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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1506년, 나무판위에 유채, 77×53cm, 루브르미술관
<모나리자>가 그려지기 까지
피렌체 부근 토스카나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밀라노와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 밀라노에서 그를 후원한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위해 궁정화가로 일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루도비코가 죽자, 1500년 4월 24일 밀라노에서의 18년 생활을 청산하고 피렌체로 돌아온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고, 이미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으로 그의 명성과 경력은 최고조를 구가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산타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기로 하고 그곳 수도원에 정착한다. 그의 걸작 <모나리자>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모나리자>라는 이름과 그 대단한 명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모나리자>의 모델은 누구이며 왜 레오나르도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예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뛰어난 화가ㆍ조각가ㆍ건축가의 생애(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1503년부터 1506년까지 4년 동안 고심하면서 모나리자를 그렸으나 마치지 못했다는 일화와,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인 모나리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모나는 마돈나의 약칭으로 부인이라는 뜻이므로 모나리자는 곧 리자 부인을 말한다). 모나리자의 실제모델이 레오나르도 자신이었다는 설과, 리자가 아닌 제3의 여성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리자외에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 한 근거는 더욱 없으므로 현재는 리자부인일 확률이 가장 높다. 이로써 우리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이며 언제 그려진 것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왜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상화라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 또는 왕가나 권력을 가진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력한 주장으로는 귀족가문이었던 리자의 아버지 안톤마리아와 공증인이었던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피에로가 직업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거처했던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에 실크를 납품했던 리자 남편 프란체스코가 이 과정에서 레오나르도를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주문자의 지위보다는 내면을 중시했다는 점과, 당시 신흥상인 즉 브루주아 계급이 중요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소비자로 등장하는 사회적 변화를 인지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레오나르도가 주문을 수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모나리자> 이야기
<모나리자>의 모델인 리자는 피렌체의 한 부유한 상인의 부인일 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대단히 다른 놀라운 점을 지니며 여러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기본을 정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안토니도 디 푸치오 피사노, <지네브라 데스테의 초상>, 15세기경, 유화, 43×30cm
16세기까지의 초상화는 인물의 뚜렷한 윤곽선, 형식적인 배경처리, 얼굴의 라인을 가장 잘 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측면 프로필구성으로 대부분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았다.
먼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리자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고안한 스푸마토(sfumato)기법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세상에 나오기 전 15세기 이탈리아의 여러 거장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다소 딱딱하고 실제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어딘가 모를 어색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지식이나 묘사를 위한 인내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더 자세히 모사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는 현실적인 생동감은 더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세부묘사나 윤곽선을 세밀하고 뚜렷하게 표현하는 대신 형태와 형태가 서로 뒤섞이며 경계가 흐려지듯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하여 무미건조하고 부자연스러운 인상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모나리자>의 입과 눈에서 표현된 스푸마토기법으로 인해 그림 속 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는 리자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처음 그림을 보면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눈과 입자락의 끝의 경계표현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마치 녹아들 듯 흐리게 표현했기 때문인데, 표정이 변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려낸 듯 생동감 있고 신비롭게 느껴진다. 배경은 섬세하고 유려한 자연풍경으로 처리하였는데 의도적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지평선을 어긋나게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의 위치에 따라 모나리자의 얼굴도 변하는 것처럼 보여 지게 하기위한 레오나르도의 의도이다.
모나리자의 머리 뒤에 소실점을 둔 원근법의 사용과 당시 유행한 딱딱한 측면 초상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3/4포즈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도 바꾼 것 또한 이후 라파엘로 등 다른 거장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눈썹이 없기 때문에 미완성 일까?
<모나리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다. 그림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배경처리에서 스케치 정도만으로 마무리된 미완성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선 눈썹이 없다는 확연한 점에서 <모나리자>는 미완성 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의 『미술가 열전』에서 바사리가 모나리자를 묘사한 부분에서 리자의 눈썹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갖가지 추측이 제기되었다. <모나리자>가 그려지던 시대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실제로 눈썹을 뽑아버리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애초에 눈썹이 없었다는 설, 원래는 눈썹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으로 여러 겹 특수처리 하였는데, 가장 바깥에 그려진 눈썹이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갔다는 설, 그리고 잦은 복원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후에 바사리가 리자에 눈썹에 대해 남긴 기록은 바사리가 실제로 <모나리자>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류라고 판단되었지만, <모나리자>의 눈썹은 지워진 것인지, 아니면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러 그려지지 않은 것 인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다. 눈썹이 없는<모나리자>에게 익숙한 우리로서는 만약 <모나리자>가 눈썹이 있었다면 지금과 어떻게 다른 얼굴일지, 신비로운 미소는 어떻게 달라질지 그저 상상해 볼 따름이다.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에 걸리기까지
피렌체에서 머물던 레오나르도는 1513년 피렌체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로마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휘아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뿐만 아니라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끄는 최고의 거장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당시 예순을 넘긴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훨씬 젊은 동료들과의 세대 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패기만만한 젊은 천재들을 바라보는 레오나르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비해 점점 노쇠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그즈음 마침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1세가 레오나르도에게 손을 내민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수와1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레오나르도의 재능과 솜씨에 감복해 있어서 만약 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약속한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던 레오나르도는 조수 두 명과 하인한명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향한다. 이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작품을 몇 가지 챙겨서 가져갔는데, 그중에 바로 <모나리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프랑수와 왕은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간지 4년 만에 프랑수와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라파엘로부터 19세기화가 카미유 코로등 화가들은 끊임없이 모나리자를 모방하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반대로 이러한 <모나리자>의 열풍을 조롱하는 작품들도 제작됐는데 오히려 원작의 명성만 더 높아지게 했다. 마르셀 뒤샹의
그림이 그려진지 5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모나리자>에 대해 얘기하며, <모나리자>의 원작을 보기위해 예술적 순례를 떠난다. <모나리자>의 시작은 피렌체의 한 여성의 초상에 불과했지만,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의 모방을 통해 재생산되고 유명한 것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글로벌리즘 현상과 매스미디어에 의해 그 불멸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예술 신화를 파괴한 수염 난 모나리자
이것은 「모나리자」에 수염을 달았을 뿐이잖아요?
