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월 2025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홈 > 世界 색점선

전체 [ 533 ]

453    "새로운 미국 회화의 선구자" 화가 - 윌렘 드 쿠닝 댓글:  조회:3994  추천:0  2017-11-20
    미국의 화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액션 페인팅’이라고 하는 일종의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자이다. 12세 때건축 장식가에게, 뒤에 조형 아카데미에서공부하였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장 식과 삽화 그리는 일을 하였고, 대공황 중에는연방 미술 계획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에입체파식의 작품이 인정되어, 그 뒤로는 추상 표현주의 경향으로 기울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인체를 자유로운 선과 선명한 색채로 대담하게 표현한 ‘여인’의 연 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베네치아·상파울루 등의국제전에서도 호평을 받아, 뉴욕파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2006년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 TOP 5에 속하는(2712만 달러)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무제 XXV''      Willem de Kooning  1904~1997        Willen de Kooning은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화가로 추상표현주의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그림에서 사용된 과격하면서도 파괴적인 붓놀림은 과장된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 ‘새로운 미국회화의 선구자’로 당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50년대 초에는 1940년대와 달리 여성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형태가 더욱 평면적이며 일그러진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분홍색, 황토색, 파란색 등 윌렘 드 쿠닝 특유의 색채가 등장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공격적이고 격정적인 형상을 한 ‘여인’ 연작을 그렸는데, 이 대형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두껍게 물감을 짓이겨 채색하는 과격한 터치로 격렬하고 공격적인 작업을 펼쳤으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호전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느긋하며 간결한 화풍을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는 ‘회화’, ‘여인’ 연작 등이 있다.                              Willem de Kooning, Woman V (1952-53)                    Woman VI, 1953 Oil on Canvas 36 x 46 ¼ in. Gift of G. David Thompson (55.24.4) The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Willem de Kooning, Woman 3 (1953)         (Willem de Kooning, Door to the Rive(1960)     Willem De Kooning의 작품명이기도 한, Door the the river(going through the door to the river)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여기서 River는 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르는 삼도천(Styx)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망자가 이 강을 건너서 죽은 자들의 세계인 하데스(Hades)에 이른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곡의 제목은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Willem De Kooning의 말년의 심정을 묘사한 내용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Two trees on Mary Street . . . Amen!"   Willem de Kooning 1975 Oil on canvas 203.8 x 177.8cm Purchased 1985 with the assistance of the Queensland Art Gallery Foundation © Willem de Kooning 1975. Licensed by Viscopy, Sydney, 2007                                                                                                                                                                                                                                                                                                                                                                                                                                           윌렘 드 쿠닝(Will de Kooning) 작가연구                                                 1. 입체파의 모방에서 추상 표현주의의 완성   잭슨폴록과 함께 미국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윌렘 드 쿠닝(Will de Kooning)은 1904년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년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은 이름에 드(de)를 덧붙여 작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 하게된다.    2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드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또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드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에서 55년 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말 탄생하는 드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드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드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가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이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그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할 수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그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차원화 시켜가는 용해작업의 시작이다.   드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이 시리즈는 드 쿠닝이 미술평론가 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시리즈 작품은 (1940)이었다.   이어 (1944), (1944), 등을 거쳐 2년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됭 (1954∼55)에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2. 시리즈     드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한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이 여인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그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 쿠닝의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을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년대는 (1952∼53)이나 (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1954∼55)과 (1955)에서 모방과 그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드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드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1971)에 이르러야 드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더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그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드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드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 업'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드 쿠닝처럼 이 문구가 잘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그 때문인지 드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 쿠닝의 작품 뿐 만아니라 그보다 더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많이 있다.  그러기에 드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 졌다고 비난할 수 도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그 작품을 감상할 뿐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땐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Willem de Kooning                                                   1904 Born Rotterdam, Holland  1916 Enrolled, Rotterdam Academy of Fine Arts & Letters Rotterdam, Holland  1926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1934 Joined the Artist's Union  1935 Joined mural division, W.P.A. Federal Art Project  1962 Became United States Citizen  1964 Awarded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From Lyndon B. Johnson, Washington, DC  1975 Awarded Gold Medal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New York, NY  1982 Elected member of the Akademie der K?ste Berlin, Germany  1985 Awarded National Medal of Arts From U.S. President Ronald Reagan, Washington, DC  1997 Died .     Woman with a Green and Beige Background, 1966. Oil on paper mounted on masonite. 28 1/2 x 22 3/4 in. (72.4 x 57.8 cm). Grey Art Gallery, New York University Art Collection.                                                        Untitled XII, 1975. Oil on canvas. 79 3/4 x 69 3/4 in. Private Collection of Paul G. Allen.                                                                                                                                                                                                   Willem de Kooning  Woman VI, 1953   Oil on Canvas                                                 36 x 46 ¼ in.Gift of G. David Thompson (55.24.4)                                                   The Carnegie Museum of Art, Pittsburgh                                                                                                                                                                                        조각 "Standing Figure" en "Seated Woman" , Rotterdam                "예술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든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 예술가가 덜덜 떨 생각을 한다면, 갑자기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떨기 시작할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떨면 엘 그레코가 떨고, 곧 모든 인상주의자들도 떨기 시작한다." - 윌렘 데 쿠닝                                  출처 :아름다운 그림여행   글쓴이 : 순순이  
452    부부 추상 표현주의 화가 댓글:  조회:3533  추천:0  2017-11-19
  출생 1904년 사망 1997년   윌렘 드 쿠닝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구한 뉴욕 스쿨의 일원이었다. 다른 추상 표현주의 화가와는 달리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액션 페인팅에 가까운 격한 필체가 특징이다. 초기에는 극단적인 추상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여인’ 시리즈에서 보이듯 전통적인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표작으로 〈여인〉 시리즈를 비롯해 〈핑크빛 천사〉, 〈벤치에 앉은 여인〉 등이 있다. 19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열두 살 때 일반 학교를 그만두고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 견습생으로 일하며 1916년부터 1925년까지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꽃잎, 줄기, 잎 등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추구하던 ‘유겐트슈틸’과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극단적인 추상화를 추구했던 네덜란드의 ‘데스테일’에 관심이 많았다. 스물두 살이던 1926년 미국으로 밀항하여 한동안 페인트공, 광고 일러스트레이터, 상점 디스플레이어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뉴욕에서 잭슨 폴록,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 마크 로스코와 같은 뉴욕 스쿨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가난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뉴욕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아 다른 지역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초창기 추상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동갑내기 화가 아실 고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아실 고키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기체적인 추상화를 그렸는데 드 쿠닝은 고키와 작업실을 함께 쓰며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큰 자극을 받았다. 1935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정부의 의뢰로 공공건물의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이때부터 상업 미술을 그만두고 순수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1938년 엘레인 프리드라는 여성을 조수로 고용했는데 그녀 역시 훗날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둘은 1943년 결혼했는데 두 사람 모두 외도를 하는 등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별거하다가 1950년대 후반 이혼했고 1970년대 중반 다시 재혼하여 아내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1940년대 중반부터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 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두 작품 모두에서 볼 수 있듯이 형상과 배경이 혼재되어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형태와 거침없는 붓놀림 등 드 쿠닝 특유의 스타일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 무렵 ‘흑과 백’ 시리즈를 발표하여 뉴욕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는데, 이 시리즈는 사실 물감을 넉넉하게 살 형편이 안 되어 가정용 에나멜페인트로 작업한 것이었다. ‘흑과 백’ 연작은 1948년 찰스 이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화제를 모으며 드 쿠닝을 단숨에 스타 화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53년에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장으로 유명한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수록된 〈여인 3(Woman Ⅲ)〉을 비롯해 ‘여인’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여인’ 시리즈는 드 쿠닝의 대표작으로 194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 사실상 작품 활동 내내 만들었던 시리즈다. 하지만 〈여인 1〉을 제외하고는 거칠고 기괴하게 왜곡된 형태와 여성을 비하하는 느낌까지도 드는 ‘여인’ 시리즈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평론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드 쿠닝은 계속해서 여인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1950년대 들어서 활발한 작품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관을 책으로 알리고, 다양한 예술가 그룹을 이끌었다. 정작 드 쿠닝 자신은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지만 추상 표현주의의 리더로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풍경화와 조각 등 기존에 하지 않았던 작업들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런 작업 역시 이전 작업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급기야 1989년 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예술가로서의 경력이 끝이 났다. 딸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을 이어 가다가 1997년 아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드 쿠닝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이후에 그린 작품의 가치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의 예술적 업적은 잭슨 폴록에 비견될 정도로 출중하지만 구상성과 서사를 중요시하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전통적인 회화의 요소를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일부 현대 미술가들은 그의 가치를 폄하하기도 했다. 대상을 변형하여 구상적인 측면과 추상적인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작품은 수많은 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5위. 〈여인 3〉 • 41위. 〈가제트 형사〉 =========================     출생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997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이스트햄프턴 국적 미국 요약 20세기 미국 작가로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주요 작품은 연작 .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작품을 그렸다. 이후에는 인물의 형태를 포함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관여했고, 나아가 그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후기에는 인물이 추상적인 배경 안에 흡수된 듯한 작품으로 대담한 채색의 풍경화 안에 수직의 인물이 서 있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 말년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생을 마쳤다. 목차 접기 초기 생애와 작품 세계 후기 생애와 작품 세계 초기 생애와 작품 세계 특히 '액션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구상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렸지만 1945년경에 이르러 이 2가지 경향을 하나로 융합한 것처럼 보인다. 연작 〈여인 Ⅰ~Ⅵ Woman Ⅰ-Ⅵ〉(1952~53)은 그 격렬한 이미지와 충동적이고 정력적인 기법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후기 작품은 풍경화에 점점 더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아버지 렌데르트 데 쿠닝과 어머니 코르넬리아 노벨은 데 쿠닝이 5세 때 이혼하여 그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1916년 상업 미술가와 장식가들이 세운 회사에 견습생으로 들어갔고, 거의 같은 무렵 로테르담 미술 아카데미 야간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8년 동안 창조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예술을 배웠다. 1920년 큰 백화점의 미술 감독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특히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 등 예술의 단순화에 이바지한 피에트 몬드리안과 테오 반 두스뷔르흐 등의 화가들이 이끄는 데 스테일 그룹 등 현대 미술운동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전통적인 스케치 몇 점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926년 미국에 밀입국하여 뉴저지 주 호보컨에 자리를 잡고 주택에 페인트 칠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7년 맨해튼의 한 화실에 들어가 화가이자 미술품 감정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존 그레이엄과 화가인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고르키는 데 쿠닝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928년경부터 파리 유파와 멕시코의 영향을 보여주는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초에는 생물형태와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이런 경향은 그가 평생 그린 모든 작품에 널리 퍼져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은 친구인 그레이엄 및 고르키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았고, 둘 다 생물의 형태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낸 파블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인 후안 미로 등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10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계획에 참여하여 일하기 시작했으나, 1937년 7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업자 구제 계획에서 강제 사직당했다. 이 2년은 대공황 초기 상업적인 작품을 그리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온 이 예술가에게 비로소 모든 시간을 창조적인 작업에만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연방미술계획의 회화부와 벽화부에서 일했는데, 그가 도안한 벽화 가운데 일부는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WPA를 떠난 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장 의약품관의 벽화 디자인을 주문받았다. 이 벽화는 전문적인 벽화가들이 채색했으며,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었다. 1940년 연방정부의 미술부는 그에게 미국 해군 군함인 '프레지던트 잭슨호'의 도서실 벽화제작을 위촉했다. 데 쿠닝이 연방미술계획을 위해 도안한 벽화는 1930년대초에 그가 그린 추상 작품과 비슷한 양식이었으나, 세계박람회장과 연방정부 미술부의 주문을 받고 그린 벽화는 좀더 구상적이었다. 1938년 데 쿠닝은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아 〈서 있는 두 남자 Two Men Standing〉·〈남자 Man〉·〈앉아 있는 인물(고전적인 남자) Seated Figure(Classic Male)〉 등 슬픈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남자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분홍빛 풍경 Pink Landscape〉·〈비가 Elegy〉 같은 서정적인 채색의 추상화도 제작했다. 인물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리는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어, 제목을 붙이지 않은 수많은 추상화와 더불어 구상적이지만 사뭇 기하학적인 〈여자 Woman〉·〈서 있는 남자 Standing Man〉가 제작되었다. 그의 추상화에 표현되는 형태는 갈수록 인물의 형상을 점점 더 강하게 암시했다. 1945년경에 그린 〈분홍빛 천사들 Pink Angels〉에서는 이 2가지 경향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것처럼 보인다. 1946년 그림물감을 살 돈마저 떨어지자 그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검은색과 흰색 에나멜을 이용하여 거대한 추상화 연작을 그렸다. 이 작품들 가운데 〈8월의 빛 Light in August〉·〈검은 금요일 Black Friday〉은 기본적으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요소가 섞여 있는 반면, 〈취리히 Zurich〉·〈우편함 Mailbox〉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요소가 섞여 있다. 첫번째 전시회가 끝난 뒤 이들 작품은 〈애슈빌 Asheville〉·〈다락방 Attic〉·〈발굴 Excavation〉처럼 복잡하고 불안정한 추상화로 발전한다. 다시 색채를 도입한 이들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씨름해온 자유 연상 구성이라는 문제를 정연하고 결단력 있게 요약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1938년 일레인 프리드를 만나 1943년에 결혼했다.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1950년대 중엽에는 그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되었다. 1948년 뉴욕의 찰스 이건 화랑에서 흑백 에나멜 구성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8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마운틴대학에서, 1950~51년에는 예일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데 쿠닝은 1940년대초와 1947~49년에 정기적으로 여인상을 그렸다. 후기 생애와 작품 세계 초기 추상화에 나오는 생물체의 형태는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가 오로지 '여인'의 주제만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여름 그는 〈여인 Ⅰ WomanⅠ〉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많은 변형을 거쳐 1952년에야 겨우 완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른 여인상도 제작했다. 이들 작품은 1953년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전시되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그의 동료들은 추상화만 그리고 있었는 데 반해, 그의 여인상은 구상적이었고, 그림의 기법과 형상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게 칠한 그림물감과 화폭 위에 안료를 쏟아놓은 듯한 기법이 한데 어울려, 현대 남성들에게 내재된 성에 대한 두려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 전성기가 지난 축 늘어진 젖가슴, 공허한 눈, 그리고 말라빠진 손발은 프로이트적 통찰을 가장 우울하게 형상화한 것이었다. 〈여인 Ⅱ Woman Ⅱ〉부터 〈여인 Ⅵ Woman Ⅵ〉까지는 〈여인과 자전거 Woman and Bicycle〉·〈시골의 두 여인 Two Women in the Country〉처럼 모두 이 주제의 변형이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고의적인 천박함은 1950년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가 그린 연작 〈여체 Corps de dame〉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뒤뷔페의 그림도 데 쿠닝의 그림 못지않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흙빛으로 풍부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져 여성의 보편적 상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1955년에는 데 쿠닝도 〈풍경으로서의 여자 Woman as Landscape〉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여성의 상징적인 측면에 눈을 돌린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인물은 추상적인 배경 속에 거의 흡수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뒤이어서 〈경찰 가제트 Police Gazette〉·〈고덤 뉴스 Gotham News〉·〈10번가의 뒤뜰 Backyard On Tenth Street〉·〈로젠버그 공원 Parc Rosenberg〉·〈아바나 교외 Suburb in Havana〉·〈강으로 향한 문 Door to the River〉·〈장미빛 손가락을 가진 루스포인트의 새벽 Rosy-Fingered Dawn at Louse Point〉 같은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들은 구성적이고 다채로운 복잡성에서 대담하게 채색된 단순성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완전히 정착한 1963년경에 데 쿠닝은 다시 여자를 모델로 삼아 〈전원곡 Pastorale〉·〈조개 캐는 사람들 Clam Diggers〉 같은 그림을 그렸고, 이 주제는 그후 몇 년 동안 〈우먼 애커보닉 Woman Acabonic〉·〈모자상 Woman and Child〉·〈방문 The Visit〉 같은 그림에서 다시 탐색되었다. 초기에 그린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그림들은 인습에 구속받지 않는 주제로 화려하고 매끄러운 그림으로 여성 나체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잊혀진 이름 ………Whose Name Was Writ in Water〉·〈무제 Ⅲ Untitled Ⅲ〉 같은 후기 작품들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빛으로 반짝이는 장면을 그린 서정적이고 싱그러운 그림들이다. 후기에는 그림보다 점토소조 작업에 점점 더 열중했다. 한동안 소원하게 지낸 아내이자 뛰어난 화가인 일레인 프리가 1978년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리던 그를 보살펴주어 회복시켰다. 1980년대 그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만년의 작품들은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추상을 보여주지만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 하다는 평판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1987년 〈분홍빛 숙녀 Pink Lady〉(1944)가 360만 달러, 1989년 〈인터체인지 Interchange〉(1955)가 2,060만 달러에 팔리는 등 엄청난 판매가를 기록했다. ============================= 감상하기...   제작시기 1953년 가격 $137,500,000(1442억 6000만 원)1) 작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드 쿠닝, 〈여인 3〉, 캔버스에 유화 / 172.7×123.2cm “몇몇 화가나 비평가가 ‘여인’ 시리즈를 안 좋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 내 문제는 아니에요. 나는 스스로 추상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미지 같은 것들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그림을 추상화냐, 추상화가 아니냐로 분류합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안 그리는 것이 더 이상한 게 돼 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윌렘 드 쿠닝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는 윌렘 드 쿠닝의 그림이 두 점 나오는데 두 작품 모두 판 사람과 산 사람이 같다. 판 사람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영화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데이비드 게펜이다. 바로 앞에 나온 폴록의 〈넘버 5〉를 판 바로 그 사람이다. 8000만 달러(839억 3000만 원)에 거래된 재스퍼 존스의 〈부정 출발〉과 6350만 달러(666억 2000만 원)에 거래된 드 쿠닝의 〈가제트 형사〉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 판 것이니, 그가 얼마나 거물 컬렉터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뉴욕의 헤지펀드 억만장자인 스티븐 코언이다. 컬렉터로서 스티븐 코언은 데이비드 게펜보다 더 유명하다. 스티븐 코언이 초고가의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무렵으로, 다른 유명 컬렉터들에 비해 그 기간이 짧다. 하지만 약 10년 동안 그림을 사는 데 10억 달러(1조 490억 원) 이상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에 1200만 달러(126억 원)를 주고 데이미언 허스트의 유명한 설치 작품 〈상어(원제는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를 사서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로 보도된 사람이 바로 스티븐 코언이다. 스티븐 코언은 ‘미술 시장’에 발을 늦게 디뎠지만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를 비롯해 세계적 갤러리들을 다니며 비싼 그림들을 싹쓸이했다. 그 덕분에 어떤 역사적 컬렉터 못지않게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한창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때 〈뉴욕 타임스〉는 1면을 할애해 ‘갑자기 떠오른 거물 컬렉터 스티븐 코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소더비는 그의 컬렉션만 모아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2013년 기준 순 자산 93억 달러(9조 7570억 원)로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 106위에 올라 있다. 이 두 사람의 그림 거래를 중개한 이는 래리 개고시언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 해 매출액이 11억 달러(1조 540억 원)이며 세계 최고 갤러리로 꼽히는 개고시언 갤러리의 설립자이자 대표다. 이렇게 사고파는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 그림들은 비싼 그림 순위에서 충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게다가 〈여인 3〉은 스티븐 코언과 데이비드 게펜이 소장하기 전인 1994년까지는 테헤란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그림을 누가 가지고 있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내놓았는지를 알 수 있는 ‘소장 기록(Provenance)’은 그림을 사고팔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그림은 참으로 뛰어난 소장 기록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거래에 얽힌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 그림의 작가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스타일은 폴록과 완전히 달랐다. 사실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은 모두 뉴욕에서 활동했고 추상화를 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뉴욕 스쿨’이라 불리지만, 작품 스타일은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종종 이 그림처럼 구상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여인을 소재로 그렸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그림처럼 우악스러운 초상화인 ‘여인’ 시리즈 대작으로 모두 여섯 점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화가 자신이 여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드 쿠닝의 아내 엘레인도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는데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대부분을 별거 상태로 살았으니 사실상 남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드 쿠닝은 “여자는 가끔 짜증 난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이 그림에서 눈, 코, 입은 지나치게 크고, 이를 드러내고 웃는 표정은 괴기스럽다. 지나치게 큰 가슴을 드러낸 것도 보기 편하지 않고,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 모델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한마디로 왜곡되고 비뚤어진 여인 초상이다. 그런데 단순히 드 쿠닝이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했기 때문에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기고 무섭기까지 한 여인상을 그린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미국은 소비가 팽창하고 각종 광고에서 여성의 상업적 이미지가 넘쳐 나던 때다. 여성은 언제나 상냥하고 예쁘고 섹시하게 그려졌다. 여성의 이런 이미지가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드 쿠닝은 “이건 어때?”라며 이와 같은 그림을 내민 것이다. 즉 이 그림에는 드 쿠닝의 개인사 및 당시 사회 분위기와 얽힌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처럼 이 그림에서도 전후의 불안과 긴장감, 공포와 희열이 섞인 다이내믹한 시대 상황이 느껴진다.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여인 초상을 즐겨 그렸다. 뉴욕에 있는 화가들 모두가 구상화를 집어던지고 완전한 추상화만 그리던 1950년대에 ‘뉴욕 스쿨’의 핵심 멤버이던 드 쿠닝이 구상화, 게다가 닳고 닳은 소재인 여인 초상화로 다시 돌아간 것은 용감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여인 초상화는 결코 과거의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섹시하고 전형적인 과거의 여성 초상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시대를 잘 반영하면서도 작가의 개인사와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라 드 쿠닝의 ‘여인’시리즈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여인’ 시리즈 여섯 점 중 다섯 점은 미술관에 있고 이 작품만 유일하게 개인 컬렉터 손에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이 1억 3750만 달러(1442억 6000만 원)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영국의 세계적 현대 미술 작가로, 1990년대에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그룹으로 불리며 전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영국 아티스트들 중 최고의 위치에 있다. 죽은 동물, 알약 등 엽기적인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미술이 될 수 있는 소재’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엽기적인 작품들은 시장에서 종종 수천만 달러(수백억 원)에 거래되어 생존 작가 작품의 가격 한계도 허물었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주 독특하고 엽기적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물리적 불가능성〉은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상어 박제’다. 일명 ‘상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그가 즐겨 만드는 죽은 동물 시리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작가는 1991년에 만들었고, 뉴욕의 유명한 컬렉터인 스티븐 코언이 개고시언 갤러리를 통해 2004년 말에 1200만 달러(126억 원)에 사들여 외신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후 자기 작품 수백 점을 직접 경매에 내놓았고, 세계 최고의 상업 화랑인 개고시언 갤러리와 맺은 17년간의 계약을 끝냈으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갤러리를 열겠다고 발표하는 등 미술 시장의 관습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나는 특이한 일을 많이 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끊임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451    [그것이 알고싶다] - 화가 반 고흐와 "해바라기그림"?... 댓글:  조회:1602  추천:0  2017-11-15
반 고흐는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을가 (ZOGLO) 2017년11월15일 반 고흐는 화란의 화가로 현대 인상파 예술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는 반 고흐의 대표작으로 그는 일생에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을가. 통계에 따르면 여섯점 정도라고 한다. 먼저 고흐는 네점의 를 그렸는데 그림 속의 해바라기의 수는 각기 다르다. 그중 한 그림에는 해바라기가 세송이밖에 안되고 다른 그림에는 다섯송이 그리고 나머지 두 작품에는 각기 열두송이와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져있다.   그중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그림은 1888년에 그려진 것으로 이 그림이 바로 경매에서 3950만딸라에 팔린 그 이다. 프랑스 미술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또 다른 유명한 인상파 화가인 고갱은 고흐와 매우 친했다. 그래서 그가 고흐에게 그림을 달라고 부탁하자 고흐는 선뜻 열두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그림과 열네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그림을 고갱에게 선물했다. 이 그림을 받은 고갱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고갱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고흐는 또 두점의 를 그려 고갱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고흐의 여섯점이 모두 완성된 것이다.   이 수자는 고흐가 서신에서 이야기한 여섯점의 와 일치하다.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 후인 1901년 프랑스 빠리의 한 전시회에서 고흐의 이름이 적힌 라는 작품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 작품을 소유한 사람은 고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삼류화가였으나 작품의 진위를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7년 한 경매에서 일본의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고흐의 를 당시 세계 최고가인 3950만딸라에 사들여 미술계가 들썩했다.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사들인 그림의 소유자는 본래 체스터 베티 일가였다.   그렇지만 영국인 노르만은 자세한 연구를 통해 10년 후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소식을 발표했다.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에 팔린 고흐의 작품은 삼류화가가 그린 위작으로 고흐의 작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삼류화가는 아무도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어 유명화가들의 명화를 모방하는 데 빠졌는데 그 정교함은 그림 전문가들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각종 매스컴에서 노르만의 주장을 인용해 작품이 위작이라는 점에 관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정작 그림의 주인인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노르만의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만의 주장이 론리적이지 않은 리유는 다음과 같다.   대략 세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고흐가 과연 몇점의 를 그렸는지 알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비록 고흐는 편지에서 ‘6’이라는 수자를 거론하기는 했지만 그 편지를 쓴 후에도 그림을 더 그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사들인 가 과연 삼류화가가 위조한 것인지를 증명할 만한 근거도 없으며 있다고 해도 이는 단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고흐의 작품을 위조한 삼류화가와 체스터 베티 일가는 무슨 관계였을가 하는 점이다. 1901년 그가 빠리에서 전시한 그림이 일본 야스다 화재해상보험회사가 경매에서 사들인 그림과 같은 그림이였을가.   이는 후세 사람들이 풀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종합/연변일보
450    [그것이 알고싶다] -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누구?... 댓글:  조회:1503  추천:0  2017-11-14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의 비밀이 풀릴까?  이탈리아 연구팀은 지난 18일(현지시간2011년 5월)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했으며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 있는 성 우르술라 수도원 묘지에서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여성 리자 게라르디니의 유해를 찾았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DNA를 분석해 실제 신원과 두개골을 토대로 얼굴을 재현할 계획이다. 모나리자의 유골로 추정되는 게라디니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으로 알려졌다. 1479년에 태어나 63세인 1542년 6월에 사망해 이 수도원에 안장된 기록이 있어 연구진은 이곳 묘지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펼쳐왔다.  모나리자로 추정되는 이 여인은 키 153cm인 여성의 두개골과 늑골, 척추 등이다.  그동안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여러설이 제기돼 왔다. '수년에 여러 인물에 영향을 받은 가상의 여인이라는 설'과 '다빈치의 자화상이라는 추측' 더 나아가 올초 이탈리아 문화계에서는 다빈치의 남성 제자인 '살라이'(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연구팀은 정황상 이번 유해으로 발견된 리자 게라르디나가 '모나리자'의 실제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며 '모나리자'의 '모나'가 결혼한 여성을 가르키는 말이고 '리자'가 그녀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중·영·일 4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449    [미술써클선생님께] - 그림 그릴 때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라... 댓글:  조회:1836  추천:0  2017-11-14
  서울대,한예종반 학생들의 재밌는 그림을 올립니다 ^^     그림이 늘 이렇게 재밌었으면 ,,,,,,, ^^       나무,고목,꽃,상추,체리,목화,버섯 등등을 이용해서 재밌게 조합한 그림,,,,,      ^^ 좀 깔끔 매끈하죠?     ​   브로콜리,마늘,당근,밤,시금치,레몬, 등등     회화적인 맛은 좀 부족한듯 ㅋㅋㅋ   ​   오렌지,당근,완두콩,석류,망고,레몬,방울토마토,보리,바구니 등등     다양한 과일,채소를 이용해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해 보았지요 ^^       ^^ 열정이 가득한 학생들~~~~~~~~~~~~~~~ 화이링 ^^
448    [미술써클선생님들께] - 그림 그리기에서 상상력을 키우라... 댓글:  조회:3472  추천:0  2017-11-14
                그림이 있는 일상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   2017. 11. 10. 17:27 URL 복사 http://blog.naver.com/damue21/221137073621       기교함 익숙함 낯선 친숙함 이 그림 첨 보았을땐  어우~~~~~   근데 거꾸로 보면 기냥 과일바구니 모든 그림이 그런건 아니지만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게 아니고 여러번 지우고 수정한 흔적이 있다네요 ㅎㅎ 초현실주의 화가 쯤으로 생각했는데 우잉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라는 웅 막시밀리안 2세는 이렇게 꾸미고 나타나야 받아주는 가장무도회를 즐겼다고 거의 우리나라 연산군 삘의 루돌프 2세의 총애는 그럴 수도  있다했는데 무려 25년 동안 궁정화가 였다니 연금술사가 판치던 세상이라 사물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랐던데에서 이런 그림이 시작됐다는 추측이 음~~~ 어떤 철학에서 시작되었던 독특한건 분명합니다 ^^   연속성이 없어서 잊혀진 화가지만 우리에 살바도르 달리님이 극찬하시면서 지금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시조새쯤이 되셨습니다 미술사에서 제일 기묘하다고 생각한 아르누보, 아르침볼도, 다다이즘 다다이즘 포스팅만 남았네요 알면 이해되고 좋아하게 된다는 생각은 변함없지요...  하하하하하 [출처]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작성자 이니 /////////////////////////////////////////////////// 이번 글의 주제는 조금 재미있는 작품을 가져 왔는데요!  유명한 화가 이면서도 신기하면서 재미 있는  미술 작품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남김 미술작가 "아르침볼도"작가의 작품을 함께 볼까요? 볼도의 작품들은 일반 화가들과는 다르게 신기한그림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사람을 그렸지만 채소 들이 가득 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데요!! 사람을 보습을 하고 있지만 채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들이 재미있는 요소를 만들어 주고 있는데요. 언젠가 티비에서  한 번 본적이 있었는데 이 작가의 작품이였군요~! 여름 - 주세페 아르침볼도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밀라노 출신의 볼도 화가는 궁정 화가로서 일을 했던 사람이였는데요. 일반  화가들과는 달이 그 계절에 맞는 원소 그리고 직업과 관련 되어 있는  물건들을 조합하고 또 조합해서 재미있는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 인데요. 신기한그림 때문읹지 16세기 후반 인기 있었던 화가 였다고 하네요. 여러가지 특징들을  잘 잡아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 한데요. 봄 - 주세페 아르침볼도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궁정 화가들 이라고 하면 운장한 그림과 우아한 초상화들을 상상할 수 있지만  볼도의 작품들은 우아하기 보다는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작품들이  정말 많은거 같네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많은 채소들을 조합해서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말이에요! 저렇게 섬세하게  그리면서 얼굴 윤곽을 나타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신기한그림 이에욧! 겨울 - 주세페 아르침볼도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금 보여 드리는 채소들을 조합하는 인물과 말고도 그 사람의 직업에 알맞은  물건들을 조합 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들도 있었는데요. 지금 까지 볼도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이렇게 다양한 물건들과 채소 과일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진  초상화 라고 하는데요. 이런 신기한그림들은 그렇게 어렵게 보지 않아도  하나 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거 같아요. 채소 기르는 사람 - 주세페 아르침볼도 출처 : The Bridgeman Art Library 개별적인 소품들이지만 이렇게 함쳐서 만들어진 모습을보니 어떤 얼굴도  연출이 가능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우스꽝 스럽기도 하면서 기괴한  작품들이지만 이 작품을 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유머러스 하게 생각하면서 정말 좋아 했다고 하네요. 저도 이런 신기한그림으로 초상화를 받는다면 뭔가 간직할만한 작품인거 같은데요?! 별난 초상 - 주세페 아르침볼도 출처 : The Bridgeman Art Library 신기한그림들이 정말 많은 볼도의 작품들!! 정말 멋지지 않나요? 채소들로 이렇게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말이에요~  예전에 본 기억이 있었는데 그냥 재미있다 ~ 하고 지나 갔지만 이렇게  작가를 알고 나니까 더 재미있는거 같아요! ㅎㅎ 오늘 잇님들에게 더욱  즐거운 포스팅 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ㅎㅎ [출처] 신기한그림 "아르침볼도" 작품을 볼까요?|작성자 아트아뜰리에
447    [쉼터] - 그림은 뛰고 또 뛴다... 댓글:  조회:2726  추천:0  2017-11-14
