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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16) :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이상미(理想美)를 뒤엎은 생활속의 미
버찌의 少年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27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에는 지금까지의 회화 수업 역정(繪畵修業歷程)을 규지(窺知)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 '마네 초기의 경신작'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델인 알렉산드르 소년은 마네의 작업장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붓도 빨아주는 사동이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감수성이 강하고 예쁘장한 미소년의 사체를 보고 마네는 겁에 질려 작업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그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여기서 목을 매었느냐?'고 무심결에 묻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대답하여 마네는 대경실색, 다른 아틀리에로 옮겼다는 일화도 있다.
스페인 발레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 왕립 극장 무용단의 인기가 대단한데, 한번 구경해봐.' 마네는 1862년 8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무려 80일 동안 롱런한 이 '세빌리아의 꽃' 공연을 보고 감동, 이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특별히 교섭, 공연이 없는 3일 동안 단원들이 포즈를 취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마네는 친구의 넓은 아틀리에를 빌려 스케치, 이 해 늦게 이 그림을 유채로 완성시켰다. 마네의 열성도 대단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마네를 위해 사흘씩이나 포즈를 취해 준 성의도 무던하다. 친해지기 쉬운 정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렸는데 간결, 자유로운 필촉의 리듬이 발레의 리듬과 잘 어울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
1858년에 제작을 개시하여 다음해 관전(官展)에 낸 마네 최초의 살롱 출품작. 57년 에 만 들라크로아만이 찬표를 던졌고 나머지 심사 위원들은 모두 부표를 던진 불운한 대작이다. 마네와 아는 체하고 지내는 주정뱅이 불량아를 아틀리에로 모셔(?)와 강한 술에 취해 의식이 몽롱한 상태를 그린 것인데, 모델의 발, 무릎, 얼굴 등 몸가짐이 어쩐지 딱딱하게 꾸민 것 같으나, 정면에서 비친 광(光)이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를 낳고, 버려진 상징적인 술병과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과 모자, 그리고 술잔 등이 대도시의 퇴폐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황폐를 화제(畵題)로 구한 것은 '惡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와의 교분으로 미루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측이 강하다.
기타 演奏者
마네의 28세 때의 작품, 다음해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교과서식 전통 도식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명암 처리, 신선한 색조의 대비로 창출시킨 살아 있는 듯한 화면 구성 등 그의 재능과 예술적 특질이 잘 나타나 있는 문제작이다. 대담한 필촉과 사실주의적인 색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 등신대의 인물상에서 기타 반주에 맞춘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오는 듯하며, 밝은 빛과 어두운 배면과 오른쪽의 붉은 병과는 서로 대비되면서 이곳이 무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인물의 배치, 묘법 등에서 스페인 취미가 엿보이나, 생기 있고 발랄한 모티브의 포착, 강렬하면서도 평면적인 마티에르에 이미 마네의 독자성이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특질은 3년 후의 <올랭피아>, <풀밭 위에서의 식사>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롤라 드 발렌스
'스페인 발레'에 등장한 몰라라는 발레리나를 그린 것인데 우측(右側)으로 무대와 객석이 보인다. 스커트의 적(赤), 흑, 황, 녹의 대담한 채색법은 형태나 음영(陰影)과의 유기적인 연관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던 전통적인 채색법에의 반역으로, 당시 평론가들에 의해 '잡탕 칠'이란 혹평을 받았다. 스커트의 색깔과는 대조적으로, 롤라의 팔과 다리의 상아색(象牙色)은 배면의 불꽃 같은 색깔과 스커트의 눈부신 색깔의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부는 위치에 따라 신비로울 정도의 미묘한 색으로 변한다. 쿠르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살 붙임'도 간과할 수 없다. 보들레르는 롤라의 야성적인 표정, 대담한 채색으로 생긴 선려한 인상을 '4행시'로 써서 그의 유명한 '惡의 꽃'에 수록했다.
