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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초현실주의 화가...
2017년 10월 22일 22시 27분  조회:3626  추천:0  작성자: 죽림

요약 1887. 7. 28 프랑스 블랭빌~ 1968. 10. 2 뇌이. 프랑스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다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 관습적인 미적 기준을 무시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여 미술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다다이스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반(反)예술주의자였던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회화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무시당했다. 1960년까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만이 그의 중요성을 주장했으며, 제도권의 미술계와 기성 비평가들은 그를 다만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로 보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야 미국에서 신비스러운 대가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그의 태도는 팝아트와 옵아트를 비롯해 각지에서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환영받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그는 시각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정신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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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블랭빌
사망 1968년 10월 2일, 뇌이
국적 프랑스

요약 팝아트와 옵아트 등에 영향을 끼친 20세기 프랑스의 미술가로 주요 작품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프랑스에서 태어나 판화를 제작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예술적 기질을 나타내며 여러 양식을 접했으나 모방을 꺼려 자신만의 양식을 고집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비롯해 누드를 주로 그렸지만 사실적이 아닌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대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누드> 작품 뒤로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레디메이드로 불리는 파격적인 개념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랑스의 미술가이다.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다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 관습적인 미적 기준을 무시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여 미술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다다이스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반(反)예술주의자였던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회화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무시당했다.

1960년까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만이 그의 중요성을 주장했으며, 제도권의 미술계와 기성 비평가들은 그를 다만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로 보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야 미국에서 신비스러운 대가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그의 태도는 팝아트와 옵아트를 비롯해 각지에서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환영받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그는 시각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정신도 변화시켰다.

뒤샹의 생애

초기

뒤샹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지만, 그의 가문에는 해운업자이면서 판화를 진지하게 제작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전통이 있어 뒤샹 집안의 여섯 자녀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다.

1875년에 태어난 가스통은 나중에 자크 비용으로 알려졌으며, 1876년에 태어난 레이몽은 스스로를 뒤샹 비용이라고 불렀다. 남자형제 중 막내인 마르셀과 1889년에 태어난 누이동생 쉬잔은 미술가로서 뒤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1904년 10월에 마르셀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두 형은 이미 그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마르셀 르프랑수아의 초상 Portrait of Marcel Lefran이미지ois〉은 그가 이미 일정한 양식과 기법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뒤 몇 해 동안 뒤샹은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리면서 당대의 주요한 회화경향(후기 인상주의 및 폴 세잔의 영향, 야수파, 입체파)을 빠르게 경험했고 여러 양식을 두루 실험하기는 했으나 특정한 양식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는 모방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자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평범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야수파 운동이 사라진 지 3~4년 뒤에 그는 야수파 양식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다. 〈미술가의 아버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1911년이 되어서야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그는 입체파와 전위적인 모든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귀었다.

그의 또다른 절친한 친구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있는데, 그는 완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1909년까지 가장 정통적인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였다. 뒤샹과 그는 둘 다 입체파가 너무 체계적이고 정적이며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둘 다 '반(半)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움직임을 '비대상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곧장 나아갔고, 그 가운데서 예전에 그 명칭만 알고 있었던 '미래주의'와 '추상주의'를 경험했다.

작품 〈누드 Nude〉

1911년 한 전시회에 뒤샹은 거의 단색조의 실루엣 5개를 중첩시켜 구성한 〈초상 Portrait〉을 출품했다.

이렇게 몸이 움직이는 연속적인 단계를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의 착상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주된 차이점은 〈초상〉에서 캥거루 같은 실루엣이 눈에 띄는 반면, 〈누드〉에서는 누드의 모습이 전혀 없고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기계의 모습이 보일 뿐으로, 이를 통해 회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비대상적이고 거의 영화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1912년 2월 제28회 앙데팡당전에 〈누드〉가 출품되었을 때 뒤샹 형제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는 이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이 위원회의 위원들도 보수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혁신적인 시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뉴욕 시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충격을 준 수백 점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는 악평을 듣고 뉴욕에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 자극을 받아 뒤샹은 25세에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뒤샹이 그의 작품에서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는, 거의 그림 자체를 비웃는 듯한 아이러니를 나타냄으로써 그림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도 허물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장난투였다. 입체파조차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뒤샹의 유일한 모티프는 도발성이었던 것 같다.

미술과의 작별

1912년 〈누드〉를 발표한 뒤샹은 그뒤 겨우 몇 점의 그림을 더 그렸다.