  다빈치 작 '세계의 구세주' . 위작으로 알려져 7만7000원에 팔렸던 다빈치 작품이 진품 판명…2,051억원 사상 최고가!            【서울=뉴시스】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지난 1959년 불과 45파운드에 경매됐던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가 다빈치가 직접 그린 진품으로 판명되면서 최소 1억2000만 파운드(약 2051억8440만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전문가들로부터 감정받았다. 사진은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사진 출처 : 英 데일리 메일 웹사이트)        【서울=뉴시스】유세진 기자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지난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단돈 45파운드(약 7만7000원)에 팔린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 작품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빈치의 제자가 아니라 다빈치 자신이 직접 그린 진품으로 판정되면서 최소 1억2000만 파운드(약 2051억8440만원)의 가치를 지녔다는 감정을 받았다고 영국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다. 1억2000만 파운드의 그림값은 한 작품으로는 사상 최고 기록이다.가로 47㎝ 세로 66㎝의 이 그림은 목판 위에 그린 유화로 예수가 왼손에 지구를 들고 오른손을 들어올려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는 11월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개막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전'에 전시될 예정인데 최종 전시 조건에 대해서는 아직 협상이마무리되지 못했다. 이 그림은 다빈치가 150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지시를 받아 7년에 걸친 작업끝에 완성했다. 런던 전시를 앞두고 이탈리아의 다빈치 전문가 피에트로 마라니와 테레사 피오리,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마틴 켐프 교수 등 전문가 4명은 이 작품이 다빈치의 제자가 아닌 다빈치 자신이 직접 그린 것으로 결론내렸다. 마라니는 "이번 다빈치 작품의 발견은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에 사용된 푸른색과 붉은색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것과 매우 비슷하며 그림물감은 그의 '버진 온 더 락스(암굴의 성모)'와 매우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찰스 1세가 오랫동안 소장하다 그의 처형 후 찰스 2세에게 넘겨졌으며 영국이 약 400년 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다빈치의 제자 조반니 볼트라피오의 작품으로 알려져 불과 45파운드에 경매됐었다. 현재는 뉴욕의 로버트 사이먼 파인 아츠 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실제 얼굴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지 모른다. 오늘날 그가 남긴 자화상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작품 속의 인물이 다른 사람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전문가에 의해 제기됐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자화상은 굳게 다문 입술에 약간 찌푸린 표정, 백발과 수염이 성성한 노인을 묘사한 드로잉. 수많은 미술 전문 서적에서는 작품 속의 인물을 다빈치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러나 저명한 다빈치 전문가인 피에트로 마라니 교수는 누런 종이에 붉은 목탄으로 제작한 자화상의 제작 연대는 1490년이며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는 점을 들어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라니 교수는 밀라노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그가 남긴 걸작 '최후의 만찬'을 복원하는 작업을 15년간 감독했던 전문가다. 이탈리아 ANSA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마라니 교수는 다빈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잘 생기고 정력적이라고 말한 점을 들어 48세의 다빈치가 결코 자화상의 인물 처럼 노쇠한 모습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 마라니 교수는 문제의 그림이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점에 의문을 달지는 않지만 결코 그림 속의 인물이 다빈치 본인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한다는 입장. 그는 작품 속의 인물은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12사도의 1명을 그리기 위한 습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최후의 만찬'을 잘 살펴보면 사도 시몬이 자화상 속의 인물과 흡사하다는 것. 자화상의 뒷면에 적힌 글자들도 의문점. 실제 다빈치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1세기 뒤에 적힌 것인데다 '레오나르도'라는 글자 외의 나머지는 잘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마라니 교수의 지적이다. 물론 자화상 속의 인물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명한 다빈치 전문가인 카를로 페드레티가 이미 고개를 갸우뚱거린 바 있다. 전설적인 미술사가인 에릭 곰브리치도 다빈치가 남긴 작품들에 이와 유사한 모습의 인물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자화상 속의 인물은 다빈치가 선호하는 얼굴의 형상화일수도 있다는 것이 곰브리치의 추측이다. 마라니 교수도 문제의 그림이 다빈치의 자화상이리는 믿음은 그림이 19세기초에 일반에 공개된 직후부터 형성된 것이라며 자연과 과학에 대한 비상한 지식, 마술사처럼 기이한 능력을 가진 천재라는 신화가 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자화상에서 묘사하는 것 처럼 백발과 수염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은 이런 통념에 걸맞는다는 것. 후대에 나온 많은 저술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다빈치 코드'조차도 신비의 후광을 더해주고 있는 셈이다. =============================   2000억 원 가치…올겨울 첫 공개 다빈치의 새로운 작품 발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잃어버린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미스터리한 인물(다빈치)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관심을 끄는 예술가는 없다(영국 일간 가디언).”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잃어버린 작품이 다시 발견돼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다. 추정가 2000억 원을 훌쩍 넘는 작품이 나오면서 르네상스 시기 천재 화가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1956년에 단돈 48파운드(8만 원)에 팔렸던 그림 한 점이 1억200만 파운드(2170억 원) 상당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유화 작품으로 판명돼 올겨울 일반에 전시된다”고 보도했다.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왼손에는 세계와 우주를 상징하는 투명한 보주를 잡고 있는 예수의 상반신을 담고 있다. 가디언은 “작품의 예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다빈치의 특성이 잘 나타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국립미술관)는 11월 9일부터 시작되는 다빈치 기획 전시에 이 작품을 전시할 계획이다.  붓질 등 다빈치 작품 확실   다빈치의 작품으로 판명된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 2170억 원 상당의 감정가로, 다시 한 번 다빈치 열풍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된다.   당초 이 작품은 다빈치의 제자인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 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500년쯤에 제작된 이 그림의 붓질과 염료, 그림의 질 등을 정밀 감정한 결과 다빈치의 진품으로 최근 감정 받았다.  작품의 진위 감정에 참여했던 마틴 캠프 옥스퍼드대 미술사 명예교수는 “다빈치의 제자나 추종자 중 이런 수준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는 만큼 새로 발견된 다빈치의 그림일 확률이 무척 높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다빈치 전문가인 피에트로 마라니 교수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다빈치의 작품이란 것을 확인했다”며 “작품 속 머리 부분과 눈썹 등이 일부 훼손됐지만 전체적으로 무척 양호한 상태”라고 거들었다. 색감이나 붓 터치 등이 환상적인 수준이어서 다빈치 작품이 분명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 작품 이름만 전해지고 현재 ‘사라진’ 작품들의 수는 현존하는 작품 수에 맞먹는다. 대표적인 것으로,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다룬 ‘레다와 백조로 변한 제우스’라는 작품은 과감한 누드화로 명성을 날렸지만 금욕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한 광신적인 프랑스 왕족에 의해 작품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앙기아리의 전투’라는 작품은 메디치 가문에 의해 숨겨진 뒤 아직까지 소재가 불분명하다. 이와 함께 ‘누드 모나리자’라는 작품도 ‘잃어버린 걸작’의 하나로 다빈치의 소실 작품만을 찾는 ‘다빈치 탐정’들의 주요 추적 대상이다. 이번에 발견된 ‘구세주’라는 작품도 17세기 작품 목록에만 등장했다가 이후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됐다. 이 작품은 1649년 영국 왕 찰스 1세의 소장 목록에 등장했다가 1763년 버킹엄 공작의 아들이 경매로 넘긴 기록만 남아 있었다.  이후 심한 덧칠로 손상된 상태로 누구의 작품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1900년 영국의 그림 수집가인 프레드릭 쿡 경이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쿡의 후손들은 이 그림을 1958년 경매에서 불과 45파운드(7만7000원)에 팔았으며 2005년 미국 수집가 손에 넘어갔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뉴욕 미술품 거래상인 로버트 사이먼 등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소유하고 있다. 한편 가디언은 “위대한 화가의 잃어버린 작품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언제나 대중을 흥분하게 한다”며 “몇 년 전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로 다빈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거액의 작품이 대중에게 전시된다면 또다시 대단한 다빈치 열풍이 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동욱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살바토르 문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잃어버렸던 걸작     크기 66x45cm 제작시기 1506~1513년 원제 Salvator Mundi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이탈리아, 1452-1519년 소장/전승 개인 소장 기법 유화, 월넛 목판에 유채 수백년 만에 는 레오나르도의 진품으로 밝혀지게 된다. 조악하게 덧칠된 물감덩어리들과 먼지더미를 한겹씩 걷어낼 때마다 레오나르도 특유의 천재적인 붓터치가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Salvator Mundi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는 레오나르도의 제자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Giovanni Antonio Boltraffio, 1467-1516)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11년 가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개최된 전시 전을 통해 60여점의 다른 레오나르도의 대표작들과 함께 전시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직접 그린 진품으로 천명되었다. 1958년 경매에 등장해 고작 45파운드에 거래되었던 이 작품은 진품으로 판명된 이후 2013년 5월 어느 익명의 수집가에 의해 대략 8천만달러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2005년 미국의 한 화상 컨소시엄에서 이 작품을 사들인 후 많은 화상들과 학자들이 수년간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연구하는 데에 공을 들인 덕분이었다. 이 작품은 무명으로 견뎌온 세월만큼이나 심각한 손상들과 조악한 덧칠들로 뒤덮혀 있었기에 이를 모두 걷어내고 레오나르도의 오리지널 붓터치를 드러내기 위한 복원작업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 작품의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조사 및 연구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윈저 로얄 도서관에 소장된 의 밑그림인 오리지날 습작 드로잉 2점과 레오나르도의 다른 대표작들의 성분들과의 비교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는 ‘세상의 구세주’라는 의미를 갖는다. ‘살바토르’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며, ‘문디’는 라틴어 ‘mundus’의 소유격으로서 ‘세상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그림 속에서 예수의 오른손 두 손가락은 축복을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세상과 우주를 상징하는 투명한 구슬을 쥐고 있다. 본디 ‘살바토르 문디’라는 주제 자체는 알브레히트 뒤러, 얀반아이크나 한스 멤링 등 16세기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들도 즐겨 그린 인기 주제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를 주제로 작품에 착수한 것은 1506-1513년경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까지 레오나르도의 양식을 모사하여 이 작품의 복제본을 워낙 많이 그려냈고, 진품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의 영롱한 구슬의 투명도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청색의상의 극도의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기록이 다시 등장한 것은 1649년 영국의 찰스 1세의 소장품 목록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폐위되면서 잠시 팔렸다가 찰스 2세가 재위하면서 1960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 1736년 버킹엄 공작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들이 이 작품을 경매로 넘겨버린 기록을 끝으로 이 작품은 백년이 넘도록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영국의 수집가 프레데릭 쿡이 1912년 이 작품을 사들였는데, 그 당시에는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에 그가 소장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때에도, 이 작품은 16세기의 ‘밀라노화파’의 한명이자 레오나르도의 수제자인 볼트라피오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쿡이 사망한 후, 1958년 경매에서 45파운드에 팔렸던 이 그림은 2011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품으로 판명되며 오늘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자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장프랑스아 밀레, 그리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종' 국내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그림 중 하나인 만종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부부, 그리고 그들 가운데로 보이는 바구니 속 감자들로 하여 수확의 기쁨을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허나, 밀레의 만종을 바라보는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견해는 이와 달랐다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하게 매료되었던 달리는 늘 의구심을 품었는데 특히 부부의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만종에 매료된 달리는 1935년에 자신의 저서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를 통해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부부 사이의 감자가 든 바구니는 사실 아기의 시신이 든 관이다"  "밀레는 한 부모가 죽은 아기를 담은 관 앞에서 기도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가 이를 감자 바구니로 수정했다"  밀레의 만종이 수확의 기쁨을 그린 서정적인 작품이 아닌, 굶주림에 죽고만 아기의 시신을 묻기 전 추모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달리의 주장은 그의 평판만큼이나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수십 년 후, 만종이 보관되어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의 관계자가 해당 그림을 X선 투시로 감정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밀레의 만종은 유화로 X선 투시를 통해 유화의  특징인 '덧칠' 전의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만종을 X선 투시한 결과 감자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원래는 작은 나무상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에 힘을 얻기 시작하는 주장들 "밀레는 본래 굶주림으로 죽은 자신들의 아이를 추모하는 부부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심화되었던 계급 갈등으로 인해 오해를 통한 신변의 위협을 걱정했던  친구의 만류로 밀레는 아기가 든 관을 다시 덧칠해 감자를 담은 바구니로 바꾼 것" "밀레는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이삭 줍는 여인들'을 통해서도 그림 전면에 곤궁에 처한  민중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멀리 배경으로 말을 탄 채 일꾼들을 부리는 지배층의 모습을  그리며 당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밀레가 마음먹고 만종을 통해 일종의 '고발'을 한 것"      "밀레가 진정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수확의 기쁨이 아닌 당시 사회를 살던 부모의 슬픔"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들   "밀레는 나무상자로 된 관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도를 위해 감자가 든 바구니의 밑그림을 그렸을 뿐" "그림에 표현된 장소와 도구들도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 "밀레는 만종을 회고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레빌아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종소리에 맞추어 행하던 천사의 기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태어나서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던 밀레를 농민들 편에 선 '서구 최초의  민중예술가'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밀레는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과연 밀레는 부부 사이에 무엇을 그려넣고자 했던 것일까   한편, 밀레의 만종을 보유하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이 X선 투시를 한 이유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작스레 칼로 해당 그림을 찢는 일이 생겨 복원작업을 위해 만종의 훼손 전 상태를 파악하고자 그리고 어린 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종을 처음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다시피 한 '만종 아기관설'을 주장했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그렇게 만종에 그려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볼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던 천재 화가라 불린 달리를 향한 또 다른 평가     "그는 미치광이였다"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대부분의 이들이 나폴레옹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주황색 망토를 휘감고 앞발을 치켜든 백마에 올라탄 위엄있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나폴레옹 시대에 예술과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궁정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 속 모습처럼 말이다  1800년,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마랭고에서 승리를 하기 전 알프스를 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며 궁정 화가로써 비호를 받던 다비드는 황제에게 명을 받게 된다  "자크 루이, 내가 알프스를 넘는 초상화를 하나 그려주게  내 모습은 스페인 카를로스 4세 국왕의 초상화처럼 그리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주게나"  "황제 폐하, 그렇다면 그림을 위해 직접 모델을 서주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자네의 '천재적 상상'에 맡기겠네"  그리하여 멋지게 미화된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은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초상화가 되기에 이른다     허나,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알프스의 험한 산길을 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병사들은 해당 지형에 강한 당나귀를 타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알프스를 먼저 넘어간 후에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던 것이다 결국, 다비드의 그림 속 나폴레옹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50년에 동시대의 화가인 폴 들라로슈에 의해 그려진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the Alps)' 속 나폴레옹의 모습이 실제와 비슷했을 것이다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의미가 없다  위대한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으면 된다" - 나폴레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천재의 걸작이었던 이 그림은 21세기 들어 가장 '핫'한 소설 속 '장치'로 등장하며 예수의 비밀스러운 코드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다시금 알려져 유명세를 얻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상한 옴니버스' 시리즈 '성배는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핏줄인가?' 편을 참조)  그리고 이 세계 유산으로써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12사도 들과의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과연 그들은 그날 마지막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을까?  본래 레오나르도의 작품 최후의 만찬은 그 훼손 정도가 심각해 만찬에 오른 음식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만, 최후의 만찬 당일이 유월절이라는 유대인들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예수와 12사도들이 마지막 저녁 식사로 양고기를 먹었을 것이므로 레오나르도의 작품 속에도 다른 많은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한 작품들 럼 식탁에 양고기가 올려져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허나, 1999년 이루어진 복원 작업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속 테이블에 어떠한 음식이 올려졌는지가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양고기가 아닌 바로 생선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어째서 유월절 이루어졌던 최후의 만찬에 양고기가 아닌 생선을 그려넣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무릎을 치며 '역시 수수께끼와 암호가 가장 어울리는 화가인 레오나르도'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예수(Iesus), 그리스도(Christos), 하나님의 아들(Theon Uios), 구세주(Soter)의 각 단어 앞글자를 연결한 ICHTHUS가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을 지닌다는 것에 주목했으며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치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비유하여 사도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면 최후의 만찬에 가장 어울리는 요리야말로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생선만큼 어울릴 수 있는 음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밀라노 칙령' 이전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당시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비밀기호였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유월절 만찬의 상징인 새끼 양 대신 생선 요리를 그려넣음으로써 예수의 희생과 기독교 박해 당시 사용되던 상징물로 최후의 만찬 당시 예수 그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1977년 시작되어 1999년까지 이어졌던 복원작업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복원을 두고 비판도 적지 않다  일부 전문가들은 복원팀이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으며 레오나르도의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드로잉을 참조해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하는 등 원작의 20%만이 살아남은 실패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바로 그것  실제로 2011년 7월, 본래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그 가치가 8만원에서 2,050억으로 뛰어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작품 속 예수에게는 비교적 덥수룩한 수염이 존재한다            한편, 화가뿐만 아니라 건축, 물리학, 기계 발명, 해부학, 화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능통했던 이 위대한 천재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요리사로 생계를 꾸렸으며 요리솜씨 또한 탁월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전거 스케치   다양한 분야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천재성을 발휘했던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런 그가 생전에 자신의 방대한 연구 기록을 기록했던 수첩에서 놀라운 스케치가 발견되는데 바로 체인과 페달까지 상세하게 스케치 되어 있는 현대식 자전거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전거가 최초로 발상 되었던 1831년보다 300년 이상 먼저 현대식 자전거를 도안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천재 그 이상이었던 것일까?         허나, 이후의 조사에서 이 자전거 도안이 실은 1960년대 이루어졌던 필사본 복원 과정 중 다른 이의 고의적인 덧칠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1961년까지만 해도 본래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던 것에 불과했던 스케치에 한 수도사가 페달을 그려넣었고 이후 또 다른 누군가가 페달과 바퀴살 등을 추가로 그려넣어 완전한 현대식 자전거로 둔갑시켜버린 것이었다        즉, 실제로는 레오나르도의 동성 연인이자 조수였다고 주장되어지는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가 스케치 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원에 1564년 발견되어 연필심의 원료로 사용되는 흑연에 의해 덧칠되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에 사망,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는 1524년에 사망)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사기가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천재가 당연히 최초의 자전거를 발명했을 것이라고 믿는가 하면 그를 주제로 한 박물관에 해당 자전거 도안을 복각한 전시물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외에도 위대한 천재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레오나르도는 현대의 문명이 낳은 많은 발명품들과 지식들을 최초로 '직접적인 구상'을 했던 불가사의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 * 참조문헌: 세계사 오류 사전                위키백과                세계명화의 수수께끼                달리, 나는 세상의 배꼽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영웅 만들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나를 매혹시킨 화가들                세상을 바꾼 최초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이상한 옴니버스] 번외단편 - Mystery of Gallery 끝.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번외단편 - Mystery of Gallery|작성자 메데아           다빈치 그림 '5천억원' 낙찰… 세계 미술품 경매역사 새로 썼다 2017년11월16일  [AFP=연합뉴스] 500년 전 희귀작 '구세주'…수백년 떠돌다 2005년에야 진품 확인 기존 최고가인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2천억원의 두배 이상 가격  [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다시 썼다.  500여년 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15일(현지시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천30만달러(약 4천978억9천만원)에 낙찰됐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긴급 보도했다.  '21세기 최대의 재발견 예술품'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러시아의 억만장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소장하다 1억 달러(약 1천135억원)에 내놨으나 거의 4배 이상 가격에 팔린 것이다.  이는 전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 가격이자, 기존 최고가의 두배를 훨씬 뛰어넘는 액수다.  기존 최고가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로, 2015년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천940만달러(약 1천982억원)에 낙찰됐다. 이를 포함해 역대 1억 달러 이상의 낙찰가를 기록한 작품은 10개뿐이다. 공개 경매가 아닌 개인 거래 기록으로는 2015년 9월 네덜란드 태생의 추상표현주의 미국 화가 윌렘 데 쿠닝의 '인터체인지'가 세운 3억 달러가 최고가였다.  다빈치가 그린 희귀 예수그림 '살바토르 문디' [EPA=연합뉴스] 다빈치가 1500년쯤 제작한 '살바토르 문디'는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왼손으로는 크리스털 보주를 잡고 있는 예수의 상반신을 담았다.  20점도 채 남아있지 않은 다빈치의 그림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던 작품이다. 대표작 '모나리자'를 비롯한 다빈치의 나머지 작품들은 현재 프랑스 루브르 등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금은 최고의 몸값을 받는 자리에 있지만, 그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럽 귀족들의 손을 거치며 심한 덧칠 등으로 손상됐고,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을 떠돌았다.  1900년께 영국의 그림 수집가 프레더릭 쿡 경(卿)이 사들인 이 작품은 1958년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단돈 45파운드(약 7만 원)에 팔렸다. 당시 이 작품은 다빈치가 아닌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난 2005년 그림의 붓질과 염료 등을 정밀 감정한 결과 이것이 다빈치의 진품이라고 확인했다. 이후 2011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됐으며 2013년에는 리볼로블레프의 손에 들어갔다. 당시 그가 이 작품을 스위스의 미술품 딜러인 이브 부비에르에게 지불한 돈은 1억2천750만달러(약 1천400억원)이었다.  이 작품은 경매 전 홍콩, 샌프란시스코, 런던, 뉴욕에서 전시를 마쳤으며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티 측은 "일부 비평가들이 의문을 제기해왔지만, 대부분의 학자가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엄청난 가격의 이 작품을 사들인 사람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로이터통신은 매수자가 전화로 경매에 참여했으며, 약 20분만에 경매가 종료됐다고 전했다.  기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EPA=연합뉴스]
446    [그것이 알고싶다] - "모나리자"는 녀성일가 남성일가?... 댓글:  조회:3019  추천:0  2017-11-14
모나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남성 연인일까? 모나리자의 미스테리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는 여러 세대에 걸쳐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는 수 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끼였죠.  이탈리아의 한 연구자가 내놓은 이론에 의하면 이 그림의 주 모델은  레오나르도의 도제였으며 연인이었을지도 모를 젊은 남성이었다고 하는데요. 문화 유산 국립 위원회의 실바노 빈체티는  ‘모나리자’가 ‘살라이’라고 알려진 지안 지오코모 카프로티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또한 ‘모나리자’의 적외선 스캔을 관찰하고,  살라이가 모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습니다. “모나리자의 코, 이마, 미소가 특히 비슷하다.” 빈체티는 텔레그래프에 말했습니다.  외신 연합 기자회견에서 그는 다빈치가 살라이를 모델로 해서 그린  ‘세례자 요한’과 발기한 젊은 청년을 그린 에로틱한 그림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를 예로 들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 살라이는 1490년에 약 10세의 나이로 다빈치의 도제가 되었습니다.  말썽꾼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는 그의 별명은 ‘작은 악마’라는 뜻입니다.  그는 20년 동안 다빈치와 함께 작업했고, 둘은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널리 추정됩니다. 모나리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이론은  모델이 이탈리아 실크 상인의 아내 리자 제라르디니였다는 것이었는데요.  토스카나에 있는 이 부부의 저택은 이번 달에 1130만 달러에 매물로 나왔습니다.  다른 설로는 ‘모나리자’가 사실은 자화상이었다,  다빈치의 어머니였다, 중국인 노예였다는 이론 등이 있었습니다. 살라이가 ‘모나리자’의 모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학자가  빈체티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보편적인 인정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예술사가이자 다빈치 전문가 피에트로 마라니는 AFP에 이 이론은 ‘근거가 없다’고 말한 반면,  옥스포드 트리니티 대학의 예술 역사 명예 교수 마틴 켐프는 이 의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텔레그래프에 빈체티의 주장은  ‘알려진 사실들, 반쯤 알려진 사실들, 완전한 판타지를 뒤섞은 것’ 빈체티는 모델은 살라이 혼자만이 아니었을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모나리자는 양성적이다.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이다.” 빈체티는 여성적 영향은 제라르디니일 수도 있고,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자 공작의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15세기 말에 스포르자 공작의 궁궐에서 일했습니다.  역사가들 대부분은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1503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지만,  빈체티는 1490년대에 밀라노에 살면서 시작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출처] '모나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남성 연인일까? 모나리자의 미스테리|작성자 abb2957   ==============================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는 여러 세대에 걸쳐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는 수 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밝혀내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이탈리아의 한 연구자가 내놓은 이론에 의하면 이 그림의 주 모델은 레오나르도의 도제였으며 연인이었을지도 모를 젊은 남성이었다고 한다. 문화 유산 국립 위원회의 실바노 빈체티는 ‘모나리자’가 ‘살라이’라고 알려진 지안 지오코모 카프로티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모나리자’의 적외선 스캔을 관찰하고, 살라이가 모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다.   “모나리자의 코, 이마, 미소가 특히 비슷하다.” 빈체티는 텔레그래프에 말했다. 외신 연합 기자회견에서 그는 다빈치가 살라이를 모델로 해서 그린 ‘세례자 요한’과 발기한 젊은 청년을 그린 에로틱한 그림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를 예로 들었다.   살라이는 1490년에 약 10세의 나이로 다빈치의 도제가 되었다. 말썽꾼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살라이라는 별명은 ‘작은 악마’라는 뜻이다. 그는 20년 동안 다빈치와 함께 작업했고, 둘은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널리 추정된다. ‘모나리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이론은 모델이 이탈리아 실크 상인의 아내 리자 제라르디니였다는 것이다. 토스카나에 있는 이 부부의 저택은 이번 달에 1130만 달러에 매물로 나왔다. 다른 설로는 ‘모나리자’가 사실은 자화상이었다, 다빈치의 어머니였다, 중국인 노예였다는 이론 등이 있다.   살라이가 ‘모나리자’의 모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학자가 빈체티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보편적인 인정을 받은 적은 없었다. 예술사가이자 다빈치 전문가 피에트로 마라니는 AFP에이 이론은 ‘근거가 없다’고 말한 반면, 옥스포드 트리니티 대학의 예술 역사 명예 교수 마틴 켐프는 텔레그래프에 빈체티의 주장은 ‘알려진 사실들, 반쯤 알려진 사실들, 완전한 판타지를 뒤섞은 것’이라고 말했다. 빈체티는 모델은 살라이 혼자만이 아니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모나리자는 양성적이다. 반은 남성, 반은 여성이다.” 빈체티는 여성적 영향은 제라르디니일 수도 있고,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자 공작의 아내 베아트리체 데스테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다빈치는 15세기 말에 스포르자 공작의 궁궐에서 일했다. 역사가들 대부분은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1503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지만, 빈체티는 1490년대에 밀라노에 살면서 시작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의 모델을 양성(兩性)으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 ​ ​ ​ ​ ​   "모나리자 안에 여자와 남자 얼굴 있다(?)"   모나리자 하다하다 이젠 양성설.."남자 애인 모델로"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작품에는 양성적 작품들이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가 남성과 여성 모델을 동시에 써서 양성(兩性)적인 매력을 노린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실바노 빈세티 이탈리아 역사문화유산 홍보위원회 위원장은 다빈치의 작품을 분석한 결과 모나리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모델로 그려졌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피렌체의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인 리자 게라르디니가 모나리자의 모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빈세티는 적외선 기술을 이용해 찾아낸 모나리자의 밑그림을 근거로 '제2의 모델'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밑그림의 모나리자는 미소짓는 얼굴이 아니라 우울하고 슬퍼하는 얼굴이었다"며 "이는 두번째 모델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리자 게라르디니에 이어 모나리자의 두번째 모델로 보고 있는 것은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 흔히 '살라이'라 불렸던 다빈치의 제자다.   살라이는 다빈치 최후의 작품으로 알려진 '세례자 성 요한'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모델로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다빈치와 '연인' 관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빈세티는 컴퓨터를 이용해 살라이가 모델이었다고 알려진 다빈치의 모든 그림과 모나리자를 비교한 결과 세부적인 형태가 완벽히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통해 다빈치가 남성과 여성, 두 모델을 써서 모나리자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다빈치의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 양성성(兩性性) 때문"이라며 "다빈치에게 있어 완벽한 인간이란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형태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가디언은 이탈리아의 미술전문가이자 자칭 '미술 수사관'인 실바노 빈체티 역사문화유산증진위원회 위원장이 '모나리자' 얼굴에 다빈치의 제자인 살라이의 얼굴이 함께 그려져 있다는 주장을 또다시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 ​ ​ ​         한마디로, '모나리자'는 한 여성의 실물 초상화라기 보다는 여성과 남성의 이상적인 얼굴을 혼합해 그린 것이란 이야기이다.  빈체티는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 '모나리자'를 분석한 결과 맨 아래에 그려져 있는 밑그림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밑그림을 보면 초상화의 여성이 웃거나 즐거워하는 표정이 없고 대신 우수에 젖어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빈치가 여성의 얼굴에 남성의 얼굴, 즉 자신의 조사인 지안 자코모 카프로티(일명 살라이)의 얼굴을 혼합해 '모나리자'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살라이는 다빈치가 '세례 요한' 등 자신의 여러 작품에 모델로 이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빈체티는 "다빈치가 살라이를 모델로 해서 그린 모든 그림과 모나리자를 비교분석한 결과 일부 세부묘사가 완벽하게 맞아들었다"며 "따라서 다빈치가 두 명을 모델로 하고 자신의 상상력에서 나온 창조적 세부 묘사를 덧붙여 모나리자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시말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있어 완벽한 인간은 남성과 여성의 혼합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모나리자와 '세례 요한'등에 나타난 살라이의 코, 이마, 그리고 미소짓는 표정이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빈체티는 자신의 주장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미술사가 조르지오 바자리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바자리에 따르면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의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가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를 위해 다빈치에 의뢰해 그린 그림이다.     ​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에는 동성애적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그림 속의 바쿠스가 미소년의 특징, 즉 무성 혹은 양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그림은 이었다. 원작자가 죽은지 176년 지난 후에 강제로 가 된 것이다. 반동종교개혁의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졸지에 세례 요한이 바쿠스로 둔갑해야 했던 것이다. 교회의 예리한 검열의 눈이 이 작품 안에 흐르는 동성애적 경향을 놓칠리 없었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성자가 동성애자 였을리 없고, 동성애자가 또한 성자에게 모습을 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 속의 동성애가 용서받는 유일한 길은 성서의 인물이 아니라 이교의 신이 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어릿광대를 고용했을 정도로 리자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전혀 웃지 않았다. 그러자 다빈치가 살라이를 모델로 써서 웃는 표정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빈체티는 모나리자에 반영된 여성 모습이 리자 게라르디니일수도 있고 또다른 여성일 수도 있다면서, 예를 들어 다빈치가 초상화 작업을 한 적이 있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자 대공의 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모습을 합친게 아니라, 여러 명을 혼합해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대다수 학자들이 모나리자의 제작연도를 1503년으로 보고 있지만, 다빈치가 밀라노에 살고 있던 1490년대말부터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빈체티는 지난 2011년에도 모나리자의 모델이 리자 게라르디니가 아니라 다빈치의 조수이자 동성 연인이었을 수 있는 살라이라는 주장은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모나리자와 살라이가 모델이 된 그림들을 상세히 비교분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한 명 이상의 여성 얼굴이 모나리자에 반영됐을 수도 있다고 주장도 이번에 새로 내놓았다. ​ =============================    
445    [쉼터] - 비행기야, 같이 놀쟈... 댓글:  조회:1373  추천:0  2017-11-13
중국 곡예비행팀 [ 2017년 11월 13일 ]     지난 11월 9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중국 공군 '8.1' 곡예비행팀이 두바이 에어쇼에서 처음으로 점검 비행을 선보였다. 중국 공군은 9일 두바이 에어쇼 주최측의 배정에 따라 처음으로 점검 비행을 진행하여 원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신화망                           
444    [타산지석] - 국화꽃아, 나와 놀아나보쟈... 댓글:  조회:1192  추천:0  2017-11-13
강소: 국화꽃 채취현장 장관 이뤄 [ 2017년 11월 13일 ]     11월 12일, 장쑤((江蘇)) 화이안 바이마(白馬)호숫가, 현지 농민들이 국화꽃을 따고 있다. 최근 장쑤 화이안 바이마 호숫가의 천 여묘 국화꽃이 풍작을 맞이했다. 백 여명의 현지 농민들이 연일 계속 이 곳에서 채취작업을 진행하는 장면이 장관을 이루었다. 알아본데 의하면 이곳은 바이마호 중약재재배산업기지이자 현재 화이안에서 가장 큰 국화재배기지이다. 또한 현지정부가 주도하는 화초 재배, 약재 가공, 유람 관광 등 기능을 일체화시킨 현대화 농업과학기술단지이다. ///신화망                                  
443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 - 잭슨 폴락 댓글:  조회:3708  추천:0  2017-11-10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메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폴락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풍경에 기초한 작업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고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폴락의 미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멕시코의 벽화가인 의 작업실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 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당시 폴락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현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따온 모티프들과 시케이로스로부터 배운 기법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그림에 이용하였습니다.   폴락은 1945년 여성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떨어뜨린 물감의 흔적이 층위를 쌓아가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폴락은 미국 미술계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47년부터 1952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계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48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에는 빌럼 데 쿠닝, 아실 고키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인 열정을 불태웠으나, 알코올 중독과 창조성의 한계에 가로막힌 그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으로 방황하다 1956년 만취상태에서 과속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집니다.   폴락은 평소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넓은 공간에 캔버스를 놓고 사방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막대기나 팔레트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 위해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기(드리핑)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폴락은 그들의 방법을 착안해 작업에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나이프 등을 이용해 재빨리 페인트를 튀기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그림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폴락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술계를 놀라게 할 회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폴락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폴락의 재능을 칭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팝 아트 같은 뒤이어 등장하는 미국의 미술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락은 비로소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이면서도 알코올에 중독되어 기벽을 일삼던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즈너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폴락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예술적 진폭을 더욱 크고 넓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왜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난 폴락은 아들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화가가 꿈이었던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미술에 눈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시절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서 화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만 해도 폴락의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폴락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화나 구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폴락의 작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멕시코의 벽화가인 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채색이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다양한 기법들에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운좋게도 그는 당대 미술계의 유명한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 1943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후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를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쏟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바로 액션 페인팅, 드리핑(dripping)이라는 기법입니다. 드리핑이란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폴락은 이 드리핑 기법으로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성취하였습니다. 폴락의 드리핑 기법은 다다이스트들의 오토마티슴(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정신 보다는 육체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드리핑 기법은 잭슨 폴락, 하면 떠오르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이기도 합니다. 층층이 다른 물감을 사용하면서 그 물감들이 우연하게 번지고 퍼지며 만들어내는 흐름과 윤곽은 회화를 미지의 카오스 상태로 밀어넣어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느낌을 주는 회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린버그를 필두로한 미국 비평계는 폴락의 드리핑 행위를 보고 다분히 미국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즉,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등으로 상징화된 폴락의 예술 행위 뒷면에는 백인우월주의의 폭력성도 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낸 폴락은 미술계의 인기스타였습니다. 추상표현미술주의의 선구자였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였습니다. 미술계에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고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폴락이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조의 고뇌로 고통받는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좀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현대 미술계가 어떤 진전을 겪었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지난 2006년 폴락의 작품 한 점이 1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이기도 한 잭슨 폴락, 어지럽고 난해하기만한 그 물감의 폭풍 속에서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그 몸짓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빌럼 데 쿠닝(1904~1997)은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다.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즉흥성과 유연성, 긴장감  이 감도는 화면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전통적인 회화의 여성이미지와 대비되는  연작은 그로테스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  로 대중과 미술계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잭슨 폴록과 더불어 액션 페인팅의 거장으로  불리워지나 폴록과는 달리 그의 작품 대부분이  형상이 묘사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인물을 변형시키거나 거의 추상에 가까운 묘사를  하고 있지만, 그는 인물이나 풍경과 같이 재현적인  요소들을 고수하였으며, 이는 구상과 추상사이의  긴장감, 유연성, 즉흥성을 드러내보여 주었다 [출처]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작성자 어니
