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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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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상상을 초월하는 "콜라주" 작품들... 만들고싶어지다...(2) 댓글:  조회:8139  추천:0  2017-10-22
    http://instiz.net/pt/3543431  
412    매력적으로 미쳐라... 그리고 상상속에서 살아보쟈... 댓글:  조회:1981  추천:0  2017-10-22
콜라주(Collage)?... 생소하지 않은 이 단어를 우리는 의미도 모른 채 알고 있다. 콜라주란 각양 각색의 재료들은 한데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회화기법이다. 미술계에서도 이미 피카소(Pablo Picasso)나 브라크(Georges Braque)가 자신의 작품에 꼴라주 기법으로 세상이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겼고 후에는 초현실주의 오브제 기법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Lasso with Infinite Appetite Hoarding Throttled Infrastructure Cubicles 콜라주 기법을 세세히 이해하기는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작품을 마주했을 때 ‘아 이거!’라고 외치게 될 만큼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Eungenia Loli 친근하다 못해 옆 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이 있는 Eungenia Loli. 그녀는 자신의 콜라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간호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저널리스트, 필름 메이커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아티스트와는 무관하면서도 무관하지 않은 그 동안의 직업 때문인지 그녀의 작품에는 그녀만의 예술성이 돋보인다. Please Don't Take My Nine (collaboration with Zach Collins) Picnic Party Stockholm Syndrome 작가의 작품에는 현대를 품은 명화를 발견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의 일상을 엿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 그녀의 작품에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역설적이면서도 부조리함을 꼬집기도 하는 것 같지만 뭔가 어울린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것이 Eugenia loli만의 매력이 아닐까? Multitouch God Dialing Happy Meal Man Dirty Lucid Dreamer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광활한 우주를 담은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아직까지도 쉽게 닿지 못하는 우주에 발을 디디기도 하고 떠다니기도 한다. 우주를 안고 있는 여인은 우주의 우수에 젖어있다. 작가는 어쩌면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지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그런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Gold digging Encapsulated by Double Quotes I Wish I was a Cloud Too Kundalini The Oracle instructs the return to Nature Muses Up or Down 또한 ‘여인’ 역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꽃 봉우리가 터져 화려함을 뽐내듯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눈 부시게 아름답다. 이렇듯 그녀는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부각시킨다. Bloomy Kiss IAMI Multifaceted Cultural Bias Strawberry Shortcake Eungenia Loil은 작업 과정 동안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이미 여러 매체를 활용해 작품을 홍보하기도 했고 이런 방식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며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그런 대화 속에서 작가는 수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예술이 상업화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녀는 문화의 장이 상업화가 된다면 현(現)시대의 유행만 따를 것이며 이는 곧 진정한 작품을 만들 수 없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신념 아래 Eungenia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작품을 업로드 해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공유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일궈냈다. 이런 과정 역시 그녀만의 콜라주다. 누구나 엮고 붙이고 발라서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듦을. 그리고 그 안에는 관객과 그녀의 무한한 가능성이 녹아있다. Vintage Heroes (exaptych)   .                  
411    새들에게는 두번 다시 반복되는 하루가 있을가... 댓글:  조회:1719  추천:0  2017-10-22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중...        교보 건물의 글판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블츠오톡 (걸래같은새)  '두번은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세상에 14마리만 있는 희귀새 인도  가슴에 와닿는 이글은 폴란드 여류시인인                       하지바우 코우일본동물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년7월 2일~ 2012년 2월 1일)       의 두번은 없다 라는 시의 문구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시인이다.                        번역된 시를 옮겨보면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질렌드 앵무새 카카포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것이다.                     아쌈 희귀새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팔색조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코뿔새 남미 희귀새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ㅡ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파란 앵무새  두번의 똑 같은 밤도없고                 타라코 새  두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이제.누군가 내곁에서 내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으면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때 난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습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                      따오기       우리함께 일치점을 찿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모셔온 글                
410    [이런저런] - 소금으로 조각품 만들다... 댓글:  조회:1626  추천:0  2017-10-21
  식용 소금으로 조각한 배추이다. [인민망 한국어판 6월 29일] 6월 22일, 160여개의 정교한 소금 조각품이 제18회 중국•칭하이(靑海, 청해) 친환경발전 무역투자 상담회[약칭 ‘칭차후이(靑洽會)’]에 등장해 시선을 집중됐다. 이 소금 조각품들은 모두 차이다무(柴達木)분지의 식용 소금을 이용해 제작한 것들로, 관공[關公, 관우(關羽)]뿐만 아니라, 비너스와 귀여운 새끼 곰, 새끼 돼지 등의 다양한 조각품이 전시되었다. 이번에 등장한 소금 조각품은 종류가 모두 160여 가지에 달했고, 가격은 10위안(한화 약 1,650원)에서 1만 위안(한화 약 165만 원)까지 다양했다. 정교한 소금 조각품은 많은 시민들의 구매를 이끌었다. 칭하이성 차이다무분지 염호는 수없이 많고, 이미 조사해 밝혀진 33개의 염호 가운데 염화나트륨의 매장량은 3,300억 톤에 달하며, 이는 전국의 염호 매장량의 85%를 차지한다. (번역: 김미연)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식용 소금으로 조각한 관공[關公, 관우(關羽)]이다.          
409    시작도 극적인 성격과 조각적인 성격을 융합해야... 댓글:  조회:2059  추천:0  2017-10-21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4) :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 (1483~1520)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천사   확실히 라파엘로의 작품이라고 인정되는 최초의 그림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페루지노의 감미롭고 품위있는 표현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제작하기 이전에 레오나르도와 접촉이 있었고, 그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한 바 있어, 작품의 고귀한 풍은 이러한 관계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작품은 1500년 12월 10일 카스텔로시의 성 아우고스티노 성당의 예배당 제단화(祭壇畵)로 제작이 의뢰된 것이나, 1789년의 지진으로 제단화는 손상되고, 그 후 남아 있는 부분이 이 그림의 이다.         聖세바스티아누스   구도적인 짜임새와 안정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이다. 순교자 성세바스티아누스를 초상화로 시대 적인 인물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물의 세속적인 측면은 부분적으로 장식화된 의상의 특징을 강조한데서 엿보이고, 또한 성자를 실제로 모델삼아 묘사한 듯이,머리의 사실적인 표출과 그 세부적인 묘사가 현실감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인물의 개성적인면이 라파엘로에게 중요시되어 그 성품의 표현을 보게 한다. 온화하고 체념된 표정은 세속적인 탐욕을 멀리하고 있는 눈빛과 정적인 성자의 자세에서 엿보게 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성자의 모습은 평온한 느낌을 주게 하는 채색과, 배경이 되고 있는 적막한 자연의 평온한 전개로 이루어지고 있다. 라파엘로의 젊은 시대가 이 작품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성모의 대관(戴冠)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페루지아에서 머물고 있었던 시대의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특히 작품의 구도면에서 그가 영향받은 페루지노와 핀투릭키오의 흔적이 뚜렷하다. 화면이 상하로 이등분되어 각기 독립적인 구성이 돼 있고, 또한 양면이 분리될 수 없는 내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 고유의 표현은 지상의 많은 성자들의 개성적인 표정에 있고 정적이고 온화한 자세에서 다시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주제가 어떻든 라파엘로는 항상 채색면에서 부드럽고 감미로운 색감과 색조를 나타내며 명쾌함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의 유래는 페루지아의 명문(名門)의 여인 오디의 의뢰로 당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1797년 프랑스 군은 이 그림을 파리로 약탈해 갔으나, 1815년에 이탈리아로 반환되어 바티칸 궁에 소장되어졌다.          몽드의 그리스도 책형   카스텔로 시(市) 성 도메니코 성당 내의 가바리예배당을 위하여 제작된 그림이다. 본래 이 작품은 좌우로 와 등 세 폭의 작품과 연결된 것이 었다. 그리스도의 책형상 밑에는 좌우로 성모와 복음서를 쓴 성 요한이 경건한 자세의 입상으로 보이고 있고, 이들 사이에는 성 히어로무스와 막달라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애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완전한 도식적인 구도를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상이 중심이 되어, 화면을 양분하고, 똑같은 각도에 대각선을 좌우로 만들어 인물을 둘씩 배치하고 있다. 배경은 멀리 전개되고 있는 자연 풍경이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맑고 밝은 하늘로 구성되어 그림에 시원한 공간성을 주고 있다.           책을 읽고 있는 聖母子   라파엘로는 수많은 성모자상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 하나하나가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초기 성모자상 시리즈에 해당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세의 성모의 모습이 특징이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기예수는 천진스럽고 장난기가 있는 상으로 그려졌다. 특히 성모는 모정과 종교적 경건함이 얽힌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은 평온한 자연 경관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이것은 상징적인 세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평온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는 온화한 색채와 부드러운 색조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1871년에 이 작품은 러시아 황제에게 양도되어 오늘날 레닌그라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聖게오르기우스와 惡龍   같은 주제의 일련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성인전에서 발취한 것이다. 그는 3세기 로마의 군인이었고,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악룡을 퇴치하여 왕녀를 구출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고 참수(斬首)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소녀는 카파도키아의 왕녀이며, 이야기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정적인 성격을 나타내었고, 또 이점이 라파엘로의 독특한 정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또 지역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 미술에서 특징이 되고 있는 정적인 면이 왕녀에 반영되고, 이에 동적인 성 게오르기우스로 대조되고 있다.         聖게오르기우스와 惡龍   같은 주제의 일련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성인전에서 발취한 것이다. 그는 3세기 로마의 군인이었고,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악룡을 퇴치하여 왕녀를 구출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고 참수(斬首)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소녀는 카파도키아의 왕녀이며, 이야기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정적인 성격을 나타내었고, 또 이점이 라파엘로의 독특한 정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또 지역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 미술에서 특징이 되고 있는 정적인 면이 왕녀에 반영되고, 이에 동적인 성 게오르기우스로 대조되고 있다.         聖게오르기우스와 惡龍의 습작   같은 주제의 일련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의 일부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성인전에서 발취한 것이다. 그는 3세기 로마의 군인이었고,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악룡을 퇴치하여 왕녀를 구출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고 참수(斬首)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소녀는 카파도키아의 왕녀이며, 이야기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정적인 성격을 나 타내었고, 또 이점이 라파엘로의 독특한 정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은 다분히 설명적이고 또 지역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 미술에서 특징이 되고 있는 정적인 면이 왕녀에 반영되고, 이에 동적인 성 게오르기우스로 대조되고 있다.         聖母子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은 우아하고 수려하며 자애감으로 성격화되고 있으며 이것이 전형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체류하기 시작한 초기 작품이다. 구도는 극히 단순한 형식으로 돼 있고 배경이 없는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다. 이 구성은 완전히 균형으로 형성되어 있고 한편 빛과 그늘은 미묘하게 인물의 심리로 반영하고 있다. 성모와 아기는 세속적인 정이 없는 심각하고 위엄있는 표정을 보이고 체념과 비애의 분위기를 엿보여 주고 있다. 그림은 배경이 없는 어두움에서 성모자가 부상(浮上)하듯이 명암을 대조적으로 표출하고 있으며 두 인물의 종교적 성격을 암시하여 준다. 색채의 조화와 명암으로의 색조가 인물 중심으로 되어 라파엘로의 고귀한 색채관을 감지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많은 밑그림과 구상이 필요하였고, 또한 완성된 성과에 대한 논리도 많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의 라파엘로의 화풍은 극히 종교적인 명상과 고귀한 정관의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이 그림은 너무나 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극적인 세속성까지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라파엘로 작품에서 특성이 되고 있는 구도의 통일성과 그 간결한 일체성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고, 사방으로 분산되는 동세로 복잡한 선을 구성하고 있다. 부드러운 음율적인 선은 여기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체는 미켈란젤로의 < 피에타 像>을 연상시키며, 한편 기절한 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작가의 에서 빌어온 상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나, 지적된 점은 양자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騎士의 꿈   이 작품의 주제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헤라클레스' 또 기타 몇 주제로 해석되고 있다. 우의적(友誼 的)인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성숙기에 다가서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후기 그의 미술의 능숙한 표현력을 엿 보게 하여 준다. 라파엘로 미술의 발전은 그의 성장 과정의 도표로 볼 수 있는 우르비노, 페루지아, 피렌체 시 등으로 엮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겨 갈 무렵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에 나무 하나가 배치되어 좌우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고, 그 밑에 기사가 누워 있으며, 또 좌우로 인물이 배치되어 삼각형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삼각형 구도를 통하여, 농촌의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원근법이 이에 적용되고 있다. 간결한 구성과 시정(詩情), 그리고 환상이 담겨져 있다.         三美神   작품 과 한 쌍으로 취급되고 있는 이 그림은 고대 조각 이래, 일반적으로 삼미신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그 소재는 그리이스 신화에서 발취한 것이다. 세 여인은 각기 손에 사과를 갖고 있으며, 정숙, 청순,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인체의 표현은 유연한 곡선과 부드러운 육체감을 미묘한 색조로 나타내고 있으나, 조형적인 구체성이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나 젊음의 생동감은 탄력있는 육체의 표출로 시사되어 있고, 우아한 분위기는 여인들의 조용한 자세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대자연이 전개되고 있는 공간에서 세 여인의 형상은 꿈이나 환상을 연상케 한다. 주제나 그리스 신화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전설적인바, 작가는 이 성격을 존중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의 초기를 장식하고, 페루지아 시대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카스텔로 시의 성 프란체시코 성당을 위하여 당시의 명문 알바치니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구상에 있어서나 그 구도에서도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와 직결되어 있다. 이그림의 특징은 전면과 후면과의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통일시키고 있고, 공간의 원근과 넓이를 통합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배후에 있는 사원 건축물의 구조에 따라 그 기본선이 광장을 규제하고, 또 전면의 인물 배치도 이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공간성에 대한 엄격한 탐구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성 모자(카우퍼의 소성모) 작품과 연관되는 성 모자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모자간의 모습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의 성모는 생각에 잠긴 상이며, 모정의 복잡한 세계를 엿보게 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애정과 종교적인 모자간의 거리가 동시에 성모의 심정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라파엘로의 인물화에 상습적으로 등장되는 자연 풍경은 여기서도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물화에서의 자연 풍경은 물론 가상적이고 회화적인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면구성은 공간성에 대한 르네상스 미술의 해석과 그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 모자의 주제는 라파엘로의 인간적인 해석과 종교적인 해석 밑에서 특징있게 표현되고 있으며, 이에 또한 심리적인 표출까지 보게 한다.         아뇰로 도니의 초상   이 작품과 다음의 작품(마달레나 도니의 초상)은 젊은 부부의 초상화이다. 젊은 남자는 피렌체 출생인 상인으로서 1503년, 피렌체의 명문인 스토롯시가의 마달레나와 결혼하였다. 이 초상이 제작된 1506년에 그 여인은 17세 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도니가에 계속 보존되고 있었으나, 가문의 단절로 인하여 프랑스의 아비뇽 시에 거주하고 있던 상속인의 손에 넘어가 그 후 1826년,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의 대공(大公) 레오 폴드2세에게 보관되었다. 이 두(rs0515.jpg와 다음의 rs0516.jpg) 작품을 보면 남자와 여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위치의 자세로 되어 있으며 이들의 배경으로 되고 있는 자연 풍경도 연속된 같은 풍경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녀의 자세는 흡사하며, 여인은 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선 남성 의상은 단순한 색채로 빨간색과 검은색의 대조로 검소하고 깔끔한 성품의 인물을 보게 한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세부적인 면의 사실적인 묘사와 얼굴의 성품을 알려 주는 특징 있는 묘사는 라파엘로의 특기이며, 또한 초상화의 생명이 되고 있다. 라파엘로는 대상 인물의 성품을 솔직하게 표출하고 그에 맞는 채색과 분위기를 만들고 있고, 이에 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암시적이고 은유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의 젊은 부인 초상화는 품위 있고 화려한 의상, 장신구로 여인을 성격짓고 있다. 질감이 표출될 정도의 세부적이며 사실적인 묘사는 라파엘로의 감각적인 표출능력을 또한 알려 주는 것이다. 여인의 무표정한 세속적인 모습은 다빈치의 암시적인 의 표정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연속적인 배경의 자연 풍경은 두 인물의 초상화에서 연결되며, 부부의 연관을 맺어 주고 있다.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수염이 없는 聖요셉과 성가족   수염이 없는 성 요셉의 상은 드물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도상학(圖像學)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이례적인 것이다. 성가족은 라파엘로의 특기인 묘사력으로 뚜렷하게 개성이 선적(線的)으로 표출 되어지고 있다. 그 묘사적인 선은 항상 유연하고 부드러워 온화한 인물상을 낳게 하고 있다. 여기에 라파엘로의 특기의 감정 어린 표현은 평화롭고 다정한 3인의 성가족을 보게 한다. 성모와 아기의 눈길과 자세는 가장인 성 요셉에 향하고 있으며, 성요셉은 깊은 정감으로 아기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구도상의 중심은 아기로 되어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으나, 정신적인 중심은 가장이 중심이 되고 있다. 3인이 화면을 크게 지배하고, 배경은 실내 벽면이 대부분이 지배하고, 배경은 실내 벽면이 대부분이 되어, 가정적인 분위기를 강조시키고 있다.그러나 배경의 한 부분은 실내의 문을 통하여 원경의 자연을 보이게 하여,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시사해 준다.         聖母子와 아기 聖요한   라파엘로의 성모자 회화 작품 중에서 다음의 두 작품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이다. 시원한 초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성요한이 서로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다.           부인의 초상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와서 감명 받은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였다. 1505년부터 6년에 걸쳐 제작한 라파엘로의 초상화 작품은 이러한 감명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초상화도 그 하나인 것이다. 이 그림의 별제(別題)인 < 라 그라비다>는 수태(受胎)한 여인이라는 뜻이며, 라파엘로는 임신한 여인을 모델로 삼고 있다. 모델이 되고 있는 여인의 자세는 부자연스러우나, 세속적인 평범한 상과 그 표정이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온화한 색조와 의상의 구체성이 인물을 개성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세 또한 인물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배경이 배제되어 인물이 더욱 부상되고 있다.         젊은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은 초상화 제작 시기와 같은 때에 그려진 또 하나의 여인 초상화이다. 여인의 의상, 손 등 여러 부분이 손상되어 수정이 가해진 상태의 그림이다. 특히 여인이 안고 있는 순결을 상징하는 일각수도 손상되어 그 흔적이 아직도 역역하다. 작품의 구성은 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이에 다 빈치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구도는 배경에 좌우로 원주를 두고 여인의 좌상이 크게 중간에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방향은 실내에서 외부로 향하게 된다. 여인의 격(格)있는 의상과 장신구, 머리의 질감, 개성 있는 얼굴의 표정 등이, 모델이 되고 있는 여인의 품위를 알려 주고 있다. 넓게 멀리 내다보이는 자연과 하늘은 원근의 법칙에서 인물상을 돋보이게 한다.           자화상   이 자화상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배우고 있을 무렵에 제작한 것이라 추측되는 것으로, 1506년 후반에 해당된다. 따라서 화가가 23세 때에 그린 것이고 청년기의 그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온화하고 청순한 용모와 부드러운 눈길 등은 라파엘로의 청년기의 작품에 공통된 특색이다. 이 시기의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자화상만큼 인간미의 이상적인 표현이 엿보여지는 작품이 드물다. 단조로운 색조의 배경과 검은 단일색으로 표출한 채색은 수식 없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 방법이다. 차분한 채색 분위기는 인물 표정에 초점을 두고 성품의 선명한 표출과 안면의 선을 뚜렷하게 하여 준다. 르네상스의 고상한 정신은 이와 같은 라파엘로 자신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聖母子   성모자가 실내를 이례적으로 배경으로 하고 나타나 있다. 모자가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정을 주고 받고 있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종교적 인물인 성모자는 세속적인 모자의 친밀감으로 묘사되어 모정의 따스함을 감지케 한다. 종교적인 위엄과 숙명의 비애는 전연 없고, 성모는 다정하고 자애스러운 표정과 자세를 보이며 아기를 얼싸안고 애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 아기의 자세는 모정에 이끌리는 일상적인 상으로 되어 양자의 자연스러운 호응을 나타내고 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실내 배경은 더욱 가정적인 분위기를 이고,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내의 다정한 자상을 연상하게 한다. 정이 감도는 훈훈한 분위기는 온화한 색조와 색채의 조화로 한층 더 강조되고 있다.         聖母子와 아기 聖요한(방울새가 있는 성모)   성모자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이 방울새가 있는 이 성모자 작품이다. 우선 구도면에서 성모가 화면 중심이 되어 크게 지배하고 있고 그 좌상의 안정감이 그림의 틀을 잡아 주고 있다. 성모 앞의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하고, 그 좌우로 자연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다른 성모자화에 비해 명암의 대조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고, 명쾌한 색채보다 통일된 색감을 주로 삼고 있다. 한편 라파엘로 특기의 부드러운 선이 묘사에서 음악적인 선율을 보이며 감미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성 요한이 잡고 있는 방울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의 이론가인 바자리에 의하면, 라파엘로의 친구인 타데오 타데이를 위하여 제작한 것이라 한다.       聖母子와 아기 聖요한(아름다운 여정원사)   프랑스어로 '라 벨라 쟈르디니에르'라 불리우는 이유는 꽃이 피고 있는 초원에 아름다운 성모가 앉은 모습을 두고 말한 것이다. 여인은 성모라 불리우기보다 청순하고 우아한 젊음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에 비하면 모자의 정은 좀더 자연스럽고 서민적임을 양자의 자세와 정에 어린 눈길로 알게 된다. 라파엘로는 이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의 환희를 그 환경과 배경에 주고 있다. 당대의 이탈리아 학자 바지리에 의하면 이 작품은 시에나 시의 귀족 필립 셀루가르디를 위하여 제작된 것이며, 그 후 프랑스의 왕 프랑소와 1세가 입수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성모의 연민이 모정에 얽힌 표정은 안보이며, 모자간의 은은한 정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융합되어진 걸작이다.           바티칸궁 서명실 천정도         솔로몬의 심판         갈라테아의 勝利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삼은 것은 드물다. 라파엘로의 후견인이었던 당시의 은행가 아고스티노 기지의 별장 파르네지나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하여 작품이 제작되었다. 바다의 여신 갈라테아는 두 마리의 돌고래에 이끌려 개선하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반인반어의 바다의 신 트리톤과 바다의 요정들이 환희에 찬 모습으로 갈라테아를 반기고 있다. 이 그림의 내용은 생의 즐거움과 찬미를 나타내는 비유적인 것이다. 한편 라파엘로는 이와 같은 신화의 소재를 통하여 당대의 고전에 대한 가치관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못 그림은 동적이고 또한 극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종교화의 정적인 숭고함에 비교를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형상은 형체 구조의 정확한 묘사로 입체감을 주는 조각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알랙산드리아 聖女 카다리나 SANTA CHTERINA DALESSANDRIA 1508년 판 油彩 71.5×55.7Cm 런던 국립 미술관 소장         카니지아의 聖家族   이 그림은 원래 피렌체 시의 카니지아니 가(家)의 소장 작품이었던바, 이 작품을 그 가문의 이름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1801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뮌헨으로 옮겨졌었다고 한다. 라파엘로가 제작한 많은 성가족 작품은 구도가 간결하고, 분위기 또한 정적이며 명상적인데 비하여, 이 작품은 그 예외가 되고 있다. 우선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는 인물의 수가 많고, 자세나 표정이 동적이고 다양하다. 감미롭고 우아한 표정 대신 감정적이고, 설명적인 표현과 자세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가족의 분위기는 속된 기미를 풍기고 있다. 이 성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 또한 설명적인 경관(景觀)이며, 변화되고 있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어 영구한 정적인 종교적 정취(情趣)를 멀리 하고 있다. 이 정적인 변화는 배경에 감동적인 색채를 또한 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聖母子(템피의 성모)   이 작품이 별칭 라 불리고 있는 이유는 템피가의 소장으로 있었던 이유에서이다. 작품 , 등이 라파엘로의 성모에 대한 이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 또한 다른 측면의 성모로 이상화된 상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적 모성이 자제된 성모의 정과 종교적인 경건한 자세에서의 자애에 얽힌 상이며, 후자는 인간적인 모성의 순수한 사랑과 친밀감에서 밀착되는 모자간의 정다운 이상적인 모습이다. 사랑으로의 모자의 일체는 라파엘로 특유의 부드러운 선적 묘사로 구체화되어 화면을 지배하고, 한편 배경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성모의 표정은 현실적인 행복과 애정의 반영이며, 종교성이 배제돼 있다. '성모자' 소재에 관한 라파엘로의 이와 같은 양면성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추기경의 초상   로마 체류 시기의 작품인 이 초상화는 인물의 개성적인 표현이 강력히 표출돼 있고, 귀족적인 성품이 뚜렷이 부상된 인물화로 알려져 있다. 날카로운 골상과 안면의 선, 그리고 깊은 선이 인물의 강한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지극히 소박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인물의 표정은 그 심리적인 면까지 표출시키고 있어, 라파엘로의 초상화에 대한 깊은 탐구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줄리우스 데 메디치로 알려져 있었으나 입증된 바 없고, 오늘날에는 볼로냐 시의 대주교 알세리 추기경이라고 있다. 인물의 정적인 면과 심리적 묘사가 개입된 이 초상화는 라파엘로 미술의 성숙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작품이 되고 있다.         폴리뇨의 聖母   , 바티칸 궁의 대벽화 등을 완성한 후 라파엘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비서였던 명문가의 시지스몬도 데 콘티가 성모에게 바치기 위해 이 작품이 있게 됐고, 로마의 아라카엘리 성당 제단화로 이용되었다. 대작과 여러 작품을 제작한 경력을 쌓은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새로운 색채를 나타낸다. 그것은 색채의 다채로움과 그 명도의 강조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두고 작가가 베네치아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온화하고 감미로운 라파엘로의 채색 세계는 사실 여기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특유의 삼각형 구도는 상부의 성모를 기점으로 하부 좌우로 연결되어 형성되고 있다. 기증자인 콘티는 우측에 무릎을 꿇고 있고, 좌측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같은 자세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   라파엘로가 제작한 초상화 중에서 걸작의 하나이다. 로마 체류시의 초상화로서, 강한 개성의 표출이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은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저명한 문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밀라노와 우르비노 궁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정신론의 자로서도 유명하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현명한 자기의 친구의 모습을 예지에 차 있는 표정으로 보여 주고, 활달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눈의 총기로 시사해 주고 있다. 확고한 인물의 자세는 안정감을 나타내 주고 있고, 차분한 색채는 인물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되어 모사를 한 바 있으며, 그의 자화상 및 초상화의 영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도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한다.         레오 X世와 두 추기경의 초상   이 초상화는 라파엘로의 만년의 작품이며, 또한 초상화로서의 그 사실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사실성은 인물의 심리적 묘사를 질감 표출과 세부적 사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상의 질감은 촉각적 성격까지 유발시키고 있으며, 탁자 위의 서적과 초인종의 세부적인면은 정밀묘사 기법까지 등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라파엘로 화풍의 고유한 고전적인 고귀성과 우아함이 없고,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리얼리티가 지배하고 있다. 레오 10세 우측 후면에 있는 인물은 그의 친척인 줄리오 데 메디치이며 훗일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다. 또한 좌측 후면에는 레오 10세의 비서를 볼 수 있다. 3인의 위치를 보아 삼각형의 구도로 보이나 각자의 방향은 다르고 표정과 자세도 상이하여 일종의 불안전감을 분위기에서 느끼게 하여 준다.         젊은 부인의 초상(라 포르나리나)   시대적인 인물을 나상으로 보이는 초상화는 드문 예가 된다. 상반신이 나상으로 나타나 있는 이 젊은 부인은 라파엘로의 애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만년에 이르러 라파엘로는 세속적인 화풍의 표현이 강해지고 있음을 이 초상화에서도 보여 주고 있다. 여인의 머리 위에 있는 두건은 그 질감의 사실성인 성격에서 촉각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또한 복부를 가리는 의상은 육감적인 여체를 느끼게 할 정도의 질감의 사실성을 보여 준다. 여인의 표정에 있어서도 지난날의 고귀성과 우아함은 사라지고 감각적이거나 육감적인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젊음의 생기는 탄력 있는 피부로 감지케하여 주고 있으며, 또한 인물의 외양적 모습은 어두운 배경에서 부상시키고 있다. 인품이나 정신적 고귀성을 반연하는 초상화는 이제 외면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의 초상화로 변해지고 있다.      
40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자연아, 이야기하라... 댓글:  조회:3304  추천:0  2017-10-21
Grand Prize: Confiscated Denver, CO, ©Britta Jaschinski 지구가 가진 아름다움과 다양성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전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의 최종 수상작들이 발표되어 인류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WINGED LIFE FINALIST: Sand Hill Cranes and Lightning Platte River, Nebraska, ©Randy Olson | Sewickley, Pennsylvania 올해로 4회를 맞이하고 있는 본 대회는 미국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에서 주최하는 국제 대회로 올해도 전 세계에서 수천 점의 사진이 응모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Aquatic Life Finalist: Revillagigedo Archipelago, Mexico, ©Ralph Pace | San Diego, California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본 대회는 ‘자연의 예술: Art of Nature’, ‘수중 생물: Aquatic Life’, ‘조류: Winged Life’, ‘풍경: Landscapes, Waterscapes, and Flora’, ‘야생동물: Terrestrial Wildlife’, ‘인류와 자연: Human&Nature’, ‘사진 시리즈-항공사진: Photo Series-Aerial Photography’까지 총 7개 부문으로 진행된다. Winged Life Finalist: Mind the Gap Bay of Whales, Antarctica, ©Andrew Peacock | Santa Barbara, California 올해는 미국 어류·야생동식물 보호국 창고에 보관 중인 불법 밀렵과 포획으로 만들어진 130만 점의 압류품 중 코끼리의 다리를 박제해 만든 의자를 찍은 사진이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된 가운데 인간의 잔혹한 탐욕으로 파괴되고 있는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다수의 작품들이 선정되어 우리에게 자연 보호와 보존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TERRESTRIAL WILDLIFE FINALIST: Saru Dango Shodoshima Island, Japan, ©Alexandre Bonnefoy | Schiltigheim, France Terrestrial Wildlife: Ecosystem Ermas National Park, Brazil, ©Marcio Cabral Brasilia, Brazil TERRESTRIAL WILDLIFE FINALIST: Dango Hokkaido, Japan, ©Natsumi Handa | Asahikawa City, Japan TERRESTRIAL WILDLIFE FINALIST: A Leap of Lechwe Okanvango Delta, Botswana, ©Wim van den Heever | Pretoria, South Africa WINGED LIFE FINALIST: Fire & Drongo Singur, India, ©Kallol Mukherjee | Singur, India Aquatic Life Finalist: Upside Down Portovenere, Italy, ©Davide Lopresti | La Spezia, Italy Landscapes, Waterscapes, and Flora: Kamokuna Lava Firehose 25 Hawaii Volcanoes National Park, Hawaii, ©Jon Cornforth Kilauea, Hawaii Human/Nature Finalist: Flying Over the Sleepers Caribbean Sea, near Dominica Island, ©Franco Banfi | Cadro, Switzerland Art of Nature Finalist: Trampantojo Rio Tinto, Spain, ©Fran Rubia | Roquetas de Mar, Spain Aquatic Life Finalist: Sealion with Starfish Los Islotes, Mexico, ©Francis Perez | Canary Islands, Spain HUMAN/NATURE FINALIST: The Collaborators Kalahari Desert, South Africa, ©Jen Guyton | Princeton, New Jersey WINGED LIFE FINALIST: Evening Ghosts Eckert James River Bat Cave Preserve, Texas, ©Karine Aigner | Washington, DC Winged Life: Snow Globe Bosque del Apache, New Mexico, ©Denise Ippolito Brielle, New Jersey Landscapes, Waterscapes, and flora Finalist Koehn Lake Mojave Desert, United States, ©Yi Sun | Cambridge, United Kingdom Human/Nature: Pandas Gone Wild Wolong, China, ©Ami Vitale Missoula, Montana 2017 Series: Aerial Photography: Supra New South Wales, Australia, ©Ray Collins Sydney, Australia
407    상상을 초월하는 "콜라주" 작품들... 만들고싶어지다... 댓글:  조회:1919  추천:0  2017-10-21
  처음작품은 Jenndalyn의 작품, 거의 대부분 Eugenia Loli의 작품들 예쁘게 감상...                                                                                                               출처 :Secret Art 
406    상상을 초월하는 "콜라주" 건축물들... 살고싶어지다... 댓글:  조회:2803  추천:0  2017-10-21
건축물 콜라주 작품 :) by Anastasia Savinova 출처: bloglovin.com [출처] 건축물 콜라주 작품 :) by Anastasia Savinova|
405    지도를 오려 붙혀 그림 작품 탄생시키다... 댓글:  조회:2965  추천:0  2017-10-21
지도를 이용해 만든 콜라주 작품         지도를 활용한 창의적인 콜라주 MATTHEW CUSICK   콜라주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여러 가지를 붙여 작품을 완성하는 미술 기법인데요. 사진이나 인쇄물 등을 자르거나 찢는 등의 방법으로 붙이는 과정을 통해 계획과 우연이 교차되면서 그만의 화풍으로 독특한 작품이 탄생됩니다. 뉴욕 출신 MATTHEW CUSICK는 지도를 이용 한 콜라주 작업으로 인간, 동물, 자연을 표현하는 작가입니다. 작가의 콜라주 작품은 그 소재와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하고 정교해 수많은 갤러리와 공공기관에 소장 또는 전시되어 있답니다.   작가는 주로 오래된 지도와 백과사전, 교과서, 책에서 지도를 조각하여 자연의 모습과 인물, 사물을 표현하는데요. 작품에 표현되는 형태, 배경, 명암, 컬러까지 꼼꼼하게 오려낸 지도 조각으로 콜라주 작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운 형태와 명암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생각만 해도 뒷 목이 아픈데요 ^^;     지도를 이용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확대해서 보면 복잡하게 보이는데요. 지도에 그려진 작은 글자와 혈관처럼 퍼진 선들부터 작품에 맞는 색조와 명암을 표현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자르고 분해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고 해요.   세밀하게 표현된 지도를 이용한 작가의 콜라주는 인물화나 물과 같이 음영과 형태를 표현하는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인물화나 사물을 표현한 것도 훌륭하지만 바다 물결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물보라는 정말 예술적으로 표현이 잘 된 것 같아 감탄스러운데요!!!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의 지도를 손 안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종이 지도의 필요성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데요. 작가는 점점 잊혀 가는 종이 지도를 이용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고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분해하고 자르고 붙이는 과정을 통해 작품이 재구성되고 만들어지는 콜라주 처럼 작가는 지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 봄으로써 지금과 같은 독창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 같습니다. [출처] 지도를 이용해 만든 콜라주 작품    
404    그림과 그림 밖에서 봐야 할 그림과 그림 밖... 댓글:  조회:4613  추천:0  2017-10-21
그밖에 테이트 모던에서  꼭 보아야 할 그림 10     과일 그릇, 바이올린과 병(Bowl of Fruit, Violin and Bottle) - 파블로 피카소, 1914 1912년 이래 피카소는 브라크와 더불어 콜라주 기법에 심취해 있었다. 〈과일 그릇, 바이올린과 병〉은 당시 피카소가 몰두한 콜라주 기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필자 주};="콜라주 기법"이란=  풀로 붙인다는 뜻으로 1912∼13년경 브라크와 피카소 등의 입체파들이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 ·악보 등 인쇄물을 풀로 붙였는데 이것을 ‘파피에 콜레’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수법은 화면의 구도 ·채색효과 ·구체감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다다이즘시대에는 파피에 콜레를 확대하여 실밥 ·머리칼 ·깡통 등 캔버스와는 전혀 이질적인 재료나 잡지의 삽화 ·기사를 오려붙여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부조리와 냉소적인 충동을 겨냥하였다. 여기서 사회풍자적 포토 몽타주가 생겨난 것이다. M.에른스트의 작품도 여기에 속한다. 1950년대 초 로렌스 앨러웨이에 의해 명명된 팝 아트도 역시 테크놀러지라든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 대중의 시각 안에 있는 조형적 요소를 몽타지해서 작품에 포함시켰으며 R.라우션버그의 작품도 원천은 콜라주수법에 의한 것이다. 참고하세요 ^^ ====================== (프랑스어로 '붙이기'라는 뜻) 신문지·헝겊·벽지·인쇄물 또는 일상생활에서 취한 물건 등을 화판이나 캔버스에 붙여 만드는 미술기법.   주로 그림 위에 붙여 병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19세기에 종이를 잘라 한데 붙여 장식적 구도를 만드는 '파피에 콜레'(papiers collés) 기법이 처음 생겨났다. 1912~13년경 파블로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이 이 기법을 확대하여 종이, 나무, 리놀륨, 신문지 조각을 유화 위에 덧붙여 미묘하고 재미있는 추상적 또는 반추상적 구도를 만들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 기법 개발은 분석적 입체파가 종합적 입체파로 바뀌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콜라주'라는 낱말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특히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을 가리킬 때 처음 사용되었다. 에른스트의 콜라주는 오래된 판화와 인쇄물을 교묘하게 잘라 붙여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이미지를 만든 것이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는 끈이나 넝마 조각, 나무토막, 철사, 못, 종이 따위를 활용했다. 앙리 마티스가 말년에 만든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는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콜라주 기법의 변형을 채택한 것이다. 미국의 조지프 코넬은 친밀감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유리 진열장에 콜라주 기법을 확대해 적용했다.    1960년대에 콜라주는 팝 아트의 주요형태로 절정을 이루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신문과 잡지 사진을 실크스크린 인쇄물과 결합하여 미국 역사와 대중문화를 혼합한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커피(Coffee) -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915 일상의 티타임을 그린 작품이지만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체크의 테이블보가 불안한 인상을 준다. 보나르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의 아내로 인해 힘든 결혼 생활을 감내해야 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보나르의 힘겨운 생활이 언뜻 엿보이는 듯싶다. 회전목마(Merry-Go-Round) - 마크 거틀러(Mark Gertler), 1916 거틀러는 독특하게도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에서 공포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회전목마는 즐거운 놀이기구라기보다는 기이한 환상이나 악몽처럼 보인다. 샘(Fountain)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917, 복제품 1964 다다이즘의 상징 같은 뒤샹의 작품. 뒤샹은 기성품인 변기에 자신의 사인을 넣은 뒤 전시에 출품함으로써 미술은 수준 높고도 고상해야 한다는 기존의 인식을 통렬하게 비웃었다. 맥주잔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a Beer Mug) -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921-1922 레제가 순수추상주의에서 조금씩 구상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던 단계에 완성한 작품. 작가는 전통적인 정물화의 방식을 모방하면서도 맥주잔과 테이블은 원색으로, 주위 배경은 흑백으로 대비시켜 경쾌한 조합을 이루어 냈다. 부부(A Married Couple) - 조지 그로스, 1930 그로스가 주로 1920년대에 그린 ‘독일 중산층의 역사’ 연작 중 한 작품. 그로스는 이 연작을 통해 1920-1930년대 독일의 정치적 격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그가 미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연작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달팽이(The Snail)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953 이젤 앞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만년의 마티스는 조수가 색칠해 준 여러 색깔의 종이를 오려 캔버스에 붙이며 작업을 계속했다. 〈달팽이〉는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 마티스의 작품 중 가장 화려한 색깔을 자랑한다. 적갈색 위의 검은색(Black on Maroon) -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58 어둠 속에 닫힌 창문을 연상하게 하는 로스코의 회화. 로스코는 이 작품에 대해 “비극과 환희, 우울함 등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의 형상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모리츠부르크 호수에서 목욕하는 여자들(Bathers at Moritzburg) -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909/1926 독일 다리파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키르히너의 작품. 드레스덴 근교 모리츠부르크 호수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과장된 포즈와 주황, 푸른색의 극적 대비로 표현해 냈다. 소녀의 초상(Portrait of a Girl)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약 1917 모딜리아니 특유의 긴 목과 그늘진 표정이 강조된 초상. 모딜리아니는 아프리카의 원시 조각들과 중세 회화, 이탈리아 조각 등에서 영향을 받아 이처럼 스타일리시한 초상화 스타일을 완성했다.  