그 가운데 몇 작품, 특히 둘 다 뮌헨에서 제작된 〈처녀에서 기혼녀로의 변화 Le Passage de la Vierge à la Mariée〉와 〈기혼녀 Mariée〉(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이것들은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또는 추상주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인체에 대한 뒤샹의 독특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뒤샹이 화가로서 매우 뛰어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 안에서 미적 가치를, 이른바 상식 세계에 맞서는 공격적인 지성으로 바꾸려 했다. 일찍이 1913년에 그는 매우 난해한 작품인 〈거대한 유리, 또는 독신남자들이 발가벗긴 신부, 그 조차도 The Large Glass, or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하여 망막미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산업 디자인의 기하학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 및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타낸 기계의 청사진 같았다. 〈누드〉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유리〉도 현대 회화 작품들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것이다. 1913~23년에 뒤샹은 거의 그림을 위한 예비 연구와 습작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기는 했으나 결코 작품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 할 이른바 '레디메이드'를 고안했다.

1913년에 그는 단지 평범한 자전거 바퀴에 지나지 않는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제작했다. 1914년에 만든 〈약국 Pharmacy〉은 겨울 풍경이 담긴 상업 인쇄물에다 약제사의 병을 생각나게 하는 2개의 작은 형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러한 레디메이드가 미술 작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데 대해 비웃는 태도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고 긍정적인 가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서였다.

레디메이드를 계기로 현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창작과 비평의 혼합물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 복무에서 면제된 뒤샹은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살며 작업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1915년 6월,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은 그를 유명인사로서 환영했다. 지식인 단체들에서의 따뜻한 환영도 그의 기분을 고무시켰다.

부유한 시인이자 수집가인 월터 아렌스버그는 그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작업실을 차려주었으며, 그는 거기에서 곧 〈거대한 유리〉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아렌스버그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누드〉를 그린 화가인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미술관들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전업화가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의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프랑스어 강습을 했다.

그는 그무렵 작품을 팔면 인기를 끌었을 것이지만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무료로 나누어 주거나 일부러 적은 금액을 받고 파는 데 만족했으며, 그후에도 계속 그러한 미술가로 남았다. 그는 아렌스버그를 도와 〈누드〉를 비롯한 그의 작품의 상당수를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이것들이 아렌스버그 컬렉션의 주요작품이 되었으며, 뒤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넘어갔다.

1923년 작업을 그만둘 때까지 8년을 더 작업한 〈거대한 유리〉 외에 뒤샹은 단지 몇 점의 레디메이드만을 더 만들었다.

그는 1917년에 독립미술가협회의 제1회 전시회에 〈샘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는 이 단체의 창립회원이었지만, 그 작품에 'R. Mutt'(얼간이)라고 서명했기 때문에 그것은 거절당했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피카비아가 잡지 〈291〉(1917)에서 뉴욕 시에 소개한 다다이즘 운동을 몇 년 앞질러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뒤샹은 아렌스버그와 H. P. 로셰를 도와 〈맹인 The Blind Man〉과 〈롱롱 Rongwrong〉을 발행했는데, 전자는 단 2회만 발행되었고 후자는 단 1회만 발행되었다. 그뒤 1921년에 화가인 맨 레이와 함께 〈뉴욕 다다 New York Dada〉를 단 1회 발행했다.

1918년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유리〉를 월터 아렌스버그에게 팔았다.

이 작품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또다른 그림을 팔아 나온 돈으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개월 동안 지냈으며, 그곳에서 정전(停戰) 및 그의 형 레이몽 뒤샹 비용과 기욤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1919년 그는 피카비아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최초의 다다이스트들과 교류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장 유명한 레디메이드인,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붙인 〈모나리자 Mona Lisa〉라는 사진작품이 나왔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의 미술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미술은 이제 막 끝난 전쟁의 공포를 일으킨 파렴치한 문명의 일부였다.

1923년 2월에 뒤샹은 〈거대한 유리〉의 작업을 멈추고 영원히 완성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해가 지남에 따라 어떤 종류의 예술활동도 점점 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영화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때까지 그가 만든 것들은 다만 잠재적인 기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작동하고 움직이는 실제 기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계는 광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단편영화인 〈무기력한 영화 Anemic Cinema〉(1926)가 나왔다. 또한 "광학적 축음기 음반"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을 만들면서 그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술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보잘 것 없는 기계들은 산업의 야망을 비웃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는 나머지 시간에는 체스 놀이에 열중하여 국제시합에 참가하기도 하고 1932년에는 그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뒤샹은 미술단체들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주로 예전의 다다이스트 친구들로 이루어진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는 관계를 유지했다.