442    [이런저런] - 200만원짜리 그림 = 1800억짜리 그림 댓글:  조회:2661  추천:0  2017-11-10
200만원에 팔아넘겼던 그림이 1800억짜리 진품이었어요 (ZOGLO) 2017년11월10일  연합뉴스   도둑맞았던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의 명화 'Woman-Ochre'가 31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9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삼촌 부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론 로즈먼(Ron Roseman)이 놀라운 발견을 했다고 전했다.   당시 뉴멕시코에 있는 리타(Rita)와 제리 얼터(Jerr Alter)의 집을 정리하던 론 로즈먼은 남은 물건을 골동품상에게 팔았다.   그는 삼촌 부부의 침실에 있던 그림까지 총 합해 2,000달러(한화 약 220만원)에 남은 물건들을 넘겼다.   이틀 후 그는 FBI의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가 팔았던 그림이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인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의 도둑맞았던 작품 'Woman-Ochre'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좌) Twitter 'Ron Roseman' / (우) UAMA   해당 작품은 가치가 무려 약 1억 6,500만 달러(한화 약 1800억 원)에 달하며, 지난 1985년 아리조나 뮤지엄 오브 아트 대학(UAMA)에서 도둑맞은 것이다.   CCTV가 없던 당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녀가 그림을 훔쳐갔고 두 사람의 몽타주가 현재까지 UAMA에 빈 캔버스와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론은 삼촌 부부가 몽타주와 무척 닮았다고 증언했지만, 그들이 범인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몇십 년간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추적했던 브라이언 시스톤(Bryan Seastone) 조사관은 드디어 돌아온 작품을 보고 기쁨을 표현했다.   그는 "이 사건은 30년간 미스터리로 남았었다"며 "마침내 그림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UAMA   박물관 측은 그림의 훼손 여부를 살핀 뒤 금고에 보관할 예정이다.    한편 'Woman-Ochre'는 아리조나 뮤지엄 오브 아트 대학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오일 캔버스에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다.   잭슨 폴락(Jackson Pollock)과 함께 액션 페인팅의 대가로 뽑히는 빌럼 데 쿠닝의 '여성'을 연속해서 그린 작품 중 하나이며, 2006년 시리즈 중 한 작품인 'Woman III'가 1억 3,000만 달러(한화 약 1500억 원)에 경매된 바 있다. ///인사이트 ========================== 빌럼 데 쿠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빌럼 데 쿠닝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 1997년 3월 19일)은 20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드 쿠닝은 잭슨 폴락과 대등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애[편집] 190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사춘기에는 상업미술 회사에서 일하는 하면서, 로테르담 미술공업학교의 야학으로 공부했다. 네덜란드에 있었던 시기에 몬드리안 등의 "더 스테일" 운동을 접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다. 1927년경 아르메니아에서 온 화가 아실 고치와 알게 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 쿠닝은 1930년대 중반까지 상업 미술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마크 로스코 등 다른 추상화가들과 함께 WPA (공공사업 촉진국)의 연방 미술 계획 업무에 종사했다. 연방미술계획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화가들에게 공공건물의 벽화 제작 등을 위촉했던 곳이다. 1948년, 뉴욕 이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경부터 드 쿠닝은 인물 표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여자" 시리즈가 잘 알려져 있다. 폴록의 "드립핑"(물감을 뚝뚝 떨어지는) 회화와 달리 데 쿠닝이 그리는 "여자"는 캔버스에 붓으로 그린 것이지만, 감정의 향하는 대로, 붓을 놀린 것처럼 보이는 화면은 거의 추상에 접근하고 있다. 그 후 화면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배제한 추상적인 작품을 그렸던 시기도 있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다시 "여자"를 테마로 작품을 만들어 냈다. 대표작[편집]《발굴》 (1950)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여자와 자전거》 (1952-53) (뉴욕 휘트니 미술관) ====================================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 1997년 3월 19일)은 20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드 쿠닝은 잭슨 폴락과 대등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41    화가는 갔어도 미술계의 그의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댓글:  조회:1779  추천:0  2017-11-09
화가 이중섭 작품 감상           살아서는 궁핍했으나 죽어서는 신화가 된 화가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가족들과 이별한 채 살아야 했지만 평생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향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뿐아니라 화가의 개성; uniqueness,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사랑 꿈과 순수함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열악한 환경을 넘어선.. 그래서 그를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혹자의 평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보아온 그림뿐아니라 처음 대하는 그림도 있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이중섭 (1916-1956)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童子〕·가족 등이 가장 많으며 불상·풍경 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자전적인 가족에 대한 정감의 요소이다. 〈싸우는 소〉·〈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소와 어린이황소〉(이상 개인 소장)· 〈투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440    [쉼터] - 가위질 몇번에 검은색 종이는 살아난다... 댓글:  조회:1986  추천:0  2017-11-07
  10월 12일, 왕위안(汪元)의 전지 작품     10월 12일, 왕위안(汪元)이 친구를 위해 전지 작품을 만드는 모습   10월 12일, 왕위안(汪元)의 작업실     10월 12일, 왕위안(汪元)의 쿤밍(昆明, 곤명) 작업실   10월 12일, 작업실 벽에 걸려 있는 왕위안(汪元)의 작품   10월 12일, 작업실 문에 걸려 있는 왕위안(汪元)의 작품. 독특한 ‘웨딩사진’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7일] 왕위안(汪元)은 윈난(雲南, 운남)성 출신의 유명 전지(剪紙: 종이공예) 예술가이자 쿤밍(昆明, 곤명)시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 계승인이다. 왕위안에게 가위는 ‘펜’처럼 사용된다. 왕위안이 가볍게 가위질 몇 번을 하면 검은색 종이는 생동감 넘치는 하나의 인물 형상의 작품으로 태어난다. 왕위안은 30년째 전지 예술을 해오고 있으며 매일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전지 작품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라고 한다. 왕위안은 요즘 전지 예술을 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자신이 직접 많은 행사 등에 참가한다고 전하며 사람들에게 전지 예술의 기본적인 정보와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특히 어린이들에게 전지 예술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전했다. (번역: 은진호) ///출처: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 ===============================   문화축제 기간 다양한 구조와 성능을 가지고 있고 테스트를 거친 ISO 폭죽이 류양(瀏陽)에 공급됐다.                        중국 호남성 류양(瀏陽) 국제 화포(花炮, 꽃불) 문화축제에서ㅡ
439    "누구가가 내 작품을 즐겼다는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끝! 댓글:  조회:1387  추천:0  2017-11-07
지하철 설치된 생리 그림 '더 이상 금기 아니다'... (ZOGLO) 2017년11월7일  스웨덴 지하철에 설치된 생리 그림. 출처=데일리메일 스웨덴 지하철에 여성의 생리를 묘사하는 미술작품이 전시 돼 논란이 되고 있다. 영국매체 데일리메일은 지난 6일(현지시간) 스웨덴의 한 지하철 역에 설치된 예술가 리브 스트로퀴스트의 작품을 소개하며 현지에선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It's Alright, I,m only bleeding(괜찮아. 나는 단지 피 흘리고 있을 뿐이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스웨덴 지하철 벽면에 설치됐다. 검은색, 흰색, 빨간색으로만 이뤄진 이 그림은 여성의 속옷에 빨간색을 칠해 생리를 묘사했다. 스웨덴 지하철에 설치된 생리 그림. 출처=데일리메일 이 작품에 대한 논쟁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벌어지고 있다. 누리꾼인 윌 베리네스는 “이것은 인권문제가 아니다. 나는 지하철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을 뿐”이라며 작품에 반대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4살짜리 아이에게 다리사이에 묻은 피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공공미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반면 2017년에 생리는 더 이상 금기시될 주제가 아니라며 예술작품을 옹호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스웨덴 지하철에 설치된 생리 그림. 출처=데일리메일 Sarmer42라는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은 “스웨덴은 진보적인 나라”라며 “다른 지하철에서도 누드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다른 누리꾼은 이에 동의하며 “생리 기간이 부끄럽지 않다는 걸 작품이 상기해줘서 고맙다”며 “생리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은 세계의 편견이다”라고 덧붙였다. 작품을 만든 리스 스트로퀴스트는 “논쟁을 일으킬 의도는 아니었다”며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 작품을 즐겼다는 것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세계일보
438    [쉼터] - "길림시 호랑이왕" 화가 = "동북호랑이왕" 화가 댓글:  조회:1634  추천:0  2017-11-07
정일평화백과 그의 필끝에서 살아 숨쉬는 호랑이들 [ 2017년 11월 07일 ]                                                                   정일평화백   1951년 길림시 출생 길림시강북기계공장중학교 미술교원으로 정년퇴직 길림성미술가협회 회원 길림시미술가협회 회원, 길림시서화원 화가 길림시조선족서화원 부원장 1986년 그림책  출판 2010년 중국미술가협회 전국 ‘백인백호’ 작품 공모에  유일한 조선족화가로 입선 도서에 작품 입선 길림시TV방송사 인물란목에 특별소개  写实派 工笔画 화가 정일평의 섬세한 손끝에서  살아 숨쉬는 각각색 호랑이들, 정일평화가는   '길림시 호랑이왕', '동북호랑이왕'이라는 미칭을 갖고 있다. ///길림신문
437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댓글:  조회:2438  추천:0  2017-11-06
박수근은 화가이자 가장, 혹은 구도자이자 순례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당신을 외면하는 불모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됐을까”(아들 박성남) ⊙ “현재 아버지의 그림은 호당 1억원이 넘어. 이게 내 아버지 맞아? 아닌데 …” ⊙ ‘박수근은 불필요할 때 결코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다’(故 박완서 선생) ⊙ 박수근의 딸·아들·(외)손자 3대가 화가의 길 걸어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오른쪽) 화백과 손자 박진흥 화백.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면 박수근(朴壽根·1914~1965) 화백이 첫손에 꼽힌다. 지금은 그림 값이 제일 비싸지만 생전 전시회 한 번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그의 그림엔 대개 농사를 짓거나 아이를 돌보고, 난전의 여인이 등장한다. 남자는 늙거나 늘어져 있다. 가난한 이웃의 얼굴이다.       생전 박수근은 이런 말을 했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박수근의 그림은 살아서 유명세를 타지 못했고 도쿄 유학파가 장악한 화단에서 배척을 당했으나 구도자처럼 캔버스 앞에 앉아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어린 아들(박성남)은 “너네 아버지는 뭘 하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냥 빌어먹고 살아요.”      어느새 일흔의 나이가 된 아들 박성남(朴城男·70)씨를 경기도 파주에서 만났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다. 19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가 몇 해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 동심(童心)의 관찰자가 말한 ‘빌어먹다’는 표현이 왜 이리 웃플(웃으면서 슬플)까요.       박성남씨의 말이다.       “외삼촌들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무시했어요. 방물장수가 간혹 우리집 마루에 걸터앉아 그림을 보곤 했는데, ‘수근’이라는 사인을 보고 혼잣말로 ‘나무들이 수군수군 대나 봐’ 하고 말했어요. 동네 이웃들도 아버지 그림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어느 날 아버지가 마루에서 곤히 낮잠을 주무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주무시는데 ….”      — 휘파람? 코 고는 소리?      “코 고는 소리는 아니고 … 뭐랄까 제 귀엔 휘파람처럼 들렸어요. 그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를 외면하는 불모지(不毛地)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 하고 말이죠. 아버지는 전업작가로, 피붙이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사셔야 했어요. 어쩌면 아버지가 순례자나 구도자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아버지가 되니 그제야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박수근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    박수근의 서울 창신동 집 마루. 박수근 화백과 아내 김복순, 딸 인숙.     — 박수근은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평가를 받아요.       “아버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강을 비우고 이불을 개십니다. 마른 걸레로 방·마루를 닦고 아침을 드시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림에 매달리셨어요. 그러곤 미니 스케치북이랑 몽당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명동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셨어요. 이런 생활이 거의 반복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아버지가 ‘우리의 화가 박수근’이 돼 있더군요. 저는 대통령이란 자리도, 노벨상이란 명예도, 아버지 자리에 비해 근사해 보이지 않아요. 아버지는 정직하고 근면한 하루의 삶에 충실했을 뿐인데 말이죠.”      성남씨는 “철학적인 용어인 ‘포월(抱越)’이란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포월이란 ‘품에 안고 넘는다’, ‘포함하며 초월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아버지는 묵묵히 자기 세계로 나아가셨어요. 사람이 태어나 엉금엉금 기다가 지치게 되면 어느새 걸어가게 되고 ….”      — ‘지치다’?      “삶에 충실하다는 말입니다. 기다가 지치면 어느새 두 발로 걷게 되고, 또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뛰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포월의 길로 나아가 그림의 달인이 되셨어요. ‘겪는 자’의 삶이라고 할까요?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겪는 삶 ….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지만, 작은 물방울이 강한 바위를 가르듯 자신의 경지에 오르셨어요.       아버지의 작품 중에 〈기름 파는 여인〉이란 그림이 있어요. 실제로 윗집에 기름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아주머니는 글을 몰라 어머니더러 읽고 써 달라고 부탁하셨죠. 그럼 고맙다며 참기름 한 병을 주셨어요. 참기름 맛의 고소함에선 그 아주머니가 달인이겠지만 어쩌면 (아주머니는) 참기름에 취해 정작 고소한 냄새를 못 느꼈을지 몰라요. 시대에 취하면 그 시대를 모르는 법입니다.       아버지 그림은 아버지의 러닝셔츠나 흰 고무신처럼, 평범한 일상의 하나였는데 한 시대가 지나고 보니, 아버지 그림이 호당 1억원을 넘어요. 이게 내 아버지 맞아? 아닌데 ….”      그의 집엔 그렇게 비싸다는 아버지 그림이 한 점도 없다. 박수근이 1965년 사망하자 가족들은 ‘박수근 유작전’을 열어 그림 대부분을 팔았다. 당시엔 호당 5000원 정도에 팔렸다고 한다. 그 돈으로 생계를 이었고 쌀을 샀으며 학비를 보탰다.       — 진짜 한 점도 없나요.       “생계를 위해 다 팔았고 나머지 그림들도 아버지 고향인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다 기증했어요. 유품 등 200 몇 십 점 모두요.”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한단다”(박수근)    박수근과 딸 인숙과 아들 성남.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박수근은 이웃의 처녀 김복순(金福順)과 1940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현재 딸 인숙씨와 아들 성남씨만 생존해 있다. 인천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한 박인숙(朴仁淑·73)은 교장으로 퇴임했다. 박인숙은 국전에 3차례 입상한 화가다. 영어교사인 천명운(千明雲·80)과 결혼해 2남을 낳았다. 장남 정국(千丁國·48)은 현재 증권회사 중견 간부, 차남 은규(千銀逵·45)는 화가로 활동 중이다. 박수근-박인숙-천은규로 이어지는 3대가 화가인 셈이다.       아들 박성남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국전에 7차례 입상했다. 그러다 1986년 국내 활동을 접고 호주에 정착, 낮엔 접시를 닦고 청소부로 일했다. 밤에 돌아와 캔버스와 마주하며 작품활동을 이어 갔다. 호주한인미술협회 회장, 크리스찬리뷰 아트디렉터를 지냈다.       권영란과 결혼해 아들 진흥·진영을 낳았다. 장남 진흥(朴振興·45)도 그림을 그린다. 역시 3대가 함께 화업(畵業)의 길에 들어섰다. 진흥씨는 인도 델리대와 웨스턴시드니대 미술대학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다. 정미영씨와 결혼해 두 아들 예담(15)·예솔(12)을 낳았다.       차남 진영(朴振英·43)은 스위스 호텔학교 레로시(Les Roches)에서 호텔경영학부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리츠칼튼 호텔(시드니, 서울)에 재직했다. 현재 시드니에서 미술학원을 운영 중이다. 정경화씨와 결혼해 딸 예서(12)·아들 예샘(9)을 두었다.       — 박수근의 아들은 어떻게 화가의 길을 걷게 됐을까요.       박성남씨의 말이다.       “환쟁이는 돈 못 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중학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웠어요. 중3 때 아버지께 공업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아버진 아무 말씀도 안 하셨죠. 서울공고에 입학해 인쇄과를 택했어요. 인쇄과가 그림과 관련이 많거든요. 그즈음, ‘신(新)기회 미술대회’라는, 구상작가들이 주최하는 대회에 나갔는데 가작에 당선됐어요.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칭찬받을 생각에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 학창시절, 박수근의 그림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아버지의 수채화는 단순하고 투명해서 고교생인 제 눈엔 재주가 하나도 없게 보였어요. 아버지의 단순한 채색과 달리 저는 중색으로, 가령 보라색을 칠할 때, 빨강을 칠하고 파랑을 겹쳐 그려 보라색이 나오게 붓 터치도 하고, 빛이 사물을 에워싸게 정물을 그렸죠.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 그림을 보시더니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한단다’는, 알쏭달쏭한 말씀만 하시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러다 고3 때 간경화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화우들의 도움으로 유작전을 열었는데, 그때 아버지 그림을 유심히 보게 됐어요. 가만히 〈좌녀〉라는 그림을 응시하는데, 무표정한 여인의 얼굴에 간절한 마음의 고뇌가 느껴졌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과를 사과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 생각했거든요. 유작전에서 아버지 그림을 보며 ‘아버지, 저도 화가가 될래요’라고 말씀 드렸죠.”         6개월 동안 박수근 그림을 베껴 그리다    미8군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왼쪽에서 두 번째).   박성남은 박수근의 사망 이후 6개월 동안 아버지 그림을 연구했다고 한다. 아버지 그림을 옆에다 놓고 수없이 베껴 그리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작업과정을 가만히 떠올렸다. ‘캔버스나 하드보드에 청자색과 암갈색 계통의 바탕색을 기름에 버무려 칠해 놓고선, 그리려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 내는지 눈여겨보았던’ 기억이 났다.       미술 평론가들은 박수근 그림의 특징으로 회백색의 화강암 같은 거친 질감을 꼽는다. 그 질감은 서민들의 삶의 무게를 연상케 한다.      “저는 아버지 그림 특유의 마티에르(질감)를 얻기 위해 몇 번 정도 덧칠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비밀기법인 ‘열십자 터치’도 알고 있었어요. 캔버스나 하드보드의 요철을 이용하고 화폭을 가로세로로 돌려 가면서 서너 번 덧칠을 하시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저는 아버지 작품을 두고 위작(僞作) 시비가 일었을 때 단박에 가짜를 알아챘어요. 다만 미술감정협회 등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입을 다물었어요.”      고교를 졸업한 박성남은 제15회 국전에 120호 크기의 그림을 출품됐다. 제목은 〈추야의 표정〉. 그 그림은 당시 국정교과서 미술책 표지로 채택했다. 교과서에는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이 함께 실렸었다.       “그렇게 정식 데뷔했죠. 아버지는 18살 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섰고, 저는 한 해 늦은 19살 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데뷔한 셈입니다.”    박수근의 1962년작 〈나무와 두 여인〉.   — 아버지 그림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나요.       “아버지가 미군 PX에서 미군들과 그들의 애인 초상을 그리고, 집에 와서는 ‘시대의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미군들의 초상화와, 가진 것이라곤 폐허뿐인 ‘서울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나의 아버지셨어요.       1970년대 나온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을 읽을 때까지, 전 아버지가 PX에서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제 기억엔 아버지가 종일 말없이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박완서의 장편 《나목(裸木)》에 등장하는 ‘옥희도’가 박수근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는 실명으로 박수근의 이름이 등장한다.       … 그(박수근)의 눈은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진지하기보다는 덤덤했다. (중략) 그는 예술보다 사는 일을 우선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아마 예술이 아니라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는 일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재주로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뿐이었다. 훗날 그가 예술가로서 받은 최고의 평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불필요할 때 결코 그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      p263~266,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웅진 刊) 중에서      — 박완서 선생은 ‘박수근·옥희도’를 참 따뜻하게 그려냈어요.       “어느 시인이 박완서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대요. ‘그 시절, 화가 박수근을 사랑했냐’고요. 선생은 열여덟 소녀처럼 달뜬 목소리로 ‘아니다’고 하셨대요. 제 기억으로, 어떤 여인이 서울 창신동 집에 온 적이 있는데, 당시 어머니가 밥 짓다 말고 밥주걱으로 무쇠솥을 탕, 탕 치며 질투하신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박완서 선생이 ‘그 여인이 내가 아니다’고 웃으셨다고 해요. 하하하.”         박수근 그림의 비밀은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는 순수함    박성남 화백의 2016년작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 같은 화가로서 박수근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독일 괴테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했던가요? 아버지 그림은 가장 한국적입니다. 일제 강점기, 전쟁, 가뭄, 홍수, 전염병, 보릿고개, 그야말로 인고의 시대가 그림에 다 묻어나요.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까요? 광폭한 현실에 대한 저항도 비관도 아닌,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니며 때를 기다리며 견디는 것도 아닌, 그냥 사는 것이었어요. 아버지에게 진실함이란 그저 물감이었고, 선함은 팔레트였습니다.”      — 2세 화가라는 게 큰 짐이 되지요?      “아버지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자긍심이 없다면 붓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아들이 아닌 독립된 예술가로서 아버지 명성이 방해가 된다고 느낀 적이 있고요. 극복하려고 제가 그린 국전 입선작을 포함해 상당수 작품을 불태웠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2세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10월부터 ‘박수근 스타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화백.   아들 박성남은 젊은 시절, 아버지와 당당히 겨뤄 보겠다며 아버지의 그림세계를 버리다시피 했다고 한다.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부터 아버지와 다른 추상의 그림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아버지 그림과 마주했고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       “아버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인, 등짐 진 여인, 곰방대 든 노인, 멍한 모습의 이웃들을 그렸습니다. 그 모습은 선합니다. 아버지 그림의 선함은 타인에게 선함을 강조하지 않아요. 그림 〈나목〉처럼 나무에 이파리가 필요 없어요. 나목은 하늘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죠.       〈절구질하는 여인〉처럼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버지에겐 리얼리티였고 모던이었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아버지 그림은 소통할 수 있는 진실성이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혼잣말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 멀어 …’ 그러셨거든요. 아버지에게 천당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건 선함과 진실함이 그리는 세상 아니겠어요? 아버진 그걸 그리길 원하셨지만 완성하지 못하시자 ‘멀다’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던 겁니다.       이 세상이 퓨전화되고 혼란스럽잖아요. 아버지가 꿈꾸던 단순하고 선하며 진실한 그림을 제 나이 일흔이 되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박수근의 창신동 시절(1952~63)이 화가로서 인생의 황금기    박수근의 손자 박진흥 화백..   이번에는 박수근의 손자 진흥씨에게 물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화가 박수근’이란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유명한 할아버지를 둬 좋겠다”고 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중학생이 돼서야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흥씨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직업엔 영 관심이 없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유년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집 안엔 온통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림을 보고 만지며 냄새를 맡던 기억이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버지 박성남에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진흥씨의 말이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도, 말씀도 없이 담배를 피우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림이라는 세계가 어려운데, 앞으로 그 길을 어떻게 헤쳐 갈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던 게 아닐까요?”      — 화가의 꿈이란 게 쉽지 않은 도전 같아요.       “화가가 되려 계원예고에 입학했는데 점점 할아버지 존재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림을 대하는 편안함이 사라졌어요. 학교 선생님은 ‘넌 박수근 손자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래서 친구들보다 더 혼이 났어요. 그림 대신 조각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는 고3 때 인도로 떠났고 호주 시드니에서 미술대학원을 나왔다. 2001년 블랙타운시티 예술전시회(Blacktown City Art Exhibition)에서 대상을 타며 화가로서 처음 이름을 올렸다.         “일본에 가면 3대가 하는 우동집이 있잖아요. 맛의 비법을 전수하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합니다. 화가라는 직업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지니신 예술정신을 이어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정신을 존중하고 싶어요.       그중에서 할아버지 박수근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제 화폭에 담고 싶습니다. 한땐 저도 출품 욕심을 가진 적이 있어요. 그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마음의 왜곡이 생겨 후회가 됐어요. 할아버지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이 그림에 담았던 겁니다. 저도 거짓 없는 진솔한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박진흥의 2016년작 〈쉼/ 오늘도 마이너스〉.     — 할아버지의 삶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라고 보시나요.       “할아버지는 6·25 당시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한동안 군산 부두에서 노동을 하시며 기약없이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할머니가 도강증도 없이 트럭에 몰래 숨어 서울로 들어가 할아버지와 극적으로 재회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창신동에 모여 살던 시절(1952~1963년)이 화가로서 열정이 가득 찼던 시절이 아닐까요?”      — 40대 중반의 나이면 인생에서 어떤 결실을 맺어 가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할아버지 박수근의 그림은 사립문을 열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이웃과 풍경이 소재였잖아요. 반면 오늘의 시대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삽니다. 스마트폰을 보고 울기도 웃기도 해요. 어쩌면 스마트폰이 인간에게 ‘쉼’의 대상이 아닐까요? 저는 ‘쉼’을 주제로 스마트폰 틀에 하루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상징화시켜 그립니다. 제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팔이 없어요. 노동자도, 화가도 팔이 없어야 쉴 수 있어요.”      — 경제적으로 해방이 되셨나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빌어먹고 있다’는 표현을 썼어요.       “너무 가난해 그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진짜 빌어먹고 살더라도 붓은 계속 잡고 싶어요.”      곁에 있던 박성남씨가 대견스레 한마디 던졌다.       “진흥이는 할아버지의 붕어빵입니다. 박수근의 DNA가 그대로 있어요. 박수근이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묵묵히 그 길을 가다 보면 응답이 있고 열매를 맺을 겁니다. 저는 아들이 이미 ‘대가’라고 마음속에 선포를 했어요.”⊙       =================================   서민의 화가 박수근 (朴壽根)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 - 박수근 선생은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입니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 민족적 정서를 거친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그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서민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박수근 미술관              화가 박수근의 작품  *...시장의 여인들 1961년-가로 62.4㎝, 세로 24.9㎝(변형 15호)   화폭에 여인 12명이 있는 이 작품은 박수근 특유의 거칠거칠한 화강암 질감이 잘 살아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그림 중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후반 작품인 ‘빨래터’는 다른 작품에 비해 색상이 화사하고 이미지가 선명하다. 흰 무명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과 함께 분홍 노랑 파랑 등 파스텔톤 색상의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옆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미국에 사는 80대 소장인이 박 화백 생전에 직접 선물로 받아 50여 년간 간직해 온 것이다. 이 작품은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나물캐는 여인들 (1940년대)    *...맷돌질하는 여인 (1940년대 후반)    시장          
436    가장 서민적인것, 가장 거룩한 세계, 가장 현대적인것... 댓글:  조회:1739  추천:0  2017-11-04
  ** 박수근 (1914 - 1965)의 작품세계 / 1950년대 **  [ 마을 / 1950 후반 ] [ 마을 풍경 / 1955 ] [ 모란 / 1950년대 ]  [ 복숭아 / 1957년 ]  [ 빨래터 / 1954년 ]  [ 빨래터 / 1950 후반 ]  [ 빨래터 / 1950 후반 ]  [ 산 / 1950년대 ]  [ 석류 / 1954년 ]  [ 시장 / 1950년대 ]  [ 시장 / 1950년대 ]  [ 시장 / 1950년대 ]  [ 시장의 사람들 ]  [ 아기보는 소녀 / 1953년 ]  [ 아기업은 소녀 / 1950년대 ]  [ 아기업은 소녀 / 1950년대 ]  [ 아기보는 아이들 / 1950년대 ]  [ 앉아있는 여인 / 1958년 ]  [ 여인들 / 1950년후반 ]  [ 우물가(집) / 1953년 ]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은 [서민의 화가]라고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는 곤궁한 시절에 힘겹게 살아갔던 서민화가 그 자체였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지만, 밀레의 "만종"이란 그림에 큰 감동을 받아 그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꾸준히 하였다. 1932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빛 그리고, I Love You...대전 엑스포 공원에서.....2006.12.29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박완서 소설 "나목"의 등장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그는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그렸다.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박수근 화백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 보다 미국인 애호가에 의해 외국에서 더 인정을 받았다.그로 인해 궁핍한 삶이지만 근근히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한다. 그는 예술에 대하여 거의 언급한 일이 없고 또 그럴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가 쓴 [아내의 일기]를 보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화가의 이러한 마음은 곧 그의 예술의지가 되어 서민의 모습을 단순히 인상적으로 담아 내는 것이 아니라 전문용어로 말해서 철저한 마티에르를 살린 평면화작업을 추구하게 되었다. 주관적 감정으로 파악한 대상으로서의 서민 모습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감정에서 독립된 완전한 객체로서의 서민이다.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주의]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수근의 그림은 부동의 기념비적 형식이 되었으며 유럽 중세의 기독교 이론과 비슷한 성서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화강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처럼 움직일 수 없는 뜻과 따뜻한 정이 동시에 느껴진다.그리하여 박수근은 가장 서민적이면서 가장 거룩한 세계를 보여준 화가가 되었고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화가로 평가 받고 있다.
435    화가들도 컴퓨터의 노예가 되고 있더라구ㅠ... 후ㅠ... 댓글:  조회:2480  추천:0  2017-11-03
Google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회화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대결에서 인간이 백기를 든 지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한국 바둑 기사 이세돌은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을 며칠 앞두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세돌의 승리를 점치고 있지만, 바둑에서도 인간이 컴퓨터에 무릎 꿇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예측이다. 그러나 절대 범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예술 영역에까지 컴퓨터가 침투했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는가? 구글(Google)의 인공지능은 이제 직접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도달했다ㅡ그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의문이지만ㅡ. 구글 천재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인공신경망은 컴퓨터에 상상력을 부여했다. 섬뜩하리만치 똑똑한 인공지능은 나무에서 빌딩을 만들어내고, 나뭇잎에서 새를 떠올린다. 물론, 상상이 아닌 첨예한 알고리즘에서 비롯된 패턴이지만, 인공신경망은 인간의 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구글은 이러한 ‘딥 드림(Deep Dream)’ 테크놀로지의 차원을 계속 끌어올리는 중이다. 마치 꿈에서 상상한 이미지를 직접 구현한 듯한 이 기술은 여러 아티스트의 손에 의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 이 컴퓨터는 게걸스럽게 학습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주, 딥 드림 코드 아트 옥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다. 엔지니어를 포함한 다수 아티스트가 이 코드를 활용해서 완성한 작품을 경매에 내놓았다. 가장 비싼 작품은 8,0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언젠가 이 기술이 상용화되는 날이 온다면? 각자의 입맛에 맞춰 코드를 변형하고, 유형화시켜서 ‘반 고흐 코드’, ‘피카소 코드’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도 가능할 법하다. 그때가 되면 현대예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것. 우선 이 고철 덩어리가 만든 그림이나 감상해보자. 딥 드림이 궁금하다면 하단에 첨부한 링크를 클릭해볼 것. 이미지 하나만 올려 놓으면 이 녀석이 대신 꿈 속으로 데려가준다. Deep Dream 속으로
434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불공평하다... 댓글:  조회:1295  추천:0  2017-11-02
                        사과의 고향이라 불릴만큼 인기 높은 섬서 례천현(礼泉)에서ㅡ       료녕성 단동 압록강에서ㅡ =====================덤으로 더...(필자 주; 쟁명?...)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남희철     연변동북아예술연구회 김성희 회장을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본 세미나를 조직해준데 대해 충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론문을 써주신 여러 교수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학술세미나에 참석해주신 여러 래빈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이번 모임이 나의 음악연구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덕담의 자리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조선족의 력사상한선을 “100여년”으로 보는 전통의 학설과 “360여년”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팽배하게 맞서고 있었다. “100여년 설”은 19세기중엽이후 특히 1860년~1870년 사이에 혹심한 자연재해로 조선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이 중국경내에 범월잠입(犯越潛入)하던 때를 이주시기의 상한선으로 본다. 반면에 “360여년 설”은 항금원명(抗金援明)이 실패한 1620년에 조선군대 수천명이 중국에 억류된 때를 이주시기의 상한선으로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번 론쟁은 “항금원명”에 동원되여 온 사람들의 후손이 료녕성과 하북성에 살고 있다는 것과 후손들의 일부가 호적을 조선족으로 정정했다는 것을 근거로 “360여년 설”이 승리하게 된다. 불변의 사실이 웅변을 이긴 것이다.   약10년 전, 화룡시에서 “진달래축제”를 만들기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이 있었다. 그 번 회의에서 내가 “진달래는 자치주주화이기에 화룡시에서 진달래축제를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화룡시에서 축제를 만들자면 화룡시 만의 무엇을 브랜드로 육성해야할 것이다. 화룡시에는 발해의 ‘정효공주묘‘가 있다. 이것은 남이 가져가지 못할 문화유산이다. 이것을 리용해서 정효공주미인선발대회, 정효공주행차 등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해”의 “발”자도 꺼내지 못하는 판국이라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기 만무했다.  지난해 나는 ⟪도라지음악의 력사상한선과 변천과정연구⟫라는 글을 써서 국내에 투고한 적이 있다. 출판부문의 이야기로는 “‘고구려’자만 들어가면 상급의 허가가 있어야하기에 조만해서 출판하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것이였다. 하는 수없이 이글은 『한국음악사학보』에 발표하게 되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령토가 현재의 중국에 일부분 또는 전체가 속해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것을 현재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고, 이들 고대 지역(또는 나라)들에 우리민족의 선인들이 산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중국조선족의 력사범주에 포함시키는 것 또한 당연지사일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으로 조상들이 살다간 옛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선인들은 현재 중국에 속해있는 일부분 또는 전체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살다가 후기신라와 후삼국을 거쳐 고려인으로 되였으며, 1619년에 다시 중국에 와서 오늘날의 중국조선족으로 살고 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의 력사는 고대사와 근대(현대)사로 구분됨이 마땅할 것이고, 중국 땅에 속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 대한 연구 역시 조선족의 참여가 바람직하며, 이들 지역(또는 나라)의 력사·문화도 조선족이 -다른 민족과 함께-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내가 『조선민족전통음악사』를 강의하면서 ‘력사공유’란 말을 늘 사용해왔다. 고구려는 조선민족의 선인과 다른 민족의 선인이 혼재한 지역(또는 국가)이고, 고구려의 멸망이 당·라 련합작전에 의한 것이며, 고구려가 패망한 후 령토·인구·문화는 2분되여 당나라와 신라가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고구려라는 지역(또는 나라)의 력사를 오늘의 조선사(또는 한국사)에서 거론될 뿐만 아니라 중국사에서도 거론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중국조선족의 선인이 현재의 중국 땅에 살았고 중국조선족 또한 중국국민으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 데야 뭘 더 말하겠는가?    중국조선족의 음악사만보더라도 고대에로 시야를 넓힌다면 조선음악사(또는 한국음악사)에서 연구되어온 고조선·고구려·발해음악뿐만 아니라 중국내지로 전파된 고구려·발해음악, 일본에로 전파된 고구려·발해음악이 새롭게 안겨올 것이다.    아시다시피 조선음악사(또는 한국음악사)에서 악곡을 기록한 문헌은 중세조선의 세종대왕 때인 1447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기원전37년~668년의 고구려악곡과 698년~926년의 발해악곡을 기록한 문헌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1171년에 일본의 후지와라 노 모로나가(藤原師長)가 편찬한 『인지요록』에 적어도 17수에 달하는 고구려악곡과 발해악곡이 있다. 이 《인지요록》에 대해서는 일본의 음악학자 하야시겐조(林謙三), 영국의 음악학자 엘 픽컨(LㆍPicken), 중국의 음악학자 엽동(葉棟)·김건민(金建民)의 연구 성과가 있다. 우리가 만약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음악을 전면적으로 조사한다면 관련 문헌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지난 세기 80년대에 사학계에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상한선을 100여년으로 보는 것과 360여년으로 보는 것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듯이 21세기 10년대에 400년 설과 수천 년 설이 격돌해야할 필요성이 있어 보이고 특히 중국조선족음악사학계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어야한다고 본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진정으로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7.10.10 =================== 개구리 증후군 김인섭 오랜간만에 친구들과 마주앉아 말보따리를 풀어 제끼고 즐거운 한 시각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친구가 자기 집 아이는 조선족 소학교를 다니는데 초중부턴 타민족 학교에 전학시켜 벼슬 공부를 시킨다며 ‘난쟁이 키 자랑’하듯 으스댔다.조선어는 소학교만 나와도 글 보고 소통하는 데 넉넉하다는  리유를 들먹들먹한다.중국인데 한어를 잘하면 족하고 민족어는 떠듬거려도 지장이 없고 한국에 가서도 밥벌이엔 부족이 없다며 주어섬겼다.그까짓 조선어라며 비죽거리는 모습에 기분이 말째지며 ‘삶겨지는 개구리’를 련상하였다.   지나간 19세기 말, 서방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이다.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순간에 뛰쳐나오지만 그의 최적온도인 15℃에 맞추고 서서히 가온하니 느긋이 잠겼다가 뜨거움을 느낄 때는 신경이 마비되여 도약력을 잃고 죽으러 가더라는 것이다.그들은 이 현상을 ‘개구리 증후군’으로 작명하였고 그후 점진적인 변화에 무감각하다 위기가 오면 ‘쪽도 못 쓰고’ 령락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비유어로 리용되었다.이를 연원(渊源)으로 변화에 둔감한 무신경이면 ‘변화무지 증후군’, 현실에 안주한 무사태평이면 ‘비전(希望)상실 증후군’이란 신조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개혁개방이 급물살을 탈 때 조선족은 자기의 문화 특히는 이중언어에 힘입어 궁핍에서 신속히 해탈하고 민족사회 재건의 경제 및 사회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그래도 그 당시는 그 조선어 수준에다 힘만 있다면 밥벌이는 넉넉했고 상당한 적금도 이룰 수 있었다.다름이 아닌 민족문화가 불시에 괴력을 발휘하여 조선족을 중국의 민족 속에서 선두주자 자리에 밀어올린 것이다.이 사실은 문화 저력의 거대성을 립증하였다.이것은 또 그 차원의 문화가 그 력사에 적응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지난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바둑 9단 이세돌과 미국 구글그룹이 개발한 인공지능프로그램(人工智能程序)인 알파고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의 참패는 인류에게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였다.인간은 사상혁명을 앞세우고 미래 수요에 높낮이를 맞추는 고민을 해야한다는 계시이기도 하다.지능사회가 돌격해 오는 때 미래 인재의 핵심적 력량은 인간만이 가진 인본주의 정신과 광활한 정보력으로 타인과 심각한 교류를 진행하며 자신의 활동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한다.여기의 핵심은 더 고차원적인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 능력이다.그 친구의 뜻대로 간다면 그 때의 그 아이는 마주해야 할 경쟁에서 사대육신(四大肉身)의 어느 쪽에 기능불구나 부자유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나라도 지능화 발전의 전략 경보를 울리며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그런데 친구의 말처럼 자식을 가르친다면 변천을 따르기 커녕 되려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상승하는 온도를 느끼지 못한 것일가.오늘의 지식이 10년 간격을 두고 상당 부분이 무용물이 되는데 말이다.주입식 교육과 세간의 무사주의(无事主义)에 푹 젖은 ‘온수 속의 개구리’가 아닌가 싱거운 걱정이 앞선다.   기성세대는 후대에게 사유재산을 만들어 주기가 급급해도 더 큰 가치는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다.옛날 어느 현자가 아들에게 고기를 주지 않고 그물짜기를 가르쳐 부자로 키웠다는 이야기는 명기할 귀감이다.포식한 배를 어루쓸며 매일매일을 까먹듯 하지말고 간혹 머리를 돌려 주변의 변화를 살피는 게 시대적 삶이겠다.갑자기 뭔가 느껴지는 때면 길몽(吉梦)도 대몽(大梦)도 죄다 탁발승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내 친구가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도 늦다는 ‘토끼와 거북이 경주’의 교훈을 살리고 ‘삶겨진 개구리’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고부가치 자본인 민족문화에 눈을 돌리고 아이의 이중언어를 완벽한 원어민 수준에 인상하는 층계를 만들어 전승시켜야 한다.그리고 민족문화와 이중언어가 지능사회를 살아가는 활주로라는 귓띔을 귓등으로라도 들어줬으면 좋겠다. ///연변일보 2017-10-25   ============================== 덤으로 더...     보물지도              /하지연     시방까지 살아오면서 남자헌테 한 번도 펜지 한나 받아 본적이 없었는디 오늘 첨으로 남자헌테 펜지 한나 받았당께 그것도 막내 사우헌테 말이여 오늘이 내 생일인디 생일상도 걸판지게 차려주고 펜지꺼지 주더라고 오래 상게 별 것을 다 받아보구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 머라고 썼냐허면 딸 낳아주셔서 고맙고 앞으로 어무이 잘모실텡게 자석처럼 생각 혀고 맘 편하게 같이 살아요 그렇게 썼더라고 우리 사우 생긴 것도 잘생겼지만 맘이 비단결이랑께 넘들은 사우 어려워 어떻게 사냐고 허지만 자석보다 더 정이가고 편하당께라 그 펜지 넘 몰래 얼매나 읽었는지 몰러 하도 펴고 접고 혀서 접힌 곳이 헤질 정도랑께 어디가든 자랑 많이 헌당게 우리 사우가 생일날 펜지 줬다고 그럼 그런 사우도 다 있는가벼잉 칭찬이 자자혀불 구만이라 오늘도 꺼내 읽고 곱게 접어 조만치 속에 넣면서 사우 감사혀 속으로 한 마디 헌당께라
