제 모델을 보고 그렸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줄리아노 대공의 요구에 응하여 그린 모델은 바로 콘스탄차 아발로스이다. 이를 다시 부연하여 설명한다면 다빈치는 두 개의 〈모나리자〉를 그렸는데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것의 주인공은 콘스탄차이고 델 조콘다를 그린 〈모나리자〉는 남편 조콘도에게 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콘스탄차를 그린 〈모나리자〉는 완성품이고 델 조콘다를 그려 남편인 조콘도에게 준 그림은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대영박물관, 바티칸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루브르박물관 다소 헷갈리지만 〈모나리자〉가 두 개 있다는 것은 이탈리아의 미술사가인 지오바니 파올로 로마초가 1584년에 적은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조콘다와 모나리자」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말의 뜻은 두 점의 그림이 따로따로 있음을 의미한다. 〈모나리자〉의 그림이 두 개라는 설명은 두 그림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과 완성된 작품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두말할 것 없이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특별히 방탄유리로 보호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줄기차게 거론되던 미완성으로 끝난 〈모나리자〉는 어디에 있는가? 델 조콘다를 그린 그림 말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이므로 다소 믿기지는 않지만 근래 〈모나리자〉에 대한 탐구는 그야말로 놀랍다. 미완성 〈모나리자〉에 대한 근래의 연구를 추적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빈치가 델 조콘다를 모델로 그린 〈모나리자〉는 비록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계속 피렌체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이 미완성 작품이 18세기 중엽 이탈리아로부터 흘러나와 영국의 서머싯 주에 있는 한 귀족의 저택에 보관되었다. 이것을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배스의 휴 블레이커라는 미술상이 발견했다. 그는 이 그림을 저렴한 가격으로 입수하여 아일워스에 있는 그의 화랑에 간직했다. 이때부터 이 그림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로 알려지게 된다. 〈모나리자〉보다 10년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작품인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는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보다 크며, 더욱 중요한 것은 진짜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배경의 그림도 가벼운 터치에 불과하다. 즉 이 그림이 루브르박물관의 그림보다 바사리가 기술했던 것과 훨씬 더 비슷하다. 바사리는 미완성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눈은 현실의 삶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그 반짝임과 윤기를 지니고 있으며 눈 주위는 비할 데 없는 정교함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붉은 붓놀림에서 오는 느낌과 속눈썹의 산들거림 ······ 콧마루와 아름다운 콧속은 장밋빛으로 요염하다. 살아 있는 듯하다. 입 주위는 위아래의 붉음으로 인해 얼굴빛에 녹아들고 색으로 칠했다기보다는 살아 있는 육체의 존재 그 자체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케네스 클라크 경은 이 문장을 보고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와는 완연히 다른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미완성 〈모나리자〉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도 제시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가 1504년 다빈치의 화실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본 후 스케치한 〈외뿔 송아지를 안은 여인〉에는 양쪽에 두 개의 그리스식 원형 기둥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식 원형 기둥은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에는 있지만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에서는 볼 수 없다. 블레이커는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쪽이 훨씬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미술가도 이에 동의했다. 특히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는 분명 삼십 대이다. 그런데 아일워스의 여성은 이십 대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외뿔 송아지를 안은 여인〉 배경에는 〈아일워스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는 원형 기둥이 보인다.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는 1962년 수집가인 헨리 F. 퓰리처 박사가 주재하는 스위스의 신디케이트가 사들였다. 박사는 『모나리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책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그림이 진정한 〈모나리자〉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조콘다의 그림은 확실히 두 점 있다. 