403    독일 녀성 화가 파울라 최초로 누드 자화상 낳다... 댓글:  조회:3670  추천:0  2017-10-21
파울라       [티브이데일리] 당차고 아름다운 여성 화가의 인생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화가 파울라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파울라'(감독 크리스찬 슈뵈초브) 메인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됐다.  '파울라'는 여성 화가로서 최초로 누드 자화상을 발표하며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 파울라-모더존 베커의 화려한 삶과 눈부셨던 사랑을 그린 영화다.  공개된 포스터에는 한 손에 붓을 든 채 위트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파울라의 모습이 담겼다. 이는 남성 화가 중심이었던 당시 미술계에 큰 화제를 일으켰던 파울라의 독립적이고 당당한 성격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며, 시대가 감당하지 못했던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기에 파울라의 대표 작품이기도 한 '6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 속 배경 이미지를 메인 포스터로 활용해 소장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함께 공개된 메인 예고편에는 예술가가 될 재능이 없단 아버지의 말에 반기를 드는 파울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여성 화가에게 주어진 편견과 한계에 맞서 오롯이 자신의 색깔을 담아낸 작품을 완성하려는 파울라의 치열한 모습은 현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된다. 또 파울라에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 새로운 도전을 위해 파리로 떠나는 모습까지 아름답고 감각적인 영상미로 구현돼 기대를 모은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 파울라 모더존-베커, ‘호박 목걸이를 한 자화상’, 1906년, 캔버스에 유채, 61×50.2㎝, 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서양 미술사에는 수많은 여성 누드화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남자 화가가 남자 관객을 위해 그린 것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여자가 정식 교육을 받는 것도 어려웠고, 설사 드물게 화가가 되었더라도 나체를 그리는 건 불경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1876~1907)의 자화상은 여자 화가가 자신의 누드를 그림으로 남긴 최초의 예다. 나체에 목걸이만 걸고 있는 화가는 푸른 하늘 아래 짙푸른 수풀을 등지고 서서 꽃을 머리에 꽂고 양손에도 한 송이씩 들었다. 동그란 핑크색 꽃송이가 그녀의 가슴과 닮았다. 모더존-베커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 그 순간의 자유로움을 즐기는 듯 만족스럽고 여유 있는 표정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것처럼 투박한 그녀의 얼굴, 푸른색과 붉은색, 초록색을 대담하게 칠해 명암을 표현한 건장한 육체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여인의 누드, 즉 보는 이의 욕망을 자극하는 관능적인 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모더존-베커는 20세기 초,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동시대 화가들인 마티스,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선구자였으나 불행히도 31세에 요절한 다음 오랫동안 잊힌 화가였다. 모더존-베커는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 결혼을 했으되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는 화업에만 충실하고자 했고, 서른이 된 다음에 계획대로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출산 후 다리에 통증을 호소하던 그녀는 침대에 누워 지내다 19일 만에 갓난아기를 한 번 품에 안아 보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전해진다. "가엾기도 하지." 정말 가엾지 아니한가. ///우정아 ============================================   ▲ 독일의 여성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여섯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1906). 서양미술사 최초로 여성 미술가 누드 자화상을 그린 파울라는 사후 30년이 되던 해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독일적인 예술의 순수성을 더럽힌다”는 명목으로 ‘퇴폐미술가’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20세기 독일 전위 예술가들을 감시하고 문화 예술 활동을 금지시켰다. 1937년엔 국공립미술관에서 그들의 작품을 철거한 뒤 독일 전역을 돌며 전시했다. 그 유명한 ‘퇴폐미술전’이다.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미술가들은 어떤 이들이었고, 나치는 어떤 이유로 그들의 작품을 혐오했을까. 신간 ‘독일 미술가와 걷다’는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힌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주목한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책은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진 것에 맞춰 급조한 책이 아니다. 미술사가인 저자는 “좋은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다 보니 대부분이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왜 그런지는 책을 읽으며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레 이해가 간다. 하나의 이름표를 붙였지만 다양했던 그들의 삶과 예술을 역사의 굴레 속에서 조망하기 위해 작가들을 사망연도 순으로 소개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다. 여성이 미술가로 교육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파울라는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린 다음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며 치열하게 작업했다. 서른한 살에 요절한 파울라는 불과 15년 동안 18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여성 화가의 누드 자화상이다. 브레멘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 미술관’에 소장된 자화상에는 예술 세계에서나 일상에서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쳤던 예술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파울라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째 되던 해에 나치는 비정상적인 여성상을 제시해 독일 민족의 건강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파울라를 퇴폐미술가로 판정하고 자화상 한 점을 보란 듯이 퇴폐미술전에 내걸었다. ▲ 표현주의 거장 에른스트 키르히너는 ‘군인으로서의 자화상’(1915)에 오른 손목이 잘려나가 그림을 영영 그리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담았다.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리고 본성에 충실한 표현주의자들은 나치의 관점에서 국가의 바른 윤리를 해치고 통제 불가능한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표현주의 미술가 에른스트 키르히너(1880~1938)는 20대에 드레스덴공대 건축학과를 함께 다니던 친구들과 미술가 공동체 ‘다리파’를 결성해 활동했다. 안락을 추구하는 낡은 힘에 대항하며 다른 세상으로 건너는 다리가 되겠다는 취지로 만든 다리파 작가들은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한다. 나치는 표현주의 미술가들을 특히 적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들이 자기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아는 개인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나치의 관점에서 키르히너처럼 표현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개인은 전체주의 체제 유지에 위험한 인물이었다. 1936년 작품 전시 및 거래를 금지당한 키르히너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합병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3개월 뒤인 1938년 6월 권총을 자기 가슴에 쏘아 58년의 삶을 마감했다. 이 밖에 노동자와 여성의 밑바닥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 전쟁의 참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적나라하게 옮긴 오토 딕스(1891~1969),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 등의 굴곡진 삶이 차례로 이어진다. 저자는 서문에서 밝힌다. “나치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부당한 살생부는 언젠가 삶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이 책이 그 증거다.” ///함혜리 선임기자 [출처: 서울신문]  ==========================   출생 1876년 사망 1907년 이름 국적 파울라 모더존 베커, 독일, 표현주의 여성 화가   1906, 101.8×70cm, 독일 브레멘 파울라 모더존 베커 미술관 ==================================     출생 1876. 2. 8, 독일 드레스덴 사망 1907. 11. 30, 보르프스베데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폴 고갱, 폴 세잔 등에 의한 19세기 후반 인상파 양식을 독일에 도입했다. 그는 프리츠 마켄젠에게서 그림을 배울 때, 브레멘 근처의 예술인촌인 보르프스베데에서 형성된 예술의 모임에 가입했다(→ 보르프스베데파). 1900~06년 4번에 걸쳐 파리로 가서 공부하는 동안, 고갱파와 나비파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초기 작품은 꼼꼼하고 자연주의적이나 〈동백꽃을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Camellia〉(1907) 같은 원숙한 작품은 단순화된 색채로 칠한 고갱과 세잔 특유의 넓은 색면에 서정적 자연주의를 결합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정확한 묘사보다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 표현주의로 여겨지곤 한다. ======================   파올라 모더존 베커는 철도 공무원인 아버지와 감수성 풍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치, 문화적으로는 혼란스러우리만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시대에 태어난 그녀가 예술가로서 훈련을 받지않고 자기 실현을 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1901년 화가 오토 모더존과 결혼하고 난 이후에는 자시만의 아틀리에를 얻어 최소한의 가사일을 제외하곤 항상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몇달이고 혼자서 파리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1908년 5월25일 봄기운이 따스한날 아침 거욱속의 자신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몸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속의 그녀는 임산부처럼 배가 부른상태. 그녀의 눈은 뭔가 탐색하듯, 뭔가 묻는듯 그러나 자신감과 승리감을 담고 관찰자를 바라본다. 이 그림을 끝낸 후 그녀는 거기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30세가 되는해 여섯번째 결혼 기념일 이 그림을 그리다.  여자가 자신의 몸을 모델로 그것도 누드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당시 그녀는 임산부가 아니였다. 임산부도 아니면서 자신을 임산부로 그렸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아마 이 담대한 여성은 임신부라는 모티프를 통해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자기 표현을 하려했던것이 아닐까? 현재라는 시간축 위에서 벌어지는 짧은 차티를 쫓기듯이 살다 간 파울라 끊임없이 더 이상의 무엇이 되고자 했던 이 여인은 마지막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31살 이른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말 "유감스럽군". -진중권 천천히 그림읽기 中 -               같은 그림인데..이렇게 다른 색상으로 인터넷을 떠돕니다. 우습죠? 이래서..그림을 직접 봐야한다는...               출처 : 비공개 입니다 ================================ 서른 살, 스스로에게서 어떤 변곡점을 찾으려 했던 화가가 있다. 독일 태생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다. 1906년 2월 8일 서른 살 생일에 파울라는 5년간 함께 살았던 오토 모더존과의 이혼을 선언했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지나치게 소모적이었다거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불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편은 파울라의 말을 경청해주고 마음으로 지지해주는 후원자였다.  결혼한 후에도 파울라는 자기만의 작업실을 유지했고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결코 등한시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하녀에게 집안일을 지시한 다음, 아침 식사 후에 바로 작업실로 갔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이런 안락한 생활은 오히려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갑작스레 파울라는 어떤 결단을 필요로 했나 보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산문집 ‘삼십 세’의 주인공처럼. 바흐만도 자신이 삶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다고 느낀 스물아홉의 생일부터 서른 살의 생일까지 꼬박 일 년 간 ‘삼십 세’를 집필했다. 이 책은 시간의 문턱, 서른에 접어든 주인공의 이야기다. 아직 젊은데 젊다고 내세우진 못하겠고, 예전처럼 살기엔 불안한데 그렇다고 무얼 시작하기엔 확신이 서질 않는다. 결국 지지부진한 사십대를 맞게 될까봐 지레짐작으로 움츠러들던 주인공은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서른 살의 파울라도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습관이 되어버린 것들과 결별을 고한 파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리로 향했다. “이제 나는 오토 모더존을 떠났고, 옛 삶과 새로운 삶 사이에 서 있다. 앞으로 삶이 어떻게 펼쳐질까, 나는 어떻게 될까?”  파리에서 그녀는 타히티 여인을 그린 고갱의 작품을 보았고, 과감한 색채와 장식적인 구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티스의 작품도 보았다. 많이 보고, 많이 느꼈고, 그 느낌을 화폭에 옮겨 담았다.  그 중 하나가 ‘자화상’이다. 호박목걸이를 두른 상반신 누드인데 원시적인 싱그러움과 더불어 자기애가 넘쳐난다. 자화상을 누드로 그린다는 것은 여자 화가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때였다.  서른 살의 쉴 새 없는 파도는 지나갔다. 오토 모더존은 아내가 있는 파리로 왔고, 둘은 다시 만났다. 드디어 파울라는 그토록 원하던 임신을 했고 예쁜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멈출 줄 모르던 그녀는 출산한지 18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 아쉬워라.” 일도 찾고 사랑도 찾았지만, 생을 잃게 된 자의 마지막 외마디였다.  ///성신여대 미술교육 ========================  1889년 이후 독일 북부 브레멘 근처의 보르프스베데 마을에 시골풍경을 그리기 위해 모인 작가들의 모임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그 근처의 관목·초원·숲·강·다리·풍차·농부들을 19세기초 프랑스 바르비종파를 연상시키는 낭만적·감상적 양식으로 묘사했다. 프리츠 매켄슨과 오토 모더슨이 초기 구성원이었으며, 1890년대에는 나중에 모더존과 결혼한 파울라 베커, 한스 암 엔데, 프리츠 오베르베크, 하인리히 호겔러가 참여했다. 재능있는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 역시 보르프스베데에서 작업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독일의 시인 릴케를 만났고 1901년에 그와 결혼했다. 2년 뒤 릴케는 작가들과 풍경화에 대해 논하는 〈보르프스베데〉라는 책을 발간했다. 보르프스베데 화가들은 1895년 뮌헨의 글라스팔라스트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매켄슨이 〈광야에서의 설교 Sermon in the Moors〉라는 작품으로 금메달을 받으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890년대 후반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그들의 성공은 지속되지 못했다. 지방화가인 그들은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격리되어 있었고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제외하고는 후기 인상주의 회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여행에서 본 고흐·고갱·세잔의 작품에 영향받은 모더존 베커는 평면성과 단순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하게 했다. ============================= ... 그녀는 독일 드레스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6세때 영국에 사는 친척집에 머물며 첫 드로잉수업을 받게 되었고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술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898 년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Worpswede)에 있는 예술가 공동체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미술가들을 만나게되었으며 깊은 우정을 나눈 시인 릴케와 그의 부인이 된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난 곳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은 보르프스베데를 배경으로 한 소박한 풍경화가 많다.   1900년 파리행을 결심하고 그곳에서 세잔과 고갱, 반고흐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고 세잔의 화면구성과 단순화된 형태에 이끌렸고 나비파의 장식적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그녀는 타히티 여인을 그린 고갱의 작품과, 과감한 색채와 장식적인 구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마티스의 작품도 접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흡수하여 화폭에 표현하였다.         Autoportrait(Selbstporträt),1906   (62,2 × 48,2 cm)   그 중 하나가 호박목걸이를 두른 상반신누드인데 원시적인 싱그러움과 더불어 자기애가 넘쳐난다. 자화상을 누드로 그린다는 것은 여자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표현 되었다. 그녀의 작품에 보이는 투박하면서도 강한 원시적 감성은 고갱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01 년 보르프스베데로 돌아온 파울라는 오토모더존(Otto Modersohn)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회의와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1902년 다시 파리로 향한다. 1900년~1906년동안  모두 네 차례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 파리는 그녀를 새롭고 더욱 대담한 그림을 그리도록 강한 영향을 주었을뿐 아니라 예술적 영감을 끊임없이 부어주는 돌파구 였다.   그 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편 오토모더존(Otto Modersohn)은 그녀의 모든 활동을 지지해 주는 부드럽고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이런 안락한 생활은 오히려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의 안정보다 자유로운 독립된 생활과 자유로운 창작의삶을 갈망하는 파울라에게는 힘겨운 부담이었다. 아내로 살기보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은 친구 릴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느낄수 있다.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그렇다고 파울라베커도 아니거든요. 나는 나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겁니다.”   그녀는 작업활동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가정을 떠나 홀로 파리로 와서 작업에 몰두 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그녀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보, 나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하니 방해하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지난주에 나는 취한 것처럼 살았어요. 정말 좋은 작품을 완성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엄 마. 언제나 바빠요. 아주 가끔씩 쉬고 다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곤 해요. 때때로 내가 사랑이 부족하게 보일 때면 이 점을 고려해주세요. 내 힘을 단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것을 이기주의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가장 고귀한 것이에요.”   그 시대에 쉽지 않은 여성성과 여성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강인한 열정의 여성작가로 시대를 앞서는 생각의 소유자로 느껴진다.   1907 년 그녀는 마지막 파리여행을 마치고 북독일의 보르프스베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그해 11월 출산하고 3주후 색전증이라는 산후병으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였다. 너무나 안타까운 짧은 삶이라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주어 졌다면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더 큰 획을 그어 주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깊게 드는 부분이다.         Autoportrait au sixièmeanniversaire de mariage,1906   détrempesur carton, 101,8 x 70,2 cm     1906 년 그녀의 '여섯번 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을 그릴 때 그녀는 임산부인 자신의 자화상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녀는  임산부가 아니었다. 임산부의 모습으로 관객을 자신감으로 바라보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다. 여성의 경험이 주체가 되어 표현하는 것과 그것이 대상화 되어 표현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의 표현일 것이다. 여성 스스로 창작의 주체가 되어 표현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의 몸을 자랑스러운 과시의 표현으로 강하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남성 화가가 여성의 몸을 표현한 것과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또 한 그녀는 여성화가답게 주로 모성애를 주제로 엄마와 아기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표현하였으며 여성작가로서의 섬세함이나 부드러움 보다는 가라앉고 무거운 색조에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현들을 하였는데 '위대한 단순함'으로 불리는 파울라식 표현이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녀는 미술의 전통과 관습을 따르지 않고 그녀의 독특한 표현법들을 연구했다. 스케치 없이 캔버스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뭉툭한 붓으로 투박하게 표현하는독특하면서도 파격적인 그녀의 작업들은 화단을 지배하는 남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녀는 독창적으로 내면의 감정들을 밀도 있게 표현하였다. 표현주의 시작점으로도 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지닌 작가, 그녀는 미술역사의 중요한 여성화가였다.   그림을 깊이 감상할수록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작가 Paula Modersohn-Becker 그녀의 짧은 인생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402    시작에서도 이미지의 무게가 손에 잡히는 느낌을 주어야... 댓글:  조회:2617  추천:0  2017-10-20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3) :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   초자연적(超自然的) 즐거움을 자신감(自信感) 넘치게...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1842년에 제작해서 44년의 살롱에 첫 출품, 입선한 쿠르베의 23세 때 작품이다. 고향인 쥐라 산중의 봉누보 골짜기에 있는 프레질 퐁테뉴 동굴 앞에서 스패니얼 종의 개를 데리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쿠르베의 자화상이다. 그 주제에 있어서나 묘법에 있어 쿠르베의 제반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그의 예술이 이미 청년 시대에 든든히 형성되어 있음을 엿보여 준다. 화면은 인물의 얼굴을 향한 삼각형의 구도 속에 인물과 개가 자리잡고 배경은 암벽과 하늘로 처리하였다. 검은 인물의 옷과 개의 모습이 밝은 색조의 암벽과 원경(遠景)에 대조를 이루면서 한층 안정감을 주고 있다.         줄리엣 쿠르베의 초상   1844년에 제작, 이듬해인 45년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된 작품이다. 모델인 줄리엣은 쿠르베의 세 누이동생 중 막내로, 그녀는 오빠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는데 쿠르베의 사후에는 그의 불명예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소각할 정도로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1844 년이라면 쿠르베는 음영이 짙은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시기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달걀형의 얼굴과 꼭 다문 입, 그리고 맑은 눈이 총명 한 여인의 이미지를 한결 부각시키는데, 사각형의 칼라와 둥근 등의자의 선, 여기에 어울리는 배경의 커튼과 카네이션의 선이 한결 장식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해먹   1845년 살롱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원제는 이었다. 달아맨 해먹에 누워 잠자고 있는 부르주아 소녀를 그린 것으로, 소녀의 포즈는 S자 형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극히 일상적인 모티브이면서 소녀의 모습에선 어딘가 모르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슷한 고전적인 취미를 보여준다. 숲과 인물이 자아 내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현실의 실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서 보이는 젊은 날의 쿠르베의 정감이 여기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그레고와르 아주머니   1848년에서 54년에 걸쳐, 쿠르베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리얼리스트들이 파리 오토피유가(街) 비어홀 앙드레르에 매일 저녁 모여들어 토론을 벌였다. 그레고와르 아주머니는 이 비어홀 카운터에 언제나 앉아 있던 집주인으로 이들 리얼리스트들과는 굉장히 친숙해 있었다. 화가의 눈도 그런 친숙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쿠르베는 다른 일련의 초상화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대상에 육박해 들어가는 밀도 있는 객관성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다. 육중한 그녀의 몸매와 두 팔을 약간 벌려 제스처를 쓰고 있는 표정은 딱딱한 대리석 카운터와 그 위에 놓인 검은 장부책과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보들레르 초상   쿠르베가 시인 보들레르를 만난 것은 1846년경이니까 이 작품은 그로부터 2년 후에 제작된 것으로, 사상적으로나 생활에 있어 두 사람이 가장 밀착되어 있을 때의 것이기도 하다. '2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전위적 예술의 모험을 거듭하던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의 젊은 날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 무렵 보들레르는 일정한 숙소가 없이 떠돌아 다녔는데, 쿠르베의 화실도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런 어느 날의 모습을 붙잡은 것일 것이다. 인물이나 기물이 침착한 톤으로 처리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양감(量感)에 넘친 표현을 보여주는 등 쿠르베의 당당한 리얼리즘의 방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베를리오즈의 초상   쿠르베는 자화상 이외 주변의 사람들을 모델로 한 여러 장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보들레르나 프루동과 같은 시인이나 철학자의 모습도 보인다. 쿠르베의 교우의 범위를 알 수 있게 한다. 도 그 하나이다. 대개의 초상화들이 자화상만큼 진지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예컨대 벤츄리의 지적도 그 중 하나이다. '쿠르베의 자화상은, 특히 나르시시즘 때문에 때때로 걸작이 된다. 여기에 비해 타인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에 대한 열의가 상당히 빈약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예외적일 정도로 치밀한 주의력을 구사하고 있다. 자화상보다 더욱 전통적인 수법에 의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마을 처녀들       멱 감는 여인들   1853년 살롱에 출품된, 쿠르베의 최초의 누드화로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루벤스를 연상시키는 풍만한 육체의 여인은,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서 정신 적인 이상을 표현한다는 이상주의적 누드와는 거리가 먼 강인한 육체의 힘을 엿보여 준다. 등을 보이고 있는 누드의 여인이 막 물에서 올라오고 있으며, 하녀인 듯한 오른쪽 숲에 앉아 있는 여인이 무언가 말을 받으면서 차비를 서두르는 모습이다. 누드의 여인이든 오른손과, 아래 쪽 여인의 손의 표정이 돋보이는데, 현실적인 누드의 여인에 비해, 아래 쪽 여인의 포즈는 다분히 신화화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         보리를 까부르는 여인들   한 여인은 열심히 보리를 까불고 있고, 또 한 여인은 일일이 손으로 낱알을 가려내고 있다. 오른편에는 한 소년이 뒤주인 듯한 나무통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범한 농가의 실내 정경을 붙잡은 것이다. 곡식을 가득 넣은 큰 자루들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고 방 구석 구석에 그릇들이 널려 있다. 쿠르베는 현실을 즉사(卽寫)하면서도 가끔 고전이나 민중 판화 같은 데서 발상을 얻거나 구도를 원용해 오고 있는데, 이 작품의 발상이나 구도 역시 다분히 벨라스케즈의 을 연상케 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그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유락(遊樂)의 여성들을 대비시켜 사회적인 의미를 강조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남 (안녕하시오, 쿠르베 씨!)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의 하나. 화구 (畵具)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막 역마차에서 내린 여행자 차림의 쿠르베 앞에 몽펠리에 시의 미술 애호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마중나와 인사하는 장면이다. 맑은 남프랑스의 들녘에 선화가와 그를 마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서는 걸맞지 않게 보이는 장면을 소재로서 다루었다는 데서 쿠르베의 현실에 대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출되고 있는 것이다. 빛으로 충만한 남 프랑스의 풍광은, 쿠르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밝은 심경의 반영처럼 시사된다.         세느 강변의 처녀들   1857년 살롱에 출품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작품.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하다는 도덕적 입장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곧 인상파인 마네의 로 이어지는 전조이자 인상파가 즐겨 다루는 행락(行樂)의 정경의 효시이기도 하다. 쿠르베는 이 작품의 구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던 듯한데, 6년 전 1850년경에서 모자를 쓴 처녀들 모습을 다룬 일련의 습작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강가에 매여져 있는 보트로 미루어 근처에 상대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두 처녀의 모습은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잠자는 금발의 여인   들과 에 이어지는 풍만한 육체의 여인은 쿠르베의 누드화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루벤스나 앵그르를 연상시키는 건강 한 여인의 모습도, 그러나 루벤스나 앵그르에 비해 훨씬 현실적 인물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약간 비스듬히 기대 누운 여인은 몸의 일부를 가리고 있을 뿐 풍만한 육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여체는 어두운 배경에 의해 피부는 더욱 황금빛의 윤기를 띠고 있다. 이 작품은 1857년 작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일부 연구가들은 49년, 또는 68년으로 상정하고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 나타나는 특성들과 연결시켜 볼 때 57년이 가장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꽃병         드 브레이엘 부인의 초상   망명한 폴란드 여자라고도 알려져 있는 이 초상은 동시에 쿠르베의 모나리자라고 할만큼 그윽한 기품과 어느 일면 신비스러운 요소도 지니고 있다. 태반의 쿠르베의 작품이 대상에로 접근해 가는 지나친 밀도 때문에 때때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시정(詩情)을 놓친다고 말해지는데, 이 작품은 그런 일반적인 평가에서 벗어 난, 쿠르베의 또 다른 일면을 보기에 충분한 작품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에서 볼 수 있는 대상과 화가와의 밀접한 동화 의식에서 생겨나는 시적 분위기 가득히 이 작품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여인의 고요하면서도 어딘가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배경의 풍경에 의해 더욱 은은함을 더해 주고 있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자화상)   쿠르베 초기의 자화상 중하나. 아버지의 희망으로 법률 공부를 위해 파리로 온 쿠르베는 곧 그 공부를 팽개치고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파리에 나온지 6 년, 여러 차례 살롱에 입선한 경력을 통해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신을 쌓았던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야심에 찬 한 시골 출신의, 약간 텁텁하면서도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작에 이처럼 사인을 기입하고 있는 것도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의 상의, 녹회색의 배경에 떠받쳐진 흰 셔츠와 붉은 얼굴은 은은하게 인물을 드러내는 전통적 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오르낭의 큰 떡갈나무   1864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는 '베르상제트리크스의 떡갈나무로 불리는 프라제의 떡갈나무. 프랑시 콩테 지방, 아레지아 가까운 케사르의 진(陣)'이라는 다소 긴 제명이 붙여졌다. 베르상제트리크스는 아레지아 등지에서 로마 제국 군사와 싸운 용장인데, 우람한 떡갈나무의 모습을 이 장군에다 비유시킨 것이다. 대지 위에 우뚝 선 떡갈나무가 화면 전체를 덮고 있는데, 그나마 윗부분은 잘려나가 더욱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떡갈나무의 질감과 그 물체의 양감을 살리기 위한 치밀한 사실적 묘사와 두꺼운 마티에르의 효과가 주는 물질감의 두드러지게 묘출되고 있다.         생각   젊고 건강한 여성이 부드러운 어둠의 배경을 통해 더욱 은은한 아름다움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이 순수한 표정, 어떤 가식도 없이 가장 천진하게 자신으로 되돌아가 있는 순간은 쿠르베가 좋아했던 소재로 어떻게 보면 이 점은 쿠르베의 사실주의의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검은 배경과 흑발, 그리고 약간 드러나 있는 검은 상의에 의해 여성의 밝은 육체는 더욱 우아하게 보인다. 모델이 된 여성은 의 모델과 동일인으로 보이는데, 쿠르베는 자신의 모델들을 파리에서 오르낭으로 불러들여 그렸다고 한다. 시골 처녀들을 누드 모델로 하기에는 곤란했을 것이다.           나무 그늘의 시냇물   쿠르베는 고향 마을인 오르낭의 풍경을 많이 그렸는 데, 이 작품도 오르낭의 근교에 있는 그가 즐겨 그린 시냇물이다.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울창한 숲과 암벽이 산간의 정적과 깊이를 실감시켜 주는데,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은은하다. 그의 시각이나 기법이 전통적인 방법에 깊이 연대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 점은 다음에 오는 인상파의 밝고 화사한 풍경들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그러나 깊고 은은한 맛이 오히려 산 속에 신비로움을 살려 주는 효과가 되고 있다. 짙은 녹음을 통해 멀리 약간 드러난 하늘의 빛이 한결 맑은 자연의 상쾌한 인상을 전해주고 있다.       보트놀이   1815년 쿠르베는 노르망디 해안 투르빌에서 한때를 보냈는데, 이 작품은 그때 알게 된 이 지방 부호의 부인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해 11월 17일자 편지에 '나는 투르빌에서 포토스가프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해상을 저어가는 부인의 새로운 타블로를 시작했다.' 는 구절이 있다. 해수욕을 비롯한 해안에서의 놀이는 1825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유행을 보았다고 하는데, 인상파 시대의 많은 해안과 해안에서의 놀이를 소재로 한 작품도 이런 시대적 취향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쿠르베에게는 다소 어색한 소재이며 인물의 처리도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런 데가 있다. 단순한 소재에의 신기로움만이 있다고 할까.         푸르동의 초상, 1853년   1865년 1월에 프루동이 사망하자, 쿠르베는 1853년 그와 처음 알게 된 때의 모습을 재현시켰다. 화면 중의 1853년이란 작품의 제작 연대가 아니고 이처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무렵의 연대이다. 쿠르베는 같은 고향 출신인 사상가 프루동과는 상당한 친교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傾倒)된 적도 있다. 아마도 이 초상은 화가 자신에게 여러 모로 정신적 영향을 준 한 사상가에 대한 교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65년 살롱에 출품되어 졸렬하고 못생겼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쿠르베의 치열한 사실 정신은 의외로 인물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다.         사슴의 은신처   1866년 살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던 작품. 65년 겨울 쿠르베는 몇 마리의 사슴을 빌어다가 숲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주고 몰래 숨어들어가서는 사슴이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숲속에 캔버스를 감추어 두었다가 다음날 또 와서 그림을 계속했다고 한다. 다소 인용적인 제작 방법에도 불구하고 숲속에 사는 동물의 생태가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으며, 흐르는 물의 투명함과 유동감, 숲속의 습기 같은 분위기가 실감있게 포착되고 있어 쿠르베의 사실적 방법의 극치를 보는 느낌이다. 무슨 소리에 곧 뛰어갈 것 같은, 사슴의 약간 치켜든 뒷다리가 사실 감을 더해 준다.         여인과 고양이           누드와 앵무새   1866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쿠르베 후기의 대표적인 누드화. 그의 기교는 과잉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데, 쿠르베가 그린 누드화가 태반이 추악하다는 비판을 받은 데 비해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다. 이나, 과 같은 작품에 비해 여체의 날씬하고도 경쾌한 곡선감은 누드화에서 보는 가장 아름다운 포즈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앵무새와 희롱하고 있는 장면 설정도 정감적인 표현에 가장 걸맞게 보인다. 기법에 있어서도 지체(肢體)의 균형과 살붙임의 정확성, 그리고 명암의 탁월한 효과 등 현실이면서 현실에 머물지 않는 이상이 묘출되고 있다.           밀렵꾼   1866년에서 다음해인 67년까지 쿠르베는 고향인 오르낭에서 보냈다. 이해 겨울엔 대단히 눈이 많이 와서, 그는 수렵을 소재로 한 설경(雪景)의 작품을 많이 제작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엽사가 잡은 짐승을 등에 메고 두 개를 데리고 눈밭을 가고 있는 장면이다. 두 인물과 동물의 윤곽이 흰 눈밭 위에 드러남으로써 더욱 뚜렷할 뿐 아니라 물체감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특이한 점은 눈의 표현이다. 눈의 그림자를 청색으로 처리함으로써 빛의 색가(色價)에 대한 감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그것은 분명히 인상파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각적 감성이기도 하다.       샘   , 에 나타나는 일련의 누드화와 연결되는 건강한 여체를 보여주고 있다. 쿠르베가 다루고 있는 누드는 때때로 미술 학교에 서의 모델 습작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드 주변의 샘이나 녹야도 전통적인 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누드화와 별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음에도 쿠르베의 누드화가 영웅시되는 것은, 클라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화가의 눈이 여체를 강하게 포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포즈의 누드화는 레인란텔과 같은 초기 나체 사진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파도와 여인         3인의 목욕하는 여인들           폭풍이 지나간 후의 에트르타 절벽   1870년 살롱에 출품된 영불(英佛) 해협에 자리한 에트 르타를 소재로 한 작품. 쿠르베는 1869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작품은 이때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도 또한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아온 곳이기도 한데, 모네도 같은 모티브의 절벽 풍경을 여러 장 그리고 있다. 그러나 모네가 풍경을 완전히 빛에 용해된 것 같은 일루젼(illusion)화 한데 비해, 쿠르베는 대상 하나하나에 명확한 물체감을 구사하고 있다. 인상파와 사상주의의 상위(相違)를 실감있게 보여 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물빛, 그리고 맑은 하늘 등 투명한 빛과 대기감은 대상을 파고드는 화가의 치밀한 눈을 측정하게 한다.           파도   1860년부터 70년경까지 쿠르베는 옹플뢰르, 르아브르 등 영불 해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몇 장의 파도 그림도 이 때 그려진 것이다. 당시 이 해안에는 많은 화가들이 몰려들어 해안 풍경을 그렸는데 이들을 가리켜 '상시메온파'라고 불렀다. 쿠르베는 그 속에서도 가장 활동적이었으나, 단순한 절벽이나 바다의 풍경을 다루는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면에서 바다의 존재에 육박해 들어가려고 했으며, 어떤 감상적인 표현이나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칠해 올리는 기법을 통해 한 순간의 자연의 모습을 물질로써 영원화하려고 하였다.         생트 펠라지에서의 자화상   쿠르베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며, 특히 젊은 날의 자화상은 자신을 내세우는 자만심과 다분히 연극적 제스처까지 보여준 바 있다. 중년이 되면서 비만해지자,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은 중단하고 대신 사진사에 의뢰해서 여러 가지 포즈로 자신을 찍게 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실로 십 수년만에 다시 그려진 자화상으로, 특히 감옥 속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기념적인 의미까지 띠고 있다. 방돔 기념주 파괴의 책임을 지고 6개월간 감옥살이의 판결을 받은 그는 실제 3개월밖에 감옥에 있지 않고 병으로 가석방되었는데, 이 자화상은 이 때의 일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약간 초췌한 모습은 당시의 쿠르베의 심경과 상황을 잘 묘출해 놓고 있다.             오르낭의 식사 후 휴식   고향 마을 오르낭을 무대로 한 과 같이 극히 평범한 시골 생활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식사 후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과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사람. 식후의 휴식의 한 때가 아무런 꾸밈 이나 연출도 없이 극히 담담하게 포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분위기 속에 탁월한 광선 처리로 부각되고 있는 인물들은 렘브란트의 어둠 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연상하는 바가 있다. 당시 유행하던 전원화(田園畵)나 농민화에서 보는 의도적인 풍경의 삽입이나 인물 배치의 작위성에 비해 이 그림에선 전연 그런 요소를 찾아볼 수 없음이 특징이다. 바로 쿠르베의 시각이 방향이 확립되어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송어   화면 가득히 낚시에 물린 송어를 그려 넣고 배경은 거친 해안의 풍경이 들어와 있다. 송어의 표정은 막바지에 몰린 인간의 절망과 억울함을 나타낸 것이라고나 할까. 화면 아래 쪽으로 '71년, G. 쿠르베 옥중에서 이것을 그리다.' 라고 씌어 있어, 한 마리 낚시에 물린 물고기를 자신의 심경으로 비유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실의에 잠긴 쿠르베의 심경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옥중에서 그렸다고 하나 실은 다음해인 72년 오르낭에 돌아와 요양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를 통한 의미화에 못지 않게 물고기 자체의 가감없는 묘사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시각을 실감시켜 주고 있다.         사과와 석류   생트 펠라지 감옥에 수감된 쿠르베는 인간을 모델로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자, 누이동생과 친구들이 넣어 주는 과일이나 꽃을 소재로 그렸다. 그리고 이 정물의 소재는 출옥 후 요양 중에도 그대로 지속된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을 주로 다뤄 온 쿠르베에게는 다소 이질된 소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정물 속에 자연 전체에 대한 애정을 쏟는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와 석류, 그리고 물통 등 과일과 기물의 질감이 현실에 대한 화가의 치밀한 접근을 충분히 시사해 주고 있다. 약간 어두운 배경 속에 빛나는 윤기로 떠오르고 있는 과일의 무게가 손에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잠 깨움         나부         전원의 연인들   쿠르베의 젊은 날의 로맨티시즘을 보여 주는 작품. 젊은 연인과 손잡고 이중창이라도 부르는 것 같은 정겨운 포즈를 보여주고 있는데 다분히 로맨티시즘의 연애 주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화가 자신도 브뤼야스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에 '괴테나 조르쥬 상드와 같은 수법으로 이상과 절대적인 사랑 속에 빠져 있는 남자의 초상'이라고 쓴 것을 미루어 보아도 이 그림은 자신의 연애 감정과 그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남자는 쿠르베 자신이고 여자는 쥬스티느 아니면 빌지니 비네일 것인데, 아마 후자가 더욱 신빙성이 간다. 그녀는 수년 간 쿠르베의 연인이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까지 있다.           시용의 성   파리 코뮌 때 방돔 기념탑 파괴 사건에 연루되어 3개 월간의 옥살이를 하고 난 쿠르베는 출옥 후에도 막대한 배상금을 물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위스로 망명한 그는 몇 번이나 거처를 옮긴 후 최후로 레망 호반의 뚜르 듀 펠스에 정착하였다. 호반에 있는 시용의 성과 알프스 산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도 이 무렵에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 제자들에 의한 도움으로 제작해 냈기 때문에 상당수의 작품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쿠르베의 친구였던 브론돈 박사는 쿠르베 자신의 작품과 제자들것으로 의심이 되는 작품을 일일이 구분하였는데, 이 작품은 쿠르베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401    [쉼터] - 사진으로 보는 세상 요지경... 댓글:  조회:2237  추천:0  2017-10-19
            무순시 망화구 료녕석유화학공업대학교 교정 내 은행나무ㅡ   서장 라싸 부다라궁 50짜리 인민페에 그려져 있는 부다라궁(布達拉宮)과 진짜 부다라궁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한 편벽한 산골의 개와 메돼지의 싸움...           2017년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야안(雅安) 비펑샤(碧峰峽) 기지에서 태어난 17마리의 판다 새끼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사진 제공: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2017년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워룽(臥龍) 선수핑(神樹坪) 기지에서 태어난 19마리의 새끼 판다들이 공개됐다. (사진 제공: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 [인민망 한국어판 10월 19일] 10월 13일, 2017년 태어난 36마리의 새끼 판다의 모습이 중국 쓰촨(四川, 사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중국 자이언트판다 보호연구센터의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 해당 센터 산하의 여러 기지들에서 총 42마리의 새끼 판다가 태어났으며 그중 쌍둥이 판다는 15쌍이라고 한다. 이는 판다 인공사육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이며 2017년 새끼 판다의 생존율은 98%에 달했다. (번역: 은진호) ====================================   아커싸이(阿克塞) 카자흐(哈薩克)족 자치현은 간쑤(甘肅, 감숙)성에서 유일한 카자흐족 자치현이자 중국 3개 카자흐족 자치현 가운데 하나. 카자흐족 경마에 참가하는 기수들은 대부분 12~13세의 남자아이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 감숙성 카자흐(哈薩克)족 열기구   ‘댜오양(叼羊)’은 카자흐(哈薩克)족 전통 스포츠 가운데 하나. 사진은 카자흐족 남자들이 말 위에서 양을 뺏는 모습           在四川省代表团(2017年)举行会议前,一个工作人员整理熊猫玩具。Thomas Peter/摄       在云南省代表团(2017年)会议上,一名党代表戴着传统头饰。Thomas Peter/摄       透过雕花玻璃看浙江省代表团(2017年)讨论。WU HONG/摄         유목민들 ‘말 타고 병 줍기’    관할구역 유목민들이 ‘말 타고 병 줍기’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9월 14일] 8월 31일 중국 서부 국경지역을 지키는 신장(新疆, 신강) 공안 변방총대(邊防總隊) 커저우지대(克州支隊) 하라쥔(哈拉峻) 변방파출소 대원들이 관할 구역에 위치한 경마장을 찾았다. 대원들은 키르기즈족(柯爾克孜族) 유목민들과 함께 ‘말 타고 양 뺏기(馬背刁羊)’ 경기를 펼쳤다. 그 밖에 ‘말 타고 병 줍기’, ‘말 타고 힘겨루기’ 등의 키르기즈족 전통 스포츠도 펼쳐졌다. 그들은 그렇게 말 위에서 전통 명절인 ‘구얼방제(古爾邦節)’를 기념했다. (번역: 은진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신장(新疆) 투루판(吐魯番) 지역은 포도 말리기에 한창(8월 28일 촬영)       다인다마(多人多馬) 공연 雪頓節 (설돈절) 행사 중 민족 전통 마술(馬術, 승마 기술) 공연, ㅡ서장 라싸(拉薩) 경마장에서...   나다무(那達慕) 축제에서   몽고족(蒙古族) 전통 의상을 입은 모델이 나다무(那達慕) 축제 개막식에서    몽고족(蒙古族) 버커(搏克, 몽고족 전통 씨름) 선수가 나다무(那達慕) 축제에서 공연하는 모습   8월 31일, 나다무(那達慕) 경마에 참가한 선수의 모습 [인민망 한국어판 9월 11일] 8월 31일 2017년 허린거얼(和林格爾) ‘멍초칭(蒙草情)’ 즐거운 나다무(那達慕) 축제가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허린거얼현에서 개최...   닝샤(寧夏) 회족(回族) 자치구 시지(西吉)현(륙반산) 바이야(白崖)향, 공중에서 바라본 계단식 밭의 모습(8월 16일 촬영)   려지의 3대 품종으로 페이쯔샤오(妃子笑), 눠미츠(糯米糍), 구이웨이(桂味)가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6월 30일] 려지, 바나나, 파인애플, 룡안(龍眼)은 중국 남방의 ‘4대 과일’이라 불린다. 중국 남방이 원산지인 려지나무는 아열대 과수로 사시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며 다 자란 나무는 10m에 달한다. 과일 껍질에는 물고기 비늘처럼 뾰족하고 선분홍색과 자주색이 있다. 뽀얀 속살의 과육은 맛은 훌륭하지만 보관이 쉽지 않다. 려지는 양귀비가 즐겨 먹어 유명해졌는데 시인 두목(杜牧)은 ‘질주하는 말이 일으키는 붉은 먼지를 바라보며, 양귀비가 미소 짓네. 아무도 모르네, 려지가 오고 있음을(壹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이라는 시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각 시대 문인들 역시 리치와 관련한 시구를 남겼다. ‘하루에 려지를 300알 먹으니 영남에 오래 머물라 해도 사양하지 않겠네(日啖荔枝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 소식이 쓴 이 시는 려지의 맛을 가장 잘 묘사한 시라고 평가받는다. (번역: 박민지) 원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광둥(廣東, 광동)성 선전(深圳, 심천) 난산(南山), 려지의 품종 중 하나인 눠미츠(糯米糍)이다. 광둥(廣東, 광동)성의 려지나무 광둥(廣東, 광동)성 선전(深圳, 심천) 현지 과수원에서는 매년마다 려지 축제가 열린다.       이탈리아 로마에서ㅡ 
400    조형언어가 추상적으로 표현된 형태시의 력작 그림... 댓글:  조회:2458  추천:0  2017-10-19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2)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 (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여자들이 있는 무르나우의 거리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 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 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주관을 강하 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나무줄기가 있는 풍경     이 작품에서는 공간감의 표현과 형의 대조로써 원근법적 묘사를 기피하고 화면에 수직으로 내린 굵은 나무 가지와, 중앙 부분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색 면, 그것들이 교차하는 십자형(十字型)의 강조는 화면에 큰 구조를 느끼게 한다. 아직 대상은 남아 있으나, 단순한 색면으로 환원되고 색채는 매우 절제되어 단순하고 간결함을 본다. 빨강·노랑·파랑·초록 등 색채들이 어울리고 있는 점은, 독일에서 그렸지만, 유럽적인 아니면 러시아 적이라고 할까. 어딘지 짙은 노스탤지어가 스며 있어 모스크바의 황혼, 붉은 환상의 지붕들을 연상시켜 향수와 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차원 높은 조화는 독창적인 세계의 구축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아라비아 1 (아라비아의 묘지)     칸딘스키는 서구적인 것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러시아의 이콘(聖像)이나, 민예품의 장식적인 요소의 색채들을 잊지 못했으며, 과학적이 되게 하려고 하면서 일종의 동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인식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이 느껴진다. 이 상징성이 강한 장식성은 칸딘스키가 그 작풍을 변모시켜 가는 과정에서 표현을 바꾸면서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큰 특색 가운데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기조로 하여 약간의 곡선을 이입한 구도에 정리된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다소 굵은 윤곽선이 사용되고 있으나, 형태는 단순하고 억양이 있는 터치로 칠해진 화면에 강렬한 색의 대비에 의해 음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       푸른 산     대담하게 설정한 구도는 종래의 구도론을 떠나 우리에게 중량 감 마저 느끼게 한다. 좌우의 균형을 맞춘 큰 나무는 하늘을 덮듯 큰 면적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중앙에 피라밋 형의 푸른 산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 독특한 구도이다. 아래쪽에는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푸른 산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하여 질주하는 군마(軍馬)의 약동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이른바 색점묘법(色 點描法)의 기법은 화면을 장식적인 세계로 이끌어가는 한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러시아의 민속 예술의 연상과 실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아무튼 끝없는 실험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작가의 태도는 대담하고 특이한 구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로맨틱한 풍경     칸딘스키가 질주하는 기마(騎馬)를 작품의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말을 좋아해서 그렸다기보다는 화면에 속도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말이라는 대상물을 차용한 듯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인가. 화면에는 사선으로 비탈길 같은 것을 설정하여 한층 속도감을 고취시키면서 터치 또한 온통 사선으로 경사지게 표현하고 있다. 붉은 점으로 나타낸 태양과 주위의 점들은 엑조틱한 분위기를 짙게 감돌게 하며, 여러 방향에 걸쳐 실험적인 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흥을 되도록 강렬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그것은 '내적 필연성'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     표현은 재료의 매체에 따라 많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유채란 캔버스에서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 수채와 종이에서는 훌륭한 표현이 되는 예가 많기 때문에 작가들은 재료에 대한 관심이 높다. 화면에서 구체성을 띠는 대상물은 그 상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감상자에게 이미지 전달로써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칸딘스키는 화면에서 이러한 대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는데 유화에서는 좀처럼 대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감동, 즉 '내적 필연성'을 형상화하는 실험으로서 종이 위에 자유로운 붓의 놀림과 수채의 부드러운 침투는 표현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위대한 발견을 맛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이며 칸딘스키 자신도 예견하지 못 했던 현대 회화의 큰 수확을 얻은 것이다.       콤포지션 5   시리즈와 시리즈와 아울러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 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즉흥 '19'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 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바이올린의, 베이스의, 관악기의 깊은 울림, 나의 마음속에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눈앞에 있었다. 야성적이며, 거의 미친 것 같은 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그너가 '나의 시간'을 음악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예술이란 것은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제명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 중의 하나이다. 시리즈에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려 했다.           인상 5   1909년 3월에 야울렌스키의 노력으로 뮌헨에서 신(新) 예술가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칸딘스키가 의장이 되어 제 1회 전람회와 제 2회 전람회를 열었다. 이 때에 피카소, 브라크, 브라망크, 루오 등도 출품하여 국제 전위 미술 전람회의 성격을 보였으나, 제 3회 때 의견 대립이 생겨 신 예술가 동맹에서 탈퇴하여, 곧 새로운 그룹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를 결성한 해에 제작된 작품이다. '공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으나 구상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평면적으로 용해시켜 전개함과 동시에, 임의 곡선과 두 개의 힘이 교대로 작용하는 각(角)이 있는 선의 등장 등은 자기의 사색에 확신을 가지는 시기였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간결한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회화에 새로운 표현이 전개될 것을 비쳐 보이고 있다.       하얀 테두리가 있는 繪畵(회화)를 위한 밑그림   뮌헨의 신 예술가 동맹으로부터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 (靑騎士)에 이르는 시기, 즉 1909년부터 1914년까지에 칸딘스키는 한 작품마다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한 가장 충실한 시기에 해당하며, 추상적 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규칙적인 선과 형태와 색채가 서로 응집과 확산이 교감하는 상황을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전개는 내적 감동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토매틱한 표출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전체의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점이 커다란 특색의 하나이다. 이러한 특색은 제 2차 세계 대전 후 앙포르멜이라든가 액션 페인팅 등 추상 표현주의가 대두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선구자적 성격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검은 곡선이 있는...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무대상(無對象)의 추상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을 보여준 역작이다. 불규칙적인 작고 큰 선이 교차하면서 불가사의한 형을 안고 있으며, 색채들은 형체를 안고 울려 퍼져 나오고 있다. 화면 구성의 중심은 명제가 말해 주듯이 검은 곡선이다. 칸딘스키는 곡선에 관하여 '점, 선, 면'에서 '임의의 곡선에 주어진 자유 자재인 악센트 한계는 똑똑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 선에 대해 서도 일체가 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은 점의 경우와 다름이 없다. 절대적인 것도 상대적인 것에 의해서, 똑똑하지도 않고 또한 울림이 약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계까지 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이론상으로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제상으로 훨씬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즉흥 '30'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어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푸가   데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은 뭐라고 해도 색 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無對 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밝은 바탕 위의 형상   1914년 7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칸딘스키는 러시아 사람이므로 뮌헨을 떠나야 했다. 뮌헨은 그 의 예술적 자기 발견의 실현과 예술의 성숙과 그의 일생에 하나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도시였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실은 가혹한 충격이었다. 상심(傷 心)한 칸딘스키는 취리히를 거쳐 16년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가브리엘 뮌터와도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화풍도 점점 정적(靜的)으로 변화하고 색채는 더 어두워져 갔다. 이 시기의 칸딘스키는 제작이 적었으나, 이 작품은 몇 점 안 되는 비교적 큰 작 품이다. 불규칙적인 커다란 형상 속에 가두어 넣은 색과 형태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이 무렵의 작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듯 우수와 상심이 화면에 깃들고 있다.           빨간 달걀 모양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 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파란 활 모양   칸딘스키는 1921년에 모스크바에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예술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등용된 미술가는 말레비치, 타트린, 페브스너, 가보 등 대부분이 구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메카닉한 예술 이론에 비판적인 칸딘스키는 고립하게 되었으며, 소련 예술은 1920년에 페브스너·가보 형제가 '리얼리즘 선언'을 한 것을 고비로 하여 급속히 정치적 이데올로기 지배로 기울어졌다. 환멸을 느낀 칸딘스키는 21년 12월에 러시아를 떠나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브스너·가보 형제와의 교류는 칸딘스키 예술의 전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나 구성적인 요소가 칸딘스키 예술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계기를 거기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평면성을 해석하여 간결하고 명확한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검은 綱版(강판)   1922년 6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윌터 그로피우스는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초빙했다. '모든 예술적 창작의 종합'을 목표로 삼고 그로피우스가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예술가를 교수로 초빙한 것은 유명하지만, 칸딘스키도 '공간과 씨름하는 일, 즉 건축과 협력하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바우하우스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이 꿈이 꼭 실현되리라 믿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 생활에 큰 기대와 만족을 가지며 가장 결실이 많은 바우하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3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개최된 전람회 출품작으로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명확한 윤곽을 갖는 것이 늘고 사각형의 선이 교차한 그물 같은 것이 강조되어 기하학적인 요소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검은 정방형의 안에서   1917년 니나와 재혼한 칸딘스키는 바이마르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제서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얻어 창작 의욕은 고조되었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직선과 원을 기본적인 형태로 하고 조형 단위를 한층 더 승화시키고 공간을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직선과 곡선, 예각과 둔각, 원 등 거의 기하학적인 요소만이 밝은 배경 위에 떠돌아 다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점, 면, 선'의 한 구절에 각(角)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세 가지 각은 저마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훌륭하게 도면적으로 번역한다. 1. 예각(銳角)-내면의 상면의 날카로움과 극도의 능동성. 2. 직각(直角)-노련한 완성(예술적 구상화) 때의 냉정함과 감정의 억제. 3. 둔각(鈍角)-제작을 완성한 후의 불만 스런 감정과 무력감.'           원 속의 원   원에 의한 구성을 탐구하고 있던 칸딘스키가 여러 가지의 원을 들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개시켜 보고 있다. 원 그 자체가 기본적 모티브가 되어 화면 중심에 집중하고 교차, 중단 등으로 '4차원 공간' 즉 칸딘스키가 말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하여 원은 끝내 각양 각색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변해 가며 점과 선과 원의 조합, 크기를 달리하는 원의 병치, 색채를 달리하는 크고 작은 원의 중첩, 이 중 어느 것인가가 원이 아닌 무엇인가를 여기에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포의 세계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곡예사의 공 타기나, 가볍게 떠 있는 애드벌룬이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공 위성까지도 연상케 하면서 그 빛나고 선명한 화면은 우주 공간을 보는 것과도 같다.           노랑=빨강=파랑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써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데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단단하고 부드러움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앞 끝의 위에   높은 이상을 내세우고 발족한 바우하우스의 혁신적인 운동은 바이마르의 보수적인 기풍과 맞지 않아, 데사우 시의 호의로 바우하우스는 1925년 4월에 데사우로 옮겼다. 칸딘스키 부부는 데사우에서 파울 클레 가족들과 이웃에 살았으며,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가 기능 주의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에 예술 창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중시한 칸딘스키는 끝까지 그의 예술 주장을 밀고 나갔다. 학생들은 칸딘스키가 벽화, 클레가 스텐인드 글라스를 담당한 이외에 1주일에 한 번씩 연 자유화 학급에 참가하였다. 이 작품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애드벌룬을 지상에 강한 선으로 매고 있는 듯한 중력과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풀이된다.           여러 개의 원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는 하나의 긴장이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다리   두 건물을 연결하는 것 같은 다리와 그 위의 삼각형도 인체인 것처럼 연상케 하고 있으나, 연상 작용을 유발 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칸딘스키는 일체를 조형적 해석으로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추상 예술은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추상 회화는 자연의 껍데기는 버리지만 그 법칙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술은 우주적 법칙과 결부하고 또 그것을 따르고 있을 경우에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자연에 가까운 경우에 말입니다-자연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대상을 사용하는 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답니다. 절대로 관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연속   칸딘스키의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는데 '음의 강약은 선이 가지는 날카로움의 증감 내 지는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활(弓)에 가해지는 손의 가감은 연필에 가해지는 손 힘의 경우와 완전히 일치한다. 오늘날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음악의 도형적 표현-기보법(記譜法)-이 점, 선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조합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 있는 일이며, 또한 특기할 일이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 와 색이 만들어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 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伴奏가 딸린 중심   노란색을 주조로 하여 바탕에 칠한 다음 복잡한 형태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으나, 매우 정리되고 단순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칸딘스키의 회화의 구도가 평면성의 강조를 기본으로 하고, 형태의 도상학적(圖像學的)인 배치를 목표로 삼고 있는데 대해서는 러시아의 이콘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사실 칸딘스키는 '나의 예술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원천, 그것은 오직 러시아의 이콘이다.' 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또한 이 해에는 나치스 정부는 칸딘스키 작품 57점을 '퇴폐 예술'이라고 압수했다. 칸딘스키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뭉크도 같은 일을 겪었는데, 만년에 접어든 예술가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 사이   1932년에 데사우에서 베를린으로 부득이 옮긴 바우하우스는 더 한층 심해진 나치스 정권의 억압 때문에 33년 3월에 마침내 폐쇄당하고 말았다. 이 때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최후를 끝까지 본 후 파리 근교인 누이이 쉬르 센에 영주하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67세나 되었다. 칸딘스키가 오랫동안 고대했던 해외 여행의 실현으로 고대 동양 세계로부터 그리스, 로마, 그리고 근대 회화의 발상지 파리에 안착하기까지 이 귀중한 체험과 여러 가지 시도, 실험 등이 파리 시대로 옮김과 동시에 그의 예술은 '대종합 시대'를 맞고 현란하게 비치는 커다란 한 송이의 꽃을 차례로 피우게 되는 것이다. 불규칙적인 두 개의 형태를 대립적으로 대치시켜 긴장과 역학적 구조로 이끌면서 개개의 형태가 자립하여 제각기의 위치에서 응결하고 있다.           섬세한 고정   '예술가는 인생의 행운아가 아니다. 즉 그에겐 책무(責務)를 면하고 살 권리가 없다. 그는 종종 그 자신의 십자가가 되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와 감정과 사상, 이들 모두가 섬세하여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확고한 소재를 형성하고, 거기서부터 자기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유로운 것은 인생에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예술에 있어서라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한다.' 라고 자각한 그대로 칸딘스키는 실천에 옮겼다. 수직과 수평으로 평행해서 달리는 직선의 교차와 간단한 형상들을 되풀 이해서 그려 놓은 이 작품은 어딘가 건축 장식의 에스키스를 연상케 하나, 각각의 다른 음색이 서로 겹쳐지면서 몇 가지 모티브를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의 악곡을 스케치한 것처럼 보인다.           빨간 형태   '내가 자연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니까 나를 구하는 길은 '색을 파괴하는 일인 것이다' 라는 비평을 듣고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뮌헨의 비평(부분적이 긴 하지만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은 나의 색채의 화려함을 내가 비잔틴 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려고 했다. 러시아 비평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난폭한 표현으로 비방을 했다. 내가 뮌헨 미술의 영향으로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대부분의 비평가는 아주 뻔뻔스럽고, 심술궂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사실은 반대로 말하면 영리한 예술가는 악의가 있는 비평에 견디어 낼 만큼의 냉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칸딘스키가 걸은 길은 시대와 역사를 앞선 외로운 개척의 길이었다.           검은 원 속에             결합   1928년에 그로피우스가 사직하고 마이어가 교장이 되는 한편, 기능주의로 방향을 바꾼 바우하우스는 30년에 마이어로부터 미이스 판 델 로에로 다시 교장이 바뀌어 처음의 이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시렌머, 클레 등 주요 스텝이 잇달아 떠나고, 강대해진 나치스의 압박도 심해져서 고난의 길을 더듬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곤란한 가운데서도 칸딘스키의 화풍은 무르익어 갔다. 이 작품은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힘차고 간결한 구성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구성은 잘 계산되어져 훌륭히 짜여져 있지만, 칸딘스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시원한 공간이 설정되지 않아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큼직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유기적으로 교착하여 하나의 구조를 얻고 있는 색다른 부류의 작품이다.           하늘 색   매우 투명한 그림이다. 푸른색의 공간에 여러 가지 유기적인 형태가 난무하고 있다. 첫눈에 민족적인 요소가 대단히 진한 형태이며, 추상을 벗어나 생명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 민족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북쪽 지방을 여행하였을 때 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흥미를 가진 민예품이나 이콘, 장식무늬,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형태 연구를 통하여 칸딘스키의 내부에서 자라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인 기호로써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하나의 코스모폴리탄 이었지만 이국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동화적 세계에 탐닉되었을 것이다.           상호의 화음         정확한 대비   지나치게 정선되어 단조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복잡한 형태가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어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엄밀하게 놓여져 있다. 중앙에 강조된 율동적인 커다란 형태의 내부에 즉흥적으로 보이는 묘선과 아무 생각없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은 기호적인 형태에 대해서도 그 자신을 철저히 검토하고 논리 적으로 검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점, 선, 면' 등의 저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칸딘스키가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지만 그의 조형 언어를 확인하고 검증해 보이고 있다. 초기의 사실주의로부터 표현주의, 비구상 표현에서부터 기하학적 추상으로 표현형식을 변화시킨 칸딘스키가 만년에 기호적 배열까지 나타낸 화풍은 고향에서의 체험으로 회귀해 갔다고 하겠다.      