433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매력적이다... 댓글:  조회:1954  추천:0  2017-10-31
       조회:536 ]                                         하남성 濟源 王屋山에서ㅡ       10월 30일, 구이저우(貴州)성 첸둥난(黔東南) 먀오족둥족자치주 단자이(丹寨)현 양우(揚武)진 파이머(排莫)촌, 먀오족 여성들이 명절날 분장을 하고 있다. 당일, 구이저우성 첸둥난 먀오족둥족자치주 단자이현 양우진 파이머촌에 먀오족의 전통적인 명절 ‘츠신절(吃新节)’을 맞이했다.      =워싱턴 백악관에서ㅡ                   10월 12일 길이 10m, 무게 10톤에 달하는 흑단(음침목) 작품 ‘실크로드’가 정저우(鄭州, 정주) 전국 상품 교역회에 등장했다.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1일] 쓰촨(四川, 사천)성 야안(雅安, 아안)시에 등장한 해당 나무 작품은 수공으로 2년 동안 조각해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속을 파낸 나무 중앙에는 고대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뚫고 이동하는 모습과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중국 상인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해당 작품은 9,999만 위안(한화 약 168억 원)으로 책정됐다. (번역: 은진호) ///출처: 중국신문사(中國新聞社)      조회:530 ]           미국 파리아 사암계곡ㅡ        
432    시작할 때 기하학적 립체도 수용할줄 알아야... 댓글:  조회:2115  추천:0  2017-10-31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1) :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973)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1) :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973)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아비뇽의 아가씨 1907년 캔버스 유채 245X235Cm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목할 작품이라고 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태가 나타난 까닭이다. 최초의 습작에는 나부들 속에 두 사람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창부의 집이었을까. 한 남자는 뱃사람이고, 다른 한 남자는 두게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두개골이 죽음의 상징인 까닭에 필경 피카소는 남녀의 영원한 육체의 연옥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차츰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 작품은 형태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인생   이 그림의 스케치에는 남자의 얼굴이 피카소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에는 피카소의 얼굴이 없어지고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바르셀로나 시대의 동료 화가이며, 1900 년 가을 피카소와 함께 파리의 땅을 최초로 밟은 사이인데, 실연한 나머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장본인이다. 이 사건 때문에 피카소는 카사헤마스를 데리고 급히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피카소는 이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배경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다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늙은 기타수   피카소의 이 시기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 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어부의 이별   노란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색 시대'의 경향인 이 작품은 짙은 모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파리의 술집 광경이나 스페인의 어느 바닷가 같은 곳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테마를 그리던 시기에서 이 작품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생략된 풍경이 쓸쓸하고 허전하여, 오히려 그것이 짙은 모성을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예술이란 고통과 슬픔에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별이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국풍의 오르가니스트   얼굴을 옆으로 하고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불거져 있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 이 늙은 손풍금 타는 사람에게서 젊은 피카소가 매혹당했던 카다르니야의 로마네스크 미술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목조각 같은 노인과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년과의 대조를 준 것은 보는 이의 가슴에 무엇인가 여운을 준다. 손풍금을 중심으로 하여 노인과 소년을 삼각형으로 배치한 구도는 화면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하고 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에 퇴색한 것 같은 색조이면서 밝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 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가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푸른 옷의 여인   1901년 마드리드에 머문 피카소는 일련의 부인상을 연작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모자를 쓴 무용수 같은 여인들로서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콤포지션도 대담 하지만 묘사력도 능란한 작품이다. 피카소의 부친이 피카소에게 인물을 묘사할 때는 특히 손을 정확히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도 왼쪽 손의 묘사가 뛰어난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때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인물이 주제로 되어 있는 데, 그 많은 인물 작품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손의 멋진 묘사력이다. 90도 각도로 뻗은 팔과 양산을 잡은 왼손만 보아도 이 모델의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아비뇽의 아가씨   에 직접적으로 힌트를 준 것은 이 벨리아 조각과 흑인 조각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는 의 오른 쪽 여인의 얼굴 습작이며 다분히 흑인 조각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가면을 쓴 여인으로서 가면 뒤 쪽의 목 처리로 보아서 가면에 숨겨진 머리는 가면보다, 훨씬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왜 의 오른쪽 두 여인의 코를 그렇게 과장해서 그렸으며, 또 삐뚤게 했을까. 피카소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의 삐뚤어진 코를 보고 그들의 코는 삐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근위기병과 나부     피카소의 최근작에는 이로우터메니아(erotomania)화한 작품이 많고 이것도 그중의 하나다. 나부의 얼굴이 이전과 같이 정면상과 프로필의 융합이면서도 아무래도 정면상으로 살아있지 않은 흠이 보인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피카소가 감상자를 향하여. "두 개의 유방 말입니까?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감상자에게 영합이라고 하는 것인지 색채도 품격을 다 잃어버리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피카소의 성적 절망으로까지 논하기도 하나, 아무튼 지난 날의 그토록 번쩍이던 피카소는 보이지 않고, 낙서같이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두 형제   '분홍색 시대'는 1905년에 시작되어 주조색은 오크로 루즈이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제작되었으며 또다른 라는 작품과 쌍을 이루고 있다. 소년의 몸은 언뜻 보기에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같이도 보이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실성이 있고 따뜻한 색이 더욱 즐겁다. 피카소가 이 시기에 있어서는 처음 모델을 정확하게 묘사한 다음 점차적으로 자기화한 제작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초상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소년을 표현하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피카소가 오늘날에 있어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된 그 뿌리는 '피카소화'라는 조형적 역량일 것이다.         앉은 나부   앉은 나부로 되어 있지만 의자의 형태도 분명치 않아, 실제로는 여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볼륨 표현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는 까닭에 남자로도 보여진다. 이 작품은 전후에 제작된 일련의 나부상으로서 단순 명쾌한 화면이 특징이다. "회화는 나 보다 힘이 세다. 회화는 생각하는 대로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경우 회화란 별 수 없이 형태인데,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형태가 피카소를 끌고 다니는 것만 같다.         긴 머리의 아가씨   이 작품이 제작된 1906년은 피카소의 필생의 걸작 이 시작된 해이며, 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벨리아 조각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때부터 '청색 시대' 때의 섬세한 감각을 떠나, 중량 감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육체 표현을 했다. 청색 시대가 도회적 세련된 감각이라면, 프리미티브 (primitive)한 태양에 그을린 건강한 '흑인 조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와 '흑인 조각 시대'는 같은 시기여서 이때 묘사된 여인의 육체는 조형적으로 씩씩하고, 그 힘참 속에 원시의 생명력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지극히 조각적이라는 점이다. 평면 구성이라기보다는 입체 구성이며, 여기에서 큐비즘의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배와 과일 그릇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가트루드 스타인은 스페인과 큐비즘의 내적인 관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의 건물은 언제나 풍경의 선을 단절시키고 있다. 인간의 영위 또한 여기에서는 풍경과 조화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풍경과 적대 관계이다. 바로 이 점에 큐비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지." 큐비즘이 세 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스타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의 정물을 보다 의식적으로 입체화한 것이니까. 큐비즘, 그것은 형태가 화면을 지 배한다. 그것은 자립한 형태, 독자의 묘미이며 허구의 세계이다.           목기 위의 정물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정확한 '자연주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앵그르풍의 그림이나, 종합적 큐비즘의 작품들을 같이 제작하고 있어서, 이러한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을 제작했다 해서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1920년대 초 '신고전주의 시대'의 풍만한 육체 묘사와 병행하여, 큐비즘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기 위의 정물을 매우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에 있어서는 흐려 뜰이고 있다. 피카소의 인물화에 있어서 얼굴은 정밀하게 묘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충 끝맺고 마는 것과도 같다. 피카소는 골고루 다 그리면 오히려 포인트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물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하여 배경을 단순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는 데 시인 쟝 콕도, 아폴리네르등을 초청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있다.         마 졸리   우리들은 어떤 물체를 한눈에 모든 각도에서 볼 수는 없으나, 큐비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들을 상호 침투하면서 공간을 전개하며, 정지하지 않고 조용히 호흡하는 것은 분석적 큐비즘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들어서면 화면은 또다시 조용해진다. 다시 평면적인 데로 복귀하는 것이다. 색채의 수도 많아지며, 물론 그 색채란 화려하지 않고 친숙하며 소박한 분위기로 감싸여 진다. 시인 폴 엘뤼아르는 큐비즘에 있어서 "색이란 공간에서 낳아진다기보다는 '색'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라고 했다. 분석적 큐비즘 다음에 제작된 비교적 차분한 작품이다.         앉아 있는 피에로   1917년 쟝 콕도의 무용극 '파라드'의 무대 장치와의 상을 맡아 피카소는 무대 위의 인물들에 크게 흥미를 지녔다. 이 발레의 무대 막은 비현실적인 강력한 색채로써 만들어졌다. 그와 같이 이 작품도 노랑, 빨강, 주홍과 같은 소리 높은 색채들이 피에로의 하얀 의상에 흩어져,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 '청색 시대' 때도 피에로를 즐겨 그렸으나, 대상이 같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는 판이한 것을 보여 준다. 청색 시대의 피에로가 현실이 모습이며 그래서 공감을 더했다면, 는 실인생과 무대의 상이한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에로는 인형일 뿐이다.         소의 두개골   피카소는 1946년 12월 이렇게 말했다. '밤의 빛의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자연 광선보다는 더 좋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도 밤에 한 번 찾아와 주기 바란다.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광선, 내 그림을 둘러싸고, 뒤 벽에 비치는 깊은 그늘, 이 빛을 당신은 내가 거의 밤에 제작하는 정물화에서 발견할 것이다. "전쟁 중에 피카소는 인간이나 두개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점이다. 또 4월 16일에는 피가 흐르는 두개골, 새하얗게 바랜 염소의 두개골을 흑백의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하였다. 흑과 백, 낮에 대한 밤, 폭력에는 결코 굴할 수 없는 피카소의 저변이 있다.         앉은 아를캥   이 그림의 모델은 피카소의 벗인 화가 살바드이다. 피카소는 그를 아를캥으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한결같이 초상화로서의 성향이 짙고, 차분히 가라앉은 인물화였다. 아를캥은 원래 이탈리아 희극의 어릿광대 역이나, 여기에서는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엄숙한 분위기마저 보인다. 피카소의 연구가들은 살바드의 정면상 아를캥과 독일 르네상스의 화가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 와 비교를 하고 있으나, 오히려 앵그르의 초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꿈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 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 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아래의 나부   1955년의 이나, 57년의 의 연작에서 어느 것이든 실내가 무대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부를 풍경 속에 배치하고 있다. 나부의 육체의 선은 배경의 언덕의 선과 하나로 되어 있다. 소나무 가지는 화면 오른쪽 앞에 푸른 그늘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무는 대지 그것인 양 엷은 갈색이며, 피카소의 저의는 '대지=어머니' 라는 것으로만 보인다. 피카소 이때 나이는 78세였다.         앉은 여인   1920년이래 이따금 피카소는 남 프랑스의 앙티브 지방들을 들르고 있었다. "나는 예언자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일찍이 내가 파리에서 그리던 그 모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일찍이 내것이었다고 말해야겠다."라고 피카소는 말 했다. 피카소의 독특한 조각적인 형태를 말하여 지중해적인 인간의 특색이라고도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은 지중해의 여신이며, 푸른 배경,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상, 피카소에 있어서는 그림이란 우상에 가깝다.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를 거쳐, 이어지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아침의 곡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주하는 주악을 말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연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 상으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화가의 초상         화가와 모델         여인과 개         피아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은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화가에게 있어서는 영원 주제의 하나에 틀림 없다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는 나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사람이 단순하게 나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화가에게는 끝이 없다. 오늘은 작업이 끝났으니, 내일은 휴일이라는 것이 화가에게는 없다. 가령 화가가 제작을 중지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가는 화면 속에 '끝'이라는 것을 써넣을 수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즐기면서 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지중해의 풍경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우는 여인'은 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납골당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적한 톤은 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파이프를 문 사나이   피카소는 프랑스와즈 지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방은 시메트리가 아니다. 무엇이나 그러하다. 여성은 누구나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유방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현실적으로는 시메트리로 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회화에서는 똑같이 그려서는 안된다." 피카소에 의하면 두 개의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하나의 팔, 하나의 유방이 나타내는 제스처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얼굴, 피카소의 인체는 남녀 구별 없이 온갖 제스처의 집적이다. 그러면 피카소가 그린 인간은 산산조각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형태는 연쇄 반응과 같이 밸런스를 허물어뜨리고, 균형을 만드는 것으로, 이 작품의 경우에서는 눈, 코 와 파이프와의 관계이다.         실베트의 초상   실베트는 피카소가 리베라에서 알게 된 젊은 아가씨로서 그는 12점의 연작을 만들었다. 실베트는 금발의 북 유럽계 미인으로서 피카소는 그녀를 회색의 단조로운 색조로 처리하였으며, 이것이 연작의 최대 매력이기도 하다. 연작 속에는 실베트를 입체파 시대와 같은 기하학적인 포름으로 환원하여, 그녀의 얼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품격도 있고 사실적인 화면으로서, 피카소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 소녀의 머리형에 매혹 당한 듯하다. 피카소의 인물화로서는 새로운 양식이기도 하다. '포니 델'이라는 유행하던 머리형에 착안하는 등, 과연 피카소 다운 인기의 비밀이 있다.         궁녀들 (벨라스케즈에 의한)   벨라스케즈의 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의 한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만으로 처리하였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431    시도 "4분의 3"의 립상이 좋을 듯... 댓글:  조회:2333  추천:0  2017-10-25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6) :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이상미(理想美)를 뒤엎은 생활속의 미       버찌의 少年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27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에는 지금까지의 회화 수업 역정(繪畵修業歷程)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 '마네 초기의 경신작'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인 알렉산드르 소년은 마네의 작업장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붓도 빨아주는 사동이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쁘장한 미소년의 사체를 보고 마네는 겁에 질려 작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여기서 목을 매었느냐?'고 무심결에 묻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대답하여 마네는 대경실색, 다른 아틀리에로 옮겼다는 일화도 있다.           스페인 발레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 왕립 극장 무용단의 인기가 대단한데, 한번 구경해봐.' 마네는 1862년 8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무려 80일 동안 롱런한 이 '세빌리아의 꽃' 공연을 보고 감동, 이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특별히 교섭, 공연이 없는 3일 동안 단원들이 포즈를 취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마네는 친구의 넓은 아틀리에를 빌려 스케치, 이 해 늦게 이 그림을 유채로 완성시켰다. 마네의 열성도 대단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마네를 위해 사흘씩이나 포즈를 취해 준 성의도 무던하다. 친해지기 쉬운 정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렸는데 간결, 자유로운 필촉의 리듬이 발레의 리듬과 잘 어울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   1858년에 제작을 개시하여 다음해 관전(官展)에 낸 마네 최초의 살롱 출품작. 57년 에 만 들라크로아만이 찬표를 던졌고 나머지 심사 위원들은 모두 부표를 던진 불운한 대작이다. 마네와 아는 체하고 지내는 주정뱅이 불량아를 아틀리에로 모셔(?)와 강한 술에 취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를 그린 것인데, 모델의 발, 무릎, 얼굴 등 몸가짐이 어쩐지 딱딱하게 꾸민 것 같으나, 정면에서 비친 광(光)이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를 낳고, 버려진 상징적인 술병과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과 모자, 그리고 술잔 등이 대도시의 퇴폐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황폐를 화제(畵題)로 구한 것은 '惡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와의 교분으로 미루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다.         기타 演奏者   마네의 28세 때의 작품, 다음해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교과서식 전통 도식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명암 처리, 신선한 색조의 대비로 창출시킨 살아 있는 듯한 화면 구성 등 그의 재능과 예술적 특질이 잘 나타나 있는 문제작이다. 대담한 필촉과 사실주의적인 색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 등신대의 인물상에서 기타 반주에 맞춘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오는 듯하며, 밝은 빛과 어두운 배면과 오른쪽의 붉은 병과는 서로 대비되면서 이곳이 무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인물의 배치, 묘법 등에서 스페인 취미가 엿보이나, 생기 있고 발랄한 모티브의 포착, 강렬하면서도 평면적인 마티에르에 이미 마네의 독자성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특질은 3년 후의 ,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롤라 드 발렌스   '스페인 발레'에 등장한 몰라라는 발레리나를 그린 것인데 우측(右側)으로 무대와 객석이 보인다. 스커트의 적(赤), 흑, 황, 녹의 대담한 채색법은 형태나 음영(陰影)과의 유기적인 연관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던 전통적인 채색법에의 반역으로, 당시 평론가들에 의해 '잡탕 칠'이란 혹평을 받았다. 스커트의 색깔과는 대조적으로, 롤라의 팔과 다리의 상아색(象牙色)은 배면의 불꽃 같은 색깔과 스커트의 눈부신 색깔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부는 위치에 따라 신비로울 정도의 미묘한 색으로 변한다. 쿠르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살 붙임'도 간과할 수 없다. 보들레르는 롤라의 야성적인 표정, 대담한 채색으로 생긴 선려한 인상을 '4행시'로 써서 그의 유명한 '惡의 꽃'에 수록했다.         테이블 위의 과일   과일, 나이프, 컵 등 여러 마티에르의 상호간의 밸런스, 이런 사물들의 구성에 견고한 토대를 부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과 배경의 절단 방법 등이 마네의 스승인 샤르당(Chardin)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샤르댕은 면밀하고 무게있는 필치로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고, 그의 정물화는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마네는 수많은 풍경 화와 인물을 그렸으나, 이에 비해 정물화는 극히 적은 편이다. 1846년에서 66년 사이에 그린 10여 점의 정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는 샤르댕의 를 모사한 것처럼 닮았다. 마네는 인물화에도 레몬, 컵, 포도 등을 장식물로 등장시켜 때로는 주제인 인물 이상으로 집요하게 묘사, 화면 전체를 대위법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데, 이 그림에서는 '견고한 구성'을 직감할 수 있다.         거리의 악사         기구하는 修道士   한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기구(祈求)하고 있다. 바닥에 있는 두개골은 수도사의 경건한 얼굴표정과 대비(對比)되어 기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한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화면 전체가 암갈색(暗褐色)의 색조로 이루어져 표현주의풍(風)의 강한 감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순수한 종교화(宗敎畵)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마네는 평생을 통해서 몇 점밖에 안 되는 종교화를 그렸고, 또한 수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파(派)나 네덜란드파의 선인(先人)들의 작품을 모사한 습작조차 별로 없는데, 이 작품 역시 어떠한 동기에서 그렸는지, 또 언제 완성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린 마네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867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건물, 인물, 거리, 동물 등의 고유색(固有色)이 한낮의 햇볕을 받아 검푸르게 변한색채의 매치(match)를 취급하여 색채 상호간의 탄력성 있는 관계를 회화적 차원에서 소화시킨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소년은 에서 언급된 아들 레옹 코에라이고, 높이 떠 있는 기구는 사진작가 나다르가 타고 파리 상공을 공중 촬영한 기구인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는 여유 있는 시민들의 동세(動勢)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른바 '현실적인 일상성'이란 마네의 묘화 태도(描畵態度)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나폴레옹 3세가 1867년에 마련한 만국 박람회를 능가한 대(大)박람회를 대작으로 그린 마네의 시대 감각을 이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鬪牛   1865년 의 악평에 번민한 나머지, 스페인으로 피신(?)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즈와 고야의 그림에 감명을 받고, 투우(鬪牛)에도 열중했다.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스페인의 추억들을 캔버스에 옮겼는데 이 그림도 그때의 것이다. 경쾌하고 거친 필촉 등 즉흥적인 묘사로 보이나, 드높은 하늘, 햇빛을 듬뿍 받은 밝은 대지, 소의 검은 고체(固?),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말이 적절히 대비되고, 또한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새빨간 물레타와 긴 칼 등이 푸른 하늘색과 해조(諧調)를 이루어 투우장의 속성인 잔혹성(殘酷性)과 시원한 맛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마네는 당시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 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표현한 듯하다.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   마네의 전생애를 통한 친구이며 유언 작성자인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이다. 뒤러가 인상주의 그림의 철저한 옹호자이며, 세계적인 미술품 수장 가라는 점을 감안, '사려 깊은 지성', '상류 사회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 화면을 짙은 회색으로 처리하고 손의 위치로 동세(動勢)를 표현했다. 이 작품도 에밀 졸라의 경우처럼 우정어린 정성이 포인트이다. 1865년 8월, 스페인 마드리의 한 호텔에서의, 마네와 뒤러의 만남에는 재미있는 삽화도 전해지고 있다. 마네가 정성을 들여 이 그림을 끝내자 뒤러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의 내용보다 이름을 보고 모으는 경향이 있으니 당신 사인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네는 분명하게 서명했다. 요즘 우리 나라의 비슷한 풍조는 백 년 전의 파리에서 따온 것일까?         자카리 아스트륙의 초상   화면 우측은 정면에서 본 초상화이고, 화면 좌측은 거울에 비친 실내(室內)이다. 벨라스케즈의 대표작 에서처럼, 마네도 이따금 거울의 효과를 그의 그림에 원용(援用)했는데, 화가들이 전통적인 대상을 그릴 때 거울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인 특색으로 지적되고 있다. 초상화 부분을 검정색으로, 거울에 비친 실내를 올리브색으로 메운 것은 이 두 색을 대비시켜 주제 인물(主題人物)의 내면적인 성격과 지성적인 분위기를 표출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문제작 에서처럼, 베네치아파(派) 회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티지아노의 작품 와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퍽 재미있을 것이다. 마네의 성실한 지지자였고 비평가, 조각가, 작곡가, 시인인 아스트륙을 정성들여 그렸는데, 아스트륙 부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묵었던 작품이다.           인사하는 투우사     1865년 스페인을 여행했던 마네는 귀국 후 수 점의 '투우' 시리즈를 발표했다. 과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인물이 '배경이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구성이다. 마네는 투우사의 모험적인 성격보다도, 화려한 의상 등 엑조틱(exotic)한 요소에 이끌려 이 시리즈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친구인 테오도르 뒤러에게 1천2백 프랑에 팔았는데, 30년 후인 1894년의 경매에서 뒤랑 뤼엘 화랑이 10배 인 1만5백 프랑에 낙찰시켰다. 모자를 벗어 들고 열광하는 관중에게 인사하는 투우사의 영웅적인 표정, 이 표정을 살아있는 눈망울과 균형 잡힌 몸매,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게 강조해주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 대해 이설이 있었으나, 1866년에 그린 대작임이 확인되었다.         피리 부는 소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에밀 졸라의 초상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졸라가 여덟 번이나 와서 포즈를 취한 곳은 마네의 아틀리에인데 도,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벽에는 그의 작품 의 사진과 벨라스 케즈의 모사도(模寫宜),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가 걸려 있어, 마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를 실물 크기로, 상의(上衣)를 검정 단색으로 처리, 인품을 강조했는데 살롱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발코니   발코니의 네 남녀,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1869년의 살롱에 출품했는데 시에스노는 '일반인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백, 청, 흑의 색조가 아름답고, 특히 청색의 난간이 툭 튀어나와 발코니임을 입증시켰다. 마네는 불로뉴에 체제중 발코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 장면의 역광 효과(逆光效 果)에 흥미를 느껴 모티브로 택했는데, 모델은 머리에 꽃 장식을 꽂고 녹색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 친구이며, 남자는 카페 게르보아의 친구 화가인 기르메, 어둠 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아틀리에에서의 식사   좋아하는 모티브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마네의 고심작이다. 그림의 왼쪽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마네 부인이 들고 있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 가지 메뉴가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 위해 16번이나 습작을 그렸을 정도이다. 노랑, 검정, 하얀 색과 엷은 푸르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陰影)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아틀리에의 격조를 높이는 한편,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감돌도록 표출시켰다. 마네는 1868년 여름 불로뉴에서의 스케치를 토대로 파리에서 이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전면의 소년은 그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부인, 식탁에 앉은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모델 에바는 파리 명문의 딸이다. 이 여인은 나중에 유명한 판화가 게라르와 결혼, 규수 화가로 활약한다. 당시 프랑스 문예가 협회 회장이었던 소설가 엠마뮤엘 곤잘레스의 딸인 에바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1869년 2월부터 마네의 아틀리에의 내제자 (內弟子)로 들어간다. 이 그림은 에바가 '40회 이상 포즈를 취했다.'고 불평한 난 산 중의 난산 작품인데, 은백색의 복장, 백장미, 깨끗한 살결, 그림 속의 하얀 꽃 등 백색에 의한 바리에이션이 아름다우며, 이러한 백색의 반복을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 검은 띠 등으로 조여 매 화면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켰다. 1869년 3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살롱 마감일인 3월 12일에야 완성시킨 이 작품은 살롱에서 악의에 찬 혹평을 받았으며, 이후 에바에게 기증되었다.         독서   마네 부인이 그의 아파트에서, 책을 읽어 주는 아들의 목소리에 만족해하고 있는 행복한 정경이다. 살갗이 비치는 하얀 옷, 커튼, 의자의 커버 등 백색을 주조로 한 그림으로 화면 전체에 전개되는 백색의 다양한 반영(反映)이 잔잔한 물결처럼 화사하고 음악적이다. 마네는 이 여인과 10년 이상 동거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친구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에 붙였고, 부친이 사망한 3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그림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레옹 코에라는 마네가 죽은 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동생으로 행세, 진짜 마네의 아들인지, 부인의 동생인지, 또 딴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부 자식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네는 1858년에서 80년까지 이 부인을 여러 번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로뉴 숲의 競馬   마네는 1872년 여름 네덜란드의 처가를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와, 스포츠맨이며 수집가인 발레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려, 당시 파격적인 3천 프랑을 받았다. 질주하는 말의 지체가 어떤 모양인가를 연구해서 그린 드가의 경마와는 달리, 마네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말의 모습을 거의 일직선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질주하는 적토마의 기수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모습도 좀 이상스럽다는 게 평론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전경과 원경과의 색채 대비는 훌륭하며, 특히 엷은 살색으로 하늘을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마네는 영국의 '경마 판화'를 참고로 해서 질주하는 말의 모습을 그렸고, 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실토했다 한다.         아르쟝뚜유   외광 표현(外光表現)을 시도한 작품, 1875년의 살롱에 출품했으나 세느강의 물빛이 너무 푸르고 원근법이 무시되었다는 악평을 받았다. 새로운, 밝은 회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던 마네는 1874년 여름 아르쟝뚜유에 있는 모네의 작업실을 찾아 모네와 함께 옥외 제작(屋外製作)을 했는데, 이 그림은 그 때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차분한 필촉으로 세분화된 분할(分割), 색채와 빛의 반짝임 등을 빠짐없이 포착하려고 노력 한 흔적이 보인다. 마네는 1874년 봄에 열린 제 1회 인상파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화우들, 특히 모네의 열성적인 제작 태도에 이끌려 이 그림을 정성껏 그려 살롱의 심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네는 한 평론가가 물이 푸르게 보이는 때가 있으면 푸르게 그려도 좋다는 평을 받고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게임   인상파풍(風)의 필촉을 느끼게 하는 화면이지만, 색채가 프리즘 적으로 분해(分解) 되어 있지는 않다. 그림 속의 인물들도 어느 우연한 순간을 스케치한 것 같이 보이나 넓은 공간과 원근(遠近)을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이며, 따라서 화면 전체가 퍽 안정감 있게 보인다. 파리에 있는 화우 스티반스의 넓은 뜰에서 크로켓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스티반스와 그의 모델, 마네의 옛 친구 등 우정에 넘치는 모임이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게임 장면을 포착, 하늘은 보이지 않고 파랑, 노랑, 흰색이 주조를 이루어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12년 베른의 헌 옷집에서 배우 도리 봐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이색적인 모티브이다.         세느강의 두 욕녀   이 주제는 그의 친구 르노와르에게는 흔한 것이지만 마네에게는 진귀한 것이다. 하지만 르노와르와는 달리 배경을 짙은 녹색으로 입혀 놓았기 때문에 욕녀의 크림빛 육체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목욕 후의 상쾌한 느낌 같은 것이 감득되는 듯도 하다. 이 그림은 욕녀들의 피부 빛깔에 무척 신경을 쓴 듯한데, 크림 계(系) 빛깔의 미묘한 전조(轉調)에 의해서 촉감성리라든가, 또는 양감(量感)이 물씬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법은 르네상스 이래의 서양 회화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3차원적인 양체(量?)나 공간의 표현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마네는 처음에는 욕녀를 그릴 때 갈색의 담채(淡彩)로 소묘적(素描的)인 표현을 즐겨 왔었다.         푸른 긴 椅子에 앉은 마네 부인   파스텔화(畵)가 지닌 표현력에 마네가 어느 정도 정통해 있었는가를 전해 주는 작품이다. 백색, 회색, 청색, 남색의 보드라운 뉘앙스와 상호간의 메아리가 무지개처럼 아름다워, 마네 부인을 선녀처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양식적(樣式的) 견지에서 1878년도에 제작했다는 주장과 마네 부인의 모자, 의상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74년 경에 그렸다는 주장이 맞서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이 그림을 최초로 입수한 사람은 드가 인데, 드가는 1870년대 초반부터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물감의 효과와 매력을 여러 차례 설명, 파스텔화를 그리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면 하단에 보이는 'S. Manet'란 연필 사인은 마네 사망 후에 미망인이 써 넣은 것이다.         나나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폐 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커다란 등받침, 침대로도 쓸 수 있는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을 한 중년 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배면에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학(鶴) 그림이 보인다. 부도덕(不道德)을 주제로 했다는 이유로 거부된 작품이다. 모델은 은퇴한 여우(女優) 앙리에트 오제르, 발랄한 젊음은 사라졌으나 당시의 세도가 오렌지 공(公)의 정부였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와 동명(同名)인 것으로 미루어 이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취한 여인     만취한 정신 상태를 상징한 듯 옷도 피부도 분위기도 모두 핑크색이다. 무엇 때문에, 얼마나 마셨는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앉아 있는 폼이 허탈 상태에 가깝다. 그러나, 술꾼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포즈다. 오른손 등으로 턱을 괴고, 왼손가락 엔 담배를 끼웠으며 그 사이에 가득 찬 술잔이 놓여 있다. 마네는 만취한 이 여인을 처절하리만큼 외로운 상(象)으로 부각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보였다. 마네는 당시의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위해 카페, 비어 홀 등에 자주 출입했고, 이 술집에서 창녀, 취녀, 취남, 무희, 악사, 여종업원을 직접 보았다. 이러한 시각 체험(體驗)은 시대 감정을 묘파한 많은 걸작들을 낳았는데, 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카페에서   이 그림과 은 한 장의 그림으로 구상되어 제작되다가 완성 단계 때 2점의 작품으로 나뉘어 그려졌다. 같은 모티브인 마네의 초기 작품 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판이하다. 3각형의 대리석 테이블에 앉은 3명의 남녀가 각각 세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이 비어 홀의 흥청대는 분위기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표정이다. 4명의 상반신(上半身)만으로 메운 특이한 화면 구성은 사진 작품에서 원용한 구도로 보이며, 후면의 포스터와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비좁은 비어 홀의 성업(盛業)이 당시 파리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남자는 에바 곤잘레스와 약혼한 판화 작가인 앙리 게라르.         비어 홀의 女從業員   마네는 46, 7세 때 자연주의적(自然主義 的)인 테마를 취급한 8점의 유채화와 카바레, 카페 등의 수많은 데생을 남겼다. 이 그림도 그 때의 작품인데, 당초는 와 함께 한 점의 대작으로 그리다가 완성 단계에서 2점의 작품으로 쪼갰다. 후면인 무대에는 한창 춤을 추는 무용수와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악사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맥주를 나르는 여종업원의 시선과 술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념에 잠긴 남자의 시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실내 조명(室內照明)을 받아 붉은 색으로 변한 얼굴들과 홀을 메운 손님들이 지껄이는 소리, 음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듯한 흥겨운 분위기와 음악적인 효과가 엿보인다. 마네와 그의 친구들도 이 술집에서 자주 만났고, 또한 화상(畵想)을 얻었다 한다.         가슴을 내놓은 블론드 아가씨   마네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서, 그가 곧잘 쓰는 크림 빛 아닌 볼그스레한 피부의 아가씨는 한결 고혹적이다. 대담한 필촉(筆?)으로 사뭇 조형적으로 포착한 이 그림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가볍게 표상하면서도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터치를 도처에 가미시키고 있다. 살결 빛깔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 여인은 마치 진주처럼 빛나 있고, 그 광휘는 담록(淡綠)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한결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빛 속에 녹아 내린 핑크와 백색의 육체는 귀스타브 제프 로아의 말을 빌린다면,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육체의 아름다운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과 과실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모델 이름은 마그리트이다.       스케이팅 링크에서   마네가 자주 다닌 스케이팅 링크에서 잡은 현대 생활의 에피소드. 꽃다발을 든 전면의 여인은 작품 의 모델 앙이에트 오제르이고, 우측(右側)의 여인은 그녀와 자매간인 빅토리느인데, 이 자매는 밤의 환락가에서 남성들의 인기를 양분했던 고급 창부(?)였다. 이 작품의 특질은, 앙리에트의 정력적이고 요염한 표정 외에 백색과 흑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그녀의 옷과 모자, 안색(顔色)에서 찾아 낸 대담한 하모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반인상파적인 흑색의 매력은 그가 카페 게르보아의 젊은 화가들과 끝내 동조하지 않은 이유도 된다. 마네는 파리의 환락가를 연작으로 그렸다. 검은 복장을 기조로 한 군중의 무명성(無名性) 속에 색채와 개성을 지닌 빛나는 존재로서의 여성, 문자 그대로 대중의 '히어로'로서의 현대 여성을 그렸다는데 파리의 화가 '마네의 영광이 있다.         조지 무어의 초상   조지 무어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 미술 평론가이며, 술을 좋아하는 천재(?)이자 방랑자이다. 또한 랭보, 뒤랑티 등 상징파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낸 '몽마르트르의 영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네가 자주 다니는 카페의 단골이었으며, 마네와도 자주 어울렸다. 마네는 유채와 파스텔로 만든 무어의 초상화 2점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시기에 마네는 극히 적은 2,3점의 스케치풍의 인물화를 경쾌한 필촉으로 그렸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에 속하는 것이며, 폭음가인 무어의 취생 몽사하는 몽롱한 모습을 리얼하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지쳐 빠진 중로(中老)의 묵객(墨客), 깡마른 몸집, 전혀 패기라곤 찾을 곳 없는 파리의 방랑객을 연상시키는 멋진 분위기다.         보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스타킹을 신는 여인   마네나 드가가 끝내 인상파에 동조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에 여체(女?)가 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육감적인 유방과 풍만한 육체는 한마디로 관능의 화신이다. 마네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선(線), 그 선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화가이다. 1878년 파리는 만국 박람회로 떠들썩했고, 마네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 파티를 열었는데 이들은 자작시에 자작곡을 붙여 소리 높이 합창했다. 이 무렵 마네는 소품을 그리는 기분으로 이 그림을 제작했는데, 화면 전체가 막 피어나는 꽃처럼 청색과 자색으로 꾸며졌고, 이 감미로운 분위기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여체가 스커트를 걷어올린 채 스타킹의 끈을 매고 있다. 우아한 곡선, 돋보이는 유방 등이 기조색(基調色)의 보호를 받아 비속하지 않은 관능미를 표출시킨 이색적인 작품이다.         생 라자르驛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배에서   와 함께 1874년에 옥외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처럼 섬세한 분할, 색채와 빛의 반짝 임보다는 외기(外氣)의 감각을 색조로써 표현하려고 한 그림이다. 청, 백색을 주조로 황, 흑색에 악센트를 준 시원스러움이 툭 트인 잔잔한 수면과 해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미있는 구도인데, 배의 후미(後尾)만을 남긴 대담한 절단이나, 중앙에 흰옷의 남자를 앉히고 좌우에는 저쪽을 응시하는 여인과 돛대의 한 토막만으로 균형을 잡은 것 등이 인상적이다. 단 두 사람만의 세계, 그것도 방해꾼이 없는 끝없는 바다 위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마네는 헤아릴 수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회화적 차원에서 만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얀 보우를 맨 이자벨   마네는 1870년대 말에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화를 6점 그렸는데 이 그림을 포함한 5점은 암스테르담가(街)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했다. 이자벨 양은 대보석상의 딸이며, 출판업을 하는 미술품 수장가 샤르팡티에의 의매(義妹)로, 마네는 이 모델이 마음에 들었던지 1점의 좌상을 뺀 5점의 초상화는 모두 무릎 근처까지 그린 4분의 3입상이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 로 젊은 아가씨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쫓은 듯한 얼굴의 표현에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의복과 손등은 경쾌하고 빠른 필촉으로 단숨에 그려 치운 흔적이 보인다. 동양적인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자벨의 얼굴 윤곽과 눈, 코, 입은 물론 안면(顔面)의 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쓴 수작으로 알려졌다.        