단 남편 이름의 여성형 어미 변화를 이름으로 가진 〈모나리자〉가 조콘다의 전통적인 권리를 가진다. 조콘다(Gioconda)는 남편의 성인 조콘도(Giocondo)의 여성형이므로 〈모나리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루브르박물관에는 없고 런던에 있다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루브르박물관의 그림은 단순한 오해로 ‘모나리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워낙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소재이므로 앞으로 정보가 많아지면 더 명확한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한다. =======================   모나리자의 미소는 과학이다 1년치 아르바이트 수입을 몽땅 털어서 떠난 유럽 배낭여행. 여기가 유럽이라고 생각하니 땀이 수돗물처럼 콸콸 쏟아져도, 뱃속에 들어간 게 팍팍한 바게트뿐이라도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 정수와 기석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았다. 기석은 내심 박물관은 지겹다는 생각이었지만, 정수는 ‘루브르!’를 외치며 아침부터 설레는 눈치다.  “이 방은 대기실인가, 그림은 없고 사람만 가득 있네.”  기석이 두리번거리자, 정수가 기석의 팔을 잡아끌며 속삭인다.  “여긴 모나리자의 방이라고. 이 루브르에서도 혼자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그림이지.”  인파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려 드디어 그림 가까이에 다가선 정수와 기석. 기석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휴우~, 고작 이거 보려고 이렇게 기다렸다는 거야. 이렇게 작은 그림이었어? 책으로 보는 게 훨씬 낫겠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미소는 도대체 어디 있냐? 완전히 심드렁한 표정이네, 뭐가 신비롭다는 건지. 직접 보니 왜 다들 ‘모나리자, 모나리자’ 하는지 더 모르겠다.”  정수는 모나리자를 정면에 놓고 투덜거리는 기석을 끌어 그림이 옆에서 보이는 자리로 옮겼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봐.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 말이야.”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뭔 차이가 있겠냐.”  마지못해 다시 그림을 본 기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조금 전에는 분명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림 속 여자가 슬그머니 웃는 얼굴로 보인다.  “에헤, 이쪽에서 보니까 약간 웃는 것도 같긴 하네. 조명 때문인가?  정수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이게 바로 우리 같은 물리학도들이 모나리자를 직접 봐야 하는 이유지. 너도 이제부터라도 미술에 관심을 좀 가지렴.”  기석은 정수의 말이 아리송하기만 하다.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본업은 과학자에 가까웠다. 그러니 다빈치의 미술 작품이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다빈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모나리자에 담긴 비밀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 혹시 다빈치 자신은 아닌가? 모나리자는 미완성인가? 모나리자는 웃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미소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뿌옇게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은 어떻게 그려진 것인가? 이처럼 모나리자에 대한 궁금증은 셀 수 없이 많다. 모나리자의 비밀은 근래 들어 과학의 힘으로 상당수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애초에 모나리자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빈치는 해부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특히 눈을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다빈치는 안구를 정교하게 해부하기 위해 삶은 달걀에서 형성되는 글루타민산염으로 안구를 고정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다빈치의 방식과 유사하게 안구 해부에 앞서서 파라핀 같은 응고물로 안구를 고정시키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눈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빛의 성질을 파악하는 일에도 힘썼다. 본다는 것은 눈, 즉 생물학적인 부분과 빛이라는 광학이 결합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빈치는 원근법의 원리를 연구했고, 명암의 미묘한 차이와 빛의 분산을 이해하기 위해 다면체의 각 면에 내리쬐는 빛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 관찰과 연구의 결과물 중 하나가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다빈치의 초상화인 것이다.  앞서 기석이 말한 것처럼 어떨 때 모나리자는 웃기는커녕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해 보인다. 하지만 다시 보면 웃는 듯도 보인다. 모나리자는 정말 웃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모나리자가 웃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가?  