399    전생애에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린 "인물화가" 댓글:  조회:2197  추천:0  2017-10-19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0) : 모딜리아니 Amedo Modigliani (1884~1920)   고독한 혼의 소리와 관능미(官能美)         자화상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 (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유태인 여자   과 함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작품이지만, 전자와는 현저한 표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과도기를 말해 준다 하겠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단테와 니체, 그리고 다눈치오를 암송하고 15세기(콰트로첸토) 르테상스의 고전을 규범으로 했던 교양인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교양 즉 그의 문학성은,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 사이의 미련(未練)의 가교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작품이 풍겨 주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이러한 그의 미련을 바로 반영해 주고 있다. 세기말 의식인 고뇌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고뇌는 젊은 예술가의 특권이었으며, 그 궁극에 멜랑콜리의 존중이 움트고 있다.       젊은 여인의 얼굴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頭像   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젊은 하녀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첼리스트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카리아티드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예술도 빈사 상태에 있다. 자바타의 농민(멕시코의 혁명조)들은 기계를 본 적이 없지만 포앙카레(당시 프랑스 수상)보다 백배로 현대적이다. 나는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그림을 보여 주면 멕시코의 농민들은 반드시 이해해 줄 것이다. 고딕 교회나 아즈테카 신전은 누가 건설했는가. 만인이다. 백성들이다. 농민들이 건설한 거지 뭔가.'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시스 신화의 목신처럼 그려져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부부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모이스 키슬링의 肖像   1910년대의 파리는 '에콜 드 파리'의 전성기였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의 미술 표지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노스텔지어의 이들은 숙명으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했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 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 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겨 주게 한다.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모델인 르네는 키슬링의 처이며 모딜리아니의 미술을 순심으로 이해했던 모델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키슬링은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화가였으며 나중에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지만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자주 제작했었다. 필경 이 작품도 키슬링의 아틀리에에서 제작된 게 아닌지...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라 . 비 . 에 . 벨...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로톤드의 맞은 편 그랑 쇼미엘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초대날 그의 나부상들이 너무 관능적이어서 풍기 문란이란 죄목으로 경찰의 신세를 지게 되며 결국 다섯 점의 나부가 철거되는 스캔들이 일어난다. (모딜리아니와 화랑의 여주인은 일시 체포된다.) 검은 배경 에 모델의 곡선은 무겁게 흐르고 있으며, 다른 나부들과는 달리 삶의 애환을 짙게 풍겨 주고 있다.       젊은 농부의 초상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 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금새 없어질 것만 같은 아쉬움의 청순함 이라고나 할까.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짔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섬세한 선묘와 얼마간 즉흥적인 터치의 관례적인 화면과는 달리 이 작품은 비교적 두꺼운 마티에르를 가지고 있다. 흰 바탕의 수병복의 자주색 칼라가 화면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모델의 주인공은 집시이고 마약 중독으로 집을 뛰쳐나온 여자였다는 풍문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때로 자신의 선묘 때문에 화면이 그 표면성에서 튕기듯 가벼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의 일회성(一回性)으로서의 섬세한 선조(線條)가 마음처럼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 결과로 두꺼운 겹칠이 불가피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애를 안고 애처로울 정도로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가, 전기한 풍문처럼 집시였다면, 고향은 있지만 나라가 없는 세파르당의 후예로서 자신의 처지를 그녀의 모습에서 모딜리아니는 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裸婦   이 작품의 원명은 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의 독자적이고 유니크한 선맥의 흐름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며 대신 나부의 얼굴 표정으로 구성이 집중된다. 여체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이 여성은 알몸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 싶으며 서로 다른 구형(球形)의 모임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노랑 스웨터의 쟌느   1918년은 쟌느가 임신한 해이다. 1918년 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따라서 모델이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S자 형의 구도는 조형상의 유연성을 겨냥한 것일 테지만 앞으로 닥쳐올 어떤 불행을 풍겨 주는 듯만 싶다.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에게 시집 간 그녀는 붉은 기미의 밤색 머리와 대조적으로 흰 얼굴 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야자 열매'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도 전한다. 이해 11월말 니이스의 병원에서 쟌느는 딸을 출산하며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준다. 충실한 반려자였던 그녀는 앞으로 만 일년 2개월 후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자 6층 창밖으로 임신한 몸을 던져 사랑하는 이의 뒤를 쫓는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 달라' 던 남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파이프를 가진 니이스의 노인   이 작품 역시 니이스 체재 중에 그린 것이며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파리의 즈보로우스키에게 보낸 이 무렵의 모딜리아니의 편지를 보면 당시의 그는 흑인처럼 제작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만년의 그의 주옥 같은 걸작들이 제작된 것은 그의 말처럼 여기서의 일이며, 다음 면의 의 경우처럼 그는 남프랑스인들의 소박한 모습들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의 화면의 구성은 마치 용암처럼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붕기가 엷은 오렌지색을 배경으로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처리되어 있다. 살짝 얹어 놓은 듯한 뱃사람 모자로 미루어 보아 이 노인은 니이스의 바닷 사람인 것 같으며, 길쭉한 담뱃대가 얼마간 과장된 손의 구도를 조절해주고 있다. 선량하고 소박한 인물이 무언가 이야기해 올 것만 같다.         앉은 나부 NU ACCROUPI 1916년 캔버스 유채 92X60Cm 런던 대학 부속 미술연구소 소장         푸른 옷의 소녀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그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소녀의 푸른 옷은 필경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때때옷인지도 모른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조용하게 가라앉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작은 농부   모딜리아니의 결핵이 악화되자 즈보로우스키 부처는 무리를 해서 그를 남 프랑스의 니이스로 보낸다. 1918년의 일이었다. 지중해의 해맑은 요양지에서 오래만에 안정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제작에만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새는 당시의 모딜리아니의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우리들은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문득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농부의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에브테르느 부인의 초상 PORTRAIT DE MADAME HEBUTERNE 1919년 캔버스 유채 92X73Cm 뉴욕 개인 소장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의 초상   즈보로우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이며 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솔본느 대학으로 온 시인이었다. 최종적으론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 먹는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즈보로우스키 부처만은 진실로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걸다시피한 갸륵한 인품이었다. 1916년에서 1919년까지의 모딜리아니의 작품의 거의는 즈보로우스키의 원조 밑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 대해 웨르나의 매우 적절한 해설을 인용해 보자.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한 작품의 하나이다. 즈보로우스키가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진실된 우정의 표시이다. 늘어진 콧수염이며 정돈된 턱수염 그리고 유연하게 기운 어깨의 키 큰 우아한 사람...'         남 프랑스의 풍경   인간만을 그려왔던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이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그는 풍경화를 미술의 장르가 아니라고까지 경원했으며, 자연은 미술가가 참여하는 곳이 못 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핵을 치유해 주는 요양지인 남 프랑스의 해맑은 대기는 얼마간 오만했던 그의 인간본위를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렸다.) 한눈에 세잔의 기법을 연상시켜 주는 이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간소한 풍경화이다. 해안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한 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여느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임은 그의 인물처럼 그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부채를 가진 루니아 체호우스카   모델은 즈보로우스키 부처의 친구이며, 기품있는 몸매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 여인을 삼십 회 가량 그렸고 이 작품 외에 비교적 모델의 외형을 충실하게 뒤쫓은 초상이 또 있다. 그녀의 부친은 폴란드인 이었으며 혁명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가 그녀를 사려 깊고 조용한 신비의 여인으로 성장시켰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 이상으로 그를 사모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신성한 일이었다.]고 자신의 애정을 돌려서 고백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최만 년의 걸작을 대표하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데포르마숑은 거의 완벽한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모딜리아니의 신변에 있던 증인의 한 사람이다.          
398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도 "3D 벽화 마을"이 있었으면... 댓글:  조회:2153  추천:0  2017-10-16
                                                  푸젠(福建, 복건)성 핑난(屏南)현 링샤(嶺下)향 카이위안(開源)촌에 실물과 똑같은 3D 벽화가 등장하며 현지 마을의 새로운 이색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인민망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8) : 루벤스 Peter Paul Rubens(1577~1640)   숭고한 통속성(通俗性)의 샘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로마에서 활동중이던 루벤스가 모친의 사망으로 급거 귀국한 것이 1608년 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이 작품은 결혼 일년 후의 것이 된다. 루벤스는 신부에 관하여 친구에게 '그녀는 선량하고 정숙한 여성'이라는 편지까지 썼으며, 부부 사이는 원만하고 다정하였다. 이 그림은 아직도 신혼의 정겨운 두 사람의 사이를 나타내 보이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롭고, 만족스럽고, 기쁜 두 사람의 심정과 생(生)에 대한 희망과 즐거움을 보이는 장면이다. 루벤스는 이 때, 이미 이탈리아에서 수련을 끝내고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카라바지오, 티지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 등의 화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두운 색조이지만 명암과 채색법은 카라바지오 풍(風)을 보이고, 대상을 파악하는 확실성 또한 정확하다.         성 게오르기우스와 악룡(惡龍)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를 받고 참수 (斬首)된 로마의 군인이며 순교자였던 성 게오르기우스가, 카파도키아의 수도에서 악룡(惡龍)을 퇴치하여 왕녀를 구출하였다는 전설은 루벤스 이전에 많은 화가들에게 많이 다루어졌었다. 이 그림은 신앙심이 강한 루벤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보인다. 그것은 색채의 다양성과 동(動)과 정(靜)의 대조이다. 루벤스의 이탈리아에서의 수련은 특히 색채의 회화적 가치를 인식케 하였고, 색채로 이루어지는 화면 구성을 중요시하게 하였다. 빛과 색과의 관계, 빛과 어둠의 대조에서 형태가 부상(浮上)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동적인 장면의 구성은 정적인 면과의 대비에서 그 효과를 찾는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회화적인 요소가 이 작품에서 발휘되고 있으며 극적인 성격을 주고 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이 작품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후 제작한 첫 그림이라 한다. 천사와 마리아의 대립적인 동태는 긴박한 사정을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명암법의 응용으로 인물의 표정과 양상(樣相)을 부상(浮上)시켜 극적인 상태를 이루어 주고 있다. 여기서도 인물의 표정은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명암법과 함께 카라바지오 화풍에 따르고 있다. 카라바지오를 두고 보통 '심야(深夜)의 화가', 또는 '촛불의 화가'라고 부르는데 그의 명암법은 빛과 색채의 관련을 상징한다. 한편 인물들의 동태는 틴토레토 풍이다. 밝은 색채와 그 조화의 색조, 대비색(對比色) 등은 색채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특색이 되고 있는 회화적인 요소는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결과인 것이다. 이 소재는 루벤스 이전에 많은 작가들이 다루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사벨라 대공녀(大公女)   루벤스가 스페인의 영토였던 네덜란드의 총독 알브레히트 대공 부처의 궁정 화가가 된 것은 1609년 9월 이었다. 이 작품은 루벤스가 궁정 화가가 된 이후 제작한 첫 번째의 것이 된다. 그림의 주인공인 여인은 스페인 왕의 딸이며 남편 알브레히트의 사후(死後)에 네덜란드의 실권자이며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이 대공비와 루벤스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밀접한 주종 관계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역사적으로도 유명하고 중요한 의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대공비는 그 위치에 맞는 호화롭고 화려한 의상과 차림을 하고 있고 위엄과 성숙한 여성미를 보이고 있다. 루벤스는 이와 같은 대공비의 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세부적인 정밀 묘사와 질감(質感) 표출까지 하고 있다. 색채주의자인 루벤스의 사실성의 표출 기술 능력을 확인하게 한다.         4명의 철학자   루벤스가 따르고 또 좋아했던 형이 사망한 것은 1611년 8월 이었다. 루벤스는 고전학을 배웠으며 고전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연유도 이에 있는 바이다. 이 그림은 그 추도의 뜻으로 그린 구상화(構想畵)이며 또한 루벤스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예이기도 하다. 그림에도 그 시대 루벤(Louven)대학 교수로 명성이 있었던 고전 학자이며 루벤스의 형의 스승이었던 쥐스타스리프시우스가 모피(毛皮)의 의상으로 나타나 있고 화면 우측에 루벤스의 형이 보이고 그 후면에 루벤스가 서 있다. 화면 우측에는 리프시우스의 또 한 제자를 볼 수 있다. 실내 배경으로 이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고대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두상(頭像)이 보이고 그 옆의 유리꽃병에는 네 개의 튜울립 꽃이 두 개는 피고 또 두 개는 봉우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생존자와 두 사람의 사망을 의미한다.         승리자의 대관(戴冠)   루벤스는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파(派)인 티지아노 미술을 자기 회화의 원천(源泉)으로 삼고 있다. 그 예를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전면 우측에 등지고 있는 여인상은 티지아노 작품에서 빌어온 것이며 루벤스는 자주 이러한 자태를 작품에서 재현했다. 특히 그의 여체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는 관능적인 미의 특징을 표출하고 이 미(美)를 여러 자세의 여체로 특징지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배후에서 본 여체와 뒤틀리고 있는 정면상(正面像)의 여체를 볼 수 있다. 한편 티지아노의 에서 정(靜)과 동(動)의 두 여인 대조는, 여기서도 갑옷을 입고 있는 승리자와 대관을 시키고 있는 여인 형상으로 표출되어 있고 등지고 있는 여인과 대관을 시키고 있는 여인 형상으로 그 대조를 보게 한다. 밝은 색채와 대조적인 색조 또한 화면의 극적인 열기를 고조시킨다.         최후의 심판(大)   V자의 대각선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의 구도는 수많은 인물의 자태와 동태를 또한 보여준다. 여러 인물들의 동태는 저마다 방향을 달리하고 있어 시선을 분산시키고 혼돈케 하는 바로크 양식의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루벤스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인체가 보여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자세나 동태가 여러 각도에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작품 을 연상케 하는 이유도 그 점에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강렬하고 신비한 신의 드라마의 연출을 보인다면, 루벤스는 설화적인 생명의 여러 양상과 그 감동적인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인물의 자태를 미켈란젤로에서 빌어 왔다면, 그 동태와 명암의 리듬은 특이하게 격하다. 한편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도 혼잡한 동태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불신의 토마스   사도 토마스에게 수난의 못 자국을 보여 주면서 의혹을 풀어주는 그리스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 친구였던 시장 니콜라스 로코크스와 그의 처의 묘비를 위해 의뢰된, 세 폭으로 된 그림의 중앙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그리스도의 자태는 루벤스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브이며 겸허하고 성스러운 자태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체구는 건장한 성인의 상반신이며 과장된 육체적 표현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사도들의 동태와 표정은 놀람과 감탄이 엇갈리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의연하고 자비스러운 그리스도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조명 앞의 그리스도를 대하고 있으며 명암의 뚜렷한 분간에서 빛을 찾고 있다. 이 점은 간접적인 해석으로 루벤스가 주제를 이해하고 제시한 것이다.         4대륙   인체에 관한 다각적인 연구는 미켈란젤로를 생각케 한다.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수련한 결과는 베네치아 파(派)의 색채 표현이 결정적이었지만 미켈란젤로의 인체표현(人體表現)도 그에게 중요하였다. 루벤스는 독자적인 양식을 이에 구현하였으나 르네상스 미술의 추억은 그의 작품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이 그림 좌우편의 노인의 자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메디치(Medici) 가(家)의 묘비 조각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그림은 루벤스 특유의 밝은 채색과 장대함을 나타내고 있고, 그의 사실적 표현과 장려함을 보이고 있다. 4대륙을 의인화(擬人化)하고 상징화하고 있는 이 작품의 구상은 거칠고 늠름함과 수려함 등이 대조를 이루게 하고 있으며 원시 사회와 문명 사회의 공존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화려하게 조각된 꽃병과 야생 동물로 표상(表象)되어 지고 있다.         사자 사냥   루벤스는 1614년경부터 18년까지 여러 수렵도를 그렸으나 그 중 이 이 가장 훌륭하다. 작품 에서 볼 수 있듯이 전투 중의 말 형태가 다각도로 다양하게 표현되었고 또 이 작품에서 사자의 포악한 맹수다운 형상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동물을 묘사하기 위해서 작가는 동물 해부학의 지식을 풍부하게 갖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실감으로 표현된 이 광경을 루벤스는 목격하였을까 의문이 된다. 묘사도 그랬듯이 루벤스는 자신의 상상력에 의하여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이다. 사자든, 기타 야생동물을 당시의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었고, 왕족 또 귀족의 개인 동물원은 한정된 사람만 허용했었다. 루벤스는 이 동물원에서 동물에 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광경은 체력, 용기, 흥분 등이 특징이 되고 있다.       聖피핀과 聖女베가   이 작품을 제작할 때는 루벤스의 역량이 이미 성숙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물 묘사의 확실함은 플랑드르의 작가 반 아이크(Van Eyck,1390-1441) 이래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이탈리아 고전에서 습득한 결과의 다행스러운 결합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루벤스 특유의 생명 감이 넘치는 활력적인 젊음과 생기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인물의 차림새와 어울리는 표정에서 표출되고 있다. 활달하고 양성적(陽性的)인 구성 요소를 중심으로 하거나 또는 지배적인 상태에 두고 이에 대조적인 요소를 둔다는 화면 구상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상황이 여인을 앞세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재는 극히 종교적이라 하여도 루벤스는 여기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양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은 세 폭(幅)으로 된 제단화의 중앙 부분의 그림이다. 중세기부터 이 그림의 소재는 많이 이용되고, 여러 가지의 작품이 산출되었다. 루벤스는 여기서 그의 특유의 인체 표현과 함께 감정 표현으로 장면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사자(死者) 그리스도의 육체와 그의 안면 표정의 일치, 그리고 후면에 있는 인물들의 비통한 모습은 자세와 표정의 일치를 또한 보이고 있다. 루벤스는 그림의 주인공인 그리스도를 화면 중앙부 전체에 두고 조명을 집중시켜 사자의 비참한 모습을 정면으로 비춰주고 있다. 따라서 정면과 배후의 명암 관계는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색조의 조화는 이와 같은 명암의 대조 밑에서 형성되고 있으며 인물의 표정이 이에 부상되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 서정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小)   앞서 보았던 과 비교가 된다. 저주를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의 장면이 지배적인 그림이다.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같은 격한 움직임을 보이는 작품이다. 큰 무더기를 형성하는 수많은 인체의 움직임은 격하고 다양한 개개인의 동태로 되어 속도감을 나타내며, 보는 사람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다. 집체(集體)로 된 개개의 인체는 360 도의 각도에서 포착되었으며, 또한 하나의 인체도 여러 각도의 시선을 요구하는 형상으로 되고 있다. 이것은 육체적인 표현과 함께 표출되는 심리적이며 감성적인 표현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루벤스는 명암의 색채감을 이용하여 여러 육체적 특징을 강조하고 부상시켜 장면을 혼잡한 극적인 상태로 표출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회화적인 요소는 바로 그 미술의 성격이 되고 있다.       만취한 실레노스   그리스 신화의 주제를 다룬 것이다. 실레노스는 물의 요정이며 반인 반수의 숲의 신 사티로스의 아버지이고 또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양육한 신화적 존재이다. 루벤스는 이 소재를 생(生)의 해학으로 해석하여, 흥미있고 의미깊게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물과 산이 있는 곳에는 동물이 있고 식물이 있으며 거기에는 생의 성장과 흥취가 있음을 그림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원형으로 된 구도는 그 안에서 또다시 X자형의 대각선을 형성하여 그림의 초점을 분산시켜 복잡하고 활기있게 만들어 놓고 있다. 화면 아래쪽 우측의 어린이는 그 위의 젊은 여인으로 이어지고 화면 위쪽의 좌측 노파로 연결되어, 생의 과정을 표상(表象)한다. 풍요로운 자연과 생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포도송이와 그 가지가 지배적으로 나타나 있고 이것을 둘러싼 생의 여러 자태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스도와 참회하는 여인   작품 에서 본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기서 되찾게 된다. 그리스도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있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참회하는 여인까지도 루벤스는 주제나 내용에 관계없이 육체의 찬미와 관능미의 표출을 잊지 않고 있다. 도리어 관능적인 육체의 여인상이 죄를 참회하는 자연을 타당화할 것 같다. 루벤스의 위대함은 육체를 자유자재로 정신과 심리적인 상태에 예속시켜 표출한다는 점이다. 탐욕의 육체, 성을 표상하는 육체, 절망의 육체, 모성적인 육체, 향락의 육체 등 다양하다. 여기서도, 여인은 타락된 육체를 가려, 뉘우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물의 표정으로 좌우되고 있는 장면이 여러 종류의 인체 표출을 보게 하는 것이다. 감격, 놀라움, 존경 등의 표정이 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에 밝고 아름다운 색채가 장면을 명쾌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레우키포스 딸의 약탈   이 작품의 특징은 X자를 형성하는 구도이다. 그러나 구성 요소들은 그 자태의 방향에 의해 원(圓)을 이루고 있다. 두 여인을 떠받치고 있는 남자는 땅 위에 쓰러지려고 하고 있는 여인을 향하고 있고, 또 그 여인은 말에 매달린 사랑의 상징 큐우핏의 머리를 돌리고 있으며, 그 방향은 레우키포스를 약탈하는 남자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바로크 예술 양식을 나타내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엉키고 있는 요소들은 생의 약동과 그 맥박의 연락이며, 루벤스는 이에 관능과 건강에 넘치는 육체미로 나타내 주고 있다. 여인들의 탄력있는 아름다운 살결은 거칠고 검은 색의 남자들의 피부와 힘찬 근육에 윤기있는 말의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 신화에 관계된다. 제우스 신(神)의 두 아들이 멧시나의 두 왕녀를 이탈하는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聖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의 奇蹟   성숙기의 루벤스가 맡은 가장 큰 작업은 안트워프 시의 예수회(會)가 그에게 의뢰한 새로운 성당을 위한 천정 벽화와 세 점의 제단화를 제작한 것이었다. 이 성당은 1718년 화재로 거의 소멸되었으나, 제단화만은 보존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악마들로부터 병자를 구해 달라는 성 이그나티우스의 기원이 성취되어, 악마는 물러가고 병자들은 치유된다. 성이그나티우스를 감돌고 있는 종교적인 감동과 그 앞의 아래쪽에 있는 민중의 현실적인 흥분은 일종의 신비감과 세속감을 대조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조화감을 보인다. 구도는 티지아노의 작품 를 연상시키는 건축적인 단상에 주역을 두고 있고 건축 요소가 배경이 되어 웅장한 성격을 보게 한다.         화환 속의 聖母   신선하고 상쾌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그림이다. 그림은 화려하고, 밝고 조용한 여러 요소로 형성되어 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화(聖母子畵)가 품위있고 고귀한 표현으로 그 특색이 된다면, 루벤스의 성모자화는 조용하고, 명쾌한 표정이 특징으로 된다. 성모에게 안긴 아기 예수는 루벤스 특유의 토실토실한 유아상(幼兒像)이고, 그 주변의 화환을 둘러싸고 있는 아기 천사들의 즐거운 모습과 연관되고 있다. 아름답고 화사한 수많은 종류의 꽃관은 성모자를 위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경사스럽고 빛나는 성모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루벤스는 꽃관과 아기천사들을 앞으로 당겨 크게 보이게 하여 중앙 액자 속의 성모자를 거리있게 나타내게 화면 구상을 하여 깊이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다채롭고 명쾌한 채색이 성모자를 영광스럽게 하고 있다.         소가 있는 풍경   1618년경부터 20년경까지 루벤스는 풍경화를 산출한다. 이 풍경은 평화스러운 자연과 목장 경관을 보이고 있는 듯하나 소들의 여러 동태와 개울가의 고목, 그리고 음산한 숲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이 무슨 사건이 발생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동요되고 있는 자연의 인상을 준다. 루벤스는 자연과 목장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성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그것은 배경으로 되고 있는 우거진 숲과 물가를 가운데 두어 둘러싸인 반원형(半圓形)으로 만들고, 목장의 광경까지 그 안에 두고 구도를 잡고 있다. 그러나 숲과 목장의 공간적 구별은 그늘과 빛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빛을 받고 있는 목장은 젖을 짜고 일하는 장면으로 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그늘진 숲은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안트워프 시장의 의뢰에 의하여 제작된 제단화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로마 병사의 최후의 일격을 받고 있는 순간이다. 참혹하고 비통한 정경이다.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와 흉하게 목을 비틀고 있는 양측의 도둑은 대조적이며 인상적이고, 또한 이들과 병사들과도 대조적이다. 이에 비해 우측 아래쪽 마리아의 군상은 표정에 있어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표정과 인물들의 여러 자태가 엇갈리고 있는 정경은 혼란된 어수선 한 분위기를 보인다. 그러나 루벤스가 이 작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특색있는 점은 구도적인 공간성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위치를 중앙에 비스듬히 두고, 좌측의 세 번째 십자가를 후면에 위치시켜 깊이의 공간성을 낳게 한 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후면에 두 사람의 얼굴을 엿보게 하여 깊이의 거리감을 주고 있는 점이다.         이사벨라 브란트   루벤스의 첫 번째 부인의 초상화이다. 이사벨라는 미인은 아니지만 교양이 있고 따뜻한 가정적 분위기를 갖고 있는 여성이며, 그녀의 사망시까지 17년간 다망한 루벤스에게 둘도 없는 동반자였다. 이 그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면에서 신뢰와 애정이 가득차고 평안하게 중년을 맞이하는 성숙한 여성을 볼 수 있고 또한 내면적인 미가 풍기고 있는 여성을 보게 된다. 이 때의 루벤스는 성숙기에 들어 있었으며 여성의 초상화 중에서 과 , 그리고 이 초상화가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취급되었다. 품위있는 간소한 차림새와 장신구는 루벤스의 수법으로 돋보이고 있으며 이에 검소한 색채가 가담되어 인품을 격조있게 하여 주고 있다.           스잔나 푸르망   이 작품은 '마리 드 메디치' 주제의 대작과 함께 루벤스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원숙기에 해당되는 루벤스는 부인 이사벨라의 친척 관계의 여인을 모델로 하고 또 기타 작품에도 등장 시켰다. 이 작품은 한편 이라는 명제로 불리우고 있으나 사실은 융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초상화가 루벤스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유는 모델의 여인이 작가의 이상형을 나타내는 여인이었다는 것과 여기에 루벤스의 성숙한 예술성이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젊음과 건강이 넘치는 여성상은, 밝고 맑은 눈동자와 표정, 풍부한 몸매를 시사하는 앞가슴 등으로 표상되고 있다. 청아한 여인상을 표현하는 루벤스의 예술은 맑은 청색의 배경과 빨간색, 검은 색, 흰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또 화합되는 색조를 이용한 색채관으로 격조를 높이고 있다.       전쟁과 평화   루벤스는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외교관으로서 유럽 제국의 왕후 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에 스페인과 영국간의 평화 교섭의 임무를 맡고 영국에 체재한 것은 1629년 6월부터 9개월간이었다. 그의 영국 체류 중 틈틈이 제작한 작품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의 왕 찰스 1세에 기증되었다. 작품 는 단순한 우의적인 의미의 것이라기보다 염원이 표현되어 담겨져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느 의미에서 기념적인 역사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평화에의 미련과 애착을 보이는 출전 용사가 가정, 풍요, 평화를 나타내는 정경에 눈길을 돌리면서 애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이 그림에서 보게 된다.           장갑을 들고 있는 헬레네 푸르망   결혼 1, 2년 후의 헬레네의 초상화이다. 침착하고 건강미의 여성임을 보이는 그림이다. 이 시대의 헬레네의 초상화가 여러 점 제작되었고 전신상 또는 반신상으로 그려졌다. 루벤스는 생과 사랑의 즐거움을 젊은 부인 헬레네에게서 더욱 확인하여 자신의 예술을 부인 소재에서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루벤스처럼 부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높이 찬양한 화가도 드물 것이다. 또한 헬레네만큼 자신의 남편의 환희와 찬미에 응한 여성도 없다고 한다. 루벤스에게는 그녀와의 결혼이 새로운 미에 대한 발견이었고 새로운 생명의 맥박이며 청춘의 재생이었다. 이 작품은 그와 같은 루벤스의 기력과 정열이 결합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배경을 단조로운 짙은 색으로 하여 여인의 의상색과 중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여인의 탄력있는 흰 피부와 젊음이 부상되고 있다.       三美神 THE THREE GRACES 1630년경 판 유채 221X181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파리스의 심판   여체의 관능적인 풍만한 몸매와 그 건강미에 이상(理想)을 추구하였던 루벤스에게는 그리스 신화의 미신(美神)은 적합한 주제였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라파엘로와 티지아노의 작품을 보았고, 고대 조각의 미를 수학한 루벤스는 또는 을 여러 번 그렸다. 이 작품에서 세 미신은 탄력있고 윤기있는 육체의 촉감적인 관능미를 과시하고 있다. 루벤스는 이와 같은 여체의 특성을 직접 광선으로 조명시켜 그 형태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 여신들의 표출을 충분히 하기 위하여 루벤스는 360도 각도로 회전시키고 있다. 정면, 측면, 후면으로 세 여인이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이, 루벤스의 여체에 대한 미적 관찰이라 할 수 있다. 화면 좌측 나뭇가지 위의 올빼미는 지성을 표상(表象)하고, 땅 위의 투갑과 창은 무력(武力)을 표상하고, 공작새는 사랑과 결혼을 표상한다.       정원을 산책하는 루벤스와 헬레네 푸르망   젊고 아름다운 헬레네 푸르망과 결혼하여 루벤스는 새롭게 가정 생활의 평안과 즐거움을 찾았다. 명성과 지위도 확립된 루벤스였다. 전처 이사벨라의 사후, 오랜만에 평온한 마음을 즐기는 루벤스는 새로운 부인과 함께 따뜻한 봄볕 아래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의상은 귀족풍의 차림이고, 사실 루벤스는 이미 귀족의 칭호를 얻고 있는 때였다. 두 사람의 배후에 걷고 있는 소년은 이사벨라 소생의 차남 어린 니콜라스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공작새와 개가 보이며, 가족적인 단란한 분위기를 돋구어 주고 있다. 이 정경의 배 경은 울창한 수목이 짙은 색으로 되어 간간이 비치는 하늘의 맑은 색과 빛으로 정원을 정답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도 루벤스는 잊지 않고 바로크의 요소를 건축의 일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毛皮(모피)를 걸친 헬레네 푸르망   루벤스는 두 번째의 처 헬레네를 자신의 원숙한 기량으로 기념비 적인 미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사적인물(史的人物), 사적사건(史的事件)을 '마리 드 메디치'의 주제 작품으로 집체화하여 자신의 예술을 결정체로 하였듯이, 여인상, 여체미를 이 작품을 통하여 완결짓고 있는 셈이다. 모피의 여인이라는 구상은 티지아노 작품에서 얻은 것으로 생각되고, 여인의 아름다움은 헬레네로 표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경은 루벤스가 이 작품을 마음으로 새긴 것으로, 헬레네에게 주는 작품이라고 그의 유언장에 기록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녀 또한 루벤스 사후의 재혼 생활 속에서도 이 작품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인물 위주의 이 전신상은 배경, 의상 등이 짙은 어둠의 단일한 색조로 되어, 밝은 살 색과 대조되어 모든 장식성을 배제하고 있다. 살색 중심의 작품이다.       스텐 별장이 있는 풍경   루벤스는 스텐에 별장을 구입한 후 모든 정치적인 활동에서 물러나고, 자연을 만끽하고 그 아름다움을 새삼 감미한다. 이와 같은 그의 신변 변화에서 만년에 50여 점이나 되는 풍경화를 제작하게 되고, 그 중 17점이 사후에도 수중에 남게 된다. 그의 마음 속으로 애정을 갖고 스텐 풍경을 그렸고, 이 작품도 그 하나인 아침 풍경의 스텐이다. 색채는 빛나고, 윤곽선은 부드러운 자연 풍경이다. 언덕진 데서 시선을 던져 본 자연은 광대한 들과 수목이 멀리 지평선까지 전개되는 개방공간(開放空間)을 보인다. 고풍(古風)이 짙은 스텐 별장을 화면 좌측에 엿보게 하고, 일찍이 일터로 나가는 농부들을 좌측의 한 모서리에 두어 농촌의 자연 공간을 화면에 지배적으로 두고 있다. 르네상스의 구축적(構築的)인 구도의 원근법은 여기서 개방되고 있다. 거리감과 공간감은 명암법에 의하여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자화상   루벤스는 다양하고 막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의 자화상은 드물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귀족풍의 모습으로 나타난 루벤스를 보여 준다. 그의 만년의 모습을 엿보게 하여 주는 걸작이다. 루벤스가 화가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여성미에 대한 애착과 그 표현에 집착하여, 그 결정으로 을 제작했듯이, 이 자화상 또한 그의 최후의 자아(自我) 결산을 예술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난날 그의 전처 이사벨라와 함께 그려진 작품 는 신혼의 기쁨을 보이는 것이며, 이미 30년이 흘러간 과거가 되고, 그간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세월을 보냈다. 이 자화상에서도 배후와 인물의 의상이 동조의 짙은 색이 되어, 얼굴과 손만 부상되도록 채색되어 있고, 극도로 발달된 색채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396    거대한 마음의 상징물들을 그림화한 "귀를 잘라 버린" 화가 댓글:  조회:2476  추천:0  2017-10-14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7) : 반고호 Vincent w. Van Gogh (1853~1891)   태양(太陽)과 해바라기에의 정염(情念)           아를르의 고호의 집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호는 1888년 5월에 아를르의 역 가까운 라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그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었다. '코발트 색의 하늘, 태양의 숨결 속에 자리잡은 집이나 그 가까운 곳이 모티브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나는 그것을 쓸 만한 것으로 해보이겠습니다.'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큰 방과 작은방의 두 개를 갖춘 이 조그만 집을 빌린 5월에 바로 이사들지 못한 것은 동생 테오가가구에 너무 비용이 들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農婦의 얼굴   빛의 혜택을 받지 못한 풍토의 화가들일수록 빛에 대한 표현 의욕은 더욱 강렬했다.램브란트나 하르스에 이어 네덜란드 지방의 고전을 바탕으로 강렬한 빛을 갈망한 고호에게 찬란한 색채의 길을 열게 해 준다. 그의 내적 열정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대담한 필촉의 엇갈림과 색채의 도입은 네덜란드 시대의 그의 어두운 색조의 작품 계열에서 마침내 남쪽의 밝은 세계를 향하여 출발하게 되는 의지를 느끼게 하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흙에서 나서 흙에서 죽는 남성적인 생명감을 통하여 생존이란 한 고귀한 가치를 화면 가득히 풍기게 한다. 흙에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하고 신선한 감정을, 넓은 대지의 박력처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호의 방   아를르 시대에서 노란 조그만 집으로 옮겨간 후, 그 집을 예술가의 집으로, 또는 예술가들의 공동 생활 터전으로 고호는 꿈꾸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의 취향에 알 맞는 몇 가지의 가구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성격이 있는 분위기로 꾸미고 싶었던 생각을 읽게 하여 준다. 침대도 쇠침대가 아닌 농부들이 쓰던 건장하고 커다란 것으로 고르고, 의자 역시 무뚝뚝한 농부용의 것으로, 벽면에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수점의 그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고,그 외 가구다운 가구가 없는 소박한 침실은 고호의 성격과 가난한 아를르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를르 시대의 생활에 그는 빨강·노랑·초록·파랑·보라·주황, 여섯 색의 기본색을 아름답게 대비시키고, 또는 조화시켜 나갔는데, 이 화면도 그런 기초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비극 직 전의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사마리아人         오렌지와 푸른 장갑이 있는 靜物   병원에서 나온 후 고호는 외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화상이나 정물화들을 그의 방에서 그렸다. 이 작품은 병중에 그렸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색조에 의한 안정감을 추구한 정물화이다. 그가 그린 정물화는 극히 그의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손쉬운 것들, 예를 들면 해바라기, 의자, 신발,책들이었는데, 이 정물은 과일, 향나무 가지, 장갑 등 제재로서는 비교적 이채롭다.향나무 가지의 검은 초록, 오렌지의 밝고 선명한 색, 장갑의 붉은 보라색 등이 부드러운 바탕 위에 선명한 색채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광주리의 테두리 선이나 과일의 윤곽선 등은 주저없이 그은 명확한 것으로,이러한 손쉬운 현실적인 소재를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직업의 안정감과 기쁨을 얻으려는 고호의 보다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트 마리의 漁船   남불(南佛)에서 제작 생활을 하면서 고호는 새롭게 눈에 뜨이는 온갖 이국적 풍경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열중하였다. 1886년 6월 중순경 그는 지중해안을 멀리 돌았다. 로오느 하구에 위치한 생트마리 해안, 더구나 처음 대하는 지중해의 색채가 그에게 제작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해안에 들어 얹혀진 어선의 눈을 붙들어 매는 색채, 기묘한 뱃머리의 뾰족 모양들이 현실적인 해안의 작은 배들과는 전연 다른 모습이었던 것같다. 자연에 임의로 손을 가하지 않는 그였지만, 필연적인 요구가 있었을 땐 그것이 흡사 자연의 외관 그대로인 것처럼 데포르메를 하는 것은 그의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측백나무   생 테미에서 발견한 보다 더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보리밭과 측백나무였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측백나무, 배후의 밭이나 산을, 고호는 흡사 그 자신의 마음의 번민과 희망의 상징인 것처럼 응시했다. 대부분 직선에 가까웠던 아를르 시대의 필치 대신 휘어 구부러져 서로 대응하는 필치가 화면을 메운다. 일종의 바로크화인데, 그 장대한 리듬의 집합은, 한 그루의 측백나무라 할지라도 거대한 마음의 상징물로 변화시킨다. 고호는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측백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그것은 해바라기에 필적하는 것이고 또한 그 대조이기도 합니다.'라고 쓰고 있다.확실히 해바라기가 아를르 시대의 마음의 상징이라면, 측백나무는 생 레미의 마음의 상징으로, 산도 하늘도 대지도 측백나무의 호흡에 맞게 요동한다.         自畵像   고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내면 생활을 읽을 수 있게 솔직하게 나타내 고 있다. 이 자화상은 고호 자신이 말했듯이 색채가 없는 회색 주조(主調)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간혹 자기 작품을 친구들에게 선사하기도 하고 교환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작품을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이 작품은 고갱과 교환 한 이며 와 같은 주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가 빨강과 초록의 대조에 의한 강렬한 구성인데 비하면, 이 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무렵의 내면 생활에 있어 격한 동요를 나타내고 있고, 아를르 시대 초기의 안정을 깨뜨리고 평형을 잃은 흔적이 짧은 머리칼과 예리한 시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클리치의 거리   이 작품은 가장 신인상 파적인 영향이 두드러진다. 는 고호의 파리 생활의 거점이었고 당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를 밀접하게 하면서, 이 거리를 신인상파 동료들의 거점으로 하고 싶어 했다. 그의 동생 테오와 함께 살던 아파트도 이 거리의 브랑슈 광장 바로 곁에 있었고, 로트렉의 본거지 물랑루즈도 이 거리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에서 고호가 파리의 공기에 동화되어 신인상파의 일원이 된 한 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피사로나 시냑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기는 하나, 바람에 휘날리듯 한 도시의 공기와 거친 터치 등은 점묘적인 기법으로 나타내어진, 그의 독자적인 개성이 풍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탬버린의 여인   1885년 4월에 카바레 카페 듀·탬버린이 개점되자, 이 술집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 탬버린의 모양을 한 탁자나 의자, 접시 등, 그리고, 벽 장식까지도 그런 분위기를 한 이 술집의 실내 장식에 고호 자신도 참가했기 때문에 그도 그들 속의 하나가 되었었다. 모델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로트렉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이여인은 탬버린 가게의 여인인지 직업 모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우리 나라의 장고 모양으로 된 의자와 탁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 경의 오른쪽에는 어슴푸레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무렵 고호가 이 가게에서 더러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전람회를 꾀했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시된 작품과 함께 진열되었던 일본의 우끼요 에로 짐작된다. 이 무렵 로트렉과 고호는 서로 한 모델을 그리면서 더욱 관심있는 교류가 이루어 졌었다.         몽마르트         알제리아 土民兵   고호가 그린 인물화는 그 대부분이 그 모델의 성격을 반영할 수 있는 강한 인상을 주는 의상을 걸치고 있다. 이 알제리아의 토민병도 아랍 출생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소의 목과 호랑이의 수염을 가진 알제리아의 병사를 한 번은 반신상으로, 또 한 번은 전신상의 이 작품으로 그려 남겼다. 다른 인물화와 마찬가지로 이 남자의 소박함이나 이국풍의 제복이 고호의 제작 의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화면상으로는 모델이 상당히 건장하고 큰 몸집을 가진 남자로 보이나. 고호의 편지에 적은 것으로는 몸집이 작은 청년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포즈, 힘찬 구도, 강한 색채가 인물을 크게 느끼게 하고, 의도적으로 계산된 구도는 아니지만 색채의 박력, 필치의 리듬, 직관적인 구도가 화면을 흔들림 없이 정착시키고 있다.           젊은 農夫   황금색으로 무르익은 보리밭을 배경으로 그 멀리에는 아늑한 나무 숲을 이루고, 통상보다 낮은 위치에 인물의 반신상을 배치한 이 초상화는 단순한 초상화라기 보다 수확의 계절을 맞이한 농촌 풍경의 한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호 특유의 필치와 색으로 화면을 통일시킨 대신 인물과 배경의 분위기를 서로 맞서게 배치하여,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생 레미 시대에 그가 많은 인물화를 그리지 못한 것은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대하면서도 상처 입은 그의 마음이 사람들과의 가까운 접촉을 거부함으로써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농부의 초상은 네덜란드 시대에 그린 농부들과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날카로운 얼굴의 윤곽과 예리한 눈, 입술, 그 표정이나 성격을 그려내는 능력을 충분하게 읽게 한다.         우편 배달부 루랭   고호는 아를르에서 약간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제작의 틈바구니에서 한가롭게 밤의 카페에서 차츰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 갔다. '금빛을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길러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보이는 우편 배달부'의 루랭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영속적(永續的)인 우정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 배달부의 가족 전체와 친분이 두터워, 아들 아르망의 초상도 그렸고 부인도 그렸다.           자장가 : 루랭의 부인 우편 배달부 루랭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빨강, 노랑, 초록 고호의 기본적인 색채 관계를 나타내는 보다 전형적인 작품이다.         밤의 카페 테라스   '두번째의 작품은 푸른 밤공기 속에 가스등 불빛에 비쳐진 카페의 바깥을 그린 것으로 파아란 별하늘이 내다 보이고 있습니다. 밤의 광장의 정경과 그 효과를 그리는 일, 혹은 밤 그 자체를 그리는 일에, 흠뻑 나는 열중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쫓아서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또, 우연히도 자기를 닮은 해바라기에 열중했던 고호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밤의 광경에 열중하게 되는 것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트렉 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리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타는 듯이 마음의 낮을 향했던 그의 눈은 마침내 마음 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푸른 별하늘과 가스등의 이상한 노란색의 대조는 그의 마음속에 일고 있던 갈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리라.         몽마르트르 언덕의 眺望   고호가 파리에 와서 클리치가(街)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리기 시작한 풍경화 속에는 마르트의 길, 언덕, 풍차 등 밝은 광선을 몸 흠뻑 받은, 몽마르트의 시리즈가 등장한다. 어두운 회색조의 풍경이 1886년부터 점차 밝은 화면으로 바뀌고, 그 다음 해에는 신인상파풍의 눈부신 밝음으로 변모하여, 이미 네덜란드의 침침한 하늘의 어두움은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 언덕이 지금은 한 치의 빈 땅도 없는 시가지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즐비하게 늘어선 밭 사이로 오두막집 농가들이 평화스럽게 자리한 농촌의 정경을 맛보게 하는 교외의 모습이었다. 이 작품은 몽마르트 풍경의 대표적인 것으로 넓은 대지를 조망하는 듯, 공간을 크게 설정하는 등 큰 구도의 풍경화의 기초를 확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필치는 대지의 생동감을 더해 준다.         생 레미의 精神病院 뜰   '이것은 지금 내가 입원하고 있는 생 레미의 요양소의 조망이다. 오른쪽에는 병원의 벽과 회색의 테라스, 꽃이 져버린 무성한 장미의 덩굴. 왼편 뜰의 지면에는 홍다색 태양이 타고 있는 소나무의 낙엽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뜰의 경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둥치도 가지도 홍다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잎의 초록에는 검은 색이 섞여 있어 뭔가 슬픈 느낌이 든다.' 고호는 이렇게 친구 베르나르 에게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병원에서 폐쇄된 채 둘러싸인 상태, 그리고 그 둘러싸인 속에서 타오르려는 마음, 그런 것을 상징하듯 한 화면이다. 거의 대부분은 평탄해야 하는 지면이나 테라스까지도 일렁 거리며 동요하고 있다. 고호는 소나무를 '검은 거인'이라 부르고, 실제의 정경 인물에 대조시키고 있다. 그 점에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별 달밤   생 레미에 옮겨 온 고호의 화면은 아를르 시대에 비하여 한층 침잠된 색채를 쓰고, 필치는 보다 다이내믹하게 되고 동적인 곡선의 자유로운 발전에 의한 일종의 묵시록 적인 팬터치를 만들고 있다. 고호가 몽상적이거나 환상적이란 것은 아를르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는 그 표면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없었다. 그는 항상 현실에 밀착한 듯했다. 그러나, 생 레미에서의 그의 작업은 본질적인 서정을 보인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으로 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이기도 하며, 그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 성취가 마침내 생 레미 시대에 있어 몽상가로서의 고호를 낳게 한다. 별들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모든 것이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대한 밤의 시는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와 닿는 것에 의한 서정성과 신비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를르요양원의 내부           양파가 있는 靜物   이 작품도 아를르의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의 정물화인데, '내일부터 일에 치중할 마음이다. 그리는 습관을 다시 되찾기 위하여, 먼저 정물을 1, 2점 시작하게 될 것이다.'라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다.술병, 물주전자, 양파, 냅킨, 담배쌈지, 파이프, 양촛대, 성냥통, 테오로부터의 편지,라스파이유라는 의학자에 의하여 쓰여진 의학서, 이런 것들은 모두 고호의 생활 중심부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그의 생활 중심부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단지 그리는 습관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서만 정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평형을 잃은 상태로부터 다시 자기 자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의 생활에 보다 확실한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가짐이었음이 틀림없다.         의사 가체트의 肖像   생 레미에서 북쪽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호는 1890년 5월에 그의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에 있는 오베르 슈르 오와즈에 사는 의사 가체트의 곁으로 갔다. 오와즈강을 중심으로 이 지방의 풍경은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가체트는 고호를 만났을 때 이미 62세로, 그 이전부터 도미에, 쿠르베, 마 네, 피사로, 귀오멩, 세잔 등과 가까운 교분을 가진 친구였다. 이 작품은 고호가 그린 3점의 가체트 초상 중의 하나로, 초상 작품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파리에서 그린 등 아를르의 루랭과 함께 모두 고호를 잘 이해했던 사람들로서, 그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로 남겨지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고호의 애정을 잘 나타내어 주는 당연한걸 작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우리들 시대의 침울한 표정'을 가졌다고 고호는 말하고 있다.         아를르공원의 입구           측백나무와 별과 길   '창에는 오렌지색의 불빛이 비치는 낡은 여인숙, 높이 뻗어 오른 한 그루의 측백나무가 똑바로 검게 서 있다. 길에는 하얀 말에 끌리는 노란 수레 한 대와 그 앞을 산보하는 두 나그네. 굉장히 로맨틱하지만, 이것이 프로방스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호는 오베르 에서 고갱에게 이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히 쓰고 있지만, 이 편지는 미완성인 채 나중에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측백나무를 그린 작품 중 특히 유명한 것으로서 별, 측백나무, 보리밭, 마차, 오두막집 등, 생 레미 시대의 요소를 대부분 여기에 갖추어 넣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측백나무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고 하고 있다. 그 검은 맛의 초록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마음을 쏟았었다. 더구나 그것을 밤의 효과 속에서 그리기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폭풍에 휘말린 하늘과 밭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멀리 펼쳐져 가는 보리 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보리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보리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만큼 불길해 보이지는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7월 27일, 그는 보리밭 언덕에 올라 자기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다. 탄환은 심장을 뚫고 고호는 상처를 손으로 누르고 걸어서 돌아와 조그만 지붕밑 방에 누워, 고통을 참으면서 파이프를 물고 7월 29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르오노강의 별 달밤   두 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 피듯, 푸른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별들이 가득하며, 강물에 비친 불빛의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이 한폭의 아름다운 야상곡은, 섬세한 가락으로 놀랄 만큼 정서에 넘쳐 있다. 고호의 리리시즘, 거의 항상 그 강도와 밝기 때문에 리리시즘으로서의 외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그리려고 하는 그는 바로 본질적인 시인(詩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를르에 도착하자마자 밤의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그리려고 마음 먹었던 사실이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져 있다. 그러나 그가 겨우 밤의 테마에 착수한 것은 9월이 되고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지방의 별이 가장 아름다운 달이 9월이었고, 고호는 촛불을 그의 모자 위에 세우고 밤 경치를 그렸다고 한다.         오벨르의 집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해바라기라고 하면 바로 고호를 연상하게 되는 꽃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고호는 해바라기꽃의 강한 모티브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리는 데 열중하였다. 특히 아를르에서 살고 있던 시대에 있어 해바라기는 그의 중심적 주제였다. 아무튼 대담한 노란색을 둘러싼 불꽃같은 꽃잎이 고호의 잠재적인 정열을 만나 생명력 있는 작품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이 작품은 아를르 시대 이전 파리에서 그린 작품으로 해바라기의 최초에 해당된다. 이후 그의 작품 속에 눈 부시는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네덜란드의 누에넹 시대에 그린, 새집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원형의 둘레는 어쩌면 그의 감각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패턴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그의 리드미컬한 생명력이며 그의 생애, 바로 그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고호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또 파리에서 아를르로 조금이라도 더 태양에 접근하려고 따라간 셈이다. 그의 이러한 태양에 향하는 집념은 어쩌면 해바라기를 꼭 닮아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그는 아를르 지방에서도 여러 점의 해바라기를 그린 작품을 남기고 있고, 그 결과 해바라기는 곧 고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해바라기의 형상이나 색채, 그리고 해를 향하는 성질은 고호의 내면적 원형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해바라기는 고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미묘한 톤의 파랑색을 배경으로, 강렬한 변화의 노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바로 고호 자신이 그의 동생에게 설명했듯,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상을 나타내는 태양에의, 또 생명에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 자신의 강렬한 생명력을 그는 해바라기를 통하여 본 것이다.         고호의 椅子   네덜란드 시데에 그린 과 함께 의자를 모티브로 한 이 그림도 고호 특유의 것이다.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 한 개의 의자를 통하여 항시 거기에 걸터앉는 주인의 성품과 생활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고갱과의 공동 생활이 시작된 이래 그는 두 개의 의자를 그렸다. 먼저 그린 것이 이 작품인데, 자신의 의자를 햇빛 아래에서 그렸고, 뒤에 그린 것은 고갱의 의자인데, 그것은 램프의 빛으로 그렸다. 고호의 것은 건장하고 소박하며, 고갱의 것은 유순한 곡선으로 그렸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두 개의 의자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성격을 암시하고, 마침내 비극으로 끝나는 공동 생활의 운명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간단한 의자 하나를 그리는데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까지도 묘사하는 그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레스토랑의 內部   점묘주의적 수법을 통한 당시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는 고호가 그린 작품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점묘법적 작품이다. 번쩍거리는 색채와 이 기법의 완벽함은 파리 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겠고, 노랑과 연초록, 그리고 장밋빛을 통한 색조의 배합은 조용하고도 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당시 인상파에 대항하는 신인상파적 보편적 교양을 알려주는 그의 역량을 보게 하는 작품이며, 후 일 활짝 피는 색채의 개화를 예감케 하는 작품이다.         신발   고호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처럼 낡은 신발을 정물의 소재로 다루었던 화가는 고호 이전에는 밀레가 있을 뿐이다.밀레의 서민 감정에 퍽 공감을 느꼈던지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고호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도 밀레의 신발을 그린 데생에 자극을 받아서 그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한 켤레의 신발은 농부의 생활과 그 힘겨운 수고의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도 세련되고 밝은 도시적인 풍물을 그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처럼 이런 신발들을 그려 네덜란드와 파리 양쪽에 살고 있는 그의 마음의 갈등 같은 것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색채가 한층 밝아지고 필치가 잘게 되면서 격렬하여 지고, 배경의 밝은 빛과 어두운 신발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   고호는 누에넹 시대에 많은 농부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남겼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를르 시대에는 이 농부 한 사람만을 그렸었다. 그가 농부들의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농부와 개별적으로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작품의 노농부는 파시앙스 에스카리에라는 이름의 카마르그 출신의 농부로서, 고호는 두 번에 걸쳐 그의 초상을 그렸다. 다른 하나는 반신상으로 손은 그리지 않았다. 적어도 아를르 시대의 그는 생의 공감 자로서 농부를 응시하는 태도가 아니라 색채나 빛에 대한 조형적 흥미의 대상으로서 더욱 인간적 흥미를 북돋우어 갔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상부의 강렬한 노란색과 빨간색, 하부의 대비적인 푸른 옷,억센 필치 등의 조형적 시도로써 이 농부를 그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활짝 핀 복숭아꽃   병의 발작과 불안의 생활 속에서도 꽃피는 계절은 다시 찾아왔다. 아를르에 도착했을 때, 눈이 녹고 과수원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고호에게 환희와 기쁨을 주던 대지는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화사한 햇빛이 어루 만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작품의 모티브를 구하러 외출하는 것도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그는 몇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넓고 아름다운 전망의 시원한 화면은 병든 사람의 그늘은 느낄 수가 없다. 전경에 비스듬히 지나간 울타리와 그 아래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잎을 배치한 구도는 극히 안정되어 있다. 오히려 잔붓으로 가볍게 찍어 나간 터치의 리듬은 봄노래를 들려주듯 화면에 튼튼한 안정감을 구축한다. 비극 이후의 체념이 그의 마음 속을 오히려 평화스럽게 가라 앉히는 것인지, 봄이 그를 평화스럽게 치료한 것인지 아름다운 정서가 훈훈하다.         복숭아나무   이 작품은 고호가 남불(南佛)에서 맞은 경이적인 봄의 화사함을 깊은 감동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그는 1888 년 2월 21일에 아를르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당시는 아직 겨울이어서 눈까지 쌓여 있었으나, 그의 예상을 뒤엎고 남불의 봄은 빨리도 왔다. 마침내 태양은 서슴없이 지상에 그 빛을 쏟아 붓고, 꽃이 일제히 피어나고,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리라꽃이 피어 널리고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복숭아꽃이 가지마다 가득 가득 피는 과수원은 아를르의 환희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은 모티브였다. 밝은 태양빛은 복숭아꽃의 구석구석에, 나무가 선 과수원의 바닥에까지 스며들어 어두움이 말끔히 사라진 그에게 가득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그는 이 기념비 적인 최초의 아를르에서의 작품을 그가 헤이그에서 그림을 배운 종형이자 스승인 화가 모브의 죽음 앞에 바쳤다.         배꽃   작열하는 태양빛에 황금색으로 물든 대지, 멀리 보이는 감·벽의 청청한 하늘, 왼편의 검푸른 숲이 절묘한 색의 조화를 이루면서 모든 존재들에게 명석한 이념을 부여한다. 소재들은 둔탁하면서도 확실한 윤곽선과 선명한 고유색을 지녀, 대담하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데, 배나무에 탐스럽게 핀 배꽃들이 무슨 사연을 말하는 듯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자연을 색채 현상으로 받아들인 인상파의 묘법에 선, 면, 고유색을 배합시켜 표현하는 기법을 가미시킨, 태양의 작가다운 수작(秀作)이다.           夕陽의 버드나무   마침내 잎을 떨어뜨리고 발가벗은 버드나무 저쪽에 석양이 장대한 최후의 빛을 쏘이며 저물어 간다. 거기에는 1888년 10월 비극의 직전에 있는 예술가의 마음의 낙일(落日)의 상태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듯하다. 네덜란드의 시대에도 간혹 그는 나무들 사이 저쪽에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그렸다. 고호 자신 훗일의 편지에서 아를르의 수양버들 뒤쪽의 낙일은 네덜란드를 회상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도개교(跳開橋)에서나 이 작품에서나 아를르 시대의 모티브에 간혹 네덜란드 시대의 모티브를 새로운 모습으로 재발견하게 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아를르의 跳開橋   고호가 아를르에서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 중의 하나가 이 도개교이다. 아를르에서 부크에 이르는 운하에 놓여 있는 이 다리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다리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것이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밝은 광선에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둘러싸인 굵고 가는 선의 결구(結構)로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의 다리의 조형은 그의 표현 의도에 알맞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프로방스의 짚단   고호는 성실한 농부의 대변인처럼 농토를 사랑하고, 신선한 흙과 그 위에 농부의 노고로써 맺은 무성한 곡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그렸다. 특히 육박하듯 대상을 붙드는 그의 시각은 이 작품에 있어서도 충실한 제작자의 면모를 보여 준다. 이 무렵 그의 주요한 모티브는 울타리에 둘러싸인 보리밭과 베어서 쌓아 놓은 커다란 짚 둥우리였다. 보릿짚의 노란색, 그리고 풀잎의 흐름은 고호의 화법에 있어 더할 나위없는 제재였다.         귀를 자른 自畵像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호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 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또 한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나 바그너나 베를리오즈의 마음속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호 자신은 말하고 있다. 그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피해 망상 등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노란 보리밭과 측백나무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역시 불 꽃 모양을 하고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 색의 측백나무,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그러나 화사하게 서로 어울리는 해조(諧調)의 색채가 억제된 색조에 의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아를르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호는 그곳에서 아를르 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해를 쫓아 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레미에서는 힘찬 생장력을 가지고 하늘 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하는 풍경에 열중하고 있다. 얼핏 보면 그는 격렬한 사나이로만 보이나 그것은 일면일 뿐, 이 작품이 갖는 안정감, 섬세함, 조화, 억제는 또 다른 일면으로 부각된다. 고호 자신도 이 작품을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다.      