테이블 위의 과일
과일, 나이프, 컵 등 여러 마티에르의 상호간의 밸런스, 이런 사물들의 구성에 견고한 토대를 부여하는 테이블의 수평선과 배경의 절단 방법 등이 마네의 스승인 샤르당(Chardin)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샤르댕은 면밀하고 무게있는 필치로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그렸고, 그의 정물화는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마네는 수많은 풍경 화와 인물을 그렸으나, 이에 비해 정물화는 극히 적은 편이다. 1846년에서 66년 사이에 그린 10여 점의 정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집토끼>는 샤르댕의 <죽은 토끼와 몰이 도구>를 모사한 것처럼 닮았다. 마네는 인물화에도 레몬, 컵, 포도 등을 장식물로 등장시켜 때로는 주제인 인물 이상으로 집요하게 묘사, 화면 전체를 대위법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데, 이 그림에서는 '견고한 구성'을 직감할 수 있다.
거리의 악사
기구하는 修道士
한 수도사가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기구(祈求)하고 있다. 바닥에 있는 두개골은 수도사의 경건한 얼굴표정과 대비(對比)되어 기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절박하고 처절한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화면 전체가 암갈색(暗褐色)의 색조로 이루어져 표현주의풍(風)의 강한 감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순수한 종교화(宗敎畵)로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마네는 평생을 통해서 몇 점밖에 안 되는 종교화를 그렸고, 또한 수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이탈리아파(派)나 네덜란드파의 선인(先人)들의 작품을 모사한 습작조차 별로 없는데, 이 작품 역시 어떠한 동기에서 그렸는지, 또 언제 완성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러 장르의 그림을 그린 마네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1867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건물, 인물, 거리, 동물 등의 고유색(固有色)이 한낮의 햇볕을 받아 검푸르게 변한색채의 매치(match)를 취급하여 색채 상호간의 탄력성 있는 관계를 회화적 차원에서 소화시킨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소년은 <讀畵>에서 언급된 아들 레옹 코에라이고, 높이 떠 있는 기구는 사진작가 나다르가 타고 파리 상공을 공중 촬영한 기구인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는 여유 있는 시민들의 동세(動勢)와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른바 '현실적인 일상성'이란 마네의 묘화 태도(描畵態度)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나폴레옹 3세가 1867년에 마련한 만국 박람회를 능가한 대(大)박람회를 대작으로 그린 마네의 시대 감각을 이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鬪牛
1865년 <올랭피아>의 악평에 번민한 나머지, 스페인으로 피신(?)한 마네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즈와 고야의 그림에 감명을 받고, 투우(鬪牛)에도 열중했다. 파리로 돌아온 마네는 스페인의 추억들을 캔버스에 옮겼는데 이 그림도 그때의 것이다. 경쾌하고 거친 필촉 등 즉흥적인 묘사로 보이나, 드높은 하늘, 햇빛을 듬뿍 받은 밝은 대지, 소의 검은 고체(固?),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말이 적절히 대비되고, 또한 투우사의 화려한 복장과 새빨간 물레타와 긴 칼 등이 푸른 하늘색과 해조(諧調)를 이루어 투우장의 속성인 잔혹성(殘酷性)과 시원한 맛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마네는 당시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 <투우>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표현한 듯하다.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
마네의 전생애를 통한 친구이며 유언 작성자인 테오도르 뒤러의 초상이다. 뒤러가 인상주의 그림의 철저한 옹호자이며, 세계적인 미술품 수장 가라는 점을 감안, '사려 깊은 지성', '상류 사회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전 화면을 짙은 회색으로 처리하고 손의 위치로 동세(動勢)를 표현했다. 이 작품도 에밀 졸라의 경우처럼 우정어린 정성이 포인트이다. 1865년 8월, 스페인 마드리의 한 호텔에서의, 마네와 뒤러의 만남에는 재미있는 삽화도 전해지고 있다. 마네가 정성을 들여 이 그림을 끝내자 뒤러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림의 내용보다 이름을 보고 모으는 경향이 있으니 당신 사인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마네는 분명하게 서명했다. 요즘 우리 나라의 비슷한 풍조는 백 년 전의 파리에서 따온 것일까?