미국 하버드 의대의 신경과학자 마가렛 리빙스톤은 2000년 모나리자의 미소는 주변에서 볼 때가 정중앙에서보다 미소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연구결과를 밝혔다. 2005년에는 망막에서 대뇌피질의 후두엽에 있는 시각령까지 이르는 경로에 무작위로 끼어드는 노이즈가 미소의 발견 여부를 결정한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최근 스페인의 신경과학자 루이스 마르티네즈 오테로와 디에고 알론소 파블로의 연구에 의하면 그림의 크기와 명도, 위치 등 시각 경로의 조건에 따라 미소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눈이 복합적인 신호를 뇌에 보내기 때문이다. 망막의 세포들은 사물의 크기, 명도, 위치 정보를 코드화해 각각 다르게 분류된 정보를 뇌에 전달한다. 이 때문에 조건의 변화에 따라 미소를 보거나 볼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빛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흰 화면을 30초간 보여준 뒤 모나리자를 보여준 경우와, 검은 화면을 보여준 경우를 비교하자 흰 화면을 본 쪽이 미소를 더 잘 포착했다.  모나리자는 그림의 왼쪽 입술은 일자로 다물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입술은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입 모양을 하고 있다. 한성대 미디어디자인학부 지상현 교수에 의하면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우뇌를 이용해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전체 표정을 인식하기 때문에 모나리자는 무표정한 듯하면서 순간적으로 웃는 표정으로 보이게 된다. 만일 모나리자의 그림을 합성해 좌우를 바꾸거나, 좌우 모두를 웃는 쪽, 무표정한 쪽으로 합성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 어떨까? 좌우 입술 모양을 바꿔 왼쪽 입술의 입 꼬리가 올라가도록 만들 경우 웃는 표정이 더 우세해지지만 신비감은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은 절묘하게 배치된 입술 모양에만 있지 않다. 다빈치가 사용한 안개처럼 뿌옇게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은 그림의 윤곽선을 희미하게 만든다. 최근 프랑스박물관연구복원센터와 그르노블 유럽가속방사광설비 학자들이 X선 형광분광기를 통해 모나리자를 분석한 결과 스푸마토 기법, 즉 안개와 같이 흐릿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다빈치는 여러 번의 덧칠을 했는데, 한 번 덧칠된 막의 두께는 머리카락의 절반 가량인 40마이크로미터 이하이며, 최대 30겹까지 칠했다고 한다.  정교하게 제작된 뿌연 윤곽선은 시신경에 혼란을 부른다. 우리 눈의 망막 뒤쪽 시신경에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연결되어 있는데, 원추세포는 색깔과 정지한 사물을, 간상세포는 명암과 운동하는 물체를 인식한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유재준 교수는 동물적 감각에 더 가까운 역할은 간상세포가 한다며, 다빈치가 윤곽선을 희마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간상세포를 자극해 다양한 반응을 유도한다고 밝혔다.  모나리자는 어느 순간, 어떤 사람에게는 인자한 미소지만 동시에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과학은 그러한 느낌이 우연이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빈치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의도해 모나리자를 그렸을까? 모나리자에 숨겨진 비밀들이 밝혀질수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에 대한 감탄도 커져만 간다.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화상 피렌체에 머무르던 다빈치는 1503년부터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모나리자〉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작품 속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많다. 이와 같은 의문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빈치의 명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나리자〉에 얽힌 이야기가 아직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모나리자〉의 모델은 그의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 화가 열전』에 적은 대로 피렌체의 명사로 부유한 비단 상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두 번째 아내인 리사 게라르디니(델 조콘다, 1479년생)이라고 알려졌다. 리사 게라르디니의 남편 델 조콘도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이었던 다빈치 부친의 주요 고객이었으므로 다빈치가 게라르디니를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빈치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1503년은 게라르디니가 자식을 잃은 직후였으므로 그림의 제작 초기에 그녀의 남편인 조콘도는 아내를 미소 짓게 하려고 광대와 악사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야릇한 미소는 그렇게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다. 다빈치는 그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배경으로 삼은 시모네호를 〈모나리자〉에서도 배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림은 6년이 지났는데도 완성되지 않았다. 