1934년 그가 〈거대한 유리〉에 관한 일련의 자료들을 담은 〈초록 상자 Green Box〉를 출판하자 초현실주의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뒤샹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논문을 써서 1935년 파리의 〈미노토르 Minotaure〉지에 실었다. 그후 초현실주의자들과 뒤샹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으며, 뒤샹은 브르통을 도와 1938~59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든 작품전시회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그는 그의 작품들을 복제한 68점의 축소품들이 들어 있는 〈부아탕발리즈 Boîte-en-valise〉라는 화첩을 만들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며 그의 작품을 국외로 몰래 옮겼다.

결국 그것은 뉴욕 시로 옮겨졌으며, 그는 거기에서 브르통과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망명 중인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 10월과 11월에 뉴욕 시에서 열린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료 망명객들과는 달리 그는 미국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전쟁 기간 중 뉴욕 시의 현대미술관에서 〈거대한 유리〉를 전시하여 명성을 회복했으며, 1945년에는 미술잡지인 〈전망 View〉의 특별호에 그가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2년 뒤 그는 초현실주의 전시회 문제로 브르통을 도우러 파리에 갔으나 곧 뉴욕 시로 돌아와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54년 티니 새틀러와 결혼한 뒤로는 예전보다도 더욱 은둔해서 살았으며,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기묘하고 독특한 물건을 만들고 체스를 두며 살았다.

이러한 조용한 생활은 1960년쯤 깨지고 말았다. 그 무렵 새로운 세대의 미국 미술가들은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뒤샹이 이미 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세계 곳곳으로부터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고 그의 작품 회고전들이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레디메이드들이 그의 허락하에 제한된 수로 복제된 것이며, 가장 놀랄만한 일은 그가 뇌이에서 죽은 뒤 그의 친구들이 그가 마지막 20년 동안 남몰래 〈명제:1. 폭포, 2. 조명 가스 Etant donnés : 1. la chute d'eau, 2. le gaz d'éclairage〉라는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데, 무거운 나무문에 2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어 그것을 통해 뒤샹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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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7년 07월 28일
사망 1968년 10월 02일
국적 프랑스
대표작 〈샘〉, 〈L.H.O.O.Q〉,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자전거 바퀴〉, 〈거대한 유리〉, 〈주어진 것들〉 등

전통적인 선입견을 깨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작품 세계를 펼쳤다. ‘예술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성상 파괴주의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르셀 뒤샹은 일상 속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견에 도전한 현대 미술의 혁명가이다. 변기에 사인을 한 〈샘〉과 모나리자의 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등 일견 엉뚱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미술품의 생산과 유통에 중대한 고찰을 던지며,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쪽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해운업자인 동시에 판화가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에게 문학과 그림, 음악 등을 가르쳤다. 뒤샹 형제 6남매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으며, 뒤샹이 학교에 다닐 무렵 큰형 둘은 각각 법률과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미술가의 길을 걸었다. 큰형은 자크 비용이란 이름으로 화가로 활동했고, 둘째 형은 레이몽드 뒤샹-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조각가가 되었다. 누이동생 쉬잔 역시 이후 쉬잔 뒤샹-크로티라는 이름으로 화가로 활동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예술 활동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고 한다.

뒤샹은 이런 분위기에서 고향 마을 풍경을 습작하며 자랐고, 특히 모네의 화풍을 좋아했다. 1904년에 중등학교를 졸업한 뒤샹은 형이 있는 몽마르트르로 가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형 주변의 예술가, 작가와 어울리면서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판화가 오딜롱 르동을 가리켜 자기 작품의 시작점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또한 말라르메,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작품과 상징주의 문학에 경도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렸으며, 판화 기법도 배웠다. 또한 인상주의와 야수파, 입체파적 화풍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특정 작품을 모방하는 건 꺼렸다.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

1912년, 뒤샹은 예술가 활동의 큰 전환점이 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를 완성했다. 입체파 양식을 받아들여 그린 그림이었으나 이는 ‘이즘’을 중요시하는 입체파 그룹에게 미래주의적으로 여겨지며 냉대받았다. 이 일로 그는 체계적이고 구속적인 ‘이즘’에서 탈피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이때 그는 ‘이게 그들이 원하는 거라면 어떤 그룹에도 낄 이유가 없어. 나는 앞으로 나 자신에게만 의지하겠어’라고 결심했다. 이 작품은 이듬해 뉴욕 아모리 쇼에 출품되었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필라델피아 미술관