자카리 아스트륙의 초상
화면 우측은 정면에서 본 초상화이고, 화면 좌측은 거울에 비친 실내(室內)이다. 벨라스케즈의 대표작 <侍女들>에서처럼, 마네도 이따금 거울의 효과를 그의 그림에 원용(援用)했는데, 화가들이 전통적인 대상을 그릴 때 거울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인 특색으로 지적되고 있다. 초상화 부분을 검정색으로, 거울에 비친 실내를 올리브색으로 메운 것은 이 두 색을 대비시켜 주제 인물(主題人物)의 내면적인 성격과 지성적인 분위기를 표출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문제작 <올랭피아>에서처럼, 베네치아파(派) 회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티지아노의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이 그림을 비교해 보면 퍽 재미있을 것이다. 마네의 성실한 지지자였고 비평가, 조각가, 작곡가, 시인인 아스트륙을 정성들여 그렸는데, 아스트륙 부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랫동안 마네의 아틀리에에서 묵었던 작품이다.
피리 부는 소년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에밀 졸라의 초상
36세가 된 마네가 28세의 에밀 졸라를 그린 초상화인데, 당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어 고민하는 마네를 백방으로 옹호해 준 졸라에의 보은과 우정의 표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지적인 정열과 불퇴전의 의지이며, 이러한 졸라의 인상 속에 고마움과 사심 없는 우정, 즉 정성을 쏟은 점이 이 초상화의 포인트다. 졸라가 여덟 번이나 와서 포즈를 취한 곳은 마네의 아틀리에인데 도,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벽에는 그의 작품 <올랭피아>의 사진과 벨라스 케즈의 <바커스의 승리> 모사도(模寫宜),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가 걸려 있어, 마네의 취미를 엿볼 수 있다. 책 읽는 자세를 실물 크기로, 상의(上衣)를 검정 단색으로 처리, 인품을 강조했는데 살롱에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발코니
발코니의 네 남녀,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1869년의 살롱에 출품했는데 시에스노는 '일반인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백, 청, 흑의 색조가 아름답고, 특히 청색의 난간이 툭 튀어나와 발코니임을 입증시켰다. 마네는 불로뉴에 체제중 발코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 장면의 역광 효과(逆光效 果)에 흥미를 느껴 모티브로 택했는데, 모델은 머리에 꽃 장식을 꽂고 녹색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 친구이며, 남자는 카페 게르보아의 친구 화가인 기르메, 어둠 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아틀리에에서의 식사
좋아하는 모티브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마네의 고심작이다. 그림의 왼쪽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마네 부인이 들고 있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 가지 메뉴가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 위해 16번이나 습작을 그렸을 정도이다. 노랑, 검정, 하얀 색과 엷은 푸르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陰影)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아틀리에의 격조를 높이는 한편,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감돌도록 표출시켰다. 마네는 1868년 여름 불로뉴에서의 스케치를 토대로 파리에서 이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전면의 소년은 그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부인, 식탁에 앉은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모델 에바는 파리 명문의 딸이다. 이 여인은 나중에 유명한 판화가 게라르와 결혼, 규수 화가로 활약한다. 당시 프랑스 문예가 협회 회장이었던 소설가 엠마뮤엘 곤잘레스의 딸인 에바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1869년 2월부터 마네의 아틀리에의 내제자 (內弟子)로 들어간다. 이 그림은 에바가 '40회 이상 포즈를 취했다.'고 불평한 난 산 중의 난산 작품인데, 은백색의 복장, 백장미, 깨끗한 살결, 그림 속의 하얀 꽃 등 백색에 의한 바리에이션이 아름다우며, 이러한 백색의 반복을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 검은 띠 등으로 조여 매 화면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켰다. 1869년 3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살롱 마감일인 3월 12일에야 완성시킨 이 작품은 살롱에서 악의에 찬 혹평을 받았으며, 이후 에바에게 기증되었다.