다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능통한 천재가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해 몇 년이나 걸린다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심지어 다빈치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다빈치의 애인이 되었다는 억측을 낳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의 의견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다빈치는 동성연애자였으며 섹스를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는 섹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성행위와 이에 사용하는 기관의 징그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인간이라는 씨는 그 인성을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나리자〉를 그리는 데 6년 혹은 그 이상을 지체했다는 이야기는 그림 속 주인공에게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빈치가 〈모나리자〉의 모델에게서 남다른 매력을 느꼈음을 유추해볼 수도 있는데 다빈치의 또 다른 전기 작가인 안토니아 발렌틴도 다빈치가 그의 생애에 만난 어느 여성보다도 〈모나리자〉의 모델에게 깊은 관심을 둔 것이 틀림없다고 적었다. 다빈치는 1505년 플로렌스를 떠날 때 미완성의 그림을 게라르디니의 남편에게 맡긴 후 돌아올 때마다 손질했다. 그러나 1506년에 남편을 따라 여행을 떠난 게라르디니는 여행 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이십 대였다. 다빈치 역시 밀라노로 길을 떠나 다시는 피렌체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더는 〈모나리자〉를 그리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화필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종결된다면 미완성 〈모나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거론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조르조 바사리가 다소 헷갈리는 이야기를 적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초상화 작업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이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현재 프랑스의 왕 프랑스와 1세의 소유로 퐁텐블로에 있다. 이 문장을 보면 이 그림은 당연히 현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는 이 작품이 완성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바사리가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에 대해 적을 때는 그림 속 모델의 남편에게 그림을 맡긴 지 고작 40년이 지났을 때다. 당대의 부호로 유명한 조콘도가(家)의 조콘도가 이런 걸작을 그렇게 쉽게 남에게 넘겨주었겠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부인을 그렇게 공들여 다빈치에게 그리도록 했는데 그 그림을 어떤 연유이든 다빈치에게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의문점은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완성이 아니라 단기간에 그려진 완성된 작품이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무언가 헷갈리는 점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 '모나리자'가 어두워진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는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천재 화가의 미술 작품을 이해할 때도 이온과 이온이 만나 생기는 앙금에 관한 지식이 도움이 된다. 명화 속에는 어떤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을까? 모나리자를 포함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은 처음 그가 그렸을 때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점차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이것은 다빈치가 사용한 물감의 성분과 관계가 있다. 다빈치는 나무판에 생석회와 모래의 혼합물을 발라 평평하게 한 후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바탕을 칠했다. 그 이유는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흰색 물감을 바탕에 칠하면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 바닥에 잘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빈치가 주로 사용했던 파랑이나 빨강 물감에는 황 성분이, 초록 물감에는 구리 성분이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 이 물감들을 함께 사용하면 납과 황, 구리 성분이 만나 검은색 앙금이 생기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어둡게 만든 물질이 무엇인지 다음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보자. 준비물 : 염화나트륨 수용액, 황화나트륨 수용액, 질산납 수용액, 질산 구리 수용액, 점적병(또는 플라스틱 약병), 투명 필름, 접착테이프, 휴지, 실험용 장갑, 보안경 ① 부록 403쪽의 반응판 위에 투명 필름을 올려놓고 접착테이프로 고정한 후, 각 수용액을 떨어뜨려 색깔 변화를 관찰한다. ② 실험 결과를 아래 표에 정리하고, 앙금이 생성된 경우 이 앙금은 어떤 이온들이 반응하여 생긴 것인지 생각해 보자(단, 앙금이 생성된 경우는 앙금의 색을 적는다). 수용액(포함하는 이온) 질산납 수용액(Pb2+, NO3-) 질산 구리 수용액(Cu2+), NO3-) 염화나트륨 수용액(Na+, Cl-) x x 황화나트륨 수용액액(Na+, S2-) 검은색 앙금 검은색 앙금 ③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 그림을 완성했을 때보다 검게 변한 이유를 앙금 생성 반응으로 설명해 보자.   → 다빈치는 그림을 그릴 때 납이 든 흰색 물감으로 바탕을 칠했다. 