430    예술창작은 자연과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댓글:  조회:2332  추천:0  2017-10-24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5) :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절규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면서 또한 생활과 심리학적인 발전의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한 중에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의외적이라기보다 상호 관계에 의한 다이내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는 아아르 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낸다.         절규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 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채택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마돈나   '여자의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죽음과 동등시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듯이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란 수태(受胎)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바탕을 발전시킨 모티브가 이다.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마돈나 상(像)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래 부분 구석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 분방한 머리카락의 곡선의 의미, 여기에서 사랑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하여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 '사랑'의 연작은 확대되어 '이것은 사랑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평생 다루었다.         마돈나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연작, , , ,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였다.         그랑 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 때 개인전을 방문한 입센의 지지와 격려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내게는 매우 즐겁군, 나를 믿게. 사태는 내 편을 든 것과 같이 틀림없이 자네 편을 들게 될거야. 적이 많을수록 친구도 많은 법이라네.'하고 입센은 격려를 하여 주었는데, 이 때 뭉크의 마음에 강한 용기를 갖게 하였다. 전체의 구성이 불안정한 어지러움을 특성있게 주입시켜 주고 있다. 석판화 작품에서는 뭉크의 섬세한 소묘의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춘기   뭉크는 소녀의 모습을 통하여 성(性)에 눈뜬 청춘기의 첫 반응의 특징인 성적인 자기 암시와 또 한편으로는 움츠러드는 애틋하면서도 청순한 사춘기 소녀를 표현하려 했다. 이 모티브는 뭉크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한 작품에서 선택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유화로 처음 제작한 것은 1886년인데, 1890년 공교롭게도 불에 타 없어지므로 해서 다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뭉크의 여성 초상화나 또 일반적인 여성을 표현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내면을 감추려는 듯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 작품에서 표현되어진 소녀는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강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진 내면 세계를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과 불안을 상징한 듯한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면서도 특징적인 것 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입맞춤   이 주제는 목판화, 유화 등에서도 잘 표현되어지고 있기는 하나, 동판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선에 의한 담백한 효과를 특징있게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향한 눈과 마음은 상식성을 벗어난 인간화된 깊은 존재의 엄숙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창가에서 밝은 빛을 받으며 애무하고 있는 나체상은 매우 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기법을 통하여 추구한 가운데 각각 다른 개성적인 면을 개척한 영역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두 연인이 포옹하고 있는 상황은 에로틱한 장르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에로틱한 행동에서 개별성을 제거한 상태로 변화시켜 양성의 만남의 보편적 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양한 판법에 의한 기법으로 드라이포인트, 에칭, 애쿼틴트 등을 결합한 혼합 방법에 의한 표현 효과를 갖고 있다.         입맞춤   뭉크의 작품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 항시 비롯되었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개인적 체험에 의해 채색과 내용으로서 표현되어졌다. 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한몸이 되어 키스를 하고 있는데, 사실적 소묘에서 시작하여 에칭, 석판화에서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간결하면서도 장식적인 나뭇결을 갖는 목판화에 결정은 최고에 이르고 있다.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모티브로 즐겨 이용되어지고 있는데, 합일화 되어진 전체 형태의 뉘앙스가 미묘한 감정을 불러주는 한편, 대상의 데포르마시옹에 의한 동감(動感)과 리듬을 생명감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배경의 불필요한 묘사를 생략하고, 고운 나무결의 자국이 인물의 효과를 돋보이게 하는데, 전체적으로 요약한 단순한 형태로서의 포착은 깊은 애정을 지니게 한다.         죽음과 소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精蟲)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原型)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 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질투 DER NEID 1896년 석판 46.5X56.5Cm 오슬로 밍크 미술관 소장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 세계를 느끼게 한다.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형태에 의한 단순한 표현은 주제를 확대시켜 주는 반면에 얼굴의 섬세한 사실성과 손, 발의 생략되어진 묘사는 상반된 조화를 강하게 느끼게 하여 준다. 주관적인 감정이 내용과 형태를 결정한다는 기조를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뭉크의 내재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병든 아이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살아 있는 인간을 그리 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뭉크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모티브도 가장 많이 선택 한 내용 중의 하나이다. 처음 작품의 모티브를 후에 다른 기법으로 변화시켜 표현하든가, 유화와 똑같은 내용으로 판화를 제작하고는 하였다. 그에게서는 그림의 다양한 양식에서 생기는 어떤 내용보다 중요시 처리되었던 것은 회화의 주제였다. 이 두 점의 석판화들은 같은 판에 잉크색을 바꾸어 찍어낸 것으로 색채의 상반된 표현 효과도 있겠으나, 그보다 특정한 모티브를 고집하고 거기에 종속되어진 속에 색을 바꾸어 찍어낸 판화로 보는 것이 의의가 있겠다. 병상에 누운 누나 소피에의 모습에서 찾아낸 강렬한 인상을 작품화 한 것으로 보여진다. 섬세한 선묘에 의한 얼굴 표정이 특색있다.         실내   뭉크는 동일한 제재를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일반 가정의 실내 풍경은 주제에 있어서나 표현 양식에 있어 특유성을 지니고 있다. 뭉크의 미술 전개 과정은 초기에는 인상 주의적인 경향과 만년에 가서는 풍경화를 대할 수 있는 약간의 주제의 변모는 있을 수 있겠으나, 전 생애를 통해서 양식의 변천은 큰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다. 맑은 색조에 의한 주관성을 지닌 빛에 대한 처리는 나중에 인상파에 매혹되어지는 관련성을 갖게 되는 암시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부친은 비정상적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뭉크가 장래 기사(技師)가 되 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뜻에 의해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화가가 되 기를 지망할 무렵 제작한 소품(小品)이다.         여자의 마스크 밑의 자화상   '나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 불행에 이길 수가 없었다.' 라고 어린 시절을 말하듯이 죽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것으로써 항시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항시 내부에는 깊은 불안 속에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의 운명적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물 배경의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한 채 간단하게 표현되어져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곧 덮칠 듯한 마스크의 상징은 압박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하여진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빨간색은 인상적이라기 보다 그의 몸 내부에 흐르고 있는 피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항시 생각하는 뜻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하면서도 암시적인 채색에 의한 집중적 표현이다.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캔버스 유채 200X228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저승에서, 자화상   생에 전체를 통해 볼 때 뭉크는 훌륭한 초상화가였으며, 항시 즐겨 다루는 그 자신으로써 일생의 대 시리즈가 되는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거친 필세에 의한 빨간 배경과 누드, 머리 부분의 강한 형태를 만든 선과 왼쪽의 검은 연기인 듯한 그림자가 대담하게 처리되어져 있는데, 명제 그대로 '저승에서'만난 인간의 실존처럼 주관성이 강하게 묘 사되어져 있다. 뭉크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 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인 우울함에 차 있는 자 신을 나타냈으며, 젊었을 때는 자유로운 형태감 추구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넘쳐 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저승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모 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의 내면적 고백으로서의 죽음의 상징화를 수용하려는 자세가 나타나고 있다.         자화상 1895년 캔버스 유채 110.5X8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소리   본래는 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 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共鳴)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 되어지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憧憬)과 고독, 불안에 차 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놀이 하 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 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병실에서의 죽음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 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본으로 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 족의 죽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無力感)이 가득 차게 톤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찾아든 흑의(黑衣)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作例)라 하겠다.           빨간 덩굴풀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 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 때에는 베를린 화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 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호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심부에서 약간 휜 듯한 수직적인 나무와 불규칙한 듯한 울타리의 직선적 효과가 중앙 건물 덩굴풀의 빨간색의 강렬함과 상호 대립을 가지면서도 공간 변화를 강하 게 주고 있다. 원근법의 강조, 불규칙한 형태 변화, 주관성에 의한 곡선 표현과,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심리 상태로 뭉크의 내면에 고조(高潮)된 심리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은 사람을 누인 베드   과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한 계열의 작품으로 여기에서도 역시 고통, 죽음, 불안에 대한 내용을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대담 한 콤포지션으로 왼쪽 상단 부분에 침대를 놓고 나머지 아래 부분은 빈 공간으로서 처리하고 실의에 찬 사람들을 오른쪽 부분으로 몰아 놓은 것이, 허탈한 공간 감과 긴장된 중압감이 대비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단조로운 색채와 강직한 형태감은 대담한 구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상징적 표현 효과를 주고 있다. 드라마틱한 모습을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둘러싼 허(虛)와 실(實), 공백과 실재(實在)의 대조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간결하면서도 생략되어진 인물의 표정과 단조로운 필세는 희화화(戱畵 化)된 것처럼 단순화되어 보이는 것이 충격있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다리 위의 소녀들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 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 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簡明)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 (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匹敵)하는 것이라 고 생각하며 중요시하였다.         다리 위의 소녀들 2 DIE MADCHEN AUF BRUCKE 1901년 캔버스 유채 136X125.5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마라의 죽음   마라는 프랑스 혁명 시대의 정치가로서 자코방 당(黨) 을 이끌고 앞장서서 지롱드 당을 공격했으나 지롱드 당에 동조한 샬로트코르데라는 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외에도 여자에 의해 배반당하는 남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는데 , 등의 일련의 내용이다. 뭉크 자신이 여자에 의해 불신과 굴욕을 겪게 되는데, 1902년 오스가르스트란드에 살고 있을 때 부유한 사업가의 딸 투라 랄손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결혼 문제로 다투던 중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뺏으려다 왼쪽 약손가락의 일부를 잃게 된다. 그 후로 여자를 악마의 화신으로 보는 습관적 이유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표출되어진 내용은 그의 심리를 적절히 묘사했다고 하겠다.         마을의 큰길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인 1905년은 뭉크가 주로 독 일에서 지낸 때로서, 그의 회화나 판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성이 강한 그림으로 대상 표현이 특이하다. 색조의 대비 관계를 중요시 처리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형성시켜 움직이는 동세는 간결한 형태면서도 힘차고 전체적인 구성은 중후함마저 느끼게 한다. 눈 이 내린 마을의 광장을 집회가 끝난 뒤인지, 아니면 축제일에 남녀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집단 행사인지, 전면에 무리지어 움직이는 오리와 대조적으로 강약의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 풍경화에 있어서 중요한 근경, 중경, 원경에 대한 공간 처리를 오리, 인물, 건물 등을 통하여 공감있게 표현했다. 뭉크에게 있어 이러한 화풍은 보기 드문 것으로써 집단이 지니는 힘에 대한 압도력을 호소하기 위한 그림이 아닐는지!         야곱슨 교수의 초상화   뭉크가 45세 되던 해, 오랜 외국 생활의 제작 활동으로 인하여 긴장, 음주 등에 의한 알콜 중독 증세가 보인다. 또 천성이기도 한 내적 갈등, 정서적 어려움, 강박관념 등은 그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고, 병원에 머물며 치료 중에도 제작 활동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작품이다.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듯이 붉은 색조에 의한 필세는 강렬한 느낌과 함께 고조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치료소에서 퇴원한 후에는 건강한 가운데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제작함과 동시, 벽화 등 다작(多作)에 들어가는 의욕적인 자세를 보인다. 야곱슨 교수의 위엄있으면서도 강직한 모습이 다른 초상화 작품에서보다 세밀하면서도 명료하게 표출되었고, 색채의 조화있는 다양한 변화에서 새로운 의지를 보는 듯하다.         멱감는 남자들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얻은 건강의 이런 약한 것도 나의 부분이며 더불어 나의 예술이 크게 그 약함의 탓이므로 나의 병을 고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뭉크의 극한적인 상황은 강인하면서도 희망찬 남성을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1907년과 1908년 여름에 뭉크가가 있었던 북 독일의 바르네뮌데에서 제작한 3장으로 된 그림) 가운데 한 가운데의 성인(成人) 부분을 나중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두 장은 과 이다. 그 당시 무질서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베르겐의 자화상   자화상을 통하여 뭉크는 생의 불안을 극복하려 하였으며 자신의 인생 시리즈로 자기 변천과 자아 의식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자화상에는 자아 그것을 그리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 이미지 표현의 진실성이 있다.' 이렇듯 엄격한 양식에 자기애적(自己愛的) 경 향과 자의식(自意識)에 찬 인물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자화상을 제작할 당시 53세로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였건만 어딘지 고독 속에 불안에 찬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 굴을 돌아보고 있는 것을 인상파 풍의 속필로 묘사하였으며, 인물 뒤에 보이는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의 거리와 집들, 널따란 광장의 선명한 색채가 대조 적인 변화를 준다. 풍경화에서 볼 수 없는 초조감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그의 정신 상태인 불안을 외적으로 투영시켜 주고 있다.         선박 풍경   단순한 색채에 의해 화면을 평면적으로 특징있게 다룬 것이 초기의 풍경에서 보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범 주에서 탈피한 이색적인 작품으로 명쾌한 감정을 준 다. 뭉크의 풍경은 거의가 공포의 요소로서의 상징으로 나타났고, 정신 세계의 풍경으로 정신적 생명을 표 현하였다. 풍경은 대개 노르웨이를 대상으로 그렸으며,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신경정신 치료를 야곱슨 교수로부터 받고 회복된 후 오슬로 피요르드 연안의 크라게뢰에 체재하면서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새로 추구할 때 제작한 것 중의 한 작품이다. 배를 만들고 있는 인부들의 동 세와 산언덕에 구축적으로 표현된 집, 나무들, 독특한 선묘와 생략되어진 색채의 담백한 효과는 새로운 조형성을 지니게 하는 세련된 작품이다.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예술 작품은 결정(結晶)같은 것이다. 결정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도 역시 영혼과 광휘(光輝)를 내뿜는 힘을 가져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정확한 외관(外 觀)의 면(面)이나 선(線)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뭉크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무렵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로서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 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청순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빨간 깔개 위에 손을 짚고, 두 다리를 편하게 뻗고 휴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붉은 색면이 강렬하다. 회화의 형식으로서의 붉은 색채가 아니라, 지향하는 욕구로서의 정신을 존재시켜 주는 독특한 형상을 느끼게 한다.           생명의 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 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 서,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 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心性)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 (思考)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 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눈 속의 빨간 집   만년에 뭉크는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1916 년 오슬로 교외의 에에켈리에 집을 사서 거기서 보내 게 되는데 사람을 피하고 사는 그의 생활은 고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평온한 생활을 찾을 수 있었으며, 고향의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으로부터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에 직면하는 자세도 갖게 된다. 뭉크가 '예술과 자연'에 대하여 쓴 글 중 '자연은 거 기서 예술이 영양을 듬뿍 섭취하는 유일하고 위대한 왕국이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마음 속의 내적인 영상, 눈의 뒤쪽의 영상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자 연과 심상(心象)이 융합된 풍경으로서 가치가 높다. 평온한 교외 풍경을 주제로 하여 투철한 표현 적 화경(畵境)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등의자(藤椅子) 곁에 선 裸婦   바르네뮌데에서 1907-8년에 쓴 글 중 '예술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다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온다. 예술은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 1929년에 에켈리에서 한 말 중 '색이나 선이나 면에 의해 재편성을 재현하는 일이 예 술이나 회화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의 표출을 항시 주장하였던 것이다.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 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 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 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 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 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병든 아이   석판화로 얼굴 부분은 이미 제작하였었는데 여기에서는 주제에 대한 확대보다 구도의 중심부분이 뭉크의 라이트 모티브였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 뭉크 가 5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하여 뭉크의 생애는 불행하게 된다. 부친의 성격은 편 벽(偏僻)하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진 성격의 소유자였고, 어머니 대신에 집안의 살림을 맡아 보살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가 14세 때 어머니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멀지 않은 죽음이 찾아올 누나 소피에의 모습과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고뇌에 차 있는 사람은 뭉크의 가정을 돌봐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 칼렌 표르스 타아드로 짐작이 간다. 누나에 대한 뭉크의 사모의 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동질의 이미지이며, 죽음에 대한 응시와 직결되는 것이다.         자화상   뭉크의 예술에 대한 지지와 평가는 만년에 가서 높아 지는데, 1912년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分離派) 대전 람회에서 세잔, 고호, 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 당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도 초대 출품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몰리 쇼에 출품, 1922년에 취리히 미술관, 1927년에는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1933년 70 세의 생일에는 대작가로서의 유럽 각지로부터 축사를 받았다. 37년 한때는 나치스에 의해 '퇴폐적인 예술' 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으나, 격동하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도 아랑곳 없이 불굴의 의지로 제작에 몰두함으로써 확실한 예술 경지를 이루었다. 파스텔로 섬세하게 소묘식으로 표현한 뭉크의 마지 막 자화상이다.         뼈가 있는 자화상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80년 미술 수업을 하 던 첫해 동안이었는데, 그 후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 뭉크에게 있어 자화상은 객관적인 사실성을 넘어 그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자 기 완성에의 도표(道標)를 이루고 있다. 석판화로 표현한 이 자화상 외에도 , , , , 등이 있는데 자기 내적 고백이나 죽음과의 갈등과 대결, 죽음의 상징화를 거쳐 생명을 조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있다. 많은 자화상들 중에서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써 아름다운 검은 바탕에 정성들여 소묘식으로 표현한 얼굴만이 나타나고 있다. 항시 죽음을 의식하고 늘 응시해 온 그에게 해골은 죽음에 대한 마음의 '내적인 영상'이었던 것이다.            
429    거꾸로 볼가ㅠ... 삐딱하게 볼가ㅠ... 댓글:  조회:2336  추천:0  2017-10-23
거꾸로, 삐딱하게 보라, 그것만이 내 세상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거꾸로 보는 그림과 숨은 그림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은 보는 관점에서 따라 그 진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거꾸로’ 보거나, ‘비틀어서’ 보면 그때까지 알던 세상과 다른 사실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순간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으로 알던 것이 진실로 뒤바뀐다. 미술작품 중에도 보는 관점, 방향, 각도에 따라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드러나는 그림들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진실다움을 추구했다. 정확한 묘사와 명확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만드는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이 진실’임을 전파했다. 그러나 16세기 마니에리스모 시대나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인식되는 형식의 그림이 등장한다. 예컨대 보던 그림을 거꾸로 보면 생각하지 못한 이미지로 변환되는 경우이다. 풍경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 형상이 다른 사물로 보이기도 한다. 특정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집중했던 틀에서 벗어나 이면에 감추어진, 혹은 상대적인 의미나 이미지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거꾸로 보기 거꾸로 보거나 돌려 보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화가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1527~93)가 있다. 이탈리아의 화가로 뛰어난 그림 솜씨 덕분에 황제(페르디난도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에게 발탁되어 궁정화가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애호가들도 재치 있는 해학과 풍자로 가득한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그림이 당대 인기를 얻었던 비결은 꽃, 동물, 어류, 과일, 채소 등 온갖 사물을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화면을 구성한데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보자. 싱그럽고 탐스러운 과일과 채소 등이 바구니와 그릇에 가득 담겨있다. 과일이나 채소들이 마치 붙어있는 듯 연결된 구성이 눈에 띈다. 자연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식탁을 풍성하게 메울만한 양이다.       그림을 한동안 감상했다면, 이번엔 두 그림을 거꾸로 보자. 그러면 생각하지 못한 형상이 나타난다. 순식간에 과일바구니와 채소 그릇이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과일과 채소를 그린 정물화 인줄 알았던 그림이 인간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가 되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독특한 구성으로 인간의 형상을 그린 아이디어가 놀랍다. 거꾸로 봐야 알 수 있는 형상을 위해서는 사전에 철저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그림을 보면 어떤 과일을 어느 위치에 어떻게 배치할까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자연사물을 의인화한 화가의 의도는 결국 단순 과일바구니나 채소그릇보다 얼굴형상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는 효과를 냈다.     아르침볼도의 이란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은빛 쟁반에 놓인 여러 고기(닭과 돼지처럼 보인다)가 쌓여있다. 만찬에 놓일 음식인 듯 고기가 쟁반이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이 그림 역시 거꾸로 보면 새로운 형상이 드러난다. 기괴한 생김새의 사내가 관람자를 쳐다보는 얼굴이 나타난다.  마치 배를 채우기 위해 육식을 탐하는 자를 비웃는 듯. 그래서일까 그림은 식욕을 떨어뜨릴 만큼 섬?하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여기에 있었다면 성공한 셈이다.         숨은 그림찾기 아르침볼도의 그림처럼 뒤집어보거나 돌려보지 않아도 하나의 그림 안에 또 다른 이미지가 있는 그림이 있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상(像)이 전혀 다른 이미지로 인식되는 그림이다. 서로 다른 퍼즐이 숨겨진 형식으로 이른바 '숨은 그림(Vexierbild)'이라 불린다. 이런 형식의 그림은 하나의 사물로 다른 사물을 떠올리게 하는 변환 효과로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한다. 동판화로 유명한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그림이 여기에 속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하다. 특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림이 많은데 1495년에 그린 수채화 아르코의 풍경(View of Arco)도 그렇다. 올리브와 포도원이 펼쳐진 곳을 지나 가파른 산허리를 요새로 만든 아르코의 풍경이 펼쳐진 그림이다. 뒤러에 의해서 각색되어 본래의 풍경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드라마틱한 느낌을 부여하려한 작가 의도가 숨어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르코의 풍경보다 요새를 감싸는 암벽 왼쪽에 살며시 숨어있는 찡그리는 남자(scowling man)의 얼굴이 보인다.   알프레히트 뒤러 .1495년   남자의 옆얼굴이 암벽의 전체 높이로 조각된 듯 그려져 있다. 뾰족한 코와 수염으로 보이는 형태(노인 형상에 가깝다)가 유독 눈에 띈다. 뒤러는 남자의 옆얼굴을 은연중 돋보이게 하려고 주변의 다른 바위보다 표면을 밝게 처리했다. 처음에 발견하기 어려울 뿐 한번 인식되기 시작하면 남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다.(사실 이러한 비슷한 경험은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종종 마주한다. 용을 닮았다는 용두암, 여인의 누워있는 얼굴을 닮았다는 산등선, 특정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닮은 자연 등) 궁극에 화가의 붓끝에서 특정한 형상을 닮거나 연상시키는 풍경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거기에 얽힌 신화까지 듣게 되면 처음 대했던 자연풍경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H. 번의 , 1830년경   다음의 예시 그림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 가능한 그림이다.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남자의 옆얼굴이 나타난다. 암벽들이 얼굴형상을 만들고, 나뭇잎은 눈썹과 눈이 되었다. 오른쪽 암벽에 기울어져 자란 한 그루 나무는 머리카락이 되었다. 이 그림은 1830년경에 그려진 H. 번의 이란 그림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림 속 형상은 그리스를 너무도 사랑했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얼굴이다.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은(말라리에 걸림) 시인의 정신을 자연과 합일된 모습으로 그렸다. 누구보다 그리스를 사랑했던 시인을 모습이 자연만큼 거대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수수께끼 풀기’, 혹은 ‘숨은그림찾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또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자신이 찾는 것, 혹은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 순간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는 없던 세상이 아니라.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노력하지 않아서 몰랐던, 혹은 감추어졌던 세상이다. 숨겨진 세상이든 감추어진 진실이든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렸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맞고 틀리다’, ‘옳고 그르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차이와 다름을 발견하고 인정해가는 것을 배우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 보는 방법과 다른, 새롭게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익숙하게 보았던, 혹은 보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거꾸로 보고, 비틀어 보고, 돌려서도 보자.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참고문헌 및 추천도서 : 진중권 지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2005.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6), ANCI연구소 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   밀라노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밀라노대성당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화공(畵工)으로 일하였다. 1562년 프라하로 가서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의 3대를 섬기는 궁정화가로서 1582년까지 체재하였으며, 1592년 백작위(伯爵位)를 받았다. 약 20점의 유화와 많은 소묘를 남겼는데, 동물과 식물을 아울러 사람의 머리를 형용한 괴기한 환상화 《여름》 《겨울》 《물》 《불》 등으로 유명하다. 종전에는 저속한 취미를 가진 화가라 하여 무시되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융성과 더불어 재평가되었다.       
428    바로 볼가ㅠ... 뒤집어 볼가ㅠ... 댓글:  조회:4198  추천:0  2017-10-23
오늘은 주세페 아르침볼도라는 화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주세페 아르침볼도 바로 보아도 뒤집어보아도 될 것 같은 채소로 그린 초상화, 정말 독특하죠? 주세페 아르침볼도 (1527~1593) 이탈리아 밀라노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1562년 그의 나이 35세, 프라하의 왕궁으로 들어가 궁정화가로 일하며 왕족의 초상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아르침볼도는 과일, 꽃, 동물, 사물 등을 이용하여 사람을 얼굴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의 이중 그림으로 유명해요. 그 중 가장 유명한 '봄','여름','가을','겨울'은  황제 루돌프 2세를 그린 그림이예요.     그림만 봐도 어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런 괴기한 초상화이지만 이 그림을 받은 왕은 정말 좋아했다고 합니다^^ 풍성한 곡식, 과일등을 상징한 초상화로 무능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었거든요. 주세페아르침볼도 위 작품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물을 표현한 '4원소'라는 작품인데 물, 불, 땅, 공기 한번 찾아보세요~^^ 주세페 아르침볼도 독창적이고 기발한 그의 그림은 피카소, 달리, 뒤샹 등 초현실주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   미술을 전공해보신 분들이라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1527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는 죽기 전까지 고향인 밀라노에서 1m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고향에서 뼈를 묻고 생활했던 것이지요. 어쨌든 그는 화가로 활동하였는데요. 1562년 로마의 궁정화가로 일했습니다. 후에 자신만의 특이한 그림기법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습니다.   유럽에서 16세기~17세기로 변화할 무렵, 예술에 대해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세페 아르침볼도도 이러한 변화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의 미술 기법과 보여지는 생각들을 관찰해 보면 동시대의 시인인 존 던과 매우 비슷하였습니다. 존 던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으며 그에따른 열정도 강력했습니다. 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극적으로 표현했으며, 놀라운 색채표현으로 여러 곳에 이름을 남겼던 유명한 형이상학파 시인이었습니다.     어쨌든 존 던과 마찬가지로 특이한 그림기법으로 주세페의 그림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꽃이나 채소와 같은 사물들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해보이는 형식에다가 참신한 아이디어를 섞어 넣어본 것이지요. 그는 꽃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배치해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그림에서도 자신만의 생각을 그려넣었는데요. 예를들어 그가 그린 '봄'에 나오는 식물들은 건강함을 상징하며 '겨울'에서 나오는 마른 가지들은 머리가 빠진 노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그렸다고 해서 그림을 대충 그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들을 보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개별적인 그림들이 상당히 정교하게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사람의 형상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지요. 그가 그렸던 그림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변호사'라는 그림을  살펴보면 털이 뽑혀있는 닭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변호사의 무미한 특성과 탐욕스러움을 나타내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그는 1562년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밀라노, 몬차에 위치한 스테인글라스 및 프레스코 활동으로 실력있는 미술가임을 증명했지요.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린 '계절의 신으로서의 루돌프 2세'는 황제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프라하 미술이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이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들이 출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무려 4세기가 지나서야 살바도르 달리가 이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의 일부 작품들을 보면 사물내에 사람의 형상이 들어가있는 것을 볼수가 있지요. 출처:  [가을 하늘] ===================   서프라이즈 주세페 아르침볼도 사계         '서프라이즈'에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이이갸기 소개됐다. 5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만족시킨 기막힌 초상화가 소개됐다. 1566년 막시밀리안 2세는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불안해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서아시아 대륙까지 차지한 뒤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했고, 결국 신성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헝가리까지 정복했던 것.  이후 신성 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1568년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제약을 맺게 됐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을 빼앗기고 해마다 3만 더컷의 조공을 바치게 된 이후 막시밀리안은 무능력한 황제라는 비난을 받게 됐다.   이후 막시밀리안 2세는 뜻밖의 묘안을 떠올렸다. 자신의 권위를 세워줄 그림이 필요하다며 초상화를 요구한 것.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초상화는 황실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홍보 수단이 됐다.  명령을 받은 화가 주세페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후 주세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떠올렸다. 사람과 동물, 식물을 뒤섞어 마치 괴물처럼 그린 그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고 황제에게 4점의 초상화를 바쳤다.   신하들은 초상화를 보고 경악했다. 초상화 속 황제의 모습은 고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꽃과 입사귀, 과일 등이 얼굴을 이루고 있었다. 황제의 초상화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엄벌에 처하라는 신하들의 말을 뒤로한 채 주세페에게 박수를 보냈다.   막시밀리안 2세는 주세페가 그린 4점의 그림이 황제의 전지전능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거다. 그림 4점은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미하는 '사계'로 '봄'은 다양한 꽃들과 신록의 잎으로 장식돼 있었고, '여름'은 복숭아, 옥수수, 버찌 등 제철과일로 표현돼 있었다.   '가을'은 포도와 호박, 밤송이 등으로 장식돼 있었고 몸에는 포도주 통을 입혔다.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고목으로 표현했다. 목에서 새롭게 자라난 가지에는 오렌지와 레몬이 달려 있었는데 이는 희망을 상징한 것이었다. 기막힌 초상화 덕분에 막시밀리언의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전까지 무능한 황제로 여겨졌던 황제는 초상화 덕분에 태평성대를 이룬 황제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이후 주세페는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에 이르기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유럽에서 백작 작위를 받는 등 당대 최고의 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 신성 로마제국 황제를 웃긴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정석범 Mystic Art Story 세상을 꼭 정해진 규칙대로 바라봐야 할까. 때로는 나무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고 사람 얼굴이 호박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위험하다. 요즘이라면 몰라도 고루한 관념이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그런 시도는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일 수도 있다. 베르트무스’, 1590~1591년,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코클러스터 성   그런 점에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1527~1593)라는 이탈리아 화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만남은 천운이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에서 비아지오라는 잘나가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밀라노대성당의 내부 장식을 수주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아르침볼도는 아버지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레 손재주를 익혔다.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일찍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것 같다. 1562년 3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제지인 빈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가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그가 그린 그림들은 전통 화법을 충실히 계승한 기독교 성화들이 주류를 이뤘다. 막시밀리안 2세와 만남 이후 새로운 화풍 선보여 아르침볼도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기발한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호기심 많은 군주 막시밀리안 2세(재위 1564~1576)의 궁정에서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한 덕분이었다. 그는 첨단 과학기구를 비롯해 희귀한 동식물의 표본 등 전 세계의 진기한 물건들을 수집, 궁궐 내에 보관했는데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위세를 전 유럽에 과시하는 역할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궁정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르네상스를 연 이탈리아 미술과는 다른 합스부르크만의 트레이드마크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황제의 의중을 간파한 아르침볼도는 그의 권위를 빌어 그간 억눌러왔던 자신의 끼를 발산하기로 결심한다. 1569년 1월 1일 그는 새해맞이 기념으로 황제에게 두 세트의 기발한 인물화를 선물한다. 봄·여름·가을·겨울로 이루어진 ‘4계절’, 공기·불·땅·흙으로 구성된 ‘4원소’ 등 모두 여덟 점이었다. 그림을 받아든 황제는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터트린다. 대체 무엇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추상같이 호령하던 대제국 황제의 얼어붙은 마음을 무장해제시킨 것일까. ‘4계절’에서 화가는 각각의 계절에 걸맞은 각종 식물들을 조합해 유쾌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봄’은 갖가지 꽃들로, 여름은 과일과 채소의 열매로, 가을은 포도와 곡식의 낟알로,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나목으로 표현됐다.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물을 표현한 ‘4원소’에서는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을 조합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공기’를 보면 갖가지 새를 조합해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는데 입과 수염이 난 턱은 닭으로, 몸은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로 표현해 그 절묘한 착상과 재치에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황제가 크게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실을 전위미술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 아르침볼도만큼 적당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아르침볼도의 생각을 높이 샀다. 특히 화가의 유쾌함이 맘에 들었다. 황제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축제 때 그림 속 인물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내친김에 황제는 그를 아예 궁정에 보관할 진기한 물건 구매 담당책으로 임명한다.  ‘4계절’ 세트 중 ‘봄’, 1563년, 캔버스에 유채,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   ‘4원소’ 세트 중 ‘공기’, 1566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피카소·마르셀 뒤샹 등에 영향 끼쳐 막시밀리안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루돌프 2세(재위 1576~1612)도 아버지 못지않은 호기심 덩어리였다.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지만 그의 프라하 궁정에는 천문학자 케플러, 티고 브라헤 등 혁신적인 이론을 내세운 과학자를 비롯, 한스 폰 아헨 등 전위적인 화가들이 터를 잡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루돌프 황제 역시 아르침볼도를 지극히 아껴 심지어 자신의 초상화마저 그의 독특한 인물화법에 따라 그리게 했다. 계절의 신인 ‘베르트무스’라고 명명된 이 초상화는 황제를 계절의 신에 비유함으로써 전지전능한 지배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강낭콩 눈썹, 서양배 코, 사과 볼따구니, 옥수수 귀를 한 베르트무스의 얼굴은 그가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다양한 수확물들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리도록 허용한 황제나 자신의 기발한 생각으로 황제의 얼굴을 왜곡한 화가의 자유로운 정신은 르네상스 시대의 개방 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아르침볼도는 단순히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때때로 작품에 치열한 비판의식을 담기도 했다. ‘장서가’는 책을 읽지 않으면서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는 귀족과 부유층의 허식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물론 ‘유머’라는 양념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책장을 펼친 모습으로 묘사된 머리카락이나 책갈피로 표현된 손가락은 보는 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게 만든다. 그의 파격적인 작품이 당대인에게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그의 희한한 그림을 보고서 사람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기벽을 추구한 사람은 아르침볼도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밀라노 궁정에서 활약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기형적인 인체와 동물을 찾아다니며 스케치북에 담았다. 매너리스트로 불리는 피렌체의 화가들도 왜곡된 신체의 사람들을 비현실적인 공간속에 배치하기도 했다. 볼록 거울 위에 비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재현한 파르미지아니노는 그 대표적인 예다.  ‘장서가’, 1566년,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코클러스터 성   안타깝게도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1648년 신교와 구교가 맞붙은 30년 전쟁 때 스웨덴 군대에 의해 약탈당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이 재능 많은 화가는 300여 년 동안 망각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의 존재가 뒤늦게 알려진 것은 작품들이 문화의 ‘변방’에 흩어져 그 존재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진가를 처음으로 재발견한 사람은 피카소, 달리 같은 20세기 전위 미술가들이었다. 자전거 핸들과 안장을 조합해 ‘황소’라고 이름 붙인 피카소나 남자용 소변기에 ‘샘’이라고 이름붙인 마르셀 뒤샹이나 그 근본 정신은 아르침볼도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가시적인 세계를 해체해서 또 다른 맥락으로 새롭게 조합한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퓨전이 대세인 오늘날 아르침볼도가 던지는 메시지를 마냥 가볍게 웃으면서 바라볼 수만 없는 이유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427    "봄, 여름, 가을, 겨울 - 사계"로 형상화한 신비로운 인물화 댓글:  조회:3469  추천:0  2017-10-23
  저작자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 제작시기 〈봄〉 1573년 제작 〈여름〉 1573년 제작 〈가을〉 1573년경 제작 〈겨울〉 1573년 제작   이 신비로운 그림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인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계절의 이치에 걸맞은 나무와 꽃과 열매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처음엔 스위스 인근 지역의 소영주 집안이었으나 훗날 오스트리아로 거점을 넓히면서 지속적으로 정략결혼을 감행, 스페인 지역까지 통치하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가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왕가는 세력 확장과 유지에 너무나 골몰한 나머지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아 선천적인 기형이나 단명하는 후손도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문의 출신으로 흔히 카를로스 대제라고 불리는 카를 5세가 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봄〉 캔버스에 유채 / 76×63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여름〉 캔버스에 유채 / 76×64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가을〉 캔버스에 유채 / 77×63cm / 1573년경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주세페 아르침볼도 〈겨울〉 캔버스에 유채 / 76×63cm / 1573년 제작 /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1층 8실 막시밀리안 2세는 그다지 출중한 왕은 아니어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해 꽤나 안팎으로 시달렸던 모양이다. 늘 술에 취해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로 살았던 그는 하마터면 역사에 묻힐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에 불과했지만,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의 이 기발한 그림 덕분에 후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여전히 받고 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도 아르침볼도를 궁정화가로 연임시켜 자신의 초상화 역시 이런 식으로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그림을 퍼즐처럼 조각내어도 하나하나가 완벽한 정물화가 될 정도로 화가의 뛰어난 기교가 놀랍다. 대체로 알프스 남쪽 화가들보다는 북쪽 지역 화가들이 이와 같은 세밀한 정물화에 능통했다. 아르침볼도는 밀라노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림을 입히는 일을 했다. 알프스 남쪽에 속하면서도 정교함을 보여주는 그의 붓질은 아마도 그 일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름〉의 목 칼라 부분에는 자신의 이름 ‘GIUSEPPE ARCIMBOLDO’를 새겨 넣었고, 어깨 부분에는 작품의 제작 연도를 감쪽같이 그려 넣었다. ===============================     출생 1527년경, 밀라노 사망 1593년경, 밀라노 국적 이탈리아 요약 16세기 이탈리아의 풍자화가이자 궁정화가로, 주요 작품은 사물을 배열하여 초상을 그린 과 . 밀라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로 출발해 프라하로 옮겨간 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의 궁에서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궁정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리고 착각을 일으키는 눈속임 기법을 개발했다. 우의적인 의미와 익살, 해학을 담고 있어 당대 사람들에게는 인기 있었으나 후대에는 20세기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에게 칭송받기 전까지 관심 받지 못했다.   화면에 과일·채소·동물·책 등의 사물을 배열하여 인물 초상을 닮은 기괴한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의 이중 이미지는 20세기에 와서 살바도르 달리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밀라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로 출발했으나, 프라하로 옮겨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인 막시밀리안 2세와 루돌프 2세의 궁에서 인기 있는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또한 궁정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렸으며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눈속임 기법을 개발해냈다.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우의적인 의미와 익살, 해학을 담고 있어서 당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으나, 후세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독특한 시각은 초상화 〈여름 Summer〉·〈겨울 Winter〉(빈 미술사박물관)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르침볼도 주세페 아르침볼도(이탈리아어: Giuseppe Arcimboldo 또는 Arcimboldi, 1527년 ~ 1593년 7월 11일)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과일, 꽃, 동물, 사물 등을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의 화풍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아르침볼도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그림의 길로 들어섰다. 독서를 좋아하고 시학, 철학, 고문헌 등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1] 그는 1562년 페르디난트 1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아르침볼도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 그를 자신의 궁정화가로 삼았고,[2] 아르침볼도는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와 손자 루돌프 2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로 일했다. 특히 루돌프 2세의 총애를 받았는데, 궁정화가에서 은퇴한 뒤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본 루돌프 2세는 크게 만족하여 아르침볼도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프라하 궁정에 있던 그의 작품들은 1648년 30년 전쟁 당시 프라하를 침공한 스웨덴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약탈되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루브르 미술관, 빈 미술사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등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편집] 『겨울』(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여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가을』(1573),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플로라』(1591), 개인소장, 파리   『베르툼누스 : 루돌프 2세』(1590-91), Skokloster Castle, 스웨덴  