독서
마네 부인이 그의 아파트에서, 책을 읽어 주는 아들의 목소리에 만족해하고 있는 행복한 정경이다. 살갗이 비치는 하얀 옷, 커튼, 의자의 커버 등 백색을 주조로 한 그림으로 화면 전체에 전개되는 백색의 다양한 반영(反映)이 잔잔한 물결처럼 화사하고 음악적이다. 마네는 이 여인과 10년 이상 동거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친구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에 붙였고, 부친이 사망한 3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그림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레옹 코에라는 마네가 죽은 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동생으로 행세, 진짜 마네의 아들인지, 부인의 동생인지, 또 딴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부 자식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네는 1858년에서 80년까지 이 부인을 여러 번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불로뉴 숲의 競馬
마네는 1872년 여름 네덜란드의 처가를 방문하고 파리로 돌아와, 스포츠맨이며 수집가인 발레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려, 당시 파격적인 3천 프랑을 받았다. 질주하는 말의 지체가 어떤 모양인가를 연구해서 그린 드가의 경마와는 달리, 마네는 이 그림에서 달리는 말의 모습을 거의 일직선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질주하는 적토마의 기수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모습도 좀 이상스럽다는 게 평론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전경과 원경과의 색채 대비는 훌륭하며, 특히 엷은 살색으로 하늘을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마네는 영국의 '경마 판화'를 참고로 해서 질주하는 말의 모습을 그렸고, 말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고 실토했다 한다.
아르쟝뚜유
외광 표현(外光表現)을 시도한 작품, 1875년의 살롱에 출품했으나 세느강의 물빛이 너무 푸르고 원근법이 무시되었다는 악평을 받았다. 새로운, 밝은 회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던 마네는 1874년 여름 아르쟝뚜유에 있는 모네의 작업실을 찾아 모네와 함께 옥외 제작(屋外製作)을 했는데, 이 그림은 그 때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차분한 필촉으로 세분화된 분할(分割), 색채와 빛의 반짝임 등을 빠짐없이 포착하려고 노력 한 흔적이 보인다. 마네는 1874년 봄에 열린 제 1회 인상파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화우들, 특히 모네의 열성적인 제작 태도에 이끌려 이 그림을 정성껏 그려 살롱의 심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네는 한 평론가가 물이 푸르게 보이는 때가 있으면 푸르게 그려도 좋다는 평을 받고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게임
인상파풍(風)의 필촉을 느끼게 하는 화면이지만, 색채가 프리즘 적으로 분해(分解) 되어 있지는 않다. 그림 속의 인물들도 어느 우연한 순간을 스케치한 것 같이 보이나 넓은 공간과 원근(遠近)을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이며, 따라서 화면 전체가 퍽 안정감 있게 보인다. 파리에 있는 화우 스티반스의 넓은 뜰에서 크로켓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스티반스와 그의 모델, 마네의 옛 친구 등 우정에 넘치는 모임이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게임 장면을 포착, 하늘은 보이지 않고 파랑, 노랑, 흰색이 주조를 이루어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다가 1912년 베른의 헌 옷집에서 배우 도리 봐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이색적인 모티브이다.
세느강의 두 욕녀
이 주제는 그의 친구 르노와르에게는 흔한 것이지만 마네에게는 진귀한 것이다. 하지만 르노와르와는 달리 배경을 짙은 녹색으로 입혀 놓았기 때문에 욕녀의 크림빛 육체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목욕 후의 상쾌한 느낌 같은 것이 감득되는 듯도 하다. 이 그림은 욕녀들의 피부 빛깔에 무척 신경을 쓴 듯한데, 크림 계(系) 빛깔의 미묘한 전조(轉調)에 의해서 촉감성리라든가, 또는 양감(量感)이 물씬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법은 르네상스 이래의 서양 회화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3차원적인 양체(量?)나 공간의 표현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마네는 처음에는 욕녀를 그릴 때 갈색의 담채(淡彩)로 소묘적(素描的)인 표현을 즐겨 왔었다.