이때의 성공을 잘 이용했다면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현대 젊은 미술가로서의 위상과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 악평을 들은 그림이 뉴욕에서 성공한 일은 오히려 그에게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믿음을 허물어트리고, 회화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뒤샹의 초기 습작 및 회화 작품들을 보면 그가 화가로서 뛰어난 기교와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지나치게 지성적이었던 젊은 화가에게 예술과 상식 세계에 대한 회의를 안겨 주었고, 그 결과 현대 미술의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레디메이드(Ready-made)1) 를 고안하게 만들었다.

뒤샹은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지만 새로운 작품 양식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공산품이 쏟아져 나오던 20세기 초기의 사회상과 산업 디자인을 받아들였다. 1912년 브랑쿠시, 페르낭 레제와 함께 항공 박람회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뒤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말에서 예술가의 기교나 솜씨에 의존하여 작품을 제작하던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관념, 미술품과 기성품의 경계 등이 허물어지면서 현대 미술이 탄생했다. 인공물이나 자연의 일부분을 이용하여 제작하는 현대 미술 작품들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일상과 예술을 혼돈스럽게 뒤섞는다.

이 무렵 뒤샹은 절대적이고 분명한 노선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에 회의를 느끼고, 생트 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1913년 첫 번째 레디메이드 작품 〈자전거 바퀴〉를 제작했다. 평범한 나무 의자와 자전거 바퀴를 결합한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기성품이라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조합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그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란 작품을 제작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정신 표현, 즉 아이디어에 있다고 사고를 전환시켰다. “나는 미술을 믿지 않는다. 미술가들을 믿는다.”라는 말 속에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레디메이드가 예술에 대한 진지함을 비웃는 태도 이상으로 여겨지며 현대 미술의 한 양식으로 자리 잡는 것은 이로부터 약 40여 년이 지난 후이다.

그 후 10여 년간 뒤샹은 레디메이드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했다. 물건을 개조하는 수고를 들이기도 했으나 때로는 제목만 붙이기도 했다. 눈 치우는 삽을 구입해 거기에 서명을 하고 〈부러진 팔보다 앞서서〉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으며, 1917년에는 변기를 구입해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하고 미국 독립미술가협회가 개최하는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이 작품이 20세기 예술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꼽히는 〈샘〉이다.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이 작품은 예술품 전시 참여를 ‘모든 사람, 모든 작품에 개방한다’라며 예술의 자유를 표방한 독립미술가협회의 슬로건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상도, 심사위원도 없는 이 전시회에서 뒤샹은 배치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전시 참여를 허락받지 못했고,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의 사진으로만 남았다. 뒤샹은 이를 비웃으며 자신이 창간한 잡지 〈더 블라인드 맨〉을 통해 작품 의의를 설명했다.

무트 씨가 직접 〈샘〉을 만들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용품을 선택하고, 그것에 새로운 관점과 이름을 붙임으로써 본래의 사용가치에 대한 고려가 아닌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창조되도록 했다.
〈샘〉
〈샘〉

1919년, 뒤샹은 길거리에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인쇄된 싸구려 엽서를 한 장 구입했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고, 알파벳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어 넣었다. 프랑스어로 ‘엘.아슈.오.오.뀌’로 읽히는 이 단어는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라는 의미의 ‘Elle a chaud au cul’를 연상시켰다.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 행위는 기존의 예술품과 예술가가 지니는 전통, 신화적 권위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지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천재성, 창조성에 관한 맹신을 무너뜨리는 뒤샹의 이 같은 행위는 반예술(Anti-Art)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현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반예술이란 뒤샹이 1914년 창안한 것으로, 예술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일견 다다이즘(Dadaism)2) 운동과도 비슷한데, 뒤샹은 다다이즘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이미 이런 사고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샹은 1923년 〈거대한 유리〉를 미완성으로 남겨 두고, 예술 활동을 중단했다. 파리로 돌아간 그는 체스를 두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프로 체스 선수가 되어 파리와 뉴욕을 오가기도 했다. 이런 행동 자체가 예술 표현 행위에 대한 조소로 읽히며,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뒤샹은 이 시기에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에게도 어떤 유파나 이즘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위대한 침묵’으로 일컬어지는 삶을 살았다. 미술가 그룹들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예전의 다다이스트였던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친구들과만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한편 뒤샹은 공식적으로는 예술 활동을 중단했지만,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다. 20년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작업한 최후의 작품 〈주어진 것들〉은 1968년 그가 생을 마감한 후 유언에 따라 공개되었다.