426    화가 다빈치가 자전거를 최초로 발상했다?... 아니다!... 댓글:  조회:2082  추천:0  2017-10-23
    밀레의 [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자 빈센트 반 고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장 프랑수아 밀레, 그리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종'   국내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그림 중 하나인 만종은 멀리 교회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올리는 부부, 그리고 그들 가운데로 보이는 바구니 속 감자들로 하여 수확의 기쁨을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허나, 밀레의 만종을 바라보는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견해는 이와 달랐다.     살바도르 달리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하게 매료되었던 달리는 늘 의구심을 품었는데 특히 부부의 가운데 놓여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만종에 매료된 달리는 1935년에 자신의 저서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를 통해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 부부 사이의 감자가 든 바구니는 사실 아기의 시신이 든 관이다. "   " 밀레는 한 부모가 죽은 아기를 담은 관 앞에서 기도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가 이를 감자 바구니로 수정했다. "   밀레의 만종이 수확의 기쁨을 그린 서정적인 작품이 아닌, 굶주림에 죽고만 아기의 시신을 묻기 전 추모를 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달리의 주장은 그의 평판만큼이나 기괴하기 짝이없었다.   그 후로 수십 년 후, 만종이 보관되어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의 관계자가 해당 그림을 X선 투시로 감정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 밀레의 만종은 유화로 X선 투시를 통해 유화의 특징인 '덧칠' 전의 본래 모습을 확인할 수있다. "   " 그리고 만종을 X선 투시한 결과 감자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원래는 작은 나무상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   이런한 결과에 힘을 얻기 시작하는 주장들...   " 밀레는 본래 굶주림으로 죽은 자신들의 아이를 추모하는 부부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   " 그러나 당시 심화되었던 계급 갈등으로 인해 오해를 통한 신변의 위협을 걱정했던 친구의 만류로 밀레는   아이가 든 관을 다시 덧칠해 감자를 담은 바구니로 바꾼 것 "   " 밀네는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이삭 줍는 여인들'을 통해서도 그림 전면에 곤궁에 처한 민중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멀리 배경으로 말을 탄 채 일꾼들을 부리는 지배층의 모습을 그리며 당시   시대상의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밀레가 마음먹고 만종을 통해 일종의 '고발'을 한 것 "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   " 밀레사 진정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수확의 기쁨이 아닌 당시 사회를 살던 부모의 슬픔 "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들   " 밀레는 나무상자로 된 관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도를 위해 감자가 든 바구니의 밑그름을 그렸을 뿐 "   " 그림에 표현된 장소와 도구들도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 "   " 밀레는 만종을 회고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레빌아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종소리에 맞추어 행하던 천사의     기도에서 영감을 얻은 것' 이라고 했다. "   " 태어나서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랐던 밀레를 농민들 편에 선 '서구 최초의 민중예술가'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밀레는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   과연 밀레는 부부 사이에 무엇을 그려 넣고자 했던 것일까?   한편, 밀레의 만종을 보유하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 측이 X선을 투시 한 이유는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작스레 칼로 해당 그림을 찢는 일이 생겨 복원작업을 위해 만종의 훼손 전 상태를 파악하고자 X선을 투시했던 것.   그리고 어린 시절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종을 처음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다시피 한 '만종 아기관설'을 주장했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그렇게 만종에 그려져 있는 감자가 든 바구니를 볼 때마다 불안감을 느꼈던 천재 화가라 불린 달리를 향한 또 다른 평가   " 그는 미치광이였다. "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대부분의 이들이 나폴레옹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주황색 망토를 휘감고 앞발을 치켜든 백마에 올라탄 위엄있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나폴레옹 시대에 예술과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궁전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 속 모습처럼 말이다.   1800년,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마랭고에서 승리를 하기 전 알프스를 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며 궁정 화가로써 비호를 받던 다비드는 황제에게 명을 받게 된다.   " 자크 루이, 내가 알프스를 넘는 초상화를 하나 그려주게 내 모습은 스페인 카를로스 4세 국왕의 초상화처럼 그리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주게나 "   " 황제 폐하, 그렇다면 그림을 위해 직접 모델을 서주시겠습니까? "   "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자네의 '천재적 상상'에 맡기겠네 "   그리하여 멋지게 미화된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은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초상화가 되기에 이른다.   허나,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알프스의 험한 산길을 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병사들은 해당 지형에 강한 당나귀를 타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알프스를 먼저 넘어간 후에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당나귀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던 것이다.   결국, 다비드의 그림 속 나폴레옹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50년에 동시대의 화가인 폴 들라로슈에 의해 그려진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Alps)' 속 나폴레옹의 모습이 실제와 비슷했을 것이다.     폴 들라르슈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의미가 없다. 위대한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으면 된다. "   - 나올레옹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재의 걸작이었던 이 그림은  21세기 들어 가장 'Hot'한 소설 속 '장치'로 등장하며 예수의 비밀스러운 코드를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다시금 알려져 유명세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 유산으로써 가장 영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 작품에는 우리가 알지 뭇했던 사실이 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   12사도 들과의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과연 그들은 그날 마지막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을까?   본래 레오나르도의 작품 최후의 만찬은 그 훼손 정도가 심각해 만찬에 오른 음식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만, 최후의 만찬 당일이 유월절이라는 유대인들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예수와 12사도들이 마지막 저녁 식사로 양고기를 먹었을 것이므로 레오나르도의 작품 속에도 다른 많은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한 작품들 처럼 식탁에 양고기가 올려져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허나, 1999년 이루어진 복원 작업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 속 테이블에 어떠한 음식이 올려졌는지가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양고기가 아니 바로 생선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어째서 유월절 이루어졌던 최후의 만찬에 양고기가 아닌 생선을 그려 넣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들어보면 무릎을 치며 '역시 수수께기와 암호가 가장 어울리는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야"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예수(Iesus), 그리스도(Christos), 하나님의 아들(Theon Uios), 구세주(Soter)의 각 단어 앞글자를 연결한 'ICHTHUS'가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을 지닌다는 것에 주목했으며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치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비유하여 사도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예수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면 최후의 만찬에 가장 어울리는 요리야말로 바로 예수를 상징하는 생선만큼 어울릴 수 있는 음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밀라노 칙령' 이전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당시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비밀기호였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유월절 만찬의 상징인 새끼 양 대신 생선 요리를 그려넣음으로써 예수의 희생과 기독교 박해 당시 사용되던 상징물로 최후의 만찬 당시 예수 그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1977년 시작되어 1999년까지 이어졌던 복원작업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지만, 복원을 두고 비판도 적지 않다.   일부 전문가들은 복원팀이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으며 레오나르도의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드로잉을 참조해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하는 등 원작의 20%만이 살아남은 실패한 복원이라는 비판이 바로 그것.   실제로 2011년 7월, 본래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드로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그 가치가 45파운드(약 7만 7천원)에서 2억달러(약 2,134억원)로 뛰어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작품 속 예수에게는 비교적 덥수룩한 수염이 존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한편, 화가뿐만 아니라 건축,물리학,기계 발명,해부학,화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능통했던 이 위대한 천재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요리사로 생계를 꾸렸으며 요리솜씨 또한 탁월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전거 스케치   다양한 분야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천재성을 발휘했던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런 그가 생전에 자신의 방대한 연구 기록을 기록했던 수첩에서 놀라운 스케치가 발견되는데 바로 체인과 페달까지 상세하게 스케치 되어 있는 현대식 자전거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전거가 최초로 발상 되었던  1831년보다 300년 이상 먼저 현대식  자전거를 도안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위대한 천재 그 이상이었던 것일까?       허나, 이후의 조사에서 이 자전거 도안이 실은 1960년대 이루어졌던 필사본 복원 과정 중 다른 이의 고의적인 덧칠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1961년까지만 해도 본래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던 것에 불과했던 스케치에 한 수도사가 페달을 그려넣었고 이후 또 다른 누군가가 페달과 바퀴살 등을 추가로 그려넣어 완전한 현대식 자전거로 둔갑시켜버린 것이었다.         즉, 실제로는 레오나르도의 동성 연인이자 조수였다고 주장되어지는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가 스케치 한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원에 1564년 발견되어 연필심의 원료로 사용되는 흑연에 의해 덧칠되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 사망,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는 1524년에 사망)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사기가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천재가 당연히 최초의 자전거를 발명했을 것이라고 믿는가 하면 그를 주제로 한 박물관에 해당 자전거 도안을 복각한 전시물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 외에도 위대한 천재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현대 문명이 낳은 많은 발명품들과 지식들을 최초로 '직접적인 구상'을 했던 불가사의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번외단편 - Mystery of Gallery|
그림   다양한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2017. 10. 17.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20여점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개인 소장 작품인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가 1천억원이 넘는 고가에 경매가 부쳐질 즈음에 세계에 널리 널려 있는 다양한 '살바토르 문디'를 한 데 모아 보아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 Albrecht Durer의 Salvator Mundi Thomas Tallis의 Salvator mundi, Salvanos An unknown Flemish artist의 Salvator Mundi(1550~157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Andrea Previtali의 Salvator Mundi(1519년) Hans Memling의 Salvator Mundi Palma Vecchio의 Salvator Mundi(1520년) Thomas Schoen의 Salvator Mundi(Sophia Musik 2013년) Mansi Magdelen의 Salvator Mundi(1510~1530년) Domenico Fetti의 Salvator Mundi Giovanni Bellini의 Salvator Mundi(1450~1520) Joos van Cleve의 Salvator Mundi(1540년) Fiz essa pintura의 Salvator Mundi(2012) Leia mais의 Salvator Mundi Rafael Sanzio (1506년) Correggio (1515년) Andrea Previtali Marie Madeleine
424    "나는 한번도 뚱보를 그린적이 없다"... 댓글:  조회:3559  추천:0  2017-10-23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1932~   보테로가 직접 한국을 찾았을때. 이번에도 그에게 똑같은 질문이 쏟아졌지요. “왜 뚱보를 그리는가?” 그의 그림만큼이나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답변을 기대한 이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노老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만큼은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뚱보를 그린 적이 없다. 색감과 양감(볼륨)을 중시하다 보니 풍만함이 강조됐을 뿐이다.” 그는덧붙입니다. “내 스타일의 목적은 규모를 키우는 데 있다. 그래야 더 많은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고, 형태의 관능성과 풍만함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본인의 개성을 풍만함에서 찾았을 뿐 단순한 재미나 풍자를 위해 ‘뚱보’를 그리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어떤 이는 서운함을 드러냅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자의 입장에서 작가의 진의와 철학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림은 두뇌가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뜻과 말, 배경과 생각에 관심을 둘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림 감상이 훨씬 충만해지기 때문이지요. 이제껏 보테로의 그림에서 풍만한 몸매만 보셨다면 이번에는 몸매 대신 여기 소개하는 다른 ‘이야기’들에 귀 기우려 보십시요. (왼쪽) ‘Rubens and His Wife’, 2005년作, 205×173cm (오른쪽) ‘After Velazquez’, 2006년作, 205×176cm 1. 도망자 보테로 vs. 기증자 보테로  콜롬비아에서 나고 자란 보테로는 이런 현실을 한탄하면서 ‘내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의견을 수차례 피력했다. 평화를 갈구하는 그 ‘목소리’가 그를 범죄 조직의 표적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보테로는 그간 수차례 위험에 처했습니다. 1994년에는 보고타에서 납치될 뻔했다가 간신히 탈출했고, 1995년에는 그가 고향 메데인에 새운 조각품 ‘새Bird’가 폭탄 테러로 파괴되었습니다. 보테로는 폭파된 조각품을 제거하지 않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조각품을 설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같은 테러의 위협 때문에 보테로는 콜롬비아에 자주 가지 않습니다. 부득이 가야 할 때는 친구 차와 경찰차를 앞뒤에 두고 움직인답니다.  콜롬비아가 범죄로 얼룩지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그림에도 투영됩니다.  ‘거리Street’를 볼까요? 언뜻 보면 사람들이 오가는 일상적인 거리 풍경을 스케치한 것 같지만 서로를 감시하는 듯한 딱딱한 표정의 수녀, 경찰, 정치인, 창녀를 통해 보테로는 권위와 정치에 짓눌리고 경직된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Street’, 2000년作,200×139cm   ‘말을 탄 남자Man on a Horse’는 또 어떤가요? 포동포동 살찐 말 위에 역시 포동포동 살찐 남성이 올라탄 모습이 피식 웃음을 짓게 하지만 창문을 열고 이 남자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듯한 또 한 명의 남성을 보면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보테로는 서로가 서로의 감시 대상이 되는 독재 체제의 불편함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테로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티칸의 욕실’이란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최고위급 성직자는 욕조에 누워 있는 반면 또 한 명의 성직자는 타월을 들고 욕조 밖에 서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타월을 든 이의 모습을 새끼 원숭이만큼이나 작게 그렸다는 겁니다. 고위 성직자는 백인, 시중을 드는 하급 성직자는 흑인으로 그린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보테로는 이 그림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 간의 불평등한 ‘서열’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물론, 이 같은 무거운 메시지에도 보테로의 그림은 따뜻하고 유쾌합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그림 속 인물들 덕분입니다. 범죄 조직에 연루돼 살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세태를 꼬집은 ‘자살Suicide’같은 작품에서조차 암울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힘은 ‘애정’에 있습니다. 따뜻한 색감, 빵빵한 몸매의 그림 속 주인공은 무표정하지만 차갑거나 매섭지 않습니다. 보테로는 2000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메데인에 있는 미술관에 자신의 조각, 회화 작품 200여 점과 피카소, 모네, 마티스, 샤갈, 미로, 클림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 100여 점을 기증했습니다. 그 답례로 콜롬비아 정부는 보테로에게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주었습니다.     2. 명화에도 주눅 들지 않는 보테로의 자존심과 ‘스타일’    도슨트는 “흔히 보테로의 그림을 보면 별 생각 없이 쓱쓱 쉽게 그린 것 같지만 그만큼 미술사와 고전에 해박한 사람도 없다. 고전에 대한 치열한 연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테로 스타일도 없었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20세에 ‘해변에서On the Coast’란 작품으로 콜롬비아 살롱에서 2등을 수상한 그는 상금 7000페소를 받는데 이 돈으로 스페인행 여객선의 3등석 표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벨라스케스나 고야 같은 대가의 작품을 공부하지요. 여행객을 대상으로 대작의 모사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그는 돈이 모이자 파리로 날아갑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목적지였지요. 스페인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작품과 질릴 만큼 실컷 마주한 그는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날아가 조토나 카스타뇨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섭렵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꼿꼿한 주관입니다. ‘Musical Instruments’, 1998년作, 133×172cm 대가의 작품에 기가 죽을 법도 하지만 그는 “나는 유럽인의 그림을 더 대단하게 상상해왔다. 그러나 작품들의 규모는 나를 실망시켰다”라고 말합니다. 대가의 작품에 주눅 들지 않은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대가의 작품을 재해석합니다. 마치 “나에겐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라고 강조하는 듯한 그의 그림들은 볼수록 재미있고 매력적입니다.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를 따라서’를 보지요. 원작을 기억하는 이라면 이 작품이 원래 얼마나 성스럽고 경건하며 진지한 분위기를 발산하는지 아실 겁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부부 주변으로 십자가, 신 등의 상징이 가득한 데다 색감도 어두워 무척 엄숙하지요. 보테로는 이러한 분위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풍성한 몸매에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의 남녀가 살포시 손을 잡고 있는 풍경은 어른들의 소꿉놀이처럼 정겹지요. 원작에서는 천장의 샹들리에에 불이 켜져 있지만 보테로는 그 불을 모두 껐습니다. 당시, 샹들리에의 촛불은 결혼을 상징함과 동시에 결혼식을 지켜보는 하느님의 눈을 상징했다는데 보테로는 개의치 않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를 패러디한 보테로의      고야의 ‘오수나 공작부인’을 재해석한 ‘고야를 따라서’, 루벤스의 1609년작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를 재해석한 ‘루벤스와 아내’ 역시 원본과는 판이한 느낌으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보테로는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정통했지만 이 역시 여느 화가처럼 신성하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덕수궁 미술관 2층에 전시된 ‘에우로페의 남자’를 보세요. 에우로페의 미모에 취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신해 에우로페를 납치한다는 것이 신화 내용이지만 보테로의 그림 어디에서도 에우로페가 납치당하는 듯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습니다. 몸이 워낙 육중한 데다 나체로 황소의 뿔을 움켜쥐고 있어 되려 에우로페가 황소를 납치하는 듯한 느낌이지요. 보테로는 젊은 시절부터 ‘나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에 골몰했다고 합니다. 미술사와 대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한 것 역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지요. 그의 스타일은 포크나 병, 컵, 의자, 꽃병 같은 소품에서도 나타납니다. 고야를 따라서   2006   캔버스에 유채   '루벤스와 아내'   에우로페의 납치  1998   캔버스에 유채  218x184 3.내 사랑,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의 그림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뜨겁고, 정열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일관되게 투영됐는가를 유심히 보면 그림 감상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벨라스케스를 따라서’를 볼까요? 벨라스케스가 1956년에 그린 작품 ‘흰 옷의 왕녀 마르가리타’가 원본인데 그림 속 인물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원래의 왕녀가 캔버스 가득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보테로가 그린 왕녀는 소녀 분장을 한 아줌마 같은 모습이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분명 흰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왕녀가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귀에는 큼지막한 빨간색 딸기 모양 귀고리를, 머리에는 빨간색 헤어 코르사주까지 하고 있죠. 유럽의 왕녀가 순식간에 라틴 아메리카의 왕녀로 변신한 듯한 모습입니다.   흰 옷의 왕녀 마르가리타    술 마시고, 안고, 사랑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는 그네들의 일상을 기분 좋게 묘사한 작품들은 하나하나 라틴 사람들의 삶의 모토인 ‘만자레(먹고), 칸타레(노래하고), 아모레(사랑하고)’를 대변하지요. ‘애인들’이란 작품을 보세요. 털이 복슬복슬한 남자가 앙증맞은 귀고리와 헤어 리본을 한 애인을 꼬옥 껴안고 있습니다. 캔버스를 가득 메운 여성의 풍만한 엉덩이가 살짝 부담스럽지만 어쨌거나 사랑스럽고 따뜻합니다.   춤추는 사람들   1999  캔버스에 유채  185x122  ‘파티의 끝’은 언뜻 야합니다. 침대에 벌러덩 나체로 누워 있는 남자 주변으로 핑크빛 언더웨어를 걸친 여성 두 명과 기타를 연주하는 남성 한 명이 자리하죠. 방바닥에는 브래지어와 담배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요. 하지만 그 모습은 보테로 특유의 따뜻한 색감 덕분에 욕망의 공간이라기보다 파티 공간처럼 보입니다. 이 같은 흥겨움은 소풍을 나온 남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여인들, 수건으로 중요 부위를 살짝 가린 욕실의 여인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투우’ 시리즈에서 역시 라틴 아메리카를 향한 보테로의 애정과 그리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보테로는 투우와 굉장히 관련이 깊습니다. 열성적인 투우 팬이던 보테로의 삼촌은 보테로가 최고의 투우사가 되길 원해 그를 투우사 양성 학교에 보내기도 했지요. 비록 투우사 학교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데만 열중했지만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그는 투우를 향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그 뿌리가 작품에 의미와 진실함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주제라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모든 것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 깃들길 바란다.” 뚱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을 통해,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매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투우   2006  캔버스에 유채  180x128     El quite, 1988 ‘Picnic’, 2001년作, 113×165cm 보테로 작품을 더욱 즐겁게 즐기는 Tip 3 1.야외 조각품 열심히 보기 덕수궁 내 중화문 앞에는 보테로의 거대한 고양이 조형물이 놓여 있다. 류지연 학예사는 왕릉을 지키는 십이지신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중화문 앞에 이 조형물을 세웠다고 한다. 덕수궁 미술관 앞에도 풍만한 여체 조각상 하나가 이 놓여 있다. 보테로는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조각 전시를 할 만큼 조각가로서도 탄탄한 명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는 샹젤리제에 작품을 전시한 최초의 외국인이기도 하다.  2.서커스 단원의 표정과 배경 면밀히 보기 이번 전시에서 보테로는 최신작인 ‘서커스’ 시리즈도 여럿 선을 보인다. 이 그림들을 볼 때는 인물과 배경 구석구석을 면밀히 볼 것. 언뜻 행복한 단원들의 모습을 그린 것 같지만 무대 안쪽에서 고독한 표정을 지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단원 등 서커스의 슬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다. 이번 전시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쓰인 두 명의 서커스 단원은 언뜻 결혼식을 올리는 남녀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남자 중 한 명이 여자로 분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슴과 겨드랑이의 무성한 털이 그 증거!  3.여성의 머리카락이 짧다고 가정하고 보기 보테로의 그림 속 여성을 자세히 볼 것.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귀고리와 머리핀 등이 없다고 가정하고 다시 한번 보면 남성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알게 된다. 특히 작품 ‘아담과 이브’ 속의 이브는 남성보다 허벅지와 발이 더 크다. 이처럼 보테로는 남녀의 얼굴을 거의 똑같이 그리고, 귀고리와 머리핀 등의 장식적 요소를 통해 성별을 구분하는 것을 즐긴다.           자화상  1992  193x130     자화상                 개를 데리고 있는 남자 / 2007 / 캔버스 유채       거리 / 2008 /캔버스 유치       고야를 따라서 /  2006 /캔버스 유채       곡예사 / 2008 /캔버스유채       노란꽃(꽃 3연작) / 2006 / 캔버스 유채       루벤스와 아내 / 2005 / 캔버스 유채       마타도르 / 2006 /캔버스 유채         모나리자       벨라스케즈를 따라서 / 2006 / 캔버스 유채       서커스 단원들 / 2007 / 캔버스 유채       소풍 / 2001 /캔버스 유채       반 아이크의(아르놀피 부부)를 따라서 / 2006 / 캔버스 유채       악기 / 1998 / 캔버스 유채       얼굴 / 2006 / 캔버스 유채       에우로페의 납치 / 1998 / 캔버스 유채       우는 여인 / 1998 / 캔버스유채       자화상 /  1992 / 캔버스 유채       죽마를 탄 광대들 / 2007 / 캔버스 유채       춤추는 사람들 /  2000 / 캔버스 유채       카드놀이 / 1999 / 캔버스 유채   비정상적인 형태감과 화려한 색채의 화풍은 인간의 천태만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라틴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현존하는 라틴 미술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 콜롬비아의 대표 작가로 소개된 바 있는 그는 유럽 사조에 휘말리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식 표현 방식의 신형상주의(Neo-Figuration)을 구사하며 라틴 아메리카 일상 문화 체험을 현대적 해석으로 이끌고 있다. 특히, 터질듯한 절대적 볼륨, 보테로식 패러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선보이며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32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보테로는 콜롬비아 작가로는 거의 전례가 없을 정도로 미술사적 위치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이룬 작가이다.  콜롬비아의 안데스 산맥 깊숙한 곳, 메데진이라는 스페인 식민 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는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보테로는 세상과 고립되어 정통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세 때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미술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현대 미술을 접하게 된다.  세계적인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와 지오토(Giotto di Bondone)의 사본을 보게 되면서 형태의 왜곡을 통한 신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이 후 유럽으로 떠나 미술 학교의 정통 교육 과정 대신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분석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까지도 미술사 전통 속에 자신을 확인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는데 특히 벨라스케스의 견고하고 세밀한 묘사 기법과 고야의 위트 있는 풍자적 표현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내 그림들이 뿌리를 갖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뿌리가 작품에 어떠한 의미와 진실함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내가 손을 댄 모든 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영혼으로부터 침투한 것이기를 바란다.”  이처럼 보테로는 라틴 아메리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 미술과의 접목을 이루어 낸 작가이다.  어린 시절을 지낸 콜롬비아의 엄격한 시골의 모습과 생활상을 표현하고, 10년 이상 이어진 현대 콜롬비아의 일상의 잔혹함과 마약으로 망가져 가는 고국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로서 ‘폭력’ 이라는 테마를 등장시켰다.   자주 사용한 콜롬비아 국기색인 빨강, 노랑, 파랑의 표현 등은 그의 미술 저변에 깔려있는 라틴의 영향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그는 영향을 받은 작가로 멕시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를 꼽는다.  젊은 시절 유럽에서 콜롬비아로 돌아와 열린 개인전에서 평론가들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생계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하다 결혼과 함께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그 당시 멕시코 벽화운동으로 남겨진 프레스코화들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 형태의 왜곡을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감각적이고 통통한 데포르마(Deformation), 특히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요 인물인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형태를 최대한 과장시키는 보테로 양식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그의 작업 특징인 데포르마숑 형태는 풍선처럼 터질듯한 형태의 풍만함에서 오는 볼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형태를 증대시키는 것은 더 많은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고 표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관능미와 풍부함을 잘 전달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표정과 부동 자세 또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물의 개성에 집중되지 않고 하나의 극단적 볼륨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했던 그의 조형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기능에 따라 혹은 공간 구성의 필요에 따라 인물의 형태 비율을 자유롭게 구사하는데, 동물이 인형처럼 아주 작은 크기로 표현되거나, 정물들이 크게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남성보다 여성을 더 크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구상에만 머무는 고전주의적 양식이 아니라 현대적 모더니즘의 새로운 신구상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고유의 색을 파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림자가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대신 색을 이용하여 면을 만들고, 그림자 대신 어두운 색 톤을 이용하여 볼륨을 만들어 마무리하는데, 이를 통해 정물이나 인물을 생기 있게 보여준다.  보테로는 17세기 네델란드의 정물화 걸작들에서 힌트를 얻어 대상의 크기를 확대하고 단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정물을 그렸다고 한다.  인물과 마찬가지로 정물 표현에서 몰개성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꽃다발이나 과일들을 화면 중심에 위치하게 하고 비현실적인 배치를 통해 풍만함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구형이나 원형 형태로 단순화된 구성 혹은 최소한의 구성으로 주제는 하나의 덩어리로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비례와 환경 설정으로 그의 작품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또한 우리는 고전미술의 패러디 작품에서 그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발견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 투벤스, 반아이크, 마네, 보나르에 이르기까지 고전작품을 패러디 하거나  일부를 차용하는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팝아트 성향의 패러디 작품들과 달리 미술 양식의 원류를 보여주고자 조형에 대해 끝없이 연구하여 보테로식 패러디를 창조해 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양식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결국 신 양식과 구 양식의 혼합을 통해 그의 조형 세계의 깊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작업 특성은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서도 이어진다.  터질듯한 절대적 볼륨, 이를 입체로 구현시키는 것은 그의 작품 철학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1963년부터 볼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후 대형 조각들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청동주물 시스템의 발견으로 대형 야외 조각 설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햇살이 조각에 비추거나 혹은 빗방울이 표면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의 효과는 그림자와 함께 매끄럽게 흐르는 청동의 선을 환상적으로 연출한다.  콜롬비아에서 경험한 바로크 양식의 영향으로 대형 동물 형상, 누워있거나 서있는 뚱보여인과 함께 아담과 이브는 특히 조각에서 많이 등장한다.  필자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받은 감동은 80세를 앞둔 세계적 거장의 진지하되 부지런한 작업 태도였다. 그는 전 세계 주요도시에 본인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으며 그만의 규칙에 따라 봄에는 프랑스 파리, 여름엔 이태리 피에트라산타, 다시 파리로 돌아와 가을 끝 무렵까지 지내다가 겨울에는 뉴욕, 그 후에는 봄까지 몬테카를로의 작업 여정을 돌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젤 없이 작업하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작업실의 높은 천정 도르래에 걸려있는 캔버스 천은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다.  벽에 천을 고정시키고 캔버스 중심에서부터 주제를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구성을 하고 부수적인 이미지를 첨가하며 작업을 완성한다.  이후 필요 부분만 잘라 캔버스 틀을 만든다.   그의 자유로운 형태의 변형 스타일이 작업 방식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 스케치는 스케치로서 존재한다.  완벽함을 중시하는 그는 드로잉 작업에서도 세밀한 부분까지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다.  “난 뚱보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확고한 예술 철학을 실험하고 또 다시 창조한다.  누가 보아도 뚱보를 그린 것이지만 그는 언제나 말한다.  라틴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그가 앞으로 세계 미술사에 남길 위대한 예술을 기대해 본다.                                                 ---아트저널 에서 
423    7만 = 1억 댓글:  조회:2620  추천:0  2017-10-22
: 2017.10.13  1900년 단 돈 7만원에 구매한 정체불명의 그림… 1억 달러 이상의 가치로 유럽 귀족들에 의해 덧칠 등 심하게 훼손돼 500년 간 작자미상의 그림으로 알려져 2005년 감정 결과 다빈치의 진품으로 판정, 2013년 러시아 억만장자 손에 들어가 500여 년 전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가 경매 시장에 나온다. 지난 10월 11일 [2017년](한국시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천재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시장에 풀리면서 경매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 다빈치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 /사진=월스트리트저널 홈페이지 러시아의 큰 손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는 다음달 15일에 열리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살바토르 문디’를 1억 달러(약 1,135억 원)에 내놓을 예정이다. 리볼로프레프가 정한 1억 달러는 경매 시장에 나온 다빈치 작품에서도 가장 높은 가격으로 아려졌다.  ‘살바토르 문디’는 현재 전 세계에 20점도 남지 않은 다빈치의 그림 중 유일하게 한 개인이 갖고 있던 작품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와 다른 유명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다. 개인이 소장하던 다빈치의 그림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뛰어오를 전망이다.  16세기 초반에 그린 다빈치의 작품인 ‘살바토르 문디’는 예수가 오른손으로 축복하며 왼손은 보석을 쥐고 있는 예수의 상반신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원본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유럽 귀족들의 덧칠 등 기묘한 보수 작업으로 심하게 손상돼 정체불명의 작품으로 수백 년간의 시간을 보냈다.  ▲ 러시아의 억만장자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 /사진=월스트리트저널 홈페이지 작가 미상의 그림이었기에 이 작품은 1958년 진행된 소더비 경매에서 단돈 45파운드(약 7만 원)에 팔렸다. 20세기 초 이 그림의 원래 주인인 영국의 그림 수집가 프레더릭 쿡은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인지 전혀 몰랐다고 전해진다. 결국 지난 2005년 정밀한 감정으로 다빈치의 진품으로 판정이 나면서 그 가치는 수억배로 뛰어 올랐다. 작품은 2011년 영국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처음 전시됐고 2013년 리볼로프레가 현재의 경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이를 구매했다.  리볼로프레프는 다빈치의 원작을 경매에 내놓은 이유에 대해 “2013년 당시 구매한 가격보다 훨씬 낮다”며 “결코 돈이 필요해서 파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4년 전 그는 이 작품을 약 1억 2750천만 달러(약 1445억 원)에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비즈 천현빈 인턴기자   크기 66x45cm 제작시기 1506~1513년 원제 Salvator Mundi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이탈리아, 1452-1519년 소장/전승 개인 소장 기법 유화, 월넛 목판에 유채 수백년 만에 는 레오나르도의 진품으로 밝혀지게 된다. 조악하게 덧칠된 물감덩어리들과 먼지더미를 한겹씩 걷어낼 때마다 레오나르도 특유의 천재적인 붓터치가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Salvator Mundi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는 레오나르도의 제자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Giovanni Antonio Boltraffio, 1467-1516)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11년 가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개최된 전시 전을 통해 60여점의 다른 레오나르도의 대표작들과 함께 전시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직접 그린 진품으로 천명되었다. 1958년 경매에 등장해 고작 45파운드에 거래되었던 이 작품은 진품으로 판명된 이후 2013년 5월 어느 익명의 수집가에 의해 대략 8천만달러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2005년 미국의 한 화상 컨소시엄에서 이 작품을 사들인 후 많은 화상들과 학자들이 수년간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연구하는 데에 공을 들인 덕분이었다. 이 작품은 무명으로 견뎌온 세월만큼이나 심각한 손상들과 조악한 덧칠들로 뒤덮혀 있었기에 이를 모두 걷어내고 레오나르도의 오리지널 붓터치를 드러내기 위한 복원작업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 작품의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조사 및 연구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윈저 로얄 도서관에 소장된 의 밑그림인 오리지날 습작 드로잉 2점과 레오나르도의 다른 대표작들의 성분들과의 비교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는 ‘세상의 구세주’라는 의미를 갖는다. ‘살바토르’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며, ‘문디’는 라틴어 ‘mundus’의 소유격으로서 ‘세상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그림 속에서 예수의 오른손 두 손가락은 축복을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세상과 우주를 상징하는 투명한 구슬을 쥐고 있다. 본디 ‘살바토르 문디’라는 주제 자체는 알브레히트 뒤러, 얀반아이크나 한스 멤링 등 16세기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들도 즐겨 그린 인기 주제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를 주제로 작품에 착수한 것은 1506-1513년경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까지 레오나르도의 양식을 모사하여 이 작품의 복제본을 워낙 많이 그려냈고, 진품에 대한 기록은 한동안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의 영롱한 구슬의 투명도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청색의상의 극도의 부드러운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기록이 다시 등장한 것은 1649년 영국의 찰스 1세의 소장품 목록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폐위되면서 잠시 팔렸다가 찰스 2세가 재위하면서 1960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 1736년 버킹엄 공작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들이 이 작품을 경매로 넘겨버린 기록을 끝으로 이 작품은 백년이 넘도록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영국의 수집가 프레데릭 쿡이 1912년 이 작품을 사들였는데, 그 당시에는 이 작품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에 그가 소장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때에도, 이 작품은 16세기의 ‘밀라노화파’의 한명이자 레오나르도의 수제자인 볼트라피오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쿡이 사망한 후, 1958년 경매에서 45파운드에 팔렸던 이 그림은 2011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품으로 판명되며 오늘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Oil on walnut panel, size 65.6 × 45.4cm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20여점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개인 소장 작품인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가 경매에 곧 부쳐진다고 한다. 예상가액은 무려 1130여억원. 현재 러시아의 한 억만장자가 갖고 있다고 한다. 크리스티 경매장 소식통에 따르면... 그럼 이제부터는 그림을 감상해 보죠.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는 예수의 모습을 목판에 유화로 그린 그림으로, 영어로는 'Saviour of the World'로서, 우리말로는 '세계의 구세주'를 뜻한다.   오른손은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살짝 겹쳐든채 '축복'을 내리고 있으며, 왼손은 투명한 구슬을 들고 있는 장면이다. 이 투명구슬은 세계와 우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출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      ==============================       다빈치 진품 살바토르 문디 53년전 7만7000원에 팔린 이 그림… "2000억원 넘는 다빈치 진품"     김재곤 기자  조선일보 2011.07.04     경매 감정가로는 사상 최고… 지금껏 제자작품으로 알려져 지난 수백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1958년 경매에서 단돈 45파운드(약 7만7000원)에 팔렸던 그림 '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가 최근 전문가들 분석결과 다빈치가 그린 작품으로 판명됐다. 이 작품이 경매에 부쳐질 경우 최고 2억달러(약 2134억원)를 호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난주 미국에서 발간된 월간 아트뉴스 매거진이 보도했다. 지금까지 역대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작품은 지난 2006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4000만달러에 거래된 미국 추상(抽象)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의 작품 '넘버5(No.5) 1948'이다.     ▲ '살바토르 문디'… 오른손가락을 꼬아 축복을 기원하고 왼손으로는 구체(球體)를 감싸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그림‘살바토르 문디’(세계의 구세주). 이 작품은 지난 수세기 동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평가절하됐으나 최근 복원작업을 통해 다빈치가 그린 진품으로 판명되면서 진가(眞價)를 찾게 됐다.    /데일리메일 뉴시스예수의 모습을 목판 위에 유화(油畵)로 표현한 '살바토르 문디'는 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인 지오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됐다. 원래 청교도혁명으로 처형된 영국의 찰스 1세가 소장하다 왕정 복고 후 아들인 찰스 2세가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동안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결국 이 작품은 19세기에 영국의 수집가 프란시스 쿡경(卿)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 1958년 경매에 부쳐져 45파운드에 팔렸다.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 것은 약 6년 전 이 작품을 공동으로 취득한 미국의 화상(畵商) 컨소시엄이 기울인 집요한 노력 덕분이다. 이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수세기 동안 이 그림에 얹힌 덧칠을 벗겨내는 등 복원작업을 거쳐 작품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놨다. 영국, 이탈리아, 미국의 르네상스 미술 전문가들이 최근 모여 과학적 기법 등을 동원해 감정한 결과 이 작품이 다빈치가 직접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복원작업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미술사학자 피에트로 마라니는 "살바토르 문디의 복원작업을 통해 예수가 입고 있던 옷의 경이로운 색감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오는 11월 영국 런던의 국립미술관에서 열릴 다빈치전(展)에서 다른 60여점의 다빈치 그림과 함께 전시된 뒤 경매에 부쳐질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 경매가 5000억원 다빈치 그림, 경매 전 ‘수정’ 논란 (ZOGLO) 2017년12월25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에서 ‘리터칭’(수정) 흔적이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구세주’라는 뜻의 이 작품은 지난달 15일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5000만 달러, 한화로 약 4971억 원에 낙찰됐다. 엄청난 기록을 세운 경매의 낙찰자가 다름 아닌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 한 번 관심이 쏠렸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살바토르 문디’에서 리터칭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독일의 예술품 전문가인 마틴 프래쳐다. 그는 2011~2012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에서 공개됐던 ‘살바토르 문디’의 작품 사진과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던 작품의 사진을 비교한 결과, 그림 속 예수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 부분의 주름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래쳐는 미술품보호를 위해 설립된 단체인 ‘아트워치’(Artwatch) 영국지사 관계자에게 곧바로 이 소식을 알렸다. 아트워치 관계자가 살펴본 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과 한 인터뷰에서 “지난 달 경매에 나온 작품과 2011년 런던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해당 작품이 런던 박물관에 전시되기 전 대대적은 복원작업이 있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후 ‘세기의 경매’가 열리기 전 원작이 달라질 정도의 리터칭 과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경매를 담당했던 크리스티의 대변인은 “해당 작품이 경매에 나가기 전 재복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작품을 담은 두 사진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은 작품의 세척 및 보존과 건조 과정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부산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크리스티 측은 경매 낙찰자 측에 경매 전 있었던 재복원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런던대학교 워버그 연구소의 한 전문가는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이 사실 때문에 4억 5000만 달러의 경매가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부다비 문화관광부는 지난 8일(현지시간)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걸작 ‘살바토르 문디’를 확보했다”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현재 대여 중인 다빈치의 또 다른 걸작 ‘라 벨 페로니에르’와 함께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422    세계 3대 박물관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보다... 댓글:  조회:1424  추천:0  2017-10-22