푸른 긴 椅子에 앉은 마네 부인
파스텔화(畵)가 지닌 표현력에 마네가 어느 정도 정통해 있었는가를 전해 주는 작품이다. 백색, 회색, 청색, 남색의 보드라운 뉘앙스와 상호간의 메아리가 무지개처럼 아름다워, 마네 부인을 선녀처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양식적(樣式的) 견지에서 1878년도에 제작했다는 주장과 마네 부인의 모자, 의상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74년 경에 그렸다는 주장이 맞서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이 그림을 최초로 입수한 사람은 드가 인데, 드가는 1870년대 초반부터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 물감의 효과와 매력을 여러 차례 설명, 파스텔화를 그리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면 하단에 보이는 'S. Manet'란 연필 사인은 마네 사망 후에 미망인이 써 넣은 것이다.
나나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폐 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커다란 등받침, 침대로도 쓸 수 있는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을 한 중년 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배면에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학(鶴) 그림이 보인다. 부도덕(不道德)을 주제로 했다는 이유로 거부된 작품이다. 모델은 은퇴한 여우(女優) 앙리에트 오제르, 발랄한 젊음은 사라졌으나 당시의 세도가 오렌지 공(公)의 정부였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와 동명(同名)인 것으로 미루어 이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카페에서
이 그림과 <비어 홀의 여종업원>은 한 장의 그림으로 구상되어 제작되다가 완성 단계 때 2점의 작품으로 나뉘어 그려졌다. 같은 모티브인 마네의 초기 작품 <압상뜨를 마시는 사나이>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판이하다. 3각형의 대리석 테이블에 앉은 3명의 남녀가 각각 세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이 비어 홀의 흥청대는 분위기를 흥미롭게 관찰하는 표정이다. 4명의 상반신(上半身)만으로 메운 특이한 화면 구성은 사진 작품에서 원용한 구도로 보이며, 후면의 포스터와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비좁은 비어 홀의 성업(盛業)이 당시 파리의 모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남자는 에바 곤잘레스와 약혼한 판화 작가인 앙리 게라르.
비어 홀의 女從業員
마네는 46, 7세 때 자연주의적(自然主義 的)인 테마를 취급한 8점의 유채화와 카바레, 카페 등의 수많은 데생을 남겼다. 이 그림도 그 때의 작품인데, 당초는 <카페에서>와 함께 한 점의 대작으로 그리다가 완성 단계에서 2점의 작품으로 쪼갰다. 후면인 무대에는 한창 춤을 추는 무용수와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악사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맥주를 나르는 여종업원의 시선과 술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념에 잠긴 남자의 시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실내 조명(室內照明)을 받아 붉은 색으로 변한 얼굴들과 홀을 메운 손님들이 지껄이는 소리, 음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듯한 흥겨운 분위기와 음악적인 효과가 엿보인다. 마네와 그의 친구들도 이 술집에서 자주 만났고, 또한 화상(畵想)을 얻었다 한다.
가슴을 내놓은 블론드 아가씨
마네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서, 그가 곧잘 쓰는 크림 빛 아닌 볼그스레한 피부의 아가씨는 한결 고혹적이다. 대담한 필촉(筆?)으로 사뭇 조형적으로 포착한 이 그림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가볍게 표상하면서도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터치를 도처에 가미시키고 있다. 살결 빛깔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 여인은 마치 진주처럼 빛나 있고, 그 광휘는 담록(淡綠)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한결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빛 속에 녹아 내린 핑크와 백색의 육체는 귀스타브 제프 로아의 말을 빌린다면,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육체의 아름다운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과 과실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모델 이름은 마그리트이다.