그런데 그가 그 위에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했던 파란색 물감이나 빨간색 물감에는 황 성분이 들어 있었고, 초록색 물감에는 구리 성분이 들어 있었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리면서 이 물감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납 이온, 구리 이온은 황 이온과 만나 검은색 앙금을 형성하였다. 모나리자를 비롯한 여러 다빈치의 작품들은 이러한 검은색 앙금으로 인해 색이 점점 어둡게 변하게 된 것이다. 모나리자 (1503~1506,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그림에 얽힌 이야기 프랑스의 유명 엔지니어인 파스칼 코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1506년에 그린 원래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있었다고 말했다. 모나리자 연구로 잘 알려진 그는 자신이 개발한 특수 카메라를 이용, 자외선과 적외선을 포함한 13개 스펙트럼을 이용해 모나리자를 2억 4000만 화소의 초정밀 이미지로 스캔한 결과, 왼쪽 눈썹 한 가닥을 그린 붓 자국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눈썹이 지워진 까닭에 대해서는 누군가 그림을 닦다가 실수로 문질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추정한다. 코트는 고성능 카메라와 스캔 장비를 이용해 500년 전 처음 완성됐을 때의 모나리자 원본 작품을 복원해 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색된 그림에 유약이 덧칠되어 다빈치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원본의 분위기를 잃었는데, 디지털 기술로 복원된 그림에서는 모나리자의 피부가 핑크빛을 띠며 배경이 된 하늘은 푸른색이라고 한다. 물감의 성분 옛날에는 아름다운 색을 가진 천연 광물의 분말을 적당한 액체에 풀어서 사용했으나, 오늘날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무기·유기 염료와 착색력을 높이기 위한 물질들을 섞어서 고체 또는 반고체로 굳힌 것을 쓴다. 안료로 사용되는 금속 원소는 중금속이므로 독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데, 구리와 비소 성분을 가진 에메랄드그린, 납 성분을 가진 실버 화이트, 크로뮴 옐로, 황화수은을 가진 버밀리언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온전한 피부에서는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상처에 들어가거나 직접 먹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다. ================ 〈모나리자〉 그림에는 왜 눈썹이 없을까? Q) 신비한 미소로 유명한 〈모나리자〉 그림을 그린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예요. 다 빈치는 이 그림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그렸다고 해요. 그런데 왜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을까요? 모나리자 정답 : ① 알아보기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의견이 있어요. 그 가운데 모델이 원래 눈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믿을 만해요. 당시에는 여인들이 눈썹을 미는 게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나리자〉의 모델도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죠. 이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스푸마토 화법'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눈썹 부분이 지워졌다는 것이죠. 또 어떤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의 미소를 더 신비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눈썹을 그리지 않았다고 해요. 〈모나리자〉의 모델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이 있어요.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호 조콘다 백작의 부인이라는 얘기도 있고, 다 빈치 자신의 초상화라는 얘기도 있어요. 또 모델이 다른 남자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모나리자〉는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그림이에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모나리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답니다. ====================== 루브르박물관의 그림이나 아일워스의 그림이 〈모나리자〉인가에 대해서는 추후에 명백히 밝혀질 것으로 생각되므로 더 설명하지 않겠지만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그림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다. 이곳에서는 근래 알려진 〈모나리자〉 연구에 대해 설명한다. 학자들이 가장 많이 주목한 분야는 〈모나리자〉의 미소다. 어딘가 모르게 차가우면서도 인자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오묘한 미소인데 200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연구팀이 ‘감정 인식 소프트웨어’를 통해 〈모나리자〉를 연구한 결과 이 미소에 인간의 복합적 감정이 섞여 있다고 발표했다. 입술의 굴곡과 눈가의 주름 등 얼굴 주요 부위의 움직임을 수치화해 분석하자 표정의 83퍼센트는 행복의 감정이었지만 불쾌함도 9퍼센트, 두려움 6퍼센트 있었고, 분노 2퍼센트 등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나리자〉는 코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입 근육이 서로 다르다. 