  루브르 박물관은 나롤레옹 1세~3세가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했는데 그때 천정과 벽면 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제작했을 것이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전시관은 당시 만든 것으로 종합예술을 보는듯하다       2층 쉴리관 전시관 입구 전경.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관을 조각, 회화, 의미 등이 복합되어 종합예술이라 부른다                       대부분 천정화도 미술과 조각이 사용되었으며, 내용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다고 한다                     거대하고 화려한 천정화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루브르 박굴관의 천정화는 너무 화려하여 세계 3대 박물관 중에는 없고 러시아 상테부르크 박물관과 비슷하다                     복도 천정화도 조각과 그림이 결합된 환상적인 종합 예술 이다                     디도의 죽음 -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635년                                           젊은 여자에게 선물을주는 비너스(프레스코화) - 산드로 보티첼리(1483~1485)                       한 청년이 7명의 비너스에게 예술 교육(프레스코화) -  산드로 보티첼리(1483~1845)                     들판속에 있는 세례 요한의 바카스 - 레오나르도 다빈치(1510~1515)                         젊은 세례 요한 - 레오나르도 다빈치(1513~1515)                       안나 셀브릿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519년                         모나리자(Mona Lisa)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작품이 방탄유리에 둘러싸여 있다                     모나리자(Mona Lisa) 작품은 매일 1,500명 이상이 관람한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 있다. 루브르 3대 명작은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승리의 여신 니케가 그것이다. Lisa 라는 이름의 여 인이다. 모델은 누구인가?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명확한 것은 없다. 모나리자는 특유의 미소, 중성적인 여인의 모 습과 눈썹이 없는 여인등이 논란을 일으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그림에서 최초로 원근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모나리자(Mona Lisa)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1513년 완성한 작품이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모작이고 진품은 박물관 수장고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다. 주요 작품은 모작을 전시하고 진품은 보관 한다                         가나의 혼인 잔치 - 파올로 베로네제((Peter Paul Rubens) 1563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Combat de David et Goliath) - 다이델레 리차아렐리 Daniele Ricciarelli (1715)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 다이델레 리차아렐리 Daniele Ricciarelli (1715), 양면으로 된 그림                                                 펠리시티의 승리보다 위험 - 오라지오 젠텔 스치(1623)                                                             4층에서 내려다 본 루브르 박물관 광장 전경                     파손된 선박 - 그레이즈 진 밥티스트(Greuze Jean Baptiste)                           밀크 메이드(The Milkmaid) - 그레이즈 진 밥티스트(Greuze Jean Baptiste)                           처벌받는 아들 - 그레이즈 진 밥티스트(Greuze Jean Baptiste) 1769년                     아버지의 저주와 처형 된 아들 - 그레이즈 진 밥티스트(Greuze Jean Baptiste) (1725)                   잠자는 큐피트와 푸시케 - Louis Jean Francois Lagrenee(1805)                       각 전시관는 제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그림은 전시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쉴리관 전시실은 전시관 하나하나의 천정화가 종합 예술이다                     해수욕장의 아침 - 조셉 베르네(Joseph Vernet) (1772)                                           Centaur Nessus에 의한 Deianeira의 납치 - Louis-Jean-François Lagrenée(1755)                     엘리자베스 루이스 비게(Elisabeth-Louise Vigee)와 딸 Julie(쥴리) - 엘리자베스 루이스 비게(1786)                   백작 부인 Skavronskaia , Mole-Reymond 부인(1786) - 엘리자베스 루이스 비게(Elisabeth-Louise Vigee)                                                 그리스 미의 세 여신 - Baron Jean-Baptiste REGNAULT(1754)                   제우스의 크로톤의 딸의 선택 (1789년) - 프랑소와 알드레 빈센트(Francois-Andre Vincent)                       가슴이 어린 소녀 (왼편), 남작 피에르 나르 세스 게린 젊은 여인(오른편) (1794) - Pierre-Narcisse Guérin                                           불만에 찬 흑인 여인 초상화 - Marie-Guillemine(1800) 루브르 박물관의 유일한 흑인 초상화                     나르시스 귀족 남작(1802 좌측), Dido에게 트로이의 도시의 불운을 말한 Aeneas(1815 우측) - Pierre-Narcisse Guérin                   Jean Goujon의 스튜디오에서 앙리 2 세와 포아티에의 다이앤 - Alexandre-Évariste Fragonard(1830)                     엔디미온(Endymion 그리스의 신) - 앤 루이스 지로 데(Anne-Luis Girodet) (1767)                     나폴레옹 1세 대관식 - 노트르담 대성당 (1804)                         알렉산더 대왕 앞에 데려온 Timoclea - domenico zampieri(1581~1641)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들라크루아(1830년),  부르봉 왕가를 무너떠린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819년. 프랑스 유람선이 세네갈에서 침몰한 사건 배경                           터키 왕의 후궁(The Grand Odalisque) - 장 오귀스트 (1814)      
요약 1887. 7. 28 프랑스 블랭빌~ 1968. 10. 2 뇌이. 프랑스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다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 관습적인 미적 기준을 무시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여 미술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다다이스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반(反)예술주의자였던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회화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무시당했다. 1960년까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만이 그의 중요성을 주장했으며, 제도권의 미술계와 기성 비평가들은 그를 다만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로 보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야 미국에서 신비스러운 대가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그의 태도는 팝아트와 옵아트를 비롯해 각지에서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환영받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그는 시각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정신도 변화시켰다. =============================     출생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블랭빌 사망 1968년 10월 2일, 뇌이 국적 프랑스 요약 팝아트와 옵아트 등에 영향을 끼친 20세기 프랑스의 미술가로 주요 작품은 . 프랑스에서 태어나 판화를 제작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예술적 기질을 나타내며 여러 양식을 접했으나 모방을 꺼려 자신만의 양식을 고집했다. 를 비롯해 누드를 주로 그렸지만 사실적이 아닌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대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작품 뒤로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레디메이드로 불리는 파격적인 개념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랑스의 미술가이다.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다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 관습적인 미적 기준을 무시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여 미술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다다이스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반(反)예술주의자였던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회화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무시당했다. 1960년까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만이 그의 중요성을 주장했으며, 제도권의 미술계와 기성 비평가들은 그를 다만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로 보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야 미국에서 신비스러운 대가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그의 태도는 팝아트와 옵아트를 비롯해 각지에서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환영받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그는 시각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정신도 변화시켰다. 뒤샹의 생애 초기 뒤샹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지만, 그의 가문에는 해운업자이면서 판화를 진지하게 제작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전통이 있어 뒤샹 집안의 여섯 자녀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다. 1875년에 태어난 가스통은 나중에 자크 비용으로 알려졌으며, 1876년에 태어난 레이몽은 스스로를 뒤샹 비용이라고 불렀다. 남자형제 중 막내인 마르셀과 1889년에 태어난 누이동생 쉬잔은 미술가로서 뒤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1904년 10월에 마르셀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두 형은 이미 그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마르셀 르프랑수아의 초상 Portrait of Marcel Lefranois〉은 그가 이미 일정한 양식과 기법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뒤 몇 해 동안 뒤샹은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리면서 당대의 주요한 회화경향(후기 인상주의 및 폴 세잔의 영향, 야수파, 입체파)을 빠르게 경험했고 여러 양식을 두루 실험하기는 했으나 특정한 양식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는 모방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자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평범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야수파 운동이 사라진 지 3~4년 뒤에 그는 야수파 양식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다. 〈미술가의 아버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1911년이 되어서야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그는 입체파와 전위적인 모든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귀었다. 그의 또다른 절친한 친구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있는데, 그는 완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1909년까지 가장 정통적인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였다. 뒤샹과 그는 둘 다 입체파가 너무 체계적이고 정적이며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둘 다 '반(半)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움직임을 '비대상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곧장 나아갔고, 그 가운데서 예전에 그 명칭만 알고 있었던 '미래주의'와 '추상주의'를 경험했다. 작품 〈누드 Nude〉 1911년 한 전시회에 뒤샹은 거의 단색조의 실루엣 5개를 중첩시켜 구성한 〈초상 Portrait〉을 출품했다. 이렇게 몸이 움직이는 연속적인 단계를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의 착상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주된 차이점은 〈초상〉에서 캥거루 같은 실루엣이 눈에 띄는 반면, 〈누드〉에서는 누드의 모습이 전혀 없고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기계의 모습이 보일 뿐으로, 이를 통해 회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비대상적이고 거의 영화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1912년 2월 제28회 앙데팡당전에 〈누드〉가 출품되었을 때 뒤샹 형제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는 이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이 위원회의 위원들도 보수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혁신적인 시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뉴욕 시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충격을 준 수백 점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는 악평을 듣고 뉴욕에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 자극을 받아 뒤샹은 25세에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뒤샹이 그의 작품에서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는, 거의 그림 자체를 비웃는 듯한 아이러니를 나타냄으로써 그림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도 허물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장난투였다. 입체파조차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뒤샹의 유일한 모티프는 도발성이었던 것 같다. 미술과의 작별 1912년 〈누드〉를 발표한 뒤샹은 그뒤 겨우 몇 점의 그림을 더 그렸다. 그 가운데 몇 작품, 특히 둘 다 뮌헨에서 제작된 〈처녀에서 기혼녀로의 변화 Le Passage de la Vierge à la Mariée〉와 〈기혼녀 Mariée〉(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이것들은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또는 추상주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인체에 대한 뒤샹의 독특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뒤샹이 화가로서 매우 뛰어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 안에서 미적 가치를, 이른바 상식 세계에 맞서는 공격적인 지성으로 바꾸려 했다. 일찍이 1913년에 그는 매우 난해한 작품인 〈거대한 유리, 또는 독신남자들이 발가벗긴 신부, 그 조차도 The Large Glass, or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하여 망막미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산업 디자인의 기하학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 및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타낸 기계의 청사진 같았다. 〈누드〉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유리〉도 현대 회화 작품들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것이다. 1913~23년에 뒤샹은 거의 그림을 위한 예비 연구와 습작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기는 했으나 결코 작품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 할 이른바 '레디메이드'를 고안했다. 1913년에 그는 단지 평범한 자전거 바퀴에 지나지 않는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제작했다. 1914년에 만든 〈약국 Pharmacy〉은 겨울 풍경이 담긴 상업 인쇄물에다 약제사의 병을 생각나게 하는 2개의 작은 형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러한 레디메이드가 미술 작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데 대해 비웃는 태도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고 긍정적인 가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서였다. 레디메이드를 계기로 현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창작과 비평의 혼합물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 복무에서 면제된 뒤샹은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살며 작업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1915년 6월,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은 그를 유명인사로서 환영했다. 지식인 단체들에서의 따뜻한 환영도 그의 기분을 고무시켰다. 부유한 시인이자 수집가인 월터 아렌스버그는 그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작업실을 차려주었으며, 그는 거기에서 곧 〈거대한 유리〉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아렌스버그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누드〉를 그린 화가인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미술관들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전업화가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의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프랑스어 강습을 했다. 그는 그무렵 작품을 팔면 인기를 끌었을 것이지만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무료로 나누어 주거나 일부러 적은 금액을 받고 파는 데 만족했으며, 그후에도 계속 그러한 미술가로 남았다. 그는 아렌스버그를 도와 〈누드〉를 비롯한 그의 작품의 상당수를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이것들이 아렌스버그 컬렉션의 주요작품이 되었으며, 뒤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넘어갔다. 1923년 작업을 그만둘 때까지 8년을 더 작업한 〈거대한 유리〉 외에 뒤샹은 단지 몇 점의 레디메이드만을 더 만들었다. 그는 1917년에 독립미술가협회의 제1회 전시회에 〈샘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는 이 단체의 창립회원이었지만, 그 작품에 'R. Mutt'(얼간이)라고 서명했기 때문에 그것은 거절당했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피카비아가 잡지 〈291〉(1917)에서 뉴욕 시에 소개한 다다이즘 운동을 몇 년 앞질러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뒤샹은 아렌스버그와 H. P. 로셰를 도와 〈맹인 The Blind Man〉과 〈롱롱 Rongwrong〉을 발행했는데, 전자는 단 2회만 발행되었고 후자는 단 1회만 발행되었다. 그뒤 1921년에 화가인 맨 레이와 함께 〈뉴욕 다다 New York Dada〉를 단 1회 발행했다. 1918년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유리〉를 월터 아렌스버그에게 팔았다. 이 작품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또다른 그림을 팔아 나온 돈으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개월 동안 지냈으며, 그곳에서 정전(停戰) 및 그의 형 레이몽 뒤샹 비용과 기욤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1919년 그는 피카비아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최초의 다다이스트들과 교류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장 유명한 레디메이드인,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붙인 〈모나리자 Mona Lisa〉라는 사진작품이 나왔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의 미술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미술은 이제 막 끝난 전쟁의 공포를 일으킨 파렴치한 문명의 일부였다. 1923년 2월에 뒤샹은 〈거대한 유리〉의 작업을 멈추고 영원히 완성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해가 지남에 따라 어떤 종류의 예술활동도 점점 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영화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때까지 그가 만든 것들은 다만 잠재적인 기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작동하고 움직이는 실제 기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계는 광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단편영화인 〈무기력한 영화 Anemic Cinema〉(1926)가 나왔다. 또한 "광학적 축음기 음반"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을 만들면서 그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술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보잘 것 없는 기계들은 산업의 야망을 비웃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는 나머지 시간에는 체스 놀이에 열중하여 국제시합에 참가하기도 하고 1932년에는 그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뒤샹은 미술단체들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주로 예전의 다다이스트 친구들로 이루어진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는 관계를 유지했다. 1934년 그가 〈거대한 유리〉에 관한 일련의 자료들을 담은 〈초록 상자 Green Box〉를 출판하자 초현실주의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뒤샹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논문을 써서 1935년 파리의 〈미노토르 Minotaure〉지에 실었다. 그후 초현실주의자들과 뒤샹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으며, 뒤샹은 브르통을 도와 1938~59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든 작품전시회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그는 그의 작품들을 복제한 68점의 축소품들이 들어 있는 〈부아탕발리즈 Boîte-en-valise〉라는 화첩을 만들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며 그의 작품을 국외로 몰래 옮겼다. 결국 그것은 뉴욕 시로 옮겨졌으며, 그는 거기에서 브르통과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망명 중인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 10월과 11월에 뉴욕 시에서 열린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료 망명객들과는 달리 그는 미국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전쟁 기간 중 뉴욕 시의 현대미술관에서 〈거대한 유리〉를 전시하여 명성을 회복했으며, 1945년에는 미술잡지인 〈전망 View〉의 특별호에 그가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2년 뒤 그는 초현실주의 전시회 문제로 브르통을 도우러 파리에 갔으나 곧 뉴욕 시로 돌아와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54년 티니 새틀러와 결혼한 뒤로는 예전보다도 더욱 은둔해서 살았으며,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기묘하고 독특한 물건을 만들고 체스를 두며 살았다. 이러한 조용한 생활은 1960년쯤 깨지고 말았다. 그 무렵 새로운 세대의 미국 미술가들은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뒤샹이 이미 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세계 곳곳으로부터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고 그의 작품 회고전들이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레디메이드들이 그의 허락하에 제한된 수로 복제된 것이며, 가장 놀랄만한 일은 그가 뇌이에서 죽은 뒤 그의 친구들이 그가 마지막 20년 동안 남몰래 〈명제:1. 폭포, 2. 조명 가스 Etant donnés : 1. la chute d'eau, 2. le gaz d'éclairage〉라는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데, 무거운 나무문에 2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어 그것을 통해 뒤샹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   출생 1887년 07월 28일 사망 1968년 10월 02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샘〉, 〈L.H.O.O.Q〉,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자전거 바퀴〉, 〈거대한 유리〉, 〈주어진 것들〉 등 전통적인 선입견을 깨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예술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성상 파괴주의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르셀 뒤샹은 일상 속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견에 도전한 현대 미술의 혁명가이다. 변기에 사인을 한 〈샘〉과 모나리자의 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등 일견 엉뚱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미술품의 생산과 유통에 중대한 고찰을 던지며,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쪽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해운업자인 동시에 판화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에게 문학과 그림, 음악 등을 가르쳤다. 뒤샹 형제 6남매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으며, 뒤샹이 학교에 다닐 무렵 큰형 둘은 각각 법률과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미술가의 길을 걸었다. 큰형은 자크 비용이란 이름으로 화가로 활동했고, 둘째 형은 레이몽드 뒤샹-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조각가가 되었다. 누이동생 쉬잔 역시 이후 쉬잔 뒤샹-크로티라는 이름으로 화가로 활동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예술 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고 한다. 뒤샹은 이런 분위기에서 고향 마을 풍경을 습작하며 자랐고, 특히 모네의 화풍을 좋아했다. 1904년에 중등학교를 졸업한 뒤샹은 형이 있는 몽마르트르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형 주변의 예술가, 작가와 어울리면서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판화가 오딜롱 르동을 가리켜 자기 작품의 시작점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말라르메,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작품과 상징주의 문학에 경도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렸으며, 판화 기법도 배웠다. 또한 인상주의와 야수파, 입체파적 화풍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특정 작품을 모방하는 건 꺼렸다. 마르셀 뒤샹 1912년, 뒤샹은 예술가 활동의 큰 전환점이 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를 완성했다. 입체파 양식을 받아들여 그린 그림이었으나 이는 ‘이즘’을 중요시하는 입체파 그룹에게 미래주의적으로 여겨지며 냉대받았다. 이 일로 그는 체계적이고 구속적인 ‘이즘’에서 탈피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이때 그는 ‘이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어떤 그룹에도 낄 이유가 없어. 나는 앞으로 나 자신에게만 의지하겠어’라고 결심했다. 이 작품은 이듬해 뉴욕 아모리 쇼에 출품되었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때의 성공을 잘 이용했다면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현대 젊은 미술가로서의 위상과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 악평을 들은 그림이 뉴욕에서 성공한 일은 오히려 그에게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믿음을 허물어트리고, 회화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뒤샹의 초기 습작 및 회화 작품들을 보면 그가 화가로서 뛰어난 기교와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지나치게 지성적이었던 젊은 화가에게 예술과 상식 세계에 대한 회의를 안겨 주었고, 그 결과 현대 미술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레디메이드(Ready-made)1) 를 고안하게 만들었다. 뒤샹은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지만 새로운 작품 양식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공산품이 쏟아져 나오던 20세기 초기의 사회상과 산업 디자인을 받아들였다. 1912년 브랑쿠시, 페르낭 레제와 함께 항공 박람회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말에서 예술가의 기교나 솜씨에 의존하여 작품을 제작하던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관념, 미술품과 기성품의 경계 등이 허물어지면서 현대 미술이 탄생했다. 인공물이나 자연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제작하는 현대 미술 작품들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일상과 예술을 혼돈스럽게 뒤섞는다. 이 무렵 뒤샹은 절대적이고 분명한 노선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에 회의를 느끼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913년 첫 번째 레디메이드 작품 〈자전거 바퀴〉를 제작했다. 평범한 나무 의자와 자전거 바퀴를 결합한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기성품이라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조합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란 작품을 제작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정신 표현, 즉 아이디어에 있다고 사고를 전환시켰다. “나는 미술을 믿지 않는다. 미술가들을 믿는다.”라는 말 속에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레디메이드가 예술에 대한 진지함을 비웃는 태도 이상으로 여겨지며 현대 미술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는 것은 이로부터 약 40여 년이 지난 후이다. 그 후 10여 년간 뒤샹은 레디메이드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했다. 물건을 개조하는 수고를 들이기도 했으나 때로는 제목만 붙이기도 했다. 눈 치우는 삽을 구입해 거기에 서명을 하고 〈부러진 팔보다 앞서서〉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으며, 1917년에는 변기를 구입해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하고 미국 독립미술가협회가 개최하는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이 작품이 20세기 예술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꼽히는 〈샘〉이다.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이 작품은 예술품 전시 참여를 ‘모든 사람, 모든 작품에 개방한다’라며 예술의 자유를 표방한 독립미술가협회의 슬로건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상도, 심사위원도 없는 이 전시회에서 뒤샹은 배치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전시 참여를 허락받지 못했고,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의 사진으로만 남았다. 뒤샹은 이를 비웃으며 자신이 창간한 잡지 〈더 블라인드 맨〉을 통해 작품 의의를 설명했다. 무트 씨가 직접 〈샘〉을 만들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용품을 선택하고, 그것에 새로운 관점과 이름을 붙임으로써 본래의 사용가치에 대한 고려가 아닌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창조되도록 했다. 〈샘〉 1919년, 뒤샹은 길거리에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인쇄된 싸구려 엽서를 한 장 구입했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고, 알파벳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어 넣었다. 프랑스어로 ‘엘.아슈.오.오.뀌’로 읽히는 이 단어는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라는 의미의 ‘Elle a chaud au cul’를 연상시켰다.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 행위는 기존의 예술품과 예술가가 지니는 전통, 신화적 권위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지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천재성, 창조성에 관한 맹신을 무너뜨리는 뒤샹의 이 같은 행위는 반예술(Anti-Art)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현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반예술이란 뒤샹이 1914년 창안한 것으로, 예술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일견 다다이즘(Dadaism)2) 운동과도 비슷한데, 뒤샹은 다다이즘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이미 이런 사고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샹은 1923년 〈거대한 유리〉를 미완성으로 남겨 두고, 예술 활동을 중단했다. 파리로 돌아간 그는 체스를 두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프로 체스 선수가 되어 파리와 뉴욕을 오가기도 했다. 이런 행동 자체가 예술 표현 행위에 대한 조소로 읽히며,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뒤샹은 이 시기에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게도 어떤 유파나 이즘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위대한 침묵’으로 일컬어지는 삶을 살았다. 미술가 그룹들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예전의 다다이스트였던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친구들과만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한편 뒤샹은 공식적으로는 예술 활동을 중단했지만,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20년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작업한 최후의 작품 〈주어진 것들〉은 1968년 그가 생을 마감한 후 유언에 따라 공개되었다. 뒤샹의 작품이 지닌 중요한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대의 미국 미술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놓았다(제시하다)고 평가받으며, 국제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용한 생활을 하며 ‘때때로 잊힌 예술가로 남고 싶다’라는 바람과는 달리 뒤샹은 ‘예술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성상 파괴주의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현대 미술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현대미술의 혁명가, 뒤샹      1917년 4월 10일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갤러리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날이곳에서는 그동안 예술에서 진행되어온 유럽의 독보적인 행보를 저지하고 미국의 새로운 미술을 장려하고자 창설한 의 첫 번째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주최측인 독립미술가협회는 출품 작품에 있어 어떠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누구나 출품비만 내면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전시 조건을 내걸었지만, 이러한 ‘관대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과 조직위원회를 불쾌하게 만들며 전시를 거부당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7.28-1968.10.2)의 이었다.     마르셀 뒤샹, , 1917.       물론 작품은 실명으로 출품되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그 작품이 당시 전위미술의 수장 마르셀 뒤샹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출품비와 함께 소포로 배송된 작품은 상점에서 누구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였고, 하단엔 ‘R. Mutt 1917’이라는 작가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 작품은 이게 전부였다. 어디한군데 작가가 창의성을 발휘해 공들여 제작한 부분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을 머트라는 사람의 장난질로 여긴 전시 조직위원회는 당혹함과 혐오감을 분출하며 작품의 전시를 거부했다. ‘출품비를 낸 작가는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라는 분명한 작품 출품 조건이 이 조건을 만든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쉽게 깨어진 것이다. 사실 에서 작가의 ‘독립’은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샹은 주최측인 독립미술가협회의 이사이자 전시조직 위원이었으므로 이 소동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뒤샹은 조직위원회의 허울뿐인 약속과 위선을 꼬집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머트씨는 세 가지 일을 해냈다. 그는 오브제를 선택했고, 그것에 새로운 명칭(샘)을 부여했으며 원래의 실용적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시켰다”       예술은 발견되는 것이다? 레디메이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는 ‘기성품’을 의미하는 모더니즘 아트의 장르로, 1915년 뒤샹이 대량생산된 물품으로 자신의 작품 만들고 이를 지칭하면서 만들어낸 용어이다. 뒤샹은 예술사의 전설이 된  이전에도 레이메이드 작품을 여러 번 만들었다.     마르셀 뒤샹, , 1913.    마르셀 뒤샹, , 1914.        작가의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성품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작가가 아닌 사람이 선택한 물건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작가가 선택한 물건과 똑같은 나머지 기성품은 왜 예술품이 될 수 없는가? 뒤샹을 레디메이드는 기존의 예술인식 방식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의문을 품게 한다.     뒤샹의 주장대로라면 예술가가 ‘발견’하여 선택한 물건은 그것이 기성품 이라 하여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누구나’가 아닌 ‘예술가’인데, 뒤샹은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심상’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은 사물이 아닌 심상에 깃들어 있다는 것, 즉 예술가의 심상이 담겨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캔버스, 대리석, 목재, 석재 등의 재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선 심상을 떠올리고, 기획된 심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을 찾는데 이것이 기성품이라면 가져다 쓰면 된다는 것! 이러한 뒤샹의 단순한 논리는 기존의 예술체계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으로 전통적인 예술계에게 큰 반란으로 받아들여졌다.     뒤샹은 미적 가치의 새로운 가능성과 다양성을 제시하여 미술가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손을 해방시켰다. 한계가 없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작품 활동을 전개 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뒤샹에게 빚진 바가 크다.     칼 안드레, , 공업용 벽돌, 1966     트레이시 에민,  , 작가가 사용하던 침대, 1998      케빈 터크 ,, 먹다남은 사과,  2006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되어준 뒤샹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정신은 현대미술을 진일보 시켰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가 되었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어법      예술에서 뿐 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권위의식, 통념적인 의미, 남성적인 과시를 부정하고자 했던 뒤샹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까지 바꾸는 모험을 한다. 뒤샹은 자신을 여성처럼 치장하고 유혹적인 포즈를 하고선 카메라 앞에 섰다.   마르셀 뒤샹, , 1920.       완전히 다른 성 정체성을 부여한 자기 자신에게 ‘로즈 셀라비’라는 가명도 만들어줬다. 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달아주며 동음이의어의 말장난같은 언어의 유희를 즐겼는데,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도 프랑스어로 읽으면 ‘에로스 세 라 비(Eros, c`est la vie 사랑 그것이 인생이다)’나 ‘아로제 라비’(Arroser la vie 삶을 위해 건배)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로즈 셀라비’라는 명칭은 단순히 여성인 자아를 표상하는 이름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샹의 중의법적 언어유희가 만들어낸 작품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에 콧수염을 그려놓고 ‘L.H.O.O.Q'라는 글귀를 적은 작품일 것이다.     마르셀 뒤샹, , 1919.       ‘L.H.O.O.Q’는 프랑스어로 읽으면 ‘엘.아슈.오.오.뀌’로 발음되며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매우 외설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예술사에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에 이런 심한 장난과도 같은 행위를 더한 것은 어떠한 이유일까? 원작을 조롱하고자 하는 불순한 생각에서였을까? 그러나 뒤샹이 조롱한 것은 가 아닌 예술작품에 대한 우상화된 통념, 즉 대중들이 가지는 예술의 신격화를 조롱한 것이다. 예술에 있어 과거의 전통과 권위를 무력화 시키고자 한 뒤샹은 우리에게 예술의 본래가치를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마르셀 뒤샹의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오브제를  전시함으로서 사물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미술품으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미술사에 처음 오브제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 샘과 같은 맥락에서의 작품이다. 자전거의 바퀴는 지면에 닿았을때에 그 기능을 다하는 자전거의 부품이다. 자전거 전체에서 바퀴부분만을 띄어내어 원래 있던 지면이 아니라 배치자체를 완전히 바꿈으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고 이렇게 물질의 본래기능과 분리시켜 전혀 새로운 시각효과를 연출하였던것은 당대에는 기적에 가까운 시각의 대 혁명이었다       마르셀 뒤샹 -모나리자 어떤이가 있어 대예술가의 대작을 이렇게 난도질 할 수 있는가.. 뒤샹은 그동안 정통적으로 추앙받던 예술가의 작품에 수염하나로 코메디를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싸인을 집어넣었다. 너무도 극단적인 그의 발상에 사람들은 경악하였으리라..     마르셀 뒤샹 다음의 작품을 보면 마르셀 뒤샹의 의도가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해진다. 처음 콧수염을 붙이면서 시작된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다음의 7장을 통하여 매우 극단적으로 마치 극단의 끝을 보여주려는 양 시각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그것이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항변하는 것일까..       앤디워홀 그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 마릴린먼로 이 주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으로 이미 앤디워홀이 말하려하는 것의 반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없다. 상업적인것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들인 작가의 대표작이다.       앤디워홀 뒤샹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한장으로 던져진 마릴린먼로를 작가 마음대로 해부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릴린먼로가 지닌 다양한 칼라를 이야기하는가. 대중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다양성의 표출인가 미국 pop아트의 철학적 기조가 이 작품하나로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앤디워홀 사람들은 저앞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이치, 그것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들, 이도저도 아니라면...그림하나하나에서 품어나오는 강렬한 색상 그것들을 애기하고는 있지 않을까?       앤디워홀 다양한 시각적 모색은 드디어 이 작품을 통해 역광이라는 주제를 선사한다 빛의 특징은 위에서 아래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비추어지는 빛의 성질로 인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은 매우 상식적인? 형태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앤디워홀은 그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림으로서 일상에서는 그간 경험치 못했던 새로운 시각적 지평을 열어준다.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 두사람은 미술가이기전에 혁명가이다 그 이전의 화가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릴것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였다면 이 두작가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에 대한 파격적인 고찰이 있었던 것이다. 현대미술의 다양성 그 지평을 열어준 이 두 작가는 후세에 더더욱 그 빛을 더할것이다. 아트나우    
420    [쟁명] = 세상은 넓고 그림세계는 요지경이다... 댓글:  조회:2159  추천:0  2017-10-22
{필자 주:- "오마주"란?ㅡ} 본래 오마주(Hommage)는 존경(respect),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예술과 문학에서는 존경하는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원작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미술에만 국한된 건 아니고요.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퀜틴 타란티노 감독은 감독 오우삼의 영향을 받아, 본인의 작품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1992)에서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牒血雙雄)》(1989) 등에 나오는 권총 액션 장면을 각색하여 삽입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영향을 받아 인터스텔라를 제작했습니다. ///(위키백과 사전) @@ 추가질문  ㅡ「 "오마주 " 그림중에 대표적인 화가 및 작품을 알려주세요? 」  마르셀 뒤샹,  유화, 퐁피두센터 소장, 1919   살바도르 달리,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1954   파블로 피카소, 유화, 피카소 국립 미술관 소장, 1951     프란시스코 고야, 유화, 프라도 박물관 소장, 1814   에두아르 마네,  유화,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63     조르조네(혹은 티치아노), 유화, 루브르박물관 소장, 1509   //////////////////////////////// ① 제 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1466년 14살의 소년 다 빈치는 유명한 화가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으며, 엄격한 사실주의 기법을 터득하였다.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다 빈치가 그린 천사가 스승보다 더욱 뛰어 나자, 제자의 천재성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는 마돈나를 중심으로 구도를 잡고 그를 정점으로 하는 삼각형 구도와 걸맞추어 안정되게 표현한다.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지네브라 데 벤치」, 「마돈나 베아노」에서 그의 치밀한 사실기법은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 공기원근법)를 병용함으로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풍은 엄격한 사실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 할 수 있다. ② 제 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레오나르도의 고전 예술은 사실상 제 1차 밀라노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축적된 그의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다. 1482년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의 지배자 스포르차의 궁정에 머물며 수많은 걸작을 완성했다. 밀라노에서의 제작에서는 15세기의 잔재가 완전히 없어졌다. 극적인 내용 표현을 위하여 구도는 빈틈없이 계산되고 주관적 정신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2차원적으로 나타낼 때 자유로운 상상의 작용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그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을 요구했다. 즉 입체의 형태, 상대적인 위치, 조명, 색, 비례, 구조, 그리고 자세는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어야 했다. 「최후의 만찬」은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함으로서 다음 세기 고전양식을 이미 완성하였다. 또한 과학 연구와 저술에 힘쓴 시기이기도 했다. ③ 제 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공격해 오자 피렌체(Florence)로 돌아 왔다. 이 시기에 그는 「모나리자」를 제작하였고, 특히 과학연구에 몰두한 시기이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며, 일반인들에게 초상화에서 단연 으뜸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정작 작품의 감상보다 집중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 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소 풍만하게 보이는 모나리자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로 생각된다. 그 당시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가는 허리과 작은 얼굴, 가는 목의 여성들의 기준에 반하지만 여성의 신비스러운 미소, 빛나는 눈, 볼의 명암과 흐려지는 배경의 조화는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이때 이미 다빈치는 류마티즘과 오른손 마비로 주위의 섬세한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왼손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며 「모나리자」,「성요한」,「암굴의 성모」와 같은 아름다운 작품들로 자신의 집을 장식해냈다. 「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이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모델이었던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의 뎃생이다. 모나리자그림의 이마의 넓이, 콧등의 아래쪽이 두드려진 형, 작은 입 그리고 맑은 눈동자 등이 닮아 동일 인물로 추정 되었다. ㅁ 모나리자에 관한 추측설- 또 하나의 진품?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귀족의 세 번째 부인 모나리자 델 지오꼰도로 알려져 있는데, 유명한 메디치의 정부 '라 지오꼰다'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란을 빚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초상화를 그릴 때 항상 두 장 이상을 그렸다고 지적하면서 뉴욕의 소장자인 헨리 퓰리쳐 박사는 자신이 가진 것이 또 하나의 모나리자라고 주장한다. 레오나르도는 4년에 걸쳐 이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것이 완성되자 이를 지오꼰도가에 넘겼다. 그 후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기 직전에, 주일리아노 데 메디치로부터 자기의 정부인 꼰스딴자 다발로스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우연히 꼰스딴자는 모나리자를 약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라 지오꼰다' 즉 ''미소짓는 여인'이라는 뜻의 별명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또 한점의 모나리자 델 지오꼰도의 초상화를 손질하여 그 그림의 얼굴을 꼰스딴자의 얼굴로 바꾸어 놓았지만 메디치는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정부 꼰스딴자를 버렸기 때문에 그 그림을 사지 않았다. 페오나르도는 팔리지 않았던 다른 그림들과 함께 제2의 모나리자를 파리로 가지고 갔고 루브르 박물관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퓰리쳐 박사는 현미경 사진으로 이 초상화를 검사하도록 했는데, 거기에서 나타난 지문이 다른 진짜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지문과 일치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화필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그림 물감을 문질러 특수한 효과를 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 겨로가 그의 지문이 뚜렷하게 남아 오늘날 그의 작품의 진짜 여부를 지문의 유무로 판정하게 되었다.또 하나의 증거로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의 화실에서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라파엘이 그 광경을 그린 스케치다. 라파엘의 스케치에는 배경에 있는 두 개의 기둥 등 서너 개의 특징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런던에 있는 초상화에는 나타나 있으나 루브르 박물관의 것에서는 볼 수가 없다. 또한 당시 그 부인은 젖먹이 딸의 죽음을 애도하여 아주 엷은 베일을 쓰고 있었다. 런던판 초상화의 젊은 여인 모나리자는 상중임을 뜻하는 얇은 투명베일을 머리에 걸치고 있다. 모나리자는 미소 짓는 여인이라는 뜻의 '라 지오꼰다'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다. 모나리자에 관한 추측설-레오나르도 자신이 모델이다? 우에노 마사히코는 일본의 유명한 법의학자이다. 그는 알고 지내던 샹송가수의 아이디어로 모델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 빈치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서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그린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보았다. 왼쪽 눈 안쪽의 콧두덩에 조그만 사마귀 같은 혹이 있다. 다 빈치의 자화상에는 반대쪽인 모나리자의 오른쪽 안쪽의 콧두덩에 작은 혹이 있었다. 더구나 모나리자의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나뉘는 부분이 언덕처럼 솟아 있다. 다 빈치는 왼손잡이로서 엄지와 검지의 사이에 화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위에 필기구를 오래 쓸 때 생기는 혹으로 솟아나게 된 것으로 추측해본 것이다 이 기이한 발상으로 법의학적인 개인식별 방법인 슈퍼포임즈(두 개골 사체가 발견된 경우, 생전에 찍은 얼굴 사진과 두개골 사진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겹쳐서 모양이 일치하는가 여부로 식별하는 것)를 해보았다. 모나리자 사진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염난 자화상을 같은 크기로 조정하여 비춰본 결과 놀랍게도 영상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수염난 모나리자가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 것은 TV에 방영되었지만 그는 유사성이 있으므로 검토할 만한 여지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소견을 말했다. 자연은 그대가 세계 도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④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년) 제 4 시기는 1506년에서 1513년까지로, 제 2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암굴의 성모」를 완성하였고,「 성 안나」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성 안나」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⑤ 프랑스 시대(1513~1519년) 제 5 시기는 1513년에서 19년까지로, 로마·앙부아즈 시기이다. 1513년에 로마에 체재하다가 1516년 프랑소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앙부아즈의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 설계나 궁정설계를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긍~정적으로!...