스케이팅 링크에서
마네가 자주 다닌 스케이팅 링크에서 잡은 현대 생활의 에피소드. 꽃다발을 든 전면의 여인은 작품 <나나>의 모델 앙이에트 오제르이고, 우측(右側)의 여인은 그녀와 자매간인 빅토리느인데, 이 자매는 밤의 환락가에서 남성들의 인기를 양분했던 고급 창부(?)였다. 이 작품의 특질은, 앙리에트의 정력적이고 요염한 표정 외에 백색과 흑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그녀의 옷과 모자, 안색(顔色)에서 찾아 낸 대담한 하모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반인상파적인 흑색의 매력은 그가 카페 게르보아의 젊은 화가들과 끝내 동조하지 않은 이유도 된다. 마네는 파리의 환락가를 연작으로 그렸다. 검은 복장을 기조로 한 군중의 무명성(無名性) 속에 색채와 개성을 지닌 빛나는 존재로서의 여성, 문자 그대로 대중의 '히어로'로서의 현대 여성을 그렸다는데 파리의 화가 '마네의 영광이 있다.
조지 무어의 초상
조지 무어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 미술 평론가이며, 술을 좋아하는 천재(?)이자 방랑자이다. 또한 랭보, 뒤랑티 등 상징파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낸 '몽마르트르의 영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마네가 자주 다니는 카페의 단골이었으며, 마네와도 자주 어울렸다. 마네는 유채와 파스텔로 만든 무어의 초상화 2점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그 중의 하나다. 이 시기에 마네는 극히 적은 2,3점의 스케치풍의 인물화를 경쾌한 필촉으로 그렸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에 속하는 것이며, 폭음가인 무어의 취생 몽사하는 몽롱한 모습을 리얼하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지쳐 빠진 중로(中老)의 묵객(墨客), 깡마른 몸집, 전혀 패기라곤 찾을 곳 없는 파리의 방랑객을 연상시키는 멋진 분위기다.
보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스타킹을 신는 여인
마네나 드가가 끝내 인상파에 동조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에 여체(女?)가 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육감적인 유방과 풍만한 육체는 한마디로 관능의 화신이다. 마네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선(線), 그 선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화가이다. 1878년 파리는 만국 박람회로 떠들썩했고, 마네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 파티를 열었는데 이들은 자작시에 자작곡을 붙여 소리 높이 합창했다. 이 무렵 마네는 소품을 그리는 기분으로 이 그림을 제작했는데, 화면 전체가 막 피어나는 꽃처럼 청색과 자색으로 꾸며졌고, 이 감미로운 분위기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여체가 스커트를 걷어올린 채 스타킹의 끈을 매고 있다. 우아한 곡선, 돋보이는 유방 등이 기조색(基調色)의 보호를 받아 비속하지 않은 관능미를 표출시킨 이색적인 작품이다.
생 라자르驛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 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철도에서>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배에서
<아르쟝뚜유>와 함께 1874년에 옥외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르쟝뚜유>처럼 섬세한 분할, 색채와 빛의 반짝 임보다는 외기(外氣)의 감각을 색조로써 표현하려고 한 그림이다. 청, 백색을 주조로 황, 흑색에 악센트를 준 시원스러움이 툭 트인 잔잔한 수면과 해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미있는 구도인데, 배의 후미(後尾)만을 남긴 대담한 절단이나, 중앙에 흰옷의 남자를 앉히고 좌우에는 저쪽을 응시하는 여인과 돛대의 한 토막만으로 균형을 잡은 것 등이 인상적이다. 단 두 사람만의 세계, 그것도 방해꾼이 없는 끝없는 바다 위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마네는 헤아릴 수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회화적 차원에서 만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얀 보우를 맨 이자벨
마네는 1870년대 말에 이자벨 르모니에의 초상화를 6점 그렸는데 이 그림을 포함한 5점은 암스테르담가(街)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했다. 이자벨 양은 대보석상의 딸이며, 출판업을 하는 미술품 수장가 샤르팡티에의 의매(義妹)로, 마네는 이 모델이 마음에 들었던지 1점의 좌상을 뺀 5점의 초상화는 모두 무릎 근처까지 그린 4분의 3입상이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 <하얀 보우를 맨 이자벨>로 젊은 아가씨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쫓은 듯한 얼굴의 표현에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의복과 손등은 경쾌하고 빠른 필촉으로 단숨에 그려 치운 흔적이 보인다. 동양적인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자벨의 얼굴 윤곽과 눈, 코, 입은 물론 안면(顔面)의 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쓴 수작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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