395    사군자화(四君子畵) =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그림 댓글:  조회:2993  추천:0  2017-10-13
사군자화, 꽃그림, 화조동물화   조선시대 회화 주제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렸던 산수화와 함께 사대부들이 마음을 수련하는 사군자화나 꽃, 새나 곤충 등 이 있다. 식물을 주제로 그린 그림 중 사군자화(四君子畵)는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그림을 말하며 선비들이 교양으로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사계절을 대표하는 사군자의 고결한 모습때문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담아 표현하였다. 사군자화를 잘 그렸던 대표적인 화가로는 대나무를 잘 그려 조선 3대 묵죽 화가로 손곱혔던 이정, 유덕장, 신위가 있으며, 이들이 그린 작품들을 중앙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군자 이외에 문인화로 다양한 꽃그림도 그렸는데 새나 곤충과 함께 그려졌다. 꽃그림은 조선후기에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의 간결하고 대담하게 그렸던 것도 있지만, 다양한 채색을 써서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린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꽃을 많이 그린 화가로는 조선초기의 신사임당과 후기의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꽃과 함께 새, 동물들을 그린 그림을 화조.동물도라 한다. 이들 그림은 산수와나 사군자화와는 달리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거나 동물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등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중앙박물관에서 여러점의 화조.동물도 중에서 신윤복이 그린 가 가장 눈에 뛰는 작품이다. 풍속화에서 보여준 섬세한 표현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사군자화(四君子畵) 사군자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속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풍기는 난초, 늦가을 첫추위를 견디며 늦게까지 꽃을 피우는 국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는 대나무 등은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군자의 정신을 나타낸다. 사철 내내 변함없이 고결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화가들은 사군자화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 표현하였다. 사군자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9,10세기 무렵이다. 중국 송.원나라에서 들어와 고려시대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문화원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대나무 그림을 1등 과목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매화, 조희룡, 19세기, 종이에 색. 6폭의 병풍에 그려진 대작으로 활짝 핀 매화를 상당히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선말기 문인화가였던 조희룡은 누구보다도 매화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매화에 대한 각별한 애호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고, 많은 매화 그림을 그렸다. 호도 우봉과 호산 외에 매수나 매화두타를 사용하여 매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조희룡의 서예나 난초 그림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매화 그림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보여 주었다. 두 그루의 매화가 가로로 긴 화면 전체에 펼쳐진 모습으로 매화나무는 용이 솟구치는 듯 구불거리며 올라가며 그 줄기들은 좌우로 긴 가지를 뻗어내고 가지에 백매와 홍매가 가득 피어 있다. 매화들은 꽃 봉오리, 반쯤 핀 꽃, 활짝 핀 꽃 들을 점을 툭툭 찍어 표현하고, 꽃받침과 꽃술을 농묵으로 나타내었다. 줄기의 내부에는 필선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 부분에 농묵으로 먹점을 찍어 입체감을 살렸다. 작품의 오른편에는 자신의 매화그림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제사를 적었다. 파초도(芭蕉圖), 심사정(沈師正, 1707~1769),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파초를 호방한 필치로 힘있게 그렸다. 세밀함보다는 굵고 힘이 넘치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심사정은 산수, 인물, 화조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 화가였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잎을 지닌 파초는 일찍부터 관상수로 또한 화조화의 소재로 사랑받았다. 특히 종이대신 파초 잎에 시를 썼다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회소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파초는 문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심사정은 커다란 잎을 늘어뜨린 파초와 괴석을 한쪽에 배치하고 그 옆에 국화와 난초를 그려 넣었다. 국화와 함께 그린 파초는 가을날의 정취를 전해준다. 파초, 국화, 난초, 괴석 등 문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소재를 심사정 특유의 호방한 필치와 능숙한 묵법으로 표현하였다. 대나무, 묵죽도(墨竹圖), 이정(李霆, 1544~1626), 1622년, 비단에 먹. 조선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이정이 그린 작품이다. 대나무 잎에서 곧은 힘이 넘친다. 이정은 세종의 후손으로 호는 탄은이다. 임진왜란때에 왜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 다음부터 붓을 잡으면 신이 도와주는 것처럼 격조가 한층 높아졌다고 한다. 의 관지가 있어서 1622년, 그의 나이 81세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대나무, 유덕장 (柳德章, 1675~1756), 1748년, 종이에 먹, 이 그림은 8폭 중 2폭으로, 1748년 74세 때 그린 그림이라고 밝혔다. 양쪽에 눈이 소복히 쌓인 설죽을 그린 것이다. 여유로운 구성과 담백하고 왕성한 필기, 농암의 적절한 조화 등이 특징이다. 난초, 묵란도(墨蘭圖), 민영익(민영익, 1860~1914), 19세기말, 종이에 먹. 시와 글씨,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민영익의 난 그림이다. 시와 글씨,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민영익의 난그림이다.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낸 것이 특징이다. 그림 좌측에 ‘민원정사의(閔園丁寫意)’라고 적혀 있고 ‘천심죽재(天心竹齋)’라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원정과 천심죽재는 민영깅의 호인데 천심죽재는 민영익이 중국 상해 망명시절에 기거하던 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화면 중간에는 망명시절 사귄 벗인 중국 청나라 서화가 포화(蒲華, 1832~1911)의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대나무, 풍죽도(風竹圖), 신위, 조선 19세기 전반, 비단에 먹, 조선 3대 묵죽화가인 신위가 그림 대나무 그림이다. 조선후기 문인화가 신위가 그린 쌍폭의 묵죽도 대련으로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우측에 있는 대나무는 화면 좌측 하단에서 우측 상단을 가로질러 힘차게 뻗은 대나무를 그렸고, 좌측의 대나무는 화면 우측에서 좌측 상단으로 뻗어 내려 서리와 눈발을 맞아 처연한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신위는 특히 화면에 제시(題詩)를 잘 썼는데, 여기에서도 제시를 통해 각각 봄날의 신죽(新竹)과 가을의 고죽(故竹)을 묘사하였음을 보여준다. 우측에 적혀 있는 글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 임고도(1580~1666)가 쓴 ‘희제(喜齊)’라는 화제(畵題)를 옮긴 것이다. 대나무, 묵죽도(墨竹圖), 유덕장, 조선 1751년, 종이에 먹, 이정, 신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알려진 수운(峀雲) 유덕장의 작품이다. 바위를 앞에 두고 자라난 일군의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잎은 작고 모두 하늘로 향해 있으며 이제 막 올라오는 죽손도 그리는 등, 새로 자라나고 있는 풋풋한 대나무를 묘사하였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신미년(1751) 5월에 필십 노인 유덕장이 젋은 벗 김자송을 위해 그렸다”는 발문이 있어 노년의 유덕장이 젊은이에게 선물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매화도(梅花圖), 이공우(1805~1877),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조선말기 문인화가인 이공우는 매화 그림으로 유명하였고 김정희, 권돈인(1783~1859)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동 시기 역시 매화로 명성이 높았던 조희룡(趙熙龍, 1789~1866)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나, 남아 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이다. 세로로 긴 화면을 가득 채운 6폭의 대형 매화 그림으로 다양한 구도에 갖가지 형태의 매화를 묘사하였다. 굵지 않은 가지들이 자유롭게 뻗어 있거나 끝이 부러진 줄기를 다양한 구도로 여러 폭에 나누어 그리는 방식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매화도의 형식 중 하나이다. 각 폭에 적은 제시(題詩) 역시 전통적인 매화의 운치를 노래한 것이다. 묵매도(墨梅圖), 전 어몽룡(漁夢龍, 1566~1617), 조선 17세기말~18세기초, 비단에 먹, 간략하면서도 이른봄 꽃을 피우는 매화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꼿꼿이 솟아오른 가는 가지와 연륜이 오래된 굵고 곧은 가지는 매화의 선비다운 기품을 잘 드러낸다. 또한 가느다란 가지에 듬성듬성 핀 매화는 왼쪽 위에 둥그렇게 떠 있는 달빛과 어우러져 고아한 멋을 더한다. 인장이나 서명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화풍상 어몽룡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어몽룡은 호가 설곡, 설천 등으로, 진천현감을 지낸 선비화가이다. 어몽룡의 매화는 이정의 대나무, 황집중(黃執中, 1533~?)의 포도 그림과 함께 조선중기의 삼절로 꼽힌다. 묵매도(墨梅圖), 홍수주(洪受疇, 1642~1704), 조선 1704, 비단에 먹 매화와 대나무, 포도그림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홍수주의 묵매도로, 밑 둥 부분은 부러진 채 줄기가 ‘S’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절매(折梅)이다. 줄기 끝은 거의 부러져 날카로운 부분을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가지에는 새로 난 또는 다른 가지가 위를 향해 곧게 올라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저매는 당시에 즐겨 그려졌던 주제로, 홍수주의 작품에서는 줄기가 더욱 거칠고 위로 뻗은 가는 줄기 역시 날카롭게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름을 지운 흔적이 있지만 “갑신년(1704) 가을 친구를 위해 호정에서 그렸다”는 관지가 남아 있다. 꽃그림 이야기 꽃그림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시대 꽃그림은 보통 새나 곤충, 동물들과 함께 그려지는데, 그 화풍은 수묵을 주로 써서 간결하고 대담하게 그린 것과 다양한 채색을 써서 사실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린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꽃을 많이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는 조선초기의 신사임당, 후기의 심사정(1707~1769년), 김홍도, 말기의 신명연(1809~1886년), 장승업(1843~1897년) 등을 들 수 있다. 모란, 국화, 원추리, 백합, 수선화, 수국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 화가의 붓으로 화폭에 옮겨졌다. 그중에서도 채색으로 그린 꽃그림은 다른 분야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각적인 참신함과 구성력을 보여준다. 신명연이 그린 수선화, 신명연, 19세기, 비단에 채색. 수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꽃이었던 것 같다. 이그림은 꽂가지만을 가까이에서 확대하여 산뜻하게 채색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준다. 수선화를 그린 이 그림은 오른쪽의 남계우의 수선화와 구도나 배치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남계우가 그린 수선화, 19세기, 비단에 채색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소년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껴안으려다가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연못에서는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었는데, 사람들은 그 꽃을 ‘나르키소서(Narcissus: 수선화)’라고 발렀다. 나르시즘이라는 말은 자기애라는 뜻으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수선화의 꽃말은 고결, 자존심이다. 봄이 오기 전 추운 겨울날씨에도 수려한 자태를 뽐낸다 해서 설중화(雪中花, 눈속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꽃이다. 고결하고 고고한 모습에 추사 김정희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그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겨울의 추위와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향기롭게 피어나는 수선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울분과 외로움을 달랬다고 전한다. 은쟁반에 금잔을 하나 올려놓은 형상이라고 해서 ‘금잔은대’라고도 한다. 신명연, 남계우 등 19세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수선화 그림을 많이 남기고 있다. 노귤도(盧橘圖), 정충엽(鄭忠燁, 1724~1800 이후), 1756년, 종이에 엷은 색. 18세기 작품으로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화려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정충엽은 조선후기의 중인 화가로 호를 이호 또는 이곡이라고 썼다. 강세황과 교유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산수화와 화조화로 이루어진 화첩 가운데 한면으로, 화첩 마지막 면에 ‘병자년 여름에 그리다’라고 쓰여 있어 1756년 즈음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한다. 괴목(槐木)으로 만든 과반(果盤)에 놓인 노귤을 그리고 화면 윗부분에 시를 써 넣었다. 윤곽선 없이 그린 노란색 귤과 싱그런 초록 이파리, 과반에 엷게 베푼 분홍색 선염이 산뜻한 색채감각을 보여준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정충엽인’과 그의 자’일장(日章)’을 새긴 도장을 찍었다. 서화첩, 신위, 1837년, 종이에 먹 또는 엷은 색 신위는 조선말기를 대표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으로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다. 특히 대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강세황(1713~1791)에게 죽석 그림을 배웠고, 김정희와는 서로의 예술관에 깊이 공감하여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 화첩은 신위가 과거에 합격한 남병철의 부탁으로 1837년에 제작한 것이다. 모두 12면으로 낙지론(樂志論, 중국 후한 말의 유학자 중장통(仲長統, 179~219)의 글)과 『사기』중 「노자열전(老子列傳)」이 쓰여져 있고, 를 임모하여 그린 매, 죽, 난, 석과 산수화가 포함되어 있다. 신위는 강세황의 영향으로 를 임모하면서 자신의 묵죽화풍을 완성해 갔는데, 이 화첩은 이를 잘 보여준다.  꽃가지, 화훼도(花卉圖), 신명연(申命衍, 1809~1886),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 – 난초, 원추리, 옥잠화, 등꽃, 수국, 연꽃,  금낭화, 양귀비, 황촉규, 연꽃, 백합과 패랭이꽃 모란 신명연은 사대부 화가로, 조선 말기 서화가 신위의 아들이다. 그의 수묵 산수와 대나무 그림은 전통성이 강하다. 이에 비해 장미, 해당화, 수국, 난초, 연꽃 등 갖가지 꽃을 그린 이 그림은 19세기에 새롭게 퍼져 나간 색채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보여준다. 꽃송이를 가까이에서 크게 잡아 대담하게 표현한 구도가 참신하다.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색조는 근대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모란과 능소화, 김수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김수철은 조선 말기 화원화가로 자는 사암 호는 북산이다. 산수화와 꽃그림을 잘 그렸다. 추사 김정희가 김수철의 글미에 대해 “배치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이 막힘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간략한 구성과 별선, 수채화와 같은 밝은 채색, 고운 색의 시료 등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조선말기 이색 화풍으로 분류한다. 금박이 뿌려진 하늘색 냉금치에 들초호와 모란을 그렸다. 좁고 긴 화면에 어울리게 꽃을 빠른 필치로 그려 배치하였다. 감각적인 필치와 색채는 김수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화조.동물화 화조.동물화는 꽃과 새, 동물을 그린 그림이다. 고려 후기 이규보의 시에 나오는 “새와 짐승 그림을 보고 즐기기 위해 좌우에 두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화조.동물화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꽃처럼 아름답게, 나무처럼 싱싱하게, 바위처럼 의젓하게 그리고 그 속에서 정답게 노니는 동물들처럼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또 나쁜 일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복을 불러온다는 의미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묵만으로 그린 문인 취향의 화조.동물화가 유행하는 한편,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채색을 사용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전통도 확립되었다. 닭싸움, 투계도(鬪鷄圖), 신윤복, 1808년, 종이에 엷은 색.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신윤복이 그린 그림이다. 화려한 색감과 함께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신윤복이 두마리의 싸움닭을 소재로, 잠깐 동안의 소강기를 포착하여 그렸다. 왼쪽의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붉은 수탉은 꼿꼿한 자세로 상대에게 다가가고 있고, 반면 검은 수탉은 땅바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화면 상단의 시는 중국 송나라 시인 한유(韓愈)가 쓴 ‘투계(鬪鷄)’의 한 구절이며, 관지(款識)의 내용을 통해 신윤복이 1808년 음력11월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풍속화 뿐 아니라 동물화에도 능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양, 작가미상, 조선전기, 비단에 색 양은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통한다. 예로부터 그려진 양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면양(綿羊)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산양이나 염소였다.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얼룩무늬의 산양의 털끝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많이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양이 길상의 소재로 오래 전부터 애호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름속의 용, 석경(石敬), 조선초기 에 속한 용 그림으로, 석경의 도장이 오른쪽 상단에 있다. 한 발에 여의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으며 구름 속을 뚫고 나와 비바람과 거친 파도를 몰아치는 모습이다. 석경은 용을 잘 그린 화가로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초기 화가다. 은 그림 74점, 묵서 5점, 총 79점으로 구성된 조선후기에 하나의 화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화첩이다. 산수화, 고사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으로 화목도 다양하며, 고려말 공민왕 그림 1점을 비롯하여 조선초기부터 18세기 화가의 그림까지 시기도 폭이 넓다. 가히 명작으로 엄선된 작품들로, 조선후기 회화 감상과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꽃과 나비, 남계우, 19세기, 종이에 채색. 조선후기 나비 그림의 대가였던 남계우가 그린 그림으로 그의 나비에 대한 식견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남계우는 역대 문헌에 나오는 나비의 이름과 생태를 연구하고 실제 나비들을 채집하여 종과 특징들을 분류하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 화가다. 나비 그림을 잘 그려 ‘남호접’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 그림은 대련으로 제작된 나비 그림으로, 섬세한 꽃과 어우러지게 그렸다. 하단에는 자색모란과 백모란을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푸른색의 붓꽃을 그려 넣었다. 사항제비나비와 호랑나비를 중심으로 흰나비, 부처나비 등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섬세한 공필로 그려진 나비와 절지 형태의 꽃의 모습과 전형적인 3단 구성 등 남계우 호접도의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꽃가지, 신명연, 19세기. 이 그림은 꽃가지만 가까이서 확대하여 산뜻하게 채색함으로써 참신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 청나라 화가 추일계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물고기와 게, 어해도(魚蟹圖), 장한종(張漢宗, 1768~1815),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물고기와 게 등 수중 생물을 그린 그림을 어해도라고 한다.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장한종은 어해도를 잘 그리는 것으로 이름났다. 어려서 숭어, 잉어, 게, 자라 등을 사오면 비늘과 껍질을 관찰하여 실물과 똑같이 그렸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어해도를 보면서 물고기와 관련된 선현들의 교훈을 상기하거나 물 속의 세상처럼 여유있고 풍족한 생활이 계속되기를 염원했다. 용맹한 호랑이, 맹호도(猛虎圖), 작가 미상,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동물의 왕이며 영물인 호랑이를 그린 그림은 힘과 용맹을 상징하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의미가 있다. 소나무 또는 대나무, 까치 등과 함께 그리기도 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생략하고 화면에 꽉차게 호랑이만을 그렸다. 안으로 야무지게 말린 꼬리, 눈빛과 표정, 묵직한 발놀림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화가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가는 붓으로 꼼꼼히 그린 치밀한 묘사는 조선 후기 동물화의 특징이다. 나무위에 앉은 한 쌍의 까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조속(趙涑), 17세기, 비단에 먹 조속은 먹으로만 꽃과 새 그림을 즐겨 그렸다. 화려하게 채색한 화조화와는 달리, 이러한 그림은 문인화가가 주로 그려 자연의 조화와 흥취를 드러냈다. 특히 조속은 성글고 거친 붓질과 간소한 구도로 겉모습보다 마음 속의 뜻을 중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독특한 세모꼴의 잎이 달린 나무를 담담하게 그렸는데, 마주 보는 새들의 정겨운 모습에서 조선 중기 화조화의 특징인 시정을 느낄 수 있다. 조는새, 숙조도(宿鳥圖), 조지운(趙之耘, 1637~1691),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나무가지에 앉아 졸고 있는 새를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조진운의 자는 운지, 호튼 매창, 매곡으로 수묵화조화와 매화를 잘 그린 문인화가이다. 부친은 까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창강 조속이고, 사촌형인 조종운 역시 서화에 능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 화단의 뛰어난 문인화가 집안이었다. 매화가지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고 있는 새를 묘사하였다. 반원을 그리며 뻗어 나온 대나무와 매화나무 가지, 고요하게 졸고 있는 새, 경물을 최대한 생략하여 수묵으로만 이루어낸 화면은 간결하면서도 뛰어난 구성미를 보여준다. 새, 화조도(花鳥圖), 홍세섭(洪世燮), 19세기, 비단에 먹 홍세섭은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로 자는 현경 호는 석창이다. 명문사대부가의 출신으로 아버지 홍별희는 공조판서, 작은 할아버지 홍학연은 공조판서와 영충추부사를 역임했다. 홍세첩은 49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부승지에 올랐다. 아버지 홍별희도 그림을 잘 그려 부자가 합작을 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잘 분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까치와 매화, 물가의 오리, 길가의 백로, 갈대와 기러기, 바닷가의 가마우치 등 계절감을 나타내는 풍경과 새를 조합했다. 수면 위를 헤엄치는 오리를 그린 유압도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채색없이 먹만으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구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 먹을 흩뿌리는 기법 등의 새로운 시도로 참신한 화조화의 세계를 이루어냈다. 해돋이를 맞이하는 매, 욱해창응도(旭海蒼鷹圖), 정홍래(鄭弘來, 1720~),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매의 용맹한 습성은 일상생활에서 나쁜 것을 막아주는 벽사(僻邪)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길상을 상징하며 예로부터 그림의 소재로 널리 애호되었다.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이었던 정홍래는 매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물결 위로 솟아 오른 해를 배경으로 바위에 앉아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모든 일이 상승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위풍당당하게 해돋이를 맞이하는 매가 주변의 나쁜 것들을 물리쳐 주리라는 기원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꽃과 새, 화조도(花鳥圖), 전 채용신(蔡龍臣, 1850~1941), 20세기초, 비단에 색 병풍으로 만든 그림 10폭의 화면에 사계절에 피는 꽃과 열매 나무, 짝을 지어 노니는 새의 모습을 다채롭게 묘사한 작품이다. 첫번째 화면에 ‘석지(石芝)’와 ‘정산군수챙신인장’이라는 주문방인(朱文房印)이 있어 19세기말~20세기 초에 활동한 화가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화면에는 각각 꿩, 원앙, 공작, 제비 등과 다채로운 꽃나무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화사한 채색에 길상을 의미하는 꽃과 새들로 가득 채우는 채용신의 화도도 병풍은 여러 점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화사한 장식용 화조병풍을 애호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연화백로도(蓮花白鷺圖), 이건(李健, 1614~1662),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가을난 연못에 깃든 새들의 정경을 그린 그림이다. 금색지로 뿌려 장식한 종이에 엷은 먹으로 연잎을 그리고, 백로와 물총새를 한 쌍식 그려 넣었다. 주변에 짙은 먹으로 난엽처럼 갈댓잎을 그려 생동감을 주었다. 해원군 이건은 왕실 출신으로, 선조의 손자이며 자는 자강, 호는 규창이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영모화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림 위쪽 비단에는 훗날 1711년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쓴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꽃과 새, 동물의 상징 원앙.물고기쌍(부부해로, 부부금실), 모란(부귀영화), 팔가조(효도), 패랭이꽃(장수), 매(화재, 수재, 풍재의 삼재 예방), 연꽃(다산.청결.연과連科-과거에 연달아 합격), 고양(70세노인), 맨드라미.닭(벼슬.명성), 나비(80세노인), 오리.백로(장원급제), 갈대와 기러기(노후의 안락)    
39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나무 구멍 사이에 그려진 그림들... 댓글:  조회:2308  추천:0  2017-10-13
(흑룡강신문=하얼빈) 9월 27일 선양(瀋陽, 심양) 난후(南湖, 남호)공원, 파손된 나무 구멍 사이에 그려진 그림이 많은 시민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나무 구멍 사이에 그려진 그림은 공원에서 훼손된 나무를 복원하는 하나의 방책으로 나무의 아름다운 변화, 생동감, 시민들의 호응 등의 효과를 내고 있다. 해당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모두 친환경 재료이며 통기성이 좋아 나무 보호에도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해당 작품은 최소 3년 이상 지속된다.  ///인민망 한국어판 [출처] 심양: 훼손된 나무에 등장한 ‘그림 작품’ 시선 강탈 - 모이자 뉴스   =====================덤으로 재 복습하기...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섬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 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학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쓰기 (문광영문창6)[ 스크랩 ]     사람에게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있듯이 시(詩)의 구조(構造)에도 형식상의 구조와 내용상의 구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커피를 좋아하시지요?   저는 아침 커피로 시작하여 온종일 커피를 마시며 삽니다. 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느끼며, 바이올린 곡이나 첼로 한 곡 곁들여 틀어 놓고 커피 한두 모금 마시며 원고를 쓰거나 책을 봅니다.   커피를 마시려면 먼저 커피 잔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커피잔의 모양, 색깔에 아주 민감합니다. 집에서 마실 때에는 연한 챠콜색의 울퉁불퉁한 머그잔을 씁니다. 깡통 찌그러진 것처럼 아주 제멋대로 생긴 놈인데,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분망한 상상에 빠지도록 해줍니다. 문협 사무실에서는 프러시안 블루의 큰 커피잔을 사용합니다. 바다를 연상하며 커피를 마신답니다. 여기 커피 잔의 선택은 시의 형식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는  커피의 내용물을  조제하는 일입니다. ‘다비도프’라는 인스탄트 커피를 마실 것인가, 케냐AA 원두커피를 내려 마실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저는 프림이나 설탕을 넣어 마시지 않습니다. 우유를 섞어 넣은 라테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지요. 바로 시의 내용상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커피 맛을 내는 데는 원두의 분쇄도나 우유의 온도, 비율 등이 중요하듯, 좋은 시(詩)가 되기 위해서는 시(詩)의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쓸 때에 어떤 방식, 어떤 형태의 시들을 쓰시나요? 시 창작을 하려면 일정 방식의 틀을 놓고 이를 변형시켜 나가고 발전, 비약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초보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형태의 시 쓰기를 알아두고, 이를 응용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참, 순간의 착상, 상상력이 대단하지요?  시는 순간의 예술이란 걸 보여줍니다. 나아가 시가 꼭 길어야 될 필   요는 없는 것이지요. 짧아도 장치만  잘하면 얼마든지 형상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반부(4행)는 묘   사시로서 외면풍경의 ‘보여주기’로 이루어지지만, 후반부(3행)는 화자 내면풍경의  ‘진술’로 서로 다른 방식이   겹쳐서 이루어진 시입니다.      전 시간에는 경험시에 이어 묘사시, 사물시, 이미지시 중심의 시 쓰기를 공부했지요. 경험시는 시인이나 화자   가 시적 언술에 참여하여 특수한 인간경험의 극적인 세계와 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묘사시는 시인이   나 화자의 관념보다 대상의 구체성에 비중을 두는 유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시의 내용과 형식 가운데 형식상의 그릇, 시의 내용을 어떤 형태의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이어 설명시와 논증시라는 유형을 놓고 창작 논의를 펼쳐가려고 합니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 쓰기                                                                       1. 설명시 유형의 시 구성          1) ‘설명문’과 ‘설명시’ 의 차이   ○ ‘설명문’의 개념과 ‘설명시’ 형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설명문은 일반적 문장 형식으로, 정보(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력을 요구하는 글이라 한다면, 설명시는 내용상에서는 시적 상상이 들어가고 그 표현의 문장 형식, 곧 기술상의, 언술(utterance)상의 문맥적 형태를 말한다.   ○ ‘설명문’은 어떤 사건에 대해 발생 원인과 경과를, 어떤 기계의 구조와 원리, 성능이나 취급 방법 따위를, 사전적 개념이나 해설을, 자세히 해명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설명법(exposition)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이냐”, “어떤 뜻이냐” “어떤 성질이냐”에 대해 그 답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는 문장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설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기술 방식에는 정의법, 비교․대조법, 분류법, 분석법, 인용과 예시법이 있다.   설명의 기술방법에서 설명시와 연관되는 것이 '정의'의 형식이다. 정의는 'A(주어)는 B(서술어)이다'가 아닌가. 바로  피정의항과 정의항으로 이루어지는 바, 여기에서  피정의항이 주어가 되고, 정의항은 서술어가 되는 셈이다.                 2) 주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시의 예   ○ 맥로그린(MacLauglin)이, 말하듯이 말하는 이가 선택한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시적 관념을 서술하고자 할 때 이 방식을 쓴다. 이때 시적 설명은 ‘주어 +서술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소위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그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 이때 소재에는 특수한 것으로 ‘장소’, ‘사건’, ‘대상’, ‘인물’ 혹은 자신의 특성을 들 수 있고, 일반적인 것으로는 ‘관념’이나 ‘진리’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아래의 시는 ‘고드름’이란 소재가 채택된 시이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의 아끼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고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소리 *   결국엔 물이었다 한잔 먹지 않겠는가                                  전문(《시문학》2006년 4월호)       ○ 먼저, 시 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 1연은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 고드름은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 고드름은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 고드름은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 고드름은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         와 같이, 고드름에 대한 시인의 시적 관념, 곧 의미부여된 화자 자신의 내면적 상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드름’이 갖고 있는 속성, 성질, 모양 등에 몰입하여 ‘오기’, ‘휘초리’, ‘송곳’, ‘회한’, ‘절규’로 치환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2,3,4연부터는 현실 상황을 제시하는 부가적 묘사와 진술로서, 고드름의 지닌 물의 속성, 허무의 결구 처리를 보여준다.   ○ 그러니까, 박정원의 은 절간에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에 대해 남다른 사유를 시로 형상화한 것, ‘고드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보인다. 고드름에 대한 상상력, 고드름과 같은 하찮은 사물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존재 의미, 삶과의 비유 등 소재에 대한 다양한 시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어찌 보면 시는 삶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다. 이때 시의 힘은 의미부여의 상상력에서 온다. 곧 ‘고드름’이라는 외면풍경의 소재에 대해 ‘시안’에 의해 반응된 작가의 내면풍경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가 깊고, 통찰을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작품의 ‘상상력의 등가성’이란 자장(磁場) 속에서 의미를 탐색해 간다. 물론 이때 시인의 연이나 행간의 설정은 중요하며, 독자는 유능한 독자, 슈퍼 리더가 되어 경험을 되살려 의미를 확장해나가도록 장치해야 한다. 곧 위에서 보듯, 시인은 고드름에 대한 시적 설명에서 다 말하지 않는다. 행간의 빈자리를 독자로 하여금 읽어나가면서 ‘빈자리 메꾸기’를, 곧 의미 있게 채워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이 노련미이다.   ○ 위에서 독자들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의 고드름,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드름,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로서의 고드름,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의 고드름,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의 고드름,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에서 삶의 아우라를 읽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고드름은 물의 변신일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적은 것처럼, 절 마당 노스님이 아끼는 동백꽃잎처럼 ‘투욱’ 지고 나면 고드름은 낙숫물에 불과한 것이고, 그 거리라는 시․ 공간의 차이도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 밖에 안 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 대개 설명시에서는 소재, 곧 사물에 대한 정신의 해석적 의미로 깨달음이나 통찰,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 것들이 많다. ‘고드름’에서의 절규는 이승의 속세에 사는 우리들의 평상심이다. 타자를 향한 회초리나 송곳 같은 마음은 결국 복수의 화살로 자신에게 꽂히는 법, 문제는 우리의 삶이란 무명(無明)의 혼돈 속에서 내 탓임을 알고 물이 지닌 섭리대로 돌아가는 유연성이다. 갈증을 아는 고드름의 원천인 물, 그 낫숫물 소리가 떨어지는 수직적 삶의 깨달음이 감동을 주지 않는가.       3) 설명시 유형의 시 쓰기 방법                  (이승훈 , 시작법, 문학과 비평사, PP.70-74참조)       (1) 특수한 소재( 장소, 사건, 사물)를 시적 설명 : 유치환의   ○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 시인이나 시 속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법이다. 대체로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설명시와 논증시의 범주에 든다.   ○ 설명시는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논증시의 경우에 그러한 서술의 논리적 타당성이 드러난다. 설명시는 화자의 주장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설명시는 주어(S)+서술어(P.V)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때 주어에 해당되는 것이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한 설명시 유치환의 을 살펴보자.                     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깃발                                    깃발은   - 소리없는 아우성 (P.V1)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깃발                             깃발은  - 노스탈쟈의 손수건 (P.V2)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깃발                        깃발은   - 순정 ( P.V3)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깃발                             깃발은   - 애수 (P.V3)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깃발                           깃발은  -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P.V4)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다 아시다시피 이 시의 소재는 “깃발”이다. 언어적 형식으로는 “깃발”이 주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 “깃발”을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시의 언어적 형식이 계속 ‘주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내용이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 위의 시구조를 보면 “주어(S)는 서술어(p.v)” 형식이 반복되는 구성 양식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이며, 무엇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을 설명을 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깃발’이라는 대상을 일상적이거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 필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시를 써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다. 물론 사전에 설명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여학생은 완벽한 설명시 형태의 시를 써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                                         고유미   긴 밤 그 적막한 터널 속을 걸어와 늘어선 회색빛 빌딩 사이를 휘휘 도는 소리 없는 몸짓입니다.     하늘 위를 촉촉히 적셔놓고 창공 속에 피어 오른 꿈에 보았던 그 소녀의 미소입니다.     이내 깨어나지 않은 내 창에 내려앉은 해맑은 눈빛입니다.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가슴에 단 하얀 설레임입니다.       ○ 김소월의 , 이상의 , 는 모두 설명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어+서술어 형식은 설명 방식의 하나인 ‘정의’(definition)에 해당한다. 곧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같은 국어사전식의 정의에서, 피정의항은 '인간', 정의항은 '이성적 동물'로 나눠지는 바, 이 때 피정의항이 주어에 해당하고 정의항이 술어에 해당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유체계에서 ‘A는 B다’ 식으로 시인들이 매우 즐겨 쓰는 방식이어서 설명시적 언술은 확장과 응용, 변이의 형태로 다양하게 도출된다.   ○ 다음의 짧은 시도 설명시 형태가 확장, 발동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2) 일반적 관념이나 진리의 시적 설명 : 김현승의     ○ 일반적인 관념이나 진리를 소재로 하는 시를 보기로 하자.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견고한 고독은   - 흰 얼굴 (P.V1)     그늘에 빗지지 않고 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 또 하나의 손발                                                                견고한 고독은 -단하나의 손발 (P.V2)     거대한 신들의 정의 앞엔 이 가는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제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견고한  고독은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                                                                                             견고한 고독은  - 피와 살 (P.V3)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못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견고한 고독은 - 굳은 열매 (P.V4)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 은-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P.V5)                                      ○ 소재는 ‘견고한 고독’이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고독의 견고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어는 ‘견고한 고독’이며 주어에 대한 서술은 3연을 빼고 각 연을 형성한다. 서술어(p.v)를 형성하는 각 연의 중심낱말은 1연: 흰 얼굴. 2연: 단 하나의 손발. 4연: 피와 살. 5연: 굳은 열매. 6연 : 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등이다.   ○ 주어 +서술어 형식의 진술은 곧 'A는 B다‘의 형식이기에 하나의 비유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처럼,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의미론적 이동‘(sementic movement)을 하는 셈이다.    ○ 주어 +서술어의 결합방식에서 문득 피천득의 을 들 수 있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이 하나의 수필이란 ‘정의놀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3) 주어 + 서술어 시 형식에서의 구상과 추상의 문제     ○ 시의 제목(주어, 소재)이 추상일 때 본분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내용이 추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한 마디로 여기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 또 본분에서도 추상 일변도라든가, 구상 일변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곧 시(詩)의 내용상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로는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들 수 있는데, 이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시에서 어떻게 배합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시의 내용 구조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① 구상(具象) + 추상(抽象)           ☞ 산은 꿈이다. ② 추상(抽象) + 구상(具象)           ☞ 시(詩)는 꽃이다.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 물은 물이다.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 마음은 무(無)다.     ○ 이러한 시의 내용상의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시의 내용 전체에 걸쳐 사용되지만, 부분적으로는 시의 제목과 내용, 한 행, 한 연의 내부에서도 서로가 긴밀하게 작용하며 나타난다.   대개 환기력을 위하여 시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①과 ②의 내용 구조처럼 추상은 구상과 어울리고, 구상은 추상과 어울리게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니까 추상어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이나,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의 형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에서 다룬 시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구상어 + 추상어)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           (구상어 + 추상어)       견고한 고독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추상어 + 구상어)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추상어 + 구상어)         2. 논증시 유형의 시 구성       1) ‘논증’과 ‘논증시’ 의 차이   ○ ‘논증’(論證, argument)은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설득시키고 동조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명제(命題, proposition) 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판단을 서술한 문장을 뜻한다. 주어진 명제는 하나의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공감을 얻으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필요하게 된다. ○ 논증시에서의 화자는 전지적 시점이거나 보고자로서의 관찰자 시점이 된다.   ○ 명제의 유형으로는 사실명제, 가치명제, 당위명제가 있다. 사실명제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다’처럼 어떤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 가치명제는 ‘진달래는 아름답다’처럼 제도, 사물, 사상에 대해 판단한 것, 당위명제는 ‘세월호 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처럼 정책이나 어떤 시사적 대상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크게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유추적 방법이 있다.   ○ 따라서 논증은 명제로써 자신의 주장(사상, 판단)이나 관념을 드러내는 서술로, 그 서술상의 인과율과 같은 논리적 뒷받침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 논증이란 그런 점에서 설명과는 다른 서술양식이다. 설명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논증시에서는 서술방법이 어느 정도 논리적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니까 논증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인과율에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과율로 나타난다. 시적 인과율이란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면서 시적 공간을 빚는다. 형식의 측면에서는 원인→결과 혹은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 여기에서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그러한 논리를 말한다.     2) 사실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시적 인과율에 따라 구성된 논증시로 서정주의 를 보자.   연               원인                           결과   1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2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4         간 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       국화가 피었다           에겐 잠이 오지 않았다     ○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실명제이다. 원인이 되는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고, 천둥이 쳤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게는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에 국화가 피었다는 명제이다. 국화가 피었다는 상상적 사실에 대한 시인의 판단에 시 속에서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가치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가치명제를 노래하면서 유추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증시로 김춘수의 을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명명이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명명이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1,2연을 미루어 판단하는 유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꽃 : 이름 = 나 : 이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 : 이름 = 우리 : 이름       ○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가치 판단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국화가 핀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이 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치명제로 노래된다. 이 시의 논리에 따르면 ‘이름 부르는 것’, 곧 명명행위와 관계된다. 이 시가 암시하는 가치판단은 ‘언어에 대해 명명될 때 사물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꽃’은 이 시에서 사물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는 사물 존재라는 것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철학시로 보아야 깊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 이렇듯 논증시의 내용은 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드러나는데, 이때 명제는 일상적 합리적 차원을 벗어난 상상의 내용으로 일상적으로 수용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어 내는 시적 의미를 지닌다.       3)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의 논리에 의한 시   ○ 초등교과서의 시 이나 박용재의 도 하나의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에 의한 논증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박용재   사랑하지 않으면 산도 계곡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싱그런 가슴도 팽팽한 엉덩이도 애인들의 이빨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던 자동응답기도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죽음의 예감도 보이지 않는다       3박 4일간 시골에 간다던 사람 그렇게 지구의 하오를 산책하러 갔던 사람     그대의 자동응답기는 앵무새처럼 3박 4일만을 되풀이하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목소리도 쓴 웃음도 지리산의 몸도 눈물도 너의 우연한 죽음도 보이지 않는다.    
393    시작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영원한 시의 지평을 열어야... 댓글:  조회:1768  추천:0  2017-10-13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6) : 밀레 Jean F. Millet (1814~1875)   토속적(土俗的)인 방언(方言)으로 영원한 지평을           씨 뿌리는 사람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 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러나고 있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 주문받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아가씨   1845년경 밀레는 목가적인 연인들을 테마로 한 몇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러한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림이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과 반쯤 뜬눈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정하고도 엄격한 수법을 엿 볼 수 없고, 터치가 즉흥적이면서 다소 거칠게 나타나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서도 그렇지만, 밀레의 눈은 호색적(好色的)이지 않다. 그가 나중에 로코코 화가들을 특히 호색적인 면에서 비판하고 있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이 초상   첫 번째 부인 포리느가 죽었을 때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로 포개어진 두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엄격한 데생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海軍士官의 초상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중의 하나,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년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이 때는 밀레의 명성도 점차 상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이 부호나 미술 애호가, 해군 사관, 선장들에게서 많은 주문이 쇄도해 왔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과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양팔을 낀 사관의 표정은 밀레의 더욱 자신 있는 수법의 원숙을 통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인물과 배경의 부드러운 조화라든지, 검은 옷 빛깔과 황금빛의 장식과의 격조있는 대비 등은 인물의 성격과 함께 화면의 짜임새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는 듯 보인다.           루크르트와 부인의 초상   주지하다시피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 한촌(寒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년(晩年)에 명성을 얻을 때 까지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청년 시절은 빈한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포리느오노가 죽 은 것도 병약(病弱)한 때문이었다.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들에서 알 수 없는 우수가 화면을 덮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이 초상은 아내 포리느의 언니, 아니면 동생을 그린 것인데, 초기 밀레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촉촉한 눈을 보이고 있다. 단정한 자세와 화면에 들어 차는 구도의 밀도는 초기 밀레의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일면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채석장   농민화와는 다소 다른 소재의 그림이지만,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티브의 애착은 밀레의 작품 밑바닥을 관류하고 있다. 후기의 농민화에서 보는 정태적(靜態的) 묘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동적(動的)이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돌 틈바구니에 꽂은 지렛대에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의,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동작은 화면에 사선(斜線)으로 달리는 시각적 이동으로 인해 단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기 밀레는 특히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인물의 데생에 관심을 기울 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활기와 박진감을 주고 있다.           귀가중인 양떼   초기에서 점차 농민화로 전향해 가던 중간쯤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그런만큼 이 작품엔 누드화를 주로 다루었던 시기의 제반요소와 농민화로서의 소재적 관심이 함께하고 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상의를 벗은 여인의 모습은 누드화의 연장 선상에서, 그리고 오른편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양떼는 농민화로서의 연결을 시상해 주고 있다. 아이를 업은 여인과 어깨에 농구(農具)를 진 남정네와 양떼를 몰고 있는 앞 쪽의 아이가 가운데 공간으로 집중되면서, 한 가족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의 밀도를 엿보여 주고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양떼들이 화면 가운데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농민화가 밀레의 세계가 확립되어진다.         水浴   밀레는 농민 화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찾기 이전 초상화와 신화화(神話畵)를 그렸고,또 일련의 노동자들의 일 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은 그 소재가 다소 예외 적이긴 하나,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룬 그림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체의 억센 형체감을 살리려고 한 의도가 노동자들의 그림들과 일치된다. 작품은 남녀가 멱을 감는 정경에서 취재된 것인데, 물에서 올라오는 여인을 남자가 안아서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두 인체가 마치 격투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억센 동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밀레가 미켈란젤로에게 매혹되었다고 하는 설이 이 그림을 통해 뒷받침된다.         양치기와 양떼 제작년대 미상 캔버스 유채 45X55Cm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어린 양치기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농가에 들어가 생애를 농민 화가로서 보냈다. 이 깊숙한 농민 생활의 체험은 그의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모티브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몸으로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그림 속에 배여 있다. 어린양치기의 모습과 양떼의 조화는 순진한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밀레의 화인(畵因)을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과 지팡이에 기댄 어린 양치기의 땅과의 밀착된 관계가 돋보인다.         키질하는 사람   1848년 이후, 밀레는 지금까지의 초상화와 신화적 테마의 범주를 벗어나 농부나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묘사하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이른바 농민화가(農民畵家)로서의 밀레의 출범을 알리는 전환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기에 제작된,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최초의 농민화 이기도 하다. 그의 태반의 농민화가 그렇듯이 이 작품의 소재도 너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고티에는 이 소재의 단순함을 칭찬해 마지 않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농민과 농촌 생활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두운 곳간에서 키를 까불고 있는 남자의 프로필이 일하는 이의 감동을 잘 포착하고 있다.         나무켜기 1850-52년 캔버스 유채 57.2X81.3Cm 런던 빅토리아 엔드 알버트 미술관 소장           나뭇가지   벌채한 나무를 두 사람이 운반하고 있는 이 그림은 인물에 비해 주변의 자연이 크게 설정되어 있는 특성을 엿볼 수 있다.말하자면 자연 속의 극히 일부로서 인물의 모습이 떠오르게 배치하였다. 나무를 끌어내리고 있는 두 시골 여인네의 마주 본 자세와 기다란 나무로 연결된 구성적 배려가 기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밀레의 태반의 농민화 들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노동의 실감을 전해 주고 있다. 더욱이 텁텁하고 난폭한 터치와 명암의 대비를 통한 무대적인 화면의 구성은 농민들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출해 주고 있음을 말한다.         나뭇군   과 비슷한 구도의, 나무를 패는 모습을 붙잡은 작품이다. 산 속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화면 가운데 나뭇군이 배치된다. 나뭇군의 앞과 뒤쪽 주변에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산 속에서 만난 평범한 나뭇군의 생활의 한 단면을 붙잡은 것으로, 쿠르베를 연상시키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는 리얼리스트의 태도가 역력하다. 나뭇군과 그 배경과의 관계, 원경의 숲과 앞 쪽의 정경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명암의 강한 대비가 이 단순한 정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수평과 수직의 구성적 배려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밀레의 독특한 시각이 있다.         건초를 묶는 사람들   밀레가 바르비존으로 오면서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으로, 점차 농민화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 밝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 건초를 묶고 있는 두 남자와 왼편에 건초를 긁어 모으는 여인의 모습은 일하는 즐거움과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명암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요소 역시 자연과 인간의 대비적이면서도 조화 있는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 농민화의 특성에 더욱 걸맞는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물통의 물을 옮기는 여인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노동하는 남자들은 한결 같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농가의 여성들은 조용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도 그 동작은 크지 않고 여성 특유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는 여인도 그 동작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동작이나 표정이 다소곳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여성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붓고 있는, 약간 구부린 여인이 정직하게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그 배경으로 농가의 뒤뜰이 보여 주는 정적이 오히려 정답기까지 하다. 저쪽 문 쪽으로 뒤뚱거리며 가고 있는 집오리의 모습도 농가의 한가로움을 더욱 실감시켜 준다.         누워 있는 누드   농민 화가로서의 뚜렷한 방향을 잡기까지 밀레는 한때 누드 그림도 그린 적이 있다. 초상화에서 농민화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커튼을 열어젖힌 안쪽 침대에 등을 돌리고 있는 나체의 여인 모습이 보인다. 침대의 흰 커버와 흰 이불 속에 드러난 알몸의 여인은, 그러나 그 정황에 비해 짙은 관능성(官能性)은 찾을 수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 중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모델로서의 누드가 갖는 흥미는 그렇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눈이 탐욕스럽지 않다 고나 할까. 그러면서 초기의 초상에 비해 보면, 농민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기법이 역력하다.         어머니와 아들   밀레가 옮겨가 산 바르비존은 가난한 한촌이었다. 밀레도 이 마을의 가난한 농부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아마도 밀레의 농민화가 너무 나도 비참하게 보인다는 평도 어쩌면 이 가난한 마을의 정경을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밀레는 두 번째 아내 카트리느와의 사이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내 카트리느는 아내로서 뿐 아니라 어머니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밀레는 갸륵한 어머니로서의 카트리느와 그 아이들을 모델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다. 견고한 돌문 사이로 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드러나고 있다. 두 아이의 천진한 동작과 어머니의 보살핌이 밀레의 눈을 통해 영원화되고 있다.           만종(晩鐘)   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하나. 밭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 종이 울리는 가운데 부부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은, 단순히 노동에서 오는 기쁨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과 기쁨을 전해주고 있어 쉽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먼 지평선에 황혼이 물들어 가고, 이 빛을 받은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작품은 처음 1천프랑에 국외로 팔려 나갔으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프랑스로 팔려 왔을 때는 그 8백 배가되는 80만 프랑으로 올랐다는데도 이 그림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906년에 루브르에 기증되었다.         소와 농부   , , 등에서 불 수 있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구도이다. 화면 3분의 2에 해당되는 대지와 3분의 1에 해당되는 하늘 부분의 안정된 구도에서 인간과 대지와의 밀착된 관계를 엿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나 와 같이 황혼녘의 들 풍경을 붙잡은 것이다. 역광(逆光)을 받은 소와 여인의 모습이 더욱 견고한 양감(量感)을 보여 주고 있다. 에서와 같이 가난한 농부의 모습이 역력하다. 1859년 살롱에 출품하여 찬사를 받았으나,한편으로 이 해 살롱 평을 쓴 보들레르는 밀레가 그리는 농민은 너무도 비참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루의 끝   이 그림은 원래 이라고 이름 붙은 4부작 가운데 하나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윗도리를 입고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예의 수평구도에다 대지에 우뚝 선 인물의 설정이 인간과 대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황혼이 깃들고 서서히 저녁의 어스름이 덮인 대지를 걸어 가고 있는 하루 일을 끝낸 농부의 표정은 실루엣의 견고한 양감(量感)을 통해 대지에 굳게 뿌리 박고 있는 느낌을 준다. 밀레는 점차 초상화는 거의 그리지 않고, 단지 일하는 농민들의 순간의 정경을 즐겨 다루었는데,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전체에, 또 어떤 주제의 액션에 어울리는 가운데서 빛나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도 모티브의 기호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달밤의 목장   달밤에 양떼가 들어오는 목장의 장면이다. 달은 먼 지평선에 떠오르고 그 은은한 빛은 대지로 번져가는데, 목장으로 들어오는 양떼와 양 몰잇군의 검은 실루엣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밤의 야외 정경은 다소 특별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밀레는 이같은 모티브로 다룬 두 개의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1856년의 것이고, 또 하나는 1861년작인 이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전작은 인물이나 동물이 하나하나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태반의 작품에서와 같은 견고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의 이 작품은 달밤의 은은한 분위기가 화면 전체를 덮고 있어 더욱 시적(詩的)인 느낌을 주고 있다.         풀을 태우는 여인   쟁기를 들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대지 위에 솟아오른 한 그루 수목을 연상시킨다. 이 너무도 단순한 인물의 자세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지표(地表)로서의 기념비같이도 생각된다. 수평의 대지 위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강인한 포즈는 밀레의 노동하는 여인들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예외적이다. 그녀의 부동의 자세는 대지에 대한 무한한 친근성과 신뢰에 가득 차 있어, 어떤 노동하는 자세보다도 더욱 일 하는 이의 숭고함을 갖게 한다. 고호는 밀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 초기 작품에서는 밀레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많다. 인간을 수목과 같이 다룬 예도 그 하나이다.           낮잠   일련의 농민화 가운데 하나지만, 이 작품은 여느 그림과는 달리 대범한 모티브 선택이면서도 다소 특이한 구도의 대담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일을 마치고 낮잠을 즐기는 농부의 부부를 약간 아래쪽에서 비스듬한 구도로 붙잡고 있다. 발 쪽에서 비스듬히 상체가 보이는 인물의 포착은 어떤 포즈보다도 까다로운 것인데, 밀레는 이 평범한 한순간을 포즈의 특이한 설정을 통해 흥미 깊게 포착하고 있다. 남자의 상체에 기대어 자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 있는 정겨운 모습은 농가의 평화로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파스텔 특유의 경쾌한 데생 처리가 순간의 포착에 더욱 어울리는 것을 엿보여 준다.           거위를 지키는 소녀   역시 농가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한 작품. 앞 쪽에 개울이 있고, 이 개울로 통하는 길이 화면 중심으로 나 있다. 거위 떼들이 개울로 몰려들고 있으며 오른쪽 언덕빼기엔 한 소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화면은 밀레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위치에 지평선을 설정하고, 아래쪽에 대상물들을 배치하였다. 밀레는 거위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여러 장 그렸는데, 파스텔로 속사(速寫)한 것도 있다. 그는 이 파스텔 그림들을 그날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 팔았다. 이 작품은 1867년 살롱에 출품된 것으로 점차 무르익어가는 시골 생활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놈, 물에 떠 노는 놈, 물가에서 쉬고 있는 놈, 소리를 지르면서 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놈, 각양의 표정이 흥미롭게 포착되고 있다.           돼지를 잡는 사람들   농가의 일기와 같은 장면의 기록이다. 돼지를 잡기 위해 두 사람의 남정네가 입에 끈을 묶어 잡아당기고 있고, 한 남정네가 뒤에서 돼지를 떠다밀고 있다.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돼지를 향해 먹이를 쏟고 있는 여인네, 그리고 저쪽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돼지를 향해 집중되고 있는 시선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또 하나의 눈, 화가의 눈이 합쳐져 화면의 중심이 강해지고 있다. 밀레는 이 작품을 1867년에 시작, 완성까지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 데 그만큼 힘을 쏟은 작품임을 시사한다. 미국인 화가 빌라이트가 그의 처와 같이 바르비존을 방문, 찬사를 아끼지 않자, 밀레는 즉석에서, '부인 이것은 하나의 드라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극적인 순간임이 분명하다.         봄   밀레는 사계의 시리즈를 몇 장 그린 바 있다. 이 작품도 사계 중 봄의 풍경이다. 알사스의 실업가 프레드릭 알트망으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것이다. 농가의 사계는 더욱 자연의 풍부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만년에 갈수록 자연이 갖는 하나의 서사시로서 엮고 있다. 아마도 화가로서나 인생으로서의 완숙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수평의 구도적 맥락을 보여 주면서 신비한 기운이 한층 짙게 깔려 있다. 과수들이 선 사이로 난 길 저쪽엔 목책이 수평으로 가로 지르고, 그 뒤쪽으론 수목이 울창하다. 이제 막 비가 개이는 듯 한쪽 하늘엔 무지개가 반원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 있다.           세탁하는 농부   어두운 실내에서 빨래통에 물을 붓고 있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붙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조로와서 모티브로서도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게 보이는 데도, 밀레는 이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고 있다. 전체가 단순하면서도 명암에 의한 대상의 견고한 형태와 볼륨이 모뉴멘탈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같은 조각적 조형은 고전주의가 즐겨 사용한 대상의 파악이나, 밀레는 고전주의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의 일하는 모습에서 숭고한 어떤 것을 각인(刻印)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시류적(時流的)인 고전주의와는 그 발상에서부터 궤(軌)를 달리 한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작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그리스의 전원 시적(田 園時的)인 소설 '다프니스와클로에'에서 취재된 그림 으로, 코르마르의 은행가 토마의 의뢰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다. 사계(四季)를 나타낸 3점(봄, 가을, 겨울)의 타블로와 1점(여름)의 친정화 가운데 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농민화가로서의 밀레에게는 다소 특이한 신화적 주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초기파리 시대의 신화적 소재의 그림에서는 엿볼 수 없는 인물이나 배경이 고전적인 완벽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밀레는 이 작품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후에 몇 장의 소품으로 남기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색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레빌의 교회   밀레는 노르망디 세르브르에 가까운 그뤼시에서 출발하였다. 그레빌의 교구(敎區)이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는 고향 마을의 풍경들이 몇 점 있는데, 가령 니, 등이 그것이며, 이 작품도 이 속에 포함된다. 그의 부친은 교회의 합창 지휘자였으므로 이 교회는 밀레에게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일 것이다. 따스한 양광(陽光)을 받고 서 있는 교회당의 조용한 풍경은 그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그런 향수가 감돌고 있다. 수평의 대지 위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교회와 맑은 배경의 하늘, 거기엔 끝없는 평화가 잠겨 있을 것이다.           자, 입을 벌려요   이 작품의 원제는 쪼아 먹다 [bwcquter]에서 나온 명사 'La becquee'이다.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은 듯, 그러한 정경을 인간 세계로 가져 왔다. 마치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주둥이로 먹이를 먹여 주듯이, 어머니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있다. 자매인 세 어린이가 나란히 앉아 있고 어머니는 막 가운데 막내인 듯한 어린애에게 숟가락을 건네고 있다. 왼쪽 아이는 곧 자기 차례가 올 것을 대기하고 있는 자세이고, 오른쪽 아이는 언니답게 '자, 먹어.'하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애(情愛)가 실감있게 묘출되고 있다. 밀레 자신의 가족이 모델이었을 것이다.         우유를 휘젓는 여인   1847년경부터 다루어온 소재인데, 이 파스텔 화는 70 년에 제작된 것이다. 농가의 생활 단면을 아무런 꾸밈 없이 극히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붙잡고 있다. 이런 그림은 화가가 방안에 들어와 모델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럼 없는 시각을 느끼게 되는데,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뛰어난 점도 이런 소박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화면에 있어서 별다른 구도적 배려도 찾을 수 없다. 화면 가운데 큰 통을 앞에 두고 우유를 젓고 있는 시골 여인의 약간 거친 표정이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야성미(野性美)로 대치된다. 우유를 휘젓고 있는 막대기는 이상하게도 나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쟁기와 연결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마거리트 꽃송이   밀레 만년의 특이한 작품이다. 이 무렵 밀레는 병상에 있으면서 잠깐 본격적인 유화작업을 쉬고 가벼운 스케치나 파스텔 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아마 병상에 누워 바라보는 창 쪽 어디쯤인가 있는 정경을 포착했을 것이다. 두꺼운 나무 창틀이 화면을 수직과 수평으로 육중하게 분절(分節)해 주고 있고, 화면 중심에는 화병이 가득히 들어차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소녀의 표정이 어두운 배경에서 이상한 요기로움을 풍겨 주고 있다. 소녀의 앞에 바느질 도구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잠시 바느질을 쉬고 있는 순간인 듯하다. 경쾌한 파스텔의 무드가 효과적이다.      