뒤샹의 작품이 지닌 중요한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대의 미국 미술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놓았다(제시하다)고 평가받으며, 국제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용한 생활을 하며 ‘때때로 잊힌 예술가로 남고 싶다’라는 바람과는 달리 뒤샹은 ‘예술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성상 파괴주의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현대 미술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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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현대미술의 혁명가뒤샹

     1917년 4월 10일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갤러리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이날이곳에서는 그동안 예술에서 진행되어온 유럽의 독보적인 행보를 저지하고 미국의 새로운 미술을 장려하고자 창설한 <독립 전시회>의 첫 번째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주최측인 독립미술가협회는 출품 작품에 있어 어떠한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누구나 출품비만 내면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전시 조건을 내걸었지만이러한 관대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과 조직위원회를 불쾌하게 만들며 전시를 거부당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7.28-1968.10.2)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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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Fontaine)>, 1917.

  

   물론 작품은 실명으로 출품되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그 작품이 당시 전위미술의 수장 마르셀 뒤샹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었다출품비와 함께 소포로 배송된 작품은 상점에서 누구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였고하단엔 ‘R. Mutt 1917’이라는 작가의 서명이 쓰여 있었다작품은 이게 전부였다어디한군데 작가가 창의성을 발휘해 공들여 제작한 부분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을 머트라는 사람의 장난질로 여긴 전시 조직위원회는 당혹함과 혐오감을 분출하며 작품의 전시를 거부했다. ‘출품비를 낸 작가는 누구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라는 분명한 작품 출품 조건이 이 조건을 만든 사람들에 의해 너무나 쉽게 깨어진 것이다사실 <독립 전시회>에서 작가의 독립은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샹은 주최측인 독립미술가협회의 이사이자 전시조직 위원이었으므로 이 소동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뒤샹은 조직위원회의 허울뿐인 약속과 위선을 꼬집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머트씨는 세 가지 일을 해냈다그는 오브제를 선택했고그것에 새로운 명칭()을 부여했으며 원래의 실용적 기능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시켰다

  

  

예술은 발견되는 것이다레디메이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는 기성품을 의미하는 모더니즘 아트의 장르로, 1915년 뒤샹이 대량생산된 물품으로 자신의 작품 만들고 이를 지칭하면서 만들어낸 용어이다뒤샹은 예술사의 전설이 된 <이전에도 레이메이드 작품을 여러 번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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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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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병 건조기>, 1914.

 

 

   작가의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성품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그렇다면 작가가 아닌 사람이 선택한 물건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작가가 선택한 물건과 똑같은 나머지 기성품은 왜 예술품이 될 수 없는가뒤샹을 레디메이드는 기존의 예술인식 방식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의문을 품게 한다.

    뒤샹의 주장대로라면 예술가가 발견하여 선택한 물건은 그것이 기성품 이라 하여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건 누구나가 아닌 예술가인데뒤샹은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심상이라고 주장했다예술은 사물이 아닌 심상에 깃들어 있다는 것즉 예술가의 심상이 담겨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캔버스대리석목재석재 등의 재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작가는 우선 심상을 떠올리고기획된 심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을 찾는데 이것이 기성품이라면 가져다 쓰면 된다는 것이러한 뒤샹의 단순한 논리는 기존의 예술체계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으로 전통적인 예술계에게 큰 반란으로 받아들여졌다

   뒤샹은 미적 가치의 새로운 가능성과 다양성을 제시하여 미술가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손을 해방시켰다한계가 없는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작품 활동을 전개 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뒤샹에게 빚진 바가 크다

  

칼 안드레Carl Andre 등가Ⅷ 1966.png

칼 안드레, <등가>, 공업용 벽돌, 1966 

  

트레이시 에민  나의침대 1998.png

트레이시 에민,  <나의침대>, 작가가 사용하던 침대, 1998

 

  

실낙원 케빈 터크 2006먹다남은 사과.png

케빈 터크 ,<실낙원>, 먹다남은 사과,  2006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되어준 뒤샹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 정신은 현대미술을 진일보 시켰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가 되었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어법

     예술에서 뿐 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권위의식통념적인 의미남성적인 과시를 부정하고자 했던 뒤샹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까지 바꾸는 모험을 한다뒤샹은 자신을 여성처럼 치장하고 유혹적인 포즈를 하고선 카메라 앞에 섰다.