왼쪽 입술은 일자로 다물고 있어 무표정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오른쪽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때문에 차갑지만 순간적으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모나리자〉의 얼굴을 합성해서 좌우 모두를 웃도록 하거나 무표정하게 만든다면, 표정은 더 또렷해지지만 특유의 신비감은 확연히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다빈치가 과연 이런 면까지 파악하고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 질문에 관한 한 다빈치가 이런 내용을 사전에 알고 의도적으로 그렸다고 믿는다.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인체를 한층 섬세하게 그리는 내공을 보였다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눈과 입에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도 그 방증으로 제시된다. 스푸마토 기법은 서로 다른 색상 사이의 윤곽을 명확히 구분하는 대신 안개를 표현하듯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상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표현하는 명암법이다. 이런 기법은 다빈치가 처음 도입한 것으로 다람쥐 털 소재의 붓으로 연하게 녹인 물감을 칠해 색의 변화를 낸 후 손가락으로 윤곽을 지워 마무리하곤 했다고 한다. 다빈치의 그림에 아직 그의 지문이 뚜렷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구현한 스푸마토 기법은 그림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거리감과 공간감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는 미소뿐 아니라 그림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스푸마토 기법이 사용된 대표적인 작품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성 가족〉 아기의 몸을 스푸마토 기법으로 표현했다. 〈모나리자〉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궁금증은 바로 눈썹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눈썹이 없는데 그 이유는 당시 넓은 이마를 미인의 조건으로 여겼기 때문에 눈썹을 뽑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원래의 〈모나리자〉에 눈썹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파스칼 코트는 자신이 개발한 특수 카메라로 그림을 분석했다. 그 카메라는 자외선, 적외선 등 13개 스펙트럼을 가지고 2억 4000만 화소로 이미지를 정밀 촬영할 수 있는데 〈모나리자〉의 얼굴 부분을 24배 확대했더니 왼쪽 눈썹 한 가닥을 그린 붓 자국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눈썹이 지워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는데 지워진 이유는 누군가가 실수로 지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모나리자〉 그림의 눈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미세한 금들을 볼 수 있는데, 그림 복원 과정에서 이 부분을 부주의하게 닦았다는 설명이다. 2010년에는 〈모나리자〉의 눈 속에서 글자와 숫자가 발견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탈리아 국립문화유산위원회가 〈모나리자〉 그림의 눈을 촬영한 고해상도 이미지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오른쪽 눈에 ‘LV’, 왼쪽 눈에 ‘CE’ 혹은 ‘B’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배경 부분인 다리의 아치에서도 숫자 ‘72’ 혹은 글자 ‘L’과 숫자 ‘2’가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이른바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다빈치 코드』의 결정적인 단서인지도 모르지만 이 글자만으로도 앞으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임은 틀림없다.
494    [쉼터] - "12세 모라리자" 댓글:  조회:2744  추천:0  2018-03-25
    콜롬비아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86)는 풍만한 양감을 통한 인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남미의 정서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뚱뚱한 그림’에 매료된 그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만하고 묵직하게 그려낸다. 특히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명작들의 인물을 풍선처럼 부풀리는 독특한 화풍이 압권이다.   1959년에 그린 ‘12세의 모나리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를 차용해 익살스럽고 경쾌한 색감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미소를 짓고 있는 풍만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모나리자가 지닌 고귀함이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살짝 걷어냈다. 원작의 어둡고 무거운 색채 대신 밝고 가벼운 색채를 활용했고, 구도와 비례도 무시했다. 원작을 비트는 시도로 오랫동안 우상처럼 각인돼온 아름다움의 규범을 가볍게 건드린다. 보테로는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림으로 명쾌하게 보여준다.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보테로의 이 작품을 구입해 화제가 되면서 단번에 보테로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김경갑 기자  ///[한경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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