392    시작도 형(形)과 색(色)의 교향(交響)의 조합을 실현해야... 댓글:  조회:1881  추천:0  2017-10-12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5) : 르노와르 Pierre A Renoir (1841~1919)   감각적(感覺的)인 즐거움의 경지(境地)         모델의 초상   르노와르는 인상파 시대에 있어서도 반드시 인상파적인 기교에만 얽매이지 않았었다. 물론 그 역시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빛의 효과에 대해서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는 다만 빛이 쏟아지는 자연 속에서 자연만을 포착하려< 들지는 않았다. 빛이 얼마나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또는 인물의 의상을 어떻게 하면 더욱 돋보이게 하는가 등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햇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는 인물을 테마로 할 때, 무엇보다도< 빛을 이용하여 색조를 한층 다양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점이 일반 인상파 화가와 구별되는 르노와르 예술의 특징이다. 이 작품은 인상파전 직후의 것으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피아노 치는 부인 DAME AU PIANO 1875년 캔버스 유채 93X73.5Cm 시카고 미술 연구소 소장           라꼬 양의 초상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지극히 사실적인 소녀상이다. 당시의 평론가 말마따나 [더 이상 오를래야 더 오를 데가 없을 만큼 고도의 회화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르노와르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화폭 구석구석에서 번득인다. 1863년은 르노와르가 로 살롱에 입선한 해다. 이 성공에 힘입어 초상화 주문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초기이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껏 그리고 꼼꼼히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르노와르는 그 성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치 에나멜과도 같은 염색(艶色)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전아(典雅)한 색조가 억제된 감성을 느끼게도 한다. 아카데믹한 작고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엿보이는 초기작이다.         모네 부인상   인상파의 화우(畵友) 모네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인상파의 제1회 전시회가 열렸던 해로서, 젊은 르노와르가 용솟음치는 희망을 품고 이 새로운 그룹에 가입하여, 그 나름의 밝고 맑은 색조를 발전시켜 나가려고 했던 시대의 회화이다. 밝고 화사한 모네 부인의 의상과 그 배경이 되고 있는 큰 의자의 꽃무늬 모양이 하나로 어울려 아름다운 색조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이 노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인물에 있다기보다는 이처럼 밝고 아름다운 빛깔의 휘황한 무늬를 회화적 효과로 여물게 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부인상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인을 중심으로 한 호사스런 색채의 영역을 조성(造成)하는 데에 그 역점을 두고 있어 보인다.         모네의 초상   아르쟝뚜유에서 조그마한 뜨락이 있는 집을 전제 내어, 그림에 골몰하고 있을 무렵의 화우 끌로드 모네가 풍경화 제작에 열중하던 손을 멈추고 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린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예술 창작에 심취된 화가의 진지한 모습을 유연한 필촉과 따뜻한 색감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제2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모네와의 우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상주의가 가장 순수하게 추구했던 시기의 화가의 한 기록으로서 퍽 값진 그림이다. 모네는 바로 이 그림 속의 팔레트와 붓으로 등이 지방이 풍물을 즐겨 그려 그 나름의 빛과 색채의 향연을 베풀었다. 여인 초상이 대부분인 르노와르 로서는 특이한 작품이다.         디아느   르노와르의 처녀작 가운데 일품(逸品)이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 그린 작품으로 화가로서의 첫발을 기념하는, 이를테면 [기념비적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사냥의 여신(女神) 알테미스, 즉 디아느가 금방 사슴 한 마리를 활로 맞춘 다음, 바위 위에 걸터앉아 노획물을 대견스레 굽어 보고 있다. 이 여신은 별로 신(神)답지도 않게 그려져 있다. 오히려 관능적인 풍만한 젊은 여자, 즉 요녀 같은 인상마저 준다. 이처럼 여체에 충만한 양감(量感)은 선배인 쿠르베의 영향 탓이라고 보여지며, 배경의 나무나 하늘의 느낌은 코로의 자연 묘사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선배들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도 독자적인 기법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浴女와 개   르노와르의 그 숱한 누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윤곽이 뚜렷하고 선명한 이 회화는, 고혹적인 색감을 배경 숲과의 대비에 의해 발랄하고도 풍만하며 또한 생동감이 넘치는 나부의 감각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S. 레이멕은 이 나부의 포즈가 고대 그리이스의 비너스 조각상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고전적인 분위기를 즐기던 살롱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서 이 그림을 제작한 것 같다. 대담한 필촉(筆觸)이 빚어낸 이 아름다운 여인상은 쿠르베의 대담함과 코로의 정묘(精妙)함을 버무린 듯한 느낌이다. 밝은 외광(外光)으로 노출된 나부의 요염한 살갗이 개와 대조되면서 유난히도 고혹(蠱惑)을 느끼게 한다.           양산을 든 리즈   르노와르가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의 작품으로서, 이 해는 인상파 그룹이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당시의 여느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들라크로아, 쿠르베 등의 영향을 두드러지게 느끼게 하는, 이른바 르노와르가 화가로서의 발전의 출발점을 보이는 작품이다. 호외(戶外)의 볕살 속에 인물을 세워 놓고 그리는 이와 같은 그림은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수법이다. 같은 해에 모네는 그의 연인(戀人) 까게유를 모델로 해서 을 그렸는데, 이에 뒤질세라 르노와르도 리즈를 샤이 안 삐엘의 여름 숲으로 데리고 나와 이 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그녀의 흰옷에 햇빛을 담뿍 싣고 있으며, 한 손에든 양산 색채가 약간 어두운 배경 위에 부조(浮彫)된 품이라든가, 모델의 자연스런 일상적인 포즈 등이 퍽 인상적이다.         부채를 든 소녀   예쁜 소녀를 전경(前景)으로 놓고 상반신을 그린 이 작품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한 귀여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유화의 윗부분은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여 눈부시다. 르노와르는 소녀와 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구도(構圖)하고 있다. 소녀나 꽃이 지니는 속성(屬性), 즉 아름답고 밝은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나름의 화사한 색감을 십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화재(畵材)가 아닐 수 없다. 딴은 이 두 소재란 르노와르를 지탱해 주는 주요한 것인데, 후기에는 이 두 주제가 제각기 독립하여 르노와르 예술로서 성숙해 갔다. 소녀와 꽃을 잇는 곳에 그려진 부채는 구도상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소녀의 둥근 얼굴과 둥근 부채가 짝지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독서하는 아가씨   인상파 시대의 르노와르 작품에는 자연의 묘사보다는 인물, 특히 여인을 주제로 한 명작들이 많다. 이 그림도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젊은 시절의 르노와르의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여느 인상파 화가들은 밝은 햇빛 속에 펼쳐진 대자연을 즐겨 테마로 삼아, 밝은 색조를 강조하면서 자연의 빛깔을 추구해 나갔는데, 그에 비해 르노와르는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빛의 효과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 그 나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에서도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역광(逆光) 속에서 젊은 아가씨의 즐거운 독서 삼매경의 한 순간을 잘 포착했다. 얼굴 한 면의 햇빛 반영이 밝아 싱싱한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초원의 비탈길   인상파풍의 밝은 볕살에 넘치는 명랑한 정경을 시원스레 그린 작품이다. 작품 한가운데 한줄기 비탈길을 그려 이를 그림의 주축으로 삼고 그 좌우에 나무와 풀밭을 펼쳐놓아 녹색과 노란 빛깔이 서로 버무려지는 부드러운 색감을 곱게 쓰고 있다. 그 사이에 붉은 꽃과 빨간 우산을 점점으로 찍어 악센트를 주어 선명하고, 여유있는 색감을 갖게도 한다. 이 화폭 전체에서 풍기는 섬세하고도, 유연한 필촉은 르노와르 특유의 감각으로서 이와 똑같은 테마를 피사로나 모네도 그렸지만 이같은 유화(柔和)한 감촉은 르노와르 독자(獨自)의 것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르노와르의 풍경화 구도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레 경묘히 다룬다는 점도 특색임을 이 그림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사마리 부인의 초상   밀도(密度) 짙은 눈부신 핑크 빛깔을 배경으로 깔고, 마치 이 화려한 분위기 속에 흠뻑 젖어 있는 듯이 우아한 여인이 턱밑에 손을 받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청징(淸澄)한 눈은 지적(知的)으로 빛나고 있고, 입술과 어깨 언저리에 붉은 색조가 산점(散点)하고 있고, 한편으로 여기에 짙은 녹색의 의상이 알뜰히 대비(對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뭇 빛깔들이 마치 하나로 용해된 듯도 하면서 쾌적한 색감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당시 파리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유명한 여배우이다. 그녀는 매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발랄하면서도 지적(知的) 매력이 넘치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매혹된 르노와르는 그녀의 전신상도 그렸다.           첫나들이   이제 가까스로 어엿한 예비 숙녀가 된 한 소녀가 어머니를 따라서 극장 관객석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 그림은 자유자재로운 시각으로 퍽 자연스럽다. 얼핏 즉흥적인 붓놀림으로 쉽사리 그린 것 같기도 한 이 작품은 학교를 마치고 이제 어른들의 사회 속에 뛰어드는 듯한 첫나들이를 겸한 관극(觀劇)에 나선 소녀의 이 도큐멘터리 터치는 [현대를 그려보겠다.]는 르노와르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이 아가씨를 옆으로 보고 이를 근경으로 처리했으며, 계단 아래의 객석이나 무대를 조금 엿보이게 하여 원경 처리를 함으로써 교묘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뜨개질하는 아가씨   비스듬히 옆을 향한 아가씨의 초상인데, 작품의 특징은 밝은 빛을 한껏 받고 그 빛에 의해 풍윤한 색시의 밝음과 아름다움이 부각(浮刻)되도록 그렸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은 볕살을 받은 자연의 정경을 추구하는데 힘을 기울였는데, 르노와르도 빛에 감싸인 자연을 안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인물에 더 관심을 가졌고, 특히 부인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르노와르는 인물 묘사에 있어 인상파의 특징을 살리려고 애를 썼는데, 여기서도 바깥에서 스며드는 빛의 묘사를 통해 신선하고 발랄한 젊은 여성의 분위기를 잘 부상(浮上)시켜 놓았다. 긴 머리, 볼, 어깨, 팔로 흐르는 빛과 그늘과의 대비를 통해 유화(柔和)한 촉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레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   가슴을 조이고 있듯 긴장한 눈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는 가련한 소녀상은 뭔지 모를 연민(憐憫)의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소녀상은 르노와르가 즐겨 다루는 소재의 하나이다. 당시 별로 많지 않았던 그의 예술의 옹근 이해자였던 은행가 루이 깡 단베르 씨의 귀여운 막내 딸이 모델이 되어 주어서 퍽 조심스레, 그리고 정성스레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놀란 토끼처럼 동그란 눈, 투명한 살결의 프로필은 유연한 붉은 자색의 머리칼에 감싸여 더욱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의 한 가닥, 한 가닥은 르노와르 특유의 흐르는 듯한 붓놀림으로, 산만한 듯하면서 도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청결하고 감미로운 작품이다.         해변에서   바닷가에서 등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는 한 귀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 등의자의 느낌과 배경인 바다가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고, 의자의 묘사도 매우 사실적이고 딱딱해 보인다. 이처럼 전경(前景)과 배경 사이에서 다소간의 괴리감(乖離感)을 안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도리어 일종의 효과가 되어 이 부인을 고전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하고도 있다. 이는 아마도 르노와르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받았던 고전 회화의 영향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고전 회화가 지니는 딱딱한 형식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색종(色種)의 단순화와 형체의 정착화에도 진일보하게 된다. 부인의 눈언저리와 머리 부분의 필법에도 고전적인 필촉을 느낀다.           매를 가진 소녀   매라고 하는 야생적인 새와 귀엽고 예쁜 소녀와의 야릇한 대조의 효과를 아마도 르노와르는 이 그림에서 노린 것 같다. 이 그림의 가장 중심 대상인 소녀를 그는 매우 정치(精緻)하게 그리고 있다. 그에게는 대체로 두 가지 묘사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작품에서처럼 놀랄 만큼 섬세한 붓 끝으로 우아하게 그리고 정성스레 다듬어 나가는 수법으로, 이는 어엿한 직인적(職人的)인 기법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전체를 하나의 색조 속에 융합시키는 묘사 방법인데, 이는 매우 세밀한 기법으로서, 비단 얼굴만이 아니라 옷이라든가 또는 주변 사물을 그릴 때에도 미묘한 질감을 보인다. 이 그림은 이 두 가지 묘사법을 다 사용하고 있다.           음악회에서   음악회에 출연하여 꽃다발을 받은 다음 무대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이다.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소녀와 꽃다발 등 매우 우아한 테마를 극히 아름다운 색조로 나타내주고 있는 이 그림은, 퍽 극명(克明)한 묘사를 하고 있어 상당히 엄격한 사실(寫實)의 화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부터 르노와르는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새로운 화법을 채택케 된다. 즉, 이른바 인상파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무렵에 그는 곧잘 소녀들을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발랄한 젊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 까닭은 소녀의 아름답고 청순하며, 또한 순진 무구함에 당시 매료(魅了)되었기 때문이다.           페르난도의 서커스 소녀   밝음, 발랄함, 따뜻함 등을 사랑한 르노와르는 서민들을 보는 시각(視角)에 있어서도 로트렉이나 드가처럼 날카로움이나 풍자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놀이] 속에서 삶의 충일(充溢)함을 찾고, 일상성 그 자체를 밝고 따뜻하게 묘출한다. 언제나 흥청거리는 몽마르트르에 천막을 친 서커스 단장 페르난도 발덴베르크의 두 딸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도, 르노와르의 그런 속성을 쉽사리 감득할 수 있다. 따뜻하게 보이는 마루를 배경으로 하여 약간 시점(視点)을 높이 잡아 굽어보는 듯한 묘사를 가미하면서, 두 소녀의 앳된 모습을 세련된 색채로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네     공원의 그늘, 산책길에서 만난 지인(知人)들의 다소곳한 대화 장면이다. 매우 흔해 빠진 일상적인 정경이, 르노와르의 애무하는 듯한 붓의 촉감으로 말미암아, 놀라울 정도로 밝은 빛의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처럼 그렇게 우아한 세계는 아니지만, 서민들의 충족한 생활의 숨결이 그런 대로 눈부신 광휘를 떨치면서 밝게 실현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빛의 줄기가 화면의 도처에 명멸(明滅)하면서 나무 등걸과 오솔 길이 한결 아름다운 빛으로 반영되고 있고, 멈춰 서 있는 그네 역시 마치 쾌적한 리듬으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듯이도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르노와르는 자연의 묘사 못지 않게 인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우산   잡답한 파리의 노상(路上)에 봄비가 갑작스레 뿌리기 시작한다. 손에든 우산을 황급히 펼 쳐든 사람들, 거리는 한결 더 붐비는 인상이다. 르노와르다운 발랄함과 서민적인 친숙함이 넘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치고는 뭔지 모르게 차가운, 그리고 창백한 톤을 이 그림에서 느낀다. 우산의 아치의 반복과 선 구성의 준엄함, 딱딱한 붓자국의 리듬이 이 화면에서는 느껴지는데, 이는 르노와르가 라파엘로의 예술에 끌려, 이태리의 여행에서 품페이의 벽화(壁畵)에 감복하여 전환기를 맞기 시작할 무렵의 작품이다. 즉 고전 벽화가 지니는 선려(鮮麗)한 색조의 영향을 적잖이 받아 색종(色種)이 줄어들고 있어 보인다. 종래의 그 나름의 색조의 융화를 본령으로 했던 그의 수법이 차츰 형체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옮겨가고 있다.         춤추는 아가씨 LA DANSEUSE 1874년 캔버스 유채 142X95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소장         나부 NU 1888년 캔버스 유채 56X46.3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햇빛 속의 裸婦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르노와르의 이 나부는 무성한 숲 덤불을 비집고 빛나는 햇빛 속에서 태어난 현대판 비너스라고나 할까! 거친 붓자국의 뿌우연 빛깔 속에서 풍요롭고도 요염한 여체가 어슴푸레하게 부각되었다. 제2회 인상파 전람회에서 [모델이 마치 수포창(水泡瘡)에 걸린 것 같다]는 험담을 들을 정도로, 풀빛으로 얼룩진 볕살의 효과는 대단하다. 얼굴, 어깨, 젖가슴 등 몸뚱이 전체에 눈이 부실 정도로 태양의 직사광선이 감싸고 있는 이 여체는, 마치 숲 속의 요정과도 같은 동화적 분위기마저 느낀다. 배경인 수풀도 역시 햇빛을 듬뿍 받아 하나로 버무려진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를 내고 있다. 순간적인 색채의 소용돌이를 잘 감득한 작품이다.         빠리스의 심판 JUGEMENT DE PARIS 1908년 캔버스 유채 80X99.4Cm 개인 소장         屋外에 앉은 여인   [누드를 그릴 바에야 누구나 그 그림을 보고 그 유방이나 등을 만지고 싶도록 그려야 할 것이다.] 르노와르는 그의 만년에 이렇게 술회했다. [매만진다]는 말은 어쩌면 그의 예술적 생애의 [ 키워드 (key word)]일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정말이지 유방과 등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혹이 물씬 풍긴다. 이 그림은 그의 나이 마흔 셋 때의 작품이니까, 이 무렵부터 차츰 옷을 입은 부인으로부터 나부로 옮아가는 시기인데, 후반기에 들어가면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누드를 중심으로 한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화면 가득히 나부를 놓아 삼각형의 구도법을 쓴 이 그림은, 부드럽고 풍만한 육체의 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머리를 만지는 慾女   [만일 여인의 유방과 궁둥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이는 르노와르의 유명한 말이다. 이 처럼 그는 여인의 육체에 심취(心醉)되어 그의 풍려(豊麗)한 색채 감각으로 즐겨 여체를 그렸다. 이 작품은 나부가 등을 보이고 앉아 지금 막 수욕(水浴)을 마치고 바위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유방과 궁둥이가 한결 돋보인다. 이 여인의 등과 궁둥이가 유난 스레 풍요로와 여체의 원숙한 매력을 물씬 풍겨준다. 이 양적(量的)인 육체를 짙은 녹음 앞에 놓아 자연의 청신한 빛 깔과 여인의 뜨거운 육감을 하나로 버무려서 풍윤한 색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 감는 浴女 BAIGNEUSE SE COIFANT 1895년 캔버스 유채 92.7X74.3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소장           浴女들   풍만한 세 처녀가 방금 물에서 나와 다정스레 뭔가 밀어를 나누고 있는데, 우선 이 세 욕녀가 그림의 전경(前景)을 차지하면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삼각형 도법(도법)을 지키기 위해 기묘한 자세를 각각 취하게 한 것 같다. 이 그림은 르노와르의 추이(推移) 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이 시대의 특색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고 있다.         浴女   잔잔하게 시냇물이 쫄쫄거리는 계곡에서 막 목욕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바위 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부 상이다.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 야생적인 주위 분위기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와는 좀 괴리감(乖離感)을 느끼게도 하며, 따라서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이도 보이지만, 르노와르는 이 대조(contrast)를 역(逆)으로 이용하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거친 터치로 바위들을 그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심산 궁곡처럼 후진 곳에서 이 욕녀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살결이 고운 육체를 드러내고 있어, 더욱 압도되는 듯한 황홀감을 갖게도 한다. 이와 같은 나부의 기법(技法)은 고전파의 영향을 받아 명쾌한 표현으로 옮아가는 시절에 익힌 것이다.         블론드의 욕녀   누드를 그리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는 서양 회화 가운데에서, 목욕하는 여인은 그 한 분야로서 주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나부와 자연이 하나로 잘 융합되어 있는 그림이다. 수욕(水浴)의 습관을 르노와르는 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목욕하고 막 나온 여인의 나른한 기분마저 잘 표현하고 있다. 르노와르가 벌거 벗은 여인을 그리는 주지(主旨)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육체 표현에 있는데, 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연의 청신한 푸른(녹색과 청색을 잘 조화시킨) 빛깔을 밝게, 그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화면 전체가 색조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나부 상이다.           보류 풍경   르노와르의 풍경은 모두가 색과 색이 어울려서 서로 불타고 있는 듯한 공간을 창조 해 낸다. 그는 결코 하나하나의 풍경만을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숲이 있고 잔디가 있고 수풀이 있으며 또한 하늘과 구름이, 그리고 때로는 인물이 적당한 안배되어 있지만, 그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따로 이 설명하려 들지 않고 이를 하나로 융합하여 서로 대화하는 일체의 색감이 감돌도록 포착한다. 르노와르의 이같은 융합되는 색조의 밑바닥에는 색의 대비(對比)라고 하는 원리가 깃들여 있다. 이를테면 빨간색과 녹색의 대립에 의해서 묘한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체가 상쾌한 조화 속에 감싸 인다. 그러한 색 모양의 미묘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작가가 퍽이나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초원에서   이 작품도 소녀상의 연작(連作) 가운데 하나인데, 여기서는 두 소녀가 야외에서 등을 뒤로 돌리고 앉아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러니까 이 유화는 인물화로서 이목구비나 손, 팔 등의 묘사보다는 이 두 소녀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채나 의상의 아름다움 같은 데에다 역점을 두고, 이를 자연과 합석시킴 으로써 이를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융화시키는 인상파 특유의 빛깔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한가운데 두 소녀가 주요 대상물이 되고, 여기에 무성한 나무들이 기둥으로 받쳐지면서 배경이 밝게 멀리 뻗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밝고 어두운 농담(濃淡)의 적절한 처리가 유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점이 르노와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피아노 앞의 아가씨들   두 아가씨가 한 멜로디를 익히려고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융합되어 있음을 보여 주려고, 르노와 르는 부드러운 색조의 하모니를 꾀하고 있다. 여유 만만한 곡선의 굽이침이 화면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는데, 르노와르는 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을 몹시 좋아했다. 주제는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속한 장면이긴 하지만, 이러한 일상성 속의 유연함을 그는 다양한 색조로 포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파랑, 녹색 등 원색을 기조(基調)로 하여 이에 대비된 버무려진 색감으로 인물을 감싸고 있다. 그는 대상물 하나하나를 선명한 빛깔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엄격한 양식]을 거침으로써만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형(形)과 색(色)의 교향(交響)이다.         기타를 치는 여인   1890년경에 이르면 르노와르의 부인상은 한껏 무르익어 간다. 모델도 점점 더 풍만한 여인이 많아지며, 그런 포동포동한 육체 속에 감각적인 표현이 더욱 여물어 간다. 이 그림에서는 그런 풍만한 여인을 벗기지 않은 채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한다. 이러한 여인의 속성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앉은 의자도 이에 대응하여 화려하고 밝게 칠했다. 그 위에 이 그림의 악센트를 넣기 위해 여인으로 하여금 기타를 연주하는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감각의 풍족함과 양적(量的)인 충실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그림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르노와르의 부인상의 연작(連作)으로 특유의 예술성을 구축하게 된다.         생선 광우리를 든 여인과 과일 광우리를 든 여인 1889년 캔버스 유채 130.2X40.6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소장           뜨개질하는 아가씨   편물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여인을 사생풍(寫生風)으로 가볍게 그린 작품이다. 물론 이 그림은 초상화가 아니라 일종의 스냅으로서 편물하는 동작의 한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작 자체에 이 그림의 실제 모티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윗도리(아마도 스웨터인 듯)의 무늬가 모양이라든가 색 배합의 감촉이 르노와르의 눈에 띄게 되어, 이를 선명하게 묘사해 낸 것이리라. 즉 인물의 표현임에는 틀림없으나,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이처럼 짠 직물의 아라베스크에 그는 더욱 흥미를 느낀 것 같다. 이러한 색감과 무늬가 여자다운 우아한 얼굴이나 머리 따올림, 그리고 배경에 감싸여 하나의 조화 있는 색채의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국화 병 BOUQUET DE CHRYSANTTHEMES 1890-1900 캔버스 유채 81X65Cm 르노와르 미술관 소장           블론드의 浴女   르노와르의 나부상은 후기에 접어들수록 그 육체의 질감 표현에 있어 풍만함을 보여 준다. 이 원숙한 욕녀상을 르노와르 예술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고 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부의 자연스러운 포즈가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어 빨강, 노랑, 녹색 등의 생생하고 순박한 색감을 미묘하게 살리고 있다. 부드러운 필촉이 신선한 색조로 다스려져서, 보드랍고 탄력 있는 여체를 회화적으로 완성시켜, 순수한 감각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대비(對比)되는 빛깔의 효과에 의해서 육체의 그 어떤 부분도 싱싱하고 발랄하고 탐스러운 풍윤한 감촉을 지니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결코 저속한 관능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프랑스적인 감각성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시슬리 부부   르노와르의 다정한 벗이었던 화가 시슬리가 결혼한 무렵에 그린 초상화인데, 이 그름은 이른바 초상화의 포즈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자유스러운 모습을 잽싸게 포착하여 다정한 부부상을 부각시켜 놓았다. 이 무렵의 엄격한 사실(寫實) 기법 탓으로 부인의 스커트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어 인물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남편과 아내를 화면 가득히 채우면서 삼각형 도법(圖法)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있다. 특히 르노와르는 두 인물의 얼굴의 볼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초기의 사실적인 수법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화려한 색조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391    시인들도 시작에 자아도취하지말고 평생 만족할줄 몰라야... 댓글:  조회:1989  추천:0  2017-10-12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4) :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빛 위주의 자연을 창조(創造         아틀리에의 한구석   19세기 후반의 중후한 사실적인 화풍을 보이는 모네의 초기 작품이다. 모네는 1860 년부터 1862년까지 군에 복무하는 동안 알제리에 파견 나갔을 때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늘 새로운 자연을 그렸다고 술회했는데, 하지만 이 작품에는 이국적인 풍물도, 그가 매혹된 빛과 색채의 인상도 그려져 있지 않다. 뒷면에 그려진 칼과 총 등에는 그의 군대 생활이 암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책과 막 뚜껑을 연 스케치 상자의 난잡함, 풍경인 듯한 벽걸이와 붉은 융단 등이 견실한 필치와 암울한 색채로 극명(克明)하게 그려져 있다. 화기(畵技) 향상을 위한 습작이라고는 하지만 뛰어난 묘사력을 보인 작품이다.         노르망디의 농장의 뜰   1864년 7월 모네는 바질과 함께 노르망디의 옹페르에 머물면서 이 말을 근처의 생시메움 농장에서 숲과 농가를 즐겨 그렸다. '모네는 눈(眼)에 지나지 않는다.'-세잔은 그의 그림을 놓고 이렇게 말했는데,이는 바깥 햇살 속의 자연에 대한 모네의 솔직한 신뢰를 퍽 아이러니 컬하게 비평한 말이다. 농가 벽면에 보이는 명암(明暗)의 선명한 콘트라스트라든가 수면에 비친 그늘의 묘사에서 모네의 빛에 대한 집요하고 솔직한 관심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세잔의 말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후덥 지근한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사물의 그늘을 차분히 가라 앉히면서 소박한 풍토색을 짙게 풍겨주고 있다.       뜰의 여인   1866년 여름, 모네가 카미유와 함께 살고 있던 집 마당에서 카미유를 모델로 해서 그린 작품이다. 마당에 깊은 도랑을 파서 캔버스의 위쪽을 그릴 때에는 그 도랑 밑으로 내려놓고 그렸다고 한다. 이따금 이곳을 방문했던 바질과 쿠르베는 그 색다른 제작 광경을 보고 곧잘 웃어댔다고 한다. 화면에 그려진 네 여인은 모두가 카미유의 포즈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제각기 다른 포즈나 배치는 바질이 보관한 사진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대범한 화크추우르는 쿠르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하얗게 빛나는 의상과 그 음영(陰影)과의 편평(扁平)한 색면의 아라베스크가 장식적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이다.           카미유, 녹색의 의상   야심적인 대작의 완성을 한때 단념했던 모네가 이에 대신하여 불과 나흘 동안에 완성하여 1866년 살롱에 출품한 그림이다. 모델은 카미유로서 짙은 녹색 무늬의 의상에 모피(毛皮)가 붙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모자의 리본을 오른손으로 쥐며 상체를 약간 화가 쪽으로 돌린 포즈가 특이하다. 마치 걷고 있는 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 그림은 쿠르베의 에 나오는 인물 자세와 비슷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철저한 사실(寫實)과 중후한 색조에는 쿠르베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다른 풍경화와 함께 살롱에 받아들여져 비록 좋지 않은 벽면에 걸려지기는 했지만,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특유의 수법을 주목받기도 했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르아브르 근처에 있는 생 타드레스의 해변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앞 쪽에 앉아있는 인물은 모네의 부친이다. 이 그림은 중간쯤에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위쪽의 바다 풍경은 수평선과 깃대가 직각으로 교차되어 종과 횡의 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의 테라스는 부감적(府瞰的)으로 조망되어 약간 경사진 구도로 이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다른 구도의 맞춤은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한 시도였다고 보는데, 그러나 주목할 점은 여기에서 모네가 쿠르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뚜렷하게 인상파의 수법에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투명한 색채로 밝음과 어두움이 뚜렷이 대비되고 있음과 동시에, 순도 높은 선명한 여러 빛깔의 반점에 의해 화단의 아기 자기한 빛이 효과를 더해 주고 있다.       라 그르누이에르   라 그르누이에르는 세느 강변의 유명한 행락지로서 모파상이 소설 무대로도 자주 등장한다. 빛이 희롱하는 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모네는, 그보다 먼저 이 놀이터를 찾아와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던 르노와르와 1869년의 한 여름을 함께 보냈다.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렸던 현존하는 3점 가운데의 하나다. 화면 오른쪽에 보트를 빌려주는 곳이 보이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몇몇 사람들이 중앙의 작은 섬 그늘에 묘여 있다. 이 그림의 명암은 모두가 색채의 선명한 대비가 되어 빛을 반사하는 수면과 그늘의 인상을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리듬이 있는 재빠른 필촉은 물의 반사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발랄하게 포착하여 여름 휴일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1868년 르아브르의 선주(船主) 고디베르의 주문에 의해 그의 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무렵 모네는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동안 모네는 숙모의 신세를 줄곧 지고 있다가, 부인 카미유와 막 태어난 쟝을 거느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무척 아쉬워 남의 초상화 그리기에 바빴다. 이처럼 초상화에 골몰하다 보니 데상력이 향상되고 구도 역시 차츰 세련되기에 이른다. 이 초상화는 부인 카미유의 초상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서 있는 모습으로 치마를 길게 늘어뜨려, 동작이 있는 어떤 한 순간을 그려 놓았다. 마네류(流)의 매우 폭넓은 색면에 의한 형태를 포착하고 있는 이 그림은 부인의 얼굴보다는 의상의 성질(性質)이나 광택의 효과를 더 노리고 있어 보인다.           개양귀비   모네의 초기 말엽에 해당되는 34세 때의 작품인데, 광활한 초원 속에 핀 무수한 개양귀비의 빨간 '색채의 향연'을 그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감도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선연(鮮姸)한 빛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색채의 독자적 주장을 회화적 차원으로 표현했는데, 화면을 상하로 양분시킨 늘어선 나무들의 검푸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게양귀비의 빨간 반점, 푸른 하늘과 솜털구름, 그리고 화면 중앙의 멀리 보이는 건물, 포즈를 취한 여인의 옷과 양산의 수색(水色)이 빛을 담뿍 받았으면서도 독립된 색채를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장대한 공간감(空間感)과 더불어 색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초여름의 향연이다.         양산을 든 부인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터치, 바람에 휘날리는 스카프, 드높은 하늘과 뭉개 구름, 좌측으로 약간 쏠린 풀잎, 앞으로 기운 듯한 몸매가 원색의 초원과 조화를 이루어 화면을 밝고 상쾌하게, 그리고 행복감까지를 자아내게 한다. 양각(仰角)의 중심부에 위치한 모델은 모네의 의붓딸로 생각되는데, 양산의 그림자가 해의 높이, 즉 그림을 그린 시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색채 혁명을 일으킨 모네의 집요하면서도 명쾌하고 섬세한 감각이 표출된 빛과 색채와 대기(大氣)의 시원한 어울림을 이 한폭의 그림에서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본 행복했던 쥬베르니 시대의 모네의 생활 기록을 읽는 느낌이다.           시슬리家의 저녁 식사   모네의 일반적인 작품 계열과 작품에서 벗어난 특이한 그림이다. 신실한 화우(畵友) 시슬리 식구들의 단란한 저녁 식사 광경을 약간 높은 대각선 위치에서 부감(俯瞰) 한 작품인데,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램프와 램프빛의 효과가 이 그림의 모티브이며, 일정한 장소에 일정하게 주어진 빛, 그것도 대자연의 빛이 아닌 인공(人工)의 빛을 집요하게 묘사하려는 모네의 의식과 또 하나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하얀 식탁 위의 검소한 차림, 희미한 그림자와 다갈색의 벽면 등이 서로 조화되어 차분하고 온화한 뉘앙스를 표출시켰고, 또한 화가의 생활 수준과 청교도적인 가풍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제 1회 인상파전이 열리기 4년 전의 그림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잔담   잔담은 암스테르담에서 북서쪽 9km 지점에 있는 기름진 땅이다. 멀리 교회 건물과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흐르는 운하, 꽃이 핀 벌판, 빨간 지붕과 녹 백색으로 칠한 작은 집들이 네덜란드 포플라 사이로 보이는데, 이 전경이 수면에 거꾸로 투영되어 춤을 추는 듯 넘실거리고 있다. 모네는 이 기막힌 풍광을 놓치기가 싫어 을 그린 모양이다. 모네가 왜 잔담을 방문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도비니의 초청으로 이곳에 들른 것으로 보이며, 런던을 방문했을 때 터너의 풍경화에 크게 감명받은 것으로 보아 터너풍(風)이 엿보인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모네의 독자적인 시각 체험이 재치 있게 표출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카푸시뉴 거리   인상파의 산실(産室)인 사진 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 2층에서, 가까운 거리를 내려다보고 그린 2점의 그림 가운데 하나, 1874년, 제 1회 인상파전(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 1회 인상파전이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열렸기 때문에 관객들은, 실제 눈으로 본 거리와 이 그림을 대조하면서 감상할 수 있었는데, 당시 평론가들이 '핀트가 맞지 않은 사진 같다'고 혹평했다. 그때 사람들은 세부까지 극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그림을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모네는 기억에 의한 관념적인 묘사를 단호히 배격,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담았다. 엷은 연기에 쌓인 듯한 파리의 공기와 군중의 움직임을 나타낸 찰필(擦筆)의 효과가 인상적이다.         아르쟝뚜유의 다리   1871년 말경 모네는 파리 서쪽 교외인 아르쟝뚜유 강변에 집 한 채를 빌려 약 1년 동안 여기서 세느 강을 주제로 한 많은 우수한 작품을 그렸다. 르노와르나 시슬리, 그리고 나중에는 마네도 이곳에 찾아들어 함께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에 그린 풍경화 가운데에서도 이 그림은 모네의 원숙한 기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수면의 부분에는 버무려지지 않은 순수색이 조그마한 터치로 양면에 병치(竝置)되어, 물의 투명한 느낌, 그늘의 흔들림, 빛의 섬세한 반사등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고 또한 싱그럽게 표현되어 있다. 색채 상호간의 미묘한 대비(對比)와 리듬을 모네가 얼마나 정확하게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가를 이 그림은 잘 표현하고 있다.         눈 속의 아르쟝뚜유   모네는 야외 사생을 시작하면서 설경(雪景)을 즐겨 그렸다. 르노와르는 '왜 설경 같은 것을 그리는지 모르겠어. 자연이 마치 병들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라고 말했지만, 모네는 그러한 친구와는 달리 은백(銀白)의 세계에도 빛과 그늘이 있음을 깨닫고 그 미묘한 뉘앙스를 묘출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옹플르 근처의 마을 어귀를 묘사한 이 그림은, 자연 상태의 변화의 다양성을 매우 솔직하고도 훌륭하게 부각시켜 놓았다. 눈 덮인 시골 아침의 청순함은, 근경의 하얀 길보다도 중경인 나뭇가지에 엷게 붙어 있는 눈의 베일을 통해서 아스라한 빛의 진동으로부터 우러나오고 있어 보인다. 볕살에 녹아 눈이 떨어져 한결 가벼워진 가지가 즐거운 듯 뻗쳐 있어 싱그러운 느낌조차 든다.         생 라자르 驛   1878년부터 78년에 걸쳐 모네는 파리의 생라자르 역과 그 주변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을 그렸었다, 1877년 봄에 열렸던 인상파 제 3회 전시회에는 이 연작(連作) 일곱 편이 출품되었는데, 이 그림은 그 가운데 한 작품이다. 철도를 주제로 한 회화로는 영국의 풍경화 작가 터너의 등이 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모네와 피사로, 시슬리 등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역과 기차가 자주 제재가 된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모네는 역 구내의 정경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렸는데,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새로운 기계 문명의 산물 자체가 아니라, 여기서 느껴지는 동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스피디한 터치가 퍽 인상적이다.         일본 의상의 여자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이른바 우끼요 에(浮世畵)가 유럽에 흘러 들어 가기 시작했고, 모네도 그 판화의 콜렉션을 그 무렵에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네가 일본을 알게 되면서 그린 일본 취향의 회화다. 모네는 애인인 카미유에게 일본의 기모노를 입히고, 벽면도 일본 부채로 가득 채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포즈나 장식적인 의장화(意匠化)의 구도 역시 일본 풍 인데, 그는 그 후 동양에 대한 감화를 크게 받아 양식적으로 이를 소화시키기도 했다. 모네가 이처럼 색다른 주제를 다루게 된 원인의 하나는, 이 무렵에 모네가 인물화를 버렸다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답변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과일이 있는 靜物   모네의 모티브에는 정물이 별로 없다. 10년 전 르노와르와 함께 일할 때는 가끔 꽃과 정물화에 손을 댔는데, 광선의 변화와 보색(補色)의 작용에 관심을 쏟고 부터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우리들은 먼저 르노와르의 풍윤한 색채를 연상하는 반면, 세잔의 정물화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조형 질서의 구축은 전혀 볼 수 없다. 하얀 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놓여진 포도, 배, 사과 등이 부드러운 광선을 받아 한결 윤이 나고 싱싱하게 보이기만 한다. 모네는 일년 전에 가난과 싸우다 병사한 사랑하는 부인 카미유의 환상을 응시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 한다. 실의와 고독, 그리고 적요(寂寥)를 자위하기 위해 정물화에 다시 손을 댔으나, 평정되지 않는 그의 마음을 나타낸 듯, 거칠고 빠른 터치를 전화면에서 엿볼 수 있다.         旗로 장식된 몽토르귀유 거리   1876년 6월 30일,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를 축하하는 깃대가 몽토르귀유 거리를 가득 메워 놓았다. 독불(獨佛) 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축제 행사로서 파리는 한참 흥청거리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모네는 두 점이나 재빨리 그려내어 제 4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했다. 모네는 나부끼는 깃발의 물결에 매혹되었다. 잡답한 군중 속을 헤치고 지나가던 모네는 문득 그림 그리기에 적당한 발코니를 발견하자, 집주인을 찾아가 그림 그릴 장소를 애써 빌려서 단숨에 완성해 냈다. 모네는 이 발코니 위에서 붉은 빛, 푸른 빛, 흰빛의 난무를 경쾌한 터치로 소묘했는데, 거리의 흥분과 소란함이 그대로 화면 위에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이 벅찬 색채의 향연은 야수파, 미래파의 회화에로 이어지는 무드이기도 하다.         베투유의 敎會堂   1878년 초, 모네는 6년 동안 살던 아르쟝 뚜유를 떠나 세느 하류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이사, 1881년까지 4년 동안 살았다. 친구들도 큰 마음을 먹어야 찾아올 수 있는 그러한 벽지 마을이다. 모네는 이곳에서 집 한 채를 빌어 생활했고 아틀리에 용 보트를 하나 마련했다. 교회 건물은 마을언덕에 있었는데, 이 교회에 있던 스테인드 글라스는 꽤 알려진 그림이었으나 지금은 그 이 없어졌다. 강변의 잔설(殘雪)을 씻는 파도는 풍광을 받아 회색으로 변용되고, 눈이 녹아 강물이 불었는지, 아무렇게나 그은 듯한 필적을 생각케 하는 붓 놀림이 흐린 날씨의 음울한 공기를 극명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이 땅의 겨울은 모네에겐 쓰라린 추억이며 세느 강변의 잔설을 밟는 모네의 심정 또한 무척 착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르쟝뚜유의 홍수   색채의 프리즘적 분석과 필촉 분할(筆觸分割)에 의한 빛의 효과를 발전시켜 온 모네는, 맑은 날씨가 아닌 흐린 날씨의 일광이 자연 현상을 어떻게 변용 시키느냐에 큰 관심을 갖고 , ,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가난에 시달리던 아르쟝뚜유 시대의 말기에 만난 홍수를 그린 것으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검적색과 엷은 먹색으로 연출된 대자연의 드라마이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상에 보이는 먹점은 무한대한 자연의 힘과 거리감을 시사한 침수된 건물들이고, 화면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나무들과 물위에 투영된 실루엣의 굴절은 빛의 조화가 얼마나 신묘한가를, 그의 회화 언어로 표출시킨 시각 체험이기도 하다.           라바쿠르, 햇빛과 눈   눈이 쌓인 갯마을 라바쿠르. 추위와 정적만이 감도는 하얀 산야를 따스한 겨울 햇살이 감미롭게 애무하고 있다. 햇볕을 듬뿍 머금은 장밋빛의 대안(對岸)과, 햇빛을 적게 받은 평지의 눈더미를 난 온색(暖 溫色)으로 대조시키면서 화면을 크게 양분하고, 집 앞에 늘어선 나무들의 갈색 실루엣과 검은 배의 터치가 '구도상의 짜임새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딱딱한 집들은 거리를 암시하면서 연속성을 나타냈고, 눈이 쌓인 강변의 부드러운 선을 검은 배의 그림자가 보강해 주고 있다. 모네는 1875년에도 수 점의 설경을 그렸는데, 특히 이 작품은 베트유 시대의 슬픈 마음을 '눈'이라는 순백(純白)한 모티브로 표출시킨 '심정의 표백'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해바라기   모네는 만년에 이르러 풀과 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0 년 이전에 독립된 꽃의 정물과가 적은 것은 퍽 기이한 노릇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모네는 야외에서 화가(畵架)를 세워 제작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화가였으므로, 아틀리에 안에서 차분히 앉아서 제작을 해야 하는 이런 장르에 종사하는 시간이 많지 못했던 것 같다. 모네는 변하기 쉬운 자연 현상과 기후에 집착하고 있었다. 계절이나, 시각에 하지만 첫 부인 카미유가 죽은 다음, 특히 1880년부터 82년에 걸쳐 이상하리만큼 꽃과 과일 등 정물화에 골몰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는 아틀리에에서 감정의 응어리를 정물화에 쏟아 놓은 것이다.         두 짚가리   시리즈는 모네에게 부와 명성을 동시에 안겨준 기념비 적인 작품들이다. 를 완성시킨 1891년 5월, 뒤랑 뤼엘 화랑에서 짚가리 시리즈 중 15점을 전시했는데 3일만에 매진되어, 모네는 생전 처음으로 거금을 만져 보았다. 아침의 청렬(淸冽), 한낮의 심록(深綠), 저녁 노을의 변환(變幻), 일몰의 연소(燃燒) 등 대자연과 대기 현상을 그의 독특한 회화 언어로 표출시킨 모네는 이 그림에서 전동한 듯한 필촉으로 역광 효과(逆光效果)의 미묘한 뉘앙스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는 불에 타는 듯한 일몰의 짚단을 그리기 위해 밭 가운데 10여 개의 화가(畵架)를 세워 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을 쫓아 이 화가에서 저 화가로 옮기면서 제작했다는데 빛의 조건이 지속되는 사이에는 무서운 속도로 그렸다 한다.         에프트 강변의 포플라   모네의 포플라 연작(連作)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쥬베르니 근처의 리메츠를 산책하면서, 에프트 강변에 줄지어 자란 포플라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한 포플라 나무에 붉은 천이 감겨졌고, 이 나무들이 경매에 붙여져 곧 근처의 제재소로 실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포플라 나무의 경매 연기를 신청했는데 각하되었고, 그래서 입찰 희망자를 찾아가 낙찰 가격보다 많은 돈을 줄 테니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포플라 연작은 이래서 탄생했다.' 쭉쭉 솟아 오른 몸뚱이, 무성한 잎새, 이곳 햇빛이 닿으면 여러 색깔로 변한다. 그 뿐이랴, 에푸트 강에 투영된 그림자 또한 일품이었지-. 이 작품은 포플라 연작 중 초기의 것이며, 모네는 20점이 넘는 연작 중에서 6점을 골라 1892년 3월 뤼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런던, 워털루 다리   빛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이미지도 변한다. 모네가 런던을 세 차례 방문했을 때 그린 모든 그림, 즉 다리, 건물, 강도 빛의 강 약에 따라 상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1950년대 한국의 영화 팬들을 울린 명화 '워털루 브리지'를 사보이 호텔 5층 발코니에서 템즈 강을 끼고 그린 인상적인 작품이다. 화면은 청, 녹, 자주 빛 색이 뒤엉킨 부드러운 색조로 물과 하늘을 표현했고, 그 속에 엷은 자주 빛의 환상적인 워털루 브리지가 멍하니 떠 있다. 모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안개가 빛을 삼키고 확산시켜 대상의 포름을 포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실토했는데, 아무튼 런던 연작 가운데서는 아주 낭만적인 정취와 런던다운 분위기가 충만한 작품이다.           뱃놀이   모네가 1883년부터 산 쥬베르니는 세느로 흘러 들어가는 에프트 강의 상류에 위치했고, 모네의 가족들은 이따금 에프트 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모네는 이 뱃놀이와 강변의 무성한 포플라 연작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같은 계열의 것이다. 미망인 앨리스가 데려온 두 딸이 하얀 옷차림으로 작은 배를 타고 서로 마주 보며 정겹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수면에 투영된 그림자의 물결과 햇빛을 듬뿍 머금은 은파가 이 아가씨들의 뉘앙스를 더욱 청결하고 밀도 짙은 것으로 부각시켰다. 배의 선미(船尾)만을 4각형으로 잘라 화면 중앙에 앉히고, 일체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파격적인 구도가 오히려 빛과 그림자를 대담하게 대비시킨 효과로 나타나, 화면 전체가 오히려 신선하고 더욱 밝아 보인다.         햇볕을 담뿍 받은 포플라   일광을 담뿍 받은 포플라가 황록색으로 변해 바람에 나부낀다. '빛의 엽사(獵師)'인 모네에게는 에프트 강변의 포플라야말로 엽사의 그물과 같은 존재다. 시간과 날씨와 장소, 그리고 화포의 대소에 따라 빛을 변용시킬 수 있는 모티브이다. 이 그림은 한낮에 에프트 강의 배 위에서, 쨍쨍 내리쬐는 햇살을 받고 하늘 높이 솟은 포플라를 그린 것인데, 전체를 밝은 색채로 상호 대비시키고, 물감을 두텁게 바른 마티에르가 수간(樹幹)과 잎과 수근(樹根) 언저리의 잡초들의 양감(量感)을 나타내 주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선을 강조한 구도도 이 연작의 큰 특색으로 주목할 만하다. 포플라를 통해 창조해 낸 하늘과 물과 빛의 대화라면 좀 지나친 표현일는지-.           루앙 大聖堂의 아침   겸재 정 선이 을 수십점 그렸고, 고호는 를, 세잔은 을, 모네는 과 와 와, 이 을 연작으로 그렸다. 화가가 한 주제를 반복해서 제작하는 게 연작인데, 모네의 많은 연작 중에서 이 가장 연작다운 연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모네는 1892년부터 꼭 2년 동안에 그린 의 연작 작품들을 1895년 봄, 뒤랑 뤼엘 화랑에 전시했는데, 피사로는 런던에 있는 아들에게 '높은 격조와 깊은 의미'를 찬탄하는 편지를 써 보냈고, 세잔도 피사로와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일정한 시간대(時間帶)의 바람과 빛과 그림자가 용해해서 형성시킨 적막과 신비로운 이미지, 그리고 고색 창연한 거대한 무엇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루앙 大聖堂의 한낮         루앙 大聖堂의 저녁           파도치는 투루빌 海   가파른 낭떠러지가 계속되는 해안선은 투루빌이라고 하기보다는, 세느 강 입구로부터 오른쪽에 아름답게 펼쳐 있는 에틀타나디에프 등이 있는 북쪽 해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투루빌 근처에서 모네는 몇점을 제작해 냈기 때문에 아마도 그림 제목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억센 파도치는 바다 풍경에 감명을 받은 모네는 날카롭고 활달한 붓놀림으로 파도의 맹위를 잘 묘출해 놓았다. 모네는 과연 그가 받은 충동 그대로를 화폭에 옮기는 화가라는 것을 이 그림을 통해서 실감케 된다. 그는 어떤 감동적인 풍경에 접하면 민감하게 움직인다. 물론 그는 풍경을 정치(精緻)하게 보거나 분석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가 처음 느낀 인상에 충실했던 것이다.           베네치아, 팔라초 듀칼레   베네치아의 연작을 완성시킨 후 모네는 어느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궁전을 건축한 사람은 분명 최초의 인상파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 건물을 물위에 띄워 인상파 화가들로 하여금 열심히 그리도록 했다.' 모네는 이 건물들을 7점이나 그렸는데, 견고한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베네치아의 대기를 진동시키며 광채를 내뿜는 색과 형태의 모티브로서 이 건물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 그림은 밝은 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궁전의 실제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 정립상과 도립상의 형태와 이 색채를 눈동자에 비친 그대로 그려, 소위 우주적 구상(宇宙的 構成)에 접근시킨 회심작으로, 그의 예술적 특질이 유감없이 표출되어 있다. 특히 수면 위에 투영된 삐딱한 실루엣은 퍽 인상적이다.         런던의 國會 議事堂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모네는 세 차례에 걸쳐 런던에 건너가 거기서 겨울을 보냈다. 템즈 강을 중심으로하여 워털루 다리, 차링 크로즈 다리, 국회 의사당 등을 주제로 한 백 점 가까운 그림을 모네는 런던에서 제작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을 런던에서 완성한 것이 아니라, 쥬베르니에 가지고 돌아와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성 토마스 병원의 발코니에서 템즈 강 너머 국회 의사당을 바라보면서 그린 풍경이다. 화면 전체가 깊은 안개 속에 침잠되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오렌지 빛깔의 태양이 수면에 빛을 던져 고딕풍의 건축을 마치 환각처럼 푸르스름하게 떠올려 놓았다. 부드러운 필촉으로 바른 미묘한 색채는 서로 혼융되어 몽환적인 로맨틱한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다.         수련의 연못 LETANG AUX NYMPHEAS 1907년 캔버스 유채 101.5X74.5Cm 도꾜 브리지스턴 미술관 소장       자화상   어느 화가든지 곧잘 자화상을 그리곤 한다. 화가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므로, 자화상은 한 예술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적잖은 도움을 준다. 모네는 자화상을 이따금 그렸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86년의 베레모를 쓴 반신상(半身像)과 77세의 백발 상반신상 두 점뿐이다. 친구 클레망소에 의하면 모네는 밀짚모자를 쓴 호외의 자화상을 두 장 그렸으나 자기 불만이 폭발하여 찢어 버린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 작품은 모네의 개성을 그 나름대로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직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집스럽기도 했던, 그리고 평생 만족할 줄 몰랐던 화가의 귀중한 만년의 기록이다.            