419    {쟁명} = "모나리자"는 말이 없다?... 말이 많다!... 댓글:  조회:2423  추천:0  2017-10-22
는 왜 루브르 소장품이 되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 존재만큼은 알고 있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인 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해부학, 천문학, 무기제작, 자연사, 음악 등 분야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그야말로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의 전형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남긴 20여점의 완성작 중 과 함께 순위를 다투는 명작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금자탑는 어떤 이유로 프랑스의 보물이 되어 루브르에 남게 되었을까.     가 그려지기 까지   피렌체 부근 토스카나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밀라노와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를 후원한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위해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루도비코가 죽자, 1500년 4월 24일 밀라노에서의 18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고, 이미 밀라노에서 와 으로 그의 명성과 경력은 최고조를 구가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산타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그곳 수도원에 정착한다. 그의 걸작 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라는 이름과 그 대단한 명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의 모델은 누구이며 왜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예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뛰어난 화가ㆍ조각가ㆍ건축가의 생애(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1503년부터 1506년까지 4년 동안 고심하면서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마치지 못했다는 일화와,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인 모나리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모나는 마돈나의 약칭으로 부인이라는 뜻이므로 모나리자는 곧 리자 부인을 말한다). 모나리자의 실제모델이 레오나르도 자신이었다는 설과, 리자가 아닌 제3의 여성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리자외에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 한 근거는 더욱 없으므로 현재는 리자부인일 확률이 가장 높다. 이로써 우리는 의 모델이 누구이며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왜 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상화라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 또는 왕가나 권력을 가진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력한 주장으로는 귀족가문이었던 리자의 아버지 안톤마리아와 공증인이었던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피에로가 직업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거처했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실크를 납품했던 리자 남편 프란체스코가 이 과정에서 레오나르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주문자의 지위보다는 내면을 중시했다는 점과, 당시 신흥상인 즉 브루주아 계급이 중요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소비자로 등장하는 사회적 변화를 인지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레오나르도가 주문을 수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야기     의 모델인 리자는 피렌체의 한 부유한 상인의 부인일 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다른 놀라운 점을 지니며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본을 정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안토니도 디 푸치오 피사노, , 15세기경, 유화, 43×30cm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 , 1472, 유화, 33×47cm   16세기까지의 초상화는 인물의 뚜렷한 윤곽선, 형식적인 배경처리, 얼굴의 라인을 가장 잘 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측면 프로필구성으로 대부분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먼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리자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스푸마토(sfumato)기법 때문이다. 가 세상에 나오기 전 15세기 이탈리아의 여러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소 딱딱하고 실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어딘가 모를 어색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지식이나 묘사를 위한 인내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더 자세히 모사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는 현실적인 생동감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세부묘사나 윤곽선을 세밀하고 뚜렷하게 표현하는 대신 형태와 형태가 서로 뒤섞이며 경계가 흐려지듯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하여 무미건조하고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의 입과 눈에서 표현된 스푸마토기법으로 인해 그림 속 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리자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얼굴부분,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처음 그림을 보면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눈과 입자락의 끝의 경계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마치 녹아들 듯 흐리게 표현했기 때문인데, 표정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려낸 듯 생동감 있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배경은 섬세하고 유려한 자연풍경으로 처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지평선을 어긋나게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모나리자의 얼굴도 변하는 것처럼 보여 지게 하기위한 레오나르도의 의도이다.     모나리자의 머리 뒤에 소실점을 둔 원근법의 사용과 당시 유행한 딱딱한 측면 초상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3/4포즈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도 바꾼 것 또한 이후 라파엘로 등 다른 거장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눈썹이 없기 때문에 미완성 일까?     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배경처리에서 스케치 정도만으로 마무리된 미완성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선 눈썹이 없다는 확연한 점에서 는 미완성 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에서 바사리가 모나리자를 묘사한 부분에서 리자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갖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가 그려지던 시대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실제로 눈썹을 뽑아버리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애초에 눈썹이 없었다는 설, 원래는 눈썹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으로 여러 겹 특수처리 하였는데, 가장 바깥에 그려진 눈썹이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갔다는 설, 그리고 잦은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후에 바사리가 리자에 눈썹에 대해 남긴 기록은 바사리가 실제로 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류라고 판단되었지만, 의 눈썹은 지워진 것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러 그려지지 않은 것 인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다. 눈썹이 없는에게 익숙한 우리로서는 만약 가 눈썹이 있었다면 지금과 어떻게 다른 얼굴일지, 신비로운 미소는 어떻게 달라질지 그저 상상해 볼 따름이다.     가 프랑스 루브르에 걸리기까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모나리자 전시실 내부  피렌체에서 머물던 레오나르도는 1513년 피렌체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로마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휘아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뿐만 아니라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 최고의 거장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예순을 넘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훨씬 젊은 동료들과의 세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비해 점점 노쇠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그즈음 마침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1세가 레오나르도에게 손을 내민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수와1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레오나르도의 재능과 솜씨에 감복해 있어서 만약 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한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던 레오나르도는 조수 두 명과 하인한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향한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몇 가지 챙겨서 가져갔는데, 그중에 바로 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프랑수와 왕은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간지 4년 만에 프랑수와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 1818년, 유화, 40×50.5cm 레오나르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태어난 피렌체나 24년간의 후원을 받은 밀라노가 아닌 프랑스 땅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 프링수아 1세는 퐁텐블로성에 미술관을 꾸미고 를 포함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것은 후에 퐁텐블로 파가 생겨나게 함으로써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시작하게 한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 후 프랑수아1세는 를 파리로 가져가고, 루이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져다 놓았으며, 그 후엔 나폴레옹의 개인소장품이었다가, 전시품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루브르의 심장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그곳에 전시되고 있다. (1911년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과도 같은 가 프랑스에 있는 것에 분개한 한 이탈리아 노동자가 대낮에 를 훔쳐 고국으로 가져갔다가, 2년 만에 다시 루브르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라파엘로부터 19세기화가 카미유 코로등 화가들은 끊임없이 모나리자를 모방하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반대로 이러한 의 열풍을 조롱하는 작품들도 제작됐는데 오히려 원작의 명성만 더 높아지게 했다. 마르셀 뒤샹의 수염난 모나리자>가 대표적이다.       마르셀 뒤샹, , 1919년, 유화, 조르주 퐁피두센터   그림이 그려진지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에 대해 얘기하며, 의 원작을 보기위해 예술적 순례를 떠난다. 의 시작은 피렌체의 한 여성의 초상에 불과했지만,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의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고 유명한 것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글로벌리즘 현상과 매스미디어에 의해 그 불멸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 그림이야기님의 추천 포스트 ///////////////////////////////////////   예술 신화를 파괴한 수염 난 모나리자   이것은 「모나리자」에 수염을 달았을 뿐이잖아요? 「모나리자」의 복제품에 염소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 ‘L. H. O. O. Q’ 라는 문자를 써 놓았을 뿐이지.   어떤 의미일까요?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 아쉬. 오. 오. 퀴.’ 이것을 붙여서 읽으면 ‘엘라쇼퀼(Ell a chaud au cul)’ , 즉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그녀는 달아올라 있다’는 뜻이 된다는 거야. 이 말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별로 그런 것은 없나 봐. 유머, 익살, 말장난이랄까?   그러면 단지 「모나리자」를 풍자한 것인가요? 풍자는 풍자지만 뒤샹에게는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었겠지. 뒤샹이 이런 종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13년경부터인데 첫 작품은 「자전거 바퀴」였어. 다음 작품이 「병 말리는 장치」였는데 그건 빈 포도주 병을 걸어 두는 도구였고, 그 다음 것은 「눈 치우는 삽」이야. 모두가 잡화점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일용품들인데 뒤샹은 이들을 ‘레디 메이드(ready made : 기성품)’라고 불렀어. 가장 유명한 것이 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뉴욕의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것인데 익명으로 출품했다가 거절 당했지. ‘이건 예술품이 아니다, 변기를 그대로 출품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하고 말야.   하지만 뒤샹은 그걸 예술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 뒤샹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냥 가게에서 사다가 제목을 붙여 발표했을 뿐이지.   그럼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경고일까요? 뒤샹은 도대체 예술 어쩌고 하는 짓거리를 비웃고 있어. 예술에 무슨 영원한 가치라도 있는 듯이 숭배하는 게 우스운 노릇이라는 거야. 예술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고 예술을 하느니 차라리 체스를 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는 거지. 그는 체스를 즐겨 한 것으로 유명하지.   그럼 뒤샹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았나요? 예술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예술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예술 작품의 가치란 길어야 수십 년이고 시대가 변하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는 달라진다는 거야. 예술의 개념이 변하는 게 당연한데도 과거의 망령 같은 예술 작품을 언제까지나 신주 모시듯 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했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붙인 것도 과거의 예술 작품을 매도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거금을 투자해 예술 작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이기도 하지. 그런 풍조에 대한 일종의 쇼크 요법이지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그러면요?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뒤샹 나름대로의 탐색과 메시지가 이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그린 시대에는 예술 작품 속에 어떤 설화적 의미라든가 종교적 우의(寓意), 상징 같은게 담겨 있었지.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작품의 뒷면에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지.   또다시 어려워지는군요?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그림 속에 있는 설화적 요소가 사라졌지.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대로를 그렸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화가의 개성이나 감각을 색이나 선을 통해서 즐기면 됐던 거야.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구요. 어쨌든 그림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그림은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뒤샹은 말야, 색이나 형태가 망막을 통해 들어와서 단순한 육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뿐인 시각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거야. 피카소나 마티스가 아무리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들도 결국은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리고 있을 뿐인 한낱 시각적 로봇이 아니냐는 거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지 물감이나 연필을 들고 하는 손놀림일 뿐인데, 이것을 인간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는 거지. 하기는 예술의 원래 의미가 ‘손장난’이긴 하지만 뒤샹은 시각적 로봇의 ‘손장난 예술’에 신물이 나 버린 거야.   그렇다면 「모나리자」에 수염을 붙이거나 전람회에 변기를 출품하는 행위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뒤샹은 예술이 뭐라고 생각했나요? 그는 ‘레디 메이드’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관이나 화랑에 놓는다면 그것들은 이미 변기가 아닐 테지.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변기가 틀림없는데 여기에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변기를 앞에 두고 해볼 수밖에 없겠지. 변기는 변기로서의 용도를 잃어버린 순간, ‘오브제(objet)’로서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온다는 거야.   역시 어렵군요. 「모나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뒤샹은 ‘수염 달린 모나리자’를 발표한 지 몇 년 뒤에 수염을 떼어 버린 「모나리자」에 「Rasee」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어. 「Rasee」는 수염을 깎은 여자 라는 뜻이야.   수염을 깎으면 「모나리자」 그대로였을 텐데요? 그렇지. 단순한 인쇄물인 「모나리자」인데 그 인쇄물은 놓이는 장소가 다르거나 제목이 달라짐에 따라서 전연 다르게 보인다, 즉 새로운 예술이란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뒤샹이 생각이지. 뒤샹은 자기 작품을 한 번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뒤샹이 발표한 단순한 인쇄물과 변기는 이렇게 해서 과거의 예술적 가치를 파괴함과 동시에 현대 예술의 새 장을 열었지.   긴시로의 中에서         후훗~♨   /////////////////////////////////////////////////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그림입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지요. 그런데 좀 이상하다구요? 네, 콧수염이 있는 모나리자네요. 그러고 보니, 전혀 모나리자처럼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모나리자는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여인인데, 이 그림 속의 인물은 수염이 난 남자입니다. 뒤샹은 모나리자를 복사한 그림위에 수염을 그려 넣는 장난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밑에다 'L.H.O.O.Q'라는 제목을 적어 넣였죠. 이 알파벳 문자열을 불어로 읽으면, "엘르(L) 아쉬(H) 오(O) 오(O) 뀌(Q)"가 되는데, 이것을 연음시켜 "엘라쇼오뀌"라고 읽으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문장과 같은 발음이 됩니다.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pun)을 하고 있는 거지요. 모나리자의 신비스런 미소는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그런 상상의 여지를 풍부하게 하고 있는 것이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이기도 하고요. 여하튼 이 문제의 미소때문에 사람들은 갖가지 말들을 지어내곤 했었습니다. "그녀가 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알아? '난 사실 남자란 말이야. 레오나르도는 사실 호모였거든..'하면서 우릴 비웃고 있는거야...." 과연 뒤샹이 그녀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으니, 모나리자는 정말로 남자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수정된 레디메이드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샘”이라는 제목의 변기를 전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전통을 모독하는 행위로 읽혀질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하면 우리가 명화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작품인데, 소위 명화의 권위와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는 전통에 대한 조소어린 장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샹은 20세기 미술의 역사에서 피카소에 비견될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술가입니다. 뒤샹은 그의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하여 미술의 정의와 미술가의 독창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노골적인 도전을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미술은 다다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표명합니다.  
418    {쟁명} = 칭찬 일색이던 사회 분위기를 대담하게 뒤번지다... 댓글:  조회:2953  추천:0  2017-10-22
  유명한 예술품들이 다들 한번씩 패러디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더 많이 패러디 대상이 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최고로 유명한 작품이 최고로 패러디가 많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최고로 유명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 받으며 르네상스의 최고봉 지위에 올랐던 모나리자는 후대의 시인, 작가들로부터 경탄에 찬 찬사를 수없이 받아 왔어요. 모나리자 자체는 빼어난 미인의 그림도 아니고 어떤 괄목할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델에서부터 제조 과정 등 수많은 부분이 베일이 싸여 있다는 것 하며 다빈치라는 거장의 솜씨, 모호한 분위기 등 여러 면에서 주목받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그녀가 가진 그 우아함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했죠.  Download #1 : 1.jpg (14.8 KB), Download : 27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보다 유명한 초상화가 있을까?  워낙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작품이다 보니 이를 패러디한 작품도 많은데,  다다이즘 화가인 마르셀 뒤샹의 수염 난 모나리자,  보테로의 통통한 모나리자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 보테로의 모나리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낙천적이고 흥겨운 느낌이 가득한 화가의 작품 특성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게도 당당하고 호의적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뭐든지 터놓고 말해봐,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다. ....   수많은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패러디 했고, 그 중에는 패러디 그 자체만으로 유명해진 그림도 있습니다. 바로 마르셀 뒤샹의 입니다.       마르셀 뒤샹은 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하죠. 기성품 좌변기를 가져다 놓고, 예술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작가의 서명이라며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전시한 것인데, 이처럼 뒤샹은 기존의 관념을 뒤트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마르셀 뒤샹 그는 조잡한 모나리자의 복제화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리고 밑에 L.H.O.O.Q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어로 읽으면 “그녀의 엉덩이는 끝내준다”라는 말이 되어 거의 모나리자에 대한 조롱으로도 보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다빈치에 대한 뒤샹의 오마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나리자의 위상을 꺾어놓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의도가 어쨌건, 뒤샹의 이 작품은 전통적인 관점의 예술을 무너뜨리고 다다이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꽃피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후, 다니엘 스포에리는 다리미판에 모나리자를 인쇄하여 다른 몇 가지 싸구려 물건들과 함께 전시하기도 하고 엔디 워홀은 는 제목으로 모나리자를 서른 장 실크스크린한 작품을 내기도 했어요. 이들은 일단 보기엔 모나리자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늘 비슷비슷했던 모나리자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여 오히려 그 가치를 더욱 풍부하고 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오로지 칭찬 일색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당히 를 내걸 수 있었던 뒤샹의 대담함에는 더욱 놀랐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출처] 뒤샹의 수염 난 모나리자
417    {쟁명} = 아방가르드적 락서 행위도 예술일까???... 댓글:  조회:1999  추천:0  2017-10-22
  ​낙서가 예술일까? 아방가르드 예술을 선도한 마르셸 뒤샹은 1919년 거리를 걷다가 프린트된  그림엽서 한 장을 산다. 그는  그 엽서의 사진인 모나리자얼굴에 검정색으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이를 불어로 연음하여 발음하면  Elle a chaud au cul와 동음이어의 말장까지 덧붙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Leonardo da Vinci의 대작에 콧수염과 턱에 염소수염을 그리고 말장난 같은 텍스트를 첨가한 뒤샹의 행위는 그야말로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는 아방가르드적 행위이다. 마르셀 뒤샹, , 1919   시각인 회화를 거부한 뒤샹은 기성품을 예술의 오브제로 끌어들여 개인의 생산과 결과물이라는 개념보다 보다 선택과 전달방식을 강조한다.  뒤샹에게 작품이란 완결된 의미의 덩어리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본다. 뒤샹은 엽서에 복제된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초상화속  숨은 자아를 발견하고 전달하고 있다. 뒤샹의 모니리자는 수염을 통해 남자로 변장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 그 자체라고 했는데 뒤샹은 “ 모나리자 속의 남성성을 내가 발견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뒤샹의 수염난 모나리자 아래에는 대문자로 L.H.O.O.Q라고 적힌 것을 불로 연음하여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 엘라쇼오뀌로 ‘읽히는 성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한 텍스트를 넣습니다. 그 남성성과 여성성의 공존에 대해  뒤샹은 단순한 말장난, 음성게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뒤샹의 수염과 제목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대신 수염을 그려 넣고 제목을 붙이는 행위 자체에 작품의 무게가 실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양한 문맥에서 인식되고 관객의 지각행위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뒤샹은 선택과 전달방법으로 수염과 말장난을 통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미학의 중심부에 숨은 젠더의 모호성과 진품과 대량생산된 복제품 사이의 의미를 드러내있습니다. 이런  그의 다다이스트적 개입은 흔한 복제품으로 전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을 구해내어  창조의 세계로 다시 돌리고 있다.     [출처] 수염난 모나리자,     ======================= 뒤샹에 의해 무너진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                                    '예술이란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 실체가 없다' - 마르셀 뒤샹                                             예술의 가치기준은 절대적인가?                                                     L. H. O. O. Q    1919년 , 복제품(복제화+연필)                                              19.7 X 12.4cm. 파리                                                                             이것은 「모나리자」에 수염을 달았을 뿐이잖아요? 「모나리자」의 복제품에 염소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 ‘L. H. O. O. Q’ 라는 문자를 써 놓았을 뿐이지.   어떤 의미일까요?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 아쉬. 오. 오. 퀴.’ 이것을 붙여서 읽으면 ‘엘라쇼퀼(Ell a chaud au cul)’ , 즉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그녀는 달아올라 있다’는 뜻이 된다는 거야. 이 말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별로 그런 것은 없나 봐. 유머, 익살, 말장난이랄까?   그러면 단지 「모나리자」를 풍자한 것인가요? 풍자는 풍자지만 뒤샹에게는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었겠지. 뒤샹이 이런 종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13년경부터인데 첫 작품은 「자전거 바퀴」였어. 다음 작품이 「병 말리는 장치」였는데 그건 빈 포도주 병을 걸어 두는 도구였고, 그 다음 것은 「눈 치우는 삽」이야. 모두가 잡화점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일용품들인데 뒤샹은 이들을 ‘레디 메이드(ready made : 기성품)’라고 불렀어. 가장 유명한 것이 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뉴욕의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것인데 익명으로 출품했다가 거절 당했지. ‘이건 예술품이 아니다, 변기를 그대로 출품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하고 말야.   하지만 뒤샹은 그걸 예술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 뒤샹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냥 가게에서 사다가 제목을 붙여 발표했을 뿐이지.   그럼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경고일까요? 뒤샹은 도대체 예술 어쩌고 하는 짓거리를 비웃고 있어. 예술에 무슨 영원한 가치라도 있는 듯이 숭배하는 게 우스운 노릇이라는 거야. 예술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고 예술을 하느니 차라리 체스를 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는 거지. 그는 체스를 즐겨 한 것으로 유명하지.   그럼 뒤샹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았나요? 예술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예술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예술 작품의 가치란 길어야 수십 년이고 시대가 변하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는 달라진다는 거야. 예술의 개념이 변하는 게 당연한데도 과거의 망령 같은 예술 작품을 언제까지나 신주 모시듯 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했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붙인 것도 과거의 예술 작품을 매도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거금을 투자해 예술 작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이기도 하지. 그런 풍조에 대한 일종의 쇼크 요법이지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그러면요?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뒤샹 나름대로의 탐색과 메시지가 이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그린 시대에는 예술 작품 속에 어떤 설화적 의미라든가 종교적 우의(寓意), 상징 같은게 담겨 있었지.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작품의 뒷면에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지.   또다시 어려워지는군요?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그림 속에 있는 설화적 요소가 사라졌지.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대로를 그렸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화가의 개성이나 감각을 색이나 선을 통해서 즐기면 됐던 거야.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구요. 어쨌든 그림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그림은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뒤샹은 말야, 색이나 형태가 망막을 통해 들어와서 단순한 육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뿐인 시각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거야. 피카소나 마티스가 아무리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들도 결국은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리고 있을 뿐인 한낱 시각적 로봇이 아니냐는 거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지 물감이나 연필을 들고 하는 손놀림일 뿐인데, 이것을 인간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는 거지. 하기는 예술의 원래 의미가 ‘손장난’이긴 하지만 뒤샹은 시각적 로봇의 ‘손장난 예술’에 신물이 나 버린 거야.   그렇다면 「모나리자」에 수염을 붙이거나 전람회에 변기를 출품하는 행위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뒤샹은 예술이 뭐라고 생각했나요? 그는 ‘레디 메이드’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관이나 화랑에 놓는다면 그것들은 이미 변기가 아닐 테지.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변기가 틀림없는데 여기에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변기를 앞에 두고 해볼 수밖에 없겠지. 변기는 변기로서의 용도를 잃어버린 순간, ‘오브제(objet)’로서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온다는 거야.                                                                                                                  1917년 '샘'     역시 어렵군요. 「모나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뒤샹은 ‘수염 달린 모나리자’를 발표한 지 몇 년 뒤에 수염을 떼어 버린 「모나리자」에 「Rasee」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어. 「Rasee」는 수염을 깎은 여자 라는 뜻이야.   수염을 깎으면 「모나리자」 그대로였을 텐데요? 그렇지. 단순한 인쇄물인 「모나리자」인데 그 인쇄물은 놓이는 장소가 다르거나 제목이 달라짐에 따라서 전연 다르게 보인다, 즉 새로운 예술이란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뒤샹이 생각이지. 뒤샹은 자기 작품을 한 번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뒤샹이 발표한 단순한 인쇄물과 변기는 이렇게 해서 과거의 예술적 가치를 파괴함과 동시에 현대 예술의 새 장을 열었지.   긴시로의 中에서                                                                                                          Marcel Duchamp Around a Table                                                                                                                                [출처] 예술 신화를 파괴한 수염 난 모나리자 ===================================     (Lobster telephone, 1938 by Dali & James)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ㅡ살바도르 달리  
416    {쟁명" = "수염 난 모나리자" 시집 잘 가다... 댓글:  조회:2381  추천:0  2017-10-22
뒤샹 '수염 난 모나리자', 佛경매서 8억대 낙찰     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의 '수염 난 모나라지' 1930년작 (자료사진) © AFP=뉴스1 (서울=뉴스1) 장용석 기자 = 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의 '수염 난 모나리자'가 경매에서 8억원대에 낙찰됐다. AFP통신에 따르면 2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소더비 경매에선 뒤샹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담긴 엽서에 수염을 그려넣은 '수염 난 모나리자' 작품 중 하나가 출품돼 63만2500유로(약 8억4500만원)에 팔렸다. 뒤샹은 1919년 구입한 '모나리자' 엽서를 이용해 처음 '수염 난 모나리자'를 만들었고, 이날 경매에서 낙찰된 '수염 난 모나리자'는 1964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뒤샹은 '수염 난 모나리자' 그림 하단에 프랑스어로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elle a chaud au cul)'는 성적 의미로 읽힐 수 있는 'L.H.O.O.Q'를 알파벳 대문자로 적어 놨다         Marcel Duchamp, L.H.O.O.Q. (Mona Lisa with Moustache) 20세기 초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처음으로 겪게 된 기계화된 현대적인 전쟁으로,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전쟁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반응으로 서구에서는 다다이즘이 유행하였습니다 다다이즘은 사회적으로 신성시되는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우상 파괴적 경향을 보였는데, 마르셀 뒤샹의 'L.H.O.O.Q. 복제'도  이러한 경향을 대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다다이즘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인 마르셀 뒤샹이 1919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뒤샹은 모나리자의 싸구려 복제화에 수염을 그려넣고, L.H.O.O.Q.라는 의미없는 글씨를 써넣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글씨를 소리내어 읽으면, 불어로 '그녀는 끝내주는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elle a chaud au cul)'란 뜻이 됩니다. 즉, 뒤샹은 모나리자의 성적인 모호함에 집중하여 모나리자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L.H.O.O.Q. 복제'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한 뒤샹의 도착된 경외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당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신성시되다시피한 그림인 '모나리자'를 이렇게 조롱할 수 있는 뒤샹의 용기와 발칙한 발상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획기적입니다. '모나리자'도 이렇게 조롱한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베를린과 파리 및 뉴욕 등지로 번져 나간 운동입니다. 다다이즘의 창시자들은 위선적인 유럽의 휴머니즘이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를 숨기고 명예와 정의를 가장하여 마침내는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엄청난 참사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여,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과 반도덕 그리고 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           20세기 초에 한 남자가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 한장을 구입한후 얼굴에 수염을 그려놓고 "L.H.O.O.Q" 라는 제목을 붙이고 전시를 하는 바람에 큰 논란을 일으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20세기 전위예술의  거장인 마르셀 뒤샹으로서 "L.H.O.O.Q"라는 말은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아쉬.오.오.퀴"로 발음이 되는데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라는 뜻이 된다고 하네요. 특별한 뜻이 있어서 이런 제목을 지은것도 아니고 별 생각없이 제목을 붙여 발표했을 뿐이랍니다.   이 작품을 통해 뒤샹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풍자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예술작품으로 인류의 찬사를 받는 작품입니다. 뒤샹은 그  "모나리자"에 낙서를 하면서 예술의 영원성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즉 예술 작품의 가치는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는데도 과거의  예술에 거금을 투자하고 신주 모시듯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죠.   암튼 지금 이 작품은 진품 "모나리자" 와 함께 꽤나 유명한 "모나리자"로 인류사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   수염 난 모나리자를 보았니? 미술 속 시간여행     어동이는 신문을 보다 깜짝 놀랐어요. 해골과 같이 생긴 얼굴이 얼굴에 손을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림이 1억1990만 달러(약 1355억 원)에 팔렸다는 뉴스를 보았거든요. 엄마는 이 그림이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사진)’라면서 미술품 경매 사상 가장 비싼 가격을 기록했다고 알려주셨어요. 어동이는 생각했어요. ‘저 그림은 왜 저렇게 유명할까?’ ‘나도 저만큼은 그리겠다!’   여러분도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나요? 때로는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작품을 본 적도 있어요. 물론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도 있지만 말이에요. 이 모든 것을 ‘미술’이라고 불러요.   각 나라마다 고유한 언어와 역사가 있듯이 미술에도 언어와 역사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는 무슨 목적으로 그렸는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 작품 속에 숨은 언어를 알아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답니다. 오늘은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해보도록 해요.   미술 속 숨은 역사이야기   인류의 역사를 나무에 비유해볼까요? 정치 철학 역사 종교 경제 등이 ‘뿌리’에 해당한다면 미술은 ‘꽃’입니다. 인류의 역사 사회 문화 등을 자양분 삼아 아름답게 피어난 것이 ‘미술작품’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미술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답니다.   동굴벽화로 대표되는 최초의 미술부터, 절대권자와 신의 시대였던 고대와 중세의 미술을 지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천재미술가들이 등장한 르네상스로 이어집니다. 이후 17세기 절대왕정의 화려한 바로크 미술, 18세기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감각적인 로코코양식, 19세기 미술에 혁명을 가져온 근대미술, 오늘날의 최첨단 현대미술까지…. 어때요? 미술이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것 이해가 되나요?   책은 미술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작품 하나하나에는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있는지, 미술가는 무슨 목적으로 미술품을 만들었는지 그림과 함께 쉽게 설명했습니다. 함께 재미있는 서양미술여행을 떠나볼까요?...     모나리자 vs 수염 난 모나리자 비교해보세요 ====================================== 덤으로 더... {쟁명}-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에는 눈썹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한데요.   일단 그동안 알려진 것은... 당시 시대에 부인들이 얼굴에 체모가 들어나는 것이 예의가 아니어서..   초상화를 그릴때는 눈썹과 얼굴에 난 털을 깨끗이 제거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모나리자 얼굴에는 눈썹을 비롯하여 속눈썹까지 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 어느 사진작가가.. 초정밀 카메라로 모나리자 그림을 촬영한 결과..   눈썹 주위에 붓칠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즉 눈썹을 그렸는데.. 세월이 지나 우리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과연 다빈치는 모자리자의 눈썹을 그린 것일까요?... 안 그린 것일까?  
415    꽃은 그 언제나 말이 필요 없다... 댓글:  조회:1807  추천:0  2017-10-22
    Calla Lily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Calla Lily, 1988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Calla Lily, 1984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Calla Lily, 1984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Calla Lily, 1987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Calla Lily, 1987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Calla Lily, 1986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Calla Lily, 1987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肝을  쪼아먹는다.                     Calla Lily, 1988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CALLA LILY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CALLA LILY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김춘수님의 "꽃의 소묘(素描)"                           Robert Mapplet‎‍‍‍horpe (1946-1989, USA)           로버트 메이플쏩만큼 드라마틱하게 인생을 살다간 사진작가도 드물다.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들, 게이를 비롯한 S&M(새대즘과 마조키즘) 을 주제로한 과감한 사진을 비롯 , 그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고요하며 아름다운 꽃 사진들 ....   그의 작품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46년 뉴욕의 롱아일랜드에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카톨릭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나 안정적이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골 생활을 못견디고 언제나 집을 떠날 생각만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 입학은 하지만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에 전공을 광고디자인에서 그래픽 아트로 바꾼다.                           졸업을 하고 록 가수이자 전위예술가인 패티 스미스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자유분방함과 예술적인 기질이 메플쏩과 조화를 이루며 그들은 그 유명한 첼시 호텔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로버트는 카톨릭 분위기에서 자란탓에 오랜시간 스스로 죄의식을 갖고 억제하던 게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예술가란 명예와 부에 초연해야 한다는 막연한 사회적 통념을 깨고 그는 늘 성공해서 부자가 되기를 꿈꿨다. 패티 스미스의 앨범 표지가 성공을 거뒀을 때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원하던 성공을 거두었다고 즐거워했다.     그렇다고 돈을 위해서 예술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술가로 성공해 돈을 벌수 있게 되기를 늘 갈망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앤디 워홀의 예술과 그의 성공을 모델 삼아 그처럼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과 돈과 섹스였다.                     Orchid, 1987               그런 그가 게이나 성에 집착한 사진을 찍다가 전혀 상반된 주제인 꽃에 관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꽃 사진에 관한 나의 접근은 기본적으로 같다. 그것은 조명과 구성에 관한 것이다”             ORCHID, 1987             이는 그가 어떤 소재로 사진을 찍더라도 언제나 동일한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고, 꽃 사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ORCHID               메이플소프의 꽃 사진도 단순한 소재로써의 꽃이 아니라 새도매저키즘, 동성애, 남근 숭배와 여성의 성기 등이 간접적으로 은유되고 있는 다양한 의미로 확장된 꽃이라고 할 수 있다.                   ORCHID, 1988           그는 마치 꽃의 촉감까지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기교적인 노력은 그가 추구하는 힘과 섹시함을 보여주는 꽃의 이미지로 재탄생된 것이다.                 Orchids 1988                       그가 꽃을 찍은 또 다른 숨은 뜻은 상업성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게이나 S&M을 주제로한 사진을 거실 벽에 걸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도 아름다운 꽃은 훨씬 더 벽에 걸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에 대한 다양한 탐닉은 80년대 초, 천형이라고 불리 우는 에이즈의 창궐과 함께 막을 내린다. 로버트는 에이즈에 걸려 언제 죽음의 사자가 찾아올지 모를 상황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과 함께 오히려 그의 명성은 더해 가고 그의 회고전이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열릴 정도였지만 결국 1989년 3월 9일 오전 5시, 그의 나이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Baby Breath                           Orchid and Leaf in White Vase 1982                               Orchid, 1982                                             Three Roses in a Vase, from Flowers, 1983                                         Flower 1983                             ORCHID, 1987                       GERBER DAISY                   Poppy 1987                                           Poppy 1988                                   ROSE                   Rose                             Rose 1987                           Rose                                   Rose                               Rose, 1988                                 Orchid, 1987                                 Hyacinth, 1987                                       Mum, 1989                                           Parrot Tulip in Black Vase, 1985                                 Tulip in Vase                   Tulip                                               Tulips                       Tulips, 1988                                               Tulips                                     Orchids  
414    세상에 버려질 물건이란 있다?... 없다!... 댓글:  조회:2641  추천:0  2017-10-22
거장들의 기법을 차용한 그림 같은 사진  어윈 올라프  © 공근혜갤러리 ‘Vogue 2013 NL 06’ LED를 화폭으로 삼아 움직이는 명화를 창조하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인왕제색도 사계’ ‘인왕제색도 사계’ ‘인왕제색도 사계’ ‘모나리자 폐허’ ‘대중의 시선을 작품에 붙잡아둘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고민 끝에 사람들에게 친숙한 명화를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한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꽃이 피고 눈이 내리도록 한 ‘인왕제색도 사계’는 겸재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흥을 상상해 LED TV에 펼쳐놓은 것. ‘모나리자 폐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술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생각한 작가가 붓 대신 디지털의 힘을 빌려 모나리자를 파괴하고 꽃이 피어나도록 한 미디어 아트다. “모나리자가 소멸되었을 때 새로운 가치와 문화가 생겨난다는 의미다. 붓과 물감을 사용해 ‘모나리자’ 같은 그림을 그려낸다 해도 현대에는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관람객과의 소통을 작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머무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작업한다. 같은 작품이라도 시차를 두고 수차례 감상하면서 다양한 감각, 다의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마무리한다. 이이남은 “명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적인 아름다움 이상으로 작품 안에 녹아 있는 역사적이고 인문학 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물론 즐거움과 상상력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산수화에 계절감을 살리고 움직이는 동물과 곤충을 더해 옛 화가들이 보았을 장면들을 상상하고 구현한다”고 말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표현의 도구가 다채로워진만큼 VR(가상현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아트도 선보일 예정이다.   아바타를 통해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하종우  ‘Funny Imagination-소년전홍’ ‘Funny Imagination- 단오풍정’ ‘Funny Imagination- 쌍검대무’ 단옷날 계곡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린 신윤복의 대표작 ‘단오풍정’.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음흉한 표정으로 아낙들을 엿보는 승려의 목에 줄을 감아 작품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젊은 아낙을 유혹하던 ‘소년전홍’ 속 양반은 자신을 도발적인 포즈로 바라보는 여성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 여성은 조각가 하종우의 아바타로 신윤복의 작품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는다. 하종우는 “한국 전통 미술 이론에 관심을 갖던 시절, 신윤복의 작품세계가 특히 관심을 끌었다. 당시 회화에서 금기시해온 주제를 다루고 원리와 법칙을 파괴하는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업의 핵심 주제로 삼는 그는 ‘20세기 이전이든 이후든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현대적인 기법과 발상을 한국 전통 미술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작가의 재미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더해 상황을 재구성한다. “시대를 초월해 동서양의 명화에 담긴 의미는 매우 크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양의 작품에 더 애정을 갖고 있다. 내면을 표현하려는 열정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다양한 면모를 ‘재미있는 상상’을 통해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버려진 물건으로 그려낸 명화  제인 퍼킨스  ‘The Kiss, after Klimt’ ‘Plastic Classics Sunflowers, after Van Gogh’ “어떤 이들은 나를 재생 예술가, 누군가는 콜라주 아티스트라 부른다.”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제인 퍼킨스Jane Perkins는 주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물건들을 활용해 작품을 완성하는 아티스트다. 버려진 단추, 장난감, 구슬, 플라스틱 식기, 깨진 보석 등으로 명화의 색감과 스케치는 물론 음영까지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금색 물감을 사용해 그린 ‘키스’ 속 황금빛은 브로치와 비즈를 콜라주해 황홀한 느낌이 들게 재현했고, 반 고흐의 ‘해바라기’ 속 꽃잎은 기린 인형, 플라스틱 빗, 집게 같은 노란색 물건으로 구현했다. 제인 퍼킨스는 “모양과 색깔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재료면 무엇이든 사용한다. 색깔을 덧입히거나 모양을 변형시키지 않고 원형 그대로 가져와 쓴다” 고 강조한다. 대학을 다니던 중 버려지는 물건들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에 놀라 재활용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명화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 오바마 같은 세기의 아이콘과 지구, 자유의 여신상 등 사람들이 익히 아는 대상을 콜라주 아트로 탄생시킨다. 제인 퍼킨스는 “내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사람들이 작품을 ‘농담’처럼 받아들였으면 해서 친숙한 작품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 덤으로 더... {필자 주;- "오브제"란?=   세계미술용어사전 오브제 [objet ] 일반적으로는 물건, 물체,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이나, 미술에서는 주제에 대응하여 일상적 합리적인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나뭇가지라든가 동물의 가죽 등 자연적인 물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주전자 등의 공산품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다다의 레디메이드 오브제는 기성품의 일상적인 위치를 변질시킨 것이고,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는 성적 욕망과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 기능을 가진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폐물을 사용한 조각, 즉 정크 아트는 공업사회에서 의미를 가지는 오브제의 새로운 전개라 말할 수 있다. 오브제를 활발히 사용한 초현실주의에서는 이것을 전용(轉用), 독특한 표현 개념을 부여하여 구체적인 예술의 한 방법으로 삼았다. 즉 예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물건이나 그 한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인 용도에서 떼어내 절연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잠재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말한다. 이 방법은 바로 언어의 무의식적인 합성에 의해서 새로운 시적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일상 생활에 쓰이는 모든 물체는 그 나름의 용도나 기능 또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게 마련이나 이러한 물체가 일단 오브제로 쓰이면 그 본래의 용도나 기능은 의미를 잃게 되고 이때까지 우리가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어떤 연상작용이나 기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에서 오브제란 사람과 물체가 서로 교통하는 한 방편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오브제의 개념은 초현실주의의 조형적 영역은 물론 그 사상에도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즉 오브제는 회화와 조각을 접근시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조형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또 오브제는 예술가의 생활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물건 그 자체로 인식되어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각종 오브제를 정리하여 12가지로 나누었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자연물의 오브제(광물, 식물, 동물 따위) ②미개인의 도구나 주술적인 물체 ③수학상의 오브제(수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구성된 입체적 모형 따위) ④발견된 오브제(흔히 오브제라고 하면 이것을 가리킬 만큼 일반적인 것으로, 표류물, 나무 뿌리, 돌 기타 모든 오브제는 발견된 오브제라 할 수 있다) ⑤해석된 오브제(이를테면 발견된 오브제인 나무 뿌리를 약간 가공해서 거꾸로 놓으면 전혀 다른 물체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해석된 오브제이다) ⑥재해(災害)의 오브제(화재가 난 뒤 어떤 물건이 불에 타서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초조형적으로 변형된 경우) ⑦기성품의 오브제(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성제품에 단순히 서명을 함으로써 예술품으로 전이시킨 것) ⑧움직이는 오브제(어떤 종류의 자동 인형이나 풍차 따위와 같은 것으로 칼더AlexanderCalder(1898~1976)의 모빌이나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의 키네틱 작품 등이 여기에 속한다) ⑨상징기능의 오브제(달리Salvador Dali(1904~1989)가 발명한 것으로, 인간의 잠재의식에 직접 호소하는 것). [네이버 지식백과] 오브제 [objet] (세계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 ===========================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