 

로즈셀라비의 뒤샹 1920.png

마르셀 뒤샹, <로즈셀라비의 마르셀 뒤샹>, 1920.

  

   완전히 다른 성 정체성을 부여한 자기 자신에게 로즈 셀라비라는 가명도 만들어줬다뒤샹은 자신의 작품에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달아주며 동음이의어의 말장난같은 언어의 유희를 즐겼는데,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도 프랑스어로 읽으면 에로스 세 라 비(Eros, c`est la vie 사랑 그것이 인생이다)’나 아로제 라비’(Arroser la vie 삶을 위해 건배)라는 뜻으로 해석된다그렇다면 로즈 셀라비라는 명칭은 단순히 여성인 자아를 표상하는 이름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샹의 중의법적 언어유희가 만들어낸 작품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놓고 ‘L.H.O.O.Q'라는 글귀를 적은 작품일 것이다

  

LHOOQ  1919.png

마르셀 뒤샹, , 1919.

  

   ‘L.H.O.O.Q’는 프랑스어로 읽으면 .아슈...로 발음되며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라는 매우 외설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예술사에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에 이런 심한 장난과도 같은 행위를 더한 것은 어떠한 이유일까원작을 조롱하고자 하는 불순한 생각에서였을까그러나 뒤샹이 조롱한 것은 <모나리자>가 아닌 예술작품에 대한 우상화된 통념즉 대중들이 가지는 예술의 신격화를 조롱한 것이다예술에 있어 과거의 전통과 권위를 무력화 시키고자 한 뒤샹은 우리에게 예술의 본래가치를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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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샘>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오브제를  전시함으로서

사물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미술품으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미술사에 처음 오브제라는 개념을 정착시킨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자전거바퀴>

샘과 같은 맥락에서의 작품이다.

자전거의 바퀴는 지면에 닿았을때에

그 기능을 다하는 자전거의 부품이다.

자전거 전체에서 바퀴부분만을 띄어내어

원래 있던 지면이 아니라 배치자체를 완전히 바꿈으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고

이렇게 물질의 본래기능과 분리시켜

전혀 새로운 시각효과를 연출하였던것은 당대에는

기적에 가까운 시각의 대 혁명이었다

 

 


 

마르셀 뒤샹 -모나리자

어떤이가 있어 대예술가의 대작을 이렇게 난도질 할 수 있는가..

뒤샹은 그동안 정통적으로 추앙받던 예술가의 작품에

수염하나로 코메디를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싸인을 집어넣었다.

너무도 극단적인 그의 발상에 사람들은 경악하였으리라..

 


 

마르셀 뒤샹 <모나리자 연작>

다음의 작품을 보면 마르셀 뒤샹의 의도가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해진다.

처음 콧수염을 붙이면서 시작된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다음의 7장을 통하여 매우 극단적으로

마치 극단의 끝을 보여주려는 양

시각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이제는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그것이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항변하는 것일까..

 

 


 

앤디워홀 <1명의 채색된 마릴린>

그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 마릴린먼로

이 주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으로 이미

앤디워홀이 말하려하는 것의 반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없다.

상업적인것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들인 작가의 대표작이다.

 

 


 

앤디워홀 <9명의 채색된 마릴린>

뒤샹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한장으로 던져진 마릴린먼로를

작가 마음대로 해부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릴린먼로가 지닌 다양한 칼라를 이야기하는가.

대중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다양성의 표출인가

미국 pop아트의 철학적 기조가

이 작품하나로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앤디워홀 <10명의 채색된 마릴린>

사람들은 저앞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이치,

그것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들,

이도저도 아니라면...그림하나하나에서 품어나오는 강렬한 색상

그것들을 애기하고는 있지 않을까?

 

 


 

앤디워홀 <18명의 채색된 마릴린>

다양한 시각적 모색은 드디어 이 작품을 통해 역광이라는 주제를 선사한다

빛의 특징은 위에서 아래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비추어지는 빛의 성질로 인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들은

매우 상식적인? 형태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앤디워홀은 그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림으로서

일상에서는 그간 경험치 못했던 새로운 시각적 지평을 열어준다.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 두사람은

미술가이기전에 혁명가이다

그 이전의 화가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릴것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였다면

이 두작가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에 대한 파격적인 고찰이 있었던 것이다.

현대미술의 다양성 그 지평을 열어준

이 두 작가는 후세에 더더욱 그 빛을 더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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