390    시작도 실제 경험과 모순되는것의 합리적 느낌으로 쓰기... 댓글:  조회:2922  추천:0  2017-10-11
에스허르 또는 에셔의 작품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직업 : 그래픽 아티스트, 판화가 국적 : 네덜란드 출생지 : 네덜란드 프리슬란트주 레이우아르던 활동년도 : 1898년 6월 17일 ( 네덜란드 ) - 1972년 3월 27일   기하하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내적이미지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판화가 이자 화가입니다. 평면의 규칙적 분할을 통한 무한한 공간과 그 속의 원과 회전체 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룹니다.   수학과 논리학의 난제를 다룬 독특한 작품 세계로 유명합니다. 그는 교묘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작품 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습니다.   미국의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룬 괴델,에셔,바르 라는 책에서 에셔의 '이상한 고리,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바흐의' 무한히 상하는 카논'을 함께 묶어 '영원한 황금실'이라 불렀습니다.       테셀레이션이라 불리는 평면의 규칙적 분할은 일정한 형태의 타일을 사용해서 겹치지도 않고 틈을 남기지도 않으면서 바닥을 완전하게 덮는 배열 방식을 의미합니다.   통상 이공간분할에 사용되는 대상은 바닥에 까는 타일과 같은 정다각형이나 그에 준하는 도형들입니다. 그러나 에셔는 수학적 도형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적 형태들의 공간 분할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는 '변태-어떤 형태가 다른 형태와 얽혀 서서히 변해가면서 심지어는 2차원 평면을 벗어나는 2차원 형태들-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특별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는 주변에 있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자기의 상상에 기본을 두고 내적 이미지를 표현하였습니다.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공간, 공간 속의 원과 회전체 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때로 에셔의 작품들은 미학적 예술작품이라기보다 수학적, 기하학적 연구결과 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에셔가 높은 수준의 수학이나 물리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에셔의 대표작으로는 서클리미트라는 목판화 연작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에 발표한 서클리미트-악마와 천사입니다. 현대 건축의 공간 인테리어에 자주 표현되는 패턴화 기법인 테셀레이션 방식으로 천사와 악마의 연속된 이미지가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입니다.   어쩌면 현실세계를 부정하듯한 그의 작품들은, 실제로 방안에 있으면서 지루한 잇랑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문제 풀이를 하는듯이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줄을 모른답니다. 이상한 점을 찾아 낼 수도 있고, 찾지 못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여행을 좋아해서 이탈리아나 스폐인등지를 평생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그이유로는 네덜란드가 지루해서라는것도 있습니다.하지만 그가 만들 네덜란드의 풍경들, 특히 델프트를 그린 그의 작품역시 정감이 많이 가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에스허르 또는 에셔의 작품들을 보셨는데요! 보면서도 저도 눈을 의심할만큼 재미있고 일상적이지 않아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까지 든답니다 ! 재미있는 착시 사진 많으니 담아 가시거나 소중한 댓글 부탁드립니다 ^ㅡ^  
389    시와 그림은 사촌지간이다... 댓글:  조회:2126  추천:0  2017-10-11
MC 에셔의 약력: 이름은 Maurits Cornelis Escher로 보통 엠씨 에셔(M.C. Escher)로 통합니다. 네덜란드 사람으로 1898에서 1972까지 살았던 사람이요. 통상 이 사람 작품은 5개의 시간대로 구분하는데 초기 2기간은 정물이나 풍경에 치중한 반면 후기에는 기묘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예를 들어 초공간의 분할이나 시각적 파라독스 혹은 지그소우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작품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그의 작품은 석판화(lithograph)라는 미술기법으로 표현된 게 대부분입니다.  ------------------------------------------------------------------------------------  오늘 님들께 보일 작품은 바로 이 '지그소우 퍼즐'을 주제로 한 작품들입니다. 보통 테슬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불르고요. 요즘과 같이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한 시대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작품들이지만 1930, 40년대에 오로지 자와 연필 그외 작도에 필요한 몇몇 기구만 가지고 이 작품들을 도안했다고 상상해보면 그 정성에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환상적인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다고 보면 되고요 ^ ^.  첫번째 작품은 '변형 I'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테슬레이션 시리즈 중에서 상당히 초기것인데 짐작하시다시피 '변형 II'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좌우로 너무 길어 이 자리에 올리기 힘드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지중해의 한 동네를 묘사한 것과 같은 모습이 좌측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집들이 점점 기하학적인 무늬로 변하다가 종래에는 한 사람의 모습(중국인이나 베트남인 같아 보이오)으로 '변형'을 하게됩니다. 직접 두꺼운 종이위에 이 모습을 전사해서 퍼즐로 만들어 보아도 재밌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Metamorphosis I (1937)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하늘과 바다'라는 작품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물밑의 물고기가 하늘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로 되는 지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이고요. 이 두 작품은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I은 좌우대칭의 모습이고 II는 좌우비대칭의 모습으로 작가의 면밀한 도안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Sky and Water I & II (1938) 네 번째 작품 역시 같은 구성인데 이번엔 가장 밑의 무늬가 올라갈수록 두 가지 서로다른 형태로 변형하게 됩니다. 하나는 집을 구성하는 블럭이 되고 나머지는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구요.  Cycle (1938) 다섯번째는 'Verbam'이라는 작품으로 화면상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가운데 Verbam이라고 써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구요. 제가 갖고있는 책으로 쌔운 스캔은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에 가는 선들이 많아 므와레의 압박이 심합니다. 그래서 그냥 밑에 그림으로 만족하기 바라옵니다. 이 작품은 위의 주제의 총정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운데부터 시작해서 가장자리의 여섯 부분으로 이동해 가면서 총 여섯가지의 패턴으로 변하게 되는 거요. 새, 물고기, 개구리가 각각 흰색과 검은 색의 무늬로 되어 여섯 면과 만나게 되는 거요.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겠구요.  Verbam (1942) 여섯번 째 작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디자인 학도를 꿈꾸며 미술공부를 하던 시절 이 작품을 보고 수없이 따라 빼끼던 작품이었습니다. 잘 보시면 선인장과 술병, 술잔 그리고 뻣뻣한 재질의 종이(혹은 오래된 탓에 수분을 살짝 머금고 있는 종이라고 봐도 좋소)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우측 상단 책 등 너무나 잘 그린 한 폭의 정물데생이라고 생각한 탓이었구요. 하지만 당시엔 이 작품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몰랐었습니다. 2차원의 스케치북에 빼곡히 있는 도마뱀 무늬가 3차원상을 가지는 실제 도마뱀으로 변형되는, 그리고 다시 2차원상으로 되돌아가는 끝없는 저 순환을 보시기 바랍나다 (다시 보니 악어에 더 가깝넹^ ^).  Reptiles (1943)  이번 주제는 ‘공간왜곡’입니다. 에셔는 수학적인 분할을 통해 왜곡된 공간을 많이 작품에 반영하였습니다.  1. 손에 든 반사된 구  보통의 미술가들도 자신의 자화상정도는 하나쯤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에셔는 독특하게도 자신의 모습을 손에 들고 있는 금속구에 비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실제로 이렇게 구를 들고 몇 시간씩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그린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먼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한 뒤 캠버스를 볼록한 형태로 표현되도록 분할한 뒤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그린, 면밀하게 3D 기하학적으로 디자인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초기작중 명작에 속하는 것이구요.  Hand with Reflecting Sphere (1935) 2. 발코니 이 작품은 지난 번에도 올렸던 것으로 마치 볼록렌즈가 중심에 있는 평면거울에 비친 상을 사진으로 찍은 듯한 작품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찍은 사진을 그대로 빼껴 그린 게 아니라 평면을 모눈종이 그리듯이 수많은 선으로 분할한 뒤 중앙의 곡선을 디자인하여 거기에 보통의 그림을 그리듯이 그린 것입니다.  Balcony (1945) 3. 세 개의 공 I 아마도 그래픽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님들은 이런 작품 정도는 쉽게 컴퓨터 상에서 쌔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든 1945년이라면 그게 그다지 쉽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온전한 형태의 원을 그린 후에 잘게 원을 분할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었이 (가장 위의 공). 그 다음은 원을 약간 잘라낸 형태의 도형을 만들고 다시 분할하여 이번엔 한 부분이 잘려나간 형태의 입체적인 구를 표현한 것이 (두번째 세번째 공). 말이야 이렇게 쉽다만 실제로 이걸 펜, 자, 컴파스같은 원시(?)적인 도구로 작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Three Spheres I (1945) 4. 세 개의 공 II 이번엔 세 개의 공을 그리되 첫번째는 투명한 유리구슬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모습이 반사된 금속구라고 보면 되겠고 세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구슬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미술공부하던 시절 저 세번째 공이라도 빼껴볼려고 안달을 하던 때가 아련히 생각이 나는군요.  Three Spheres II (1946) 5. 이슬방울  나뭇잎 위에 떨어진 이슬방울입니다. 위에 올린 반사된 구와 일맥상통하나 반사된 형상(창문으로 보이오만)과 투영된 잎맥까지 표현한 작품입니다. Dewdrop (1948) 6. 물결이 있는 표면  쓸쓸한 겨울밤, 달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비친 물웅덩이에 물방울이 두 방울 떨어진 모습을 포착한 듯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스케치가 있습니다. 먼저 나뭇가지와 달을 정상적으로 그린 뒤 두 개의 타원을 겹쳐 그리고 그 아웃라인에 맞게 나뭇가지를 표현한 것이구요. 기회가 되면 그 스케치들도 올리겠습니다.  Rippled Surface (1950) 7. 화랑  에셔 자신의 작품이 걸려있는 한 화랑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잘 보면 위에 소개한 “세 개의 구 I”도 보일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작품들과는 또 다르게 전체적인 구도가 가운데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비틀린 왜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Gallery (1956)         미술가 에셔의 작품과 수학 네덜란드의 미술가 에셔(Escher)는 미술에 문외한이 필자가 그림만 보고 누구의 작품인지 판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술가 중의 하나이다. 에셔는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을 이용하여 대칭의 미를 느낄 수 있는 '테셀레이션' 작품을 많이 남겼다. 테셀레이션이란 동일한 모양을 이용해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이나 겹쳐지는 부분 없이 채우는 것을 말한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는 단어는 4를 뜻하는 그리스어 'tesseres'에서 유래했는데,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사각형을 붙여 만드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삼각형이나 정육각형 등 다양한 모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해서도 테셀레이션을 만들 수 있다. 테셀레이션의 예로는 욕실의 타일, 보도블록, 조각보, 전통 문양 등을 들 수 있는데, 테셀레이션이라는 생소한 용어 대신 '쪽매맞춤'이라는 정감 넘치는 순 우리말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 초등학교 수학 교과서에는 '옮기기', '돌리기', '뒤집기'라는 새로운 내용 요소가 포함되었다. 이는 각각 '평행이동', '회전이동', '반사'라는 수학 용어에 대응되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테셀레이션의 기초가 된다. 평행이동(옮기기)은 도형을 일정한 거리만큼 움직이는 것이고, 회전이동(돌리기)은 한 점을 중심으로 도형을 회전시키는 것이며, 반사(뒤집기)는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모양을 뒤집는 것이다. 조개껍질과 불가사리를 반복적으로 배치한 에셔의 그림은 회전이동을 이용하여 면을 채운 테셀레이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에셔의 작품 ‘도마뱀’에는 도마뱀이 2차원 평면에서 나와 3차원 입체로 옮겨갔다가 다시 2차원 평면으로 되돌아가는 순환 과정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배경은 개구리 모양으로 채워진 테셀레이션으로 되어 있다. ▲ 에셔의 테셀레이션(左)과 도마뱀(右)  ⓒ ▲ 에셔의 천국과 지옥  ⓒ 에셔의 그림에서는 부분이 전체를 닮으면서 자기 유사성을 갖는 프랙탈(fractal)의 아이디어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천국과 지옥’에는 검은색 박쥐와 흰 천사가 중심에서 주변으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면서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프랙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흰색을 위주로 보느냐 검은색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느낌이 달라진다. 전문적인 수학을 배우지 않은 에셔가 다분히 수학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보면, 미술과 수학의 상상력은 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388    2차원의 평편 위에 3차원 공간을 만든 화면의 연금술사- 에셔 댓글:  조회:1789  추천:0  2017-10-11
가상과 현실을 교차하는 상상력    -에셔의 ‘도마뱀’       반복·순환의 수학적 고리 속 돋보이는 테셀레이션 기법      네덜란드의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1898∼1972).  그는 공간 착시와 불가능한 장면의 사실적 묘사, 정다면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만든 화면의 연금술사다.   ‘수학적 화상’이라고 하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인 공간과 평면의 마술적 구조를,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개념을 토대로 평면의 규칙적 분할에 의한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연결 그리고 대립과 대칭을 통한 모호한 시각적 환영 속에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 등을 다뤘다.  그는 스페인의 그라나다(Granada)에서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을 방문했을 때 그 궁전의 장식에 그려진 무어인의 양식과 뫼비우스의 띠에 매료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처음 에셔의 작품을 접하면 예술적 감흥보다는 지극히 정적인 차가움만 감도는 수학적 세계와 같다고 하지만 반복과 순환이라는 냉정한 수학적 고리 속에 잔잔한 감동이 있다. 작품은 스케치북 속 도마뱀이 밖으로 빠져나와 화가 주변의 물체들을 지나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다시 수많은 도마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적으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연출됐다. 여러 마리의 도마뱀 다리와 머리가 뒤엉켜 있지만 하나하나 정확한 원형을 이루는 이 기법은 그의 전매특허인 ‘쪽매맞춤’이라 불리는 테셀레이션 기법이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가상과 현실의 기묘한 세계는 확실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에 대해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순간 그의 상상력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우리는 그에게 다시 내보낸다.     국방일보 2013. 03. 24 ...............................................................................................................................................   순환 —에셔의 「도마뱀」        최라라           ……그리고 당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내 영혼은 잠시 무중력이겠습니다 어둠 이전의 당신이 당신 이후의 어둠을 점선으로 묶습니다 자라지 않는 것은 슬픔만입니다 나는 당신의 걱정만큼 흐르는 중이고 어둠으로부터 온 중력이 감각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순환 중이므로 두꺼운 옷을 입은 채로 잠들겠습니다     어느새 당신 밖입니다 그리고     캄캄한 현실은 꿈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처음을 모르는 파충류 뒤돌아볼 수 없으므로 꿈은 앞으로만 흘러가는 벽입니다 아무리 걸어도 외워지지 않는 숫자들이 거기 있으므로 나는 유일하게 배란기를 기억하지 않는 암컷입니다 내 숫자들은 삼각이나 사각의 기호로 무성해져 내가 모르는 달력에서 꽃밭이 됩니다 꿈은 의미를 잃은 단 하나의 꽃밭입니다     그리고……이곳은 나도 모르는 오후입니다 책상 위로 햇살이 가득합니다 작고 따뜻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이제 잠들어도 될까 이제 잠들어도 될까 내 목소리를 내가 들으며 사라집니다 이곳은 나도 모르는 당신 밖입니다     이제 당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장웹진》2014년 4월호 -------------- 최라라 /  2011년 《시인세계》로 등단.       에셔 병원     함기석       빛이 검게 싹트고 있다 중앙 707 사체보관실 내 따뜻한 폐에서 이상하다 내가 언제 죽은 거지? 창가엔 꿈이 담긴 빈 컵, 개나리 꽃 몽우리가 노랗게 싹트고 컵의 내부에서 비밀이 새고 있다   아침은 아침마다 새고 은은한 새소리가 개나리 꽃 가지를 흔든다 창틈의 빛이 내 눈에 매캐한 연기를 방사하는 비단뱀 같다 이상하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는 거지? 누가 날 죽인 거지? 이 깊은 칼자국은   지네 닮은 실밥이 팽팽히 부풀고 있다 죽은 자의 혼백이 제 살을 열어 끔찍한 황궁을 엿보는 시간 나는 나에게서 물러나 내 주검을 내려다본다 죽음은 흰 침과 붉은 오줌이 뒤섞인 시음용 마취제 이상하다 내가 어디서 이 약병을 마신 거지?   창가의 새들이 탐정돋보기처럼 떠든다 푸른 환자복과 휠체어가 7층 복도에서 웅성웅성 떠들 때 두 눈이 쌍둥이 블랙홀 같은 병원장 에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의 사체보관실로 들어온다 입에 입을 없애는 마스크를 쓴 자들이 뒤따르고   발소리는 침묵을 깨며 이심률이 점점 커지는 타원을 그린다 휘어진 벽엔 휘어진 옷 휘어진 인체해부도 이상하다 왜 이 자들이 나를 옮기는 거지? 망각은 기억할수록 점점 모래가 새어나가는 육체의 항문 고무장갑 낀 두 손이 힘껏 내 폐를 열고 있다   아파, 아파요! 하지 마세요! 내가 소리치자 창밖 은사시나무의 새들이 흩어지고 폐허의 황궁 바닥에서 벌레들이 떨어진다 죽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것들뿐인 이 세계 썩은 살에서 기억은 가까스로 입술이 싹튼다 손톱이 싹튼다                             —《포지션》2014년 봄호 ------------- 함기석 /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손을 그리는 손          김미정                연필 끝엔 가늘게 선이 빠져나오고, 그 길을 따라가는 당신, 타오르는 손가락을 깎고 있어요. 눈동자를 그려요. 오늘의 손끝이 부풀어 오르네요.        손가락을 삼킬 거야, 흰 재로 길을 만들고 처음 보는 손바닥 밖으로 걸어 나가요. 손이, 손을 매달고 가는 도화지마다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요. 당신을 향해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손이 손을 뚫고 자라요. 잘 그려지지 않는,        눈동자를 꺼내요. 손바닥을 뒤집어 불꽃으로 타오르는 손가락을 보고 있어요. 왼손이 그려지면 오른 손이 지워지는 날들. 누군가 투명한 손을, 손을 흔드네요.                                    —《시와 반시》2013년 겨울호 ------------- 김미정 /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손을 그리는 손 ―M. C. Escher의 석판화 「Drawing Hands」      강인한           흰 드레스셔츠에서 빠져나온 손 연필을 쥐고 과거에 매달리고 있는 기억력이 나쁜 손이 있다.     의심이 많아서 만져보기 전엔 절대로 믿지 않으며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리는 실증(實證)의 습관.     완벽하고 높은 일상의 궤도에 진입하기를 기도하는 손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꿈속에서 건져낸 표정은 지금 여기서의 삶이 지루하다.     검은 탁자 위 회색 중절모 속에 접혀 있다가 줄줄이 풀려나오는 붉은 리본, 꾸깃꾸깃 접혀 있다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한 마리 흰 비둘기는 당신의 두 손이 간절히 바라는 꿈.     인생이라는 두꺼운 책 표지를 잠시 덮어두고 당신은 오른손으로 연필을 쥔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림자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늘게 그려지는 선, 선들을 모아 쌍둥이처럼 닮은 당신의 오른손을 향하여 연필 끝으로 좇아가고 있는 내 오른손의 목마름이여.     출처 :여향예원  =====================
387    네덜란드 판화가, 초현실주의 화가 - 에셔 댓글:  조회:2265  추천:0  2017-10-11
“수학자들은 그 미지의 영역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수학자들은 문을 여는 방식에만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문 뒤에 있는 풍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름다움과 순수함이다.”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네덜란드 출신의 20세기를 대표하는 판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초현실주의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년). 그는 1898년 네덜란드에서 토목 기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에셔는 1919년에 하를렘건축장식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잠시 배웠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권유로 그래픽 아트를 공부하게 된다. 그림 그리기와 목판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 에셔의 초창기 작품은 대부분 풍경화였다. 그런 에셔에게 그의 인생과 작풍을 지배하게 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이다. 1922년, 당시 25세의 에셔는 14세기 이슬람 궁전에서 무어인들이 만든 아라베스크의 평면 분할, 기하학적 패턴에 깊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 1936년 그는 다시 한 번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고 그의 작품에 기하학적 문양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세밀한 선을 사용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는 묘하게도 예술비평가 혹은 화가보다는 수학자, 건축가, 과학자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이처럼 20세기 초현실주의 아트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에셔의 작품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국내 최초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반복되는 시간과 그 시간을 순환하는 공간 그리고 평면에서 입체로, 또한 입체에서 평면으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마술과 같은 이미지를 창시하는 에셔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작품 130여 점이 공개된다.  그의 작품들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1948년 작 이다. 작품은 압핀으로 고정된 도화지 위에 펜을 쥐고 손을 그리고 있는 손과 그림 속 손이 펜을 든 손을 잡고 있는, 도무지 현실 공간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또 하나는 1960년도 작품인 ’이다. 에셔는 중세 수도원을 그린 이 그림 속의 ‘끝없이 반복 순환되는 계단’을 통해 수학자 펜로즈의 ‘삼각형 이론’을 보여준다. 이 계단은 3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즉 3차원의 대상을 2차원 공간에 왜곡해 표현함으로써, 영국 심리학자인 라이오넬 펜로즈와 아들 로저 펜로즈가 발표한 끝나지 않는 계단(펜로즈의 계단)을 2차원 평면에서 펼쳤다. 일종의 무한계단의 역설이다. 한마디로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아우르는 이미지의 재탄생, 바로 에셔인 것이다.  또한 에셔의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수학적 소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다. 이는 새, 물고기, 도마뱀, 개, 나비, 사람, 사자 등의 동일한 모양을 이용해 틈이나 포개짐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완전하게 덮는 것으로 반복되는 패턴과 기하학적 무늬를 수학적으로 변환시킨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에셔는 인간의 시각, 지각 능력이 빚어내는 착각과 진실에 대해 독창적이고 다면화된 방법으로 평생 448개의 판화, 약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에셔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복과 순환, 변형, 무한 공간 등이 주는 낯선 생경함과 불안감이다. ‘순수한 수학자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가에 가깝다’는 말처럼 에셔가 펼치는 ‘종이 위의 마술’은 독특한 시각 언어로서 그의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에셔의 이 같은 작품들은 당대 평단에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의 작품들은 예술로서, 또한 현대 건축과 공간 인테리어, 그래픽 디자인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상상력이 빚어내는 인간의 시지각의 착각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이다.  ///글 김은정(프리랜서)  ====================================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는 미술과 수학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다. 그는 중등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수학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수학적 원리를 시각적으로 표상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그 당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수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에셔는 1936년에 알함브라 궁전의 이슬람 미술작품을 보고 수학적 패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공간의 기하학뿐만 아니라 공간의 논리를 이용하여 평면에 표현된 구조(유클리드 기하) 및 사영기하학(비유클리드 기하)에 매료되었다. 에셔는 반복되는 기하학적 패턴을 이용하여 대칭의 미를 느낄 수 있는 테셀레이션(tessellation) 작품을 많이 남겼다. 테셀레이션이란 동일한 모양을 이용하여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이나 겹치는 부분 없이 채우는 것을 말한다. 그는 한 가지 모양의 정다각형으로 바닥을 채우는 정테셀레이션(regulaar tesselation)은 물론, 2개 이상의 정다각형을 이용하여 2개 이상의 배열이 있도록 다각형을 채우는 반정테셀레이션(demiregular tesselation)을 이용하였다. 또한 기본도형을 이용하여 놀라운 패턴을 만드는가 하면 반사, 평행이동, 회전이동 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유형을 연구하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에서 정다면체, 플라톤 입체, 위상기하학의 시각적 측면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수학적 패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그의 작품에선 늘 수학의 향기가 난다. - 염지현 제공 에셔는 예술가였지만 수학을 사랑했다. 보통 사랑한 게 아니라 지독히 사랑했다. 덕분에 수학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풍겨오는 수학 냄새(?)를 쉽게 맡을 수 있다. 에셔는 전통 예술 영역에서 이단아로 불리던 흑역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판화나 회화,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는 물론 수학, 건축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20세기 대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특별한 수학적 시각과 공간감, 영감이 반영된 작품은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오마주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에셔(또는 에스허르)’라는 작가는 몰라도, 영화 ‘인셉션’에 등장했던 무한계단이나 불가능한 도형을 대표하는 착시 삼각형은 누구나 한 번 쯤은 마주했을 확률이 높다.  ● 국내 최초, 에셔 특별展 기자는 그동안 에셔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사를 종종 써왔지만, 그때마다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을 맘껏 보여줄 수 없었다. 이미지 사용 권한을 얻는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그 절차를 진행한다고 해도 대표작 1~2점 이외에는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셔의 진짜 작품을 100여 점이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이번 전시를 주최한 박사진 와이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에셔 재단을 설득하는데 거의 3년이 걸렸다”며 “풍성한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재단뿐만 아니라 개인소장하고 있는 수집가에게도 여럿 도움을 받아 준비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에셔는 전문 수학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수학 논문을 중심으로 대칭 분야를 공부했다. 특히 그는 헝가리의 수학자 조지 폴리아의 ‘평면 대칭군’에 관한 논문을 읽고, 17개의 평면 대칭군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그 결과 ‘평면을 규칙적으로 나눠 공간을 채우는’ 자신만의 테셀레이션을 완성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별히 그의 테셀레이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도마뱀’과 관련된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거울의 방 안에 놓인 도마뱀 입체 조형물을 활용하면 특별한 기념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에셔전은 연휴가 끝나고 그 주에 막을 내린다. 워낙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에셔 재단의 허가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 기약할 수 없다. 긴 연휴 중에 서울 나들이를 할 기회가 있다면 광화문에 들러 에셔전을 보면 어떨까. 수학, 과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초등생 이상의 자녀를 둔 독자라면 더욱이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염지현 기자 ===========================              
386    [이런저런] + "그림의 마술사" =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댓글:  조회:2595  추천:0  2017-10-11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였던 현실에서 절대 불가능한 이 도형! (어질어질..) 정보보기 영국의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가 만든 이 '불가능한 도형'을 미술에 접목한 화가의 전시회가 열렸다고 하는데.. 정보보기 바로 수학적인 계산으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그리는 네덜란드의 화가 '에셔'가 그 주인공!   에셔의 작품은  많은 예술가, 건축가, 수학자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현재 초중고 교과서에도 언급된다고~  '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전'- '그림의 마술사'라는 타이틀처럼 수학적으로 계산된 선을 사용하여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을 창조해내는 마술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정보보기 전시는 크게 시간과 공간, 풍경과 정물, 대칭과 균형, 그래픽 이렇게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어ㅎㅎ # 시간과 공간 시공간의 왜곡과 착시를 바탕으로 한 초현실적인 작품부터 만나볼까? 정보보기 서로를 그리는 두 개의 손 그림은 에셔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데.. 현실에서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넘나 리얼해서 당황잼... 정보보기 또 펜로즈 삼각형의 일종인 '무한 계단' 착시가 담긴 작품을 보면 멀쩡한 내 눈도 믿지 못한다는 거 동의? (어~ 보감~)
385    詩도 세로가로 이등분법(二等分)적 그늘과 양지로 표현해야... 댓글:  조회:2432  추천:0  2017-10-10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3) :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혼(魂)의 고향(故鄕)을 찾는 색채(色彩)의 대교향곡         푸른 서커스   1924년부터 샤갈은 서커스를 통하여 많은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려는데 열중해 왔다. 그는 그 주제를 때로는 많은 팟슈로, 혹은 아크와틴트의 판 형식으로, 또 유화로 많은 경험을 했고, 또한 서커스는 그의 화면 공간을 그만큼 자유롭게 설정하는데 성공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그의 화면에는 이후 자주 선량하고 우수에 찬 눈이 등장하고, 또 물고기가 등장한다. 투명도가 높은 푸른색 속에 그가 항상 그려오던, 이미 그에겐 일상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물 속에 잠기듯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빨강과 노랑, 초록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푸른색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이후, 이 몽상적이며 환상적인 랍소디 인블루에 의하여 연인들의 로맨스를 물들일 것이다.         검은 장갑을 낀 피앙세   6년 후 샤갈의 아내가 될 벨라 로젠펠드를 그린 초상 화이다. 이 해에 처음으로 벨라를 그때까지의 여자친구 테아의 소개에 의하여 알게 되어, 그의 영원한 반려자로의 한 여성상을 이 유태 여성으로부터 찾게 되고, 그 선택의 순간을 기념하기 한 초상화로 그려졌다. "돌연 나는 느꼈다. 내가 살아나갈 길은 테아와 함께 라는 것을! 벨라만이 내 아내라는 것을." 샤갈은 바로 전년에 테아를 모델로 한 를 거친 표현주의적 묘법에 의하여 그린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청산하고 이 작품에서는 엄격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서로 융화하듯 한, 샤갈의 독자적인 여성미 표현에 있어 최초의 기념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까만 배경 앞에 하얀 의상, 그리고 까만 장갑의 대조에서 기품 있는 화면을 느끼게 된다.       시인 또는 3시 반   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샤갈은 아폴리네르 와 친교를 맺게 되어, 아마 이 작품은 아리네를 그린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차츰 큐비즘의 영향에 깊이 들어간 작품으로, 특히 드로네나드 라 프레네 등과 같은 공통의 쾌적하고 간결한 포에지가 여기 흐르고 있다. 그러나, 화면을 단지 기하학적으로 통일된 분할만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입체파적인 분할은, 화면의 긴장과 운동감을 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응했을 뿐이라는 것을 분활 되지 않은 나머지 화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운데 자리잡은 시인의 상념을 위하여, 비스듬히 넘어지는 술병과 테이블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과일, 칼, 그리고 왼쪽에 앉은 고양이 등이 중앙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 구도이다. 초록의 얼굴을 거꾸로 놓는 그 비극적 세계관은 정착되지 않은 곡예의 방랑하는 슬픔 같은 것일 게다.           병사와 촌 여자   이 작품은 1910년 샤갈이 파리에 도착하여 그 다음에 그린 작품이다. 이 무렵 그의 화제가 된 것은 거의가 향수에 젖은 그의 고향 이야기나 풍습 또는 사람들의 일상 생들이었다. 이렇게 상상력이나 기억력에 의존하여 제작을 했기 때문에 대상을 묘사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극단적인 데포 르마숑에 의한 환성적인 화면을 구축할 수 있었고, 독특한 그의 풍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파리에 서 그린 그러한 작품들 중에는 병사가 여자를 희롱하는 장면들이 더러 있는데,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고향의 추상을 파고 들음으로써 화면의 공간을 하나의 추상공간으로 심리적 깊이를 더해 가려는 의도를 알아볼 수 있다. 전경의 인물이 취하고 있는 손의 모양과 함께 우스운 포즈의 무언극이라도 하는 모양, 뒤쪽에 뛰고 있는 인물과 함께 유머러스 한 화면을 만들고 있다.         아담과 이브   이 작품 샤갈의 작품 중에서 면을 가장 세분화한 작품 일 것이다. 당시 그는 벽에 세잔의 복제화를 몇 장이나 붙여 놓을 정도 세잔의 만년의 입체파의 모체가 된 조형 이념을 동경하였고 "우리들은 모두 세잔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 레제, 브라크에 가장 심취해 있었다. 일찍이 제작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해체를 철저히 파고들려고 결의하고 있었던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추측할 수가 있다. 이 작품은 형태가 그렇게 세분화되어도 유동적이고, 음상이 또렷 또렷한, 마치 바하의 토카타를 듣는 것처럼 장엄하다. 이러한 수법은 후일 렝스 성당이나 메쓰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에 되살아난다. 샤갈의 다른 작품에도 그러하지만, 인물의 표정에 있어서 음산한 면은 금단의 열매를 딴 악의 주 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이 작품의 부분적으로나마 처음으로 파리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왼쪽 창밖에 거리와 에펠탑이 그려진 현실로의 파리와, 오른쪽 벽에는 회상으로서의 비테부스크를 나타내어 그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있다. 그가 그린 얼굴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괴신(怪神)의 것으로, 그 현실성은 일곱 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되고 있다. "나무가 뜻밖에 엉뚱한 것으로 하고, 별안간 자신의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인데 왼 손이 일곱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세계를 나는 극히 의적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E. Roditi와의 대화) 하지만 이 일곱 손가락은 누르고 있는 화포(畵布)속에 그려진 그림의 세계와 조화되며 다시 배경의 벽에 그려진 헤브라이 문자에 속하는 신기한 문명의 비밀과 조화되고 있다.         나와 마을   파리에 나온 샤갈이 처음엔 고갱의 원시적인 생명력에 감화를 받기도 하고, 고호의 정적인 표현 특성에 영향 받기도 했으나, 곧 입체파적인 화면 분할기가 시작되어 이 작품을 그린 해부터 3년간 그런 작업 계속된다. 이 작품도 그의 마음 속에 깊이 꿈 비틀거리고 있은 추상의 이미지를 원과 삼각,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서 평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점은 그러한 화면 분할의 수법과, 나와 마을의 거리를 이렇게 친밀화시켜 보여주는 심정에 의한 또 다른 질서의 힘이다. 그 힘은 소와 나를 같은 원 속에 접근시켜 과거와 현의 나를 일체화시키며, 나의 얼굴빛을 푸른색으로 한 것은 후의 과 같이 물리적 중심과 다른 중심을 가진 별세계에 상응하게 하기 위한 필연의 변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팔이   샤갈은 노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작품 테마로 많이 다루고 있다. 그것은 그 유년기에 흔히 마을에서 대하던 친척이나 이웃 노인들을 통하여 뭔가 인생을 이야기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빨간 하늘과 검은 거리를 배경으로, 신문을 팔아서 사는 한 노인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내일이 없는 산 숙명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한 한 노인의 상을 화면에 영원화한 듯한 작품이다. 이 노인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에 늘어뜨린 신문의 뭉치로서, 이것이 강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뭉치의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문자 "여기에 유일의 팬터지가 있다."라는 말로써 대신되고 있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그것들은 시간의 추적이며, 오른쪽 멀리 교회가 상징하는 영원과 서로 맞서고 있다.         아크로바트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파 화가들이 서커스에 흥미 갖고, 그런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샤갈도 서커스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전년경 부터 인데, 그는 후일 마술적인 세계, 고도의 포에지의 형(形)으로서 서커스에 자신이 끌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회화도, 언어도 결코 서커스의 정확함에는 미치지 못한 다."라고도 말하고 있듯이,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정체는 정확함에 있다. 발레리가 말한 '댄스와 같은 정확함'은, 후일 원숙기에 전쟁, 혁명, 성서적 광경 등을 그린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묵시록 적인 혼돈과 거리가 멀다. 아크로바트의 정확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화면에 대담하게 인물을 배치하고, 큐비즘 분석의 정도(精度)와 결합된 호사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아이를 밴 여자   화면의 지평선을 아래로 내릴 수 있는 데까지 내리고,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를 속에 가진 성모가 우뚝 섰다. 18세기까지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이콘 (聖像)의 전통으로, 아기 예수를 원형이나 타원형의 테두리 속에 넣어 성모의 뱃속에 투시시켜 그리는 것은 넓게 알려진 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 속에 그 전통을 현대적 성상으로 그렸다. 태아 주변에 그려진 타원 속의 소우주와 성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와의 교감이 샤갈의 분명하고 우아한 필법에 의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입체파인 화면 분할법은 차츰 화면에서 오히려 내적으로 샤갈의 조형적 의도에 순화되어 공간을 더욱 깊게, 크게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성모의 표정이나, 스카프, 치마 등에서 보여지는 세속성은 오히려 속(俗)과 성(聖)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바이올린을 켜는 여인   샤갈은 그의 일생동안의 작품 속에 꽃다발, 말, 소, 닭,서커스,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의 악기를 되풀이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대하던 그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도 그의 어린 시절에서 투르기는 해도, 담뿍 흥에 겨워 그리움과 회상에서 그린 것일 게다. 지붕 위에 선 인물은 초자연적인 크기로 그려져 지구를 딛고 선 남자 천사처럼 눈이 내린 지구 저쪽의 마을을 배경으로 흥겹게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나무 위 아래에 몇 마리의 새들이 그 소리를 즐기고 있고, 왼편에는 화환을 들고 세 사람의 남매가 소리나는 곳을 찾아 모여 들고 있다. 명확한 흑백 대조의 화면 속에 그 의 유년기의 회상을 듣는 듯하다.           산책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는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1914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그때 샤갈은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페트로 그라드의 미하이로스키 극장에 집결한 시인, 화가, 배우들이 미래의 문화성의 초석을 위하여 샤갈을 미술국장에 추대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여 비테부스크의 벨라 집으로 돌아와 화업에 전심, 사태를 관망했다. 이때 그린 작품 이나 은 이 시기의 사랑에의 찬가이다. 드디어 약탈과 파괴에 멍든 고향의 산하에서 첫딸을 얻은 아내를 넓은 우주 공간에 휘돌리는 이 작품은 매우 대범하게 처리 한 그의 동화적 표현에 의하여 매혹적이다. 그리고 빨강과 초록의 두 계통의 색채로써 그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맑고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있다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   비테부스크의 처가에서 명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그린 작품들에서 가장 대표할 수 있는 그의 사랑의 찬가가 바로 이 이다.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스타일에 있어 명확한 하나의 전기를 가져왔다. 화면 전체에 명쾌한 빛이 넘치게 되고 더구나 억제된 약동감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까닭은, 배경 오른편에 두텁게 노란 마티에르가 왼쪽의 청색과 효과적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세 인물을 일체화하는 요소에 의하여 심정의 흐름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딸 이다가 천사처럼 아버지의 머리위 에서 날개치고 있고, 그 주변에서 부부의 몸 쪽으로 붙어서 흐르는 짙은 파랑색은 윤곽이 아니고 피와 살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선은 처음 나타난 것으로 후일의 서정적 작품에서 더러 나오게 된다.           전원의 창   아늑한 녹색 정원을 창밖에 둔 신혼의 보금자리다. 선명한 초록 화면의 한 중간에 하얀 간이 커튼이 걷어 올려져 있다. 밤에는 커다란 창을 반만 가릴 수 있도록 된 커튼의 백색이, 깨끗한 그들의 신혼의 감정처럼 청결하다. 사랑이 넘쳐 만물을 모두 같은 아름다움으로 찬미하려는 심정의 행복함이 숨김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 심정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창의 오른편에 쌓아 올려놓은 듯 두개의 옆 얼굴로 샤갈과 부인 벨라가 그려져 있다. 창 밖의 무성한 자작나무의 풍경은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세계로서 보는 감동을 갈색의 항아리와 빨간 과일을 자연에 바치는 물건으로 창을 통해서 생명이 일고 그 생명 다하도록 온갖 곳에 사랑의 중심이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이 이 화면을 꽉 메운다.       부인기수   1924년 이후 샤갈은 완전히 서커스를 파고 드는데 사로잡혀 있었다. 