「모나리자」의 복제품에 염소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 ‘L. H. O. O. Q’ 라는 문자를 써 놓았을 뿐이지.
어떤 의미일까요?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 아쉬. 오. 오. 퀴.’ 이것을 붙여서 읽으면 ‘엘라쇼퀼(Ell a chaud au cul)’ , 즉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그녀는 달아올라 있다’는 뜻이 된다는 거야. 이 말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별로 그런 것은 없나 봐. 유머, 익살, 말장난이랄까?
그러면 단지 「모나리자」를 풍자한 것인가요?
풍자는 풍자지만 뒤샹에게는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었겠지. 뒤샹이 이런 종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13년경부터인데 첫 작품은 「자전거 바퀴」였어. 다음 작품이 「병 말리는 장치」였는데 그건 빈 포도주 병을 걸어 두는 도구였고, 그 다음 것은 「눈 치우는 삽」이야. 모두가 잡화점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일용품들인데 뒤샹은 이들을 ‘레디 메이드(ready made : 기성품)’라고 불렀어. 가장 유명한 것이 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뉴욕의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것인데 익명으로 출품했다가 거절 당했지. ‘이건 예술품이 아니다, 변기를 그대로 출품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하고 말야.
하지만 뒤샹은 그걸 예술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 뒤샹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냥 가게에서 사다가 제목을 붙여 발표했을 뿐이지.
그럼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경고일까요?
뒤샹은 도대체 예술 어쩌고 하는 짓거리를 비웃고 있어. 예술에 무슨 영원한 가치라도 있는 듯이 숭배하는 게 우스운 노릇이라는 거야. 예술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고 예술을 하느니 차라리 체스를 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는 거지. 그는 체스를 즐겨 한 것으로 유명하지.
그럼 뒤샹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았나요?
예술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예술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예술 작품의 가치란 길어야 수십 년이고 시대가 변하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는 달라진다는 거야. 예술의 개념이 변하는 게 당연한데도 과거의 망령 같은 예술 작품을 언제까지나 신주 모시듯 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했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붙인 것도 과거의 예술 작품을 매도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거금을 투자해 예술 작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이기도 하지. 그런 풍조에 대한 일종의 쇼크 요법이지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그러면요?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뒤샹 나름대로의 탐색과 메시지가 이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그린 시대에는 예술 작품 속에 어떤 설화적 의미라든가 종교적 우의(寓意), 상징 같은게 담겨 있었지.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작품의 뒷면에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지.
또다시 어려워지는군요?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그림 속에 있는 설화적 요소가 사라졌지.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대로를 그렸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화가의 개성이나 감각을 색이나 선을 통해서 즐기면 됐던 거야.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구요.
어쨌든 그림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그림은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뒤샹은 말야, 색이나 형태가 망막을 통해 들어와서 단순한 육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뿐인 시각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거야. 피카소나 마티스가 아무리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들도 결국은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리고 있을 뿐인 한낱 시각적 로봇이 아니냐는 거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지 물감이나 연필을 들고 하는 손놀림일 뿐인데, 이것을 인간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는 거지. 하기는 예술의 원래 의미가 ‘손장난’이긴 하지만 뒤샹은 시각적 로봇의 ‘손장난 예술’에 신물이 나 버린 거야.
그렇다면 「모나리자」에 수염을 붙이거나 전람회에 변기를 출품하는 행위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뒤샹은 예술이 뭐라고 생각했나요?
그는 ‘레디 메이드’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관이나 화랑에 놓는다면 그것들은 이미 변기가 아닐 테지.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변기가 틀림없는데 여기에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변기를 앞에 두고 해볼 수밖에 없겠지. 변기는 변기로서의 용도를 잃어버린 순간, ‘오브제(objet)’로서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온다는 거야.
역시 어렵군요.
「모나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뒤샹은 ‘수염 달린 모나리자’를 발표한 지 몇 년 뒤에 수염을 떼어 버린 「모나리자」에 「Rasee」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어. 「Rasee」는 수염을 깎은 여자 라는 뜻이야.
수염을 깎으면 「모나리자」 그대로였을 텐데요?
그렇지. 단순한 인쇄물인 「모나리자」인데 그 인쇄물은 놓이는 장소가 다르거나 제목이 달라짐에 따라서 전연 다르게 보인다, 즉 새로운 예술이란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뒤샹이 생각이지. 뒤샹은 자기 작품을 한 번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뒤샹이 발표한 단순한 인쇄물과 변기는 이렇게 해서 과거의 예술적 가치를 파괴함과 동시에 현대 예술의 새 장을 열었지.
긴시로의 <명화의 수수께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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