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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가 예술일까?
아방가르드 예술을 선도한 마르셸 뒤샹은 1919년 거리를 걷다가 프린트된 <모나리자> 그림엽서 한 장을 산다. 그는 그 엽서의 사진인 모나리자얼굴에 검정색으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이를 불어로 연음하여 발음하면 Elle a chaud au cul와 동음이어의 말장까지 덧붙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Leonardo da Vinci의 대작에 콧수염과 턱에 염소수염을 그리고 말장난 같은 텍스트를 첨가한 뒤샹의 행위는 그야말로 과거의 전통을 부정하는 아방가르드적 행위이다.
마르셀 뒤샹,
시각인 회화를 거부한 뒤샹은 기성품을 예술의 오브제로 끌어들여 개인의 생산과 결과물이라는 개념보다 보다 선택과 전달방식을 강조한다. 뒤샹에게 작품이란 완결된 의미의 덩어리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본다.
뒤샹은 엽서에 복제된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초상화속 숨은 자아를 발견하고 전달하고 있다. 뒤샹의 모니리자는 수염을 통해 남자로 변장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 그 자체라고 했는데 뒤샹은 “ 모나리자 속의 남성성을 내가 발견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뒤샹의 수염난 모나리자 아래에는 대문자로 L.H.O.O.Q라고 적힌 것을 불로 연음하여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 엘라쇼오뀌로 ‘읽히는 성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한 텍스트를 넣습니다. 그 남성성과 여성성의 공존에 대해 뒤샹은 단순한 말장난, 음성게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뒤샹의 수염과 제목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대신 수염을 그려 넣고 제목을 붙이는 행위 자체에 작품의 무게가 실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양한 문맥에서 인식되고 관객의 지각행위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뒤샹은 선택과 전달방법으로 수염과 말장난을 통해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미학의 중심부에 숨은 젠더의 모호성과 진품과 대량생산된 복제품 사이의 의미를 드러내있습니다.
이런 그의 다다이스트적 개입은 흔한 복제품으로 전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을 구해내어 창조의 세계로 다시 돌리고 있다.
[출처] 수염난 모나리자,
뒤샹에 의해 무너진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
'예술이란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 실체가 없다' - 마르셀 뒤샹
예술의 가치기준은 절대적인가?
L. H. O. O. Q 1919년 , 복제품(복제화+연필)
19.7 X 12.4cm. 파리
이것은 「모나리자」에 수염을 달았을 뿐이잖아요?
「모나리자」의 복제품에 염소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쪽에 ‘L. H. O. O. Q’ 라는 문자를 써 놓았을 뿐이지.
어떤 의미일까요?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 아쉬. 오. 오. 퀴.’ 이것을 붙여서 읽으면 ‘엘라쇼퀼(Ell a chaud au cul)’ , 즉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그녀는 달아올라 있다’는 뜻이 된다는 거야. 이 말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별로 그런 것은 없나 봐. 유머, 익살, 말장난이랄까?
그러면 단지 「모나리자」를 풍자한 것인가요?
풍자는 풍자지만 뒤샹에게는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었겠지. 뒤샹이 이런 종류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913년경부터인데 첫 작품은 「자전거 바퀴」였어. 다음 작품이 「병 말리는 장치」였는데 그건 빈 포도주 병을 걸어 두는 도구였고, 그 다음 것은 「눈 치우는 삽」이야. 모두가 잡화점 같은 데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일용품들인데 뒤샹은 이들을 ‘레디 메이드(ready made : 기성품)’라고 불렀어. 가장 유명한 것이 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뉴욕의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것인데 익명으로 출품했다가 거절 당했지. ‘이건 예술품이 아니다, 변기를 그대로 출품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하고 말야.
하지만 뒤샹은 그걸 예술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 뒤샹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냥 가게에서 사다가 제목을 붙여 발표했을 뿐이지.
그럼 그 자체가 예술에 대한 경고일까요?
뒤샹은 도대체 예술 어쩌고 하는 짓거리를 비웃고 있어. 예술에 무슨 영원한 가치라도 있는 듯이 숭배하는 게 우스운 노릇이라는 거야. 예술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고 예술을 하느니 차라리 체스를 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는 거지. 그는 체스를 즐겨 한 것으로 유명하지.
그럼 뒤샹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았나요?
예술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예술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예술 작품의 가치란 길어야 수십 년이고 시대가 변하면 작품의 의미나 가치는 달라진다는 거야. 예술의 개념이 변하는 게 당연한데도 과거의 망령 같은 예술 작품을 언제까지나 신주 모시듯 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했어.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붙인 것도 과거의 예술 작품을 매도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거금을 투자해 예술 작품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이기도 하지. 그런 풍조에 대한 일종의 쇼크 요법이지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그러면요?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뒤샹 나름대로의 탐색과 메시지가 이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그린 시대에는 예술 작품 속에 어떤 설화적 의미라든가 종교적 우의(寓意), 상징 같은게 담겨 있었지.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작품의 뒷면에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지.
또다시 어려워지는군요?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그림 속에 있는 설화적 요소가 사라졌지.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그대로를 그렸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화가의 개성이나 감각을 색이나 선을 통해서 즐기면 됐던 거야.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구요.
어쨌든 그림은 보고 느끼는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대부분의 그림은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뒤샹은 말야, 색이나 형태가 망막을 통해 들어와서 단순한 육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뿐인 시각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된거야. 피카소나 마티스가 아무리 독창적인 작품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들도 결국은 보고 느낀 그대로를 그리고 있을 뿐인 한낱 시각적 로봇이 아니냐는 거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지 물감이나 연필을 들고 하는 손놀림일 뿐인데, 이것을 인간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는 거지. 하기는 예술의 원래 의미가 ‘손장난’이긴 하지만 뒤샹은 시각적 로봇의 ‘손장난 예술’에 신물이 나 버린 거야.
그렇다면 「모나리자」에 수염을 붙이거나 전람회에 변기를 출품하는 행위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뒤샹은 예술이 뭐라고 생각했나요?
그는 ‘레디 메이드’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관이나 화랑에 놓는다면 그것들은 이미 변기가 아닐 테지.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변기가 틀림없는데 여기에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단 말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변기를 앞에 두고 해볼 수밖에 없겠지. 변기는 변기로서의 용도를 잃어버린 순간, ‘오브제(objet)’로서 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온다는 거야.
1917년 '샘'
역시 어렵군요.
「모나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뒤샹은 ‘수염 달린 모나리자’를 발표한 지 몇 년 뒤에 수염을 떼어 버린 「모나리자」에 「Rasee」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어. 「Rasee」는 수염을 깎은 여자 라는 뜻이야.
수염을 깎으면 「모나리자」 그대로였을 텐데요?
그렇지. 단순한 인쇄물인 「모나리자」인데 그 인쇄물은 놓이는 장소가 다르거나 제목이 달라짐에 따라서 전연 다르게 보인다, 즉 새로운 예술이란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게 뒤샹이 생각이지. 뒤샹은 자기 작품을 한 번도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뒤샹이 발표한 단순한 인쇄물과 변기는 이렇게 해서 과거의 예술적 가치를 파괴함과 동시에 현대 예술의 새 장을 열었지.
긴시로의 <명화의 수수께기> 中에서
[출처] 예술 신화를 파괴한 수염 난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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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bster telephone, 1938 by Dali & James)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ㅡ살바도르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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