확실히 이 세계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통하여 유태 예술계와의 협력 시대에 몸에 익힌 새로운, 경쾌하고 대범한 필법을 충분히 소화시켜 나간 것 같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그린 이란 작품과 함께 이후 또 한 단계 그의 원숙기에 한 발자국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 함께 곡예사를 그리는 작업을 통하여 그 형(形)의 데생적인 묘사가 아니라 해방된 호방한 필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그의 새로운 발견은 형은 데생으로부터 자유이고 색채는 형에서 자유라는 것, 평면적으로 색을 칠하는 가치가 얼룩으로 바 뀌고, 새로운 기호(말의 배면에 있는 기수의 손과 같은)의 발 등... 그는 속박되는 틀에서 한 겹 탈피하는 것이다.           농민의 생활 : 러시아생활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도 되고 싶지 않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 고향이여, 너는 에크스(세잔이 태난 고장)의 일을, 귀를 자른 화가의 일을, 큐빅(立體), 4각, 파리의 일을 들었느냐? 비테부스크여, 나는 너를 두고 간다." 자서전 '나의 생애'에 결별사를 놓고 파리에 다시 온 샤갈 이었으나, 프랑스의 자연미를 알게 됨에 따라 다시 살아나는 것은 고향의 산하였다. 이 작품은 1925년의 여름을 몽쇼베에서 지내면서 아름다운 그 풍광에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농부와 말의 정다운 관계, 그리고 멀리 보이는 주막, 그 주막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춤을 추는 남녀 등, 꿈결 같은 그리움이 맑게 흐르는 기억의 샘물같이 그려져 있다.           창가의 이다   1923년 샤갈은 두 번째로 파리에 나오게 되고, 다음 해인 24년에 바르바상쥬 오베르 화랑에서 처음으로 회고전을 갖고, 여름을 브르타뉴에서 보냈다. 이 작품은 파리에 나와서부터 시작되는 제2 체불 기간의 새로운 그의 양식이 보여주는, 색채와 형을 사랑으로 융화시키는 수법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그림 이다. 브르뉴 해안의 경승지 브레아섬의 여름이 주는 풍치가 그가 사랑하는 딸 이다와 함께 융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첫 번째 파리 시절에 입체파의 영향으로 그렸던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화면의 분할과 어두운 그림자도 없이, 인물은 외계에 대하여 알맞게 균형 잡혀 안정되고 조용하게 앉아 있다. 전체의 색조와 마티에르는 안개가 스며든 것처럼 부드럽게 어울려 데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색채의 뉘앙스에 의하여 화면을 처리한 듯 부드러운 정감이 가득하다.           천사의 추락         두 얼굴의 신부 LA MARIEE A DOUBLE FACE 1927년 캔버스 油彩 99×72Cm 개인소장         레지스탕스   1937년에 샤갈이 유태인 박해의 현상을 보고, 또 독일과 이태리의 파시스트 대두, 조국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에 의한 숙청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의 젊은 피를 끓어 오르게 했던 10월 혁명을 상기시키는 대작을 계획, 이란 제목의 에스키스를 남기고 있는데, 그로부터 10년간 그것이 세 개로 쪼개어져 가필되어 완성한 것이 이 와 , 의 삼부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는 없고, 제목과는 달리 공방하는 적대 관계도 없다. 단지 위대한 수난자의 둘레를 부유(浮遊)하는 민중의 각고가 있을 뿐이다. 는 여기서 항독 (抗獨) 운동이 아니라, 운명에 항거하는, 유동하는 영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비테부스크의 광장에 누운 화가 자신에게 향하여 조그만 초록색 벽시계가 흘러내리고 있다.           피안(彼岸) 없는 시간   예감되어 왔던 비극은 드디어 세계대전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발발의 해에 몇 점의 대작을 그렸는데, 그 중 특히 이 작품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새로운 그의 양식의 도래를 알려주는 그림이다. 그가 계속해 오던 주제 '사랑'은 마침내 불길한 것의 그늘에 부각되게 되었다. 여태껏 그가 표현하던 고향 비테부스크를 어슴푸레하게 위에서 내려보게 하는 구도로 뒤에 깔고, 강한 그리고 기묘한 물상의 앙상블을 이루어 놓았다. 커다란 추시계와 함께 날개에 피칠이 된 커다란 청어 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사랑의 찬가 아닌 다른 슬픈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듯하다. 날아도 날아도 앉을 곳이 없는, 그래서 쉴 틈없이 날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을 이야기하듯, 유태인으로서 당시 절박한, 올 것이 오고 만 비극을 나내고 있다.           첼로 연주가   드디어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서 또 한 번의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샤갈의 작품 속의 연인들이 아주 몽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환상 속에 이제는 어떤 괴기적 요소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테부스크는 첼로를 켜는 인물 뒤에서 황량한 눈이 덮인 고장으로 되고, 혹은 다른 작품 에서는 건물이 눈을 번쩍거리기도 한다. 인간은 동물로 동물은 어떤 괴물로 각각 변모한다. 이 작품에서는 첼로가 샤갈 자신이 되고, 바이올린을 켜는 벨라는 조그만 송아지로 변하여 있다. 그들 자신이 화면에서 곡예를 하며 또한 다음 곡예를 예고하기도 한다. 특히 하늘이나 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마티에르, 얼룩지듯 엮어간 화면의 질감은 앞서 제작한 판화집을 통한 기법에서 온 것이다.         에펠탑의 부부 LES MARES DE LA TOUR EIFFEL 1938-39년 캔버스 油彩 148×145Cm 작가 소장       화촉   벨라의 죽음은 샤갈에서 있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불행과 고독을 이겨내는 9개월간 그는 붓을 들지 못했고 온갖 그림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았다. 드디어 화가(畵架) 앞에 앉을 기력을 회복하여 처음으로 그가 손에 잡은 그림이 12년 전 그가 사랑에 잠겨 살 때 그린 이었다. 시집가는 신부를 거의 중앙에 그리고, 주위에는 여러 형상과 인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이 오른쪽 반쪽의 테마로서는 이라는 이 작품을, 왼쪽 반으로서 앞에 소개한 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앞 쪽의 투명하고 짙은 푸른색에서, 밝게 멀리 배경의 위로 놓은 신부의 모습으로, 그 주위에는 선회하는 듯 여러 형상을 둘러 싸게 한 이 구도는 혼례를 주제로 한 샤갈의 전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록 눈의 집   샤걀의 초기의 작품들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우울한 어두움이 그 동안의 전쟁과 고독의 부조리를 통하여 풀어지고, 세계의 그늘과 융화되어 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정다운 회상의 대상이며, 몇 번이나 거듭 화폭에 나타나는 비테부스크까지도 이제는 유령의 마을처럼 그리고 있다. 낮을 비추는지 밤을 비추는지 구별이 되지 않은 초승달이 화면 광경에 초월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주막의 현현한 거안은 젖어 동공이 흐려 있다. 이 무렵에 그린 그의 작품 속에 보여주는 그의 낙원의 동물들은 대부분 이빨을 드러내고, 물고기는 선혈을 벌겋게 흘리는 날개를 갖는다. 이 작품을 그린 해에 사랑하는 벨라를 잃었고, 그래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집들, 고독하게 혼자 젖을 짜는 여인을 지켜보는 수호의 눈으로서 자기 자신의 눈을 동공이 없는 채 부드럽게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주변   이 작품 샤갈의 애처 벨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그려졌다. 파리 해방과 더불어 파리개방의 소식을 듣고 뛸 듯이 좋아하던 벨라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사람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샤갈은 그 슬픔을 통하여 그녀와의 삶을 이 작품에서, 마치 스테인 글라스의 작품처럼 투명하고 심오한 색으로 표현했다. 푸른 밤의 중앙에는 초승달 빛을 받은 비테부스크의 또 다른 밤이 둥글게 따로 박혀 있고, 이 둥근 조그만 지구를 아크 로바트로 변한 딸 이다가 붙들고 있다. 전경에는 피안의 사람들을 봄으로써 그것을 상기하고 있는 듯한 벨라의 표정과, 그피안의 하늘에 시선을 지는 자기 자신의 역전한 얼굴이 그려져 있다. 중앙의 원은 초승달과 함께 해와 달을 상징하고, 이후 많은 작품에 음양(陰陽)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기호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다.       순교자   순교자는 십자가가 아니라 커다란 일자 막대기에 매달려 있다. 순교자의 집은 불타 하늘에 시커멓게 연기로 채워지고 있다. 결혼 이후 25년간 행복하고 안락한 그 의 가정에 피어나던 사랑의 이야기를 환희와 더불어 그려오던 그의 작업은, 정세의 변화와 함께 전해 내려 오는 전설 신화에 그 자신의 현실을 일체화시키는 총합적인 작업으로 변하여 간다. 이 작품에 있어 순교자란 예수가 아니라, 나찌에 의하여 학살되어 간 이름 없는 무수한 유태인들 중의 하나이다. 죽은 자를 한 여인의 눈물, 명복을 비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의 기도, 바이올린으로 진혼 음악을 연주하는 녹색 옷을 입은 악사, 그런 것에 의하여 죽음을 보상받는 순교는 유난히 화면 중앙에 강렬한 인상를 주고 있다.           생 잰의 태양   1947년 6세의 샤갈은 프랑스로 돌아간다. 파리, 암스테르담, 런던등지에서 미국의 뉴욕, 시카고에 이어 회고전이 열리고, 6년 만에 새로 대하는 프랑스의 자연을 대하며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특히 생 잰 카프 페라에 머무르면서 남프랑스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남프랑스의 밝은 색채에서 다시 광명을 찾은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후일 봔스나 생 포 르에 결정적으로 새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은 별명으로 이라고도 제목이 붙어 있다. 또 이것과 관련된 연작으로 있다. 이 작품의 태양은 샤갈 특유의 새빨간 색으로 바다 위에 해바라기와도 같은 가장자리를 이루고 선명히 떠 있다. 한 여신이 남자의 얼굴을 받들고, 한 손으로는 태양을 붙들고 있다.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주는 여신이리라.         썰매와 마돈나   벨라가 죽고 난 이후 몇 점의 작품에서 샤갈의 색채가 얼마나 투명하며 깊이 있고, 아름답게 발색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의 내면 속에 깊이 깔린 슬픔을 그가 얼마나 알뜰하게 소화하며, 정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화면의 부분을 메운 투명한 푸른색 속에 몇 가지 드러낸 강렬한 대비색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샤갈이 돌연 화면에 매를 그리게 된 것은 어느 친구의 '천야일야(千夜一夜)'의 삽화를 경험에서라 한다. 어쨌든 그의 즐겨 쓰는 나선구에 의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 모자의 하강과 썰매와 말의 상승운동을 통하여 어떤 리얼리티와 결합한 점에서, 이 작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썰매를 타고 가던 마돈나는 상승하는 썰매에서 떨어져 땅에 떨어지고 있다.         다윗왕   후에 로서 통괄되는 작품의 중핵이 되는 3점의 회화가 바로 이 과 , 그리고 이다. 1951년 이 작품을 그린 해에 이스라엘을 재차 방문한 것을 계기로, 샤갈은 20년만에 판화집 성서의 못다 한 부분을 완성하고, 그 여세로 조각과 스테인드 글라스에 이르는 대하(大河)와도 같은 광범위한 제작에 들어간다. 그러나, 음악을 연주하는 의 작품은 예루살렘의 언덕을 앞에 하고 탄식하는 교부의 모습을 빼고는 종교적 요소는 전혀 없다. 샤갈의 종교화는 협의의 종교 성을 나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전 작품에도 공통적으로 인간의 비극성과 결합하여, 그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펼치는데 성공하고 있다. 샤갈 나름의 엄격성, 샤갈 나름의 비극성을, 샤갈 나름의 포에지와 팬터지를 통해서 엮고 있다.         십계판을 부수는 모세   이 작품을 앞에 소개한 , 과 더불어 대작 3폭의 기념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산에 올라 주(主)의 손으로부터 증표가 되는 십계판을 받고 있는 사이, 아론의 선동에 의하여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한 민중이 화면 우측에 보인다. 이에 너무 화가 나서 십계판을 던져 깨어 버린 모세의 모습을 화면 중앙에 세워 화면을 좌우로 갈라 놓았다. 이 작품은 이중으로 어떤 뜻을 시사하고 있다. 왼편 아래쪽에서는 거룩한 분노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 오른쪽 쪽에는 모세가 주(主)로부터 십계판을 받는 장면이, 다음 왼편 위쪽에는 십계에 따라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 마치 헤브라이적인 의미의 천의의 달성의 시간을 펼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바바를 위하여   "이제야 제2의 청춘이 열렸다."라고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노화가(老畵家 65세)는 부르짖었다. 25세 연하의 검은 눈의 어여쁜 러시아 여성 바바를 위하여 이 그림이 그려져, 그녀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샤갈의 바바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감동적인 이야기거리가 될 정도로서,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검은 색을 배경으로 한, 유난히 정결한 얼굴과 시원하고 맑은 눈이 노란 말의 초록색 눈과 대조를 이루며, 괏슈 특유의 수수한 맛을 풍겨준다.             당나귀가 있는 에펠탑   샤갈은 차츰 악몽에서 깨어나 1952년 제 2의 벨라라고 할 수 있는 발렌티나 브로스키와 재혼을 하고 광명의 세계를 얻는다. 그의 색채는 도기(陶器)와 스테인드 글라스의 제작에 발을 들려 놓으면서 그의 화면에 그런 기법을 효과적으로 적용시켜 독자적인 색채감을 개척 해 나갔다. 이 작품은 재혼을 한 다음 해 시작한 연작 중의 하나로서, 역시 3년 전에 그렸던 와 함께 투명한 도자기의 유약을 통해 빚어져 나오는 광택의 마티에르를 느낄 수가 있다. 에펠탑은 강철로 구성되어 하늘 위를 향하여 힘차게 뻗어 있는데도, 온갖 것을 꺾어 휘어서 그리는 만곡증 (彎曲症)의 샤갈에게 그려지는 에펠탑은 역학적(力學的)인 강철(鋼鐵)의 결구(結構)가 아니라 그 화면에 나타나는 말이나 닭과 같은 성질로 휘어진 달 모양에 대응하여 곡선으로 휘여 거꾸로 서 있게 된다.         홍해 횡단   모세에 의하여 홍해(紅海)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그라나파를 위시하여 몇 몇 종교 화가들의 영감을 고취하기도 했고, 또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우리의 흥미를 돋군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샤갈은 그 나름의 대단한 구성법에 의하여 작품 화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모세의 힘으로 바다를 두 쪽으로 갈라, 해안과 해안 사이에 길을 이루어 피난민을 건너게 하고, 신의 사자인 모세는 다시 되돌아와 그들을 뒤따라 절박하게 추격하여 온 파라오의 군세(軍勢)위쪽에 서서 구름과 어둠을 내려 그 진격을 저지한다. 날이 밝아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휘둘러, 주의 힘은 좌우로 갈라졌던 바닷물을 일시에 되덮게 한 광경을 그리고 있다. 강렬한색 대비의 화면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하모니를 이루는, 그의 원숙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大서커스   최만년(最晩年)의 샤갈 예술의 스타일은 무엇보다도 이 한 점의 작품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많은 서커스 작품을 남겼고, 또한 그의 독특한 환상을 서커스에 결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서커스에서 얻은 경험의 형태나 색을 다시 그의 다른 작품에 소화시켰다고 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흰색, 회색, 검정의 무채색 (無彩色)을 주조(主調)로 하고 그 속에 군데 군데 유채색(有彩色)의 채도(彩度) 높은 투명색(透明色)을 놓았다. 그리고, 화면의 여러 형상도 여태껏 보아오던 기호(記號) 상호(相互)의 결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불가지(不可知)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 새는 땅에서, 말은 하늘에서 서로 성체 배수(聖體 拜受)의 관계에 들고, 말은 천사와 결합되어 천사는 거룩한 손 위에 있다. 성속(聖俗)을 하나로 묶어 보는 이 양식은 서커스의 광경을 하 나의 종교화로서, 그리고 긴장이 가득 찬 굵은 선은 그의 에칭의 인열선(引裂線)을 응용한 것으로, 그의 온갖 서커스 작품의 총합체라 할 수 있다.       부활제   "마티스 이후 샤갈만이 색이 무엇인가를 아는 유일한 화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피카소가 한 말이다. 샤갈은 물감의 순결이 심정의 순수와 일체화하려고 했고, 작품을 성실히 제작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성실을 가지고 자기 표백을 하는 것을 염원으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색채의 폭력에 있다고 그는 생각하며, 그런 색을 "코에 역겹게 다가온다."고 했다. 이작품은 극히 억제된 색으로 별세계(別世界)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부활제의 헤브라이어의 원의(原意)인 '통과', 초월자(超越者)의 놀라운 통과를 이 천사는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오른손을 올려 희생된 어린 새끼 양을 부르고, 가난한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를 환송한다. 모든 것이 여기서는 희생에의 축성(祝聖)을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의 초극(超克)은 이리하여 최고의 축성(consecration)의 의의와 합치된다.           푸른 얼굴   이 작품은 화면을 세로로 이등분(二等分)하여 그늘과 양지로 표현하고 있다. 7년전에 을 그렸는데, 같은 모티브로서 피리 부는 사람, 꽃들, 이러한 제재(題材)들은 60년 전 그가 초기에 붓을 손에 잡던 그 시절에 마음이 끌렸던 테마들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체의 색들은 그동안 전쟁과 혁명을 통하여, 결국 역사가 화폭에 비극적인 찰과상을 남기고 지나갔으며, 다시 이렇게 하여 그 엘리멘트를 되살리고 있다. 그 동안에 샤갈은 판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도예(陶藝) 등을 통하여 애당초부터 체질적으로 우러나던 그의 색채들을 갈고 닦았다. 그늘 속에 잠긴 푸른 얼굴은 잔잔한 호수 같고, 그 위에 삼각형의 더 깊은 심연을 이루는 순박하고 선량한 얼굴이 양지 쪽으로 꽃다발을 내어 밀고 있다. 건너편에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황홀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곡예사   1940년, 파리의 독일군에 의한 함락과 유태인 학살 때문에 남불(南佛)로 피난을 했다가, 다음 해에 뉴욕 근대 미술관의 초청에 의하여 샤갈 부처는 미국으로 건너 간다. 그래서 그 다음 해인 42년에 수주일간 멕시코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아레코'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샤갈 자신의 현실적 내면을 무대의 극적장면을 통하여 이야기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대의 극적 장면도 서커스와 발레의 총합적 장면이다. 새 모양을 한 인물이한 손에 시계를 걸치고 나타나, 뭔가 자기정체를, 또는 어떤 다가오는 시간을 알리려는 듯 둥글게 된 무대 중앙에 지금 막 뛰어나왔다. 오른편에는 자그만 소녀가, 말 위에서 유도하는 대로 말이 된 아가씨가 수줍음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다. 불길(不吉)을 느끼게 하는 환상미의 극치에 이르는 작품이다.   ///출처:[톰과 제리 아지트]    
384    한글, 우리 민족 이어주는 위대한 공동 유산 댓글:  조회:1542  추천:0  2017-10-09
"한글, 우리 민족 이어주는 위대한 공동 유산" (ZOGLO) 2017년10월9일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제공) © News1 "세종 한글 창제의 뜻, 오늘날 민주주의 정신과 통해" 美순방때 유엔본부 전시된 '월인천강지곡' 본 사진 함께올려 (서울=뉴스1) 서미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은 571돌 한글날을 맞은 9일 "한글은 우리 민족을 이어주는 위대한 공동유산"이라고 한글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한글의 가장 위대한 점은 '사람을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며 "한글은 배우기 쉽고 우리 말을 들리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어 의사소통이 쉽다"고 이렇게 밝혔다. 이어 "만백성 모두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해 누구나 자신의 뜻을 쉽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한 것,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뜻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신과 통한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말과 글이 있어야 우리 마음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다. 한글은 단지 세계 여러 문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유일한 문자"라며 "한글이 있어 우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과 가장 수준높은 교육을 이뤄냈고 개성있는 우리만의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9월 러시아에서 만난 고려인 동포와 사할린 동포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다. 정부는 해외동포가 한글을 통해 민족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힘껏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에 갔을 때 유엔본부에 전시된 활자본 월인천강지곡을 봤다. 한글 창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금속활자 인쇄를 전세계에 소개하고 있었다"면서 지난달 미국 뉴욕 순방 당시의 사진을 함께 올렸다. 아울러 "한글의 과학성은 오늘날 컴퓨터와 휴대폰의 문자입력체계의 우수성으로 또 다시 증명되고 있다. SNS시대에 한글의 위대함이 더욱 빛난다"며 "참으로 자랑스럽고 소중한 우리의 한글"이라고 덧붙였다.
383    그림의 여백부분이 훌륭한 웅변적 표현력을 과시, 암시효과 댓글:  조회:2187  추천:0  2017-10-09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 : 세잔 Cezanne Paul (1839~1906)   자연(自然)의 재현(再現)을 넘어서       로코코풍의 풍경   꽃이나 꽃병을 그린 세잔의 정물화는 무수히 많으나, 로코코풍의 것을 그린 그림은 이것이 단 1점이다. 실은 이 작품은 제 2제정 시대의 판화를 그대로 유화로 옮긴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재료들을 보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다. 판화를 사용한다든지, 꽃을 조화(造化)로 바꾸어 그린다든지 하는 것은 세잔이 곧잘 하던 짓이었다. 색채를 자기 스스로 상상하여 만든 것이었으리라. 꽃병의 백색과 장식 부분의 투명한 청색계의 대조는 매우 투명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으며, 백색 꽃병에는 녹색의 반사색(反射色)을 쓰고 있다. 채광 (採光)은 왼쪽 윗부분으로 잡고 있고, 꽃병은 오른쪽으로 조그맣게 그늘을 늘어뜨리고 있다. 꽃이나 잎, 꽃병은 붓자국이 매우 섬세하며, 그것에 비하여 배경이나 책상은 붓자국이 조금밖에 나타나 있지 않다.       자화상   세잔은 렘브란트나 고호와 같이 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나, 그것이 자기 성찰의 뜻이라기보다는 이마, 코 등 명확한 형태를 지닌 것과 머리, 수염과 같이 부정형의 것들과 공동으로 이루어진 얼굴이라는 모티브를 조형적으로 추구하는 수단이었다고 본다. 세잔의 다른 자화상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부드러운 표정의 작품이다. 언제나 세잔의 자화상에서 보여주는 준엄하고 위엄있는 표정은 이 작품 제작 수년 후에야 나타나는 것이다. 습작품이고 터치가 비교적 자유로운 것이 더욱 이 자화상에 친근감을 더하게 한다. 아직 40세 전인데도 이마가 벗겨졌고, 등은 구부러졌으며, 어딘지 모르게 인심 좋은 할아버지로만 보인다. 세잔의 그 많은 위엄있는 자화상들 속에 유일하게 있는 희귀한 1점의 자화상이다.         흑인 시피온의 초상   시피온은 아카데미 스위스의 모델이다. 푸른 바지를 입고, 상반신은 나체로 나무 의자에 앉아 흰 천을 씌운 무엇인가에 몸을 기대고 있다. 배경은 어둡고, 얼룩이 없는 청색으로 보다 밝게 큰 터치로 된 바지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청색은 흰 천 속에도 번져져 있다. 이 청색의 변화가 인체의 짙은 갈색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인체는 비교적 강인하면서도 힘차게 묘사되고 있으며 귀, 코, 오른팔에 약간 보이는 하이 라이트가 바지 부분의 큰 터치와 잘 호응되고 있다. 불과 세가지 색의 색채가 교묘하게 사용되어 간결하고 웅대한 효과를 보여 주며, 구도에 있어서도 의자의 형태인 수직, 수평의 선이 안정감을 놓이는데 효과가 크다.         부채를 든 세잔 부인   세잔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서 알려져 있으며, 더욱이 자기 아내의 초상을 많이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은 비교적 제작 연대가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1880년 전후하여 파리나, 그 근처에 살 때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연대의 추정은 이 시기의 정물화에서 볼 수 있는 배경의 벽지 무늬에서 할 수 있다. 붉은 보라색 안락 의자에 부인을 앉혀서 손에는 부채를 쥐게 하여 옆에서 본 사면 구도(斜面構圖)를 썼다. 직선적 요소는 비교적 적으며, 양감을 암시하는 갖가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락 의자의 커다란 완만한 곡선이 의자에 앉은 인물을 더욱 더 안정되게 하고 있다. 색채는 음영(陰影)에 의하여 깊이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의자의 그늘이 벽면을 어둡게 하고있는 것이 부인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모데르느 올랭피아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제작된 것으로 의사인 갓세가 마네의 를 칭찬하자 세잔은 단숨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화가의 보다 멋진 컨디션에서 낳아진 작품이다. 색채와 터치도 분명히 인상파적이며, 검정은 개와 세잔 자신의 모자에만 사용했는데, 마네 또는 르노와르가 즐겨 검정의 악센트로서 적절하게 효과를 내고 있다. 왼쪽에는 핑크색의 커튼, 오른쪽에는 무더기로 된 꽃의 꽃병을 배치하여, 중앙의 밤색 머리의 여인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흑인인 하녀와 그 위의 샹들리에 배경의 엷은 녹색이 전경의 짙은 녹색에 대응하여 로코코풍의 소형 원탁의 붉은 색이 카아핏의 짙은 녹색 속에 무르익는다. 재기가 넘치는 경쾌한 작품이다           프로방스의 풍경   인상파 시대 때의 세잔의 아름다운 수채화 중의하나 이다. 왼쪽에 키가 큰 나무를 두고 오른쪽에도 단단한 듯한 나무들이 있어, 그 아래에 보이는 집을 감싸고 있다. 전경에는 냇물이 흐르고, 그러나 시선은 중앙의 흰 부분으로 인도되어 서서히 안쪽으로 빨려드는 것을 느낀다. 지면이나 집, 언덕, 어느 부분의 그늘에도 청색을, 나뭇잎들 사이의 빛은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필로써 큼직하게 물체의 위치 정도를 정하고는 자유롭게 수채의 터치를 주고 있다. 물감이 묻지 않은 흰 부분이 눈에 띄나, 작품이 미완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절도있는 채색으로 하여금 여백 부분의 말없는 효과가 표현력을 증대시켜 주고 있다.         세잔의 초상   1875~1877년에 제작된 자화상에 비하면 구성적 요인이 매우 짙어진 감이 있다. 그것은 수직이나, 수평의 선 들이 교차하는 창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규칙적인 삐딱한 터치로 모자와 얼굴과 수염들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비하면 검푸른 양복색이며, 오른쪽 벽면은 비교적 자유로운 터치로서 생략적으로 처리되어져 있고, 더욱이 어깨에서 팔에 이르는 부분은 미완성의 느낌마저도 든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자화상은 다른 5점이 또 있으나, 그 제작 순서를 가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자화상은 좀더 이른 1879~1880년경의 제작으로도 보여진다. 세잔의 40세경의 작품으로서 표정이 굳어져 완고함과 야성적인 감을 준다.         목맨 집, 오베르 LA MAISON DU PENDU, A AUVERS 1872~3년 캔버스 유채 55.5 X 66.5Cm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오른쪽과 왼쪽에 놓여진 집의 크다란 덩어리가 힘있는 대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먼 경치가 보인다. 중첩된 지붕 너머로 들판이 보이고 다시 작은 집들을 지나면 눈은 원경에 있는 언덕에 이른다는 전개 방법은 매우 실증적이며 공간의 설정 방법이 면밀함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초가 지붕의 사면에 자란 풀의 녹색, 길과 나무들, 왼쪽 집들의 벽은 갖가지 톤의 갈색으로 창문이나 문짝에는 푸른색이 반영되고 있다. 마티에르는 전체적으로 두텁게 되어 있고, 부분적으로는 팔레트 나이프가 사용되고 있다. 왼쪽밑에 붉은색으로 사인이 되어 있다. 관찰의 면밀함과 정확성, 중후한 맛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1874년 제 1회 인상파전에 출품되었다.       숏케의 초상   물체의 형태를 여러 가지 평면으로 분할하여 모자이크와 같은 선명한 색채 효과를 노린 점이 이 초상화의 특색이다. 화면의 배경인 여러 점의 그림이나, 장식품 등으로 보아 이 작품은 숏케의 집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제작 연대는 1880년 전후로 보이나, 그 이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바닥과 벽이 만나는 수평선, 오른쪽 윗부분에 상하로 걸린 그림의 왼쪽 선이 의자의 선과 만나는 수직선, 이러한 두 개의 직선이 화면 구성상의 축을 이룬다.   그 외 여러 개의 직선들이 이것들과 평행하여 작은 악센트를 이루고 있다. 광선은 왼쪽에서 비쳐져 숏케의 얼굴이나, 상반신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양분시키고 있다. 바닥이나 벽지의 붉은 무늬 등의 색채가 빛에 의하여 선명하게 두드러지면서 빛과 실내 공기를 생 성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들라크로아의 메데   들라크로아가 몇 점의 유화로 제작한 에 의한 자유 모사이다. 낭만주의 거장의 작품과의 상이 점은 첫째 동굴 밖의 푸른 공간이 왼쪽 상하를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다음에 밖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메데의 왼쪽 어깨의 뒤쪽을 비추는 빛의 노란색이 이 작품에서는 거의 생략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 수채화의 화면이 아래위로 길다는 이유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남편에게 배신당한 메데의 새파랗게 타는 분노와 복수심이 하얀 피부와 양다리를 싸고 있는 옷과 단검의 푸른색들로 잘 묘사되고 있다. 동굴 안벽을 묘사한 터치도 어둡게 엉켜있고, 여인의 분노에 타는 살기 돋친 감정과 잘 일치되고 있다. 지금 이장면이 사랑하던 두 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려 하는 장면인 것이다.       정물   세잔의 정물화에는 두 종류의 벽지 무늬가 있는데 이 그림의 무늬와 나뭇잎 무늬가 있다. 이러한 벽지는 그 당시의 유행으로서 프랑스의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그림에서는 붓의 터치가 아직도 덜 규칙적이며, 화면이 전체적으로 두텁게 물감을 올려놓고 있다. 전면에 나이프가 삐딱하게 놓여져 있는 것은 세잔이 젊은 시절에 마네나, 샤르댕의 정물화에서 배운 것이며 다른 정물화에도 가끔 보여진다. 중앙에 있는 유리컵을 통하여 뒤쪽 냅킨이나 벽지의 색채가 보이는 것도 17세기의 네덜란드 정물화에 잘 쓰여진 수법이다. 왼쪽의 푸른 빛 우유 그릇과 빨간 둥근 사과 등이 충실한 양감을 보여 준다.         꼬부랑길   1880년 전후에 세잔은 '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몇 점 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잘 완성된 작품이다. 대체로 퐁드와즈 근처의 풍경으로 보여지며, 전경 중앙에서 중경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이 원운동(圓運動)을 형성하여, 그 내부나 왼쪽의 가느다란 나무들이 화면에 틀을 이루고 있다. 배경의 경사진 지붕이나 작은 집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그 집들의 뒤에는 작은 언덕이 좌우로 있어 화면 구성상으로는 완벽 한 구도라 하겠다. 붓의 터치도 규칙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수년 후 제작된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의 완벽성 같은 것은 이 작품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장식적이며 평면적인 인상이 짙다. 그러나, 고갱은 이 시기의 세잔의 풍경화나 정물화에서 보여 주는 평면적인 성격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에스타크의 바다           화가의 아들 폴의 초상   폴은 세잔의 독자(獨子)로서 1872년 초 파리에서 태어 났다. 세잔과 그의 부인인 오르탕스 피케는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폴의 출생을 구청에 신고 하고 그들의 자식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일은 그 당시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가끔 있는 일로서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세잔 자신도 양친의 정식 결혼 전의 자식인 것이다. 세잔과 오르탕스 또한 1886년 4월에 비로소 엑스에서 결혼하였다. 이 폴의 초상화도 그 전후의 작품이다. 평소의 복장으로서, 상의는 엷은 청록색으로 인하여 흰 샤쓰에도 푸른색의 반영이 보인다. 모자는 찌든 짙은 청색으로서 이 시기의 세잔의 자화상 2점에서도 이러한 색의 모자를 쓰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그림틀 같은 모양이 장식적인 효과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에스타크의 바위   1883년 5월에 세잔은 그의 벗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 '에스타크의 역 위쪽에 뜰이 있는 조그마한 집을 빌었다. 언덕 기슭의 내 집 뒤쪽에서 암산과 솔밭이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세잔의 중기의 풍경화 중에서도 가장 박력있는 이 작품은 그 생동감으로 하여금 세잔의 중기 작품 같지가 않다. 전경은 얕고 중경은 바위들로 솟아 있어 멀리 바다와 마르세이유 만 쪽의 섬이 보인다. 바다와 하늘 이외에는 모든 것이 규칙적인 삐딱한 터치로서 그려져 있다. 녹색과 갈색 그리고, 청색에서 회색의 변화로 하여금 바위의 양감을 강하게 보여 준다. 수평선은 약간 위쪽으로 치켜 올려 처리되었으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강한 운동감을 낳고 있다. 이것을 왼쪽의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받치고 있는 것이다. 다이나믹하며, 압도적인 박력있는 작품이다.       튜립 꽃병         목욕하는 세 여인들   여인들이 목욕하는 주제는 세잔이 즐겨 택한 것이다. '주제에서 모티브로, 상상되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으로'라는 근대 회화의 움직임에서는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나 색채상으로는 역시 인상파 그것이며, 이 작품에 있어서도 청록의 짙은 색채가 매우 규칙적으로 삐딱하게 놓여져 있다. 전경인 지면이나, 풀, 수면은 터치가 옆으로 놓여져 있으며, 멀리 약간 보이는 푸른 하늘은 터치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좌우로 선 나무들이 피라밋 형으로 화면의 틀로서 작용한다. 그 중 두 여인은 물 밖에서 앉아 있기도 하고 선 채로 타올을 쥐고 있기도 한다. 중앙의 한 여인은 무릎까지 물에 잠긴 채 서있다. 세 사람의 머리는 각양각색으로서 인체와 풍경의 조화가 매우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마티스가 애장(愛藏)하던 작품이다.         부엌의 탁자(부분)   세잔의 정물화 중에서도 복잡한 구성과 형태의 데포르 마숑 그리고, 시점의 이동이란 점 등으로 보아서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탁자를 화면에 병치해 놓고 그 위에 과일이나, 갖가지 항아리들 그리고 과일 광주리, 냅킨 등을 풍성하게 배치하였다. 과일 광주리를 보는 시점과 왼쪽에 있는 항아리를 보는 시점의 차이는 이미 세잔 연구가들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조형적 노력이 큐비즘의 이론 구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배경의 구성도 매우 복잡하여 왼 쪽에 짙은 갈색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 등 벽구석까지 이르고 있다. 뒷벽 부분은 녹색·청색·보라색·갈색 등 짙고 깊은 색들이 엉켜져 있고, 전경의 테이블과 평행하여 전경의 갖가지 빛깔들을 흡수하고 있다.         벨르뷔의 조망   완벽한 구도의 작품으로서 맑은 분위기로 안정되어 있다. 유채물감을 비교적 얇게 써서 붓자국을 많이 남기지 않은 작품이다. 갈색과 녹색 등 갖가지 복잡한 톤으로서 짜임새 있는 작품이다. 전경은 수평의 한 선으로 잘려져 있고 색채나 터치 변화를 조금씩 주고 있으며, 낮은 나무들의 무더기를 점점이 배치하고 있다. 중경에 몇 개의 집들이 기하학적인 양감을 보여 주고 있으며, 지붕의 경사가 점차적으로 시선을 지평선으로 인도하고 있다. 여기서 아무 장애도 받지 않은 수평선이 대지의 넓이를 암시해 준다. 지평선의 짙은 녹색에서 전경의 황록색에 이르기까지 세잔은 녹색의 복잡한 하모니를 무한히 아름답게 처리하고 있으며, 그 가장 엷은 색 들을 하늘로까지 가져가서 화면의 분위기를 한층 무르익게 하고 있다.           연못 위의 다리   녹색의 교향시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하늘이 희멀건 청색 나무 다리가 지닌 회색조의 갈색,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비쳐진 무엇인가 그늘의 붉은 맛이 감도는 갈색 등을 없애 버린다면 화면 전부가 녹색의 바리 에이션으로 엷은 황록에서 짙은 녹색으로, 그리고 진 보라에 이르기까지 그 무한한 변천이 매우 상쾌할 뿐이다. 터치는 우거진 나뭇잎의 경우는 옆으로 뉘어져 있고, 물 위의 반영의 부분은 주로 아래위로 쓰여져 있다. 세잔이 인상주의 작가라는 것이 이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며, 모네와 결코 다른 점이라면 그가 물체의 형태를 무시하지 않는 점, 그리고 색채의 효과를 뜨겁게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명하고 명쾌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이 두 가지 점일 것이다.       부인과 카페테르   만년에 있어서 세잔은 인물화에 지극히 관심을 보였다. 그것도 화면의 크기가 큰 것으로만 제작되었다. 이 작품도 그 걸작들 중에 한 작품이다. 짐작컨대 엑스에서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이 강직하게만 보이는 가정부가 세잔 집안에서 일하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배경에는 투박한 나무 문이 있고, 그 왼쪽에는 장미 무늬로 된 벽지가 보인다. 이 부인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나, 무릎이나 그 옆의 탁자 표면까지도 모두 다른 부분보다 높은 시점에서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왼쪽 벽지로서 수직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마치 가정부는 서 있는 것같이 보인다. 머리를 가른 선, 코 끝, 복장의 중앙선을 지나 무릎을 양분하는 선도 이 또한 엄정한 수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커피 포트 왼쪽 선 또한 수직으로 서 있다.           생트 빅트와르 산   1867~1870년경에 제작된 이 작품에서는 화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생트 빅트와르 산을 그렸는데, 1880년대에는 정면으로 이 산을 그려 놓았다. 에스타크의 바다나, 마르세이유 만의 고요한 물결에서 건장한 대지나, 산으로 차츰 세잔의 관심이 옮겨짐을 볼 수 있다. 산은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구릉을 뻗치고 있고 바로 그 아래에 육교가 걸쳐 있다. 전면에서 그 안 쪽으로 길이 나고 집들이 간간이 있어 중경의 넓이를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전경에 우거진 나무들이 있고 단 한 채의 집이 사각(斜角)으로 놓여 있다. 중앙의 소나무는 화면을 좌우로 나누어 놓고 뻗쳐 있는 나뭇가지로 하여금 장식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오렌지색과 녹색의 대조 관계는 매우 강렬하며, 산 허리나 하늘에는 엷은 보라색이 있어 빛처럼 밝은 분위기를 한결 더하고 있다.         마른 강의 다리   1888~1889년경의 세잔은 파리에 머물면서 세느 강이 나, 마른 강 그리고, 샹티이에서 정력적인 제작을 하였다. 남 프랑스의 명쾌하고 강렬한 풍경을 즐긴 다음에 ,다시 북프랑스의 부드럽고 조용한 광경을 만나 세잔은 더욱 자신을 갖고 인상주의적인 감각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이 하늘과 녹색과 물 속으로 자기를 쏟아 넣었다. 강변과 다리가 옆으로 축을 이루고, 치솟은 미루나무와 수면에 떨어진 미류나무의 그늘이 상하의 악센트를 좌우로 펼친다. 전경의 수목인 녹색이 왼쪽 면을 크게 자리하고, 이것을 마주 보는 오른쪽 중경에서는 붉은 지붕의 집이 비스듬히 보여 공간을 꼭 알맞게 설정시키고 있다. 수면에 떨어진 하늘이나 녹색의 처리는 매우 훌륭하며, 세잔 만년의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뛰어난 걸작이다.         목욕하는 남자들   최근에 인상파 미술관으로 옮겨온 이 작품은 수많은 < 목욕하는 남자들> 중에서도 총 결산이며, 최고의 걸작이다. 세잔 개인적으로는 졸라와 같이 소년 시절 아르크 강에서 놀던 기억으로 연결된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몇 개의 인체들을 구성하여 화면을 만든다는 서양 회화의 전통적인 발상법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겠다. 르노와르의 목욕 군상도와 더불어 세잔의 그 많은 목욕도 들은 근대 서구의 화가들이 과거의 전통을 어떻게 자기화하여 생기있는 작품으로 만들었냐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수직으로 치솟은 강 건너편의 나무들, 그리고 멀리 가깝게 느끼면서도 분명한 형태의 인체와 부정형의 수목들과 결정적으로 화면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하늘의 흰 구름. 갖가지 대립하는 요소가 이렇게도 혼연 일체가 되어 높은 통일감을 주는 예는 다르게 찾아 볼 수 없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목욕하는 여인들   세잔의 수채화에는 유화를 습작과 유화에서 독립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후자에 속한다. 수채화는 세잔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만년에 이를수록 수채화는 유화와 대등한 질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데생에 있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세잔의 화법은 쿠르베나 밀레, 모네, 피사로보다도 그 폭이 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몇 사람의 여인들이 풀밭 위에 자유롭게 배치돼 있고, 중앙의 한 여인은 물에서 올라오고 있다. 왼쪽에는 화면을 이어 붙인 자국이 있고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인체와 수목이 더 그려져 있어 몇 번이고 고쳐 그어진 윤곽선의 움직임이 보다 아름다운 리듬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적절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모자를 쓴 자화상   화가는 자기의 몸을 옆으로 돌려서 그렸으며, 얼굴만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거울에 비쳐진 자신을 보다 잘 그리기 위해서는 얼굴을 그렇게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눈 끝의 표정이라든지 둥근 등의 모양 등에서 화가의 심정을 읽게 된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라든지,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불만 의식 같은 것이 보여진다. 모자, 얼굴 등 데생이 좋고 특히 얼굴의 양감은 갈색의 갖가지 톤으로 잘 처리되어져 있다. 수염에는 흰색이 있고, 등과 배경에는 칠 하지 않은 부분이 보여진다. 수년 전에 제작된 세잔 부인 초상과 비교하면 배경의 처리에 있어서도 이미 여기에서도 갖가지 색채가 쓰여지고 있으나, 그것들이 선으로서보다는 커다란 색의 덩어리로서 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미완성 작품이기는 하지만 녹색·회색이 감도는 보라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매우 훌륭하다.         사과와 오렌지   카몽드 콜렉션에서 인상파 미술관으로 오게 된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구도를 지닌 만년의 정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쿠션이 있는 긴 의자에 천을 늘어뜨렸고, 몇 장의 냅킨을 깔아서 그 위에 도자기와 과일을 배치한 구도로서 물체가 당장 굴러 떨어질 것만 같으나, 불안정감은 없으며 오히려 화면이 생동감을 보여 주고 있다. 물감은 매우 엷게 발라져 있고, 왼쪽 냅킨은 캔버스 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터치는 매우 자유로우며, 도자기의 경우는 거의 터치를 발견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사과나 오렌지의 경우 붉은 색에서 노란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형태나 양감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원숙한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면 이러한 작품을 말할 것이다.         바위   전체가 보라색으로 덮인 이 풍경은 필경 폰텐브로 숲 속에 있는 바위들을 그린 것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에 커다란 바위들이 겹겹이 있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가슴 속에 일종의 극적인 충격마저도 일으키게 한다. 만년의 세잔에게는 지질학자인 그의 벗 마리옹의 영향으로 대지의 생성에 흥미를 가졌고, 또 황폐한 모습에도 흥미를 가졌다.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바위들이 중첩하는 사이에서 수목들이 자라나온 이 풍경은 조형적으로도 훌륭하다. 보라색 바위에는 갈색·노란색의 터치도 있으며 나뭇잎들도 거의 같은 빛깔들로 되어 있다. 주조를 이루고 있는 보라색과 황량한 풍경은 잘 어울려있고, 왼쪽 구석에는 멀리 공간이 열려 있다.       밀집 모자의 소년   1896년 세잔은 아누지 호반을 여행하여 다르와르에 머문 적이 있다. 그 지방의 소년을 모델로 하여 몇 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제작했으며, 이것도 그 중의 1점이다. 낡은 밀짚 모자의 형태와, 그 아래 소년의 참외형 얼굴의 곡선의 콘트라스트는 매우 재미있다. 왼쪽 몇 가닥의 직선, 그리고 소년이 입고 있는 덧옷, 그 앞 가슴에서 내려오는 수직선의 반복. 군데군데 미처 칠하지 않은 흰 화면들이 보이나 별로 탓할 것이 없다. 화면 전체는 물감들이 엷게 발라져 있고, 제작 과정이 비교적 순순히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소년의 덧옷 소매 안쪽의 선들이 어려웠던 것이 눈에 띄며, 몇 번이고 고쳐서 선을 그었던 까닭에 색채도 이 부분이 약간 짙어져 있다.         프로벤스의 산         앙부르와즈 볼라르의 초상   의자에 앉아 약간 아래를 보는 볼라르의 모습을 어두운 갈색과 보라색의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강한 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커다란 오렌지색의 터치로 데생한 오른팔이 더욱 힘차다. 이 팔과 흰색 내의가 하이 라이트를 이루고 있고, 흰색 속에는 가지가지 엷은 색들로 되어 있다. 왼쪽 창문은 열려져 있고 오른쪽은 밝은 갈색으로 막연히 묘사하고 있다. 손목이나 팔의 윤곽이 잘되지 않았던지 선의 양쪽에서 물감이 쌓여 올라와 있다. 다른 부분은 물감이 엷고, 기름기 있는 터치가 시원하다. 얼굴 역시 큰 터치로서 작은 면들을 집적(集積)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비교적 큐비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작에 대해서는 볼라르 자신의 저서 '풀 세잔' 중에서 매우 회의적으로 말하고 있다.         숲 속의 바위       붉은 바위   밝고 소리하나 없는 어느 남 프랑스의 풍경이다. 비베뮤 돌 채취장 근처로 짐작된다. 하늘은 푸르고 대지나 바위는 강한 오렌지색이며, 수목의 녹색 속에는 노랑·보라·붉은 색·흰색 등 갖가지 톤이 엉켜 있다. 태양의 강한 빛남으로 하여금 오히려 일종의 슬픔과 고독감이 감도는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나무 숲을 묘사하는 터치는 보다 규칙적이고 잦으며, 명암의 묘사는 전경이나 원경을 큰 변화 없이 반복시키고 있다. 그러나, 바위나 하늘의 부분 묘사는 오히려 큼직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져 있다. 이나, 같은 세잔의 화가로서의 지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작품들에 비하여, 이 작품에 있어서는 오히려 세잔의 눈에 띄지 않는 내면의 성격이나 의지가 보여진다.         생트 빅트와르 산   세잔의 수채화에 있어서는 만년에 이를수록 색채가 칠해지지 않는 부분이 많아 진다. 그러나, 작품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 여백의 부분이 훌륭한 표현력을 작용하고 있어, 어떤 의미로는 색채가 칠하여져 있는 것보다 더 웅변을 하고 있다. 산 전체를 앞으로 당겨서 잡았고, 연필의 옆 터치로서 산의 피부나 요철(凹凸)의 전 변화를 생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두운 부분에는 청색·보라, 밝은 부분에는 노란색을 칠했다. 색 수는 대략 이 세 가지 색에 국한되어 있으나, 그것들의 배색, 리듬, 여백과의 대화들로써 산이 형태와 양감들이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낀다. 잘 관찰해 보면 가볍게 연필 데생을 하고 그 위에 엷게 수채를 올려놓고 있다. 산 전체가 수정으로 되어 있는 것같이 투명하며 신선하고 더욱이 경쾌한 점은 지극히 희귀한 일이다.           쥬르당의 작은 집   1906년 10월, 세잔은 이미 이 작품에 손을 대고 있었다.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명쾌한 대립으로 대충 그렸으며, 길이나 나무에는 붉은 색, 녹색의 보다 약한 대립도 주어졌다. 작은 집의 문과 허술한 부분에는 하늘 색과 같은 색으로 놓여져, 총합적 큐비즘에 있어서의 색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있으나, 세잔은 다시 그 위에 다른 빛깔들을 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면은 힘차고 명쾌함을 보여 주고, 제작도 반은 넘어서서 남은 작업은 세분의 처리나, 약간의 끝맺음 정도로 보여진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은 유화로서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10월 15일, 제작 도중 화가는 비를 맞고 인사 불성이 되었다. 수일 후 세잔은 약간의 회복을 보아 수채로 바리에의 초상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계속하지 못하였다.        
382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그리기... 댓글:  조회:2064  추천:0  2017-10-08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 :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나선 예술가     나부습작(裸婦習作)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쏙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로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고갱은 1873년 11월, 23살의 덴마크 여성 메트와 결혼 했다. 결혼 전 어느 편지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를 덴마크로부터 뺏어 오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고 했지만, 결혼 후 북구(北區)의 프로테스 탄트풍(風)의 엄격한 윤리관에 젖어 있는 그녀와 고갱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고갱 이외의 다른 남자였다면 훌륭한 부인으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갱이 고갱 자신으로 돌아 감에 따라 그녀도 자신을 드러내어 자제하지를 못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베르탕 상점을 그만둔 다음 해에 르왕에서 그린 것인데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그런 기질(氣質)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에서 이런 투시력(透視力)은 고갱 시각(視覺)의 독특한 성질의 하나일 것이다.     캔버스 앞의 自畵像   고갱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전적으로 화업(畵業)에 투신함으로써 생활의 형편은 절망적이었다. 1894년 11월 그는 가족과 함께 부인 메트의 고장인 코펜하겐으로 옮겼으나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코펜하겐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메트가 불어 레슨(佛語講習)을 하기 위하여 거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붕밑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틈틈히 제작에 몰두했다. 그가 회화라는 것은 외계(外界)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내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슈프네케르란 사람에게 써 보낸 것은 1885년 5월의 일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정신과 회화관(繪畵觀)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둡게 침잠된 색조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있다. 고호나 고갱이 함께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대상(對象)의 응시(凝視)가 자기 응시(自己凝視)에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그들 공통의 지향에 원인한 것이었다.     4 명의 브르타뉴 舞踊手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19점의 작품은 기대했던 만큼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깨어진 하모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그 시기의 구축성(構築性)이 강한 구도법(構圖法)과 그의 평면 처리법(平面處理法)이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길은 브르타뉴의 생활에서 하나의 달성을 보인다. 화면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르타뉴 농부(農婦)의 얼굴을 옆으로 그리는 수법이나, 빨강이나 초록의 사용법 등은 두 번째 브르타뉴 시대의 작품을 예견케하는 점이고, 전경의 인물이나 사물을 크게 그리고 후경(後景)에 여러가지 정경을 그려 넣는 수법으로 장식적인 화면에 원근법(遠近法)을 도입한 것은 고갱이 그의 타히티의 작품에 있어 자주 쓰던 수법으로, 그 싹이 여기에서 자란 것으로 느껴진다. 피사로부터 받은 점묘적(点描的)인 터치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평면적 의지가 화면 속에 교차되어 있다.       열대의 식물   이 작품은 1887년 뜨거운 태양을 쫓아서 마르티니크섬에 얼마간 체재하면서 그렸다. '원주민의 남녀는 서인도의 노래를 부르면서 종일 맷돌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칠줄 모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조롭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만큼 변화가 풍부한 곳은 없을 것이다. 자연은 색이 선명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때맞추어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는 이섬의 환경에 만족스러웠으나 여기서도 가난과 병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그가 초기에 자주 나타내던 전후경(前後景)의 대조적 구도법을 이섬의 자연에 의하여 장식적으로 바꾸어 나간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섬의 강한 태양은 프랑스의 힘없는 태양빛 아래의 경우처럼 인상파적인 분할적 수법(分割的 手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섬의 체험은 후일 그를 타히티로 가게 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욕하는 브르타뉴의 아이들   '나는 막 나체화(裸體畵) 몇 개를 끝맺었다. 이것들의 됨됨이에는 자네도 만족하여 줄줄믿는다. 이것은 드가풍의 하찮은 것은 아니란다. 가장 최근의 것은 개울가에서 두 아이들이 엉켜 있는 것을 그렸는데 이것은 페루의 야만인이 그린 실로 일본적(日本的)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888년7월 8일 슈프네 케르에게 보낸 편지).  이 작품도 고갱이 말하고 있는 나체의 연작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부인 메트가 싫어했기 때문에 앞에 소개한 외에 나체화가 없었으나 브르타뉴의 자연 속에서 그의 내면에 마르티니그나 페루의 추억에 잠겨 그의 정신적인 이미지에 순도를 더해갔다. 샛노란 풀잎의 색과 배경의 빨간색에서 그의 내면의 반영을 느낄 수있다. 브르타뉴에서 차츰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벗어나 인상파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여 가게 된다.     해변의 두 소녀   두 소녀를 전면에 크게 그리면서 먼 배경(背景)을 의도적으로 차단, 아주 평면적인 표현법을 썼다. 커다란 색면(色面), 선명한 분할(分割)등, 어떻게 보면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고호와 함께 이 우끼요 에를 연구했고, 인상파 화가들인 마네, 모네 등도 색채와 형태의 표현 기법에 흥미를 나타냈었다. 고갱은 1889년 10월부터 르 푸르뒤라는 어촌(漁村)에 머물면서 현지 소녀를 모델로 한 외에 등 대표작 수점을 그렸는데, 복잡한 가정 문제, 인상파 탈퇴, 고호와 비극적인 공동 생활 등을 치른 후여서 그림과 인간에 대한 그의 가장 심각한 번민을 이 소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타히티행은 이와같은 번민과 파리 만국박람회 때 본 자바 미술에 대한 관심이 합쳐저 2년 후에 결행된다.     戱畵的(희화적) 自畵像(자화상)   아를르에서 고호를 떠나 1889년 4월에 세번째로 퐁 다벵으로 갔다가, 10월에 루 뿌르두로 가서 하숙집 식당의 찬장 위쪽 거울 판에 이 그림을 그렸다. 반대쪽에는 친구 마이엘 데 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의 지도자상으로 부각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原始林)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황색의 그리스도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 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 다벵 마을과 생트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로 화하고 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푼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화재 (畵材)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 (抽象化)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고 짐작된다.         아름다운 안젤   고갱은 브르타뉴 지방의 퐁 다벵에서 사트르라는 젊은 부부에게 여러 가지 신세를 졌다. 그는 감사의 뜻으로 미인으로 평판이 높은 안젤 사트르라는 젊은 부인의 초상을그렸지만, 이 아름다운 작품은 당사자인 그부인에게나 남편에게나 조금도 아름답게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고갱이 가지고 온 그림을 보고 부인은 '지독한 그림!'이라고 부르짖고 남편은 화를 내어, 고갱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돌아 갔다.  테오토르 반고호(고호의 동생)는 이 그림의 인상을 '여기에 그려져 있는 여성은 젊은 암소와 같은데가 있어.. 얼굴의 표정도 태도도 실로 신선하며, 정말 시골티가 나고, 보고 있으면 아주 즐겁다.'라고 형에게 써 보내고 있다.이 평의 뜻은 소박하고 침착한 이 여성의 인상을 정확하게 전하여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自畵像         슈잔 밤부리지   1891년 6월 4일, 고갱은 타히티에 도착한 3일만에 부인 메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조금 있으면 초상화를 좋은 값으로 두세 장 그릴 수 있게 될 것 같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사방에서 물어오고 있기에 말이오. 이번엔 내가 될 수 있는 한 배짱을 좀 퉁기려고 하고 있소 그러는 것이 좋은 값으로 사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오.' 이 작품도 그가 말하는 초상화의 하나이다.   모델은 당시 타히티의 수도 빠뻬테에 사는 영국여성(英國女性)이었다. 타히티 궁전에서 당시 의식(儀式)이나 축전(祝典)을 거들거나 통역을 하거나 했는데, 고갱이 먼저 그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직강한 타히티의 작품적 특색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를르에서 고호와 함께 그렸던 을 상기시키는 온화한 그림이다.       바히네 노 테 치아레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하여 얼마간 지난 후에 그린 작품으로, 간혹 그의 오두막집에 찾아오곤 하던 이웃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녀는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는 구라파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럴 뿐이다. 어쨌든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얼굴 생김새의 어디를 보나 곡선의 매듭 속에 라파엘로적인 조화가 있다. 조각가가 살을 붙인 것 같은 입은 온갖 말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과의 입맞춤을 말하고 있었다. 그 울적한 표정 속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엉켜 의연함 속에 순종(順從)함이 있었다. 미지(未知)한 것에의 두려움이 적당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서 정열을 기울여 일을 했다. 그 초상은 내 마음의 눈이 인정한 것을 그리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면을 그리려고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노아노아에서)       해변에서   이 그림은 커다란 나무 등걸을 화면 중앙에 옆으로 눕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누고 있다. 위쪽에는 고기잡이를 하는 세 인물을 배치했는데, 앞 왼쪽의 여인은 곧 바다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향하여 엎어지려는 순간으로 신선을 유도한다. 고갱의 타히티 작품 속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장식적인 쪽의 하나로, '나는 화가보다 공예가에 적합하다.'라고 그는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림과 함께 많은 목각 부조(木刻浮彫)를 장식적으로 만든 것이 많고, 그것들은 그의 개성이 넘치는 독특한 착색(着色)에 의하여 훌륭한 그의 체취(體臭)를 풍기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그런 장식적인 재능이 신선하게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쪽의 보라색이 감도는 분홍 색은 이를테면 그의 마음의 눈이 본 모래의 색이며, 나무 등걸 위의 빨간 꽃, 분홍색 모래와 노랑의 풀잎 등 그 장식적 효과는 찬란하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   '그러나 나는 50호의 그림을 한 점 그렸다. 노란 날개를 가진 천사 하나가 두 사람의 타히티 여인에게, 타히티 사람인 마리아와 예수를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파레오를 걸친 나체화이다. 파레오라고 하는 것은 꽃모양이 있는 일종의 면포(綿布)인데 말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는지 허리에 감는 거야. 배경은 지극히 어두운 산과 꽃이 피어 있는 나무들, 길은 짙은 보라색으로 전경은 에머랄드 그린, 왼편에는 바나나가 있다. 나는 이 그림이 제법 마음에 든다.'(1892년 3월 11일 몽프레에게)   고갱이 브르타뉴 이후 타히티에서도 화면에 간혹 기독교적인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중경(中景)의 두 여인의 모습이 자바 사원의 대상 부조(帶狀浮彫)에서 가져온 것은 원시의 신성(神性)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테 파토르마   샤를르 모리스는 이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뒤쪽을 활짝 열어제친 마오리인(人)의 집 출입구 쪽에 다리를 개고 앉은 한 여인이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골이 나서 볼이 부어 오른 모습을 하고 앉아 있다. 적어도 5분간은 혼자서 이렇게 부어있었을 게고, 적어도 5분간은 앞으로 더 부어서 있을 것이겠지.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녀 자신도 모른다. 다분히 골이 나서 부어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중경(中景)에는 난처한 모습으로 개가 앉아 있고 밖에는 말을 탄 남자가 있다. 남편인지 연인인지. 여인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게 풍부한 양감(量感)에 의존하고 있고, 다소 코믹한 고갱의 애정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브로타뉴의 환상적인 화면에서, 안정되고 온화한 화풍으로 바뀌어 가는 느낌이 풍기는 작품이다.       어마, 질투하고 있니?   1892년 7월 고갱은 몽프레에게 '나는 최근 모델없이 나체화를 한 장 그렸다. 물가에 두 여인이 있는 그림이다. 지금까지 그린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여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샤를르 모리스는 이 정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영(水永)을 하러 온 두 자매가 더운데도 동물과도 같이 우아하게, 싱싱하게 몸뚱이를 뻗치고 중얼중얼 하며 지금까지의, 또 지금부터의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돌연 말다툼이 벌어진다. 뭔가를 생각해 낸 것이다. '어마, 질투하고 있니?' 이 대담한 구도에 두 인물의 누움과 앉음의 배치, 양광(陽光)과 음영(陰影)의 배치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회화(會話)를 누구나 상상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타히티란 한 원시적인 낙원에 사는 한가로운 주민(住民)의 생활을 단면적(斷面 的)으로 잘 느끼게 해준다.       언제 결혼하니?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 , 등, 그 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 (動)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 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모자를 쓴 自畵像   고갱은 타히티에서 마저 가난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다. 과도한 제작 생활과 가난이 겹쳐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간다. 이 자화상은 파리에 돌아간 후에 그린 것으로서, 그가 프랑스에서 그린 자화상 중에서 최후의 것이다. 배경의 위쪽에서 비스듬히 아래의 왼쪽으로 내려온 노랑색의 색면이 코펜하겐에서 지붕밑 다락방을 화실로 쓰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신의 고독과 고립을 생각하며 그린 것인지... 오른쪽 뒤에 걸려 있는 그림은 그의 타히티 작품 인데, 그의 배후에서, 누워 있는 듯하다. 색조도 어둡고 고갱 자신의 표정도 어두운 것은, 떠나오기는 했어도 그의 전부인, 타히티에의 동경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은 파리 생활의 그늘같은 것일 게다.       아이타 파라리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9월에 몽파르나스 가까이에 있는 그랑 쇼미에르 거리에 아틀리에를 빌려 제작을 하다가, 곧 베르생제트리크스 거리의 아틀리에로 옮겼다. 고갱은 이아틀리에에서 자바 태생의 키가 작은 혼혈의 안나와 함께 살면서, 목요일에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법석을 떨었다. 아마 그것은 이미 자신의 육체 일부가 되어 버린 타히티를 떠나, 그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괴로운 몸부림 같은 것이었을 게다. 타히티의 풍토적(風土的) 향기(香氣)를 안나로부터 찾으려고 했다. 그가 모래 빛깔에서 자주 보여준 보랏빛이 감도는 분홍색을 배경에 대담하게 밀어붙이듯 평면적으로 칠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밝고 투명한 푸른 색이, 검은 피부의 안나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그를 파리에 붙들어 놓을 수 없는 불안이 감도는 화면에는 온화함이 없다.       망고의 女人   '나는 세로 1미터, 가로 1미터 30센티의 그림을 막 끝 낸 찰나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초록의 바닥에 나체인 여왕이 비스듬히 기대이고, 시녀가 과일을 따고, 두 노인이 굵은 나무곁에서 지혜의 나무에 대하여 말을 주고 받고 있다. 배경은 해안이다 .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색채의 점에 있어 이렇게도 무게있고 장대한 울림을 가진 것을 그려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개는 당번을 서고, 오른쪽에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울고 있다.' (1896년 4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 1895년 3월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갔다. 다시 그곳에서 한 해를 넘긴 그의 희열이 이 장대한 색채와 행복감에 차 있는 이 미묘한 하모니 속에서, 점점의노랑과 빨강을 빛내며 안정감을 전달하여 준다.       네바모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나는 단순한 나체화에 의하여 지금까지 미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호사함을 암시하려고 했던 거야. 전체는 일부러 어두운 색으로 가라앉혔지. 이러한 호사함을 만드는 것은 비단으로도, 빌로도로도, 삼베로도, 금으로도 되는 게 아니고, 화가의 손에 의하여 풍부한 것으로 되는 마티에르, 오직 이것으로만 가능해. 잡다한 것은 필요없고, 단지 인간의 상상력만이 그 환상에 의하여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것이지. 제목은 , 에드가 포의 큰 까마귀가 아니라 문지기가 딸린 악마의 새야. 그리는 것은 서툴지만- 지나치게 신경이 쓰여 발작적으로 일을 하고 있음-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나로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1897년 2월 14일 몽프레에게)         미개의 詩   타히티는 사령(死靈)이 지켜주고, 가지각색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생기고, 모든 것에 정령(精靈)이 머무르며 범신론적(汎神論的) 신화(神話)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고갱은 그러한 신화나 신앙을 주제로 하는 여러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고갱이 그린 마오리족의 그림들에는 자바에서 본 사원의 불상(佛像)에서 시사를 받아 원시의 신성(神性)을 불상의 포즈에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여인의 포즈는, 예의 자바불상, 바로 그것이고, 가슴 쪽의 형상은 불상 조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아주 정적인 여인의 얼굴에서는 많은 감정을 아로새긴 것같이, 무표정 속에서 깊은 염원(念願)과 기도(祈禱)를 가진 표정은 독특한 것이다. 왼쪽 아래 원숭이처럼 보이는 기묘한 것은 타히티의 사령(死靈)이나 정령 (精靈)으로서 마오리족의 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졌는데, 재미 있게 느껴진다.       테 레리오아 : 꿈   '군함이 10일쯤 출항을 연기한 것을 이용하여 다시 한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서둘러서 그렸지만 지금까지의 것보다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라는 것이 그 제목이다. 이 그림에 있어서의 모든 것이 꿈인 것이다. 아이도, 모친도, 오솔길을 가는 말에 탄 인물도, 말하자면 이것은 화가의 꿈인 것이다. 그런 것은 그림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분히 그런 일은 없을 줄 안다.'   (1897년 9월 12일 몽프레에게)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고갱의 오두막집이다.두 쪽으로 갈라져 있는 왼쪽은 화실로서 '나는 이것을 조각으로 장식하여 제법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두 인물은 들라크로아의 을 상기시키는 포즈를 잡고 있다.       母性   초록의 대지 위에 한 여인은 과일을 들고, 한 여인은 꽃을 들고 서 있다. 두 여인의 보호 아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는 타히티의 성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의 뒤쪽에는 노란색 하늘, 그 속엔 분홍빛 구름이 걸려 있고, 오른편 하늘로 내려온 나뭇가지에는 꽃이 매달렸다. 대담한 색 배치와 건실한 구도로써 힘찬 교향악을 이루고 있다. 고갱의 어머니 아리느는 고갱이 하급 선원으로 항해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의 눈길은 부드럽고도 위엄이 있으며 맑고 애정이 넘쳤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의 딸에게 아리느라는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붙여 사랑했었는데, 1896년 딸이 급사하여 그는 심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이 작품은 항상 그에게 깔려 있던 슬픈 마음의 바탕에서 우러난 행복한 모성에의 찬가이다.         바이루 마치   바이루마치란 원래 마오리 신화에 나오는 종족의 창시자 타아로아의 아들 오로의 아내이다. 오로는 인간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어서 어떤 호수의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바이루 마치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밝은 빨강의 배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육체를 비스듬히 기대고, 그 뒤에 옥좌(玉座)와 같은 의자, 두 사람의 시녀, 도마뱀을 밟고 선 노랑새가 함께 엑조틱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노아 노아'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 그녀는 키가 큰 여자로 타는 듯한 태양빛이 그 황금색의 어깨 위에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젊은 아가씨는 바이루마치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에게서 이러한 신화를 투시한 것일 게다.       白馬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이처럼 시정에 넘치는 목가적인 작품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평평하게 칠해진 색면(色面) 하나하나가 깊숙한 환상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색다른 작품이다. 짙은 프루샨 블루의 웅덩이, 거기에서 물을 마시는 하얀 말도, 또한 푸르게 칠해진 넘실넘실 뻗어 나는 나무 가지도, 늪가에 피어있는 하얀 꽃, 새빨간 말 잔등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도, 이상한 침묵 속에 잠겨 있다. 화면의 색을 대립적으로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빨강에서 노랑, 연두, 초록, 파랑, 보라로 해조의 변화를 주어 결코 단조로운 배색은 아니지만, 전체가 통 일된 조용한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다음의 작품으로 늪의 수면이나 나무의 검푸른 가지는 어둡고 침잠된 죽음의 그림자가 스며있는 듯하다.         세명의 타히티인 또는 대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그 구도가 대담하고 힘차다. 섬사람들의 일상적인 단면을 그의 장식적인 수법에 잘 끼워 맞추어서 현실과 환상이 야릇하게 교차한 느낌이다. 과일을 한 손에 들고 돌아선 여인의 과일에서, 또 어깨로 움직이는 선이, 몸을 둘러싸는 빨간색의 파오리와 서로 응답하며 만드는 부드럽고도 풍만한 정감은 정말 아름답다. 왼쪽에서 중앙으로 내려온 그녀의 어깨선이 중앙에 배면으로 선 남자의 어깨선에서 안정감을 구하고, 오른쪽 꽃을 든 여인의 어깨선을 통하여 위쪽으로 뻗는다. 이 세 인물의 몸을 나타내는 색조는 초록과 노랑과 밝은 분홍 등의 흐르듯 깔린 색과 함께 묘한 뉘앙스를 이루고 있다. 그려진 인물의 검고 건실한 얼굴의 정감이나, 어깨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살붙임, 평면적이고 무정형적(無定形的)인 배경의 색은 이 무렵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빨간 꽃과 유방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의식적인 그의 원시주의적(原始主義的) 조형 의지를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의식을 떠나서 간결한 구도로 인공적(人工的)인 단순화(單純化)나 양식화(樣式化)의 흔적도 없이, 두 여인의 포즈에도 고갱이 가끔 쓰는 자바나 이집트의 그 양식도 볼 수가 없다. 젊고, 그래서 아름다운 매력을 몸 속에 가득히 지니고 자연스럽게 서 있다.   그것은 유럽인이 꿈꾸어 오던 이브(Eve)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반대적 이브도 아니다. 그런 대립을 뛰어넘은, 싱싱한 한 현실로서의 여체(女體)인 것이다. 빨간 꽃과 젖꼭지, 입술 등의 색에서, 오렌지빛, 노랑, 그리고 청록의 밝은 치마에서 차츰 어두운 암록색 검정의 머리칼과 치마색까지 차분한 하모니를 이루고 화면은 풍부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선물   앞 쪽의 작품들이 대부분 타히티에서 일상적인 모습들을 그리는 듯하면서도, 상당히 고갱 내면적인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는 상징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 다면, 이 무렵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그런 그의 강한 의식을 떠난 순수한 일상적인 현실을 그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타히티 시대의 대표적인 모자상 (母子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바 오아 섬에서 그린 이 작품에는 섬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단면을 통한 고갱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에게도, 그것을 지켜 보고 있는 왼쪽의 여인에게도 양식적(樣式的)인 강조는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일상성을 묘사한 풍속화적인 작품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고갱이 인간의 내면을 투시하는 관찰안(觀察眼)과 닦아온 그의 조형적 형식미의 승화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균제의 예술적인 격(格)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부채를 든 아가씨   이 작품은 그가 히바 오아 섬에 옮긴 다음 해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이 섬에 옮겨 온 이후에 그린 여인들은 타히티에서 그린 것처럼, 어깨가 넓고 굵은 팔을 가지고 있지 않고, 반대로 부드러운 몸집에 소녀적인 가냘픔을 보여준다. 이것이 실제적인 모습인지, 고갱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서 반영된 모습인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찬탄보다는 애정이, 양식보다는 친밀한 일상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소녀와 같은 부드러운 몸매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나, 그 구도, 그리고 인물과 의자와의 결구(結構)는 대단히 건실하게 이루어져 있다.       부르는 소리     1901년 11월, 고갱은 몽프레에게 자기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 조그마한 잠잘 곳을 둔 커다란 아틀리에, 이것 저것 모두 선반에 정리하여 손이 닿는 곳에 있다. 그늘진 곳에 달아맨 그네에서 낮잠을 자고 있으면, 3백미터 앞의 바다에서 야자수의 숲을 넘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기서는 시(詩)가 저절로 생겨난다.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것은 그림을 그리면서 몽상에 잠겨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 작품은 고갱의 이런 말들을 상기할 수 있게 한다. 전경의 풀밭 빛깔은 화려한 꽃밭과도 같은 빨강, 분홍, 노랑색 들의 해조(諧調) 뒤쪽의 잔디밭을 앞에 하고 여기 저기 선명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들의 귀에는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부채가 있는 靜物       해변의 騎手들   이 작품은 고갱 최후의 거주지인, 역시 히바 오아 섬의 아투아나 해안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개개의 포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긴밀한 공간 감각(空間感覺)은 드가를 상기시킨다. 고갱은 선배 드가를 일생 동안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 만년의 이 작품에 있어서 그는 다시 드가에 새삼스럽게 더 접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의 대부분을 메운 모래밭의 분홍색은 고갱 특유의 것으로서, 포비즘 (faubism)에 발전하는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고갱은 관헌(官憲)과의 분쟁이나 병의 악화 때문에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화면의 생기있는 표현은 조금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그리고 시력이 아주 나빠졌는데도, 이 화가가 최후까지 작가로서의 힘을 잃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브르탸뉴의 추수 MOISSON EN BRETAGNE   1889년 캔버스 유채 92x73Cm 런던대학 코틀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소장       未開한 이야기   만년의 고갱은 이 섬의 여러 가지 전설에 귀를 기울이고 흥미를 느낀다.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때로는 신비하게, 또 때로는 상징적인 성격으로 화면을 이루어 나간 것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불상(佛像)과 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남자와, 그 한쪽에 가까이 붙어 앉은 젊은 여인,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과 꽃들, 이것도 고갱이 히바오아 섬에서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 배후의 기이한 인물은 고갱의 퐁 다벵 시대의 야코브 마이 에르 데 항이다. 곱사등이며 조그맣게 생긴 사내로서, 항상 20파운드나 되는 성서를 들고 다니는 이 남자를 여기에 그림으로써 고갱은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그리려 했던 것 같다. 그의 과거에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이 만년의 그가 본 섬의 일상성에 결합되었다.   출처:[톰과 제리 아지트]  
381    [쉼터] - 같은 사진을 찍어도 좀 남다르게... 댓글:  조회:2223  추천:0  2017-10-05
  땋은 머리 위에서 피어나는 우정 [인민망 한국어판 9월 29일] 한 사람의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려운데 많은 사람을 동시에 촬영하는 것은 당연히 더 어려운 일이다. 만약 단체사진을 찍는데 모두가 손으로 ‘V’자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단체사진이 될 것이다. 단체사진을 어떻게 찍을지 모르겠다면 SNS에서 ‘좋아요’ 클릭수가 높은 사진을 따라 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번역: 은진호)     해변가에서 촬영한 사진   두바이에서의 찍은 단체사진   천수관음
380    [쉼터] - 위인 초상화 댓글:  조회:1735  추천:0  2017-09-29
천안문--- 모택동초상화 새로 걸어 [ 2017년 09월 28일 ]           국경절을 앞두고 천안문성루에 모택동초상화를 새것으로 바꾸어 걸어놓았다.        천안문광장에 설치된 대형 ‘꽃바구니’ ///신화사 [ 2017년 10월 01일 04시 37분 ]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 2017년 10월 01일 04시 37분 ]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국기호위대전사들---  
379    [이런저런] - 마광수님, "문인화" 범주에서 "외도"해보기... 댓글:  조회:1537  추천:0  2017-09-26
      한때 장차 미술을 전공할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줄곧 미술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틈틈히 문인화를 그리며 미술에 대한 욕구를 달래곤 했는데,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꿈꾸는 나의 미술가적 기질은 내가 쓴 문학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여러가지 탐미적 묘사를 가능하게 한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본격적인 그림이래봤자 삽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독자들한테 내 그림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1989년 봄부터 1992년 가을까지 '일간 스포츠'지에 을 연재하면서 나는 직접 삽화를 그렸는데, 내가 그린 의 표지화를 보고 신문사측에서 삽화까지 의뢰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뒤로 나는 내가 쓰는 신문, 잡지의 연재소설 삽화까지 의뢰받아 더 자주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개인전과 단체전 등 꽤 많은 미술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시화집도 내고 단행본 소설에도 내가 그린 삽화들을 넣었다. 또 내 책의 표지화는 다 내 그림들이다. 여러 번 전시회를 하면서 나는 다시한번 미술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새롭게 실감할 수 있었다. 문법을 따져가며 토씨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글쓰기와는 비교가 되지않았다. 특히 손으로 비비고 문지르며 나이프로 긁어댈 수도 있는 캔버스작업은 내게 진짜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해 주었다.그림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 우선 나 스스로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붓을 휘둘러 대었는데,그러다보니 캔버스 작업은 대부분 즉흥성에 의존한 것이 많다. 밑그림을 그리거나 전체의 구도를 미리 머리속에서 생각해 놓고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일단 뭔가 발라놓고나서 무슨 형상을 만들것인가를 즉흥적으로 결정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즉흥성과 우연기법은 사실 비구상 회화에서나 시도하는 기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구상일지라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되었는데,  이 색 저 색 마구 칠해놓고 나서 나중에 억지로 정리를 하다보니 신기하게도 상징적인 그림이 되어버렸다. 짧은 싯귀가 들어가는 문인화적 회화는 일필휘지로 그려야만 하고, 또 주제와 상징적 상관성이 있는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시인기질과 잘 맞아떨어져서 어렵긴해도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옛부터 시.서.화 이 세 가지는 문인들이 당연히 습득해야할 분야였으므로 각자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와서는 문학과 미술 간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가고 있다. 나는 그런 간격을 좁혀보려고 했다. 이번에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것은 내 작품들이 무슨 재료를 써서 그렸든 모두 다 문인화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미술작업을 외도라고 비아냥거리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 마 광 수 -          《정신보다는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질서보다는 자유에, 도덕보다는 본능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운명과의 싸움이란 결국 정신적 극기와 육체적 절제를 강요하는 전통윤리와의 싸움이요, 금욕주의와의 싸움이다. 진정한 행복은 운명과의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드라마틱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미’로부터 온다.》 《나는, 문학은, 또는 모든 예술은 우리의 과 사이에서 비폭력적 중재가 가능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시인ㆍ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1951년 서울 출생. 1969년 대광 고등학교 졸업, 1973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75년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1983년 문학박사(연세대).  1977년 [현대문학]에 , , , , ,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도 등단.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전시회 1991 [마광수,이목일,이외수,이두식 4인의 에로틱 아트 전] 나우갤러리, 서울 1994 [마광수 개인전] 다도화랑, 서울 2005 [마광수, 이목일 전] 거제 예술회관, 거제 (1월) 2005 [마광수 미술전] 인사갤러리, 서울 (6월) 2005 [마광수 미술전] 대백플라자 갤러리, 대구 (7월) 2006 [마광수, 이목일 전] 롯데마트 화정점 로비, 일산 (2월) 2007 [색(色)을 밝히다 전(展)] 북스 갤러리 서울 인사동 (1월) 2007 [마광수 개인전] 미국 뉴욕 Maxim 화랑 (6월) 2009 마광수展 청담동 갤러리아순수(4월) 2009 마광수展 용인 수지 아트센터순수(5월)       
378    [중국 이모저모] - 중국 하르빈 "건축예술광장"에서- 댓글:  조회:2573  추천:0  2017-09-25
중국 하르빈 성 소피아성당 외부           새들이 모여있는 곳...       성당 내부     들어가는 입구     성당 내부에는 성당 관련 옛날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장이 예쁘다           5시가 되니 클래식 음악에 맞춰서 분수 쇼가 펼쳐지고...   성당의 불은 6시 반쯤이 돼서 켜졌다 성 소피아 성당의 밤                         (흑룡강신문=하얼빈)하얼빈(哈爾濱, 합이빈) 성 소피아 성당은 1907년 3월에 건축된 성당으로 제정러시아 동시베리아 제4보병 사단이 중동철도를 부설하며 지은 성당이다. 성당 전체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면적은 731㎡, 높이 53.35m에 달한다. 평면이 라틴십자가 구조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의 건축이다.   성 소피아 성당의 웅장함과 정교함과 견줄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성당 벽면은 모두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위를 올려다보면 양파 모양의 돔형 지붕이 4개의 크기가 각기 다른 지붕들을 모아주고 있다. 주종식(主从式) 구도가 돋보이며 4개 층 사이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앞뒤, 좌우에는 4개의 출입문이 있다. 정문 맨꼭대기는 시계탑이 있고 구리로 만든 큰 종은 7개 소리를 낼 수 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종지기가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해 리듬감 있는 종소리를 연주한다.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이 갖고 있는 이국적인 도시 풍경에 어울릴 뿐만 아니라 제정러시아의 동북 침입 역사의 증거이자 하얼빈 근대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2016년 9월 하얼빈시 성 소피아 성당은 인민대회당, 파크 호텔 상하이(上海國際飯店), 우한(武漢, 무한) 창장(長江, 장강)대교 등 98곳과 함께 ‘제1기 중국 20세기 건축유산’에 등재되었다.         밤이 되면 이렇게 연주도 해준다는~ ==========덤으로 더@@...         하르빈 중앙대가에 우리와 연관된 건물도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저격 전 일본인처럼 변장했던 미용실과 사진 찍은 사진관이 있던 건물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본인처럼 꾸미고 애틋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 거사 전의 마지막 모습을 남겼을 것이라 상상하니 숙연해진다... ================================== 성소피아 성당의 모습이다. 이 성당은 1907년 지어진 높이 53m의 러시아정교 교당이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성 소피아 성당. 무척이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다. 1996년 전국 중점점 문물보호단위로도 선정된 건물이라고도 한다. 러시아 정교 문화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는 하얼빈의 대표적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의 장식문양이 가까이서 보니 더욱 정교하고 화려했다. 이곳 저곳에서는 기념사진을 찍겠다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확장공사를 계속해서 면적이 721㎡에 이르는 규모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라고 한다. 역시 그렇게 자랑할 만큼 무척이나 그 규모가 큰 성당이었다. 1903년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오면서 멀리 고향을 떠난 병사들을 달래기 위해 1907년 나무 구조로 건축했다고 한다. 이어 1923년부터 9년간 벽돌로 재건축 되었다. ? 하얼빈 역사를 기록한 흑백사진들도 전시해두었고, 하얼빈의 건축예술관이라고도 하는 이 곳.    
377    [고향자랑] - 중국 연변 황금가을 구경 오이소... 댓글:  조회:1479  추천:0  2017-09-25
[중국 연변] 황금가을 대지를 수놓았네 [ 2017년 09월 25일 ]                   9월말, 가을빛이 점점 짙어지면서 황금가을이 성큼 다가오고있다. 사진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연변 각지의 가을풍경들/길림신문
376    [그림한점] - "인생아리랑" 댓글:  조회:1555  추천:0  2017-09-23
   
375    [미술시장] - 청록색 전면점화 "무제" 새 주인 찾았다... 댓글:  조회:1451  추천:0  2017-09-19
[서울옥션 제공]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공개적인 미술 시장에 처음 등장한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청록색 전면점화 '무제'가 19일 경매에서 15억 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서울옥션은 이날 서울 종로구 평창동 서울옥션 스페이스에서 근현대미술품·고미술품 경매를 진행한 결과 '무제'가 15억 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서울옥션이 애초 밝힌 '무제' 추정가는 16~25억 원이었다. 그러나 해당 작품은 이날 경매에서 기대만큼 높은 낙찰가를 기록하지 못했다. 작품 뒷면 'whanki 69-73'은 작가가 미국 뉴욕에 체류하던 시절인 1969~1973년 제작했음을 알려준다. 함께 적힌 '낫 포 세일'(not for sale) 문구를 두고 서울옥션은 "뉴욕 포인텍스터갤러리가 1978년 아트페어 피악(FIAC)에 김환기 작품을 출품할 당시, 아내 김향안 여사가 출품은 하되 판매를 원치 않아 남겨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374    마광수님은 화가의 꿈도 꿨었다... 댓글:  조회:2424  추천:0  2017-09-14
      한때 장차 미술을 전공할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되었지만, 그 뒤로도 줄곧 미술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틈틈히 문인화를 그리며 미술에 대한 욕구를 달래곤 했는데,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꿈꾸는 나의 미술가적 기질은 내가 쓴 문학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여러가지 탐미적 묘사를 가능하게 한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본격적인 그림이래봤자 삽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독자들한테 내 그림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1989년 봄부터 1992년 가을까지 '일간 스포츠'지에 을 연재하면서 나는 직접 삽화를 그렸는데, 내가 그린 의 표지화를 보고 신문사측에서 삽화까지 의뢰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뒤로 나는 내가 쓰는 신문, 잡지의 연재소설 삽화까지 의뢰받아 더 자주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개인전과 단체전 등 꽤 많은 미술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시화집도 내고 단행본 소설에도 내가 그린 삽화들을 넣었다. 또 내 책의 표지화는 다 내 그림들이다. 여러 번 전시회를 하면서 나는 다시한번 미술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새롭게 실감할 수 있었다. 문법을 따져가며 토씨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글쓰기와는 비교가 되지않았다. 특히 손으로 비비고 문지르며 나이프로 긁어댈 수도 있는 캔버스작업은 내게 진짜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해 주었다. 그림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 우선 나 스스로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붓을 휘둘러 대었는데, 그러다보니 캔버스 작업은 대부분 즉흥성에 의존한 것이 많다. 밑그림을 그리거나 전체의 구도를 미리 머리속에서 생각해 놓고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일단 뭔가 발라놓고나서 무슨 형상을 만들것인가를 즉흥적으로 결정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즉흥성과 우연기법은 사실 비구상 회화에서나 시도하는 기법일 것이다. 그렇지만 구상일지라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되었는데,  이 색 저 색 마구 칠해놓고 나서 나중에 억지로 정리를 하다보니 신기하게도 상징적인 그림이 되어버렸다. 짧은 싯귀가 들어가는 문인화적 회화는 일필휘지로 그려야만 하고, 또 주제와 상징적 상관성이 있는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시인기질과 잘 맞아떨어져서 어렵긴해도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옛부터 시.서.화 이 세 가지는 문인들이 당연히 습득해야할 분야였으므로 각자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와서는 문학과 미술 간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가고 있다. 나는 그런 간격을 좁혀보려고 했다. 이번에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것은 내 작품들이 무슨 재료를 써서 그렸든 모두 다 문인화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미술작업을 외도라고 비아냥거리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 마 광 수 -          《정신보다는 육체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집단보다는 개인에, 질서보다는 자유에, 도덕보다는 본능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이 바로 「야한 정신」이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운명과의 싸움이란 결국 정신적 극기와 육체적 절제를 강요하는 전통윤리와의 싸움이요, 금욕주의와의 싸움이다. 진정한 행복은 운명과의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드라마틱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미’로부터 온다.》 《나는, 문학은, 또는 모든 예술은 우리의 과 사이에서 비폭력적 중재가 가능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시인ㆍ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1951년 서울 출생. 1969년 대광 고등학교 졸업, 1973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75년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1983년 문학박사(연세대).  1977년 [현대문학]에 , , , , ,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도 등단.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전시회 1991 [마광수,이목일,이외수,이두식 4인의 에로틱 아트 전] 나우갤러리, 서울 1994 [마광수 개인전] 다도화랑, 서울 2005 [마광수, 이목일 전] 거제 예술회관, 거제 (1월) 2005 [마광수 미술전] 인사갤러리, 서울 (6월) 2005 [마광수 미술전] 대백플라자 갤러리, 대구 (7월) 2006 [마광수, 이목일 전] 롯데마트 화정점 로비, 일산 (2월) 2007 [색(色)을 밝히다 전(展)] 북스 갤러리 서울 인사동 (1월) 2007 [마광수 개인전] 미국 뉴욕 Maxim 화랑 (6월) 2009 마광수展 청담동 갤러리아순수(4월) 2009 마광수展 용인 수지 아트센터순수(5월)          ▲ (사진 = 장해순 기자) ⓒ2011 CNBNEWS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포르노그래피 작가’ ‘외설 교수’ 마광수… 그를 따라다니는 무수한 빨간 딱지들. 그런 마광수가 20년간 자신을 둘러싼 숱한 가십과 색안경을 걷어내고 '소년 광수'로 돌아가 동심을 노래한다. 산토리니서울에서 마광수의 개인전 ‘소년, 광수’가 열렸다. 올해로는 첫 전시이지만 벌써 그가 아홉 번째 선보이는 그림 전시회다. 선정성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의 글만큼, 그동안 그의 그림 역시 ‘포르노그래피’라는 꼬리표를 달 만큼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예전 작품과는 너무 상반된 느낌으로 ‘소년의 동심’을 담아냈다. ‘광마’ 마광수가 아닌 ‘소년’ 광수의 모습으로 그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동심이 꾸는 꿈, ‘포르노’ 기존에 그가 선보인 ‘마광수다운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이번 작품에 대해 그는 오히려 ‘다르지 않음’을 설명했다. “저는 글을 쓸 때도 ‘야(野)한 것’에 중점을 두지만 그림을 그릴 때 역시 ‘야한 것’에 중점을 둡니다. 야하다는 것이 무조건 선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타고난 자연의 성정(性精)에 솔직함을뜻하는 거죠.” 마광수의 작품에서 ‘야(野)’는 곧 동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동심으로 돌아가 본연에 순응하는 것. 그것은 때로 ‘야한’ 포르노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벌거벗고 있어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성경대로라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기 이전 아담과 이브가 갖고 있던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겠죠.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순수 한 본능의 세계, 그런 세계가 곧 야한 세계요, 야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성범죄율의 10배에 달하는 한국에 대해 그는 ‘성의 자유가 없으니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한국의 닫힌 성문화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그의 작품 속에 ‘야’는 결국 순수한 본연의 결정체, 발가벗은 ‘동심’으로부터 꾸는 꿈 인 것이다. ▲ 그녀의 만도린, 2011 ⓒ2011 CNBNEWS ▲ 광마의 꿈, 2010 ⓒ2011 CNBNEWS 춤추듯 노래하듯, 캔버스에 담아내는 즉흥연주곡 글과 함께 어우러지는 마광수의 그림은 ‘문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어떤 그림은 ‘그림’ 자체가 강조되기도, 또 어떤 것은 ‘글’이 더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문인인 그의 그림에 글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이처럼 그림과 글은 그의 화폭 위에서 분방하게 어우러진다. 이는 계획된 구상과 정형화된 규칙, 방법 속에 일궈지는 것이 아닌, ‘붓 가는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증거다. 그의 그림은 모두 ‘그때그때 마다의’ 즉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글이 먼저, 또 다른 작품에서는 그림이 먼저 떠오른다는 것은 그가 일체의 구애 없이, 그저 손 가는대로 단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음을 보여 준다. 재료에서도 제한이 없다. 그의 작품을 담아낸 종이나 채색 재료 모두 일상적이고 가벼운 느낌이다. 마치 동네 어귀의 문방구에 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재료들 말이다. ▲ 육교에서, 2011 ⓒ2011 CNBNEWS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큰 것’ ‘비싸 보이는 것’을 좋아하죠. 문학에서만 봐도 '대작주의'라고 해야 하나요? 무조건 크면 작품이 좋고 비싸다고 생각하니까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단출한 종이 위에 소박하게 그려낸 그림이면 '저렴한 그림'이라는 인식이 참 웃긴 거죠.” 이런 현실에서 ‘팔릴만한 작품’을 그리고자 했다면 그 역시 ‘비싸 보이는’ 재료들로 그림을 무장했을까? ‘돈 벌자고 그림 그리는 것이 아니다’는 마광수는 물질적인 것을 기대해서 ‘크고’ ‘빛 좋은’ 것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이처럼 소박하고 일상적인 그의 재료들은 그가 말하는 ‘동심’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듯하다. 물질적인 것이라든가 그 어떤 구애 없이 그저 ‘마음으로 좋아 그리는 그림’인 것이다. 글 쓰는 마광수든, 그림 그리는 마광수든 “소설이 중노동인데 비해 미술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쉽게 그려지죠.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참 어렵더라구요. 아이디어가 잡히고 나면 즉흥적으로 즐겁게 그려 나갑니다.” 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마광수. 글만큼이나 그림에도 애착이 큰 그는 오는 8 월에도 삼청동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그 어떤 매체의 모습으로든, 세상을 향해 그가 던지는 여과 없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닫힌 마음을 열고 그의 진심어린 동심을 느껴 볼 수 있다. “저도 이제는 재평가 받고 긴 세월 동안 받은 ‘왕따’의 설움을 면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나 마광수를 무조건 ‘변태’라고들 생각하시니 말입니다. 모국에서의 이런 시선이 서글픕니다. 오히려 타국인 일본은 저의 문학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데 말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런 색안경 을 거둬내고 싶습니다. 그동안의 ‘외설’이 아닌, ‘소년 광수’의 동심을 통해서요.” 이선유 기자 마광수 개인전 : 언제나 소년같은 마광수, ㅡ그림 속에 동심을 담아 돌아오다 마광수(馬光洙) ! 1989년 를 시작으로 그는 존경받는 교수나 작가보다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는, 작품성보다는 항상 말초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며 사회적으로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이름 중 광(光)이 빛광이 아니라 미칠 광(狂)이 아닐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을 만큼 당시 그의 작품 속에 묘사되는 성적인 코드는 높은 수위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대단할 것이없는 수준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거의 포르노그라피였었고 제 기억으론 여러번 TV 토론이 열릴 만큼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었습니다.) 이후 , 등의 연작을 통해 파격적인 성애묘사와 가치전복의소재로 사회를 논쟁속으로 뜨겁게 달구었던 그는 결국 법정에까지 서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이후 거짓말처럼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서 서서히 잊혀졌었습니다. , 등의 작품이 있었지만 대중들에겐 변태작가, 언론에 주목받으려 발버둥치는 이상애주의자로 치부되어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하고 주류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물론 그 사이에도 여러 편의 책이 출간되었고 문학적인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후 22 년만에 첫사랑과 그 순간의 열띠고 설레이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개인전 로 돌아왔습니다. 2011년 2월 18일부터 홍익대 앞의 "산토리니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마광수 교수의 개인전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작품성향과는 다른 마치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속 그림을 보는 듯한 이미지가 돋보이는데... 그의 명성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조금은 생뚱맞고 이상한 전시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기작가...... 변태작가로서의 마광수가 아닌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속으로 돌아가려는 순수한 동심으로 다가가려는 이번 전시는 그를 잘 모르고 있던 사람들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심을 이야기하는 그림이라 하지만... 곳곳에 마광수교수만의 생각과 도발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이 아니겠지요.^^ ㅋ~ 두고보자 정신.... 그가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51년생이니 올해 마광수교수의 연세가 60세... 그런데 그 이상의 나이로 보이는 이 비쥬얼은... 하긴 젊었을때도 그의 저서로 통해 접했던 야한 컨셉은 외모와 일치하지 못했었죠.^^ 이번 작품들은 야하지 않으니 겁먹지 말라는 그의 말이 있었지만 이 전시가 그렇게 동심의 세계만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의 그림 속의 말이 그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하긴 그만 아니라 모든 남자들이 한번쯤은 저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아닌 척하는 대중들에게 항상 도발을 합니다. "너희도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점잖은 척하지 말라는....." "산토리니 서울"의 큐레이터 노경희씨가 진행한 간담회에서 마광수교수는 전시회의 작품들이나 현재의 동향 보다는 지난 날 그의 작품을 몰라주었고 오해했던 대중들에 대한 회한과 힘들었던 지난날에 대한 아픔을 이야기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요. 그를 볼 때 화려했던 지난 날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리 편한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 "마광수"...... 20년을 돌아 당시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했고 또 어떤 면에선 정치적인 희생양이기도 했던 영욕의 시대를 거쳐 동심과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담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물론 요즘 세대는 잘 모르는 그의 작품들과 일부 사람들에게는 외설 연극 공연의 원작자(?)로 비춰질지라도 격동의 한 시대를 풍미했고 시대를 앞서갔던 아픔을 홀로 간직해야 했던 마광수의 이름은 언제나 우리곁에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마광수 교수, “순수한 본능의 세계가 야한 세계, 야한 마음”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   “야하다는 것은 섹시하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저는 ‘들 야(野)’자로 해석하는데, 타고난 자연 의 성정에 솔직한 것을 뜻합니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죠.도덕 과 윤리를 뛰어넘는 순수한 본능의 세계, 그런 세계가 곧 야한 세계요 야한 마음입니다. ” ‘야한 작가’ 마광수 교수(60)가 개인전 ‘소년, 광수’를 지난 2월 18일부터 서울의 홍익대 앞에 있는 산토리니 서울 갤러리에서 열고 있다. ‘야한 그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간 마 교수는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육교, 소녀, 별, 동물과 같은 소재를 등장시키면서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그려낸다. “동심의 세계와 야한 세계는 통한다” 는 설명이다. 이번 전시에는 마 교수가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그린 그림 50여점이 전시됐다. 종이에 먹과 파스텔 같은 친숙한 소재로 그려낸 그림에는 마 교수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글을 함께 실었다. 육교에서 첫사랑 소녀와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그림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날 육교 위에서 그 녀와 손잡고 걸어가다보면 사랑이 저절로 솟구친다”라고 적었다. 그는 “현대적인 문인화”라고 말했다. 마 교수는 “그림을 그릴 때 동심과 같은 즉흥성에 중점을 두고 붓가는 대로, 생각이 가는 대로 그렸다”며 “시구 또한 즉흥적인 글귀를 써넣었다”고 말했다. 마 교수는 “그림을 많이 그려갈 수록 ‘꼼꼼하고 성의있는’ 그림보다 ‘거칠되 천의무봉한’ 그림을 지향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마 교수의 심경을 반영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마 교수가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고 꼽은 ‘광마의 꿈’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말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狂馬(광마)는 날아오르고 싶다”고 적어넣었다. 마 교수가 “내 심정을 가장 잘 담고 있다”는 ‘시작이 반’이라는 작품에서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 두고보자 정신으로”라고 적어넣었다. 1990년대 등으로 외설 시비에 휘말려 두 번이나 재판을 받고 고초를 겪은 후 학계에서도 소외된 마 교수의 심정을 담은 것으로 그는 “살아서 재평가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고 말했다. 마 교수는 그러나 자신의 본령을 글쓰기라고 강조했다. 곧 의 후속작인 등 2권의 소설과 그림과 글을 함께 엮은 에세이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마 교수는 “는 옛날의 사라보다 훨씬 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광수 교수 미술전시회 (2011. 2. 18 - 3. 6 ) 열다 (아츠 뉴스) 2011년 2월 21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화랑에서 마광수 교수의 개인 전 (소년, 광수)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몸의 철학', '육체주의' 등 선정적인 소재와 파격적인 글쓰기로 유명한 마광수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20년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숱한 가십과 선입견을 걷고, 그의 가장 순수한 감성을 표현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마 교수는 작가노트를 통해 "난 그림을 그릴 때 '야(野)한 것'에 중점을 두는데 그렇다고 섹시 한 의미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내가 표현, 표출하고 싶은 '야한 것’은 타고난 자연의 성정에 솔직해지는 것으로 즉,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마광수 개인전'(소년, 광수)는 3월 6일까지 산토리니 서울에서 열린다. [아츠포토] 마광수 교수,'광마의 꿈' 자신을 표현한 작품 [아츠뉴스 뷰티스타 임한별 기자] 마광수 교수가 자신이 그린 작품(광마의 꿈)을 설명하고 있다 [아츠포토] 마광수 교수, ' 그리움' 오랜 시간에 공들여 걸린 작품. [아츠뉴스 뷰티스타 임한별 기자] 마광수 교수가 자신이 그린 작품(그리움)앞에서 포즈를 취 하고 있다 [아츠포토] 마광수 교수, '시작이 반' 살아 생전에 자신을 평가하여 그린 작품 [아츠뉴스 뷰티스타 임한별 기자] 마광수 교수가 자신이 그린 작품 (시작이 반)을 설명하고 있다. [아츠포토] 마광수 교수, '먹, 파스텔, 나에게 잘 어울려' [아츠뉴스 뷰티스타 임한별 기자] 마광수 교수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 야한 남자의 동심은? 2011-02-22 (헤럴드 경제) 마광수 개인전 갤러리 산토리니서울 1관, 2월 18 ~ 3월 6일까지 외설, 포르노그래피 작가, 광마 ‘마광수’. 그의 이름 석 자는 마광수 개인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야함’의 대명사로 읽힌다. 이런 그가 ‘첫사랑’을 그렸다.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 으로 그렸다는 야한 남자의 첫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야함과 첫사랑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에 마광수 교수는 작가의 말을 빌어 “나는 문학창작을 할 때도 ‘야(野)한 것’에 중점을 두지만 그림을 그릴 때도 역시 ‘야한 것’에 중점을 둔다. 야하다는 것은 섹시하다는 의미보다는 타고난 자연의 성정(性情)에 솔직한 것을 뜻한 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라며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순수한 본능의 세계, 그런 세계가 곧 야한 세계요 야한 마음이다.” 라고 나름의 견해 를 밝혔다. 마광수 교수는 展에서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육교, 소녀, 별, 동물과 같은 친 숙한 소재를 등장시키면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가장 순수한 과정으로 그렸다. 동시 적인 표현과 환상적인 사고,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은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상기시키며 잠시나마 여유를 찾아 주는 듯 하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2011년 최근 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약 5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展은 갤러리 산토리니서울 1관에서 2월 18일부터 3월 6일까지 진행된다. /한석희 기자             마광수, "야(野)함이란 순수한 본성에 가깝죠" 주간한국 2011-02-24   주제로 개인전.......문인화 형식의 50여 작품 선보여 마광수 교수에 관한 대부분의 인터뷰 기사는 그의 투덜거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가 지나온 길 을 돌이켜보면 당연하다. 억압과 압제의 시기였던 군사독재 정부 이후 찾아온 문민정부도 '성 (性)'이라는 테마 앞에서는 서슬 퍼런 칼을 휘둘렀다. 그 칼에 다친 사람 중 가장 큰 희생자가 바로 마광수 교수다. 1990년대 대부분을 '표현의 자유' 라는 가치를 위해 검찰과 싸운 그는 오랜 싸움 끝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2000년대 이후에도 마찬가지. 언론과 학계는 다원주의의 도래, 문화 민주주의 등 문화 패러다 임의 변화를 외쳤지만, 성에 대한 인식은 이런 급변하는 흐름에서 빠져 있었다. '마광수'라는 이름이 아직도 1990년대에 씌워진 외설 작가의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다. 하고 싶지만 다 못한 말들을 글로 써왔다. 그가 글로만 그 의 작품 세계를 펼쳐온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그, 미술 전시회는 문학적 재능 못지않게 그림에서도 발군의 재능을 드러냈다. 대학 진학 시에도 미대를 지원하려고 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이번에 자신의 그림들을 모아 개인전을 연다. 2011년 2월 18일부터 갤러리 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마광수 교수의 작품 약 50여 점을 모았다. 작품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소년 광수'. 우리가 알고 있는 마광수가 아닌, 그 안에 있 는 근원적인 마광수의 자아가 담긴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전시가 처음은 아니다. 24년지기인 서양화가 이목일 화백과 함께 , 등을 여는가 하면, 1994년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이후 서울과 미국에 서 수차례 전시회를 연 그는 글과 그림을 통해 꾸준히 자신만의 에로티시즘을 설파해왔다. 하지만 동심을 다룬 만큼, 이번 전시 에서 우리가 알던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의 전도사 마광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소년 시절의 마광수가 궁금해진다. "어릴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어요. 힘센 놈들한테 얻어맞고 돈 뜯기며 당하고 살았죠. 나는 폭력에 약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계속 주장하는 것도 탐미적 평화주의죠." 모든 아이들의 권장도서인 를 그는 무척 싫어했다. 대신 그의 관심을 끈 것은 . 그는 얼마 전에 완역판이 나왔는데 역시나 잘 안 팔린다며 우리 사회의 경색적인 풍토를 지적한다. "문학에서 자꾸 교훈을 찾으려고 해요. 물론 사회 개조도 작가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칼럼만으로 충분한데, 왜 창작에서까지 그것을 강요하는지 모르겠어요." 고흐의 서간집처럼 그림에 짧은 글을 넣는 문인화 형식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즉흥적인 드로잉과 강렬한 색채로 문학 세계와의 유사성을 증명한다. 글이 아닌 그림에서도 자신만의 색채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경지다. 이에 마 교수는 '글과 그림은 원래 통한다'며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원래 '시(詩), 서(書), 화(畵)'는 문인들이 습득해야 할 분야였다는 이유다. 문단에서 그처럼 글과 그림을 자유롭게 다루는 작가는 이외수가 있다. 두 사람은 예전에 전에서 함께 전시를 한 적도 있다. 화가 마광수가 좋아하는 작가는 고흐와 천경자 화백. 듣고 보니 원색을 주로 쓰는 강렬한 색감 의 화풍에서 닮은 점이 있다. 또 그림뿐만 아니라 글솜씨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작가라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도 마 교수 일생의 주제인 '야함'은 여전히 나타나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벗은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 교수는 그동안 '야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야(野)'자를 써서 '자연의 본성에 충실하다'라고 사용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야함이란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는 순수한 형태의 본성에 가깝다. 마 치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천진난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 교수는 이런 원래의 뜻이 오랫동안 '천박하다'라는 뉘앙스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예수님 말씀에도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리니'라는 내용이 있습 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점차 '체면'을 차리게 돼서 그 순수한 야함을 잃어가는 것이죠." TV를 켜면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들이 짧은 옷을 입고 나와 엉덩이를 흔든다. 언론 은 이를 '삼촌 팬덤'으로 명명하기도 하고, 혹자는 '미성년 여성의 성 상품화'를 언급하며 신랄 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 마광수라는 성의 아이콘을 넘어서는 성 전성시대 라는 점이다. 하지만 마 교수가 보기에 성은 여전히 억압받는 대상이다. "언젠가 KBS 사장이 걸그룹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겠다는 말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죠. G - 드래곤은 외설스러운 퍼포먼스를 했다고 비난을 받기까지 했죠. 이미 현실의 청소년들의 성 의식은 앞서 있는데 겨우 퍼포먼스 정도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그는 이런 이상한 엄숙주의, 경건주의의 배후로 기독교를 지목한다. 처음에는 이게 유교 탓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근본주의 기독교가 지배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이처럼 성에 대해서라면 급진적인 의견을 피력한 탓에 그에 대한 인식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막론 하고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계속된 잡음은 그의 40 ~ 50대를 각종 소송으 로 보내게 했다. 어느덧 올해로 환갑이 된 마광수 교수. 일평생을 에로티시즘에 바쳐온 그가 느끼는 '노년의 에 로티시즘'은 어떨까. 그동안의 상황을 감안하면 한풀 꺾일 만도 하지만, 그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인식은 한층 더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답한다. "예전에는 결혼은 선택이라고 주장했다면, 지금은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제안해요. 지금도 이 혼율은 점점 치솟고 불륜, 별거 커플도 많아지는데, 결혼제도는 앞으로 50년 안에 무의미해질 겁니다. 장담합니다." '야함'에 대한 천착을 통해 자신만의 공고한 에로티시즘 세계를 구축해온 마광수 교수. 이번 전시를 통해 '야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야한 작가' 마광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그는 다음에는 '야함에 대한 동화'를 구상하고 있다. "어른들이 읽는 동화에요. 야함을 동심에 대한 관점으로 쓰는 거죠. 그럼 걸리지도 않을 거고. 하하하~" ///[인터넷한국일보] 송준호 기자 사진=임재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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